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 꿈에 수안스님이 나타나셨다.

'통도사'에 계시는 전각가이자 화가, 시인 등 다재다능하신 분인데, 나에겐 “眞空‘이란 법명을 주신 분이다. 
너무 반가워 큰 절을 넙적 올렸더니,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소식 끊긴지가 십 오년도 더 되었는데, 갑자기 왜 나타나셨을까?
스님께 연락 드리지 못한 건,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내 주둥아리 때문이다.


오래 전, 통도사에서 올라와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 때였다.
스님을 모시는 통 큰 방림보살이 호텔 방을 두 개나 잡아두고,
근사한 전시오프닝을 마련했는데. 주연에서 그만 방정을 떨고 말았다.
“스님! 서울역에 한 번 가보이소. 배고픈 놈들이 천진데, 스님이 이라마 됩니꺼?”
화가 난 스님께서 크게 나무라시어, 그 뒤부터 가지 못했는데, 
한 참후 방림보살과 동강에 레프팅하러 오셨다며 정선 집에 들리셨다.
‘夢菴’이란 현판 글씨를 써 주시며 거금 백만 원이나 놓고 가셨는데,
연이 닿지 않았는지, 그 뒤로도 스님이 계신 축서암에 들리지 못했다. 

가끔 스님의 근황이 궁금하거나 보고 싶기도 했지만, 연락처마저 바뀌어 버렸다.

수소문해 보니 축서암에서 문수암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러던 중에 꿈에 나타나시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한편으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도 되었으나, 나더러 조심하라는 경종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나도 늙었지만, 스님께서도 연로하시어 살아생전 만나 뵙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작정하여 한 번 찾아뵈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난, 주둥이 뿐 아니라 손가락으로도 상대를 씹어 가까이 있는 많은 사람을 잃어 버렸다.
상대에 대한 악의는 없으나, 잘 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 때문이다.
태생은 그렇지 않았으나, 평생을 기득권자에 당하기만 해 온 처지라
나도 모르게 입바른 악바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까운 친구는 물론 예술계, 특히 사진판에서 더 그렇다.
그러니 ‘다된 밥에 코 빠트린다’는 말처럼 지원이나 도움이 확실했던 일도
뒤늦게 따돌리기 일 수였는데, 기득권자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다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모 나는 일에 나서지 않고 살아 그런지,
정치판이나 사진판이나 곳곳이 썩어 문드러졌으니, 어찌 간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정영신씨가 시골장에서 점쟁이를 만나면, 가끔 내 사주를 물어보는데, 

만나는 점쟁이마다 입 때문에 팔자가 세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말년에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된 것같다.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었지만, 상처 준 이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쪽방 촌에 들어 왔다.

빈민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비난 받을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갑 질 하는 자를 나무라며 잘 못을 바로 잡으려했으나, 잘 못 전해진 내용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의한 이야기를 믿고 발발거렸으니, 내 꼴이 어떻겠는가?

그것도 친하게 지낸 믿었던 사람인데 말이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일로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글로 옮길 때는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비가 들쳐 창문도 열지 못하고, 방안 열기 때문에 컴퓨터도 켜지 못한 채,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이틀 동안 한증막에서 곤욕을 치루었으나, 비가 그친 어제 오후에서야 모처럼 공원에 나갔더니,
이준기, 방원길, 변성식씨가 모여 앉아 소주 한 잔 하고 있었다.

술병이 비어 소주 한 병을 더 사오려니 준기씨가 강력하게 말렸다.
이 친구는 어느정도 술이 취하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성식씨와 원길씨 생각은 달랐다.
소주 한 병 사와 세 사람이 나누어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정신 바짝 차려, 주민들이 힘을 모아 권익 찾는데 집중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에~
이렇게 더위에 시달리기는 처음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주룩 주룩 흐른다.
선풍기도 뜨거운 바람만 분다.
컴퓨터 식히는 날개 소리조차 덥다.

겨울 쪽방은 버텼으나, 여름은 못 견디겠다.
방마다 문 열고 벌거벗은 꼴도 가관이다.
다들 곰처럼 잘 버티는데, 난 못 참겠다.






계단을 내려오니 옆방의 전씨가 한마디 한다.
“아직 수양이 덜 된 것 같네요.”
지옥이 이러면 지옥에서도 도망칠 것이라고 답했다.

길거리에 큰 대자로 누워 자는 노숙인이 부럽다.
겨울은 쪽방, 여름은 노숙이라지만, 그게 안 된다.
길거리에 자리 깔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도사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서울역에서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마땅히 갈 곳은 없었지만, 더위부터 식힐 요령이다.
그러나 지하철은 너무 추웠다. 죽 끓듯 하는 이 변덕을 우짤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와 공원에 퍼져버렸다.






동네 술꾼들과 어울렸으나,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올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
정선 만지산으로 튈까? 아니면 경주 가는 정영신씨 따라 붙을까?

에라~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생각하자.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 들어온 지 10년차인 조인형(74)씨는 아직까지 총각이다.
평양에서 난리 통에 내려와, 어린 시절을 마산에서 보냈다.
집도 절도 없이 대전으로 서울 가리봉동으로 떠돌았지만,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온갖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밑바닥 인생을 굴렀는데,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으며 그나마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이제 일흔 넷이나 아직 장가도 못 가고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지낸다.
어쩌면 외로움을 잊으려 부지런하게 사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고물을 주워 모았다,
그래서 조씨가 사는 동자동 쪽방은 고물 창고, 아니 보물 창고다.






그의 이름처럼 인형들이 가지런히 앙증맞음을 잃지 않았고,
상여 집 같은 조화나 온갖 잡동사니의 행색들이 어설프게 고개 내밀고 있다.
짐 때문에 누울 곳이 변변찮아도 물건을 처분하지 못한다.
구리나 동 파이브 등 비싼 고물만 한꺼번에 팔기위해 모을 뿐,
대개 자신의 손길이 묻은 애착어린 집기들이기 때문이다.






이젠 물건들이 오히려 주인을 내몰려고 할 정도다. 
더러 처분하면 좋겠지만, 그게 삶의 유일한 낙인데 어쩌겠는가?
버려진 사물을 주워 닦아 희망을 심어주고, 죽어가는 화초를 살려 생기를 돌게 한다.
마치 노인들이 모여 있는 요양소처럼, 잠시 소멸을 유예시켜 주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비에다, 고물 수집으로 한 달에 20-30여만 원을 더 버니,
이웃보다는 한결 여유로운 삶을 산다.
발발 떨며 안 쓰고, 돈을 숨겨두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현명한 처신이다.
자기 말처럼, 백수는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방에 들일 침대크기를 재기 위해 줄자를 좀 빌려 달랬더니,
아예 가져다 쓰라며 보관하던 줄자를 내 주었다.
얼마나 만졌으면 케이스가 반질반질 그의 콧등을 닮았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제 기능만 할 수 있다면 살아남는 게 미덕이다.
부디 건강 지켜, 보물과 함께하는 백수잔치를 기대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매일 방바닥에 앉아 일하다보니 허리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어제 새벽세시까지 컴퓨터와 놀다 허리가 불편해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점심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일어나려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신경외과를 찾아 나섰으나 후암동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병원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힘들게 걸었으나, 좀 다니니 통증이 사라지고 허리도 펼 수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알아 병원 찾는 것을 포기하고, 새꿈공원 술자리에 어울려 버렸다.





김용태, 이원식, 황규복, 안중균, 강원씨 등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 날은 황규복씨가 돈이 생겼는지, 이원식씨에게 파랑새 한 장을 주기도하고, 술과 담배까지 샀다.

그러나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정치이야기로 술맛 가게 하더니, 어제 있었던 현충일 이야기로 옮겨갔다.






문대통령의 추모사에 감동 먹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군대에서 개 고생했던 이야기까지 구구절절했다.

김용태씨는 차라리 군대에서 고생하다 죽었으면, 이 모양으로 살지 않고 죽어 대접이나 받을 거라는 쓸데없는 소리도 했다.

그리고는 이순신장군 이야기가 나오니 끝이 없었다.

하늘의 별을 보고 날씨를 알아보는 기상관측에서부터 장군이 남긴 명언 등 마치 위인전을 다시 보는 것 같았는데,

안중균씨는 이순신장군 초상이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것에 불만이 많았다. 어떻게 신사임당 보다 못하냐는 것이다.

액수로 위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백 원짜리가 좋지 않으냐는 궤변도 펼쳤으나,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그 무렵, 저녁식사를 약속한 미디어작가 김도이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일어나려는데, 또 다시 허리가 아파 일어날 수 없었다.

! 이 병은 누웠거나 서있으면 괜찮으나 앉았다 일어나면 통증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 쯤 한방병원에서 침이라도 한 대 맞을 작정으로 구부정하게 도이씨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집 앞에 있는 광주식당에서 된장찌게와 돼지고기로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 한 잔 걸쳤다.

한 병만 비우고 방에서 마시자며 일어났는데, 또 다시 허리가 아파 공원을 한 바퀴 돌아야했다.

방에 쪼그려 앉아 컴퓨터와 씨름할게 아니라 부지런히 다니며 사진 찍으라는 경고로 받아 들였지만,

근본적인 대책부터 마련해야 했다.






일단 의자에 앉아 일하는 방 구조로 바꾸어야 하는데, 방이 좁아 책상을 들일 수가 없었다.

도이씨와 궁리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의자높이의 좁은 침대를 만들어 의자와 겸용하고,

큰 책상을 들여 식탁을 겸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앞자리를 차지한 책장을 침대 밑에 넣으면 안성마춤일 것 같았다.

돈 생기면 목공소에 부탁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할 일이 많으나 허리 때문에 일찍 드러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니 머리가 지끈 지끈했다. 차라리 미녀생각이라도 할 걸...
인생이 일장춘몽이라는데, 그 마지막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김정호씨]



, 어릴 때부터 유달리 친구를 좋아했다.

밖에서 친구들의 인기척만 나도, 숙제는 뒷전이었다.

친구를 가리지 않고 사귀니, 울 엄마의 걱정스런 역정도 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도 친구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더 좋았던 것 같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성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를 모우기 위해 음악실을 차렸다.

문 닫은 정미소를 개조하여 3000여장의 LP판을 모아놓고,

퇴근 후에만 문을 여는 무료음악실을 열었는데, 주 고객은 시골학교 선생들이었다.

그러나 주말에는 부산에서 원정 오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던지,

거짓 교통사고를 꾸며 직장에 땡땡이 칠 핑계까지 만들었겠는가?

멀쩡한 팔에 기브스하고, 몇 날을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울 엄마가 제일 경계하는 친구는 김해 살던 정남규였다.

돌아가실 무렵 남규만 멀리 했다면, 니 팔자가 이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말씀도 하셨다.


    

 


혼자서는 일을 벌이지 못하지만,

옆에서 도와주면 물불가리지 않는 성격을 알아 걱정한 것 같았다.

결국 울 엄마의 우려대로 직장에 사표 내던지고,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해 정남규와 부산 에덴공원으로 야반도주한 것이다.

돈보다,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난초의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에덴공원 백원장의 설득을 거절하지 못해 이름 걸었던,

난향음악실로 시작하여 하늘목장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러한 꿈같은 세월도 오래가지 않았다.

뒤늦게 내가 머문 곳을 알아낸 아버지께서 결혼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후두암에 걸려 수술 받고 오셨는데, 내가 속 섞여 병을 얻은 것 같아

마지막 효도한다는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한 여인의 인생을 효도의 제물로 삼았다는 자체가 눈물의 씨앗이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포동으로 진출해 국악주점 한마당

고전음악 학고방이란 술집을 차려두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만난 분이 최민식 선생이었다.

사진에 빠지니, 그 좋아하던 음악이나 술집은 관심 밖이었다.

해방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한 감격시대에서 피난시절을 담은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서울로 야반도주하게 된 것이다.




 

월간사진에 일자리를 얻어 사진 할 때도, 친구 찾아 나서는 일은 계속되었다.

퇴근 시간만 되면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친구도 사겼다.

부산에서 상경한 화가 이존수, 최울가, 박광호를 만났고, 소설 쓰는 배평모, 땡초스님 적음,

노동자 시인 김신용과 김명성, 설치 미술하는 석파, 도자기 꿉는 묵객 신동여, 사진기자 김종구

사진 찍는 김영수, 별을 그리던 강용대, 전활철 등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날밤을 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면 인사동사람들이란 블로그까지 만들어 오래 기억하려 했을까?

 

그러나 뒤늦게 진정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꼽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물론 좋아하는 친구들이야 많지만, 마음을 송두리째 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뒤늦게 머리를 쳤다. “그래! 아니라 질이야, 이 등신아~”




 

평생을 가족보다 친구를 더 좋아했으나,

동자동에 들어 온 후부터 활동반경을 서서히 좁히며, 오래된 친구마저 거리를 두고 있다.

이제 철들었는지, 죽을 때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혼자 쭈그려 앉아 청승맞게 고독을 씹는다.

 

지난 주말 강릉단오제에 다녀 와 친구 아들놈 결혼식 간 것 외에는

이틀 동안 아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메라도 접었다.

동자동에 가지 않고, 발길 가는대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상 대하듯 살폈다.

지치면, 지방 떠나 비어있는 정영신의 집에 쓰러져 자고, 또 다시 돌아다녔다.



 


극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훌쩍거리기도 했고, 시장에서 빠진 이 사이로 떡뽁기를 끼워 낄낄거리기도 했다.

친구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 별짓을 다했으나,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내 마음에 머무는 친구가 없어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단 한사람 있다면 저승으로 떠난 정남규 뿐이었다.

, 권력, 지,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잡놈일 뿐이지만, 조가 너무 잘 맞았다.

음악이면 음악, 술이면 술, 대마초면 대마초, 여자면 여자, 모든 게 내 생각과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양보하지 않아도 내게는 많은 걸 양보했다. 무슨 일만 터지면 그는 만능해결사였다.



[고 정남규씨]

 


그러나 서울로 상경한 후론 그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지방 촬영 길에 창원이나 울산에서 간간히 만났지만, 가끔 술 취해 걸려오는 전화가 전부다.

문호야 잘 있나? 나 소주 한잔해서 기분 좋다.” 통화도 간단했다

그러더니 삼년 전 느닷없이 죽었다는 부음이 날아왔다.


정선에서 부랴부랴 김해로 달려 갔는데, 김의권, 황성근이도 와 있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났으나, 정남규만 볼 수 없었다.

그것도 자기 집 마당의 감나무에 목메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었을까?


가족들이 외부의 입방아가 두려워 쉬쉬했으니,

가족을 생각한다면 자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키로 내가 겪는 것처럼 심한 상실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어야만 했던 기구한 사정은 저승에서 만나 물어볼 작정이다.



  [동자동 송범섭씨] 


지방에서 돌아 온 정영신과 와인 한 잔 마시며, 이틀간의 방임을 마무리했다.

친구란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좋은 친구라는 결론도 내렸다.

다시 동자동으로 복귀했다.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전화가 빗발쳤다.

끊긴 전화를 다시 연결하였더니 김정호씨의 전화였다.

작가님 식도락으로 빨리 밥 먹으러 오이소

먹는 것보다 더 자고 싶었으나, 일어나야 했다.

 

집에서도 아내의 밥 먹으라는 소리 뭉게다 타박도 많이 받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밥 먹으라는 소리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살기위해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 밥값까지 내고는 쌀까지 가져가란다.


밥해 먹는 것이 귀찮아 있는 쌀도 이웃 주었는데, 기어이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전에 술 마시며 했던 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좌우지간  밥을 해 무야 삽니다.”

피로가 덜 풀렸는지 잠이 들 깼는지 빌빌거렸더니, 그가 4층 방까지 올려 주었다.

 이렇게 고마운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동자동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하나다.






그가 떠나니, ‘디딤돌하우스에 사는 송범섭씨가 찾아왔다.

예전에 내방에서 살았다며, 지금 사는 자기 쪽방 자랑을 해댔다.

어떻게 꾸며 놓았는지 궁금해 따라갔더니, 마치 신방처럼 꾸며놓았더라.

나비를 만들어 창틀에다 촘촘히 붙여 놓았는데, 계속 만들어 붙일 것이라고 했다.

방을 꾸미는 새로운 즐거움에 빠진 그는, 나비처럼 훨훨 날수 있는 희망을 찾은 듯 했다.

 

그런데, 난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새 방보다 오래된 지저분한 방이 더 좋고

희망이 보이는 정리된 방보다, 술병이 딩구는 절망에 찌든 방이 더 정겹다.

내 몸에 악마의 피가 끓는 걸까? 아니면 패배주의의 발로일까?

절망이나 희망이나 글자 한 자 차이라고 위안하지만, 그 의문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5일 정오 무렵, 동자동 쪽방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미디어 작가 김도이 군이 밑 반찬을 잔뜩 사들고 찾아 온 것이다.
어저께 페북에 올렸던 불신의 병에 시달린다는 글을 본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몇 달 전 다녀 간 후로 만나지 못해 근황이 궁금했었다.
같이 점심 식사하며 소주 한 잔 하자는 제안에 쌍수로 환영했다.

건물 밑에 자리잡은 ‘광주식당’엔 좌석이 없어 도이씨 따라갔다.
‘서울역쪽방상담소’ 부근에 있는 ‘청국장’집으로 안내했다.
동자동 살고 있는 나도 못 가본 식당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청국장에다 돼지볶음으로 소주 한 잔했다.






빈속에 소주가 들어가니 짜리한 기분이 죽였지만, 낮술이라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행히 소주 두병을 도이씨가 많이 마셔 주었다.
페북에 올린 동자동소식을 틈틈이 보는지 이 쪽 사정을 좀 아는 것 같았다.
우연찮게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연인즉, 어머니께서 심한 당뇨로 고통 받고 계신다는 것이다.
누군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았다.






발동 걸려 동자동 ‘새꿈공원’ 아지트로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낮술에 젖어 있었다.
정재헌씨는 이미 맛이 갔고, 이준기, 김용태, 계남기, 이한보, 이원식, 강완우씨 등

많은 사람이 여러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도이씨가 동내 사람들을 위해 막걸리와 담배를 사왔다.

다들 고맙게 받아 마셨는데, 이번엔 고급커피와 캔 막걸리를 또 사온 것이다.

이준기씨가 부담스러운지, 집에 가져가라며 사양한다. 사실 지나치면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이준기씨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왕년의 주먹 아니던가.





이 날은 교도소 갔다 온 친구들이 많아 그런지 교도소 이야기가 주 화제였다.

다들 사연이야 기구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쪽방생활보다는 교도소 생활이 편하다는 것이다,

갔다 오면 몸까지 좋아진다는 교도소 예찬론을 폈다.

하기야 얻어먹으러 다니지 않아도 삼시 세끼 밥 챙겨주겠다, 사람들과 늘 함께 어울리니,

쪽방처럼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술 담배를 못하지만, 건강에는 그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술 취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이기영씨를 비롯하여 라흥주, 강동근, 이태헌, 연영철,

유한수씨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마침 정용성이가 지나갔는데, 그날따라 말짱했다.

궁금증이 발동해 옥탑 방까지 올라가보았는데, 끓여놓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황춘화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식 놈의 라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황춘화씨 얼굴이 묵사발이 되어 있었다.





그 가파른 '9-18’건물, 마의 계단 에서 또 넘어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넘어져 팔을 다치지 않았던가.

아들 용성이가 넘어져 다치더니, 정재헌씨가 넘어져 다쳤고, 어제는 황춘화씨가 넘어져 다친 것이다.

건물 계단 손잡이를 쪽방상담소에서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사람 다 잡고 설치할지 모르겠다.

좀 있으니 꼭대기까지 손님이 줄을 이었다. 정재헌씨야 5층에 사니 올라 올 수 있겠으나. 이원식씨도 올라왔다.






내가 술집 작부를 자청하며 노래 한 곡 뽑았다.

‘비나리는 호남선’을 청승맞게 불렀는데, 갑자기 정재헌씨가 서럽도록 울어대는 것이었다.

말 못할 사연이 있어 보였다. 눈치 빠른 황춘화씨가 자기가 춤 출테니, 신나는 노래로 불러 달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돌렸는데,

애미는 신바람 나 흔들어 댔으나 용성이는 처음 듣는 노래라 흥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 노트처럼 생긴 노래방 책과 손바닥만한 앰프를 켜 놓고 한 번 찾아보란다.

나는 가수라 노래방 노래는 하지 않는다며 밀쳐냈더니,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촬영이 있어 강릉까지 가야해 너무 오래 퍼질 수가 없어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동자동 사랑방’ 일행이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타이밍이 귀가 막혔다.

내가 사랑방으로 갔더니, 박정아, 김정호씨가 술과 안주까지 준비해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 올라와 보니, 밑반찬까지 사온 것이다. 박정아씨도 내 하소연을 페북에서 본 듯했다.

후배가 와서 냉장고를 채워놓았다며 돌려보냈으나, 이게 사람 사는 맛이다.






‘동자동 사랑방’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박정아씨는 피가 뜨거운 빈민운동가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주민들이 소통하며 정 나누는 일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말없이 온몸과 마음을 바치니, 그 열의에 보답하느라 김정호씨도 열심히 돕는다.

내가 오버 할 것 같아 술을 자제하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떠 난 후 컴퓨터를 열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에 대한 김진하씨의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핵심에서 비껴 간 글이긴 했으나,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재발을 막기 위해 누군가 책임지는 사람은 있어야 했다.

대표가 사임하고 부대표가 끌어간다면 협력할 용의가 있다며, 함께한 분들께 죄송함을 표했다.






더 이상 작가 없는 사진이 떠돌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공익도 중요하지만, 작가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차후 어디에서라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작권 침해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작정이다.

잘 못된 일은 바로 잡아야 하니, 다들 양해해주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죽을 날이 다가 온 걸까?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날 정도로, 식구보다 더 챙긴 내가 요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으며,
그 오래된 인연을 하나하나 끊고 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변화다.

없는 자보다 가진 자가, 못 배운 사람보단 배운 자가,
못난 사람보단 잘난 사람들의 가식과 비인간적인 실체에 서서히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동자동 사람 외는 아무도 만나기 싫어 고장 난 핸드폰마저 일부러 고치지 않고 버틴다.

문제는 동자동에 정착하며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정 많은 동자동 사람들과 비교되어서 일까? 아니면 일종의 패배의식의 발로일까?
항상 마음의 문을 열라 나발 불었지만, 정작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것이다.






열흘 전, 동자동 공원과 용성이네 집에서 술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가 사라져 버렸다. 동내 나들이라 호주머니가 얕은 옷을 입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쪽방의 자물쇠 고리는 방 안에서 고리가 나와 밖에서는 못을 뽑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쪽방에 별 중요한 물건도 없을 텐데, 다들 문 걸어 잠그는 건 철저하다.

망치도 없지만, 잠든 야밤에 퉁탕거릴 수 없어 고민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염치불구하고 건물 관리자 정선덕씨를 깨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가끔 있는 일이라며 쇠 자르는 공구로 단숨에 자물통 고리를 잘라 주었다.
감사~ 감사~를 연발하며 들어 왔으면 잘 것이지, 술 취해 컴퓨터를 열어놓고 페북 질 하느라 날밤을 깠다.
눈을 떠보니 점심때가 지났더라. ‘식도락’도 끝난 시간이라 컵라면으로 속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외출을 하려니 자물통이 필요했다.
후암시장 철물점으로 급히 갔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 앞에서 김만귀, 문규도씨가 밑반찬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 밑반찬이라도 챙겨가야 하지만, 미처 신청하지 못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던 얻어먹으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만, 쪽방상담소에는 왠지 걸음이 가지질 않는다.

열어 놓은 방이 걱정되어 자물 통 하나 사서 바삐 걸어오니, 멀리서 이재화씨가 반갑다며 손을 흔들지만,
손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방문을 걸어 잠거야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것도 잠재적인 피해의식이리라.





쪽방은 겨울보다 여름 지내기가 더 힘들다.
방이 좁아 통풍이 잘 안되니, 방문을 열어놓으면 훨씬 나을 텐데, 다들 문을 닫고 산다.
아무런 비밀도 없지만, 독거들의 공통된 심리다.

그런 폐쇄되고 고립된 습관에 의한 것인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불신인지 모르겠으나,
방문 닫는 것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 그것이 더 걱정이다.
깊어가는 불신의 고리를 끊고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평생을 사람 사람하며 인본주의를 노래불렀는데,

더 이상 그런 말 할 자격도 사진 찍을 자격도 없다.
불신의 병이라면 빨리 치료 받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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