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것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힘든 세상사, 어쩌면 죽음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겠다.

난, 초상집이 잔치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문상객의 슬픈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까지 만들어 두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망자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다.
슬픔도 잠시 뿐, 쉽게 잊어버리고 좀처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다.





흐르는 세월에 잊혀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건망증 환자다.






얼마 전, 인사동을 사랑한, 한 여인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 가난이 원죄다. 절망의 벽이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삶을 끝낸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것은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다.

가족들이 방관하는 시신은 냉동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태워진다.






돈과 명예를 가진 자의 죽음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지만,

그 여인의 자살은 많은 신문의 어느 한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만 무성하지, 가진 것 없는 낮은 사람은 죽어서도 외면 당한다.


더러운 세상, 저주의 굿판이나 벌일까 보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을 등진 정성애씨는 참 착한 여자였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인사동 ‘유목민’에서 찍은 사진이 그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필이면,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뿌리친 소녀의 한에 버금가는가?
담배 연기속의 애잔한 웃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연히 그녀 사진을 만나, 그리운 분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문디 자슥아~ 문디 자슥아~”를 연발하던 천상병 선생은 윙크하고 계셨다.

노자돈 받아 막걸리 사 드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을 기웃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씀 없이 웃으시며, 허름한 봇짐에서 붓글씨를 꺼내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유분방한 선생만의 필체는 오래된 인사동 가게라면 부적처럼 붙어있다.






선배들은 챙겨주고, 후배들은 다독거리던 ‘민예총’의 거목 김용태씨도 반겼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바지춤을 추켜 세우며 부르던 청포도사랑이 듣고 싶어진다.

저승에서라도 재기의 깃발 올리는 '민예총'에 힘을 실어주길 부탁한다.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동수선생은 점심 먹자는 전화를 가끔 하셨다.

인사동에 작업실이 있을 때인데, 선생께서도 사무실을 인사동에 두었다.

만나기만 하면 인사처럼 하시는 말씀이 조군 사진 값을 줘야 할텐데...”였다.

인사동 사람들전시 후, 선생사진을 전해 드렸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 오셨던 이계익 장관도 보고 싶어진다. 
노 풍류객의 아코디온 소리가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민영시인과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누는 밀담은 무엇이었을까?





혼 술로 속세를 마감한 적음선사도 내 눈에 밟힌다.

땡초처럼 살았지만, 마음은 깊다. 그가 기거한 '일소암'에서만 볼 수 있는 속내다.

정선 '만지산축제'에서 불렀던 '긴머리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중이 부른 노래라 다들 배꼽 잡았지만, 나는 슬펐다.






별을 그리다, 별 따라 간 강용대 화백,

인사동에서 일원짜리 동전 가진 사람에게 십원짜리로 바꾸어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사동 거지 까딱이를 반기며, 대작해준 유일한 술 친구였다.

김용문씨의 '옹관장전' 퍼포먼스에서는, 왜 온 몸을 칭칭 감은 시신 역활을 자처했을가?

일찍부터, 더러운 세상 살고 싶지 않았나보다.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김영수는 성질 한번 고약하다.

그는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성격이다.

괴팍한 그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 가다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도 당했다.

장례식장에 구급차 타고 갔던 귀 막힌 사연이다.





 

문영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지인들 전시에는 빠지지 않는 의리파다.

그가 그린 심상석을 보여 달래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더니,

결국 죽고 나서 모든 작품을 보여주었다.

저승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선생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던 '귀천'의 목순옥 여사 모습도 안스러웠다.

천상병 선생 기리는 사업을 그렇게 악착스레 밀어 붙이더니, 결국 빚더미에 오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돈을 못 구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위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가련한 분인데...





온갖 기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중광스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만나뵈러 댁에 갔더니, 조기를 갈비처럼 뜯어 드시며 어린애처럼 식탁을 어지럽혔다.

사진처럼, 허접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선 들통에 가득 담긴 먹물을 샤워하듯 온 몸에 부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자우지간 괴짜였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도 그립다.

인사동 카페 '산타페'에다 양주를 맡겨두고, 술 값 없으면 그 술 마시라는 멋쟁이다.

자신을 위해선 남에게 부탁 한 번 않지만, 어려운 친구를 위해선 손발 걷어 부친다. 

자칭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시다. 






온 몸을 비틀며 시를 토해낸 이선관시인,

공단 폐수에 썩어가는 바다를 절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썩어가는 인간들 정신에 통곡했을 것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인사동을 떠돌던 유랑객 이종문씨는

대마초 한 모금에 세상 시름 다 녹이며, 아름답게 살다 떠났다.





정남규와 홍수진은 둘 다 병들어 떠났지만, 죽는 방식은 달랐다.

정남규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지만, 홍수진은 병원에서 끌려갔다.

다들 정남규를 나무라지만,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홍수진의 시 처럼,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이다.
민속극과 인사동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사셨지만, 허허롭게 떠난 것이다.

넋전춤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는 제자 양혜경씨가 있어 그나마 위안된다.






그러나 죽는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병석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
어눌한 말로 낄낄 거리던 이청운화백 모습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더라.






우리 모두, 그리운 사람들 추억이나 씹자.
죽는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4일 동자동 골목의 가게 앞에서 김용태씨가 술 판을 벌이고 있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걸리 한 잔 권하며, 안주로 깎아 놓은 참외조각을 나누기도 했다.
지나가는 나에게도 한 잔하라며 눈짓을 했다.


그는 오늘 갖고 나온 팔 만원을 노숙자들에게 다 풀었다고 한다.
여러 노숙인 에게 나누어주었으니, 대개 술값으로 잘 썼을 것이다.
김용태씨는 노숙자들에게 구세주다.
돈 팔 만원으로 어디에서 그런 기쁨을 나눌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의 행색 역시 노숙인과 다를 바 없는데, 돈은 어디서 나는지 물어보았다.
오래전 은행에서 퇴직하며 받은 퇴직금으로 쓰고 있는데, 그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자신도 쪽방 달세를 내지 못해 노숙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손이 부어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에도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여의도에서 열렸던 기초연금 기자회견장 다녀오느라, 힘들어 그냥 헤어졌으나,
다음에 만나면 그의 삶의 철학이나, 지난 이야기를 물어 볼 작정이다.

스스로 선택한 동자동의 삶이 때론 힘들기도 하지만, 이런 분을 만나면 힘이 솟는다.
모두가 극락을 향한, 저승의 문턱을 두드리는 사람들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밤늦게 술 마시고 집에 가다보면 즐거운 일도 종종 만난다.
돈 냄새에 인사동이 싫어도, 옛 친구들 만 날 수도 있고, 아직은 인사동 낭만이 남아있다.

인사동 밤안개 여운이도, 민족 머슴 용태도, 양아치 영수도 다 가버렸지만,
그래도 술집 풍류는 남아 있더라. 여운이가 자주 간 섬에는 ‘유목민’이 남았고,
용태 남은 자리는 ‘풍류사랑’이 있는데, 영수 자리만 오간데 없네...

다 부질없는 세상, 혼자 취해 밤 늦은 인사동 거리를 허우적거리며 나오니,
외국인 넷이 연주를 하는데, 무슨 곡인지도 모르면서 신바람 나 엉덩이를 내 둘렀다.
왠 외국여자도 덩달아 엉덩이를 흔들며 파랑새 한 장을 돈통에 집어넣었다.

이제 인사동을 즐기는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그 들이 인사동사람들이다.
밤늦게 가끔 인사동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보아 여행객은 아닌 것 같았다.
직업으로 하는지, 노는 게 좋아 하는 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연주하였다.

인사동의 밤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풍류사랑’이 인사동에 문을 연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이곳은 96년 한학자 최동락씨가 차린 학당이자 대폿집이었다.
걸죽한 올갱이 탕이 좋아 가끔 들렸는데, 매주 월요일은 논어 공부도 했다.
장소는 옛날 ‘실비식당’이 있던 골목으로, 인사동8길 끝집이다.
‘사동면옥’을 지나 ‘대감집’을 꺾어 막다른 골목에 있는 집이다.

그런데, 단골만으로 운영하기엔 힘이 부쳤는지, 3년 전 점포를 넘겨버렸다.
그 뒤 콩으로 만든 두부음식 전문의 술집이었으나, 그 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몇 일전, '민예총'의 대부였던 김용태씨의 딸 보영이가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운현궁 옆 골목에 있던 ‘낭만’이 헐려 인사동으로 진출했다는데,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사동에 죽칠 곳이라고는 고작 ‘유목민’ 뿐이었는데, 한 곳 더 생긴 것이다.

일단은 술꾼들의 입맛을 잡고 있는 보영 엄마의 안주 솜씨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경호씨로 부터 몇 차례 전화는 받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들리지 못했다.

지난 주말 13차 촛불집회 행사장에서 만난 장경호씨가 오늘 저녁은 ‘풍류사랑’에서 먹기로 했으니,

8시까지 그 곳으로 오라고 했다. 광화문광장은 눈이 내려 온 종일 돌아다니려니 힘에 부쳤다.

더구나 땅까지 미끄러워 다리에 신경이 쏠려 그런지 어깨까지 땡겼다.

시간 되기가 무섭게 인사동 ‘풍류사랑’으로 갔더니, 보영이 모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방안에는 이종률, 성기준씨 일행이 있었고, 밖에는 술상만 여러 군데 차려놓았더라.

‘민미협’에서 예약한 자리라기에, ‘광화문미술행동’팀 자리로 알고 퍼져 앉았다.

그들도 ‘민미협’ 맴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오면 탕을 끓이려고 기다렸더니,

방에 있던 성기준씨는 민미협’ 총회가 늦는 모양이라며 먹던 술과 안주까지 챙겨 주었다.

광화문에서 사진 찍던 정영신씨까지 불러 언 몸을 녹이는데, 예약한 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최석태씨를 비롯하여 박홍순, 김치중, 천호석, 최연택, 김영중, 나중기, 백창흠, 이재민씨 등

대부분 아는 분이었으나, 미술행동 팀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영신씨는 좌석이 부족해, 자기가 끼일 자리가 아니라며 먼저 일어났다.

난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 자리를 지키고 앉았으나,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다른 때처럼 광화문 ‘남원추어탕’에서 식사를 할 것이었다면,

미끄러운 길 따라 인사동까지 오지 않아도 될 것을, 왜 잘못된 정보를 주었을까?

추측컨대, 이인철씨가 회장으로 있는 ‘민미협’ 모임을 기록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낭만’이 인사동 ‘풍류사랑’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전해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인사동 풍류를 소개해 온, 나 역시 늘 숙제로 남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풍류사랑’은 '민예총'에 소속된 작가들의 아지트로 자리잡았다,

이 글을 올리는 중에도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인터넷에 떴는데,

신학철, 임옥상, 김정헌, 박재동, 박현수, 유홍준, 민정기, 박불똥, 이인철씨 등 명사들이 잔득 모여 있었다.

그래도 모르는 분은 한 번 들려 볼만한 주막이다.

인사동 구석에 위치해 젊은이들이 판치지 않는데다, 음식이 맛깔스럽다.

인사동의 마지막 풍류이기도 한데다, 운이 좋으면 예술계의 대가들과 친분도 나눌 수 있다.


주소는 종로구 인사동8길 12-7이고, 전화는 02-739-0809, 010-2770-8022번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사진은 지난25일 김보영씨가 찍어 페북에 올린 사진을 스크랩했다.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1980년 초 결성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단체 이름에서부터 기존 미술판에 충격파를 던졌고 그해 10월17일 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산하 미술회관에서 창립전 대관을 하루 전날 일방취소하면서 빚어진 ‘촛불전시회’ 사태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진은 82년 서울 덕수미술관에서 열린 ‘현발’의 세번째 정기 작품전 ‘행복의 모습’ 때로, 왼쪽과 가운데 두 그림이 고 김용태 선생의 출품작이다. 사진 김정헌 이사장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현발’ 창립때 야인풍모 그와 첫 대면
토론땐 경청, 뒤풀이선 좌중 압도

 

80년 창립전 ‘전시불가’ 통보
전기 차단하자 촛불 들고 관람
매년 ‘주제전’ 열어 세상 향한 발언
84년 용태형 ‘DMZ’는 불후의 명작

 

‘붉은색 들어갔으니 용공작품’
전두환 정권 노골적 탄압
오윤 세상 떠나고 몇몇은 유학
10년만에 해산…구심점 ‘민미협’으로

 

■ 현실과 발언의 태동

 

나와 ‘용태 형’의 인연은 순전히 1979년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에서 시작됐다. 바로 전까지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일한 그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새로운 동인 활동과 관련해, 맨 처음 나를 찾아온 이들은 그해 가을 최민과 오윤이었다. ‘부마항쟁’ 등 유신 말기의 어수선하던 시절 새로운 미술 운동이 필요하다면서 같이하자고 권유했다. 그들과는 이래저래 자주 어울리는 사이라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는 동의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누가 누가 같이하는가?”

 

‘미술과 생활’에 자주 기고하던 평론가 원동석이 80년 ‘4·19혁명’ 20돌을 맞아 미술 분야에서도 기념 전시회를 열자며 처음 모임을 발의했다고 했다. 그 취지에 동의한 이들은 서울대 쪽으로 최민·성완경·김경인·오수환·오윤·최민 등과 홍대 쪽으로 손장섭·김정수 등이라고 했다. 그밖에 ‘미술과 생활’ 출신으로 윤범모는 알겠는데, 주재환, 김용태는 생소했다.

 

그해 12월 초 ‘현발’ 첫 회합이 있었다. 주재환과 김용태는 첫눈에 봐도 온갖 풍상을 겪은 야인의 풍모였다. 우리는 곧 의기투합했다. 물론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해 비상계엄을 발동했던 무렵이라 만나도 제대로 교분을 쌓을 틈도 없이 헤어지곤 했다.

 

그러다 80년 초 ‘현발’이라는 명칭과 ‘새로운 미술’을 선언하는 창립 취지문이 완성되면서 자연히 모임은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단어 자체로 제도권 미술에 일격을 가한 명칭 ‘현발’은 이론가들의 작품이었다. 특히 원동석·최민·성완경·윤범모의 활약이 컸지만 아마도 69년 서울미대 시절 오윤 등이 시도했다 좌절된 ‘현실동인’의 영향도 컸으리라. 특히 내게 ‘발언’이라는 단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와우~ 미술이 발언한다?” 기껏해야 ‘미술은 표현’이라는 정도에 머물러 있던 나였으니 더욱 그랬다.

 

그 무렵 회원 추천을 통해 심정수·권순철·백수남·노원희·김건희·임옥상 등 8명이 새로 가세했다. 그 가운데 이상국, 여운 등이 탈퇴한 대신 뒤이어 이태호·강요배·이청운 등이 가입했다.

 

 

■ 현발 회원들의 의식화

 

80년 초 동인 회원들이 확정되자 현발은 정기 모임이나 야외로 엠티(MT)를 나가기 시작했다. 모임 때는 주로 ‘현실’과 ‘발언’에 대해 이론가들이 발제하고 전체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미대 시절에는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의식화하는,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미술에 인문학이 접속되는 순간이었다. 예컨대 원동석의 ‘현실과 미술의 만남’이나 성완경의 ‘발언의 독점과 관용구의 타락’ 등이 대표적으로 회원들의 정신세계를 무장시키는 주제였다.

 

그러나 현발의 진면목은 이런 토론을 통한 의식화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육화시키는 뒤풀이 자리였다고 하겠다. 그 뒤풀이에서 오윤과 ‘용태 형’이 슬슬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윤의 뒤풀이 재능은 익히 알았지만 새 인물이 나섰으니 바로 그가 ‘용태 형’이었다. 오윤처럼 레퍼토리가 많지도 않았다. 오로지 ‘산포도 처녀’ 노래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밖에도 심정수의 샹송, 민정기의 ‘무너진 사랑탑’, 주재환의 ‘여보야 당신아…’, 임옥상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등 회원들의 육화된 장기들은 끝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현발 회원들이 곧잘 벌이던 토론 때 ‘용태 형’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대신 그는 행동에는 빨랐다. 현발의 야외 엠티나 지식산업사에서 했던 정기 모임이나 뒤풀이 술자리는 모두 그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입담이 세고 다들 한가락씩 하는 회원들을 이끄는 모습은 탁월한 야전사령관을 연상케 했다. 그의 친화력은 야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그 무렵 밥벌이로 <조경>이라는 전문잡지사에서 출판 일을 하고 있었는데 현발의 전시회 팸플릿이나 회지 <그림과 말>, 다이어리 <’85 그림일지>, 오윤의 전시회 도록과 판화달력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출판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 20세기 첫 촛불 전시회

 

현발은 80년 초 출범 때 이미 10월17일 창립전을 열기로 하고 문예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미술회관(지금의 아르코미술관)을 전시공간으로 대관해두었다. 바로 그 유명한 ‘촛불 전시회’다.

 

마침내 개막 전날 회원들은 저마다 설치할 작품을 들고 미술회관에 모여들었다. 진열 장소를 배정하고 하나둘 작품을 개봉하고 있는데 대표 자격으로 관장을 만나고 온 심정수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전시 불가’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추상화가 아무개씨가 “어찌 이런 단체의 전시를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관장이 긴급조처를 내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회원들의 항의에 관장은 다음날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공식적으로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튿날 운영위원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상계엄하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시회를 찾아온 적잖은 지인과 관객들은 미술회관에서 전기를 차단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급히 마련된 촛불을 들고 마치 순례자들처럼 전시장을 돌 수밖에 없었다. 아마 20세기 최초의 촛불 전시회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창립전은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3주 뒤 다시 열 수 있었는데 화랑주 박주환 사장의 호의 덕분이었다.

 

아무튼 현발의 창립전은 모더니즘 단색 계열의 추상화가 판을 치던 미술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특히 미대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이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세대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80년대 초반 수없이 생겨난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젊은 미술단체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후로도 현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엠티를 통해 서로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81년 <도시와 시각전>을 비롯해 <행복의 모습전>, <6·25전> 등 해마다 주제전을 열어 미술계를 향해 또한 세상을 향해 발언을 퍼부었다.

 

‘용태 형’도 그 시절엔 해마다 유화 등으로 회원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만 워낙 강렬한 작품들이 쏟아진 탓에 도드라지게 주목을 받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84년 ‘6·25전’에서 불후의 명작이 나왔으니, 바로 동두천 사진을 모아 만든 ‘디엠제트’(DMZ)다.

 

초기 현발의 주제전이 사회 현실을 집중 조명하기 위한 방식의 하나였다면, 82년부터는 분과별로 소그룹을 나눠 그 결과물을 내놓기도 했다. 판화분과에서는 <현실과 발언 판화전>을 열었고, 주재환·김용태가 속한 출판분과에서는 처음으로 회지인 <그림과 말>과 열화당의 호의로 무크지 <시각과 언어 1, 2>를 펴냈으며, 내가 속했던 벽화분과는 공주교도소 안에 <꿈과 기도>라는 대형 벽화(3m×30m)를 그렸다. 이런 시도는 모두 소통 부재의 미술계에 대중매체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과 해산

 

창립전부터 제도권 미술계의 ‘눈엣가시’로 찍힌 현발은 전두환 정권에는 이미 불온한 집단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82년 정기회원전 <행복의 모습전>을 열 무렵 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문공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주무 국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현발 회원들을 중심으로 안기부에서 미술인들 내사를 해왔는데 불온한 작품들에 대해 조처를 취해야 되겠다’고 협박성 통보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으로부터 우리 작품에 대한 유권해석도 이미 받아놓았다고도 했다 . 붉은색만 들어가면 거의 용공작품이라는 식이니, 참 황당무계했다. 해당 작가는, 회원으로는 임옥상, 신경호, 노원희 등이고 비회원으로는 김경인, 강광, 홍성담 등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표가 나서서 더 이상 다치지 않게 문제 작품들을 자진해서 문공부에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당신이 해당 작가들에게 직접 요구하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그 국장과 해당 작가들이 모여 협의를 했고, 수사를 종결하는 대신 작품을 문공부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일종의 강압적인 압수보관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와 신경호 등 대학교수 회원들에게 교육부를 통해 경고장이 날아왔다. 공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위의 김정헌은 ‘추상표현주의’를 표방하는 불온한 단체에서 활동하여… 이를 엄중 경고 조치하고 보고할 것.” 그때 현대미술관에 압수보관당했던 작품들은 몇해 전에야 작가들 품으로 돌아왔다. ‘압수보관 작품 반환 기념전’이라도 열어야 했는데 때를 놓쳐 아쉽다.

 

그 뒤로 현발은 해가 거듭할수록 동력이 줄어들었다. 82년 박재동, 83년 안창홍·정동석·박세형·최병민·김호득, 85~86년 박불똥·안규철 등 해마다 신입 회원이 들어오긴 했지만 최민, 임옥상, 백수남 등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오윤은 86년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렇지만 후배 그룹들이 새로운 집단 동인 활동을 벌이자, 긴장한 정권은 85년 서울미술공동체에서 주관한 <힘전>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현발 회원들도 미술운동의 선배로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1월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체가 바로 민중미술운동의 구심체로 결성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였다. 김용태, 원동석, 손장섭, 주재환 그리고 내가 민미협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그때부터 ‘용태 형’은 민중미술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마침내 88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창설의 주역으로 나아갔다. 현발에서 주로 뒤풀이를 조직했던 그는 민예총의 건설과 운영에서 앞풀이 내지 본풀이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86년 <제6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이어 88년의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전>을 마지막으로 <민중미술을 향하여>라는 거창한 보고서를 출판한 현발은 10년 만에 자진 해산했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고 김용태 선생 특유의 ‘형·아우 화법’은 이질적인 예술인들을 한데 모이게 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사진은 1983년 1월 충북 청원군 문의마을로 엠티를 가기 위해 행정선을 타고 대청댐을 건너고 있는 ‘현실과 발언’ 동호인들로, 왼쪽부터 김용태, 한 사람 건너 민정기, 이태호씨의 모습. 사진 김정헌 이사장 제공

 

경상도 사나이의 화법…누구하고나 ‘형님, 아우’

 

 

 

‘용태 형’ 매력은 친근감 있는 호칭
상대에 존칭 붙일때는 되레 긴장

 

“나에게 김용태 선생님은 언제나 ‘용태 형’이었다. 10년이나 선배였는데도 언제나 ‘형’이라 부를 수 있었던 건, ‘선생님’이란 명칭이 주는 거리감, 민중운동이 줄 수밖에 없는 거대한 무게를 ‘용태 형’이라는 친근한 호칭이 단칼에 없애버렸기 때문이었고, 형도 그런 느낌으로 후배들을 대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미술평론가 심광현) “용태 형은 두번째 만나는 사람에게는 선배건 후배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김없이 반말 투로 내려서 형, 동생처럼 친밀감을 증폭시켰다.”(판화가 홍선웅)

 

“고등학교 교직생활을 20년 넘게 했던 까닭에 ‘선생님’이란 호칭이 습관이 된 내게 ‘흥순아~!’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용태 형이었다. (…) 가끔은 ‘내 나이가 몇인데’라며 불평하는 후배의 소리도 들었지만 결국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만다.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을 우리 진영에 끌어들인 ‘용태 형’의 매력과 흡인력이 바로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화가 박흥순) “과연 명실상부하게 ‘형님’이라 대접할 만한 인품을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오직 단 두 명밖에 만나지 못했으니, 그중 손위가 바로 김용태다.”(화가 박불똥)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43명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 김용태 선생에 대한 첫인상과 함께 호칭부터 남다른 그만의 화법을 회고한다. ‘용태 형’, 1980~90년대 민중문화운동판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라고들 한다. 그 시절 사석에서 한번이라도 그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그렇게 불렀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도 “그는 발이 넓고 사람 사귀는 데 천재였다. 나는 김용태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누구하고나 형님, 아우였다”고 기억했다.

 

 

그래서인지 이름과 얽힌 재미난 일화도 여럿 남겼다. 80년대 초 ‘현실과 발언’ 초기 정기모임에 종종 어울린 화가 노원희는 어느 날 뒤풀이 찻집에서 나눈 ‘말린 음식 이야기’를 책에 소개해놓았다. “용태 형이 뭐라 뭐라 떠들 때였겠지, 갑자기 오윤 선배가 특유의 장난기 담은 눈빛과 배시시 웃음 띤 얼굴로 ‘용태야, 니 용 말린 거 용태 아이가?’ 한다. 일순 좌중에 웃음보가 터지고 용태 형은 말이 막혔다.”

 

김용태는 왜 이런 화법을 구사했을까. 지난해 투병 중 내내 구술을 진행했던 큐레이터 전승보는 “그 이유를 용태 형이 직접 설명한 적은 없다”며 “아마도 ‘부산 사나이 기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경상도식 친근감의 표시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용태 형’이 갑자기 상대를 존칭을 붙여 부를 때는 “겁나는 사태”가 빚어지곤 해 모두들 긴장했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동시 출마’로 야권이 분열되자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안의 하나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을 추대하는 운동에 앞장섰고 고 김용태 선생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87년 12월12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민중 대통령 후보 사퇴 발표를 앞둔 연단에 설치된 백기완·장준하·김구 선생의 대형 걸개그림. 사진 류연복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⑧

1987년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의 집권 연장책인 대통령 간선제와 유신잔재 헌법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전국민적 저항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이른바 ‘6월항쟁’을 일구어낸 해였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군사반란 동업자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선언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끓어오르던 국민의 독재타도 열망을 일단 무마하였으니 ‘6·29선언’이 그것이다. 승리에 도취한 일단의 사람들이 이를 두고 아예 ‘6·29 항복선언’이라 규정하기도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누구인가? 광주의 학생과 시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자들 아닌가? 그들 독재자들이 행한 통치방식은 ‘정치’라기보다는 줄곧 국민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이거나 ‘정보공작’ 아니었던가? 대통령 직선제 전격 수용이 위기탈출용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라 항복을 가장한 기만적인 깜짝쇼였음을, 그만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해 7·8·9월,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면서 한국 사회 진보논쟁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으나,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 전선에서 대담한 투쟁과 협력을 함께 해온 야권 지도자 김대중·김영삼, ‘양김’이 각기 독자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대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서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동안 그토록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싸워왔던 재야 운동권이 ‘양김 동시 출마’라는 뜻밖의 사태 앞에서 균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쪽은 ‘디제이’가 경륜이 높고 좀더 진보적이므로 그를 ‘비판적으로 지지’(비지)하여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와이에스’가 당선 가능성이 더 높으며 정권교체의 반작용이 덜할 수 있으므로 그가 후보가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디제이를 지지하는 쪽은 이른바 ‘4자필승론’(노태우·김종필·김대중·김영삼 4자가 출마하면 호남과 민주진영의 합세로 디제이가 필승한다는 선거공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독자출마 주장을 편 것에 비해,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쪽은 독자출마를 내세우기보다는 두 분이 어떻게든 합의해 단일후보를 내는 것이 좋다는 ‘단일화’ 명분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비지’ 그룹의 시각에서 보면 단일화론은 디제이보다는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호남 출신이었고 만약 두 분 중 누구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진보적 시각에서 당연히 선택지점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양김이 따로 출마하면 반드시 패할 것으로 예측했기에, 누가 되든 반드시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당시 재야 민주운동권의 총결집체라 할 수 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공식 결의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에는 내가 속해 있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민통련의 일원으로 ‘비판적 지지’에 찬성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민문협 실행위원회에서는 대선 방침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용태 형’에게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했더니, 형 역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서 그런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며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국본’은 그해 5월 재야운동권의 민통련과 당시 ‘양김’이 속해 있던 통일민주당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결합한 범국민운동기구로서, 용태 형이 자신의 역량과 인맥을 만들어가게 된 장이기도 했다.


나는 평소 ‘형’이라 부르던 민문협 김종철 상임대표에게 정중하게 연락을 해 언론에 보도된 연유를 여쭙고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민문협 실행위원회 긴급소집을 요구했다. 당시 민통련 대변인도 겸하고 있던 종철 형은,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의에 민문협이 찬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실행위원회의 표결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실행위원회에서 ‘비판적 지지’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예기치 않은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일처리를 신중히 해야만 했다. 민문협의 의결 결과를 민통련 본부로 보내어 ‘비판적 지지’ 방침에 대한 철회를 전달하되, 이것이 재야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종철 형은 자신의 곤란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 감당하고 어김없이 처리해 주었다.


‘양김’의 독자 출마 선언에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졌고
민문협서 ‘비판적 지지’안이 부결되자
용태형은 ‘특급지령’을 내렸다


문익환·백기완…독자후보 준비하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서
백 선생은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박용일·이애주·김용태·최열…
선대본 핵심에 정치인은 없었다

대학로 유세는 선거축제의 절정
수만명의 열망이 출렁거렸다
6월항쟁 ‘민중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한국정치사 첫 정치문화운동이었다


■ 용태형의 특급지령과 민중후보 공작
용태 형과 나는 민문협의 문건이 민통련의 기존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러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용태 형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정치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선을 두어달 앞둔 그해 가을 어느 날, 용태 형은 나를 불러 ‘특급지령’(?)을 내렸다. “양김이 단일화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으니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겠다.” “재야 운동권에서 독자 후보를 내세워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준비를 해라.” 독자 후보라고? 파천황(破天荒)적인 발상이었다. 독자 후보로는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 목사님은 ‘비판적 지지’에 앞장선 분이라 교섭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고는 했으나, 우리 힘으로 대통령 후보를 독자 추대한다는 게 가능할지 사실 좀 막연했다.


그러던 10월31일,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 장내에 뜻밖의 정치선동 전단이 뿌려졌다. 읽어보니 “난관에 부딪친 대선 국면을 보수 후보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백기완 선생을 민중의 독자 후보로 추대하여 돌파하자”는 내용이었다. 재야 인사가 거의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돌연 행사와 무관한 민중후보 추대 전단이 뿌려졌으니 아연 술렁거렸다. 마침 백 선생이 새 신문 창간을 독려하는 축사를 할 차례였는데, 연단에 오른 백 선생은 천하의 굿쟁이(광대)답게 판을 대번에 휘어잡았다. “여러분, 지금 여기 살포된 전단은 분명 누군가의 공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기관의 간교한 공작이 아니라 궁지에 내몰린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요구하는 민중의 공작입니다.” 백 선생은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민중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을 한 셈이었다. 나중에야 그 전단을 뿌린 이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 후배 송운학이었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합(인민노련)인가 하는 단체가 연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본)가 전격 발족했다. 선대본부장에 변호사 박용일, 명예선대본부장에 춤꾼 이애주, 비서실장에 화가 김용태, 사무총장에 환경운동가 최열, 특별보좌관에 판소리꾼 임진택, 대변인에 문학평론가 김도연…. 선대본 핵심 간부에 정치인은 한 명도 끼지 않았고, 거의 다 민주인사와 문화예술인들로 꾸며졌다. 나는 영광스럽게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요즘 대선판처럼 도나캐나 수백명씩 명함 찍어 돌리는 흔한 특보가 아니라 백 후보의 단 한명뿐인 특보였다. 게다가 나는 후보 전용 승용차 운전기사도 겸했다. 백본 진영에서 유일하게 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 김정헌 형이 딱한 사정을 알고 자신의 중고차를 내주어 겨우 두 대가 되었지만, 후보를 직접 수행하는 임무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 한판 문화축제였던 민중후보 선거운동


나는 19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은 정치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핵심들의 면모가 춤꾼·소리꾼·글쟁이·그림쟁이는 물론이요 변호사·환경운동가 등 넓은 의미의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것 자체가 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대통령 후보 자신부터 비나리꾼(시인)이면서 민족문화에 달통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아닌가. 이들 가운데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는 다행히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특히 대학로 유세는 민중(시민)에 의한 선거축제의 절정이었다. 커다란 걸개그림에는 백범 김구와 장준하 선생, 그리고 백기완 후보의 얼굴 모습이 ‘시간적 원근법’에 바탕해 형상화되었다. 분열을 극복해서 기필코 대선을 승리로 이끌어 독재타도를 완결짓고자 하는 염원 하나로 수만명 청중이 운집하여 출렁거렸다. 재정에서 기획까지, 무대 설비에서 집객까지 모든 준비는 비서실장 용태 형과 사무총장 최열의 몫이었고, 현장 진행사회는 특별보좌관인 내 몫이었다. “여러분, 민중 대통령 후보가 돌연 등장하니까 유신잔재 군사독재세력이 잔뜩 겁을 먹고 ‘좌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난폭한 버스기사가 갑자기 핸들을 우측으로 확 틀면 승객들이 어떻게 됩니까? 승객들은 모두 좌경하게 되지요. 여러분, 우리는 똑바로 서 있고 싶습니다. 우측으로 고개가 돌아간 저 난폭한 운전사를 이제 반드시 갈아치워야 합니다.” 수만 청중들이 함성과 환호로 응답하더니 이어 모두 함께 구호를 외쳤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물론 백본의 누구도 민중후보의 당선을 믿고 뛰어든 이는 없었다. 다만 민중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6월항쟁의 승리가 정치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결국 대선 실패로 귀결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후보 단일화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체가 되어 힘으로 민주진영 대선 후보를 단일화해서 6월항쟁의 승리를 국민의 승리, 민중의 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정치문화운동이었다.


백 후보는 ‘양김’의 단일화가 끝내 불가능해지자 대선 이틀 전 눈물을 머금고 사퇴를 했다. 그럼에도 대선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 ‘합법적’ 결과로 인해 군사독재정권의 수명 연장뿐 아니라 수구세력이 끈질기게 존속할 수 있는 토양이 보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김 분열로 인한 영호남의 지역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운동! 이 어려운 일을 결단하고 추진해 낸 주역을 꼽는다면, 용태 형과 최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훗날 그들이 해낸 일을 보면 안다. 용태 형은 대선의 좌절을 딛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해냈고, 최열은 환경운동연합과 환경재단을 꾸려 새로운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2000년 총선 때 부패하고 고질적인 선거판에 큰 충격을 준 낙천·낙선운동은 바로 참여연대의 박원순과 환경연합의 최열, 민예총의 김용태, 문화연대의 김정헌이 함께 기획하고 추진한 정치문화 혁신운동, 다시 말해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그에 앞서 87년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했던 민중후보 운동은 우리 정치사에서 최초의 정치문화 혁신운동,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스크랩/한겨레신문]

 

1987년 민중 대통령 후보와 후보 비서실장으로 인연을 맺은 백기완(맨오른쪽) 소장과 김용태(오른쪽 둘째) 선생이

2013년 4월 고 김영수 작가 추모 사진전에서 함께 한 모습. 사진작가 장영신 제공


백선본 비서실장 맡았던 용태형에
백선생, 유일하게 “이놈아~” 부르고
‘존칭생략’ 용태형은 깍듯이 “선생님”


“용태 형아~ 이놈아!” “네~ 선생님.” 누구한테나 두번째 만나면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한 채 맞먹거나 ‘형 노릇’을 하기로 이골이 난 김용태 선생을 유일하게 이렇게 부르는 이가 있었다. 그러면 용태 형 역시 이처럼 깍듯하게 모시는 ‘어르신’이 있었다. 바로 백기완 선생이다.


“용태 형과 언제부터 아는 사이냐고? 워낙은 김윤수 교수하고 그림쟁이 주재환이랑 먼저 알았지 아마. 그러다 그때 내 비서실장을 했잖아? 그림쟁이랑 맞아떨어지는 일은 아니었잖아? 근데 매사 적극적이고 수틀리면 들이받을 줄도 알고 저돌적이고 ‘앗쌀’한 게 나랑 아주 배짱이 잘 맞았어.”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은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선본) 때 시작된 셈이다. 당시 김대중·김영삼 ‘양김’의 동시 출마 선언 이후 야권의 패배를 우려한 재야와 노동운동 등 진보진영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범국민 대통령 단일후보 추대운동이 일어났다. ‘민중의 지도자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으로!’ 86년 ‘5·3인천투쟁’ 직후 노동해방 노선을 표방하며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일부가 갈라져 나와 형성된 이른바 제헌의회(CA)그룹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처음엔 그런 젊은이들이 민중후보가 되어 달라고 찾아왔드랬어. 그담엔 서울고 운동장에서 열리는 야권후보 단일화 요구 대회에 와달래서 갔더니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지지 편지를 발표하기도 했었지. 그때마다 내 대답은 이랬어. ‘누구한테 차비 한 푼 빌릴 재주도 없는데 무슨 출마냐’고.”


계속 거부하던 백 선생은 결국 ‘민중 대통령 후보 전국추대위’(위원장 이애주)의 요구를 수락해 그해 11월23일 마감 직전 후보 등록을 했다. 백 선생은 그 직후 꾸려진 선거대책본부 때부터 용태 형이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으로 기억했다.


안타깝게도 김용태 선생이 생전에 ‘백선본’ 참여 동기나 의도에 대해 직접 밝힌 기록은 없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실린 구술대담에도 이 대목은 빠져 있다. 대담을 정리한 큐레이터 전승보는 “미처 물어보지 않은 까닭에 선생의 뜻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선거와 정치운동의 경험과 그때 이뤄진 광범위한 인맥이 곧바로 88년 민예총 창립의 동력이 됐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스크랩/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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