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사람들이 기억하는 공간과 인사동 옛 이야기로 엮은 사진집인데, 당시 출판과 함께 인사동 ‘북스갤러리’에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전시기간동안 절반 이상이 팔려 나갔고, 삼사 년 지난 후에는 완전 절판되어 더 이상 구입할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다. 저자에게 한 권 남은 사진집마저 도둑맞게 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다.
2015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농동588’전시를 열며 그동안 발행한 사진집을 견본으로 내놓았는데, 그 책이 감쪽같이 사라 진 것이다, 그 당시 전시장을 지키던 공윤희씨가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 사이에 없어져, 입장이 난처해진 공윤희씨가 CCTV를 돌려 본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책을 몰래 가져간 분은 잘 아는 원로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부터 책 도둑과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란 말도 있지 않는가? 그 문제는 두 사람만 아는 영원한 비밀로 묻어버렸다.
‘빛깔 있는 사람들’이란 부제를 단 ‘인사동 이야기’는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억하는 공간에서 찍은 입상사진 110여점과 오래된 인사동 풍정사진 40여점, 그리고 인사동을 추억하는 작가들의 글 47편 등 총 244페이지로 구성된 책으로 가격은 20,000원이었다.
게재된 입상사진 110여점은 2007년 인사동 ‘공화랑’에서 가진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전에 전시한 사진이었다. 뷰카메라로 찍어 한지에 디지털 프린트한 사진인데. 파주 헤이리에 있는 ‘인물박물관’에서 5점, 오산 ‘막사발미술관’에서 4점 구입한 것 외에는 대부분 찍힌 분들에게 실비로 제공하거나 기증하여 제고를 한 점도 남기지 않은 유일한 전시였다.
사연이 많은 사진집이지만 절판되어 저자도 갖지 못한 귀한 책이 되어버렸는데, 노광래씨가 인사동 자료를 구하다 알게 되어 개정판을 발간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어려운 출판사 사정을 감안하여 선 구매 독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연락했는지 저자에게 확인하는 전화도 여럿 걸려 왔다.
아마 책에 실렸던 분들에게 전화를 한 모양인데,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해 선 구매를 부탁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책이 나왔을 때도 전시 안내 외에는 책 판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어떤 분은 절판된 후에야 책을 구해달라고 안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광래씨를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인사동을 사랑하는 애착에서 책을 다시 찍고 싶어 선 구매를 부탁했을 것이다. 그 책이 복간된다고 해서 노광래씨에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2년 전 ‘진인진출판사’와 새로운 인사동 사진집을 출판하기 위해 계약까지 해둔 상태라 다른 곳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음 달 ‘노숙인’사진집이 나와 마무리되면 새 인사동사진집에 매 달릴 작정이었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하여 새 책 제작에 올인 해야 할 절박한 사정이나, 노광래씨의 열성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재판을 찍으려면 그대로 펴 낼 것이 아니라,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부사진을 추려내고 인사동과 관련 있는 분 중에 누락된 분을 추가로 촬영하여 개정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광래씨가 몇몇 분들에게 연락하여 촬영 스케줄까지 잡아 두었다.
오늘 오전 노광래씨를 만나 인사동에 사진 찍으러 따라 나섰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박복신 대표와 방귀식씨를 만나 차 한 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늦게 ‘명신당’ 필방 이시규씨와 섬유공예가 최정인씨도 만났다. 오늘은 세분을 촬영했는데, 꼭 들어가야 할 박재동씨와 김진하씨도 연락해야 할 것 같다. 촬영스케줄을 잡아야 할 텐데, 워낙 바쁜 분들이라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인사동 추억을 불러내어 삭막해 가는 인사동에 봄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전강호씨 송추 작업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가는 길이 피서객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들이를 제한하는 거리두기도 푹푹 찌는 무더위에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만난 전강호, 이종순 내외가 반갑게 맞았는데, 이 얼마만이던가?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첫 만남이고, 송추 작업실에 들린 적은 3년이 더 되었다.
연못이 조성된 정원에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자연 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이제 연꽃이 피기 시작한 연못에는 팔뚝만한 술 안주가 우글거렸다.
노광래씨가 술자리를 만든 것은 오는 9월경 민병산선생 33주기를 맞아
인사동에 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인데, 사진을 좀 제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역시 인사동 책 낼 출판사 약속으로 코가 석자지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인사동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 알찬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오래된 인사동 추억담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미리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담도 많았지만 한 때 인사동에 사무실을 둔 모 시인의 추잡한 비행까지 나왔다.
그 자가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 오른 ‘예술원’ 회장을 하지 않았던가?
미성년자를 건드린 그 일이 다시 불거지면 사회매장은 물론 바로 구속감이다.
사실 예술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없애야 할 조직이었다.
철옹성 같은 벽으로 쉽게 들어갈 수도 없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오라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바 있는 이시영시인이다.
1954년 "반공 문예 조직의 국가적 공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자 권리 주장”이라는 설립 성격도 웃기지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회원들에게 매달 180만원의 정액 수당과 각종 회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회원이 대학교수 출신이라 연금을 받는데,
이중으로 국고를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프랑스와 미국, 독일 예술원의 경우는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정액 수당이 없으며,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낸다고 한다.
다들 예술원 회원 자신들보다는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사업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은 하는 일도 없지만, 국민들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이 더 많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다들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입 다물고 묵인해 왔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분과와
연극·영화·무용을 합친 4개 분과로 구성되어있는데, 사진 분과만 빠졌다는 점이다.
사진 뿐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희곡 분야 회원도 없고, 남성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 생활이 어려워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작가 몇몇 분이 나서서 선생을 입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경노단체에 안 들어 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나 패거리 의식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기호 교수가 예술원을 비판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덜 쪽 팔릴 문제다.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결단을 부탁드린다.
사진: 전강호,조문호 / 글: 조문호
'대한민국 예술원을 폐지하라'
한겨레 [시론]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기호 작가가 대한민국예술원을 비판하는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긍정적인 역할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는 일들이나 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폐지를 말해왔다.
문학회원의 경우 원로 문인으로 귀감이 되기는커녕 부끄럽고 추하게 자신의 ‘생사당’을 짓듯 살아서 자기 이름의 문학관을 짓는 모습들과 후배 예술인을 위한 창작 지원 활동보다는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이나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기리어 짓는 것으로 알아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자기 문학관을 국가 예산까지 끌어들여 짓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문학관을 짓는 것에 더해 지역 시민의 재산인 공적 재산 수백점을 탈취해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들이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으로 예술원의 문학 분과 회원 26명이 받는 수당만도 4억6800만원이다. 여기에 비해 2021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으로 문학 부문 청년예술가에게 지원된 예산은 7명 선발 4000만원에 불과했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자신들이 받는 연금 외에 월 180만원, 연간 216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대부분 다른 고액의 연금을 받는 이들이 감액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특권적 지원이야말로 창작 지원이 절실한 청년예술가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이기호 작가가 “나라 예산으로 명예를 세우지 마십시오. 제 또래의 부장급 과장급 작가들도 밥벌이가 따로 있으면 지원금 같은 거 신청 안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누구보다 지원이 절실한 전업작가들도 남보다 조금 더 알려지면 자기보다 어려운 동료 후배 작가들을 생각해 지원 신청을 자제한다. 그러나 예술원은 이제까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키워왔다.
과거 2005~2006년 ‘우수예술인발굴지원’ 하던 것을 폐지하고,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예술원 회원만의 예술활동 지원을 시행해왔다. 그나마 외부 작가에게 주는 ‘대한민국예술원상’도 올해 문학 부문은 예술원 회원의 동생에게 1억원을 주었다. 이쯤 되면 특권이 아니라 나라 세금에 대한 범죄 수준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기호 작가가 공개한 글에 이시영 시인이 댓글로 이들이 ‘수당 180만원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행사 시 국가 의전서열 제일 앞에 예술원 회원을 배치하고, 해외여행 시 공항 귀빈실 이용 및 1등석 등을 요구하고 있다. 후진 예술가들의 가난과 고투 등은 눈 밖이며 오로지 예술 원로로서의 자기 보신이 제일 사업이며 청와대가 예술가들을 초청해 밥을 안 먹는 것도 항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지 끝이 없다.
회원은 예술원 회원이거나 예술원이 지정한 예술단체가 후보를 추천하는데, 예술원 회원 중 출석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회원이 된다. 자격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저희끼리 바꾸었다. 이러다 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누가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 온갖 추문이 흘러나온다. 존경받는 회원이 왜 없겠는가마는 명단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나 싶은 이름이 왜 저렇게 많은지 절로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선을 말하지만, 조직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운영되어 개선해봐야 마찬가지다. 무보수 명예직이라 하더라도 그 허울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추한 몰골을 보일 것이 뻔하다. 문학으로 예술을 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단체는 해체와 폐지가 답이다. 그 전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들 물러나길 바라나 이제까지의 특권적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무망한 일이다. 정녕 문학을 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지난 5월 3일은 달세 방에서 쫓겨 난 노숙자 거처에서 낮술에 취한 날이다. 이덕영씨와 씨잘 데 없는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공윤희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나오지 않냐?”는 말에 나가기는 했으나, 숨이 가쁘기 시작해 더 이상 술을 마시기는 힘들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인사동 거리를 찍으며 지나가는데, 세계일보 편완식기자가 도화가 이흥복씨와 미녀 한 분을 데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흥복씨를 보니, 지난 4월 하순 ‘통인’에서 개최한 개인전에 가보지 못한 미안함이 앞섰다. 개막식 날 작정하지 않으면 미루다 놓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흥복씨는 백자도판을 픽셀 삼아 평면에다 입체적인 작업을 하는 도판화가인데, 고향인 거창에 작업실이 있어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여럿이 가는 것으로 보아 무슨 약속이 있는 것 같아,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
공윤희와 약속한 ‘유목민’으로 갔더니, 민영기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그만 마시기로 작정했으나, 마시고 있는 ‘한라산’소주에 구미가 땡 겼다. 맛이나 본다며 시작한 술이 서너 잔은 족히 마셨는데, 그때서야 용건을 꺼냈다. 지난 번 말썽을 일으킨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 결산 내용을 정리해 줄 테니,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차례 구설수에 몰렸던, 그 지긋지긋한 일을 왜 다시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았으면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순리이지만, 남은 일은 돈 받은 사람들 거명할 일인데. 잘 아는 분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내용을 보고 결정할 생각으로, 자료나 정리해 보내 달라며 나왔다.
그 후 잊고 있었는데, 이틀 뒤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노광래씨가 녹번동에 들려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햇님을 위한 조각가 박상희씨의 마음을 전해주러 왔다는데, 나한테 꼭 전하라는 말도 있단다.
첫째는 채현국선생과 자기에게 사과하는 글을 올려 달라 했고,, 둘째는 채현국 선생께서 날더러 “동냥 보따리를 찢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에 인사동의 가난한 작가들이 엄청 자존심을 다쳤다는 이야기도 덧 붙였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만약 그런 일만 없었다면, 문제의 그 전시를 계속 할 작정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시가연’에서 채현국선생께 드린 말이 와전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갑의 입장에서 사셨기에 을의 입장을 모르지 않느냐?”는 내 말이 ‘최현국선생께서 갑 질 했다“는 말로 둔갑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더러 무엇을 사과하라는지 모르겠다. ‘시가연’에서 채현국 선생께 인간적으로 심려를 끼친데 대해 큰 절 올리며 사과했고, 노광래 씨에게는 개인적으로 밥그릇 걷어찬데 대하여 사과하지 않았던가?
난, 머리가 나빠 판단이 잘 안 되니, 내가 올린 글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해 주면 충실한 답을 공개할 것이고, 잘 못된 일이라고 판단되면, 정중히 사과하겠다고 전하라 했다.
요즘 나를 아는 분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 좋던 조문호가 왜 저리 변했냐고?’ 예전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웃고 넘어가던 사람이 왜 저렇게 까칠해 졌냐는 것인데, 그건 뒤늦게 반성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언젠가 바뀌겠지 생각했지만, 죽을 때가 되도록 바뀌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 못 살고 나쁜 놈들이 잘 사는 구조도 그렇지만, 잘 못된 관행이나 위선, 부조리 등 못된 짓이 모두 그대로였다. 듣기 싫은 참 말은 안 하고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하는 사람 탓이었다. 가까운 사람의 잘못은 눈감아 주는 습관이 이 지경을 만든 것이다.
내가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13년 전 정영신씨를 만나 인터넷에 접하며 부터다. 몰랐던 정보도 많이 접했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며 작심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개입된 일이라도 잘못된 것은 기어히 바로 잡아야겠다고...
그러니 주변에 있는 가까운 분들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친한 사람일수록 사정을 많이 알 수밖에 없으니, 어쩌랴! 잘 못된 일에 내편과 남의 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처음엔 정영신씨가 욕을 많이 먹었다. 심지어 뒤에서 조종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요즘 또 다시 벌집 쑤셔놓은 듯 인사동에 말들이 많다. 바로 ‘지난 11월에 열린 ’쓴 맛이 사는 맛‘전 문제점을 나발 불어 그렇다. 그 전시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채현국 선생께서 총대 맨 일이고, 3-40년 동안 잘 알고 지내 온 동생 같은 사람이 추진한 일이다.
자선의 간판을 달고 장사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으나, 이 건 70명의 참여 작가를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 이름을 내건 전시다. 그 결산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것이 뭐가 잘 못되었는가? 정작, 인사동을 떠도는 수많은 뒷말을 당사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지난 9일 오후6시, 채현국선생께서 마련한 만찬이 ‘시가연’에서 있었다. 노광래씨의 연락으로 갔는데, 채현국, 임재경, 이재하, 서정춘, 구중관, 이두엽, 공윤희, 하홍만, 정고암, 이인섭, 서길헌, 이만주, 이회종, 노광래, 편근희 씨등 열여덟 명이 나왔다. '
전시에 대한 결산을 하고, 마무리하는 자리로 알고 갔으나, 술 마시며 노는 자리였다.
채현국선생께서 노광래씨를 술 심부름 시켜놓고, 화를내며 고함을 질렀다. ‘왜 광래를 힘들게 하냐?’며 욕설을 퍼 붓기에 ‘선생님께서 그렇게 만들지 않았냐?’고 대들었다. 지인들 앞에서 망신주려 작심한 것 같았는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바른 말하는 놈은 욕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인간적인 도리에서 큰 절 올리며 사죄했지만, 결코, 잘 못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