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Meditation' 초대전이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지난 31일 개막되었다.

 

전시된 히말라야 설산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로운 생명의 숨결로 가득하다.

설산에서 영적 에너지가 솟는 것은 작가의 간절한 기도에 의한 것이다.

 

작가는 20여 년 전, 히말라야 설산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어 작품 세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인사동 풍류객으로 살았으나, 그 이후부터 그의 기행은 전설이 되어버렸다.

스님처럼 술과 고기도 멀리하며 간절한 기도를 화폭에 옮긴다.

 

명상과 기도에 의한 설산은 차가운 한기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가 번져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사랑의 빛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 전시는 612일까지 열린다.

 

또 다른 작품도 선보였다.

 

좀 늦게 간 개막식에서 강찬모화백을 비롯하여 장경호, 이두엽, 조준영, 최유진,

방기식, 정영신, 노광래, 덕원스님, 황경애씨 등의 반가운 분을 만났다.

 

 '인사아트프라자' 5층 레스트랑에 마련한 만찬장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날 2차는 언론인 이두엽씨가 '흐린세상 건너기'에서 샀다.

조준영, 장경호, 정영신, 최유진씨가 함께 한 자리에서 인사동 추억몰이가 시작됐다.

"술 귀신 강찬모 오기 전에 도망가자"는 전설에서 부터,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이야기거리를 만들었던 풍류객의 만행을 낱낱히 폭로했다.

이두엽씨가 인사동에 관한 추억몰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니, 다들 기대하시라~

 

 

 

 

실종의 소설가 구중관 형이 소설제목처럼 영원히 실종되어 버렸다.

팔순이 넘도록 홀로 적적하게 지내더니 산천이 들썩이는 이 화창한 봄날, 하늘나라로 떠났다.

천상의 선녀 만나러 떠난 것일까?

 

중관형이 여주로 이사한 뒤로 늘 궁금하던 차에, 난데없는 부고가 날아들었다.

뇌경색을 일으켜 조카의  간병을 받았으나, 며칠 지나지 못한채 운명하셨다고 한다

 

중관 형의  빈소를 인사동 '사가연'에 마련한 사람은 '시네갤러리' 노광래 관장이었다.

지난 달 유목민에서 치른 신성준 선생 장례처럼, 여기 저기 알려 인사동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비싼 장례식장보다 잘 다니던 술집을 빈소로 정하여 고인의 삶과 연결시켰다.

 

요즘은 일로 인한 스트레스인지, 갈 때가 되었는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힘들어 온 종일  누워있지만, 중관형이 떠나는 마지막 길은 마다할 수 없었다.

더구나 마지막 볼지도 모를 배평모씨가 삼천포에서 온다는데 어찌 누워 있겠는가?

 

빨리 갔다 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일찍부터 나섰는데, 길에서 잘 아는 노숙거사를 만났다.

"어딜 그리 황급히 가는가? 술 한 잔 하고 가시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노숙거사는 행색은 거지지만 표정은 부처 같았다.

마신 술이 약인지, 두들겨 많은 것처럼 쑤시던 몸이 가뿐해 졌다. 

알콜 중독증세일까? 아니면 노숙거사의 신 끼가 작동한 걸까?

준비한 조의금에서 파랑새 한 장 빼내 적선했다.

 

찾아 간 인사동 시가연‘에는 상주인 조카 구정현씨와 잘 모르는 분만 있었다.

마이크 잡고 노래한 적이 어저께 같은데, 그 자리를 영정사진이 대신하고 있었다.

절을 올리며 중관형의 명복을 빌었으나 마음은 찹찹했.

살고 죽는 것이 이리 간단한 것이던가?

 

중관형과 양평장에서 만난 일들을 떠 올리며 혼자 홀짝거리고 있으니, 반가운 분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이준기, 김형구, 배평모, 김철환, 임해리, 임계재, 박상희, 이만주씨 등 많은 분이 모여들었다.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냈던 배평모씨는 만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쩌렁 쩌렁한 목소리 들으니 기가 철철 넘쳐 백수는 무난할 것 같았다. 

평소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기차 불통을 삶아 먹었는지 잘들리다 못해 귀가 멍멍했다.

앞 사람과 조가 맞아 쉼없는 구라를 풀어대는데,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졸리기 시작했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들은 이야기로는, 요즘 죽는 사람이 유독 많은 것은 윤석열이 때문에 홧병이 나 죽는단다.

결정적으로 잠을 깨운 이야기는 비아그라 이야기였다.

 

 비아그라를 많이 먹은 한 인간이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시신의 거시기가 튀어 올라 관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죽은 자의 친구가 나타나 ! 너그 마누라 왔다고 하니, 관 뚜껑이 쑥 내려갔다"는 설렁한 개그였다.

 

영정사진을 거두어 여주로 내려갈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부쩍 주변 분들이 많이 돌아가신다.

인사동과 관련된 분만 해도 신성준선생을 비롯하여 박구경시인 등 줄줄이 돌아가셨는데,

아직 사망신고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또 돌아가신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가슴 아프지만, 그 길은 천국 가는 영생의 길이 아니던가?

이젠 장례문화도 초상집이 아니라 잔칫집으로 바뀌어야 한다.  

비싼 장례식장보다 사정에 맞게 치루고, 춤추며 노래부르는 신나는 굿판을 만들자. 

 

중관형!  봄바람에 실려 꽃길따라 훨훨 날아가, 좋은 세상만나길 축원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자유로운 삶을 사신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았다.

뇌출혈을 일으켜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인사동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윤명철씨가 발견하여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늦었다고 한다.

독일 사는 조카에게 연락이 닿아 그나마 혈연이 빈소를 지킬 수 있었다.

 

지난 5일 오후6시 무렵, 빈소를 차린 유목민에 갔더니,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와 조카 신대식씨를 비롯하여

윤명철, 노광래, 전활철, 최유진, 강찬모, 김명성, 조해인, 이명희씨가 있었다.

 

일찍은 박상희씨가 다녀갔고, 늦게는 방기식씨와 김상현씨도 조문을 왔는데,

김상현씨는 암과 투병중인 환자가 아니던가?

 

빈소에 걸린 영정사진이 젊은 모습이라 낯설기도 하지만,

고인의 영전에 술 한 잔 올려 편안한 안식을 기원했다.

 

먼길 떠나는 노잣돈이라며 돈봉투를 내놓았더니, 노광래씨가 필요없다며 돌려 주었다.

술 값은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가 부담한다며...

 

고인은 독신으로 사셨으니, 걸릴 것 없이 편하게 떠나신 것이다.

장례식장보다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한 것도 잘 한 것 같았다.

 

5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조문객을 맞고,

6일은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시네갤러리에서 맞을 것이라 한다.

 

생전에 두 곳을 가끔 들리기도 했지만, 유목민처럼 사시며 술을 즐겼으니

고인의 뜻도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의 삶처럼 자유롭게 이승을 떠돌며  삶을 하직한 것이다.

최유진씨는 장례문화도 이처럼 다양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조카가 사는 독일로 옮겨 갈 것이라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보름정도의 시일이 걸린다고 한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마지막 송년회라 여긴지가 한 두 번이 아니건만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다.

 

올 해 따라 가까운 친구가 여럿 세상을 떠나, 더욱 슬픈 한 해를 보낸다.

모든 게 없을 땐 소중함을 깨닫지만, 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살아있을 때 자주 만나지 못했음이 가슴을 후벼 파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지금부터라도 주변 분들과 자주 소통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유래 없는 코로나 광풍은 아직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적 피해도 막대하지만, 개인의 삶 또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차지하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소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싸울 일이 아닌데도 다투는 등,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와중에도 스스로의 이권에만 전전 긍긍하는 정치인들 보면 울화가 치민다.

정당보다 정책과 인물을 보고 뽑는 그런 세상은 정말 요원한 것이던가?

이태원참사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49제 날,

크리스미스 트리 불을 밝히며 술잔을 치켜드는 대통령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

 

다들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두 번 죽이는 망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도 여럿 보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인들은 걸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부자 표를 노려 부자감세를 추진하거나,

노인 표를 의식해 선심형 노인복지예산을 올리는 모순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유권자에게 고무신 돌리던 자유당 시절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시급한 것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과 쪽방에서 죽어가는 고독사 부터 없애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청년이 더 살기 어려운 시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시대를 맞은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젊은이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정책과 행정력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16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송년회가 ‘유목민’에서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지만, 참석하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조준영시인이 비용일부를 부담해가며 어렵사리 주선하지만, 매번 그 얼굴에 그 얼굴이다.

 

이번 모임은 날씨가 추워 그런지 송년회 모임치고 저조했으나,

백남이 시인은 정읍에서 상경하는 열성도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앉던 ‘유목민’ 좌석이 예약되어 떨어져 앉아야하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깥 좌석에는 바람막이까지 설치해 두었으나, 날씨가 추워 앉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골목이 대화의 자리고, 사진 찍는 장소였다.

불화가 이인섭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야외의자에 정답게 앉기에

두 분 결혼사진 찍는다고 떠벌렸더니, 화들짝 놀라면서도 좋아한다.

결혼은 겁나지만 연애는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화가 정복수씨는 지역문학총서인 ‘장소시학’ 2호 한권을 선물했다.

이번호의 특집 장소는 경남 의령인데, 의령은 정복수씨 고향이 아니던가.

문인들의 글만 아니라 화가와 미술평론가 글도 실려 있었다.

정복수씨의 회향기인 ‘내 존재의 비망록과 그림', 미술평론가 황인의  ‘병막의 주인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네갤러리'를 운영하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떴다.

‘한겨레신문’ 짬에 ‘즐겁게 놀며 배우는 인사동 대학 다시 살리고 싶다’는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풍류학교 교장선생으로 추천한다는 허풍도 떨어댔다.

 

이 날 ‘유목민’ 특선 안주로 사골건더기와 시루떡이 나왔다.

술만 홀짝이던 예전과 달리 푸짐한 안주 덕에 술이 덜 취했다.

 

이날 참석한 분으로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 이명희, 전강호, 조해인,

정복수, 이인섭,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노광래, 백남이, 정영신, 임경일,씨가 참석했고,

끝날 무렵에는 김수길, 최석태씨도 나타났다.

 

엊저녁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수길씨가 녹번동까지 쳐들어 와 술을 마셨는데,

술병 났는지 장경호씨는 나타나지 않고, 그 패잔병 둘이 뒤늦게 온 것이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그런지, 모든 일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사람이 좋아 사람만 찍어 왔는데, 사람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전시장 돌아다니며 써 온 전시리뷰는 물론,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남의 작품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적 만들기 싫어서다.

 

사람을 피해가며, 사람을 찍어야 하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까지 싫은 소리에 등 돌리는 판에 남이야 오죽할까.

심지어 내가 있는 쪽방 주민들 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다 허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찌 사람을 포기할 수야 있겠는가?

 

새해에는 좋은 사람 많이 만나, 살 맛 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짬] 갤러리 씨네 노광래 대표

노광래 대표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인사동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고 민병산 선생의 서예 작품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천상병 시인 좋아 ‘귀천 껌딱지’ 인연

1985년부터 38년째 ‘인사동 연락책’

 

노광래(66) 갤러리 씨네 대표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거리인 인사동 사람들 사이에 연락책으로 통한다. 1985년 지금은 고인이 된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씨가 카페 귀천을 연 이래 ‘귀천 껌딱지’로 살았으니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 37년이다. 앞서 1983년 시인 천상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천상문학회’ 초대 총무를 지낸 그는 1988년 시인이 춘천의료원에 입원하자 8개월 동안 병실에서 숙식하며 간병을 했단다. ‘인사동 풍류객’이었던 고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 말년에도 1년6개월 동안 ‘비서 겸 운전사’ 노릇을 하며 함께 인사동을 누볐다.

 

15년째 화랑 주인으로 사는 그에게 그림을 맡기는 화가와 고객들도 대부분 인사동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한 달에 그림 200~300만원어치 팔아 세내고 남은 돈으로 라면 먹고 즐겁게 산다”는 노 대표는 지난해부터 인사동과 인사동 사람들을 알리는 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지난 9월 ‘인사동 산타클로스’로 불렸던 고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는 글을 모은 책 <건달할배 채현국과 친구들>을 기획 출간했고, 지난해는 절판된 지 오래인 조문호 사진작가의 인사동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개정판 발행에도 앞장서 성사시켰다. 최근엔 유홍준 미술평론가와 윤후명 작가, 황주리 화가, 안선재 번역가, 장광팔 만담가, 가수 남궁옥분 등 35명의 ‘인사동 애정담’을 모아 <인사동에서 만나자>(덕주)라는 책도 냈다.지난 9일 서울 경운동 갤러리 씨네에서 노 대표를 만났다.

 

인사동에서 만나자 275P / 20,000원 / 덕주출판사
 

2008년부터 인사동 수운회관에서 유카리 화랑을 했던 노 대표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고 2년 전 폐업한 뒤 지난해 지금의 자리에 다시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이번에 수십명 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원고 청탁을 해 인사동 책을 낸 것도 코로나로 인사동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서란다.1968년 대학 2학년 때부터 우현 고유섭 선생의 책을 사러 인사동을 찾았다는 유홍준 평론가는 1990년대 들어 인사동이 관광거리로 크게 변했지만 지금도 “마음의 고향”인 인사동을 일주일에 두어번 들른다고 책에서 털어놓았다. 가수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림을 인사동에 처음 올리던 날이 “티브이 프로그램 <가요 톱텐>에서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1위 트로피를 받았을 때보다 몇 배의 기쁨이었다”고 적었다. 고교생 때부터 인사동을 드나들었다는 시인 이만주는 ‘인사동 성골은 목순옥씨의 카페 귀천을 드나들었고, 지금은 다 고인이 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채현국 선생을 알고, 지금도 가끔 인사동을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뒤 이런 “인사동의 문화 게릴라”는 50~1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노 대표는 천상병 시인과 의형제를 맺기도 한 소설가 고 이외수 선생 부부가 말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인의 부인에게 거금(3천만원)을 건넸다는 일화도 전했다.

인사동이야기 / 250페이지 / 25,000원 / 눈빛출판사

“코로나로 망해 인사동을 뜬 자영업자들이 많아요. 인사동을 다시 살려 예전처럼 즐겁게 놀면서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마음으로 책을 기획했어요. 인사동에서 우리를 가르쳐준 훌륭한 어른들이 많이 떠나셨지만 지금도 구중서 신경림 구중관 염무웅 선생님 등이 계시죠.”이날도 인권운동가 서승 선생과 함께하는 모임 약속이 있다는 노 대표는 인사동을 두고 대학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한테 인사동은 대학이었어요. 1985년 귀천에서 채현국 선생님을 만난 이후 마지막까지 따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요. 끝까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분이죠.” 인사동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뭐냐고 하자 그는 “남과 함께 즐겁게 살자,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실천하며 살자”라고 답했다.

 

 

건달할배채현국과 친구들/ 15x22cm 288면 14,400원 출판피플파워

인사동 사진집·채현국 추모집 이어최근 ‘인사동에서 만나자’ 기획출간

작가·만담가·가수 등 35명 글 모아“선생님들처럼 후배들 밥술 사야죠”

 

그의 공식 학력은 초등 3년 중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10대 중반 때 학생잡지 <학원>에 실린 최인호 청춘 소설을 보며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 만 21살에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사상전집 외판 일을 시작했고 그 뒤로 월간 <객석> 영업사원과 출판사 영업부장, 잡지사 광고부장 등을 거쳤다. “삼성출판사 전집 월부값을 갚으려고 그 전집 외판 일을 시작했죠.”그는 지금도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단다. “귀천에 붙어 있을 때 천상병 선생께서 저에게 ‘놀지 말고 시 몇 편 써 오면 <현대문학>에 실어주겠다는 말씀도 하셨죠. 하지만 그때 저는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었죠. 죽기 전에 서정인·윤후명 작가처럼 깊이가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 생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서를 많이 했죠.”그는 천상병 시인 생전 10년 동안 제자로 살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분의 시처럼 천진하고 순진무구한 인간적인 모습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천 시인은 날카로운 통찰력도 있었어요. 제가 춘천에서 병간호를 하며 일본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책을 보니까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네가 우치무라를 아느냐고 하시더군요.”노 대표에게 인사동은 “자연스럽게 놀고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고 민병산 선생이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에서 80년대에 인사동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하신 말씀이 ‘인사동은 생산적이야’였죠. 여기는 전시 예술이 번성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재미나게 즐기고 배울 게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공부도 억지로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요즘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애정하는 공간이 어디냐고 하자 그는 카페 ‘귀촌’과 막걸리 주점 ‘유목민’, 한정식집 ‘여자만’과 만두 전문점 ‘사동면옥’, 강된장 전문점 ‘툇마루집된장예술’ 그리고 카페 겸 식당 ‘시가연’ 등을 꼽았다.‘인사동 터줏대감의 세대 교체’를 화제에 올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우리 60대가 죽은 뒤에는 이어질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40, 50대라도 많이 오면 좋겠어요. 전에는 선생님들이 공부 가르쳐주고 밥도 사고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해야죠. 돈이 많지 않아도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이젠 우리가 해야죠.”

 

한겨레 /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캄보디아 깜퐁참 가나안 농군학교를 돕는 후원전이 인사동 '갤러리씨네'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20여 년 전 중국단둥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바 있는 김홍명씨를 돕는 전시다.

 

당시 북한사역과 탈북자사역, 북한 지하교실 설립, 농아교회 개척 등으로

지도자 양성을 하던 중 중국으로부터 추방되어 캄보디아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지원은 물론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등 많은 일을 하고 있으나, 코로나 여파로 사정이 어렵다고 한다.

 

후원전이라도 열어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에 ‘갤러리씨네’ 노광래씨가 전시를 기획했으나

도움도 주지 못하고 끝낼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후원전에 출품해 달라는 연락은 받았으나 ‘인사동이야기’ 전시 마무리와 겹쳐 경황이 없었다.

그 후에는 몸이 아파 제 때 작품을 보내지 못한 것이다.

 

건강을 되찾은 20일에서야 사진을 챙겨 부리나케 인사동 ‘갤러리씨네’로 나갔는데,

그 날이 공식적으로는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연장전시를 하게 되었다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전시장 벽에는 박불똥씨 ‘보도지침’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출품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나, 출품자 명단에 없는 강찬모씨와 최울가씨 작품도 보였다.

 

한 해를 보내는 의미 있는 때를 맞아 다 같이 자선의 손길에 동참하자.

어려운 분도 돕고 새 작품도 소장 할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영신씨와 전시장을 방문한 시간에는 조각가 박상희씨 내외도 들렸다.

노광래씨가 내 놓은 모과차를 마시며, 훈훈한 새해를 맞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0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유카리화랑’ 문을 닫은 후 한동안 떠돌았으나

지난 11일 경운동 SK허브 108호에 다시 ‘갤러리 시네’를 개관했다.

개관 기념전으로 “Funny Art, Joyful Life’란 제목의 35인전이 열린다.

 

지난 14일 인사동 사진 자료들을 전해주러 가는 길에 개관전을 볼 수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 신학철, 주재환, 최울가, 강찬모, 박불똥, 장경호, 고선례, 박성남, 박재동, 박상희,

성 륜, 김지하, 서길헌, 이목일, 이흥덕, 최소리씨 등 인사동을 출입하는 현역 작가들을 비롯하여

민병산, 권옥연, 임창열, 강용대, 이존수, 중 광 등 유고 작가 작품까지 걸려 있었다.

 

마침 전시장에는 연극배우 장두희씨가 인사동에 관한 유튜브 방송물을 만든다며

‘아리랑명품’대표 유재만씨와 섬유공예가 최정인씨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나까지 인터뷰에 참가하라지만 손을 내저었다.

제작 의도나 내용도 모르면서 무슨 말을 지껄인단 말인가?

 

인사동을 홍보하는 일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으나,

그보다 어렵사리 문을 연 갤러리나 잘 되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한 달 임대료가 백 오십 만원이라는데, 그 정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개관전 “Funny Art, Joyful Life’은 오는 10월 10일까지 열린다.

 

인터뷰가 끝난 후 유재만씨와 SK허브를 운영하는 개천산업 홍수표회장 사무실로 갔다.

유재만씨가 부지런한 노광래씨의 근면성을 내세워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말이 적은 홍수표씨는 너무 늦게 출근한다는 한마디로 자르며,

홍준표가 집안 조카뻘 된다는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인사동 거리나 돌아다녔다.

그 장면이 그 장면이고 그 풍경이 그 풍경이지만,

비위 상하는 정치 이야기보단 낫지 않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누가 늙은이들을 인생의 도서관이라 말했던가?

인사동 추억의 파편을 건져 올리려 늙은이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인사동에서 시인학교10여 년 운영하다 말아먹은 정동용 시인,

구름에 달 가듯이를 운영하다 달 가듯 떠도는 사진가 김수길씨,

인사동에서 태어난 만담가 장소팔씨의 아들 장광혁씨,

인사동을 번질나게 드나들며 인사동의 추억을 쌓아 온 안동해씨,

천상병시인을 지독히도 따랐다던 허태수목사 등 여러 명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한 지난 24일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어제는 오래된 인사동 사진 자료 찾느라 잠 못 이루다 아침에서야 잠에 빠졌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 것이다.

 

방문을 열어보니 교회 젊은이들이 도시락을 가져왔는데, 벌써 점심때가 되어버렸다.

세수라도 해야 할 텐데, 화장실 들어 간 사람은 알을 까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않았다.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도시락을 카메라 가방에 넣어 부랴부랴 인사동에 나간 것이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인사동을 돌아다니며 추억할 장소부터 살펴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추억하려는 장소는 흔적도 없이 다 바뀌어 버렸다.

빗길을 헤집고 다니는 나그네들의 발길만 분주했다.

 

약속한 인사아트프라자전시장에 갔더니,

일을 주선한 노광래씨가 먼저 도착해 장광혁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사진 찍기가 불편했지만, 당사자들이 추억하는 공간에서 사진을 찍다보니,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짜증스러웠다.

 

인사동에서 40여 년 손수레를 끌고 다닌 분을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정동용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한 자는 여전히 가난할 뿐이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조해인 시인을 만나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축축한 비가 술 생각을 재촉했지만, 허기가 져 더 다닐 수도 없었다.

술안주 삼아 도시락을 까먹으니, 김수길씨와 정동용씨가 차례로 등장했다.

 

분명 술이 약은 약이었다.

배고픔과 짜증스러운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기억에서 불러낸 인사동 벗들을 안주 삼아 옛이야기로 위안했다.

지난날이 그리워지는 인사동의 하루였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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