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종희의 '터널II'가 지난 19인사아트센터’ 2층에서 시작되었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버려진 깡통을 두들기고 오려 붙여 만든 갖가지의 형상들이 화판을 가득 메웠는데,

뻔쩍거리는 화려함 속에 도사린 짙은 그림자가 헤어날 수 없는 터널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화려하고 편리한 삶에 의한 인간 황폐화를 비판하는 시각적 울림은 오래갔다.

3년 전 나무아트에서 열린 터널I’보다 대작들로 이루어져 그런지, 훨씬 강열했다.

 

정말 놀라웠다.

버려진 폐품에 불과한 깡통으로 물질 문명을 비판한 메시지에 앞서,

고지식하게 이루어낸 작가의 노동력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욕망의 배설물인 코카콜라나 커피 같은 깡통에 새겨진 상품의 색깔도 각양각색이지만,

조각 조각의 이미지를 퍼즐 맞추듯 형상화한 치밀함은 미술과 조각을 넘어 과학의 경지를 넘나들었다.

 

깡통의 색깔은 말할 것도 없고 조각 조각 오려 붙힌 방향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것 같았다.

조명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이고 보는 위치마다 달라 보였다.

 

재활용품으로 만든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개의 빤짝거리는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답게 살자는 메시지였다.

 

인간의 욕망이 끌어들인 블랙홀은 빠져나올 수 없는 터널 같았다.

 

때로는 웅크리거나 곤두박질하는 인체에, 해골도 모자라 똥도 벽에 붙어 놓았다.

똥을 자본으로 빗댄 작가의 직설적인 표현처럼 깡통처럼 텅 빈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말 “Yes i can”, , 나는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예, 나는 깡통이로 소이다.

 

아래는 작가의 말이다.

대량 생산된 음료들의 용기인 알루미늄 캔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가볍게 욕망을 채우고 내던져 버리는 찌끼기이자 배설물이다. 우리가 묶여 사는 체제의 똥이다. 가위로 오려내진 캔 조각을 나무망치로 반짝임을 덜어내면, 그로부터 우리가 사는 아파트와 빌딩 숲이 이끌려 들어온다. 이전의 손도끼는 힘차게 골을 내며 달렸지만, 캔 조각들은 둔탁하고 위태로운 기호로 켜켜이 포개지며 화면에 거대한 어떤 형태로 구축된다

 

전시장에서 반가운 분을 많이 만났다.

전시작가인 나종희씨 내외분을 비롯하여 주재환, 김정업, 박진화, 박흥순, 두시영, 김영중, 변대섭, 김보중,

성기준, 김윤기, 김경복, 양상용,  임정희, 이필두씨 등 화단에 내노라 하는 분들을 두루 만났.

 

이날은 동자동에서 초상사진 찍느라 큰 카메라를 들고와 찍어야 할 때 못 찍었다.

전시장을 나오다 김재홍씨를 만났으나 꺼낼 겨를이 없었다.

카메라는 손에 있어야 카메라지, 가방에 있으면 카메라가 아니라고 했던 평소의 말이 생각났다.

 

후회하며 카메라를 꺼냈더니, 약속이나 한듯 고옥룡씨가 나타났다.

 

사진:/조문호

 

나종희의 ‘터널’은 오는 24일까지 열린다.

 

2021.10,6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민중미술의 거장 신학철선생의 포토꼴라주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질곡의 한국현대사로 엮어 낸 포토꼴라주 작품은 지난 10월 6일부터 오는 11일 1일까지 열린다.

 

‘나무아트’와 ‘유목민’을 오가며 벌어진 보름 동안의 전시로 녹초가 되었으나 쉴 수도 없었다.

이어지는 전시가 신학철선생의 포토꼴라주 전이기 때문이다.

 

신학철 선생은 아직도 청년처럼 피가 끓는다.

얼마 전 '인사동 사람들' 사진을 찍기 위해 어렵사리 인사동에 나오시게 했는데,

그 날 핸드폰으로 보여 준 최근작 두 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현대사와 연결된 ‘갑돌이와 갑순이’ 시리즈로, 춘화도 그처럼 힘찬 춘화는 여태 보지 못했다.

온몸에서 힘이 솟구치는 그게 바로 신선생의 열정이고 에너지의 소산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두 남녀의 사랑에 의해 민족 통일이라는 거대 담론까지 만들었다.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희망찬 앞날을 기대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고 선생의 얼굴에는 항상 짙은 그림자가 깔려있다.

우리의 근대사가 가슴 아프듯 선생의 삶 또한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거다.

그 가슴 아픈 한이 그림 속에 배어들어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다.

 

한때 공안당국에 의해 압류된 전시작품 ‘모내기’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도 있지만,

이미 선생의 독보적인 작품세계야 잘 알려져 신학철 선생을 모르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선생의 작품세계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굴곡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번에 보여준 포토콜라주 작품들은 선생의 자전적 체험과 역사의식을 담아낸 소중한 전시임이 틀림없다.

사료로서 사진보다 더 진실성을 가진 매체가 어디 있겠는가?

사진을 채집하고 맥락을 연결하거나 축소 또는 확대의 복사과정을 거치는 등,

종이에 흑백 사진을 오려 붙여 가며 누적된 역사의 층위를 이루어 낸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형성된 틀이 캔버스에 옮겨지며 완전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 포토꼴라주는 캔버스에 옮겨지기 전의 작품으로, 사진으로 치면 필름 원판에 해당하는 셈이다.

선생의 작품가격은 서민들이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싸지만,

소장 가치가 높은 포토꼴라주 소품 한점이 250만원 정도라니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전시가 시작되는 지난 6일 오후 다섯 시경 전시장에 들렸는데, 생각보다 덜 붐볐다.

어느 방송 팀이 촬영을 하고 있었고, 신학철, 이효상 선생 내외분은 손님을 맞고 있었다.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이종승, 송 창, 정영신씨도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아는 작품도 있었으나 처음 보는 작품이 많았다.

역사적 팩트와 작가 내면의 무의식을 긴밀하게 콜라주한 작품에서

작가의 치열한 정신력과 탁월한 조형적 능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개인에게 판매할 작품이 아니라 역사박물관에서 일괄 소장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

아무리 거리두기로 외출을 삼가해도, 틈내어 꼭 한번 관람하시길 바란다.

 

전시 뒤풀이 장소로 정해진 ‘유목민’으로 갔더니

김정헌, 장경호, 박윤호, 황경애씨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춘천에 계시는 황효창화백 내외분도 오셨으나

술 한잔 드시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라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박불똥, 조경연 내외를 비롯하여 송창, 나종희, 방기식, 김진하,

김구, 박세라, 김세균, 장의균, 장 춘 노광래, 최효준, 김이하, 조준영,

황정수, 우문명, 조명환, 이인섭씨 등 많은 분이 오셨더라.

 

반가운 분들이 많은 이 좋은 날, 몸이 편치 않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쉽지만 줄행랑쳤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모처럼 정영신씨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나종희씨 '터널'전을 보기 위해서다.

 

전시장에는 나종희씨를 비롯하여 ‘나무화랑’ 김진하씨,

단양에 사는 설치미술가 김언경씨가 와 있었다.

 

뒤 이어 김재홍씨와 류충렬씨가 나타났다.

 

문명비판적 시각의 나종희씨 작품은 

폐기물인 캔을 납작하게 오려붙여 형상화했다.

알록달록한 발색이 강렬한 시각적 운동감을 주었고,

조명에 의한 반사 각도에 따라 보는 느낌도 달랐다.

 

한 마디로 물질문명에 의해 황폐화된 세상 이치를 말했다.

자본의 똥, 욕망의 바다, 붕괴, 추락, 블랙홀, 혼돈 같은 작품 제목처럼

자본과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블랙홀이자 깊은 터널이었다.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인간성 상실에 대한 메시지였다.

 

난, 형상미보다 고지식하게 이루어낸 노동에 더 의미를 두고 싶다.

예술이란 이름의 화려한 포장보다 사람 사는 노동의 가치 말이다.

민중미술의 한 궤인 비판적 리얼리즘에 초점을 맞춘 그의 작업에서

예술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는 근원적인 질문과도 마주쳤다.

 

반짝거리는 폐기물이 시각적 쾌감을 주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변하는 시각성은 또 다른 재미였다.

때로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체 형상으로 빈민의 몰락을 상징하거나

똥의 형상으로 자본을 탓하는 등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화려함 뒤에 오는 인간의 황폐화를 은유적으로 시사했다.

 

마치 그의 작품에서 깡통처럼 텅빈 인간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전시 서문에서 말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Yes i can”이 떠오른 것이다.

한 때 사회에 풍미된 말 “예, 나는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예 나는 깡통이로소이다”에 빚댄 유모어 같았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전시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캔을 집적한 바탕에 작가가 추가한 사람형상이나 여타 풍경과 같은

이미지의 결합으로 구조화된 화면이 이번 전시 작업양식의 대체적 흐름이다.

그러나 내겐 작가가 인위적으로 추가한 소재나 손맛의 서술적 형상 없이,

캔의 배열만으로 상징성을 확보한 ‘터널’이 인상적이었다.

캔의 부착 방향과 크기에 따른 배치, 그로부터 야기되는 무브먼트와 속도감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묵시적인 형상성이 설명이 아닌 울림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와서다."

 

버려진 폐품을 소비시대 욕망의 배설물로 비판한

나종희의 ‘터널’은 오는 12월 1일까지 열린다.

 

사진:글 /조문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세 가지의 목소리를 내는 특별한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이흥덕의 불안의 에티카’(1)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조신호의 “DMZ로 부터”(1)는 생태환경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민종은 나의 노래’(2), 자연은 자연으로 두라는

각기 자신만의 어법으로 쟁점화 시켰다.



 


작가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비판적 현실이 암울하고 참담할 뿐이다.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정신은 병들었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마치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남이야 죽던 말든, 자연이야 망가지던 말든,

오로지 개인주의적 탐욕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그 비정의 현실을 말하는 기획전이라 뜻하는 바가 크다.



 


이흥덕이 사회를 보는 불안한 시각은 꽤 오래 되었다.

40년 가까이 욕망이 이글거리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사회풍경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불안한 현실을 그려내는 심리 도해로서의 지옥도고, 온몸으로 부대낀 보고서다.

    


 



해골 무덤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 군상들, 구제역에 매몰되는 가축들,

전쟁놀이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처박혀 떨고 있는 사람들, 십자가에 눌린 무력한 예수,

모든 작품들이 지옥이 따로 없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준다.



 


작가의 불안한 증상은 개에 쫒기는 사람으로 동시대적 폭력과 야만을 보여준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단다.

풍자적으로, 때로는 에로티시즘적인 수사학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상을 형상화해냈다.



 


흑백 목탄이나 초록의 유화 모노크룸,

또는 강렬한 색을 사용하여 마치 요지경이나 만화경 속에 들어 있는

무대처럼 몽환적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시의 울산 암각화처럼...




 

근대미술의 시조격인 고야의 동판화집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 뜬다"라는 작품이 있다.(중략) 이흥덕의 그림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요괴를 부정하는 근대도 지나고, 그 유산으로 '찬란한 문명(?)'을 성취한 현대도 100년 이상이나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요괴가 눈 뜨고 횡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흥덕은 그런 동시대를 때로는 겹 눈질로 때로는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의 불안을 임상보고하고 타자와의 미적·정서적 연대를 시도한다. 이는 보편적인 이웃과 더불어 인간욕망과 욕망이 야기한 폭력과 그로인한 '불안'을 바로 보고, 거기에 맞서려는 작가 이흥덕의 저항적 '에티카(Ethica)'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고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썼다.




 

두 번째 작가인 조신호씨는 대학생 신분으로

한강미술관푸른깃발전에 참여한 적도 있단다.

일찍부터 시대정신에 눈 떠 현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미를 추구하는 그림에서 벗어나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다 18년 전, 살기가 어려워 파주로 들어가 DMZ를 접하며

생태환경에 빠지는 일대 전환을 맞는다.

고통 받는 동물들을 치료해 주며 스스로 위안 받았다고 한다.

지구의 환경오염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자각한 후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는 DMZ를 다닐 때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초월적인 힘은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다.

인간을 끝없이 불안한 존재로 인식하며,

그런 문제의식을 그림으로 토해내기 시작 했다.



 


살기를 뻔뜩이며 날개 짓하는 독수리무리, 해골에 박혀있는 나무,

앙상한 나목을 마지막 보루처럼 지키는 조류, 하나같이 섬뜩한 장면이다.

마치 작가의 분노가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진 것 같다.

강렬한 색과 터치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미술평론가 곽대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작품을 보면 영국의 화가 프렌시스 베이컨(1909-1992)을 연상케 한다. 베이컨은 고기와 형상과의 관계를 통해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다. 베이컨 그림에 나타난 인간과 동물은 아름다움보다는 처절함이다. 조신호의 작품에서 종종 비슷한 그림을 발견한다. 동물을 인간의 정형이라고 믿는 베이컨이나 조신호가 혹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고 있다.

    


 



세 번째 작가 이민종이 나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내 놓은

일련의 작품을 보면 우선 나른한 느낌이 든다. 자극거리가 없다.

땅에서 시작되는 삶이란 원래 지루하고 따분하다.

성적인 말로 조루와 반대되는 지루의 상태로

언제 사정해 버릴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을 지닌 채 오래도록 지속된다.

본래 자극을 주는 것이란 쉽게 눈길은 가지만 금방 싫증을 느낀다.



 


마치 드론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풍경은

재현적인 사실주의라기보다 조형화한 산수화 같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아주 높고 치밀한 불완전함이 있다.

무기교의 기교이며, 무기교를 위장한 기교다.

바로 이것이 이민종 풍경화의 매력이다.



 


색을 중첩하는 채색방식이야 서양화지만, 동양화의 관점이다.

미세한 붓 자국으로 눈이 쌓이듯 잔잔하게 찍어 그렸는데,

작가는 사물의 물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물감의 흔적으로 화면 층을 깊게 하며,

붓 자국이 쌓이는 시간을 기다려 공간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형상화해가는 방법이 아니라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있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은 지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은 가능성의 세계이고 봄은 생동하는 계절이기에 선택되었으나, 계절 속 자연은 침묵으로 생명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은 현실 속에서 주변과 자기마음을 조용하고 화평하게 하는 데 있다. 화가 이민종의 정신은 이러한 자연에서 발견한 감성적인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것이다.”고 주성열교수가 적었다.



 


지난 30일 전시를 보러 금보성아트센터를 가야했으나,

그날따라 서울대학병원장례식장에서 열리는 김윤수선생 추모식 시간과 겹친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곳은 포기해야 할 텐데, 기어이 욕심을 부려 더 힘들게 만들었다.




   

먼저 전시장부터 들렸으나 이미 개막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보성 관장과 미술평론가 김종근씨 등 작가들이 차례대로 나와 이야기들을 했다.

객석에는 류연복, 정복수, 이재민, 나종희, 김진하, 김재홍, 김구씨 등

반가운 분들의 모습도 여럿 보였다.



    

 

개막식이 끝나야 전시를 볼 수 있을 텐데, 행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류연복씨가 추모식에 갈 것이냐며 재촉해 온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볼 생각으로 나왔는데.

가보니 추모식도 이미 끝날 직전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이야 만났지만...



 


지난 2일은 아침부터 궁상맞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정영신씨에게 연락해, 전 날 못 본 금보성아트센터전시를 다시 찾은 것이다.

작가 이흥덕씨는 자리에 없었지만, 조신호, 이민종씨가 있었고,

금보성 관장과 사진가 양재문씨도 와 있었다.



    


전시도 찬찬히 돌아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관장실에 들려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마침 서재에 전주의 류휴열씨 도록이 꽂혀 있었다,

! 이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30년 전에 그의 주선으로 전주에서 전농동588번지전시를 연적도 있다.

어떻게 서로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이토록 무심하게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다음에 전주 가면 꼭 한번 만나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금보성 관장께서 내년에 나와 정영신씨에게 전시를 하란다.

난, 형편도 되지 않지만, 전시 같은 건 별 관심이 없으나,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은 한 번 추진해 봐야겠다.

죽기 전에는 동지로서의 계약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꺼번에 세 작가의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전시를 놓치지 마라.

오는 17일까지 금보성아트센터’(02-396-8744) 전관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이제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리는 온통 선거현수막과 유세차량으로 소란스럽습니다.

선거풍토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없습니다. 

거리 유세보고 표 줄 사람이야 없겠으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보다 돈이 선거판을 좌지우지해 왔고,
뽑힌 정치인도 사람보다 쓰레기가 더 많았습니다.

간혹 운이 좋아 사람이 뽑히기도 하지만,
쓰레기장에 들어가면 같은 쓰레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바닥에 자식 놈 발 담구는 게 싫었으나,
그런 구조를 바꾸려면 똥물이라도 뒤집어 써야 합니다.






모든 건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사는 지역이 바르지 않으면, 나라도 바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나 몰라라 뒷짐 진, 스스로가 쓰레기인지도 모릅니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가 유권자를 찾아다니는 구조에서
유권자가 일꾼들을 찾아내는 구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후보 선택에 더 많은 시간을 활애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이니까요.






나 역시 총선이나 대선에 출마한 분들은, 나름으로 결정했지만,
지방의회 출마자들은 공보물 만으로 결정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거대정당 공천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겠지요.
폐지되어야 할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존속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 모든 책임은 모순된 구조에 끌려 온 우리의 책임입니다.

조햇님 역시 작은 정당이지만, 몸 담아 온 '정의당' 공천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구의회에 내세우며, 뒤늦게 각성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힘은 없지만, 무모하게 도전하는 자식을 도우며 감시하려 합니다.
문제는 선거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가진게 없으니, 남보다 더 부지런히 뛰어야겠지요.
선거유세 차량은 어떻게 구할지 걱정스러웠으나,
햇님이 끌고 다니는 경차를 예쁘게 단장했네요.
당원들도 열심히 도와주고요.
지인들의 격려와 성원도 따랐습니다.






지난 25일에는 사진가 하재은, 정영신씨와 조준영 시인이
조햇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여 힘을 실어주었고,
화가 나종희씨와 장봉숙선생의 성원도 있었습니다.
페북을 통해 힘을 실어주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결정은 은평구민들이 하겠지만,
제대로 알려 당선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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