인생 말년에 동네 사람들 초상 사진 찍느라 걱정이 많다.

설득에 설득을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촬영하지만, 대개 반기지 않는데 있다.

인물의 정신이나 개성보다 오로지 멋지게 나오는 걸 원한다.

 

“개 같은 개성 보다 멋지게 찍어달라~“란 말도 여러 번 들었다.

하기야! 어느 누가 마지막 남을 사진, 멋지게 남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 외출 때처럼 모자를 쓰거나 수염을 깎아  찍기도 하고,

그 사람 개성과 정신이 드러난 내 꼴리는 사진도 찍는다.

 

며칠 전에는 충무로에 가서 초상사진을 몇 장 뽑았다.

전시할 때까지 빚쟁이처럼 쫓기기도 싫지만, 자기 사진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다.

그러나, 다들 받아 보는 표정이 신통찮았다.

말은 안 하지만, ”사진을 이 따위로 찍냐?“는 것 같았다.

내키지 않으면 다시 찍어 주겠다고 말은 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다음 날은 정동지가 교보문고에 책 살 일이 있어 기사로 따라나섰는데,

마침 장흥의 마동욱씨가 인사동에 있으면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책 보따리를 챙겨 약속한 귀천으로 달려 갔더니, 아는 분 결혼식에 왔단.

 

동네 구장 같은 마동욱씨의 넉넉한 모습은 여전했다.

모처럼 시원텁텁한 '귀천'의 모과차 한 잔 맛보며, 마동욱씨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드론으로 인근 지역의 땅을 찍고 있다는데, 한편으론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살고 있는 장흥은 물론 강진, 영암, 고흥 등 인근 지역 곳곳을 촬영하여 사진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 사진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더구나 촬영하면 찍힌 장소의 지번까지 나온다니, 사진으로 찍은 지적도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동자동에서 초상 사진 찍으며 열 받는 일들을 하소연 했더니,

자기도 마을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을 많이 찍어 봐, 그 사정을 훤히 안단다.

요즘은 주름까지 안 나오게 깨끗하게 수정해 줘야 좋아하지, 그냥 주어서는 안 건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끔한 사진이 좋다지만, 사람이 사람 같지 않고 인형같은 사진을 만든다면,

사진에 쪽팔리는 일이 아니던가?

 

그것은 인간 개인의 자존감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짓이다.

사진찍기에 앞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자존감을 심어주는 게 더 시급할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 대접 받으려면, 초상 사진부터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귀천에서 일어 나려니, 기다렸다는 듯이 차 빼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은 걷기가 힘들어 휠체어처럼 차를 끌고 나오지만, 매번 골목에 세워 민폐를 끼친다.

 

인사동 거리를 달려가다, 복잡한 거리에서 반가운 분도 만났다.

인사동을 자기머리처럼 반질반질하게 만들겠다는 김발렌티노 였다.

 

그가 인사동 청소부로 등장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이젠 인사동의 또 하나 명물 아닌 명사가 된 것이다.

 

정동지와 마동욱씨가 골목안 풍경전시가 열리는 인덱스갤러리에 올라간 틈에

차를 주차장에 집어 집어넣고, 모처럼 인사동 길을 걸어 보았다.

 

주말의 인사동 거리를 남인사마당에서 안국역 빙향으로 걸었는데,

남인사마당에서 인사동 사거리까지는 아직 문 닫은 업소가 많았다.

 

나들이객도 남인사마당 쪽보다 북인사마당 쪽이 훨씬 더 붐볐는데,

인사동 사거리를 기점으로 나들이객의 쏠림 현상이 심했다.

 

옷가게와 잡화상이 진을 친 거리에는 봄나들이 객들이 부산하게 오갔는데,

봄은 왔으나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차림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 역시 봄바람은 불어도 마음과 몸은 돌덩이처럼 무겁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듯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사진, / 조문호

 

 

장흥의 마동욱씨는 고향이 좋아 장흥만 찍어 온 사진가다.

젊은 시절 교도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사진에 미쳐 고난의 길에 빠져들었는데,

미쳐도 고향과 함께 미쳐 천만다행이었다.

 

고향을 찍은 사진가로는 장흥에서 제일 먼저 사진관을 차린 강수의 선생도 계셨다.

10여 년 전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의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사진기억들을 모아 ‘사진으로 보는 장흥 100년사’를 펴내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반평생동안 고향과 사진에 미쳐 사는 이가 이번에 마을창고를 사진창고로 만들려는 마동욱씨다.

장흥은 지역 사진가들의 고향사랑이 남다른 지역이었다.

 

다들 고향을 잃은 실향민처럼 살기에, 그의 고향사랑이 더 가슴 시린 것이다.

고향이란 태어난 땅에 대한 애착에 앞서 그 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일 것이다.

그가 보여 준 장흥사진에는 장소성을 드러낸 사진이 주종을 이루지만 결국은 함께 살아 온 이웃에 있었다.

 

그동안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 ‘그리운 추억의 고향마을’, ‘탐진강의 속살’, ‘하늘에서 본 장흥’,

‘고향의 사계’, ‘하늘에서 본 보성’, ‘아! 물에 잠긴 내고향’, ‘월평-월평마을120주년’,

‘장흥파 각 문중재각’등의 고향에 대한 사진집만 수없이 펴냈다.

다들 팔리지 않는 사진집을 저렇게 만들어 어쩔 것인가 걱정했으나 어렵사리 헤쳐 나갔다.

힘들어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해 온 이웃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돈은 못 벌었지만, 계속 일할 수 있는 발판은 깔아놓은 셈이다.

 

오래 전 인사동에서 열린 그의 전시 개막식에 몰린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은 물론 장흥사람들이 먼 전시장까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마치 장흥사람들 총 동창회하는 것 같았다.

그의 사람에 대한 진정성과 정치성을 동시에 알아 챈 것이다.

 

저렇게 하려면 그동안 고향사람들에게 얼마나 베풀었겠는가?

그의 사람 사랑은 고향사람에 거치지 않고 사진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인들 전시만 열리면 먼 길을 마다하고 찾아 와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오히려 축하 받는 당사자가 송구스럽다니까... 그의 타고 난 천성인 것 같았다.

이럴 때 생각나는 유행가 구절이 있다. “정이란 무엇인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란 사진집을 보내주면서다.

두꺼운 판형의 사진집이었는데, 처음엔 아름다운 풍경이나 찾아다니며 찍는 작가협회에 속한

전형적인 아마추어로 여겨 제대로 보지도 않고 처박아 두었다.

한 마디로 흑사리 쭉지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사랑에 대한 집착을 알고서야 달리 보였다.

어떤 이는 그의 사진이 비슷비슷한 사진이  많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건 강남 스타일이 아니라 마동욱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진보다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에 있다.

 

나 역시 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지만, 살다보면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로 등 돌릴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초지일관 아우르며 포용하기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 없이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다.

 

그는 장흥지역의 300여 마을을 드론으로 촬영하여 '하늘에서 본 장흥'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영암지역 600여곳을 찍었고 최근에는 강진 지역으로 확대해 사진 작업을 한다는데, 펴낸 사진집을 펼쳐보니 마치 지적도를 보는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 전역을 떠돌며 지도 작성에 평생을 바친 고산자 김정호선생의 대동여지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겠는가?

 

이젠 집 부근의 문 닫은 새마을창고를 빌려 사진창고가 아닌 보물창고 만들 야심찬 작전을 짜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정남진 토요시장 가는 길에 마동욱씨 만나러 평장마을로 찾아갔다.

작년 11월, 평장마을 ‘새마을’ 창고에서 ‘우리 마을로 간다’는 장흥마을문화제를 열었는데,

아직까지 철수하지 않았다며 한 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다.

 

정남진 토요시장에서 정동지와 열무비빔국수로 요기를 하고 전시가 열리는 평장마을 창고를 찾아갔더니

마동욱씨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넓은 창고공간 벽에 크고 작은 사진자료들이 빼곡이 전시되어 있었다.

 

금안, 대반, 덕제, 송산, 순지, 평장 등 여섯 개 마을을 기록한 전시회에는

마동욱씨를 비롯하여 문충선, 서선미, 류은숙씨 등 네 명의 지역 사진가가 참여하고 있었다.

전시된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긴 세월 마을을 지키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애환이 배어 있었다.

점차 사라져가는 마을의 역사를 문 닫은 새마을창고에서 보여 준 의미 있는 전시였으나,

힘들게 살아온 지역민들의 이야기만 텅 빈 창고에 메아리처럼 번졌다.

 

이 전시를 계기로 새마을창고를 전시장으로 활용할 앞으로의 계획도 말했다.

지자체 도움을 얻어 지역 자료관을 겸한 전시관으로 만들 것이란다.

천장 높은 창고의 특성을 활용한 구조설계도 좋아야 겠지만, 앞으로의 운영안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얼마 남지 않은 주민 이외의 외지인들을 끌어드리려면 전시나 행사 기획력이 탁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원한 냉커피나 한 잔하자며 집으로 안내했는데, 가보니 새로 지은 집이었다.

오래 전 가본 집이 아니라 대출받아 새로 지었다고 했다.

아담하고 편리해 보여 얼마나 들었냐고 물었더니, 1억이나 들었다는 답에 깜짝 놀랐다.

요즘들어 건축비에 부쩍 관심이 많은 것은 정선 집지을 생각 때문이다. 다들 자재비보다 인건비가 더 무섭다며 집짓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광주교도소’사진집을 출판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촬영을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는데, 그는 교도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어

어떤 사진가보다 교도소 구조물의 의미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일었다.

 

이사한 것도 모르고 빈손으로 찾아 갔는데, 마동욱씨 부인은 냉장고에 숨겨둔 짱아치를 꺼내 주었다.

저렇게 안팎에서 챙기니 사람들이 꼬이지 않겠는가?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하니 아내가 식당에 일하러 나간단다.

한 곳에 미쳐 사는 남편을 둔, 새까맣게 타 버린 아내의 심정을 난들 어찌 모르겠는가?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며 마당에 불러 세웠더니,

마동욱씨 표정에 아내를 향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묻어났다.

고향사진은 마동욱씨가 찍었지만, 아내 같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 가능했던 합작인 셈이다

부디 힘을 합쳐 사진창고가 아닌 장흥의 보물창고를 만들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웃의 삶과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집들이 몇 달 동안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인간관계를 이어가며 마을의 역사를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숨은 노력의 결과다.

 

대표적인 사진집으로 수몰을 앞두고 찍은 마동욱씨의 ‘아! 물에 잠긴 내 고향’이다.

20여년 전 장흥다목적댐 건설로 수몰된 장흥군 유치면 일대

수몰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집이다

 

정들었던 집이 포클레인으로 부서지는 장면과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주민들의 

눈물이 담긴 장면 장면들이 2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세상에 나온 것이다.

 

수몰지역 주민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얼마나 그립고 반가웠겠나?

그건 누가 시켜 한 것이 아니라 한 사진가의 고향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진을 기록한 마동욱씨는 수몰지역 외에도 탐진강을 비롯하여 장흥, 영암, 강진, 보성 등지를

기록하여 여러 권의 사진집을 펴낸바있는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이번에 출판된 마동욱씨의 ‘아! 물에 잠긴 내 고향’ 사진집 (가격12,000원)은

눈빛출판사의 '눈빛사진가선 065'로 발행되었다.

출판기념전이 장흥읍 평장리 새마을 창고에서 오는 30일까지 열리고 있다.

 

두 번째는 한센인 정착촌인 강원도 대명원 만종마을 주민들이 직접 찍은

‘만종' 사진집도 나왔다.

 

사진가 노은향씨를 주축으로 결성된 '좋은 사진 모임 포트인' 회원들의 지도와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김동한, 김연태, 김정희, 신순재, 전석권, 제갈귀자, 이종애, 윤순심, 허정자씨 등

아홉 명의 주민이 직접 기록한 의미있는 사진집이다.

 

절망에서 희망의 삶으로 바꾸게 된 만종마을 주민 뒤에는

노은향씨를 비롯한 사진가들의 따뜻하고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외부와 단절되어 소외된 삶을 살아온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가 그리 쉬웠겠는가?

 

지난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인사동 ‘마루아트’에서

‘만종, 60년만의 외출’이란 제목의 전람회도 개최한 바 있다.

 

사진 기록에 참여한 주민들이 인사동에서 열린 전시 개막식에 나오는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동안의 노력과 보람에 따른 고마움에 눈물짓는 정겨움도 볼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서울 이화마을을 기록한 사진가들이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 사진집을 펴냈다.

 

재개발에 의해 서울의 골목이 하나 둘 사라지고

오래된 집이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진가들의 노력에 의해서다.

 김수길씨가 주축이 되어 이대형, 이정은, 이용민, 최재현씨가 나선 것이다.

 

서울시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진행한 ‘낙산공공미술 프로젝트’에

김수길씨를 비롯한 사진가들이 합류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십년 간의 기록이 집대성되었다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쉼 없이 기록해 온 사진이라 그 가치가 더 큰 것이다.

 

그동안 해마다 동내에서 빨래줄 전시를 열어 주민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만들어 왔다.

동내 관광화에 따른 주민들과의 갈등을 풀어가며 이룬 성과라 그 의미도 남다르다.

 

네 번째 사진집은 사진가 양시영씨 지도로 난곡 주민들이 직접 기록한 ‘난곡난향‘ 별별 사진책이다.

 

2018년부터 양시영씨를 비롯하여 김미숙, 김숙희, 박우인, 서민경, 오순환, 유순덕, 유현만,

이양자, 전영석씨등 열 명의 주민이 참여하여 난곡 난향마을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난곡난향 도시재생사업에 힘을 얻기는 했지만,

사진가 양시영의 마을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을 정경과 마을사람의 삶의 무늬를 담아낸 난곡난향 사진집에는

주민들의  마을에 대한 사랑과 사진기록에 대한 자부심도 담겨있었다.

지속적으로 이어 간다면 먼 훗날 난곡마을의 소중한 사료집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일년 넘게 지속된 ‘코로나19’로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세태에 나온

마을 공동체 사진집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번에 출간된 마을 사진집 외에도 '구룡마을', '동자동' 등 소외지역을 기록하는 사진가도 있다.

이웃 사랑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노력과 성과에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글 / 조문호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 사진집에서

‘만종, 60년만의 외출’ 사진집에서




지난 월요일은 늦잠을 잤다.
간밤에 정선에서 오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무의도 촌장 정중근씨로 부터 연락을 받아,
요양원에서 모친 간호하던 정영신씨와 

약속장소인 남대문 ‘벤로갤러리’로 갔다.






평소 버스는 잘 타지 않는데, 그 날 따라 버스를 탔다.
갑자기 소공동에서  “끼이익~‘소리를 내며 버스가 급정거했다.
한 아낙이 급히 버스 앞을 지나치다 생긴 일이었다.
승객들이 놀라기는 했으나, 별탈은 없었다.
한사람이 앞으로 쏠렸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기사가 버스에서 내려 아낙에게 전화번호 달라며 닥달이다.
승객 중에 다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아낙은 기어이 못 주겠다고 버텼다.
‘달라’. ‘못 준다’며 한 참을 실랑이 해대니,
뒤에서 비키라는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기사는 멀찍이 차를 옮겨놓고 다시 달려갔다.
차에 탄 승객들은 한사람 두 사람 내리기 시작했고,
버스에는 정영신씨를 비롯한 네 사람만 남았다.
30분 가까이 지체했으니, 억울해서 그냥 내릴 수가 없었다.






잠시 차에 핸드폰 가지러 온 기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니 눈깔에 승객은 보이지도 않느냐?고 화를 냈다.
그렇게 난리를 쳐도 다시 아낙 쪽으로 달려간다.
기어이 받겠다는 기사나, 못주겠다는 아낙이나 똑 같았다.






더 이상 약속한 분들이 신경쓰여 버스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자기밖에 모를까?
교통불편 신고서까지 챙겨왔으나 찢어 버렸다.
그런 것이 사람들을 더 급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다.






화를 삭이지도 못한채 ‘벤로갤러리’에 갔더니,
‘하늘에서 본 영암’ 전시를 하는 사진가 마동욱씨와

무의도 정중근 촌장, ‘예당국악원’ 조수빈 원장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만 나누고, 식사 대접하겠다는 정중근씨 따라

인근의 '진주냉면'에서 오붓한 오찬의 시간을 가졌다.





전시장으로 돌아 온 조수빈씨는 사진전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정선아리랑’을 그렇게 구성지게 부를 수가 없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애잔했다.
마동욱씨는 만들어 놓은 사진 한 점을 답례로 선물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맛 아니던가.

버스에서 상한 마음, 눈 녹듯 녹아내렸다.


사진,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사진집표지]


사진가 마동욱씨의 하늘에서 본 영암사진전이 지난 21일 오후 5, 남대문 벤로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그는 1996년부터 고향 장흥을 꾸준히 기록해온 향토사진가다.

고향에 대한 지극한 애착은 탐진강의 속살’ ‘고향의 사계’, ‘하늘에서 본 장흥등 여러 권의 사진집을 출판하며 장흥을 기록해 왔다.

그러나 이젠 고향인 장흥을 넘어 영암의 전 마을을 기록하여 전시와 사진집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강진군 작업도 끝낸 상태인데다 계속 다른 곳으로 작업 반경을 확대해 가고 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만이 아니라 드론을 띄워 곳곳의 도면 같은 부감사진을 찍어 신판 대동여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발품 팔아 전국을 누벼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화가 김 억씨의 목판화 작품을 비견할 수 있으나,

드론으로 기록한 마동욱씨의 사진은 정확도에서 이에 비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일관된 대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념이 다큐멘터리사진의 소중한 덕목이 아니던가?

그는 곁눈질 하지 않는 사람이며, 예술사진 한다며 폼 잡지도 않는다.

잘 살지도 못하는 형편에 숱한 돈을 작업에 쏟아 부으며 전전긍긍하는데, 사실 이런 공익적인 기록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 뿐 아니다. 지인들의 전시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축하해 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서울 사는 나도 그처럼 찾아다니지 못하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 탈인 것이다.

잔재주 좀 부린다고 온갖 똥 폼 다 잡으며, 인간성이라고는 전당포에 맡긴 덜 떨어진 사진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술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원로 예술인의 말에 무릎을 칠 그런 사진가다.


 

그동안 얼마나 남을 도와주었으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

어느 사진가의 전시회 뒤풀이에서 한 후배가 모자를 벗어 술값을 거두었다고 한다.

막상 거두고보니 실제 술값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액수였단다.

그렇다면 거둔 돈을 전시 작가에게 전해주어 계산하게 해야 하는데, 거둔 돈을 마동욱씨에게 주어 나머지를 계산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좋으니, 그를 무슨 호구로 보는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새삼 꺼내느냐 하면 그렇게 도움 받았던 많은 사진가들이 정작 그의 전시 개막식에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판에 싸가지 없는 사진가들이 너무 많다.

인사 받으려고 전시장에서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전시리뷰 만들어 신문사에 투고한 것은 아니지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행여 잘못이라도 지적하면 두고두고 씹어 돌린다.

그 욕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전달되는데, 그런 인간을 위해 일한 게 후회막급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신문사에서 월급 받는 정식기자거나 원고료 받기 위해 일 한다면 인사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가난한 신문사를 돕는 뜻도 있지만, 오직 전시 작가에 대한 배려였다.

그것도 괜찮은 전시라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안면 때문에 전시 가치도 없는 글을 쓸 때는 얼마나 머리 아픈지 모른다.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파리 뭐 만큼도 없는 사진인들이 도처에 늘려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서 활동하는 양승우씨의 초대전이 인디프레스에서 열린 날이다.

양승우 전시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보조 건전지가 없어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전시에 사진 찍어주고 전시리뷰까지 써준 후배사진가가 옆에 있어 작가 프로필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사진 보낼 이메일을 건네주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소식이었다.

사진을 전해주기 싫었다면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다른 분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는데, 정말 난감했다.

대관절 무슨 이유일까? 감히 예술사진가에게 신문에 게재할 프로필 사진이나 부탁해서 일까

아니면 원고료가 없어서일까? 그렇다면 입은 두었다가 어디에 쓸까?


 

이런 저런 일로 사진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많이 해 이젠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사진전엔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랬더니 나보다 더 바쁜 정영신씨가 그 일을 대신해 주고 있다.

정영신씨도 마동욱씨 처럼 사람이 좋으니, 아는 분들의 전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마음의 상처라도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판의 문제를 거론하다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마동욱씨가 전시하는 하늘에서 본 영암으로 돌아간다.

이번에 펴낸 사진집을 살펴보면 영암읍 뿐 아니라 삼호읍, 덕진면, 금정면 등 11개 읍면 소재지 마을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에는 시골 논두렁, 밭두렁에서 집으로 연결되는 아기자기한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주민들이나 그곳이 고향인 분들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소중한 사진으로 얼마나 많은 추억이 담긴 장면 장면이겠는가?

수십 년을 살았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고향산천을 훨훨 나는 새의 눈으로 구석 구석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하늘에서 본 영암600여 개의 영암 마을 모두를 드론으로 촬영한 컬러사진 600여 장을 수록하고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국립공원 월출산과 영산강하굿둑을 중심으로 펼쳐진 영암군의 전형적인 취락구조와

자연생태를 보여주는 상공지리지인 것이다.

     


 7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영암군의 4계를 담은 컬러 사진 50여 점이

영암 특산품이 담기는 여러 가지 농산물 박스위에도 펼쳐져, 고향에 대한 정취를 더욱 더 일깨워 주고 있.


 

마동욱이 기록한 고향마을 사진은 이 땅의 모습과 생태가 어떠한 변모 과정을 거쳐 왔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암시해 준다.

고향이 그리운 분은 고향 앨범처럼 펼쳐놓은 마동욱씨의 영암 사진전을 꼭 한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전 개막식에는 작가 마동욱씨의 내빈 소개에 이어 전남도의원 우승희씨와 무영스님,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가 엄상빈씨가 차례대로 축사를 하였으며,

사진가로는 전민조, 김보섭, 김문호, 정영신, 남 준, 박찬호, 곽명우씨가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1, 지방에 촬영간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장흥인데, 촬영에 문제가 생겼어!

짐이 많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좀 와 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체류할 것이라며 짐을 잔뜩 싸가지고 갔는데, 뭔 일인지 모르겠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감히 지존이신 동지의 말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대충 마무리하고 나서니, 오후5시가 되어버렸다.

내일 전시장 들릴 곳이 있어 밤늦게라도 돌아 올 작정으로 출발했는데,

서울을 빠져나가려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하는 변속으로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마동욱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쯤 오셨냐?“기에 도착하면 한 밤중일 것 같다니까,

우리 집 옆 대나무 숲 민박집을 잡아놓을 테니, 천천히 오라는 것이다.

힘들어도 숙박비 줄이려 당일치기를 생각했으나,

난데없는 지원군 덕에 하루 밤을 장흥에서 묵게 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 밥도 먹지 않고 밟았는데, 도착하니 밤11시가 가까웠다.

네비게이션이 없어 전화로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민박집이 아니라 마동욱씨 집이었다.

정영신, 마동욱씨와 함께 그의 아내 김영숙씨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늦은 시간까지 자지 못하게 해 송구스럽기 그지없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느냐?


 

김영숙씨는 저녁 못 먹은 걸 눈치 채고 저녁상을 차려 주었는데,

얼굴에 철판 깔아 눈 지긋이 감고 허급지급 먹어 치웠다.

바지락 국에다 갑오징어, 열무김치 등 반찬 수는 적으나, 그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장기도 한 몫 했겠지만, 여지 것 그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숙씨는 제 작년 쯤 인사동의 마동욱씨 전시 오프닝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지만,

음식 솜씨가 이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

음식 솜씨도 보통이 아니지만, 두 내외가 찰떡궁합이었다.

여지 것 아침상 한 번 거른 적 없이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챙긴다는데,

마동욱씨는 마누라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난 지방촬영가면 아는 분들에게 좀처럼 연락하지 않는다.

빠듯한 촬영 스케줄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서다.

지난 번 강진촬영 때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더니,

페북을 본 마동욱씨가 어떻게 지척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있냐며 나무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영신씨가 연락한 것 같았다.


 

마음 마씨라 본래 마음이 좋은지 모르지만, 마동욱씨는 사람 좋기로 유명하다.

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변을 잘 챙긴다.

벌어 놓은 돈도 없으면서, 욕심 없이 사는 그의 모습에 존경감이 일었다.

덕분에 그가 얻어놓은 대나무 숲 속의 민박집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가야 한다며, 내일 못 본다고 헤어졌으나, 그만 늦잠이 들어 버렸다.

오전 아홉시 무렵, 민박집을 지나치던 마동욱씨가 차를 보고 다시 연락해 온 것이다.

본인은 이미 식사를 했었고, 우리는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했으나,

기어이 밥 먹으러 가자는 성화에 따라나서야 했다.


 

친구가 운영하는 듯한 우리식당이란 밥집으로 데려갔는데

이곳 역시 진수성찬으로 차린 반찬이 모두 맛있었다.

전라도에서도 음식 잘하는 장흥 여인네들 음식솜씨를 제대로 맛 본 것이다.


 

마동욱씨와 헤어져 서울로 차를 몰았는데,

정영신씨는 이왕 온 김에 하루 더 지체하여 시골장터 좀 돌아보자고 했으나,

박은태씨 전시 보려면, 오후 다섯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며 우겼다.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장흥 용산장과 강진 성전장만 들리기로 했다.


 

먼저 장흥에서 지척에 있는 용산장 부터 들렸다.

용산장 역시 사라져 가는 장터의 한숨이나 파는

장꾼 몇 사람이 나와 장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용산장 입구에 있는 장터식당부터 들렸다.


 

이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정영신씨와 동갑내기인데,

작년에 정영신씨와 친구하기로 약속하고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은 사이다.

음식 맛있다는 칭찬에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주는 고마움에 감읍해 친해졌는데,

마치, 친정 엄마처럼 뭘 먹이지 못해 안달 하더니, 또 몇 가지의 김치를 싸 주었다.

다양한 김치를 이렇게 맛깔나게 담는 사람도 보지 못했지만,

작년에는 장터 사진집으로 답했으나, 이번엔 뭣으로 답해야할지 고민되었다.


 

이어 강진 성전장으로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찾아 간 곳이

오늘 서울 가서 봐야 할 전시의 주인공인 화가 박은태씨의 고향이었다.

그 전에는 비스듬히 버틴 장옥 한 채가 장터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때의 장옥은 사라져버리고, 어울리지 않는 천막 식 장옥에

동네 사람 몇몇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헐벗은 옛집들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오래된 장옥이라도 보존하고 있었다면, 향수나 추억이라도 팔 텐데,

이젠 살 사람도 팔 물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 여기만의 아쉬움이겠는가? 면소재지에 위치한 대개 오일장의 현실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지루한 운전이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사실상, 얼마 전 강진 갈 때도 정영신씨가 목적을 말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의 여정으로 혼자 떠난 이번 촬영 역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더구나 촬영에 차질이 생겨 사흘 만에 돌아와야 했으니,

이젠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면 말하려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평생을 장돌뱅이로 살아 온 현역 장꾼 몇 명을 밀착 취재하여

그 사람의 생활 전모를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번 영랑시인 기념관에 도슨트로 일하는 이재광씨를 만난 것도

취재 대상에 걸 맞는 장꾼을 추천 받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추천한 여인이 흔쾌히 허락하여 촬영에 들어갔는데,

하루 찍고, 이틀 날 새벽에 못하겠다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깊이 파헤치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동네 이장이 큰일 난다며 못하게 말렸다는 것이다.


 

닷 세 동안 그 여인이 사는 콘테이너 박스에서 기거 할 약속에,

그 여인도 좋아했다는데, 갑자기 이변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꿀 때까지 일단 철수해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있으나, 그 장꾼에게 이야기 거리가 너무 많아

꼭 취재하고 말 것이라는 각오도 덧 붙였다.


    

나 몰래 추진하니 이런 일이 생긴다며 어깃장을 놓았지만,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첫날엔 이재광씨도 만났다고 한다.

그 분의 차로 장흥 펜션으로 안내하여 숲 해설가 김동호씨도 소개해 주었고,

해남의 설화다원까지 찾아가 마승미씨를 비롯한 소리꾼들과 어울려

판소리까지 들으며 찡하게 놀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재광씨는 지난번에도 이곳 저 곳 안내해 주며 사람도 소개해 주었는데,

이번에도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장흥은 음식도 맛있지만, 인심까지 좋으니,

사돈 볼 사람은 기어이 장흥사람 찾으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야겠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지난 5일 정오 무렵, 장흥의 사진가 마동욱씨를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서울역 11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추워서 지하철까지 내려갔다.

개찰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처음 보는 노숙인 한 사람이 다가왔다.
불룩한 가슴팍을 뒤집더니, 컵라면을 꺼내어 나더러 먹으라고 주었다.
내가 그렇게 배고파 보였을까? 없는 놈이 없는 놈 사정 안다는 말이 딱 맞다.

후배 만나 맛있는 밥 먹으러 갈 거라며 사양했으나, 코끝이 찡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하나 가진 밥그릇을 내놓다니..

이래서 늪에 빠지듯, 빈민들의 삶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희망도 욕심도 없는 그들만이 따뜻한 인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진 자들이나 권력자보다 배운 것은 없으나, 훨씬 인간적이었다.

갑자기 마동욱씨가 등장하여 반갑다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서울서 열리는 사진전 때문에 올라왔다지만,
속으로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한 때 저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한 시절이 있었는데,
사돈 남 말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카메라점 들릴 곳이 있다며, 남대문가서 밥 먹자고 했다.
이 친구! 정말 모르는 데가 없었다.
‘억불카메라’점에 들리니 박지성사장이 오랜 애인 만난 듯 반긴다.

하기야! 그의 인간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덕분에, 박지성씨가 점심식사도 대접했다.
카메라 점 윗 층에다 사진전문 갤러리를 만들 것이란 말도 들었다.

광화문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날씨가 추워 그런지 광장은 썰렁했다.
입구 찬 바닥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마네킹처럼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박근혜를 규탄하는 말없는 시위였으나, 절규에 가까웠다.

한쪽은 예술인텐트촌에서 생활하는 양혜경씨가 현수막을 깁고 있었다.
밤새 못된 놈의 면도날에 난도질을 당한 것 같았다.
어느 놈의 짓인지,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사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고생스럽게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동욱씨는 ‘갤러리 브레송’에 들렸다 ‘스페이스22’로 간다기에 헤어졌다.
다들 날씨가 추워 그런지 텐트 안에서 꼼짝도 않았다.

박근혜야! 저렇게 웅크린 많은 예술가들이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떨고 있는가?
다, 너 때문이다. 이제 그만해라.


사진,글 / 조문호




















지난12일 아침, 컴퓨터에 달라붙어 이 것 저것 검색하는데, 마동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지하철 서울역에 도착했다기에, 11번 출구로 나오라 했다.

아마 시위에 참여하러 온 김에, 들린 것 같았다.

사진가 마동욱씨는 엄청 바쁘게 사는 분인데, 그가 방에 앉으니 쪽방이 가득했다.
반가운 만남이지만, 대접할 건 커피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난 번 전시로 2천 만원이나 빚졌다고 했다.
열심히 벌면 된다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걱정스러웠다.

어제는 '교육방송'에서 고향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를 방송했다는데,

몇 일 동안 고생시킨 출연료가, 달랑 20만원이란다.


마동욱씨는 참  낙천적인 삶을 산다. 살기가 힘들어도 어렵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잘 될 거라며 자기 걱정은 않고, 남 걱정부터 하는 것이다.









밥 먹긴 이른 시간이라, 동자동 공원으로 나갔다.
마침, 토요일이라 빵 얻으러 온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토요일마다 공원에서 빵을 나누어 주지만, 여기선 사진 찍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동자동 사람들보다 외지에 사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일찍이 자기 짐을 바닥에 놓아 대기 순서를 만들어 놓았더라.

강완우, 김진석씨는 빵 받을 생각은 않고, 공원에다 술상을 차려 놓았고...





밥 한 끼 사겠다는 마동욱씨 따라 나섰으나,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단골 집보다 나은 곳을 찾느라 서울역까지 따라 갔는데, 정식 일인분에 13,000원이나 했다.
‘식도락’에선 열 세 번 먹을 수 있는 돈이고, 쪽방 1층 식당에선 세 끼를 먹어도 남는 돈이었다.

덕분에 거룩한 식사는 하였으나, 맘이 편치 않았다.







블랙리스트 예술인 캠핑촌이 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함께 나갔다.
캠핑 촌에서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는데, 모두들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땅값 비싼 서울 요지에 숙소를 만들어 놓은 이인철, 류연복, 양혜경, 이상영, 노순택씨는 피켓을 만들거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고, 최석태, 김영중, 송경동, 박미루씨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한 판 치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 저기 사진 찍느라 마동욱씨를 놓쳤는데, 난 동자동 주민들을 만나기로 한 남영역에 갈 시간이되어 통화만 했다.

이 날은 서울시내가 인산인해라 더 이상 만나지 못했는데, 페이스북에 고향 소식이 올라 온 것 보니, 잘 간 것 같다.








































장흥에 사는 마동욱씨를 알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참 인정이 많은 후배다.
지난 번 정영신씨 사진전 개막식에서 찍은 사진으로 책을 만들어 보내왔다.

제작비용도 만만찮겠지만, 그 공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마음의 짐이 되고있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