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③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세번째로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가 1970년대 후반 함께 일했던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 시절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매일같이 돼지껍데기집 출근도장
용태형·주재환 등 의기투합
술 마시면서 미술과 사회 논하며
민중미술 요람인 ‘미술과 생활’ 창간
백기완 선생도 마포 들러 ‘특강’
술자리서 만난 초짜 예술 이론가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하며
인연 이어가 진보 예술운동 싹 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질풍노도의 시절, 바로 1977년 무렵이었다. 세상은 수상했고, 즉 군홧발만 빛나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우리는 무제한 암울했고, 무제한 마셨다. 아니, 무제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로 지금 과거를 추억해보니, 내게도 기가 막힌 기록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다. 365일의 음주, 그러니까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해, 그런 특기사항이 개인사적 연보에 남아 있다. 77년은 ‘음주운동’의 절정 시기였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렇게 술판에서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단골, 많고도 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요 멤버의 하나로 ‘김용태’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 미술잡지를 만들던 그때였다. 주된 무대는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였고, 때때로 종로통으로, 그리고 무시로 바뀌었다.


나는 ‘용태 형’을 어떻게 만났던가. 20대의 중반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더벅’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라는데, 후배 하숙집에서 얹혀살면서 세월만 한탄하고 있던 괴짜 형이었다. 효창동, 숙대 앞 하숙촌에서 나는 문제의 더벅머리를 만났다. 그는 나의 ‘끼’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낭인 시절의 어느 날 인사동을 걷다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났다.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서 최더벅이 소개한 사람은 또 하나의 유유상종, 즉 김용태라고 했다. 시골스런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이름하여 <프로그램>. 뭐, 프로그램? 매월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소개하는 문화예술계의 안내서라 했다. 비록 작은 판형에 얇은 페이지, 게다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편집, 하지만 잡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과 생활>

월간 <미술과 생활>, 우리 미술출판 역사에 특이한 잡지가 출현했다. 국어 참고서로 돈을 번 세운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김용태의 그 ‘프로그램’ 판권을 인수하여 만든 미술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정기간행물은 허가제여서 보통 사람들은 잡지 발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 잡지를 창간할 때도 기왕의 판권을 인수해 제호만 바꿔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용태 형은 월간지 발행권을 양도하고, 아예 그 잡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자금난이 ‘사장님’을 평사원으로 하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77년 4월, ‘미술과 생활’ 창간호가 나왔다. 특집은 ‘미술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실 속의 살롱 미술로 세뇌되었던 미술인들에게 ‘사회’ 특집은 신선한 충격, 바로 그 자체였다. 창간호가 나오던 그 무렵 나는 ‘특채’로 기자가 됐다. 대학신문 학생기자 출신에, 그러니까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점이 돋보였던가 보다. 물론 용태 형의 소개가 힘을 받았다. 아, 이런, 뭣도 모르면서 술도가니에 온몸을 빠뜨리러 가다니!


마포 시절, 의기투합으로 뭉쳤던 잡지 편집실,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 가족 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넘쳤던 편집실 분위기였다.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보자는 의욕도 대단했다.


우선 임영방 주간의 ‘존재’를 회고하게 한다. 프랑스 박사 출신이어서 ‘임박’(林博)으로 통했다. 저녁나절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포로 퇴근해 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 이미 이름난 마포 돼지껍데기구이 전문, 최대포집은 당연한 순례 코스였다. 어쩌다 발동이 걸리면, 우리들은 ‘임박’의 동네인 홍은동 방석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편집장 황명걸, 그는 해직기자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판매금지로 묶인 창비시선 <한국의 아이들>의 시인이었다. 암흑기 ‘판금 도서’의 저자는 대학가에서 무조건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품이 돋보였던 그를 찾아 어스름 날이 저물면 마포로 출근하는 ‘투사’들이 많았다.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수시로 ‘특강’을 베푼 인사로 백기완 선생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87년 양김 분열 시대에 용태 형이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은 것은, 마포 시절부터 싹튼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는, 신경림, 민영, 염무웅, 정희성, 강민 등 기라성을 비롯해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해직 언론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미술과 생활’의 동지들을 살펴본다. 77년 봄 입사 이후 한 계절도 넘지 않아 황 편집장은 내게 편집차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뭐, 선배들도 많은데, 어떻게? 9월호인가, 아무튼 나는 황 편집장에 이어 차장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자는 김용태 이외 주재환 같은 선배 그리고 김학민, 여기자 몇명이 있었다. 김학민은 민청학련 출신으로 감옥 갔다 나온 뒤 낭인생활을 하다 미술기자가 된 사례였다. 나는 ‘학민 형’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판금도서였던 <노동자의 길잡이>(가톨릭출판사 발행)를 어렵게 구해준 것도 그였다. 노동법을 강렬한 그림과 함께 편집한 그야말로 노동자의 교과서였다. 편집위원 성완경, 그는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여서 그런지 항상 의욕과 발랄함으로 넘쳤다. 단골 필자 원동석과 최민도 신예 비평가로서 역시 마포 출입을 즐겼다.


돌이켜보니, 원동석·성완경·최민 그리고 나, 이들 이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79년 유신독재의 최암흑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의 창립 주동자들 아닌가.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미술그룹, 여기에 작가로서 주재환과 김용태까지 합세하니 미술판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미술 운동, 그 모체라고 볼 수 있는 ‘현발’, 그 ‘현발’의 모체가 마포 시절 ‘미술과 생활’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미술과 생활’은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임영방 관장 시절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민중미술 15년>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나는 마포 시절의 인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마포 시절, 우리들은 민주화 운동에 눈을 떴고, 사실 특급 선생님들로부터 특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실은 물론 술자리였다. 공부하기, 그것을 어찌 하루라도 건너뛸 수 있겠는가.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날은 동네 포장마차에서라도 나 혼자 복습(?)을 했다. 365일 음주운동, 그것의 저력은 80년대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민족미술협의회와 민예총 같은 단체 활동, 혹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용태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내 많았다. 나는 중앙일보사의 <계간미술>을 거쳐, 호암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 개관 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업무 이외 재벌 회사라는 하중은 나의 어깨를 항상 무겁게 눌렀다. 마침 미국 정부 초청으로 북미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내친김에 나는 뉴욕에 눌러앉았다. 장학금도 풍부해 뉴욕의 문화예술계를 만끽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제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인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찾아왔다. 미술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당분간 뉴욕에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창간 작업의 주역으로 용태 형을 추천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듬직한 후원자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격월간 <가나아트>는 상업화랑의 홍보기관지가 아니라 민중미술단체의 기관지 같다는 투정을 들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88년 여름 일시 귀국한 나는 3개월간 ‘중공’ 대륙을 취재여행 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신문 연재는 나의 뉴욕행 발목을 잡았고, 결국 용태 형에게 ‘가나아트’ 편집주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가나아트’는 지금도 미술공부 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향력 있는 미술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용태 형, 그의 널널한 인품은 주위를 항상 환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없는데 그가 있으면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포 시절의 추억, 사회생활 ‘초짜’ 시절 나는 훌륭한 개인교사들 덕분에 사회에 대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도 마포 시절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현발 창립과 그에 따른 주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를 입증한다. 현발 이래 진보적 예술운동 단체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등에서 조직가로서 빛나던 용태 형의 활약은 마포 시절부터 싹이 텄다고 믿는다. 그 시절, 용태 형과 함께한 것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생활’이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미술운동과 음주운동, 그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던 시절, 어찌 마포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365일 술 마시기 운동, 지금 생각해 보아도 훈장과 같은 세월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포 시절의 노도, 그 세월이 그립다. “용태 형~! 한잔 나누고 싶구려.”

 

[윤범모 미술평론가 가천대 교수]




1977년 김용태 선생이 잠깐 일했던 <미술과 생활>의 편집실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79년 말 출범하는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둥지 노릇을 했다. 사진은 83년 1월 충북 대청호 야유회에서 함께한 ‘현발’ 동인들. 왼쪽부터 고 김용태, 김건희, 노원희, 윤범모, 이태호, 성완경씨. 사진 박현수씨 제공


“편집실을 사랑방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일”


‘유쾌한 씨’들 모여 인간미 나누며
수다 떨다가 기획하고 작가 선정


“편집실은 김용태의 사랑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기 바둑을 두고 그러다 밖으로 나가 술 먹는 게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방으로 만들어놓은 거 자체가 일이었다. (…) 이야기 중에 기획이 튀어나오고 필자가 정해지고 작가가 자연스럽게 선정되는 방식은 미술잡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이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1988년 봄 창간된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의 초대 편집장으로, 편집주간 김용태와 함께 일했던 김진송의 ‘증언’이다. “네 마음껏 해봐.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2년차 기자인 그에게 편집장 일을 맡기면서 ‘바람막이’를 자처했던 ‘용태 형’은 자신의 장담을 지켰다.


사실 김용태 선생은 미술작가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예술 관련 각종 잡지의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연말 투병 중에 진행된 큐레이터 전승보와의 구술 대담에서 그 자신이 밝힌 계기는 단순했다. “잡지사 기자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한 일이고, 그때 그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만들었다.”


70년대 초 제대한 그는 72~73년 무렵 뉴욕에서 살다 온 선배의 제안으로 각종 문화계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 동안 혼자서 유지하다가 결국 문을 닫은 뒤 대입 수험생들의 필독지였던 <진학>으로 옮겼다. “그때 ‘진학사’ 편집실은 학생운동권 출신 서중석 덕분에 운동권 수배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76~77년 전후 새로 생긴 월간 <디자인>의 편집차장으로도 일한 그는 “재정난 때문에 막내 기자로 갓 입사한 이영혜에게 ‘약수동 시장골목 음식점에서 떠넘기듯 맡겼던’ 그 잡지가 오늘날 디자인하우스가 됐다”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 뒤에도 <조경> <대학> 등 잡지를 만들던 그는 마침내 77년 봄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참여한다. “특히 번역물이 좋았다. 우리는 그때 너무 목말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말 가뭄에 단비였다. (본사인) 세운문화사의 사장은 잡지에 상당히 관대해 참견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책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면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됐다. 꼭 출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


제목 탓에 공예잡지로 오해받기도 했던 ‘미술과 생활’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을 태동시킨 보금자리로 큰 몫을 했다. 그 뒤 78년부터 그는 ‘동아투위’ 황명걸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한구석을 빌린 ‘관철동 편집실’에서 주재환 선생과 함께 일했다. “먹고사느라 <이대학보> 편집 대행도 하고, 말하자면 편집기획사였다.”


그 시절 인연으로 ‘현발’에 참여한 작가 노원희는 “사무실 간판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미 넘치는 주재환·김용태, 독특하고 ‘유쾌한 씨’들이 나이차를 내던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언사가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의 주인공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김용태(그림·박재동) 선생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아니다. 올해 들어 투병 중에도 회고록 구술을 해오던 그는 지난 5월4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기꺼이 그가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나섰다.
지난해 12월 8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투병을 응원하고자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용사모)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47명은 지난 3월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형>을 펴냈고, 화가 43명은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열어 후원했다.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이들 가운데 20여명이 필자로 참여해 1970~90년대에 걸쳐 민주화운동의 큰 축으로 자리한 민중문화운동사의 주요 마디를 되짚어줄 예정이다. 또 그 마디마디를 술과 차비를 챙겨주며 ‘접착제’처럼 이어준 ‘인간 용태 형’의 일화도 들려준다.
첫번째 필자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2회에 걸쳐 민중문화운동의 시대적 의미와 ‘용태 형’이 차지한 자리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윤범모,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씨 등이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3월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린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에는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한 80여명의 문화예술인을 비롯해 여러 지인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민중문화운동 세대의 잔치판이 됐다. 앞줄 왼쪽부터 부인 박영애씨와 김용태 선생, 황석영 작가, 박현수 교수,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부영 전 의원, 이재오 의원, 원경 스님,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신경림 시인, 임재경 선생,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강연균 전 민예총 공동의장, 문재인 의원 등이다. 사진 장성하 사진가 제공


 문화라곤 ‘시낭송’ 고작이던 시절
‘현실과 발언’ 창립하면서
민중의 삶 예술로 담기로 작심했다


광주학살 뒤에도 용공조작…
재야 투쟁대열 서서히 정비돼
시·노래·춤·걸개 등 문화예술투쟁
그 중심에 용태 형이 있었다


 82년 인제 내린천 여행 계기로
문화·언론·학계·청년층 등
민주화 주력부대 벽 허물어져


용태 형이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그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되짚어보는 연재 기획의 총론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왜 하필 나일까 생각해봤다. 용태에게 정을 느끼는 후배들, 용태에게 신세진 수많은 문화예술인들, 용태에게 술도 많이 얻어 마시고 바둑내기 돈도 얻어 쓴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징역산다고 정치한다고 용태와 살갑게 자주 만나지도 못한 필자에게 왜 총론을 맡기느냐 말이다.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거니 하고 믿는 처지였으니 내 몫이 된 게 아닐까 하고 받아들였다.


필자가 용태를 만난 것은 1977년 연말이 아니었나 싶다. 유신시대 말기 숨막히는 암흑기, 두셋만 모여도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붙던 시절, 대화는 산이나 들로 나가 산개 들개처럼 떠돌면서 나눠야 했다. 잠행의 시대였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불같은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일망타진당하자 한편으로는 낙담을, 한편으로는 더 굳은 다짐들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돌려보고 김남주·조태일·양성우의 시를 읽으면서, 때로는 문익환 어른의 ‘꿈을 비는 마음’을 성래운 선생의 낭송으로 들으면서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행사도 드물었거니와 문화를 곁들인다고 해도 시낭송이 고작이었다. 뒤돌아보면 엄혹하기는 했어도 그때 시대정신은 시와 소설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강만길 선생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77년 말 필자가 2년6개월 징역 만기를 채우고 나왔을 때 함께 모이자고들 해서 동아투위에서 송년회를 열었다. 태화관이라는 중국집에서 모였는데 반유신 인사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민족-민주선언’ 같은 성명서도 낭독하고 술도 어지간히들 마셨다. 백기완·고은 선생을 앞세우고 동아투위 동료들과 김용태·김학민·이신범 등이 9평 청운아파트 우리집에 들이닥쳤다. 용태의 선동으로 고은 선생의 흰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지금은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된 네살배기 딸아이가 “왜 신발에다 물 마셔?”라고 물어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렇게 용태와 인연을 맺었다. 폭압은 질식할 듯 심했지만 그 대응은 아직 떠들썩한 시적 낭만의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 후반을 미술잡지 편집실을 어정거리던 용태는 유신군부독재의 정치적 폭압, 비대해져가는 재벌, 거기에 짓눌린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79년 <현실과 발언> 창립에 참여하면서 불온한 저강도 문화 비정규전을 시작했다.


시대의 담금질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79년 ‘10·26 사건’ 이후 군부 내의 대립 갈등을 예상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가 그처럼 전광석화처럼 감행될지는 몰랐다. 필자는 10·26 직후 계엄령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되어 80년 ‘서울의 봄’도 5·18 광주학살도 감옥에서 겪었다. 살인적인 삼청교육도 대구교도소에서 받았다. 81년 3월 삼청교육을 이수해 ‘순화’되었다고 해서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분명한 것은 ‘광주’ 이전과 이후는 다른 시대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도피중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고 만남도 줄어들었으며 떠들썩한 술자리도 별로 없었다. 늘어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등산 모임이었다. 이름들이 이상했다. 거시기, 머사니, 무명, 바가지 등등. 거시기 산악회에는 이돈명·리영희·송건호·강만길·백낙청·박현채·박중기·김정남·조태일 등 당시 재야의 중심에 있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무명에는 신경림 시인을 좌장으로 정희성·안종관 등 문인, 김종철 등 동아투위 해직언론인들과 김학민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바가지에는 홍성우 변호사를 좌장으로 정태기·신홍범·최병선 등 조선투위 해직언론인과 소장 변호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들은 산에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바가지를 캠프로 삼고 여기저기 비정규 회원으로 기웃거렸다.

그런가 하면 ‘기파’(棋派)가 있었다. 산에 가기 싫어 주로 관철동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진 치고 앉아 바둑을 벗삼고 저녁이면 인사동 대폿집을 전전하는 인사들이었다. 당시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성유보가 한국기원 발행 월간지 <바둑>의 편집을 맡고 있던 연유도 있었다. 여기서 단연 중심 인물은 용태였다. 임재경 선생과 황명걸 시인 그리고 박종태 전 국회의원도 단골이었다. 산파들도 산행을 끝내고 저녁에는 기파들과 한자리에 어울리곤 했다. 값도 싸고 자리도 널찍한 ‘이모집’이 단골이었다.


82년 여름 “우리도 여름이니 남들 간다는 바캉스 좀 가자”는 공론이 돌더니 7월 하순 강원도 인제 내린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문인, 화가, 해직교수, 해직언론인, 제적학생 등 시대와 불화하던 인물군이 어지간히 모였다. 무슨 토론이 되겠는가. 처음부터 술로 시작해서 밤새 술로 지새웠다. 내린천 깊은 골에서 발가벗고 밝은 달밤에 밤새 요즘 말로 하면 캠프파이어를 했다. 고은·조태일·송기원·여운의 광태가 빛을 발하도록 유도하는 몫이 용태의 할 일이었다. 어디서든 용태의 메마르고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슨 대단한 결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풀고 온 뒤에는 모이라면 잘 모이고 얘기하면 합의도 잘됐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모임을 계기로 문화계·학계·언론계·청년층 등 민주화운동 주력부대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듯싶다.


점차 용태의 그 비범한 기획력과 조직력을 발휘할 시간과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시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학교 옥상에서 밧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다가 추락해서 죽기도 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분신을 하고 투신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적학생 그룹을 학림·무림·부림 등 무협소설의 ‘강호제현’ 같은 이름을 붙여서 용공 사건들을 조작해내고 있었다. 이제 80년 광주학살 이래 납덩이 같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휘장을 찢어야 했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김영삼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했고 재야에서는 청년들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부문별 지역별 조직으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조직되었다. 야권과 재야의 투쟁 대열이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민민협에는 민청련이 함께 회원단체로 들어와 있었고 용태가 사무처장을 맡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구성단체가 되어 있었다.


 민문협에는 청년문인·놀이패·노래패·화가들이 운동 현장과 결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와 노래와 춤 그리고 걸개그림 등 문화예술이 투쟁의 주요 부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총참모장이 바로 용태였다. 거기에 지금은 세상 떠난 지 20년도 넘은 김도연이 있었다. 민청련과 민민협, 그리고 민문협의 고리로 용태와 함께 움직인 김도연·박인배·정희섭의 활약이 컸다. 용태는 회의를 하러 민민협에 들르면 조그만 짬을 내서라도 민민협의 사무처장 박계동과 어울려 바둑을 뒀다. 김도연까지 어울려 뒀다. 필자는 일하는 사무실에서 바둑 두는 것에 질색했다. 한번은 바둑판을 문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부영 해직언론인 전 국회의원 -

 

 

1980년대 초 서울 서대문 봉원사 근처에 있던 ‘용태 형’의 집들이에서 김용태(왼쪽) 선생이 특유의 몸짓과 함께 애창곡 ‘산포도 처녀’를 부르 자 후배 화가인 민정기(오른쪽)씨가 옆에서 기타 연주 춤으로 흥을 돋우고 있다.

 

술자리 무르익으면 바지춤 추어올리고 ‘산포도~’

 

백기완 선생도 “용태 형” 불러
노래 열창할 땐 다들 배꼽 잡아
헌정문집 표지도 그 모습 담아

 

 

‘산포도 익어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 떠날 때 소매 잡고/ 뒤따라 서던/ 흙묻은 그 가슴에/ 순정을 남긴/ 산포도 첫사랑을/ 내 못잊겠네.’

헌정 문집 <김용태와 함께한 문화예술인의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제목은 그의 애창곡 ‘산포도 처녀’(1966년, 남상규 노래, 이인권 작곡, 월견초 작사)에서 따왔다. 또 김용태를 아는 모든 이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용태 형”이라고 불렀다. 1987년 대선 때 그가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맡아 모셨던 백기완 선생도 그렇게 부른다. 워낙 감투나 직함 같은 허식을 싫어하던 그가 그렇게 불러주길 원해서였다.

문화예술인 47명이 글품을 모아 펴낸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표지.

 

 

“용태 형의 ‘산포도 처녀’를 언제부터 듣게 되었는지는 기억하기 어렵다. 나름 상당한 훈련을 쌓으시고 이 정도면 ‘현실과 발언’(현발) 모임에서 발표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데뷔하신 것 같다. 어느 날, 음식점 방 안에서 일어서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서 마치 무대에 오르는 것같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산포도~’를 부르는데,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지춤을 배꼽 상당히 위까지 걸치는 아주 촌스러운 스타일을 연출하셨다.”

화가이자 후배인 민정기가 책에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 ‘산포도 처녀’의 기원에 대한 일화를 보면, ‘현발’을 결성한 1979년 무렵부터 ‘십팔번’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현발 모임은 학연, 지연, 작가, 평론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그룹 운동이다. 토론이 시작되면 얼마나 말씀들이 풍부한지 언변과 지식이 너무도 모자란 나는 그저 아무 소리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최민, 성완경, 원동석, 윤범모, 오윤, 김정헌, 임옥상, 노원희, 김건희 등 여러 분들이 포진하여 앉은 술자리가 아닌가. 나는 그저 소주잔만 기울이다가 ‘민정기도 한마디 해봐’ 하면 그땐 취한 김에 용감하게 일어서서 ‘노래라도 한 곡조 불러보겠습니다’ 하면서 ‘첫사랑’을 부르는데 그때쯤이면 대개 무거운 주제를 잠시 멀리하고 재치와 재기, 노래, 입담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여흥시간에는 각자 재미있는 것을 개발해서 발표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는데 … 용태 형의 ‘산포도~’도 이때쯤으로 어슴푸레 기억된다.”

이처럼 ‘용태 형’은 술자리가 무르익거나 토론이 뜨거워지다 못해 싸늘해지면 스스로 벌떡 일어나 오직 이 노래만을 불렀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도 “(용태 형은) 오로지 ‘산포도 처녀’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며 “작은 키에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챔피언벨트를 찬 권투선수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열창할 때는 다들 박수를 치기보다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헌정 문집의 표지로 쓰인 그림도 바로 화가 강요배가 ‘산포도~’를 부르는 용태 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한겨레 /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용태형’의 유언대로 유골은 신촌 봉원사에 안치되었다.

한 때 세들어 살았던 봉원사 사가에 대한 추억들이 많았을 것이다.

봉원사 주변 길들을 돌아다니며 오랜 기억 조각들도 찾아보았다.

저돌적인 성격에 상처받았던 생각도, 잔잔한 정에 코 끝이 찡하기도 했다.

 

 

추모회 때는 ‘용태형’의 정확한 나이를 알게 되어, 실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동안 나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행세하며 항상 동생처럼 대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도 한 살 적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같은 입장이던 김정헌씨가 오죽하면 조사 제목을 “야 임마! 용태”를 추도함“

이라 적었겠는가?

 

 

“이젠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것이 더 서러운 처지가 되었으니,

그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가끔 봉원사에 들려 술 한 잔 올릴테니 저승 소식이나 전해주고,

부디 극락왕생을 누리시게나

 

 


 



















                                              옛날 '용태형'이 살았던 봉원사 집이다










                                                아래사진 두 장은 사진가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이다.

                                            


인사동에서 노제를 마친 '용태형' 시신은 백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인상무상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용태형' 부디 극락왕생 하소!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난 '용태형' 운구행열은 서소문 배제학당을 한바퀴 돌아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그림마당 민' 앞에서, 그 시절을 회억하는 유홍준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며 고인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망자의 가게였던 '낭만'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올렸다.

 

 

 

 

 

 

 

 

 


 

 

 

 

 

 

 

 

 

 

 

 

 

 

 

 

 

 

 

 

 

 

 

 

 

 

 

 

 

 

 

 

 

 

 

 

 

 

 

 


지난 5월7일 “용태형” 추모식에 정치인을 비롯한 전국의 민중예술가들이 다 모였다. 
                                                                                                                                                                                      

중국에서 이강군씨, 제주에서 강요배씨, 마산에서 고승하씨, 풍기에서 배평모씨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모여들어 장례식장이 분주했다.  장례위원장 김정헌, 이애주선생을 비롯하여  백기완, 유홍준씨 등 많은 분들이 고인을 추억하는 사연들과 아픈 마음들을 전해 주었고, 마지막에 나온  장사익씨의 노래 '귀천'과 '봄날은 간다'가 더욱 마음 아프게   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잘 모르는 분은 물론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실수로 빠뜨린 분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억력이 그의 치매 수준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바란다.

  먼저 정치인부터 거명하자면  백기완, 이부영, 이재오, 문재인, 손학규, 이재정, 권영길, 노희찬, 최 열. 김철기씨 등을 꼽을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여러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들이다. 김정헌, 이애주, 황석영, 김윤수, 임진택, 최종원, 이강군, 민정기, 박진화, 성완경, 최 민, 임옥상, 신학철, 박재동, 박불똥, 고승하, 강요배, 배평모, 윤승길, 김태서, 이종률, 심정수, , 장경호, 이미례, 신상철, 김수남, 이승철, 제이슨 J시노, 김상철, 김윤기, 남요원, 문국주, 박인배, 전승보, 조성우, 홍선웅, 조영신, 정정식, 김치중, 최백호, 김영복, 장사익, 정태춘, 이인철, 홍석화, 김준권, 류연복, 이도연, 최석태, 이행자, 공윤희, 김명성, 유홍준, 최혁배, 고 헌, 심우성, 정복수, 박인식, 정인숙, 이명선, 이두엽, 박흥순씨외 200여명 (무순)

 

 

 

 

 

 

 

 

 

 

 

 

 

 

 

 

 

 

 

 

 

 

 

 

 

 

 

 

 

 

 

 

 

 

 

 

 

 

 

 

 

 

 

 

 

 

 

 

 


김용태 민족예술인장(장례위원장: 김정헌, 이애주)추모식 “민중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가 지난 5월7일 오후8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2호실에서 많은 조문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임진택씨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식에는 김정헌, 이애주씨(장례위원장)의 조사와 유홍준씨(집행위원)의 고인 소개, 이승철, 김명성씨(장례위원)의 조시, 백기완, 이부영, 조영신씨의 추모사, 유족 김승부씨의 인사말, 윤선애, 정태춘, 장사익씨의 추모노래, 김남수, 이애주씨의 씻김굿 순으로 숙연하게 진행되었다.

김용태 선생 민족예술인장 장례위원회
장례위원장 : 김정헌, 이애주
집행위원장 : 박진화, 이종률
집행위원 : 김상철, 김윤기, 남요원, 문국주, 박인배, 유홍준, 전승보, 조성우, 홍선웅
고 문 ; 김윤수, 백기완, 손장섭, 신경림, 원 경, 이부영, 주재환, 함세웅외 다수
호 상 : 김태서, 임진택
유 족 : 박영애(처), 김보영(딸), 김용순, 김승부, 김용선, 김용출, 김용숙(이상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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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후3시의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2호실은 한가했다.

먼저 떠난 “용태형”을 조금이라도 오래도록 붙들고자 5일장으로 한데다, 대부분 문상을 다녀 갔거나,

더러는 추모식이 있는 7일이나 발인 날 들리려고 기다리는 듯 했다.

함께 들린 정기범, 김명성, 조준영씨 외에는 장례위원 김태서, 이애주씨를 비롯하여 소설가 조정래, 배평모씨

서양화가 장경호, 민정기씨, 민속학자 심우성, 사진했던 박영수씨등 몇 몇 분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뒤이어 약속했던 무세중, 무나미선생을 비롯하여 이청운, 전강호씨 등 ‘인사동 유목민’팀들이 방문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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