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용태 형! 기어이 가셨군요! 지난달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바로 그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면서 “난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라고 달관한 노스님처럼 말할 때만 해도 불사조 같은 용태 형은 아마도 일주일만 지나면 인사동에 다시 나타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 마주치면 “야, 이 사람 누구야”라며 반갑게 손을 내밀 줄로 알았답니다.

 

한달 조금 더 된 3월26일이었지요. 문화예술인 46명이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을 내고, 선후배 화가 43명이 100여점을 출품해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열었던 바로 그날, 당신과 한생을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여 한결같이 “용태 형, 벌떡 일어나시오”라고 했을 때 “그래, 그래”라고만 답하면서 보내던 그 정감 어린 미소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김용태’(사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미술, 문학, 연극, 춤, 가요에서 ‘민족’ 두 글자가 매김씨로 들어가는 민족예술판에서 그는 ‘용태 형’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그는 민족예술의 마당을 일구어낸 큰 일꾼이었다.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1979),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운영위원(1984),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초대 사무국장(1985)이었고, ‘그림마당 민’ 초대 총무(1986),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초대 사무처장(1988)이었다. 그 모두가 ‘초대’였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심부름꾼이었다.

 

태 형은 ‘맨날 똑같은 얘기를 하는 리론가’보다 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사랑했다. 대토론회가 열릴 때면 그는 돌아다니며 재떨이 비우는 게 일이었고 뒤풀이에서 애창곡 ‘산포도 처녀’를 힘차게 부르는 것으로 자신을 말했다. 그는 언제나 인간됨이 우선이었고 우리의 따뜻한 서정을 잃지 않고 하나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 믿었다. 화가 강요배는 그의 이런 모습을 담은 <용태 형>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현실을 떠난 예술, 민주적 당면 과제를 외면한 예술은 허울일 뿐이라며 민주화운동과 민족예술을 견고하게 묶어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백기완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으로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살았다. 그해 6월항쟁과 뒤이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농민운동의 수많은 집회에서 춤, 노래, 걸개그림, 낭송시로 무대를 꾸밀 때면 언제나 그가 있었다. 화가 신학철 역시 그런 그의 모습을 <용태 형>으로 남겼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용태 형은 온 정열을 통일에의 길에 바쳤다. ‘코리아통일미술전’ 남측 단장(1993), 6·15 공동선언 남측위원회 공동대표(2005)를 맡으면서 예술과 정치와 재야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장까지 맡으면서 민주화와 민족예술에 온몸을 바치느라 정작 화가로서 남긴 작품이라고는 동두천 기지촌 여성과 미군 병사들의 사진을 모아 콜라주한 <디엠제트>(DMZ)가 있을 뿐이다.

 

지만 백기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용태 형은 마땅히 들풀임을 살아왔다. 그의 삶, 그의 투쟁, 그의 역사가 곧 거대한 예술이 아니던가.”

 

용태 형! 어제 그제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말하더군요. 참으로 잘 산 인생이라고, 당신과 한생을 같이 보내 따뜻했고, 너무도 고마웠다고, 그래서 많이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유홍준 전 민미협 공동대표·미술사가)
한겨레신문 / 사진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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