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⑨

 

1999년부터 12년에 걸쳐 전국을 돌며 ‘우리땅 터벌림’ 춤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한 우리춤꾼 이애주 교수(오른쪽)와

사진작가 김영수(왼쪽)씨가 2011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마지막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작가 곽명우 제공

 

 

 

■ ‘무당 아닌 무당’ 오윤이 맺어준 인연

 

‘입관하던 마지막 순간/ 그렇게 아름다운 장엄은 본 적이 없다./ 한 떨기 연꽃 송이로 피어났다./ 아주 신선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커다란 슬픔도 아름다운 고요로 돌려놓았다./ 아, 몸의 무상함이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냥 하나라는 것/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빛을 발하고 있는 만인의 용태 형.’

 

‘용태 형’과의 첫 인연은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시대인 1980년대 초반 그의 절친이자 판화가인 ‘윤이 형’(오윤·작고)이 나의 춤 작업실에 드나들 때였다. 나는 춤패 ‘신’과 함께 <도라지꽃>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 만행인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를 주제로 한 조선여성수난사를 다룬 춤굿이었다. 성가실 정도로 드나들며 쫓아내면 낼수록 더 신명나게 판을 잡던 윤이 형. 신들린 눈빛, 귀신 형용으로 사물을 파고드는 무당 아닌 무당인 그가 입만 열면 나오는 이름이 ‘용태, 용태’였다. 그러다 마침내 용태 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일 정도로 정감있으면서 구수하지만 그 안에 보이는 깡심있는 눈빛은 척 봐도 윤이 형이랑 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도라지꽃’ 작업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용태 형의 활약은 점점 빛이 났다. 잠실 석촌호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 그 원형 야외마당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장식한 것이다. 현발의 내로라하는 민중·민족화가들이 한 점씩 맡아 그려냈다. 낮부터 북춤, 탈춤, 강강술래 등 가족과 함께하는 춤, 대동춤으로 흥을 돋운 뒤 어스름 해질녘부터는 횃불을 밝히고 ‘도라지꽃’ 막을 열었다. 병풍처럼 원으로 둘러쳐진 걸개그림은 땅과 하늘과 맞닿아 횃불에 일렁거리며 살아 움직였고 중심으로 모아지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의 타오르는 기운은 일제의 만행을 싹 쓸어버릴 만했다. 우리 민족예술사에서 언제 그러한 장관이 펼쳐졌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다시 한번이라도 전개될 수 있을까. 바로 용태 형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다음 작업은 86년 6월 판화가 오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칼노래>였다. 용태 형이 “윤이 판화전 여는 날 뭘 좀 해야 되는데” 하여 즉각적으로 맘을 맞추고 준비했다. 그날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등 원조 사물놀이패와 호흡을 맞춰 상기된 마음으로 판을 열었다. 서로 처음 해보는 열림굿춤판이었다. 청수를 소반에 받쳐 들고 그림판을 돌아 예를 갖춘 뒤 기운 닿는 그림들과 집중적으로 교감하며 춤추었다. 신명이 내리면서 벽에 걸린 그림의 군상들이 걸어 나오기도 하고 내가 들어가기도 하며 하나가 되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르면서 관객 모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 흠뻑 땀으로 젖은 채 끝이 났다.

 

훗날 평론가 이태호 교수는 이런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한국미술사 마지막 강의 때 열림굿춤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양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고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좋은 선례이기 때문입니다. 오윤 선생님의 작품과 함께 말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문화가 어떤 시대 양식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나 자신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음속으로 이 교수에게 무척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바로 87년 ‘바람맞이’의 토대를 깔아준 셈이다.

 

그런데 전시 끝나고 외국 공연 며칠 다녀오니 윤이 형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용태 형이 “윤이 그림 한 점 챙겨줄게” 하며 춤그림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림을 받아들고 이 상황이 무엇인지, 휑한 마음으로 그냥 서 있었다.

 

■ 춤작업실이기도 했던 그림마당 민

 

그즈음 나는 ‘그림마당 민’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림마당 민은 서울 인사동 수도약국 골목 맞은편 지하에 있었는데 나는 대충 그림 쪽 판에 일이 많았고 또 그때 모든 활동의 주무대가 그곳이기도 했다. 저녁때 그림전이 끝나면 그때부터 내 작업실인 양 춤작업에 들어갔다.

 

역시 용태 형이 주도해 85년 결성된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 창립일에는 <부적살풀이>로 의례를 올렸다. 이 작업도 민미협 화가들이 대형 부적을 함께 그리면서 춤의 윤곽이 잡혔다. 촛불을 밝히며 부적을 펼쳐 들고 등장해 땅에 중심을 잡아 놓고 부적을 풀어내는 살풀이 형식이었다. 그처럼 큰 부적도 처음이었지만 춤 구성도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살풀이로 부적을 풀어내면서 신명으로 치달았고 춤패들이 진달래 가지를 너울거리며 부적을 돌아 진달래꽃춤 군무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도 가끔 그 부적살풀이가 생각나고 부적 그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 그냥 춤이 아니라 그날의 행사 전체를 의례춤굿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86년 8월15일에는 민미협이 그림마당 민에서 <통일전>을 열었는데, 나는 윤이 형의 <통일도> 앞에서 ‘통일무’를 추었다. 이 춤 또한 통일의식을 치르는 대동판으로 이끌었다. 그 중심에 항상 용태 형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 당시 작업은 거의 민미협과 연결되었고 대부분 처음 시도해보는 것들이어서 나로서도 창조의 본성에 불을 지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화가들도 그림 소재로 나의 춤을 즐겨 그렸다. 나도 특별한 경험을 하며 서로 상생작용이 일어났고 생각지도 못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즈음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도 결성됐다. 앞에 임진택 명창의 글에서 자세히 나왔지만 황석영, 김종철 등 각 분야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선후배 동지들이 모였고 물론 용태 형도 함께했다. 한번 모이면 진지한 토론이 오가며 현시점 점검과 앞으로 문화운동의 방향과 내용 등이 정리됐고 후반부로 가면서 술판이 섞여 새벽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민문협의 창립 행사 자체가 비합법 문화의례였다. 나는 정말 온몸으로 준비를 했고 그날 민중문화의 상징적 춤을 추었다.

 

오윤이 입만 열만 “용태, 용태”
85년 ‘도라지꽃’ 때 처음 작업한
일제 만행 쓸어버릴 걸개그림 무대
민족예술사에 그런 장관이 있었던가

 

오윤 판화전에선 열림굿춤판
그림과 교감하며 관객 무아지경
민미협 창립행사도 의례춤굿으로
이한열 장례식 때 바람맞이 춤은
처절한 부활의식이었다
형식미학·사상미학 깨는 ‘해방’ 맛봐

 

민예총 반대로 형과 10년간 데면데면
작년 김영수 사진전서 다시 뭉친
‘우리땅 터벌림’이 마지막 작업으로

 

■ 이한열 부활의식 ‘바람맞이’ 춤판

 

마침내 87년 6월, 나는 그즈음 연우무대 개관 공연으로 <바람맞이>를 올렸다. 민주화대행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6월26일 학생들의 요청으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또 다른 바람맞이를 추었다. 각 단과대와 대학원별로 깃발을 펼쳐들고 휘날리며 모여든 광장의 열기는 대단했다. 춤판이 끝난 오후 2시 예정대로 전국민 민주화대행진이 전국 각 도시에서 거센 불길로 일어났다. 그렇게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가 되었다.

 

 

87년 8월 김용태 선생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연합 주최로 열린

‘이애주 한판춤-바람맞이’의 공연 포스터. 사진 이애주 교수제공

 

 

민미협 식구들은 7월9일 이한열 장례식을 며칠 앞두고 밤을 새우며 그리고 또 그렸다. 나 역시 장례식 전날 각지에서 모여든 대학생 연합풍물패, 노동자 문화패 등 수백명을 이끌며 밤새워 장단을 맞췄고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오자 마지막 점검을 하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난생처음 수백만이 운집한 장례식장 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처절한 부활 의식이었고 함께 일어나 나아가는 집단군무였다. 연세대 정문 앞으로 나오며 베 한 필을 가르면서 마지막 ‘한열’이가 쓰러진 곳에서 나도 쓰러졌다. 정신줄 놓고 한열이와 하나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푸근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중에 보니 허름한 옷을 걸친 신촌시장의 할머니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할머니가 어떻게 겹겹이 싸인 인파를 뚫고 그 현장에 계셨는지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하다. 그렇다. 모든 국민이 하나 된 자리였다. 민미협과 민문협이 하나 되고, 모든 민주화 단체들이 뭉쳐서 혁명 전야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도 용태 형의 활약은 비범했다. 나는 그 경험을 훗날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인간 본성으로의 춤, 자연과 사회의 춤, 그 시대 민중의 첨예한 쟁점으로의 춤, 정치와 예술의 연장으로의 춤, 그리고 순수와 비순수, 형식미학과 사상미학 등 그동안 관념적으로 맴돌며 해결 안 되던 부분을 몸으로 부딪히며 문리(文理)를 트는 해방의 경험을 맛보면서 새 단계로, 무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민예총 결성 반대와 용태형의 침묵

 

87년 대선은 우리에게 닥친 또 하나 큰 산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민중후보 추대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 뒤 명예본부장이 되었다. 용태 형은 민중후보 비서실장을 맡으며 우리 모두 11월, 12월을 찬 거리에서 서로 의지하며 부대끼면서 지냈다. 그 결과의 당락과 관계없이 민중후보를 통해 민중의 역량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88년이 되자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한동안 뜸했던 용태 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민문협이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으로 조직이 바뀌며 커지는데 발기인에 이름을 올린다고 했다. 나는 ‘그건 아닌데’ 하고 ‘큰일 났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조직운동, 문화운동의 큰 허점으로 개개인의 기본 역량, 특히 최소한 갖춰야 할 기량 등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던 터였다.

 

그 뒤로는 서로 만날 일도 없었고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금강산에서 남북 공동 문화행사를 할 때는 서로 다른 조직으로 가서 같은 행사를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텄지만 결코 조직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10여년을 데면데면 지냈다.

 

 

2014년 3월26일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용태와 함께 가는 길’ 출판기념전시회 뒤풀이에서 함께한

‘용태 형’(오른쪽 셋째)과 이애주 교수(왼쪽 둘째).사진 장영신 제공

 

 ■ 김영수 사진집 ‘우리땅 터벌림’

 

나는 김영수 민족사진가협회 이사장과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12년에 걸쳐 우리 땅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우리땅 터벌림> 작업을 했다. 99년 백령도로 첫 여정을 떠날 때 몇 명이 동행했는데 김정헌·민정기 화백 등과 함께 용태 형도 있었다. 민예총 시절부터 용태 형과 김 작가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갈 때부터 배 안에서 벌였던 술판은 사진 찍는 시간만 빼고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지더니 돌아올 때는 마치 개선장군들처럼 의기탱천했다.

 

2011년 5월 김영수 선배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땅 터벌림>은 이듬해 5월 1주기 추모 사진집으로 나왔다. 용태 형, 민정기 화백, 정인숙 사진작가 등 몇몇 지인들과 고인의 묘소를 찾아가 책을 올렸는데,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용태 형과 나는 사진전을 열어야 한다고 의기투합했다. 고인이 생전에 이애주 춤을 통해서 민중문화운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듯이 그냥 있기에는 사진 하나하나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었다. 사지가 꿈틀대고 펄렁대기도 한 그 몸짓을 순간 포착으로 잡아낸 또 다른 상징적인 정지의 미학이었다.

 

그 무렵 이미 투병중이던 용태 형은 지친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더니 2013년 3월 끝내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전시관에서 초청 전시를 하도록 성사시켰다. 애초 일주일 하기로 했는데 다시 일주일 연장 전시까지 했다. 전시 중간 토요일에는 유홍준 ‘춤과 미술’ 특강이 열리고 내가 ‘터벌림춤’ 시연을 했고 임진택 명창은 신경림 시인이 ‘우리땅 터벌림’을 위해 지은 시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를 창으로 불렀고, 사회는 김석만 교수가 보았다. 7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많은 관람객들이 왔고 그동안 못 보았던 옛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이며 모두 8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고 감격했다. 거기에 자연요리 연구가인 임지호 선생의 뚝딱 자연상차림까지 곁들여져 수백명이 즐기며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모두가 용태 형이 자기 일처럼 나선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결국 김영수 선배의 뜻대로 문화운동사에 또 하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또한 용태 형과도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1986년 작가 오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때 전시된 판화 작품으로,

오윤 장례식 뒤 김용태 선생이 이애주 교수에게 전해준 유작.

사진 이애주 교수, 정영신 작가 제공

 

 

 ■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

그런데 용태 형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지난 5월 병상에서 의식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는 남북 통일문화 행사를 꾸미고 있었다. 바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고 거대한 민족예술의 역사를 일구고 있었다. 곁가지 하나 덧붙이자면, 늘 옆에서 분신같이 돌보던 ‘절친’ 태서 형에게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정신 나갔어? 애주는 빼라고. 정헌이는 넣어도 돼” 하면서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이생 저생을 넘나들면서도 끝까지 나를 보호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가끔씩 고통으로 입술을 악물면서도 빙긋이 웃으며 함께 간 후배들과 내게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용태 형과 함께한 시간은 바로 문화운동의 역사, 민중민족문화의 역사였다. 현발, 민문협, 민미협, 그림마당 민, 백선본 등이 상부상조하는 중심에는 항상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용태 형이 있었다. 이판사판, 사통팔달, 종횡무진 내달으며 행동 실천으로 나서며 말이다. 우리 시대 문화의 역사를 온몸으로 써 나간 것이다.

 

‘용태 형, 잘 계시죠./ 팽목항 굽이돌아 한 서린 진도 바다를 거쳐/ 이섭대천세계로 대천세계로/ 고통과 절망을 껴안고/ 침몰되어가는 나라와 함께/ 남북 천지 통일세상 열면서 함께 나아가요./ 만인의 용태 형이여!’

 

[한겨레신문] 이애주 우리춤꾼·서울대 명예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