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님, 베이징에 다녀오시죠”


1995년 봄 무렵일 것 같다. 정작 실무대표단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이승환 당시 한청협 부의장과 이은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간사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동행 취재했던 <통일뉴스> 기자도 오락가락한다. 아무튼 90년 베를린 남·북·해외 3자회담 이후 안팎의 여건이 만만치 않아 후속 회담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해 봄 ‘광복 50돌 기념행사를 남·북·해외가 함께 내용과 규모 모두 의미 있게 치르자’는 남쪽 김영삼 정부의 역제안을 북쪽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실무회담 일정이 잡혔다. 범민족대회 남쪽추진본부도 갑자기 바빠졌다.


그때 나는 앞서 94년 8월의 범민족대회 개최와 관련한 수배로 도피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행위원장 임무를 수행해야 할 형편이라 실무대표단 구성, 회담 장소 등등 일정에 맞춰 준비해야 했다. 베이징에 있는 지인에게 회담 장소를 잡아주도록 부탁하는 한편 이승환·이은민, 두 사람을 실무회담 준비를 위해 조금 앞서 베이징으로 보냈다.

 
문제는 대표단으로 누가 가느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쪽과 회담이 낯설기도 하고 더욱이 다녀오면 구속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터에 선뜻 나서는 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숙고 끝에 실무대표단장을 수락해주었다. 곧바로 ‘용태 형’을 만나러 갔다. 알아보니 인사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 중이었다. 다짜고짜 말했다.


“형, 베이징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북쪽하고 실무회담 일정이 잡혔습니다.” “언제야?” “내일모레입니다.” “어떡해야 돼?” “형은 요주의 인물이니 베이징으로 바로 가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일단 홍콩으로 갔다가 베이징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노자를 마련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도망 다니는 네 앞가림이나 잘해, 이놈아!”


그게 ‘용태 형’이었다. 그 다음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용태 형은 홍콩에서 비행기표를 새로 끊어 베이징으로 날아가 국제선으로 도착했는데, 먼저 현지에 가 있던 실무대표단 두 사람은 국내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서로 어긋났는데 신기하게도 영어,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는 용태 형이 내가 건네준 호텔(뉴그레이스) 이름과 전화번호만으로 회담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중에 들으니 실무진도 호텔 위치를 잘 모르는 운전기사들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용태 형이 혼자서 용케도 찾아온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다른 일정 때문에 회담 첫날에만 참석을 했고, 용태 형이 실질적인 남쪽 대표단장을 맡아 회의를 이끌었다. 남북 간의 이견과 난제들이 많아, 매우 어려운 회담이었으나 용태 형 특유의 뚝심으로 합의문까지 채택해냈다. 일반적으로 합의문을 채택하지 않으면, 국가보안법으로 걸어도 구속될 가능성은 낮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용태 형은 구속을 각오하고 끝내 성과물을 들고 돌아왔던 것이다.


■ ‘남·북·해외’ 묶어낸 용태 형의 한마디


2004년 11월23~25일 2박3일간 금강산에서 남북의 실무회담이 있었다. 2005년을 준비하는 회담이었다. 최교진 당시 민화협 집행위원장(현 세종시 교육감), 한충목 통일연대 집행위원장(현 진보연대 공동대표), 이승환 민화협 정책위원장(현 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 공동대표), 정인성 원불교 사회문화부 차장, 김동만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현 한국노총 위원장),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김이경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사무총장 등 남쪽 대표단 34명이 참석했다. 최근 인천아시안게임 북쪽 단장으로 내려왔던 이충복 당시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을 비롯해 북쪽 대표단은 28명이었다. 거기에 이행우 6·15실천미주위원장, 리한수 일본 조국통일협회 부회장 등 국외 동포 대표 7명까지 대규모 회담이었다.


공동행사에 관해서는 큰 어려움 없이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공동행사 추진 상설기구 결성 시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워낙 여러 부문이 함께한 자리여서 의견도 분분하고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회담 이틀째인 24일 저녁 만찬장 자리로 기억한다. 용태 형이 북쪽 이충복 단장과 한참 술잔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서 일갈했다. “야, 그냥 하면 되지, 뭐 그렇게 말들이 많냐.”


‘공동보도문 3항-남과 북, 해외의 각계각층 단체들은 앞으로의 통일운동과 민족공동의 통일행사들을 광범하게 협의하고 추진하고자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약칭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를 내년도에 적절한 시기에 결성하며 당면해서는 올해 안에 남과 북, 해외에서 각기 지역준비위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 조항은 전적으로 용태 형의 작품이었다. 그때 합의로 결성된 ‘남·북·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지금 ‘6·15공동선언실천 남·북·해외 공동위원회’로 이어져 있다.


■ 북에서도 ‘용태 형’으로 통한 사연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를 앞두고, 남쪽에서는 평양을 가네 못 가네 설왕설래가 벌어졌다. 결국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를 단장으로 남쪽 대표단이 방북했다. 용태 형과 나도 동행했다.


북에서 나름 공들여 준비한 만큼 기념행사는 웅장했고 화려했다. 이른바 ‘집체예술’의 진수를 실감했다. 특히 대규모 카드섹션이 인상적이었다. 어림잡아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펼쳐내는 그림 속에는 꽃들도 피었다 지고, 바람도 불고, 구름도 흐르고, 말도 힘차게 달리고, 사람 얼굴도 기가 막히게 형상화하고, 그야말로 감탄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한 모퉁이에서 잠깐의 실수가 있었다. 누군가 카드 색깔을 잘못 내민 듯했다.


“어, 저기 삐끗했네?” 화가 용태 형의 예리한 눈이 놓칠 리가 없었다. “어휴, 안심이 좀 되네.” “엉?” “야, 이놈아 좀 틀려야지!”


그날 저녁 식사 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2차로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옮겼다. 고려호텔의 젊은 여성 접대원(봉사원)들은 용태 형에게 다 ‘아가’였다. “아가, 저녁 묵었나?” “아가, 시집갔나?”


거나해진 북쪽 단장인 김영성 민화협 위원장과 죽이 맞은 용태 형은 다시 자리를 옮겨 물론 새벽까지 계속 마셨다. 김 위원장은 훗날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으로 남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흥이 도도해진 김영성 단장이 피아노 솜씨를 보여주겠노라며 다른 큰 방으로 옮겨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한참 놀았다. 그러다가 김 단장이 물었다.


“그런데 용태 선생은 올해 몇이시오? 나는 45년생이오만.”


그건 김 단장의 실수였다. 자기 나이를 먼저 밝히지 말았어야 했다. 답은 뻔했다.


“아, 그래요. 나도 해방둥이요.”


그때부터 둘은 동갑내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북에서 용태 형은 해방둥이로 통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용태 형의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는 출생연도는 48년생이다. 하긴 남쪽에서도 그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용태 형’이라 부른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


■ 통일·평화 말하지 않고도 최일선에 섰던 그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됐던 나는 3년 가까이 복역한 뒤 추방당해 일본에 머문 적이 있었다. 86년 6월 용태 형과 김정헌·성완경·원동석 등 ‘현실과 발언’ 선배들이 도쿄에 왔다.


“너 왜놈 말 좀 늘었나?” “아직도 버버거리지 뭐.” “야 이놈아, 아직까지 뭐했냐? 아무튼 내일부터 가이드 좀 하고 통역도 해라!”


이럴 때 ‘토’를 달면 죽음이다. ‘일본·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중미술전’(JAALA전)을 쫓아다니면서 덕분에 작품 보는 눈도 뜨고 마음도 훈훈해졌지만 몸은 죽을 노릇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가던 저녁 무렵 용태 형이 느닷없이 물었다.


“너 총련 쪽하고 좀 트고 지내냐?” “내가 죽을 일 있어?” “내일 총련 서만술 의장하고 만나는데 같이 갈래?” “거긴 통역 필요 없잖아?” “허긴, 넌 빠져라.”


그렇게 맺어진 서만술 의장과 친분은 이후로도 돈독히 이어졌고 93년 10월의 ‘코리아통일미술전’은 그때부터 준비된 셈이었다.


용태 형은 평소 통일이니 평화니 입에 올린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통일운동이나 평화운동 하는 벗들은 끔찍이도 아꼈다. 참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뒷받침을 해줬다.


88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평화대회’를 비롯해 범민족대회 10여년간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다. 한번도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노동운동, 민중운동, 통일운동, 평화운동의 최일선에 용태 형은 늘 있었다. 민화협 공동의장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어눌하면서 날카로운 통찰력! 용태 형의 비사는 책으로 엮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 용태 형, 떠나보낸 지 반년도 안 되었지만 그립다. “용태 형! 몹시 그립습니다.”


민화협 상임의장·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스크랩/한겨레신문]

 

1990년대 들어 민예총은 빠르게 번져가던 노래운동을 조직 확산과 연대 강화의 매개체로 활용하고자 대학가와 노동권의 노래패들을 참여시킨 대규모 민중가요 공연 기획을 주도했다. 사진은 90년 3월24일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 첫번째 공연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⑬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번째로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민예총 결성과 남북 예술교류 활동과 일화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심광현, 이종률, 조성우,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대선 패배 뒤 문예운동 대중화 절감
용태 형이 살림 맡은 민예총 출범
전교조·전노협 기금전에도
그가 나서면 놀랄 만한 수익 올려
90년대 대형공연 흥행 일궈
93년 문민정부 들어서자 법인 전환
문예아카데미 등으로 기반 넓혀
남북·재일동포 예술교류 눈돌려
94년 ‘코리아통일예술제’ 합의
반말투 친밀감·단도직입의 발언
지루한 공전 무너뜨리며 우의 다져

 


■ 87년 대선 패배의 역설적 산물, 민예총


내가 ‘용태 형’과 문화운동의 장에서 처음 함께한 것은 1985년 형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84년 창립) 실행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였다. 그때는 ‘부산 사투리를 몹시 심하게 쓰는 미술 쪽 선배’로만 여겼다.


민문협(민문연)을 비롯해 문학·미술·언론·출판·교육 등의 문화 6단체는 87년 6월 항쟁을 뒷받침하는 조직운동의 문화부문을 담당했는데, 용태 형은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다. 6·29선언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 그해 여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정치적 역동성을 크게 강화해 갔다. 하지만 12월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워 오자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론, 김영삼 중심의 후보단일화론, 백기완 민중후보론 등으로 진영은 분열되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용태 형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민문연 실행위원들도 각기 처지와 견해에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어부지리 당선이었다.


이른바 ‘민민’ 진영은 뼈를 깎는 각성의 아픔을 안은 채 이듬해 봄 총선에서는 여소야대를 이루었고, 일상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확산되는 기반을 조성했다. 대선 기간 동안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던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도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들을 좀더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통합적 조직 건설이 필요하다는 논의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88년 9월30일 서울 신촌역 근처 예술극장 한마당에 모인 여러 장르 대표들은 새로운 예술인 조직 결성에 의견 일치를 보았고, 조직·규약(김용태), 인선(황석영), 재정(오종우), 지역 연락(채희완), 대회 준비(임진택) 등 5개 소위를 구성해 민예총 건설에 나섰다.


그리하여 88년 12월23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가 열렸다.


용태 형은 ‘조직’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맡았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 이전에 문예조직 건설에 늘 바람잡이 노릇을 했던 황석영 선배와도 호흡을 잘 맞추었다. 한 사람은 백 후보 비서실장, 또 한 사람은 디제이 지지 방송 연설원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통합의 기운이 매우 강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이날 조성국(영산줄다리기보존회 회장), 고은(시인), 김윤수(미술평론가) 세 사람의 공동의장에 신경림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고, 용태 형은 조직의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90년도부터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용태 형은 민예총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자리에 ‘묶였다’. 조직의 회계는 회비로 충당하도록 했지만, 실제 모아지는 총액은 크지 않았다. 그러니 독지가들의 후원금을 모아야 했고, 적자가 누적되면 아쉬운 소리를 해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용태 형은 자신은 늘 쪼들리더라도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였다. 89년 ‘전교조 기금마련전’과 90년 ‘전노협 기금전’이 그러했다. 당시 전교조와 전노협의 담당자였던 이상호 선생은 전교조 기금마련전에서 “1억원 이상의 수익금을 올렸는데 이 기금으로 유통업체인 참교육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금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민예총의 김용태 사무총장, 큐레이터 구실을 해준 유홍준 교수, 독특한 한글서예작품을 처음으로 공개 전시회에 출품해준 신영복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다”고 회고한다. 이듬해 ‘전노협 기금전’은 3억원 가까운 수익금을 올려 인사동 화랑가에서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심한 탄압을 받고 있던 전노협이었지만 조합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들 모두에게서 큰 애정을 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용태 형의 또 다른 이바지였다.

 

 

1987년 대선 패배의 시련을 겪은 뒤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는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통합적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김용태 선생은 누구보다 앞장서 갈라진 세력들을 한데 모았다. 사진은 88년 12월23일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 앞줄 왼쪽부터 작가 황석영, 영화감독 이장호, 한 사람 건너 계훈제·백기완 선생, 그 뒷줄에 리영희·김진균 교수 등이 자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대형 집회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의 제작자

 

용태 형에게 기금마련전은 어찌 보면 자신의 장르 전문성을 활용하는 사업이었기에 부담이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90년도를 맞이하면서 가장 빠르게 부상하는 장르는 노래운동이었다. 집회에서 다 같이 노래부르기를 할 수 있는 노동가요, 민중가요들이 속속 창작되었고, 이를 보급하는 노래테이프들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90년 봄, 용태 형은 이런 흐름을 빠르게 살려 3월24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을 열었다. 노래패들로서는 새로 창작된 노래를 선보이는 자리이자, 학생운동권에서는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이 운동가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조직적으로 동원을 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은 제작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 공연은 92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그해 연말 대선 때는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공연을 했다.

 

하지만 총제작자 격인 용태 형은 공연을 보면서도 속이 탔다. 입장료로 제작비가 충당되면 다행이겠지만 적자라도 나면 또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민예총은 90년 3월 낙원상가 골목 안쪽으로 이사를 해 공간을 조금씩 넓히면서 각 장르들의 협의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3층에 들어갔던 본부 사무실에 이어 2층에 민미협이 오고, 다음번에는 본부 사무실이 4층으로 올라가고, 3층에 민족음악협의회가 자리를 잡고 민족미학연구소, 민족극연구회 등이 모임방을 같이 썼다.

 

덧붙여, 용태 형은 문예아카데미 강의실로 사용하겠다며 5층까지 확보해놓았다. 요즘말로 일단 질러놓은 것이었다. 염무웅 선생의 민족미학연구소가 90년 여름에 개설했던 ‘민족미학 여름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몰리자, 용태 형은 이를 상설로 개설하기로 했다.

 

■ 민예총 법인화 이후 남북 예술교류의 길로

 

93년 민예총은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고, 문민정부라 이름했다. 청와대 교문수석에 임명된 김정남 선배와 용태 형이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해서, 민예총의 법인화는 별 어려움 없이 추진되었다. 법인이 되면서 ‘자, 손을 잡자’ 공연, 문예아카데미 등을 통해서 확보된 대중적 기반을 좀더 안정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코리아통일미술전>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고, 94년부터 지역 민예총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전국조직화의 토대가 되었다.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과 남북의 미술작가들이 공동전시회를 열고 작가들도 함께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민미협 식구들은 출품작 준비 등 들뜬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김용태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필요한 비용 마련 대책이 막막했다. 그때 통일부 장관이었던 한완상 부총리가 ‘미징’(微徵)이라고 쓰여진 금일봉을 주고 격려해주었는데 액수로는 그야말로 미미했지만 그것은 그가 사업 자체는 인정한다는 표시였고, 김정남 수석의 주선으로 기업체 협찬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 민예총 건설은 지역의 자율성을 강조한 까닭에 해당 지역 문예운동의 역량에 따라 10여년 가까운 시기의 편차를 가지고 서서히 확장되었다. 용태 형은 그때부터 남북 예술교류 사업에 매진했다.

 

일본의 ‘코리아통일미술전’을 계기로 남북을 오가며 통일미술전을 포함한 ‘코리아통일예술제’를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94년 베이징에서 3자간 회합까지 있었으나 그해 여름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 또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93년 통일미술전에서 친분을 쌓은 김용태·홍영우(재일본 문예동맹 미술부장)·최계근(북한 화가)·송석환(북한 작곡가·이후 문화성 부상 역임)·김정수(문예동 위원장) 등의 우정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인 베이징 회담 등으로 이어졌다. 매번 용태 형을 수행하고 베이징이나 도쿄로 다녔던 나로서는 그의 반말투 친밀감이 얼마나 사람들을 쉽게 가까워지게 하는가를 보았고, 단도직입의 발언들이 협상장의 지루한 공전 분위기를 허물어뜨리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은 지금도 남과 북을 오가며 “거 쫌 잘해 보시오” 하면서 남북 예술인들의 교류사업을 부추기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전 민예총 기획실장

 


[스크랩 /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7년 3월 민미협에서 기획한 <반(反)고문전> 때 출품한 박불똥 작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

하지만 주최 쪽의 자체 검열로 그림마당 민의 전시장 대신 사무실에 숨기듯 걸었다가 그해 연말 작가의 개인전 <졸작전>에서는 공개 전시됐다.

 

 

‘힘전’ 출품 작가 즉심 회부 탄압에
민중미술 전시장 대관 불가능
당국 ‘민중’만 들어가면 눈 부라려
김정헌 형과 용태 형이 불러
“전시관 보증금·월세 570만원 좀…”
돈은 내가 마련해 볼게요”
수도약국 맞은편 ‘그림마당 민’ 탄생

 

 

■ 전시장 대관도 어려웠던 민중미술

 

 

모두가 “용태 형”이라고 부르는 김용태라는 인간은 죽어서도 ‘용태 형’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렇게 민중문화운동의 발자취를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줄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만인이 용태 형을 좋아하고 사랑함은 그에게는 사사로울 ‘사’, 거짓된 ‘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 자가 없다는 말로 요약한다.

 

 

이념으로 뭉친 단체는 말이 많기 마련이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이고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고 제도권에 도전하는 재야의 ‘운동’단체는 항시 당면 노선을 놓고 일대 혈전을 벌이기 일쑤다.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 노선이라는 것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눈앞의 현실은 당장 싸우느냐 참느냐, 이걸 하느냐 마느냐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

 

 

민미협 역시 독재정권에 대항하고 올바른 미술문화를 이룩하자는 재야단체였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모두 동의하면서 노선에서는 개인마다 그룹마다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민미협은 기본적으로 미술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술이라는 장르는 아틀리에의 작업이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객관화되고 사회화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발표될 공간을 갖지 못하면 먼 훗날 숨은 이야기와 함께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팽팽 돌아가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제도권에서는 화랑들이 작가 활동을 지원하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구실을 했지만 80년대 벽두부터 불붙듯이 일어나는 미술운동을 지원해주는 화랑은 없었다. 작가들이 주머닛돈을 모아 전시장을 빌려 자기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당사자밖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미술평론가로서 내가 잊을 수 없는 해는 1984년이다. 그해 6월에는 무려 105명의 작가가 서울의 전시장 3곳을 빌려 <삶의 미술전>을 열었다. 7월엔 서울 한강미술관에서 <거대한 뿌리전>, 8월에는 부산·마산·대구를 순회하는 <시대정신전>, 9월에는 <서울미술공동체전>, 11월에는 <푸른 깃발전>이 열렸다. 이미 80년대 초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 ‘임술년’, ‘실천그룹’, ‘두렁’, ‘광주시민미술학교’ 등의 연례 전시도 이어졌다.

 

 

젊은 작가들의 뜨거운 열기는 이듬해인 85년 7월 열린 <한국 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더욱 분출되었다. 그동안 사찰 당국이 미술은 그래도 순수하다고 관망하다가 급기야 이 전시회를 봉쇄하고 출품 작가를 연행해 즉심에 회부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그 활동이 결국 그해 11월, 민미협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전시장 대관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 “민씨 성의 대표를 찾아라!”

 

 

민미협이 결성되고 한달쯤 지난 12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인사동에 있는 선화랑에서 발행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었다. 용태 형과 김정헌 형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여 우리가 즐겨 가던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는데 둘 다 정작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용태 형은 화를 낼 때는 목소리가 뱃속에서 나오고 곤란할 때는 약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용태 형이 먼저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용태 형은 아쉬운 소리를 할 때면 나를 유 대감이라고 불렀다. “유 대감, 우리 전시장을 한번 마련해 볼까 하는데 어때? 수도약국 맞은편 지하에 35평이 나왔어.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70만원이래.” “괜찮네.”

 

 

그러자 하는 말이 좋기는 한데 문제는 그만한 돈도 없거니와 그곳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팔리는 그림을 전시할 뜻이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회비와 대관료뿐인데 가난한 민중미술가들에게 회비 납부를 강요할 수도 없고, 대관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물 임대료도 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얘기만 듣고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정헌이 형이 답답하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유 대감, 당신이 보름 안에 돈을 융통해 올 수 있어?”

 

 

나는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민미협 활동가들의 작품 발표장을 갖는다는 것은 민족문학가들이 이를 지지하는 문학잡지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형들이 적극 나선다면 돈은 내가 마련해 볼게요.”

 

 

당시 내 월급이 30만원이었으니 쉽지 않은 목돈이었지만 잘 아는 선배에게 빌려 보증금 500만원과 선금으로 내는 첫달 임대료 70만원 합쳐 570만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계약을 하고 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시장 운영 문제를 논의했다. 이번엔 전시장에 누가 상근하느냐는 문제였다. 형들은 내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 그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어차피 필요한 민미협 사무실과 같이 쓰고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이어서 우리는 전시장 이름을 지어보기로 했다. 갤러리니 미술관이니 전시회관이니 하는 말 대신 ‘그림마당’으로 하자는 내 제안에는 둘 다 동의했다. 그러나 그 앞뒤에 붙일 이름에 원칙론자인 용태 형은 어떤 식으로든 ‘민중’, ‘민족’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매사에 신중한 정헌이 형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노출하면 안 된다고 해서 끝내는 둘이 다투었다. 그렇게 언쟁 비슷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내가 그러면 ‘중’ 자는 빼고 ‘민’ 자만 뒤로 붙여서 ‘그림마당 민’으로 하자고 했다.

 

 

용태 형은 그것으로 좋다고 했는데 정헌이 형은 여전히 그렇게 직설적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중미술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때라 ‘민’ 자만 들어가도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헌이 형이 양보를 하고 나왔다. “좋아. ‘그림마당 민’이 좋은데 이건 한글로만 민이라 쓰고 대표를 민씨에게 맡기자.”

 

 

그리하여 민씨 성을 가진 우리 쪽 사람을 찾아보니 민정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용태 형과 정헌이 형은 ‘걔는 그림 그릴 줄밖에 모르는 애’라며 안 된단다. 정헌이 형 부인이 민씨이긴 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 탐색 끝에 우리는 민혜숙을 찾아냈다. 민혜숙은 나와 미학과 동창이고 내 친구 부인이기도 해서 아주 친한 사이였고 오윤, 정헌이 형, 용태 형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는데, 그가 흔쾌히 승낙해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는 것은 돈 되는 일은 없고 오직 노력 봉사일 뿐인데 모두들 거기에 온 열정을 쏟아 넣었으니 무엇에 씌어도 단단히 씐 것이었다. 그것은 ‘민’ 자라는 거대한 멍석이었다. 용태 형은 그 멍석자리를 까는 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마당쇠였다. 그는 친구 김선경에게 부탁해 거의 공짜로 실내장식 공사를 마무리해 아담한 공간을 연출해냈다.

 

 

그리하여 민혜숙 대표를 모신 ‘그림마당 민’이 세상에 탄생했고 86년 2월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초대전이면서 <40대 22인전>이라는 아주 ‘부드러운’ 제목으로 개관을 할 수 있었다. 민중미술가들의 기대와 축복 아래 개관전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림마당 민의 등장은 민중미술 운동과 민미협의 활동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앞으로 민중미술운동사 내지는 20세기 한국미술사를 서술함에 그림마당 민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운영난에 미술강좌 수강료 보태고
정체성과 다른 전시도 불가피
회원 항의 땐 용태형 “니 죽을래?”
그 진정성은 누구에게도 통해
가나화랑·학고재 대표 등은
눈밝은 민중미술 후원가였다

 

 

■ ‘그림마당 민’의 성공과 한계

 

 

그림마당 민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86년 6월 첫 초대전으로 기획된 오윤의 <칼노래>는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모두들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동했다. 그러나 오윤은 이 첫 개인전에 이은 부산 순회전을 마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가 이 전시회를 위해 마지막 1년 동안 제작한 70점의 목판화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그림마당 민의 운영에 차질이 생기더니, 대관이 되지 않는 달은 적자를 메울 방법이 없었다. 용태 형, 민 대표 그리고 나는 매달 건물 임대료 마련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도 낡아서 비만 오면 전시장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매번 그걸 닦고 치우는 게 일이었다. 홍선웅·곽대원·류연복·유은종·최석태 등이 정말로 고생들 많이 했다.

 

 

게다가 민미협 사무실이 따로 독립해 나가고부터는 인건비 부담이 생겼다. 대관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신촌 우리마당에서 하고 있던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좌를 그림마당 민으로 옮겨와 수강료를 받아 임대료를 내기도 했다.

 

 

민중미술 전문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은 늘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사진은 1987년 3월 박종철군 추모 기념으로 기획된 <반고문전>을 원천봉쇄하고자 사복경찰들이

그림마당 민 입구를 막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와중에도 그림마당 민에선 정말로 많은 민중미술가의 개인전과 단체전 그리고 기획전이 열렸다. 해마다 열린 <통일전> 같은 전시에서는 이애주의 춤과 김남수의 굿이 더해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전시장 운영을 위해 그림마당 민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전시회에도 대관하지 않을 수 없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면 민중미술의 노선을 따지던 회원, 노동미술을 지향하며 현장으로 나갔던 회원들의 항의가 거세게 들어왔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주장이었지만, 그 원칙에 맞추려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기금 마련 캠페인으로 그림마당 민에서 <민중미술 예쁜 그림전>을 기획하였을 때도 앞뒤 사정을 모르는 민미협 회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나는 나대로, 용태 형은 용태 형대로 곤혹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전시회였다고 받아들일 만도 하지만 그때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용태 형이 그럴 때면 잘 쓰는 말이 있다. “늬들, 정말 말 다했어. 늬들만 옳은 줄 알아. 죽을래!” 이 말은 용태 형의 전매특허 같은 대사였다. 그래도 그에게는 ‘사’ 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통했다.

 

 

여담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기획한 <미술과 성(性)>은 그 주제 때문에 민중미술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특히 인사동에 배치되어 있는 전투경찰들이 많이 구경하고 갔다. 그러나 87년 박불똥의 <졸작전>에서는 전두환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를 전시장에서 뗄 수밖에 없었고, 88년 박종철군 추모 <반(反)고문전>에서는 그림마당 폐쇄 위협까지 받는 등 탄압이 끊이지 않았다.

 

 

■ 민중미술과 그림마당 민을 살린 후원자들

 

그림마당 민의 운영비를 마련하고자 나는 민중미술을 홍보하며 작품 판매에 전념을 다했다. “민중미술은 훗날 미술사적으로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민중미술 작품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재평가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리한 화상, 안목 있는 소장가라면 지금이 민중미술가의 작품에 투자할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겠는가.” 이런 논리로 처음에는 친한 친구들에게 권해 보았는데 몇 명에게는 통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다음엔 미술 작품은 역시 미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사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친분 있는 화상과 미술애호가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역시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 왜 이런 정치성을 드러낸 그림을 그리는지 의아스럽다’는 선입견이 강했던 것이다.

 

그래도 눈 밝은 이들은 있었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는 민중미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하고 초기부터 작품을 많이 사주었고, 마침 그때 새로 창간한 <가나아트>의 초대 주간으로 용태 형을 모셔갔다. 나중엔 임옥상을 전속작가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된 가나화랑의 민중미술 수집품들은 훗날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나중에는 학고재 화랑의 우찬규 대표가 적극 후원해줬다. 학고재를 열기 전부터 기꺼이 작품 강매를 당해준 그는 심지어 걸개그림을 사달라는 무리한 요구도 들어주곤 했다.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 작가인 신학철 초대전의 전시장을 제공해주었고, 강요배·이종구를 비롯한 여러 민중미술가들의 초대전을 열어주었다.

 

순수애호가도 여럿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이 청관재라는 호를 가진 고 조재진 사장과 그의 부인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인사동 화랑가 순례를 하는 미술애호가였던 부부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청관재의 민중미술 수집품들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임대료가 다급할 때면 코리아나 화장품의 유상옥 회장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한때는 재야단체의 ‘기금 마련전’이 유행처럼 열렸는데 그럴 때면 나와 용태 형의 강매에 마지못해서 사준 이도 적지 않았다. 이런 민중미술의 이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마당 민은 그나마 10년간 장수(?)할 수 있었다.

 

그림마당 민은 나중엔 문영태 형이 나서서 운영을 맡으면서 조금 사정이 좋아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유홍준 미술평론가·전 민미협 공동대표

[스크랩 / 한겨레신문]

1985년 7월20일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제지당하자 출품 작가 30여명이 서울 안국동 아랍미술관 전시장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날 경찰은 끝내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출품작을 강제로 철거해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미술인협회가 결성됐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84년 ‘삶의 미술전’ 끝나자
새로운 미술운동 논의 무르익어
‘해방 40년 역사’ 전국 순회전 열고
민중미술 논의 물꼬 ‘민미협’ 결성
‘민족미술’ 발행·토론회 정례화…
‘그림마당 민’ 운영 등 기틀 잡아

 

■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운과 민미협의 태동

 

‘용태 형’은 그가 즐겨 부르던 ‘청포도 사랑’처럼 부드러우면서 정감이 많았다. 그는 조직을 운영하는 일에는 판단력이 신속하고 단호했지만 누구에게나 자상했다. 1984년 6월 <삶의 미술전>(관훈미술관·아랍미술관·제3미술관)을 기획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문영태, 강요배, 박세형과 함께 우리는 여러 차례 기획모임을 하면서 작가의 자료를 수집하고 출품 작가를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성완경 선배와 용태 형에게 조언을 듣곤 했다.

 

‘삶의 미술전’은 “삶과 유리된 미적 가치관을 양성한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총체적 삶의 맥락 속에서 미술을 정립해 나갈 것”을 주장한 전시였다. 군부독재정권 속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술에 매몰된 제도권 미술에 대한 도전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의 가치관과 창작론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삶의 미술전’을 계기로 새로운 미술운동에 대한 논의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많은 미술인들이 인사동의 건국다방 앞에 있던 평론가 원동석 선생의 미술자료실을 들락거렸다. 주재환, 손장섭, 김정헌 등 현발 동인들을 비롯해서 선화랑에서 발간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던 유홍준, 그리고 광주의 홍성담과 최열, 동인 ‘임술년’과 ‘두렁’의 회원들과도 가끔씩 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84년 우리는 <해방 40년 역사전> 전국 순회전을 기획했는데, 또 지방 순회전시회 때마다 세미나도 열었다. ‘역사를 보는 작가의 시각’(황석영·광주), ‘작품에 있어서 형식의 제 문제’(홍선웅·광주), ‘역사와 예술’(염무웅·대구), ‘작가와 역사’(이철수·대구), ‘역사화의 주제의식’(성완경·부산), ‘작가와 시대정신’(문영태·부산), ‘작품에 있어서 주제 표현의 제 문제’(원동석·마산) 등의 주제로 지역 미술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전시회를 통해 민중미술에 대한 논의가 전국 단위로 활성화되었으며 훗날 ‘민미협’이라는 미술전문가 집단을 결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힘전 사건’과 젊은 미술인의 결집

 

사무국장 연임 마다한 용태형
뉴욕 가서 ‘민중판화전’ 기획
판매대금 민미협 활동비로 보내
유홍준과 콤비플레이 운영비 숨통

 

85년 7월 안국동에 있었던 아랍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20대 힘 전>이 열렸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에서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해 버렸다. ‘힘 전’ 사건은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첫번째 민중미술 탄압 사례로 꼽히며, 이로 인해 미술인들의 조직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 달 뒤인 8월17일 우리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열고 민미협 창립의 필요성에 합의하고 창립준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 덕분에 ‘힘 전’에 참여했던 20대의 젊은 미술인들이 민미협에 적극 가입하며 주도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힘 전’ 며칠 전인 7월5일, 나는 이른바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유상덕(작고)·김진경(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고광헌(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등 30여명의 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해직당했다. 그러자 선배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민미협 창립 준비위원회 총무를 맡겼다. 그리고 여러 대학신문에 미술운동론을 쓰고 있던 미술평론가 최열에게는 사업과 홍보를 책임지게 했고, 사무국장은 당연히 용태 형의 몫이었다. 서서히 사무국 체계가 갖춰지고 운영위원회와 대의원 조직이 편제되면서 그해 11월22일 120여명의 미술인들이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창립총회를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민미협이 출범하면서 용태 형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직을 다져 나갔다.

 

1985년 7월20일 전시장에서 철거·압수당한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출품작들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쌓여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용태 형은 86년 1년 동안 사무국장을 맡았지만 그사이 많은 사업을 추진해 민미협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을 꼽자면, 민미협 기관지인 <민족미술>을 발행해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 기관지를 통해 회원의 전시와 기획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집단 미술운동과 지역현장 운동을 소개했다. 또 30년대~80년대의 중국 신목판화운동사,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전>(JAALA)의 작품과 교류를 소개해 사회변혁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에 대한 시각을 국제적으로 넓혀 나갔다.

 

둘째로는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정례화시켜 조직운동의 방향과 창작론, 미술의 대중화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지역 미술인들과 연대를 강화해 나간 점이다. 이 대토론회가 지금까지도 해마다 민미협의 정기 행사로 이어진 것은 이처럼 출범 때부터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받아온 덕분이다.

 

셋째로는 민미협의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했다. 그림마당 민은 많은 운영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원 모두가 힘을 모았지만 이를 총지휘한 것은 당연히 사무국장인 용태 형과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유홍준 선배였다. 나는 지금도 이 두 선배의 콤비 플레이가 없었다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이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때 ‘민미협·그림마당 민의 1년 결산 대차대조표’(86년 12월15일)를 보면 총수입과 총지출이 각각 3352만원이었다.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약 2억원에서 3억원은 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은 회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그 출발 시점에 용태 형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 6월항쟁과 민예총 결성의 모색

 

87년 민미협 제2기에 들어서면서 용태 형은 나를 사무국장으로 추천했다. 돌이켜보면, 앞서 86년 수많은 일들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에서 벌어졌고 용태 형은 과로로 인해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평론가 엄혁의 주선으로 캐나다 토론토의 에이 스페이스 화랑에서 ‘김용태·김봉준·박불똥 3인 초대전’(1987)이 이뤄졌고, 이어서 3월에는 뉴욕의 마이너 인저리 화랑에서 초대전이 잡혀 있었다. 용태 형은 3월 뉴욕 전시를 위해 출국했고 전시가 끝난 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국청년연합을 이끌고 있던 윤한봉(작고) 선배와 만나 <뉴욕 민중판화전>을 기획했고, 그 수익금을 민미협에 보내주기까지 했다. 어디를 가나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용태 형의 성격이 잠깐 다니러 간 이국땅에서 민중판화전까지 주선한 것이다.

 

87년 3월 민미협이 고 박종철군 추모를 위한 <반고문전>을 열자, 경찰은 그림마당 민을 봉쇄하고 작품 30여점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4월 전두환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4·13 호헌조처’를 발표했다. 민미협은 즉각적으로 ‘우리 모두의 소망을 모아서 어둠을 밝히자’라며 ‘시국에 관한 237 미술인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어서 민미협을 포함한 문화 6단체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 조작 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후 6월항쟁까지 군부독재 타도를 향한 투쟁의 열기는 뜨거워만 갔다. 반고문전부터 6월 투쟁까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이때처럼 바빴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뉴욕에 가 있던 용태 형이었다.

 

이처럼 국내 사정이 급박하고 점점 치열해지자 용태 형은 뉴욕 전시를 마치자마자 귀국했다. 그리고 민미협과 문화 6단체의 투쟁에 힘을 보탰고 직접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87년 대선이 야권분열에 의한 민주정권 교체의 실패로 막을 내렸고, 용태 형은 뭔가 모색을 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화예술인들의 역량을 모아 민예총을 건설해야겠다는 것이다.

 

홍선웅 판화가·전 민예총 대변인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⑨

 

1999년부터 12년에 걸쳐 전국을 돌며 ‘우리땅 터벌림’ 춤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한 우리춤꾼 이애주 교수(오른쪽)와

사진작가 김영수(왼쪽)씨가 2011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마지막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작가 곽명우 제공

 

 

 

■ ‘무당 아닌 무당’ 오윤이 맺어준 인연

 

‘입관하던 마지막 순간/ 그렇게 아름다운 장엄은 본 적이 없다./ 한 떨기 연꽃 송이로 피어났다./ 아주 신선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커다란 슬픔도 아름다운 고요로 돌려놓았다./ 아, 몸의 무상함이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냥 하나라는 것/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빛을 발하고 있는 만인의 용태 형.’

 

‘용태 형’과의 첫 인연은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시대인 1980년대 초반 그의 절친이자 판화가인 ‘윤이 형’(오윤·작고)이 나의 춤 작업실에 드나들 때였다. 나는 춤패 ‘신’과 함께 <도라지꽃>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 만행인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를 주제로 한 조선여성수난사를 다룬 춤굿이었다. 성가실 정도로 드나들며 쫓아내면 낼수록 더 신명나게 판을 잡던 윤이 형. 신들린 눈빛, 귀신 형용으로 사물을 파고드는 무당 아닌 무당인 그가 입만 열면 나오는 이름이 ‘용태, 용태’였다. 그러다 마침내 용태 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일 정도로 정감있으면서 구수하지만 그 안에 보이는 깡심있는 눈빛은 척 봐도 윤이 형이랑 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도라지꽃’ 작업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용태 형의 활약은 점점 빛이 났다. 잠실 석촌호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 그 원형 야외마당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장식한 것이다. 현발의 내로라하는 민중·민족화가들이 한 점씩 맡아 그려냈다. 낮부터 북춤, 탈춤, 강강술래 등 가족과 함께하는 춤, 대동춤으로 흥을 돋운 뒤 어스름 해질녘부터는 횃불을 밝히고 ‘도라지꽃’ 막을 열었다. 병풍처럼 원으로 둘러쳐진 걸개그림은 땅과 하늘과 맞닿아 횃불에 일렁거리며 살아 움직였고 중심으로 모아지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의 타오르는 기운은 일제의 만행을 싹 쓸어버릴 만했다. 우리 민족예술사에서 언제 그러한 장관이 펼쳐졌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다시 한번이라도 전개될 수 있을까. 바로 용태 형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다음 작업은 86년 6월 판화가 오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칼노래>였다. 용태 형이 “윤이 판화전 여는 날 뭘 좀 해야 되는데” 하여 즉각적으로 맘을 맞추고 준비했다. 그날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등 원조 사물놀이패와 호흡을 맞춰 상기된 마음으로 판을 열었다. 서로 처음 해보는 열림굿춤판이었다. 청수를 소반에 받쳐 들고 그림판을 돌아 예를 갖춘 뒤 기운 닿는 그림들과 집중적으로 교감하며 춤추었다. 신명이 내리면서 벽에 걸린 그림의 군상들이 걸어 나오기도 하고 내가 들어가기도 하며 하나가 되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르면서 관객 모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 흠뻑 땀으로 젖은 채 끝이 났다.

 

훗날 평론가 이태호 교수는 이런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한국미술사 마지막 강의 때 열림굿춤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양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고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좋은 선례이기 때문입니다. 오윤 선생님의 작품과 함께 말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문화가 어떤 시대 양식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나 자신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음속으로 이 교수에게 무척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바로 87년 ‘바람맞이’의 토대를 깔아준 셈이다.

 

그런데 전시 끝나고 외국 공연 며칠 다녀오니 윤이 형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용태 형이 “윤이 그림 한 점 챙겨줄게” 하며 춤그림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림을 받아들고 이 상황이 무엇인지, 휑한 마음으로 그냥 서 있었다.

 

■ 춤작업실이기도 했던 그림마당 민

 

그즈음 나는 ‘그림마당 민’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림마당 민은 서울 인사동 수도약국 골목 맞은편 지하에 있었는데 나는 대충 그림 쪽 판에 일이 많았고 또 그때 모든 활동의 주무대가 그곳이기도 했다. 저녁때 그림전이 끝나면 그때부터 내 작업실인 양 춤작업에 들어갔다.

 

역시 용태 형이 주도해 85년 결성된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 창립일에는 <부적살풀이>로 의례를 올렸다. 이 작업도 민미협 화가들이 대형 부적을 함께 그리면서 춤의 윤곽이 잡혔다. 촛불을 밝히며 부적을 펼쳐 들고 등장해 땅에 중심을 잡아 놓고 부적을 풀어내는 살풀이 형식이었다. 그처럼 큰 부적도 처음이었지만 춤 구성도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살풀이로 부적을 풀어내면서 신명으로 치달았고 춤패들이 진달래 가지를 너울거리며 부적을 돌아 진달래꽃춤 군무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도 가끔 그 부적살풀이가 생각나고 부적 그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 그냥 춤이 아니라 그날의 행사 전체를 의례춤굿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86년 8월15일에는 민미협이 그림마당 민에서 <통일전>을 열었는데, 나는 윤이 형의 <통일도> 앞에서 ‘통일무’를 추었다. 이 춤 또한 통일의식을 치르는 대동판으로 이끌었다. 그 중심에 항상 용태 형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 당시 작업은 거의 민미협과 연결되었고 대부분 처음 시도해보는 것들이어서 나로서도 창조의 본성에 불을 지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화가들도 그림 소재로 나의 춤을 즐겨 그렸다. 나도 특별한 경험을 하며 서로 상생작용이 일어났고 생각지도 못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즈음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도 결성됐다. 앞에 임진택 명창의 글에서 자세히 나왔지만 황석영, 김종철 등 각 분야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선후배 동지들이 모였고 물론 용태 형도 함께했다. 한번 모이면 진지한 토론이 오가며 현시점 점검과 앞으로 문화운동의 방향과 내용 등이 정리됐고 후반부로 가면서 술판이 섞여 새벽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민문협의 창립 행사 자체가 비합법 문화의례였다. 나는 정말 온몸으로 준비를 했고 그날 민중문화의 상징적 춤을 추었다.

 

오윤이 입만 열만 “용태, 용태”
85년 ‘도라지꽃’ 때 처음 작업한
일제 만행 쓸어버릴 걸개그림 무대
민족예술사에 그런 장관이 있었던가

 

오윤 판화전에선 열림굿춤판
그림과 교감하며 관객 무아지경
민미협 창립행사도 의례춤굿으로
이한열 장례식 때 바람맞이 춤은
처절한 부활의식이었다
형식미학·사상미학 깨는 ‘해방’ 맛봐

 

민예총 반대로 형과 10년간 데면데면
작년 김영수 사진전서 다시 뭉친
‘우리땅 터벌림’이 마지막 작업으로

 

■ 이한열 부활의식 ‘바람맞이’ 춤판

 

마침내 87년 6월, 나는 그즈음 연우무대 개관 공연으로 <바람맞이>를 올렸다. 민주화대행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6월26일 학생들의 요청으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또 다른 바람맞이를 추었다. 각 단과대와 대학원별로 깃발을 펼쳐들고 휘날리며 모여든 광장의 열기는 대단했다. 춤판이 끝난 오후 2시 예정대로 전국민 민주화대행진이 전국 각 도시에서 거센 불길로 일어났다. 그렇게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가 되었다.

 

 

87년 8월 김용태 선생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연합 주최로 열린

‘이애주 한판춤-바람맞이’의 공연 포스터. 사진 이애주 교수제공

 

 

민미협 식구들은 7월9일 이한열 장례식을 며칠 앞두고 밤을 새우며 그리고 또 그렸다. 나 역시 장례식 전날 각지에서 모여든 대학생 연합풍물패, 노동자 문화패 등 수백명을 이끌며 밤새워 장단을 맞췄고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오자 마지막 점검을 하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난생처음 수백만이 운집한 장례식장 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처절한 부활 의식이었고 함께 일어나 나아가는 집단군무였다. 연세대 정문 앞으로 나오며 베 한 필을 가르면서 마지막 ‘한열’이가 쓰러진 곳에서 나도 쓰러졌다. 정신줄 놓고 한열이와 하나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푸근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중에 보니 허름한 옷을 걸친 신촌시장의 할머니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할머니가 어떻게 겹겹이 싸인 인파를 뚫고 그 현장에 계셨는지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하다. 그렇다. 모든 국민이 하나 된 자리였다. 민미협과 민문협이 하나 되고, 모든 민주화 단체들이 뭉쳐서 혁명 전야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도 용태 형의 활약은 비범했다. 나는 그 경험을 훗날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인간 본성으로의 춤, 자연과 사회의 춤, 그 시대 민중의 첨예한 쟁점으로의 춤, 정치와 예술의 연장으로의 춤, 그리고 순수와 비순수, 형식미학과 사상미학 등 그동안 관념적으로 맴돌며 해결 안 되던 부분을 몸으로 부딪히며 문리(文理)를 트는 해방의 경험을 맛보면서 새 단계로, 무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민예총 결성 반대와 용태형의 침묵

 

87년 대선은 우리에게 닥친 또 하나 큰 산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민중후보 추대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 뒤 명예본부장이 되었다. 용태 형은 민중후보 비서실장을 맡으며 우리 모두 11월, 12월을 찬 거리에서 서로 의지하며 부대끼면서 지냈다. 그 결과의 당락과 관계없이 민중후보를 통해 민중의 역량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88년이 되자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한동안 뜸했던 용태 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민문협이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으로 조직이 바뀌며 커지는데 발기인에 이름을 올린다고 했다. 나는 ‘그건 아닌데’ 하고 ‘큰일 났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조직운동, 문화운동의 큰 허점으로 개개인의 기본 역량, 특히 최소한 갖춰야 할 기량 등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던 터였다.

 

그 뒤로는 서로 만날 일도 없었고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금강산에서 남북 공동 문화행사를 할 때는 서로 다른 조직으로 가서 같은 행사를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텄지만 결코 조직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10여년을 데면데면 지냈다.

 

 

2014년 3월26일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용태와 함께 가는 길’ 출판기념전시회 뒤풀이에서 함께한

‘용태 형’(오른쪽 셋째)과 이애주 교수(왼쪽 둘째).사진 장영신 제공

 

 ■ 김영수 사진집 ‘우리땅 터벌림’

 

나는 김영수 민족사진가협회 이사장과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12년에 걸쳐 우리 땅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우리땅 터벌림> 작업을 했다. 99년 백령도로 첫 여정을 떠날 때 몇 명이 동행했는데 김정헌·민정기 화백 등과 함께 용태 형도 있었다. 민예총 시절부터 용태 형과 김 작가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갈 때부터 배 안에서 벌였던 술판은 사진 찍는 시간만 빼고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지더니 돌아올 때는 마치 개선장군들처럼 의기탱천했다.

 

2011년 5월 김영수 선배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땅 터벌림>은 이듬해 5월 1주기 추모 사진집으로 나왔다. 용태 형, 민정기 화백, 정인숙 사진작가 등 몇몇 지인들과 고인의 묘소를 찾아가 책을 올렸는데,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용태 형과 나는 사진전을 열어야 한다고 의기투합했다. 고인이 생전에 이애주 춤을 통해서 민중문화운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듯이 그냥 있기에는 사진 하나하나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었다. 사지가 꿈틀대고 펄렁대기도 한 그 몸짓을 순간 포착으로 잡아낸 또 다른 상징적인 정지의 미학이었다.

 

그 무렵 이미 투병중이던 용태 형은 지친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더니 2013년 3월 끝내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전시관에서 초청 전시를 하도록 성사시켰다. 애초 일주일 하기로 했는데 다시 일주일 연장 전시까지 했다. 전시 중간 토요일에는 유홍준 ‘춤과 미술’ 특강이 열리고 내가 ‘터벌림춤’ 시연을 했고 임진택 명창은 신경림 시인이 ‘우리땅 터벌림’을 위해 지은 시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를 창으로 불렀고, 사회는 김석만 교수가 보았다. 7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많은 관람객들이 왔고 그동안 못 보았던 옛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이며 모두 8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고 감격했다. 거기에 자연요리 연구가인 임지호 선생의 뚝딱 자연상차림까지 곁들여져 수백명이 즐기며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모두가 용태 형이 자기 일처럼 나선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결국 김영수 선배의 뜻대로 문화운동사에 또 하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또한 용태 형과도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1986년 작가 오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때 전시된 판화 작품으로,

오윤 장례식 뒤 김용태 선생이 이애주 교수에게 전해준 유작.

사진 이애주 교수, 정영신 작가 제공

 

 

 ■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

그런데 용태 형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지난 5월 병상에서 의식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는 남북 통일문화 행사를 꾸미고 있었다. 바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고 거대한 민족예술의 역사를 일구고 있었다. 곁가지 하나 덧붙이자면, 늘 옆에서 분신같이 돌보던 ‘절친’ 태서 형에게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정신 나갔어? 애주는 빼라고. 정헌이는 넣어도 돼” 하면서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이생 저생을 넘나들면서도 끝까지 나를 보호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가끔씩 고통으로 입술을 악물면서도 빙긋이 웃으며 함께 간 후배들과 내게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용태 형과 함께한 시간은 바로 문화운동의 역사, 민중민족문화의 역사였다. 현발, 민문협, 민미협, 그림마당 민, 백선본 등이 상부상조하는 중심에는 항상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용태 형이 있었다. 이판사판, 사통팔달, 종횡무진 내달으며 행동 실천으로 나서며 말이다. 우리 시대 문화의 역사를 온몸으로 써 나간 것이다.

 

‘용태 형, 잘 계시죠./ 팽목항 굽이돌아 한 서린 진도 바다를 거쳐/ 이섭대천세계로 대천세계로/ 고통과 절망을 껴안고/ 침몰되어가는 나라와 함께/ 남북 천지 통일세상 열면서 함께 나아가요./ 만인의 용태 형이여!’

 

[한겨레신문] 이애주 우리춤꾼·서울대 명예교수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⑦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민중의 승리를 확인하는 6월항쟁의 절정이자 걸개그림으로 상징되는

민중문화예술의 대향연이었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서 출발한 운구 행렬을 호위중인 최민화 작 ‘이한열 부활

도-그대 뜬 눈으로’로, 결국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작품은 부서지고 말았다. 그해 3월부터 연세대 동

아리 ‘만화사랑’의 지도강사를 맡아 이한열과 인연이 있던 최민화는 전날 저녁에야 장례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밤샘 작업 끝에 작품을 완성해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70년대초 문화운동 논쟁의 추억


‘용태 형’과 만나 함께 일했던 시기를 떠올리다 보니 새삼 ‘문화운동’의 개념을 되새기게 된다. 1970년대 초 ‘문화운동’에 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은 당시 전국 각 대학에 들불처럼 번졌던 탈춤부흥 민속문화운동과, 역시 젊은이들 사이에 대유행을 한 통기타와 청바지로 표상되는 청년문화 현상과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당시 그 젊은이들 사이에 어떤 적대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둘은 천박한 독재권력의 폭압적인 정치상황과 폐쇄적인 문화 질곡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호 우호적일 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은 당시 병영국가로 치닫던 유신정권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현실참여 문학예술뿐 아니라 사소한 이유로 유행가 가사까지 문제 삼아 금지시키고 심지어는 미니스커트와 장발까지 유치하게 단속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거의 탈정치적인 수준의 외래 수입 청년문화 현상을 두고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당대의 바람직한 청년문화운동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생겨나자, 탈춤부흥 민속문화운동 쪽에서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반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갈 점은 문화운동은 결코 탈정치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운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문화운동적 성격을 지닌 정치·사회적 움직임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나는 우리 근대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문화운동을 동학사상의 포태와 이에 바탕을 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로 본다. 동학의 핵심 사상인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개념에는 가히 ‘문명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컬음직한 엄청난 세계관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는 사회변혁을 위한 최고의 정치원리와 사람 삶의 관계를 담아낸 근원적인 문화윤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학운동 이후 일제강점기에 민족자주의 시각에서 애국계몽사상을 보급하려 한 활동들, 무엇보다도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선각들의 활동 역시 본래적 의미에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그러한 ‘문화적’ 활동들이 -설혹 탈정치를 표방했다 하더라도- 끝내는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학의 자주평등사상이 결국 반봉건 농민혁명과 반외세 농민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이었으리라.


문화운동은 문화적 기제와 방식을 통해 세계와 인간,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혹은 지켜내는) 운동이다. 사람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먼저 바꾸어서(혹은 지켜서), 일상의 관습과 생활태도를 바꾸고(혹은 지키고), 그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문화운동의 진정한 의미이고 목적이다. 이처럼 문화운동이 본래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성을 지니고 있는바, 난폭한 독재권력의 시선에서 보면 민중문화운동이란 것은 문화를 빙자한 불온한 정치운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고, 완고한 보수 문화예술진영한테서 ‘민족예술운동’ 따위는 예술의 품격을 저해하는 불순한 반예술행동으로 공격받기도 한다. 어떻든, 80년대 이후 용태 형과 나는 그러한 민중문화운동과 민족예술운동의 거친 광야를 함께 헤쳐나간 동지였다.


민중문화운동 표방 첫 단체 ‘민문협’
84년 만들면서 만난 그는 대번 형노릇


민문협이 남긴 의미 있는 유산은
기관지 ‘민중문화’와 비합법 테이프
책자는 민주화운동의 씨알이 되고
신경림·신동엽 등 민족시 낭송과
내가 작창한 ‘똥바다’ 녹음한 테이프
몰래 복사해 비공식 판매됐다


온몸 내던져 독재 맞서던 처절함이
6월항쟁서 거대한 에너지로 빛났다
마당극으로 걸개그림으로 춤으로


 

■ 민중문화운동의 첫 결집체 ‘민문협’


‘민중문화운동’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최초의 재야 운동권 단체는 84년 결성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다. 이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을 보면 작가 황석영을 비롯해서 동아투위 김종철, 춤꾼 이애주, 화가 김용태, 불교계 여익구, 기독교계 최민화, 출판계의 김학민, 문학평론가 채광석, 탈춤원조 채희완, 영화감독 장선우 그리고 마당극판의 광대 필자 등이 선배 그룹을 이루고 있었고, 문학평론가 김도연, 문화정책가 박인배, 화가 김봉준, 문화기획자 김영철, 연극기획자 유인택, 문화이론가 정희섭 등이 후배 그룹을 이루어 실행위원회와 사무처를 담당했다.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에서 보듯 이 단체는 문학을 비롯해서 미술·연극·탈춤·무용·영화 등 예술 분야는 물론이고, 언론·출판·종교 그리고 문화정책까지를 망라하는, 문자 그대로 문화계 전반을 포괄하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민문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야 ‘김용태’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지, 그 전에는 그를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민문협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초기 각 장르의 대표 인물들과 접촉해 참가를 독려해야 하는데, 그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화가는 두렁패의 김봉준과 현실과 발언 그룹의 ‘오윤’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윤 형은 그런 조직운동에 나선다거나 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어서 다른 인물을 물색해야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김용태라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근무한다는 인사동 어느 사무실로 찾아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다. 거기가 미술 관련 잡지사였는지, 진학 관련 잡지사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만나보니 그는 이미 민문협 추진에 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눈치였고, 나는 그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탐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당시 몇해 전 <창작과 비평>에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라는 마당극론을 제창한 적이 있고, ‘이야기와 판소리’ ‘살아있는 판소리’ 등의 창작판소리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었으므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용태 형은 아마도 오윤 형을 통해서 내 얘기를 들어 좀 더 알고 있는 것 같았고, 현발 창립 멤버로서 미술계를 대표해 민문협 참여를 암묵적으로 수락한 셈이었다. 그 뒤 두번째 만남부터 용태 형이 대번에 말을 놓으며 형 노릇을 하려고 했음은 앞서 필자들의 경험과 똑같다.


1987년 7월9일 최병수 작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내걸린 연세대 학생회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최병수는 앞서 6월11일 신문에 실린 최루탄 피격 현장 사진을 보고 학생회관에서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그림을 그려 다음날부터 건물 외벽에 걸었고, 이는 6월항쟁의 상징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 폭압정치가 낳은 문화운동의 절정기


민문협은 그 포악스럽던 전두환 정권 시절, 김근태 등이 앞장서 출범시킨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와 더불어 독재정권 타도의 깃발을 가장 높이 치켜든 단체 중 하나다. 그처럼 무자비하게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5공화국도 말기가 가까워진 85년 이후에는 일종의 문화통치로 전략을 교묘히 수정한 까닭에, 문화운동의 깃발을 든 민문협의 임무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 무렵 민문협의 상임대표는 동아투위의 김종철이었다. 초기 민문협 내에서 용태 형의 위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현발 기획전시회나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같은 데 더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민문협에서는 단지 장르별 실행위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한편 민문협을 창설하는 데 앞장서 바람을 잡았던 황석영은 김종철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벌써 바깥에서 또다른 일을 개척하고 있었다. 85년 봄, 나는 ‘석영 형’과 함께 독일 베를린의 ‘제3세계문화회의’에 초청받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윤이상 선생과 송두율 교수 등과도 만났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바로 귀국했지만 석영 형은 남았는데, 그 머무름은 3년 뒤 형이 방북을 결행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시절 민문협이 해낸 사업으로 크게 두 가지 유산이 남아 있다. 하나는 기관지 <민중문화>다. 비록 부정기적으로 나온 얇은 책자였지만 민청련이 발행한 <민주화의 길>과 더불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씨알 같은 기록이 되었다. 이 책의 기획 책임은 기자 출신 상임대표 ‘종철 형’의 몫이었지만, 편집 디자인은 본업이 화가이고 각종 편집디자인의 달인이었던 용태 형의 몫이었다. 그의 손이 간 책들은 아무리 허름해도 검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또 하나 민문협이 남긴 유산은 이른바 ‘비합법’ 카세트테이프들이다. 비합법? 우리는 불법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저들이 합법으로 허용해주지 않으니 부득이 찾아낸 신조어가 비합법이었다. 대한민국 비합법 카세트 1호는 성내운 교수가 낭독한 ‘분단시대의 민족혼과 민족시 낭송’이다. 그는 전업적인 시 낭송가가 아님에도 재야 인사들이 모인 작은 모임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담아낸 민족시들을 스스로 선정해 낭송하곤 했는데, 시의 내용과 낭송의 감정이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곤 했다. 이 테이프에는 성 교수의 음성으로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신경림의 ‘4·19날 고향에 와서’,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 백기완의 ‘전지 요양의 길목에서’, 고은의 ‘화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비합법 카세트 2호는 김지하 원작 담시를 원재료로 해서 내가 작창한 판소리 <똥바다>다.

 
당시 민문협 후배들은 운영 재정을 만들기 위해 이 비합법 카세트를 몰래 복사해서 비공식으로 판매했는데, 한번에 3개씩밖에는 복사가 안 되는 구형 복사기인지라 돌아가며 밤새워 작업하는 날이 많았다. 정식 음반이 아니었으므로 조야한 재킷이나마 스스로 만들어야 했는데, 다들 어렵게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용태 형 손에 닿기만 하면 마술처럼 금방 쉽게 풀리곤 했다. 민문협은 비록 가난했지만 각 갈래가 모여 있어 분업과 협업이 언제든 가능한 체제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포악의 극치였던 전두환 시기가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민중문화운동의 절정기였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화려해서가 아니라 가장 처절했기 때문에 절정기였다. 왜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가? 첫째는 문화 전반의 각 분야가 그만한 크기와 결속력으로 다시 모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문화가 어떤 형체였는지 점차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온몸을 내던져 상황을 타개하려는 처절함이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문화예술의 신명과 민중의 함성 일치


마침내 87년 6월! 그간 십수년 동안 축적된 민중문화운동, 민중예술운동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분출하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부터 시작해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팽창해온 국민적 분노가 이른바 ‘6월항쟁’으로 폭발하던 시기, 탈춤·마당극·풍물굿 등 공연예술 장르와 더불어 민중예술운동의 커다란 축으로 부각된 갈래가 바로 민중미술이었다. 전시장 액자 그림이 아닌 걸개와 벽화를 시도하던 민중미술의 방향이 얼마나 절실한 바람이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던 날, ‘미술’은 눈부시게 빛났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그날, 87년 7월9일 연세대 교정에는 거대한 걸개그림과 수백개의 만장들이 세워졌다.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와 더불어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압권이었다. 특히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한 친구의 모습을 그린 최병수의 그림은 그 자체로 거대한 깃발이었다. 깃발로 흔들어 불러일으키는 항쟁의 절정이었다. 그림이 말을 하고, 그림이 외치고, 그림이 절규하고, 그림이 통곡하고, 그림이 분노하고, 그림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이한열의 주검을 실은 거대한 상여를 풍물패와 상여꾼이 운구하는데, 뜻밖에 소복한 어떤 여인 하나 튀어나와 몸부림으로 춤을 추며 베를 갈라 죽은 이의 넋을 걷어내니, 춤꾼 이애주였다. 백기완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썽풀이춤’이다. 그날 우리는 민중문화와 민중예술의 어떤 신명이 거대한 시민항쟁의 분노 함성과 일치하면서 최고의 정치적 경지에 이르는 순간을 분명히 목격했다. 87년 6월! 용태 형과 민족미술 진영, 그리고 우리네 민중문화운동 진영이 길러낸 문화역량이 한 시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로 전환되는 순간이었고,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문화와 정치가 일치하는 황홀함을 맛보았다.


그리고 6월항쟁은 일단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민주진영이 균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용태 형과 나는 무언가 급박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또다른 문화운동이었다. (계속)


필자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4년 6월26일 서울 경운동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의 다섯번째 주제전 ‘6·25전’ 출품작으로 첫선을 보인 <디엠제트>는 작가 김용태의 대표 걸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사진콜라주라는 새로운 형식과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의 사진’을 내건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문화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훗날 재전시회 때 원본이 아니라 저장해놓은 사진 파일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사진작가 고 김영수가 찍었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여섯번째로 조각가 이태호씨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주제전 ‘6·25전’에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 김용태의 대표작 <디엠제트>(DMZ)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진 190장 콜라주 작품 ‘DMZ’
사진속 한국 여성과 미군 통해
휴전·분단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호소력있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훗날 “여성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진들을 없애 원본은 이제 없다
‘DMZ’는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위에서 폭발하고 사라졌다

 

■ ‘현실과 발언’의 청년시대

 

 

1980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흉흉하고, 불길하고, 우울했던 해로 기억된다. 기억 속에서는 내내 계엄령 아래서 살았던 것 같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그 엄청난 소식도 ‘카더라’와 소문에 의해 더듬더듬 알게 됐다. 김재규가 사형당하고, 친구들이 어디론가 잡혀갔고, 갑자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어 체육관 선거에 의해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해 12월 말 밤늦은 귀갓길에서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져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병원에서 누워 있던 그때 ‘현실과 발언’의 최민과 성완경 두 분이 찾아왔다. 회원으로 같이 활동해보자 했다. 두 분의 방문 자체가 황송해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무조건 “예”라고 답했다.

 

 

‘미술은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게 당시 미술인 대부분이 인정하는 정답이었다. 미술은 냄새나고 구차스런 현실을 떠나 어떤 고상한 것, 어떤 아름다운 것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현발’은 그 이름에서부터 정답을 무시하고, ‘현실’ 뿐만 아니라, ‘발언’까지 들고 나온 미술그룹이어서 당연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 창립전이 ‘촛불전시회’가 되고, 결국 취소되는 사태를 겪은 뒤 나는 현발과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꼼짝없이 모더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주의와 작가주의에 찌든, 이리저리 집단으로 몰려다니거나, 누굴 대표해 발언하거나, 또 그런 일로 쓸데없이 주위의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름 깐깐한 미술쟁이였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현발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참여하고 있던 여러 미술그룹 가운데, 현발은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는 ‘학벌’이니 ‘동문’이니 하는 게 없었고, 강요되는 ‘선후배 서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들 앞에서 그런 것들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현발은 재미있었고, 지적 자극과 도전이 있었다. 회원들은 음주가무에 있어서도 탁월했지만, 토론과 의견 개진에도 누구 하나 뒤처지는 일이 없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연구하는, 그리고 미술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연습장이자 경기장이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많은 회원들이 당시 미친 듯한 속도로 ‘산업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일부는 그러한 현실을 강요하거나 주도하는 정부 혹은 대기업 등 권력에 예리한 관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현발의 주제전 ‘제2회 도시와 시각전’과 ‘제3회 행복의 모습전’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4회전의 주제는 ‘6·25’로 정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6·25는 최대의 사건이었지만 한국 미술에서 그것을 다룬 작품은 실로 미미했다. 그러한 한국미술사의 기이한 현상을 두고 자성하는 의미의 토론을 하다가 ‘6·25’가 그 해 전시의 주제로 정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 김용태의 작품 ‘디엠제트’의 폭발

 

 

그 ‘6·25전’에 김용태는 작품 <디엠제트>(DMZ)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용태는 동두천과 의정부 등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며 손님들이 촬영한 뒤 찾아가지 않고 있는 사진들을 구해 왔다. 그리고 검은색 배경 위에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영어 대문자로 ‘DMZ’를 만들었다. 모두 800여 장을 수거해 왔다는데, 최종적으로 작품에 사용된 사진은 180여장으로, 크기는 3×5에서 11×14인치까지 다양했다.

 

 

되돌아보니, 작품 ‘디엠제트’를 나는 3회에 걸쳐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만났다. 맨 처음은 역시 현발의 <6·25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84년 인사동 아람미술관에서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88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민중미술전>(민중 아트-어 뉴 컬처럴 무브먼트 프롬 코리아)에서였다.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201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30년전>이었다.

 

여기서 작품 <디엠제트>의 특징과 내 느낌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그 감동은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의 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작품이 아니다. 또한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품처럼 작가가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조작하거나 합성해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사진을 김용태 작가가 발견해 수집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발견된 사물’이다. 그 사진들은 원본 자체에는 아무런 조작 없이, 작가에 의해 디엠제트라는 글자로 배열됐을 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차용’ 방식이다.

 

 

그 사진들이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80년대 한국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점을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도 모더니즘의 ‘보편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용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지닌 호소력과 설득력이다. 그 작품은 물건으로서의 미술품이라기보다는 개념과 기호로 소통하고 공감을 나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는 일종의 ‘개념미술’이다. 그것은 한국의 당장의 현실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라는 추상어를 구체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과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가 하면, 우리가 여전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존상태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은 미군 병사의 모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는 한국의 여인들과, 병사의 배경에 있는 풍경들에 관심을 간다. 사진 배경에는 한국의 기와집과 초가집 등 그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가 하면, 국적 불명의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도 있다. 그야말로 모두 ‘키치’들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 앞의 미군 병사들이 비선택적으로 한국에 와서 삶의 한동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시골 출신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으므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는 배경의 글에서 한국을 지옥이라 했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도 나는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글에서 한국은 우리가 사는 한국이 아니다. 군 복무로서 한동안 보내는 그들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들도 제대 뒤 흔히, 근무하던 부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차원일 것이다.

 

 

그 사진들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는 병사들의 포즈나 배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 그 구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특별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한국 여인이 흑인과 백인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진이다. 완전히 다른 피부색의 두 아이를 가진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결코 나만의 체험이 아닐 것이다.

 

 

지난 ‘현실과 발언 30년전’의 인터뷰에서 김용태 작가는 전시회 이후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 사진에 나오는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 사진들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의 원본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폭발한 뒤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은 사진작가 김영수의 사진 복사본이다. 이는 개념미술가로서의 김용태를 잘 드러내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작품=물건=상품=매매’라는 도식이 그의 머리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디엠제트’ 이후, 미술 현장을 떠났다. 그 대신 삶의 현장으로 갔다. 문화를 통한 사회변혁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보였다.

 

 

■ ‘디엠제트’를 입체작품으로 세우자

 

 

김용태 작가가 투병중일 때 나는 작가에게 작품 ‘디엠제트’를 입체로 제작해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입체작품 <러브>(LOVE)를 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그는 영어 ‘LOVE’란 글자를 회화로뿐만 아니라 입체작품으로도 만들어 세계 여기저기에 세워놓고 있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디엠제트’가 ‘러브’보다 못할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조각가인 내가 도와드릴 테니 어서 병석에서 일어나 함께 일도 하고 재밌게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용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제 이 제안은 수사를 넘어 하나의 필수 사업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통일되는 그날을 위해 그의 작품 ‘디엠제트’가 기념비로 서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통일이 되어, 철조망도 사라지고, 그래서 디엠제트도 사라진 뒤, 그 땅 한가운데에 김용태의 ‘디엠제트’ 기념비가 서는 것을.

 

 

이태호 / 현실과 발언 동인·경희대 교수

 

 

1984년 ‘6·25전’ 출품작 <디엠제트>에 쓰인 실사 사진 가운데 일부.

 

 “우월감 젖은 미군의 점령군 행세 폭로한 것”

 

용태형이 말하는 ‘DMZ’

 

 

“다섯번째 주제전 ‘6·25’을 2개월 남짓 앞둔 1984년 4월의 어느 일요일, ‘현실과 발언’ 회원 일행은 동두천행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다. 봄이었으나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동두천 기지촌’에라도 가보자는 한 회원의 제안에 따른 길이었다. ‘아직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어쩌면 특수한 문화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을 품고서였다.”

미술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인 ‘디엠제트’(DMZ)의 창작 과정과 ‘6·25’전의 의미에 대해 고 김용태 선생이 직접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현실과 발언>, 열화당 펴냄

 

 

4월 동두천 기지촌 답사 때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김용태 선생이 사진관을 순례하며 수집한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들의 기념사진들이다.

 

 

 

사진속 체념한듯한 여성의 사진
뇌리에 깊게 남아 작품 만들어
미군 장교들이 사진 뜯어내기도
“진정한 작품 이해 없었다”고 회고

 

 

 

“버스에서 내려 약 15분간 걷다 보니 ‘내국인 출입 금함’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골목에 당도했다. … 우리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장면은 사진과 진열창 속의 많은 컬러사진이었다. … 그 사진들 중에서 국제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웃고 있었으나 특히 여자의 표정은 삶을 체념한 듯한 우울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계속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두천을 다녀온 지 한달이 넘었으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 어느 날 중앙청 앞 신호등에서 멈춘 출근 버스 속에서 본 풍경이 자꾸만 아롱거렸다. … 조선조 태조 4년에 창건된 광화문, 그 지붕의 잿빛 기와와 화려한 단청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그 아래쪽 붉은 대문, 노랑머리의 키 큰 외국인과 곱슬머리의 젊은 한국 여인, 해태상, 동상마냥 서 있던 전투경찰의 자세, 일제 때 지어진 중앙청 건물, 그 뒤쪽의 장엄한 인왕산 등등.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동두천 사진관에서 느꼈던 ‘분단의 현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김용태는 혼자서 동두천을 여러 차례 오가며 진열창 속의 사진들을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사진관 주인과 장기·바둑·화투를 놀아 주고 때로는 막걸리를 대접하며, 한 장에 300~500원씩 흥정하거나 1천~2천원까지 지불하며 모두 800장을 모았고, 그 가운데 190여장을 골라 출품했다.

 

 

마침내 그해 6월26일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6·25’ 주제전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진 콜라주 형식의 ‘디엠제트’는 전례없는 “대박”이 났다. 하지만 정작 김용태는 관객의 반응을 두고 “내 작품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왜 이런 사진들이 미술전시회에 나와 있는가란 의구심과 6·25란 역사적 주제와 이 사진과의 관계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많이 받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에이에프케이엔>(AFKN)의 프로듀서였던 테리 크라우제의 제안으로, 85년 2월 한달간 미8군 영내에서 ‘2인전’이 열렸는데 첫날부터 일부 미군 장교와 대부분 한국인인 그 부인들의 항의로 사진들이 떨어져 나갔고, 특히 미8군 최고층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서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불쾌해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김용태는 “동두천 사진들은 그들이 우월감에 젖은, 즉 점령군이란 명목 아래 과시해온 많은 행위들 중에 하나의 표시를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기고문을 마무리지었다.

 

 

[한겨레신문]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80년 10월 창립전부터 화단은 물론 문화계 전반에 충격을 던졌던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89년 말 발전적 해체를 결의한 뒤 90년 창립 10돌 전시회로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다. 사진은 90년 10월6일 서울 관훈미술관 3층에서 ‘현단계 미술운동과 창작의 문제’를 주제로 열린 창립 10돌 기념 토론회로, 앞줄 왼쪽 넷째부터 임옥상, 유홍준, 원동석, 한 사람 건너 김정헌, 강요배씨. 객석 맨 오른쪽 고 문호근, 그 뒤로 심광현(안경 쓴 이)씨 등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다섯번째로 작가 임옥상씨가 1979년 말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 때부터 시작된 35년 인연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람 선별능력은 가위 동물적이다
저자가 순수하냐, 사가 끼어있냐
한번 투시로 꿰뚫었다
통과된 자는 그대로 믿고 품었다
그 규모가 일개사단은 넘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관여하면서
형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당연히 주변에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늘 무관이고 빈주머니였다
전술은 뛰어났지만 전략엔 약했다

 

■ ‘용태 형’의 미스터리


“임 작가, 차비 있냐?” ‘용태 형’은 누구에게나 헤어질 때 꼭 차비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막상 차비를 받아 가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형은 역시 누구에게나 ‘작가’란 칭호를 붙였다. 물론 화가 동료들에게 말이다. 내게 처음 작가 칭호를 붙여준 게 아마 용태 형일 것이다. “임 작가” 얼마나 친밀한가! 여기에 차비까지 걱정해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나는 명색 대학교수였고 형은 늘 직업이 불안했다. 그런 형이 차비를 물으니 감동일 수밖에.


형은 두어 번 잡지사 주간을 맡은 적이 있었으나 길지 않았다. 도무지 가만두지를 않았다.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호출(?), 차출(?)되는 것이 형이었다. 아니 제일 먼저 스스로 손들고 뛰쳐나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두 망설이고 주저하며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형은 즉발적이고 즉각 자원하고 나섰다. 모든 일이 다 민주화와 민중문화운동과 연결된 것들이었다. 그는 비록 미술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넓고도 넓었다. 어찌하다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난 사실 잘 모른다. 미스터리다.


나는 1979년 연말 ‘현실과 발언’(현발) 창립 무렵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일면식이 없었다. 아니 전혀 알지도 못했다. 이름도 듣지 못했다. ‘현발’ 창립 준비모임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 김용태요!” 하면서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인데 처음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도 곧바로 반말세례를 받았다.


현발의 공식적인 회의는 성완경 선생이 이끌었다. 최민 선생과 성완경 선생은 마치 의견을 조율이라도 하고 나온 듯 쿵짝이 잘 맞았다. 그러나 비공식 부분은 용태 형 몫이었다. “술 들어. 안 마시나? 마셔! 노래해봐, 뭐야? 빨리빨리 해! 그만 따져. 하면 하는 기지!? 치아라! 좋아. 됐어.” 모든 추임새는 그의 몫이었고 오락 진행도 그의 뜻대로였다. 그렇다고 회의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는 회의에 활력을 넣는 것, 그래서 회의를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현발 회의는 노는 것인지 장난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정말 재미있는 장면을 항상 연출했다. 그 가운데 용태 형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현발의 목적보다도 그 모임 분위기가 좋아서, 사람들이 좋아서, 용태 형이 보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눈 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다. 어떤 감각 더듬이로 사람을 선별하는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의 선별 능력은 가위 동물적이다. 저자가 순수하냐, 혹은 사가 끼어 있느냐를 꿰뚫었다. 술좌석에서는 곧잘 술잔이 날아다녔다. 그의 성질은 그만큼 단호하고 과격했다. 그의 웃음은 너털웃음이지만 그의 안광은 야수처럼 꽂혔다. 지금도 그 앞에서 발발 떠는 자들이 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그는 한번 그의 직관력으로 파악된, 그래서 그 한번 투시로 통과된 자는 그대로 믿었다. 아니 믿음을 넘어 품에 품었다, 챙겼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늘 품고 보살폈다. 지금도 그 규모가 일개 사단은 족히 넘을 것이다. 나도 그의 품속에서 따뜻했다. 언제나 불러주고 놀아주고 안아줬다.


현발 초기 우리는 매일 만났다.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어디에선가 누군가들은 만나고 있었다. 나는 비록 광주나 전주에 있었지만 ‘언제 서울에 가나’만을 생각하고 기다렸다. 최민 형의 광화문 작업실, 용태 형의 관철동 사무실이 1차 모임 장소이자 사랑방 구실을 했고, 주변 술집으로 2차, 3차가 계속되었고, 끝내는 누군가의 집에까지 가서 합숙하기 예사였다.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았으나 김정헌 형 집, 용태 형 집이 제일 개방적이었다, 편했다.


또 워크숍이, 스터디 모임이 계속되었다. 우린 모두가 쇼맨십이 대단했다. 농담할 줄 모르는 자, 즉각적으로 웃을 찰나를 못 맞추는 자, 노래 시켜도 빼는 자, 술을 못 마시는 자들은 설 땅이 없었다. 못 마셔도 마시는 척, 마신 척해야 했다.


우리는 전시회에서의 겨루기보다 술판 겨루기가 더 빡셌다. 술판이 주 무대고 전시는 뒷전이었다. 이게 더 정확하다! 아니 술안주를 위해 작품을 하는 것처럼 술좌석에선 작품 품평회가 질펀하게 농반진반으로 난무했다.


권력의 중심 그러나 빈 주머니


시국에는 격랑이 휘몰아쳤다. 나라는 풍전등화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갔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녹록지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비록 ‘졸개’들이었지만 그 뿌리는 깊고 깊었다. 민주화와 연계된 민중문화운동의 초반은 문단에서 이끌었지만 그 뒤를 화단이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시각예술과 활자예술의 차이랄까. 민족미술협의회, 그림마당 민, 걸개그림, 벽화, 판화, 만화. 이제 그림은 먹물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용태 형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사이 용태 형은 이미 그림판을 떠나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언젠가 프랑스 유학 중이던 최민 형이 용태 형에게 그림 그리라며 유화 물감을 사서 보낸 적이 있다. 나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자고 권유를 했다. 하지만 용태 형은 84년 현발 동인들의 주제전 <6·25> 전시회 때 <디엠제트>(DMZ)를 끝으로 그림을, 작품을 손놓았다. 그러고선 민족미술협의회,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만들었다.


용태 형이 아니었으면 못 할 일들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시간이, 절대적 시간이 형에겐 부족했다. 어느 때부턴가 나도 형을 보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입성하고 민예총이 자리를 잡으면서 형의 행동반경은 더욱더 넓어졌다. 이젠 전국을 망라해야 했다. 엔지오(NGO)로서 지오(GO) 영역까지 깊이 관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노무현 정부 때는 정치적 입김이 더 커졌기에 또 더더욱 그랬다. 어느덧 형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신은 공정(?)하게도 형에게 돈 관리 능력과 사람 관리 능력까지는 주지 않았다. 전술은 뛰어났지만 전략엔 약했다. 민예총이라는 전국 조직을 움직이기에 자본은 항상 구멍이 났고 사람을 꿰뚫던 안광도 한계가 있었다. 용인술에 문제가 있다 보니 조직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떠났다. 새로운 기획과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그 인력과 자본으론 역부족이었다. 회원과 그 힘으로 조직이 움직여야 하는데 형은 늘 정치적 방식으로 해법을 찾았다. 정부와 밀착하는 만큼 일의 신선도가 흐려지고 의미도 바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창출하는 데 일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력은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권력은 인격이 없다. 권력은 지배할 뿐이다. 권력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은 상처받지 않는다. 권력은 붕괴한다. 인간도, 예술도, 철학도, 과학도, 역사도 권력에겐 의미가 없다. 권력은 오직 권력만이 목적이다. 용태 형은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가? 아니다. 권력이 용태 형을 삼킨 것이다. 그가 권력을 탐했거나 쫓아다녔다면 오늘의 모습일 수가 없다. 대신 남 좋은 일만 했다. 빈털터리.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아니 권력의 중심에서도 그는 늘 무관이고 빈 주머니였다. 물론 한때 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을 쓴 적도 있으나, 실은 모두 다 심부름, 즉 ‘따까리’, ‘설거지’ 자리였다.


나는 계속 의문을 갖는다. 왜 그림 작업을 포기했을까. 작업하자면 그는 “됐어!” 그 한마디였다. 용태 형은 아마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더 큰 작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달은 것을 말이다.

 
그의 대표작 <디엠제트>만 해도 그렇다. 이 작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이로운 작품, 작업이다. 의정부, 동두천 미군부대 주변 사진관에서 기지촌 여성들 사진을 수집하여 만든 이 작품은 우선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은 그리는 것이다’라는 통념에 젖어 있던 나의 뒤통수를 쳤다. 분단의 비극, 처연한 현실 앞에 나는 말을 잊었다. 미군 병사의 품속에서 웃고 있는 우리의 동시대로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은 그대로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DMZ, 맞다! 디엠제트는 바로 저 여인들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결코 지옥에 갈 수 없다. 여기가 지옥의 한가운데인데 더 이상 다른 지옥이 또 있겠는가?’ 사진 속의 미국 병사는 말한다. 여기 한국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용태 형은 미술의 허망함을 보았을 것이다.


이 사진을 모으며 기지촌을 배회했던 용태 형에게 미술은 한낱 배부른 자들의 유한취미로 비쳤을 것이다. 세상은 사람을 움직여야 변한다고, 미술만으론 안 된다고 새기고 또 새겼을 것이다. 스스로 붓을 꺾고 현장에 뛰어들었던 낭만적 혁명가, 김용태 형! “형, 오늘 차비 있어? 오늘은 내가 형 차비 줄게!”


임옥상 화가·임옥상미술연구소 소장

 

 


김용태 선생은 1980년대 10년을 관통한 ‘현실과 발언’ 시절을 “진지하면서도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사진은 87년 봄 남양주 능내리 한강변에서 ‘현발’ 정기 워크숍을 마치고 찍은 것으로, 왼쪽부터 김용태, 임옥상, 두 사람 건너 김정헌, 김선화·박재동 부부, 박세형, 김건희·신금호 부부, 강요배. 앞줄 왼쪽부터 주재환, 김용태 선생 부인, 민정기, 안규철씨.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놀기도 잘 놀았어…서로 얘기하고 싶어 죽는 거지”

 

용태 형의 ‘현발’ 회상

 

“모두들 흩어져라!” 고 김용태 선생이 회상하는 ‘현실과 발언’ 결성 배경은 1979년 ‘12·12 쿠데타’의 공포와 겹쳐 있다.

 

“그해 ‘10·26’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가 터질 때였다. 여느 때처럼 청진동 중국집에서 ‘현발’ 창립 동인들이 거사(?)를 모의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김윤수 선생이 어떻게 알고는 뛰어들어와 고함을 질러 혼비백산했다.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먹어보지도 못하고 흩어졌어. 김 선생은 70년대 초반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해직된 경험이 있어서 일종의 행동요령을 알고 계셨던 거지.”(<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마포의 <미술과 생활>을 떠나 78년부터 주재환과 함께 일하던 김용태의 종로 ‘관철동 편집실’은 사실상 ‘현발’의 회합 장소로 쓰였다. “관철동이라는 데가 명동에서 넘어오는데, 집세가 좀 쌌어. 그래서 번역하시는 분들, 신경림 선생, 민영 선생, 천승세 소설가, 그런 사람들이 우리 방에 와서 죽치고 있었어. 매일 같이 살았어. 그래서 문인들하고도 거기서 잘 어울렸지.”

 

‘술객’ 모임이 토론자리로 발전
“현발은 우리 나름대로의 반란”

 

하나둘 모인 ‘술객’들로 시작된 관철동 모임은 ‘10·26’ 이후까지 주말마다 한가지 이상의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로 발전했다. “어느 날 손장섭 선생이 ‘미술 하는 사람이라고 그림만 그려야 되겠나.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한다. 정물이나 풍경만 그려서는 안 된다’고 했던” 순간을 김용태는 ‘현발’ 태동의 계기로 기억한다. “특히 성완경의 주장은 영향이 컸어요.” 그 무렵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예술의 사회현실 참여 사례를 집중적으로 소개해 미술인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유신 말기까지 이어진 관철동의 주말 토론 모임에서 멤버들은 예술가로서 비판적 시각으로 나름의 견해를 발표하고 차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찾아 자연스럽게 ‘현발’이 탄생했던 것이다.

 

화제와 파문을 던진 80년 1월의 ‘현발’ 창립전 구상도 술자리에서 나왔다고 김용태는 기억한다. “저녁이면 답답하고 그러니깐, 관철동 설렁탕집에서 막걸리 한잔씩 먹는데, 어느 날인가 원동석이 ‘내년에 ‘4·19’ 20돌인데 가만있어서 되겠는가? 의기투합해서 전시회를 준비하자’ 했어. 그러면서 멤버들이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을 벌이게 된 거지.”

 

79년 11월 가장 막내 격인 윤범모가 “솜씨 좋게” 문예진흥원 미술관을 대여하면서 본격화된 창립전 준비 당시의 분위기를 그는 한마디로 “참 진지했다”고 증언했다. “긴장된 사회 속에 살다 보니깐. 우리 나름대로는 반란이지. 음모를 꾸민 거지.”

 

유신 말기, 술집에서조차 대여섯명만 모이면 신고를 하게 되어 있었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현발’의 결성은 모임 자체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김용태의 기억 속 그 시절은 여전히 ‘낭만이 살아 있던 시대’였다. “놀기도 잘 놀았어. 말하기 좋아하는 신경호·임옥상·노원희·박재동·강요배가 나타나면 서로 얘기하고 싶어 가지고 죽는 거지. 시끌시끌하고 재미있어.”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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