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사랑은 부자연스러워 ‘덩어리’가 된 집단사랑 그려
나는 ‘불온한 노인’을 꿈꾼다

소설가 박범신(68)은 한국 문단에서 드문 존재다. 우선 이 연배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는 현역 작가가 많지 않다. 간간이 작품 활동을 하더라도 젊은이들조차 여전히 따라가기 힘든 감각적인 문장을 유지하거나 심화시키는 현역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문장의 완성도도 체력에 비례하게 마련인데 칠순을 목전에 두고도 오히려 더 벼려진 깊은 문장으로 독자들 앞에 나서는 에너지에 놀랄 수밖에 없다. 신작장편 ‘소소한 풍경’(자음과모음)을 보면 그 경이적인 에너지의 원천은 포기할 수 없는 ‘불멸의 사랑’인 것 같다.

 

 

 

세 남녀의 사랑을 그려낸 소설가 박범신. 그는 “불온하고 강력한 예인의 길이 아니면 생의 본원적 쓸쓸함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요즘 같아서는 세월호 사고에 심한 상처를 받다보니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번 장편은 서사나 플롯에 방점이 찍힌 소설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사랑에 관한 산문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깊은 사유가 개입된 사랑에 관한 아포리즘이 전면에 부각된다. 두 여자와 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그들에게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름 대신 ㄱ, ㄴ, ㄷ으로 호명할 따름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은 건 사랑의 보편적인 속성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싶은 의지 때문이다. 구구절절한 서사나 한 사람의 구체적인 캐릭터에 독자들이 더 몰입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사연이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다. 짧게 제시하지만 그래서 더 기구한 그들 생의 맥락을 통해 사랑에 대한 갈망과 허무는 더 깊어진다.

이들 두 여자와 한 남자는 눈이 내려 고립된 집에서 ‘덩어리’로 사랑을 나눈다. 세상의 고정된 시선으로만 보면 위험한 행각이다. 작가는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라고 강조한다. ‘섹스’라는 말에다 그들의 비밀을 다 담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섹스란 외로운 사람들옆구리에 입을 벌리고 있는 한낱 상처의 주머니 같은 거”라고 발언한다. 그는 “덩어리라는 말에선 ‘상처의 주머니’가 아니라 ‘순수의 집합체’ 같은 광채가 느껴져서” 좋다고 기술한다.

“육체는 때로 영혼의 야영지(野營地)가 된다. 아니, ㄴ을 만나기 전까지의 육체는 내 영혼의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육체가 감옥으로부터 야영지로 변이되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다. 몸뚱어리 속에 가시가 내장돼 있었던 게 아니라, 선과 악으로부터 놓여난 강물도 남 몰래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를 통해 자각한다.”

불멸의 완벽한 덩어리 형태의 사랑은 “누구든지 살아 있는 한 존재의 독방에서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 불멸은 찰나의 덩어리 형태를 응고시킬 때에나 가능하다. 그래서 작가는 남자 ㄴ을 우물 속으로 난 죽음의 길로 투하했다. 여자 ㄷ도 그 찰나를 불멸로 승화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7일 서울 인사동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범신은 이날 무척 피폐한 모습이었다. 세월호의 참혹이 내내 괴롭혀 “슬픔은 몸 속 가시가 되고 분노는 병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유일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고 썼는데 “이즈음은 사랑의 대상이 유일해야 한다는 건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오직 한 사람만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행태는 인간의 본성을 속이는 정치-사회적인 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실에서는 평생 가족을 잘 챙겨온 성실한 가장이고 여전히 나이에 어울리는 점잖은 노인으로 살아가겠지만 소설에서는 여전히 위험한 노인이 좋다”고 말했다. ‘은교’에서 노스승과 젊은 여자와 남자 제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그려 주목을 받았고, 이번에는 세 남녀의 ‘집단 사랑’이라는 외피를 빌린 탓에 자칫 오해받을 소지를 미리 제거하는 발언인 셈이다. 세속적인 화제성을 뛰어넘어 기실 이번 소설은 ‘생의 심연’을 파고 들어가려는 박범신의 의지가 어느 소설보다 깊이 스며든 작품이다. 그는 “읽는 이와 덩어리를 이루는 문장”을 갈망하면서 “좋은 문장은 작은 집 속의 큰 방과 같다”고 소설에서 설파했거니와 이번 장편은 그의 이런 비원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결실로 보인다.

세계일보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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