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인가게’ 관우선생 만나러 인사동에 갔는데, 김이하시인 사진전부터 들리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어 버렸다.




늦었지만 발길을 재촉했는데, ‘상광루’에 있어야 할 관우선생 일행이 인사동 거리에서 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배일동 명창과 권재일 한글학회장, 변작가 등 여러 명이 낙원동 ‘다리밑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관우선생이 발굴한 단골집 ‘다리밑 집’은 이제 낙원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다른 집은 손님이 없어도 포차나 다름없는 그 집은 항상 손님이 넘쳐난다.
그 날도 손님이 많아 길가에 자리 잡았는데,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한지 코로나도 도망칠 것 같았다.




관우선생이 조제한 막맥에다 감자부침, 닭발 등의 일품 안주가 나왔다.
난, 통풍 때문에 한 번도 막맥은 마셔보지 못했지만, 맛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생맥주에 막걸리를 회석하는 막맥은 냉동시켜 차게 만든 생맥주 잔도 한 몫 한다.
결국은 생맥주와 막걸리의 회석 비율이 맛을 좌우하는데, 관우선생의 칵테일 비결은 아무도 따를 자 없다.




관우선생은 ‘통인가게’를 찾는 벗들을 대부분 이곳으로 안내한다.
처음엔 돈 많은 재벌이 코 구멍만 한 가게를 찾아 의아해 하지만,
막맥과 안주를 맛보고는 다들 역시를 연발하며 단골이 되어버린다.




그 날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웃지 못 할 헤프닝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패션과 아트, 음악, 그림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독특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팝아티스 까스텔 바작이 통인가게를 방문하여 이 집으로 안내했단다.
그 역시 막맥의 독특한 맛과 포차 같은 술집 분위기에 반해버린 것이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낙원상가 계단 벽에 멋진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 장소가 아니면 어울 릴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 탄생해 다들 인사동 명물하나 생겼다고 좋아했다는데,
다음 날 가보니 깨끗하게 지워지고 없더라는 것이다.




알아보니, 건물관리인이 고생스럽게 지웠다는데,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명작이 무지한 관리인의 실수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척 보면 똥인지 된장인지는 분별해야 할 것 아닌가?




작가도 그 때 기분이 아니면 다시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며 아쉬워했다는데,
직무에 충실했다는 건물 관리인만 탓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권재일회장은 그 벽화를 지운 이야기 자체가 예술로 더 오래 회자될 수 있을 것이라며 위안했다.



이차를 가자는 관우선생 말에 다들 일어났다.
잘 가던 ‘유진식당’ 가는 줄 알았는데, 경운동 방향으로 이끌었다.
흥선대원군 집터 골목으로 한 참 끌고 가서는 허름한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싸고 맛있는 집만 찾아다닌다.




그런데, 이차로 간 음식점에서 아쉽게도 음식 맛을 보지 못했다.
전 날 밤 컴퓨터와 노느라 날밤을 깠는데, 취기가 오르니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배일동 명창이 부르는 ‘사철가’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깬 것이다.
관우선생이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이산 저산 찾는 노래가 아니던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우람한 소리와 애간장 녹이는 절절한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언제 이런 술집에서 대명창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까스텔 바작의 벽화는 하루라도 버텼지만, 배명창 소리는 그 자리서 날아갔다.
어차피 예술이나 인생이나 사라지는 것은 매일반이니, 어디 한 번 멋지게 놀아 보자구나.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고
여름이 오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 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 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사진, 글 / 조문호





































통인 관우선생의 아지트인 ‘다리 밑’이 인사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자리 잡은, 이 이름도 없는 대폿집은 탁자가 두 개뿐인 구멍가게다.
고향 같이 포근한 단골집으로, 관우선생이 ‘다리 밑’이란 거시기한 이름을 붙였다.






이 대폿집은 시원하게 얼려놓은 생맥주잔에 막걸리를 섞어 마시는 ‘막맥’이 자랑이지만,
감자전과 닭똥집 같은 싸고 맛있는 안주들이 많다.






전날 밤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화가 이목을, 편완식 기자가 ‘다리 밑’에서 논다고 꼬셨지만,
영양가 없는 핑계 대며 안 나갔다. 다 막맥 마시는데, 나 혼자 소주 빨기도 그렇지만,
이미 취한 사람은 사이클이 맞지 않아 편치 않아서다.
술 마시는데도 이 것 저 것 따지는 것이 많아 술꾼 자격 상실한지 이미 오래다.






난, 옛날부터 술에 약하다.
소주 반병이면 알딸딸하게 기분 좋고, 한 병 마시면 오바 한다.
술도 도수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량으로 취한다. 그래서 양 많은 막걸리가 쥐약이다.
맛이 가면 성희롱의 경계를 위험스럽게 넘나들기도 한다.
그 이튿 날 하루 종일 빌빌대며 후회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쯤은 그럴 일이 생긴다.






지난 5일은 통인에서 열린 배일동 명창 판소리가 끝나고, ‘상광루’에서 막걸리를 마신 후
이차로 ‘다리 밑’에 몰려갔다.
통인 관우선생 따라 황태인, 김규진, 배일동, 조상민, 민호기, 박영수, 최유정씨가 갔는데,
이미 다리 밑에는 강정호회장 일행이 자리 잡아, 밖에 앉아야 했다.





반 쯤 담긴 생맥주가 사람 수 대로 나왔는데,
제조 상궁 역활을 하는 관우선생이 막걸리를 타기 시작했다.
희석시키는 비율이 술맛을 결정한다는데, 난 통풍으로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확인할 도리가 없다.





오로지 촌놈 술 소주만 마시는데, ‘상광루’에서 막걸리를 마셨으니, 이미 맛이 간 상태다.
엎질러 진 물이라 겁 없이 막걸리를 홀짝거린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테너 이동환씨가 나타나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술이 취해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대 명창 들 앞에서 ‘봄날은 간다’를 짤아 댄 것이다.
바람새는 이빨로 뽑아내느라 욕도 봤지만, 좌우지간 술 취하면 간이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술만 취하면 가만 있지를 못한다. 

술꾼들 내려 찍는다며 계단 집에 올라갔는데, 헛걸음질로 디질 뻔했다.
죽는 거야 괜찮지만, 갑자기 떨어지면 술 마시던 양반들 얼마나 놀래겠노?






몸이 비실거려 더 이상 노닥거릴 수 없었다.
비상금을 털 생각으로 택시를 잡았는데, 배일동 명창이 불러 세웠다.
무슨 할 말이나 있는 줄 알았더니,
지갑 깊숙이 감춰 둔 비상금을 꺼내 택시비를 주는 것이다. 자기는 우짤라고...
이 양반 소리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인정도 죽이네.





낙원동에서 서울역까지 오천원이면 찍 쌀 건데, 열배나 되는 신사임당을 주니 욕심이 나부렀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제! 녹번동 가입시더” 햇붓다 아이가...
사실, 술 취해 동자동 4층까지 기어오르기 힘들어서다.






이틀 날은 천벌 받아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빌빌거렸다.
“천지 씹신이여! 이제 그만 데려가소서”



사진, 글 / 조문호























볼만한 전시가 있어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




옛 민정당사 자리 호텔공사는 이제 마무리를 했다. 머지않아 인사동이 더 낯설 것이다.




거리에는 임금님이 나와 광고판을 들고 있고, 지난날이 그리운 유랑 악사는 멀쩡한 날 ‘봄비’를 불렀다.




요즘 인사동에 나와도 갈만한 술집이 별로 없다.
돈에 밀리고 젊은이에 밀려, 길 잃은 기러기 신세다.
아지트로 죽치던 ‘유목민’도 젊은이 아닌 돈에 밀려났다.




사실상, 인사동을 못 잊어 배회하는 것은 공간의 추억이 아니라, 그 곳에서 놀던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 보다 죽었거나 볼 수 없는 자들의 추억이 짙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천상병시인이고,
뒤이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방송작가 박이엽선생,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
넋을 부르는 민속작가 심우성선생 같은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땡초시인 적음과 최루탄 냄새 풀풀 풍기던 사진기자 김종구, 별만 그렸던 강용대,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 ‘민예총’의 대부 김용태,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
강단 있는 민중화가 문영태, 그리고 살아있어도 볼 수 없는 화가 박광호와 이청운도 있고,
미국으로 떠난 최정자시인도 그립다.




그들과 어울리던 ‘실비집’이나 ‘누님칼국수’, ‘시인통신’, '하가', '레떼'

‘수희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부산식당’이나 ‘사동집’, ‘귀천’ 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잘 가지 않는 것은,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만났던 사람이 그리운 거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곳이 있어야해 ‘다리 밑’에 자리 잡기로 했다.
‘다리 밑’은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있는 코 구멍만한 술집인데, 간판이 없어 계단집으로 불렸다.
통인의 관우선생이 ‘다리 밑 집’으로 고쳐 불렀으나, 더 줄여 ‘다리 밑’으로 부른다.
옛날엔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살았으나, 대개 태어날 때의 고향인 다리 밑을 좋아한다.
공사판의 함바집처럼 서민적이라 더 정겹다.




주종은 불문이나 관우선생이 개발한 시원한 생맥주에 막걸리를 타 먹는 막맥이 맛있다지만
통풍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안주가 싸다. 쫀득쫀득한 감자전 같은 대부분의 안주가 오천원이다.




이 날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통인의 관우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보는 여인도 나타났다.
미끄러질 것 같은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생글 생글한 눈웃음이 죽이더라.




그런데, 옆 자리에 아는 분이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처럼 상투를 틀어 올린 권도경씨인데,
사진가 하형우씨께 전화 걸어 바꾸어 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좁았다.




그들의 건배사가 더 재미있더라.
술잔을 치켜들며 “이것이 무엇이요?”하니, 다같이 “정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이란 노래를 처절하게 합창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렇다. 다들 그 놈의 정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그리운 사람 만날 때는 다리 밑에서 만나자.
받을 때나 줄 때나 한 결 같이 꿈속 같도록...

사진, 글 / 조문호





















낙원상가 계단 아래 자리 잡은 다리밑집은 다리 밑의 음습함이 정겹다.
테이블이라고는 두 개 뿐인 코 구멍만한 대폿집인데, 닭 똥집이 별미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좁은데서 부딪히는 사람냄새가 더 좋다.






지난 7일저녁 무렵, 편완식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인사동 찍사가 인사동에 안 있고 어딧냐?’는 것이다.
산토끼가 어디를 못 가겠냐마는, 동자동 쪽방에 살림 차린 걸 모르진 않을텐데...
연휴라 방구석에만 쳐 박혀 있어 목구멍이 근질 근질하던 차에 반가운 기별이었다.
라면 끓이려 물을 올려놓았으나, 꺼버리고 나갔다. 


 



다리밑집에 들어가니 편완식기자와 건축가 김동주, 화가 이목을씨가 있었는데, 옆자리에 미모의 여인도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여인인데, 일전에 인사를 나누었다기에 더 이상 묻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틀니라고 끼고 나올 걸 후회막급이었다.






그런데, ‘통인’ 관우선생은 춥다며 옷 가지러 간 사람이 강원도 포수란다.
김동주씨가 설계한 강화도의 ‘통인미술관’ 준공검사가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날의 화제는 단연 미투였다.






화가 이목을씨가 국회의사당에서 초대전을 열었는데, 미투에 휘말려 전시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큐레이터에게 수제 명함을 주기위해 성향을 물은 것이 화근이란다.
명함에 그림 그리려, ‘굵은 것을 좋아하냐? 가는 것을 좋아하냐?’고 물었단다.
펜그림 굵기를 물었으나, 그 여인은 요상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다들 한바탕 웃고 넘겼으나, 편완식기자가 말을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있던 최효준씨가 당한 황당한 이야기였다.

부하 직원인 큐레이터에게 보낸 동영상이 문제가 되었는데,
작업에 상상력을 주려 보낸 동영상이 미투의 올가미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찌, 웃기 위해 농담도 못하는 이런 살벌한 세상이 되었는가?
집에서는 마누라 한테 엎어지고, 밖에선 입도 벙긋 못하는 남자 수난시대다.




 


농담 잘하기로 소문 난 나는 왜 시비 거는 여인이 없는건가?
사람 차별한다며 투덜거렸더니, 돈도 권력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란다.
그 날도 전시 기획하는 미모의 여인에게 진한 농담을 했으나,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주둥이만 살아있는 능력 없는 사내로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구 서러버라! 사내 취급도 못 받을 바에야 차라리 잘라 버릴까보다.


'




역시, 술타령은 미투가 최고더라!



사진, 글 / 조문호



















한 해를 보내는 지난 31일은 왠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몇 날을 송년회 핑계대고 퍼 마셨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종각 타종행사 같은 곳에 갈 수는 없잖아.

마침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연락이 왔다.
낙원상가 밑의 ‘다리 밑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관우선생 단골집이지만, 좁아도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다.
마치 어린 시절 짚동 사이에 들어가 놀던 틈바구니 생각도 나지만,
집 이름이 너무 야하지 않은가?

인사동에 나가보니 낙원상가 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몇 사람이나 넘어졌다.
연탄재라도 좀 뿌려야 했으나 요즘은 연탄재도 흔치 않다.
그런데, ‘다리밑 집’에 문이 잠겨 있었다.
연락했더니, ‘낙원아구찜’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관우선생을 비롯하여 송재엽씨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미녀가 두분이나 있었다.
관우선생이 도예가와 큐레이터라고 소개했는데, 큐레이터라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사슴 눈처럼 큰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애잔함이 가득한데,
약간 도툼한 입술은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일 것 같은 강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눈치 챈 송재엽씨가 얼른 자리를 바꾸었다.
이런 저런 씨잘데 없는 이야기 나누며, 소주로 한 해의 여독을 씻었다.

이차로 다른 곳에 간다지만, 난 서울역으로 가야 했다.
한 해를 보내는 즈음이라 노숙하는 친구들과 한 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최고의 부자나 인생의 벼랑에 선 사람이나 술마시고 노는 건 별 다를 바 없다.
쪽방 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기초생활수급자라 사는데 별 걱정은 없지만,
노숙자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욕심 부릴 게 없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대로 나누어 먹는 그들이 진정 비운 자라는 생각도 한다.

패트 소주 두병과 육포하나를 사들고 서울역으로 같다.
개찰구를 나오니 지하도 한 쪽 구석에 낯 익은 자들이 보였다.
이종민, 김종학, 김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낄낄거리고 놀았다.
총무를 맡고 있다는 김종학은 ‘종학이를 아느냐?’며 계속 천원만 달랬다.
서울역에서 종학, 종철, 종민, ‘쓰리 종’을 모르면 간첩이라며 유세했다.

마침 세밑이라 그런지 온정을 나누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외국인 가족이 각기 봉투를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빵 하나 우유 하나, 양말 한 컬레, 핫펙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난 고맙다며 사진까지 찍었으나, 다들 시큰둥했다.
술이 취해 했던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가끔은 금지된 노랫가락이 튀어 나오기도 했는데,
지나가는 역무원들이 제지시키며 나가라고 종용했다.
몸에 상처를 입은 동자동 최씨는 ‘다시서기’직원들이 휠체어로 실어갔다.

이종민이가 카메라를 달래서 주었더니, 이런 저런 모습을 찍어댔다.
마침 경찰의 강제 해산에 직면해 어지러운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선물이 담긴 봉지는 챙기지도 않은 채 그냥 두고 갔다.
그런데, 정리를 하고 나니, 종민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가져간 카메라는 5년 전에 삼십만원에 구입한 NIKON Coolpix P310으로 지금은 단종 된 카메라다.
술자리에서 마구 사용한 고물이라 돈은 되지 않지만, 오늘 찍은 사진파일이 걱정되었다.
그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미인도 미인이지만, 같이 마신 친구들의 초상사진도 많았다.

다른 역으로 옮긴다면 모르겠으나, 서울역에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한편으로 배신감도 일었으나, 아무래도 물욕은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겐 소중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쓰레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더 가까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라는 듯...
그들 무리에 합류하고 싶으나, 추위가 두려워 탐색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빼앗긴 무장해제 상태가 되니 지갑에 돈 떨어지듯.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기관총 급인 라이카를 챙기러 동자동 방으로 올라갔다.
이 카메라는 고향후배인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인데, 

좋기는 하지만 술자리나 현장에서 막 쓰기는 불편하다.
찍히는 사람들도 피해의식부터 느끼니, 큰 행사나 많은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카메라를 챙겨 서울역지하도로 내려갔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 나타난 어느 노숙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 깔고 누워 있었다.


하는 수 없어, 해 바뀌는 시점에 함께 축배 들기로 약속한 녹번동 정영신씨를 찾아갔다.
오늘 일기장에 올릴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다며, 내 얼굴 한 장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 밀었다.
신년 인사를 겸한, 강한 의지가 담긴 그런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3월 정기모임이 지난28일 오후6시 인사동 ‘툇마루’에서 있었다.
이번 모임에는 민건식회장을 비롯하여 김완규, 박일환, 강봉섭, 조균석, 윤경원, 이흥복, 송재엽,

박상균씨 등 참석률은 적었지만, 미녀 화가 에밀리 영이 나타나 분위기를 띄웠다.

난 그녀가 가뭄에 콩 나듯 얼굴을 내 밀어, 잘 몰랐었다. 

가라기에 작품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팝아트적인 감수성이 묻어나고 있었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사진에서 그림으로 완성시킨 독창성이 돋보였다.

작품들이 그의 용모처럼 화려했다. 술자리서 씰데없는 농지걸이나 하지 말고,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민회장님께서 몸이 불편하여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2차를 가야했다.

몇몇 분들이 ‘다리 밑’집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손님이 꽉 차있었다.
좀 기다리다, 계단 밑자리를 차지했는데, 그 비좁은 자리에 여덟 명이나 앉을 수 있었다.
다 낑겨 묵고 살도록, 조물주가 인간을 참 잘 만들어 놓았더라.

가운데 미인이 낑겼으니, 좌우에 앉은 조균석, 이흥복, 두 교수는 좋았겠다.
그런데, 그 날 안주로 나온 뻔데기 찌개란 걸 처음 먹어 보았다.

좀 징그럽기는 해도 고소한 맛이 나는게 먹을 만 했다.

소주안주로 괜찮을 것 같아, 찜해두었다.

모두들 불편함도 잊은 채,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사람 사는 정이 묻어났다.



사진, 글 / 조문호


-인터넷에서 찾은 에밀리영 작품들을 옮기오니, 봄꽃 보듯 안아주세요.-

































낙원상가 계단 밑에 둥지 턴 ‘다리 밑’ 집은 추억을 일깨우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이곳은 본래 담배포를 개조한 곳이라 간판도 없다.
탁자도 세 개 뿐이라, 열 댓 명 남짓 들어가면 꽉 찬다.
‘통인가게’대표 김완규씨는 외국 손님을 이곳에 안내할 정도로 단골이다.

안주로는 감자부침, 닭똥집, 뻔대기찌게 등이지만, 생맥주에 막걸리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김완규씨가 개발한 이 ‘막맥주’를 마셔보진 못했지만, 마셔 본 사람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통풍에는 맥주가 쥐약이라 삼가긴 하지만, 마시고 싶은 마음은 꿀떡같다.

그런데, 입구에 자리가 있어도 굳이 담배가 진열된 계단 밑을 찾아간다.
키 큰 사람은 계단 턱에 걸릴 것 같은 낮은 곳이지만, 오랜 기억들을 끌어내는 아기자기함이 있어 좋다.

밀폐된 좁은 공간의 은밀함에 더해 상대방과의 대화집중력에 그지 그만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어린 시절 추억이란 게 골방의 구석진 자리나 뒤 칸의 숨은 공간들을 아지트 삼아 놀던 기억이다.

심지어 시골에서는 볏단 틈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일단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 날 수도 있었지만,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이 좋았던 것이다.

지난26일 오후7시 무렵, 김완규, 송재엽, 연극박사 이동일, 윤경옥 내외와 어울려 다리 밑으로 기어들었다.

술집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 날의 화제는 어린 시절 이야기 일색이었다.

김완규씨는 어릴 적 병아리를 무척 좋아 했다고 한다. 용돈만 생기면 병아리를 사 모아 일흔 여섯 마리까지 모았단다.

병든 병아리는 마이신까지 사 먹이며 애지중지 길렀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모두 가마솥에서 삶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단다. 조금만 더 키워 야생으로 키울 야심찬 기대가 순식간에 물거품 된 것이다.

이동일씨는 집에서 키우던 개 네 마리가 한꺼번에 쥐약을 먹어 안타까워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고,

윤경옥씨는 팔려가던 개가 자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린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말 못하는 가축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이런 저런 옛 생각에 빠져 들었다.

모두들 불편을 감수하며 이 좁은 집을 찾는 것은, 지난 시절의 추억도 추억이지만, 사람 사는 정이 그리워서일게다.

요즘은 이 집도 손님이 많아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인사동에 추억과 낭만을 파는 술집은 없는가?

사진,글/ 조문호




























‘다리밑 집’은 인사동에서 제일 작은 대폿집입니다.
본래는 콧구멍만 구멍가게였는데, 2년 전부터 술집으로 바뀌었지요.
이름도 없이 그냥 ‘다리밑 집’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낙원상가 악기점으로 올라가는 계단아래 터를 잡았거든요.
테이블이야 2개뿐이지만, 비집고 앉으면 열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요.
감자부침이나 닭똥집 맛이 귀가 막혀, ‘통인’ 김완규씨가 단골이랍니다.

지난 15일 오후 길가다 들렸더니, 김완규씨와 건축가 김동주씨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김동주씨와는 오랜만이라 자리에 눌러 앉았습니다. 

술자리에서 관우 김완규씨의 부친 인제 김정환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업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나니, 친구 분께서 큰 일 난다며 우려 했답니다.
사실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관우는 밤새도록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는데.
부친께서 “난 아들을 믿는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답니다.

지금은 김완규씨가 아들에게 사업의 일부를 넘겨주었는데,
아들 역시 부전자전이라 술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부친에게 배웠던 “난 아들을 믿는다‘는 말을 하긴 했으나, 걱정이랍니다.

다른 약속 때문에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대번 취해버렸습니다.
먼저 일어났으나 몸이 비틀거렸습니다. 흔들려도 기분은 좋지요.
화가 장경호씨가 기다리는 ‘유목민’으로 가며, 인사동거리를 찍습니다.
지나치다 ‘사동집’ 주인장 송점순씨를 만나 윙크도 보냈고요.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강행복, 이승철씨가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이번에 나온 이승철시집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도 받았습니다.

"사랑도 먹어야겠지만, 밥도 먹어야 살지요!"


반갑기는 했으나 이미 취해 더 마실 수가 없는데다,
사진에 거부감을 보이는 어느 여인네 히스테리에 도망쳐야 했습니다.
문제는 지하철에서 잠들어 한없이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 팔자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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