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날 오가며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일찍부터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오셨습니다. 맛있는 점심 사 주겠다면서요.

아내와여자만에서 쌈밥 얻어먹고, 허리우드에서 커피도 마셨습니다.






전시장으로 돌아오니 부산에서 최혜영씨와 사진가 김지연, 시인 김생나씨가 오셨고,

사진가 양시영씨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넋전 춤을 추는 양혜경씨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심선생께서는 신궁장여관이 리모델링한다며 숙소를 옮긴다는 말씀을 들었으나,

어디로 옮겼는지 궁금했는데, ‘종로오피스텔로 옮겼다네요.












반가운 만남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래층의 공창호씨가 장구경 하러왔고, 좀 있으니, 가수 최백호씨도 왔습니다.

잇따라 강 민선생께서 시인 천성우, 이혜선, 김정남선생과 함께 다시 오셨네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강민선생의 옛 친구 박병선선생도 지나치다 올라 오셨는데,

구수한 냄새에 끌려 왔더니, 옛 친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끝 날 시간이 가까워 오니, 곤충사진가 이수영씨가 나타났습니다.

유민목에 장경호씨가 있다는 귀뜸을 전했더니, 거기서 기다리겠다며 먼저 일어났습니다.

뒤따라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내외가 오셔서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로 소주 한 잔 했습니다.

소주 딱 두병만 까고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이수영, 장경호, 공윤희씨가 마시고 있더군요.

막차시간 놓치지 않으려는 이수영씨 따라 일어남으로 하루를 잘 넘겼답니다.









 

그 이틑 날은 미디어아티스트인 이상만회장께서 일찍부터 오셨습니다,

연이어 연극연출가 기국서, 울산의 기와장 오세필, 건축가 임태종씨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이 날은 장흥에서 이대흠시인과 성은정내외 분이 오셔서,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대흠시인은 아내의 장날사진집 서문을 쓴 인연이라 더욱 기다렸는데,

첫인상처럼 무척 다정다감한 분이더군요. 시간 만들어 장흥에도 꼭 한번 들릴 작정입니다.

















전날 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밤을 꼬빡 새웠는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쪽 구석에 누워 잠들어 버렸는데, 이대훈, 노인자 내외분이 오셔서 자는 모습을 찍어,

칠순의 아기천사라는 제목까지 달아 카톡으로 날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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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문화의 날이라 밤 열시까지 문을 열기로 했으나, 술친구 채근으로 더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전 날 페북에 공지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밤 여덟시에 문을 닫는 실수를 그만 저질렀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진가 박영환씨가 뒤늦게 다녀 간 흔적이 방명록에 적혀 있더군요.

확인했을 때는 이미 때 늦은 후회였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에 안절부절 하였으나, 결국 젊은 후배에게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그 날은 유목민에서 이대훈, 노인자씨 내외와 거나하게 마셨습니다.

옆 자리에는 임태종씨가 친구들과 있었고, 김명성, 이상훈씨도 있었답니다.

좀 있으니 오세필씨가 국민은행에 있는 노처녀 지점장 최명숙씨와 김용식 부장 등 여성분들과 나타났습니다.














일행이 있어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인사동 곳곳에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버스킹에 나서자며 길모퉁이 자리잡아 퍼질러 앉았습니다.

난 모자만 내려놓은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으나, 이대훈씨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우아한 노래에 한참 빠졌는데, 눈을 뜨보니, 모자에 천원짜리 지폐가 한 장 담겨있더군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 놈이 먹는 꼴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돌아왔답니다.

하하하~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지난 22일 충무로에 있는 갤러리 브레송에서 김보섭씨의 사진전이 열렸다.

개막식에 가 있는데, 인사동으로 빨리 넘어 오라는 전화가 번갈아 왔다.

제주에서 온 변순우씨도 기다리고, 김명성씨는 기국서씨와 함께 있단다.

 

뒤풀이에서 먹는 둥 마는 둥, 사진 몇 장 찍고 빠져 나왔다. 급해 택시를 잡았더니 시간이 더 걸렸다.

유목민에 도착하니, 기다리다 지친 변순우씨는 술 취해 여관에 들어 누워버렸고,

연출가 기국서씨와 박 철, 김명성, 이승철시인이 유목민골목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쪽에는 전활철, 이상영씨가 분주히 오갔고, 공윤희씨는 거나하게 한 상 차려놓고 있었다.

 

기국서씨는 극단76’의 창단 40주년을 맞아 신작 리어의 , 지난 20일 대학로 무대에 올렸단다.

'76단'은 연희단 거리패, 학전, 연우무대와 함께 대학로 연극시대를 이끈 핵심 극단이다.

예술 감독인 기국서씨를 비롯해 동생인 기주봉, 송승환씨가 창단해 관객모독등의 대표작들을 만들어 냈다.

선돌극장’에서 공연되는 리어의 역은 리어왕을 40년간 연기하고 은퇴한 노배우의 이야기로,

58일까지 이어지니 한 번 구경하러 오란다.

 

좀 있으니 방동규 선생께서 '유목민' 골목에 등장하셨다.

방동규선생은 이름보다 별명이 더 잘 통한다. 방동규 하면 몰라도 방배추라면 왠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 구라 중 한 분 아니던가.

양산에 있는 채현국선생 학교에서 일하셨는데, 그만두고 올라오셨단다.

하기야 얼마나 살지 모르는데,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산 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날 방선생께서 김명성씨 칭찬을 많이 하셨다. 인사동 예술가들을 보살펴 온데 따른 치사였는데,

자고로 사나이는 그릇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릇이 적으면 질질 흘려 주변이 더러워진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는 벽에다 下學而上達라는 글을 쓰셨다.

아래로부터 배워 위를 통달한다는 공자말씀인데, 너무 좋아하는 고사성어였다.

 

이어 박 철시인의 기타반주에 노래가 흘러나오는 흥겨운 술판이 벌어졌다.

그런데 방동규선생이 듣고 싶은 노래를 박 철씨가 정확히 모르는 게 있었다.

제목은 기억 나지 않고, 가사 에 그냥 십팔번으로 불러주세요라고 나오는 작부 신세타령인데,

나도 입에 뱅뱅 돌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김명성씨는 송상욱 선생을 불러야 한다며

난리법석을 떨었으나 집에 들어가신지 오래 된, 송선생을 모셔오기는 더욱 힘들었다.

 

뒤늦게는 강성수, 고용욱, 김기영, 이상훈씨 등의 술꾼들이 차례로 등장하였고,

충무로 김보섭전시 뒤풀이에서 놀던 아내 정영신도 찾아왔다.

신나게 놀았지만, 집에 돌아갈 시간만 되면 맥이 빠진다. 술 마시다 편하게 죽는 수는 없을까...

아내와 골목을 빠져 나오니 푸른 별의 최일순씨가  의정부 천상병선생 행사에 가자며 채근이다.

내일 선약이 있어 갈 수도 없지만, “김병호가 장난치는 동안은 낄 생각 없다고 전하라 했다.

 

사진,/ 조문호






















































ㆍ창단 40주년 맞은 ‘극단76’의 연출가 기국서

최근 들어 ‘극단76’이 언론 지면에 빈번히 오르내리고 있다. 진원지는 연출가 이윤택(64)이다. 그는 한 달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단 40주년을 맞은 극단76이 극장도 사무실도 연습실도 없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얼마 후 자신의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창단 30주년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1970년대 전위연극을 이끌었던 기국서(극단76의 연출가)는 요즘 생계유지를 위해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국 연극판에서 극단76이 새겨온 족적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런 의미 있는 극단이 자본의 위압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개탄이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극단76이 어느덧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1976년 신촌에서 문을 연 이후, 전위적이면서도 사회성이 농후한 연극 세계를 펼쳐왔던 극단76은 한국 연극판에서 보기 드문 ‘반골(反骨)의 극단’이다. 이제 우리 연극계의 주요 연출가로 손꼽히는 박근형(53), 김낙형(46) 등이 수업했던 ‘연극적 친정’이기도 하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16일 오후, 창단 40주년을 맞아 새 작품을 준비 중인 기국서(64)를 대학로의 카페에서 만났다. 유독 ‘언어’를 고심하는 작가 겸 연출가인 그는 “처음 20년은 행복했고, 그 후 20년은 난파선의 심정”이라는 말로 40년의 소회를 내비쳤다.

그의 육성을 최대한 전하기 위해 1인칭 시점으로 옮긴다.

“40주년? 사실 내 동생 기주봉(배우)이 40주년의 산증인이겠지. 나는 창단 2년 뒤에 합류했으니까. 당시 극단76에는 10개 조의 강령이 있었는데, 나는 그중 마지막 조항이 참 마음에 들었어. ‘진정한 꿈을 꾸는 자는 결코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라는 거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20년은 매우 행복했지. 연극은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신념, 사는 게 팍팍해도 그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거든. 한데 다음부터는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어. 풍랑의 바다에 표류하는 난파선 같았지. 아예 극단 이름을 난파선으로 할까, 그런 생각도 했어. 같이 탈 사람만 따라오라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권력에 부딪히고….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햄릿과 오레스테스>를 공연할 때였는데, 극장 앞에 ‘닭장차’들이 3대나 서 있더라고. 그게 5시간짜리 공연이었어. 공연 1부를 극장 내부에서 하고 2부는 로비와 계단에서 하는 거였는데, 공연 직전에 ‘로비 사용 불가’ 통보를 하더라고. 요즘 후배들이 겪고 있는 ‘검열’을 그때 먼저 겪은 거지.




동생 기주봉? 아, 말썽꾸러기였어. 고등학교 때부터 패거리 지어 다니고 싸움하고, 그 어린 나이에 도박도 했어. 세 살 위의 내 친구들한테도 반말로 엉겼지. 한데 대학 들어가더니 사람이 180도 바뀌더라고. 나하고는 굉장히 달라. 그 친구는 정말 몽상가거든. 돈암동 살던 어린 시절에, 우리 집에서 산양 17마리를 키웠거든. 그걸로 생계를 유지했어. 나하고 주봉이하고 산등성이로 양을 몰고나가곤 했는데, 나는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갔고 주봉이는 머리에 대야 같은 거 뒤집어쓰고 손에는 긴 막대기 하나 들고 ‘생쑈’를 했지. 자기가 김삿갓이라는 거야. 10살이 안됐을 때부터 그랬어. 중학교 들어가더니 연극반에서 배우를 하더라고. 걔는 애초부터 배우가 되려고 태어난 거 같아.

나? 나는 연극을 우습게 봤어. 초등학교 때 어머니하고 여성 국극이나, <자명고> 같은 신파조 연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진 같아. 좀 엉성하고 웃기잖아. 나한테는 언제나 문학이 최고였어. 그러다가 고3 때 임영웅 선생이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거든. 물론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을 먼저 읽었지. 그해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연극도 마찬가지였어. 꾸벅꾸벅 졸았지. 그러다 갑자기, 에스트라공을 연기했던 배우 김성옥이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잠이 번쩍 깼어. 아, 천둥 같은 소리였어. 연극에 뭔가 있구나, 그런 생각을 처음 했지. 그 다음에는 드라마센터에서 유덕형 연출의 <생일파티>를 봤거든. 뼈다귀로 이뤄진 무대에 조명을 비추고, 배우가 벽 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데, 그 시각적 충격이 오래 가더라고. 팸플릿을 보니까 등장인물 맥켄은 메커니즘을, 골드버그는 황금만능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고 써 놨더라고. 심오해 보이잖아. 20대 때는 그런 것에 심취하지. 그리고 세번째 본 연극이 오태석의 <루브>였는데, 정말 너무 웃겨서 계단에서 구를 뻔했어. 그 세 편이 연극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꿨지.

극단76의 대표작 <관객모독>? 아, 징그러워. 1979년 초연부터 30년 넘게 했으니까. 가장 마음에 드는 버전은 초연하고 10년쯤 뒤에 공간 사랑에서 했던 공연이지. 아주 단순하게 연출했어. 그 다음부터는 자꾸 교묘하게 손을 대게 되더라고. 앞의 공연하고 달라야 하니까. 그런데 즉흥성이 강조된 이 연극의 형식은 지금도 유효한 거 같아. 배우들도 관객들도 그 즉흥이 재밌는 거지. 제작사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또 할 수는 있어. 솔직히 돈이 들어오니까. 하지만 일단 부담스러워. 아휴, 이걸 또 해야 하는구나! 그런데 막상 연습 시작하면 또 재미있어. 나도 배우들도.

40주년 기념작? 한 편 준비하고 있지. <리어의 역(役)>(가제)이라는 작품인데, 평생 리어왕 역할을 해온 노배우, 치매에 걸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거든. 작년부터 대본을 쓰다가 멈추다가 그래 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야. 4월에 선돌극장, 5월에 게릴라극장에 공연이 잡혀 있어. 쓰는 건 정말 힘들잖아. 오늘도 7~8줄 간신히 썼어. 그래도 가장 행복한 곳은 연습실이지. 배우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 어느새 생기가 나거든.”

경향신문<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지난 24일 화가 장경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안동서 신학철선생과 한 잔하고 무다헌에 넘어 왔으니 빨리 나오소~”

이미 술에 취해 목소리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마신 술로 주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도 마실일도 걱정인데, 가만 두질 않았다.

소 도살장에 끌려가듯 인사동에 나갔더니, 일찍부터 술집이 부산했다.

 

신학철선생은 반가워하셨으나, 장경호씨는 김정대씨와 입씨름하느라 아는 척도 안 했다.

금방 한 판 할 것 같은 기세였으나,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행복한 노래쯤으로 생각하고 앉았다.

그다음엔 나한데 시비를 건다. “어찌 알고 왔어요?” 자기가 전화해놓고도 매사 이런 식이다.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시비성 노래는 익히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좌불안석이다.

나중엔 나죽으면 형이 가마니때기라도 한 장 덮어주소라기에 가마니는 구하기 힘들고

카시미롱 이불은 덮어 줄게라고 말했다.

 

신학철선생께서 처음보는 류제홍박사를 소개했다.

모내기그림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꽤 오랜 교분 같은데, 너무 젊어 보였다.

내가 여자라면, 한 번 꼬셔보고 싶을 정도로 핸섬했다.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너무 다양하게 바쁜 사람이더라.

사회경제를 통솔한다는 뜻도 가진 ‘planner’라는 글자아래 공공공간연구소 공간력소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보니 정신이 없었다.

문화학박사, 정책컨설턴트, 전통시장전략가, 도시마을계획가, 청년도시메이커, 세계대회기획사라 적혔는데,

사짜는 아닌 것 같았다. 점잖았고, 이야기도 진솔했다.

오죽하면 술 취한 장경호씨의 거친 말투가 류박사와 연결되면 곧 바로 공손해 지겠는가?

    















옆 자리에는 요즘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않는 주임마담 강고운시인도 보였다.

언제 왔는지, ‘관객모독을 연출한 기국서씨도 있었다. 그도 한 가닥 하는 주당이다.

말은 별 없지만, 거슬리면 여지없다. 한 때 서정춘시인이 그의 헤딩 한 방에 날아가는 것도 보았고,

도예가 한봉림씨를 향해 늑대처럼 튀어 올라 얼굴을 활키는 것도 봤다.


작은 거인 기국서씨가 반가웠지만, 일행이 있어 인사만 나누었다.

뒤늦게는 미술평론하는 김준기씨가 등장해, 술자리 대화가 갈리기도 했다.

장경호씨의 십팔번 뒷동산 아지랑이~”를 뒤로하며 먼저 도망쳤다.
















돌아오다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안국역 옆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와 박혜영씨는 손님받느라 정신없고,

인사동에서 풍요로움이란 회사를 운영하는 조원희씨가 같은 일가라며 엄청 반가워했다.

김기영씨와 함께 앉았지만, 술을 더 마실 수 없었다.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와 노래하는 신현수씨도 있었고, 나오는 길에 노광래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로서 모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인사동 술 방랑은 끝났다.

 

씰데없는 술주정 듣느라 고생했슴니더.”

 

사진,/ 조문호










































 


 


‘청량리 588’ 사진전이 시작된 이틀 만에 작품 하나가 팔렸다.
그것도 가난하기 그지없는 서양화가 장경호씨가 샀기에 더 뉴스거리다.

588사진들은 일 이 십만 원 정도의 싼 작품이 아니다. 한 컷에 두 장만 뽑는 오리지널
프린트라 11X14인치 소품 한 점에 300만원이고, 최고는 1,000만원씩이나 한다.

돈이 없어 허덕이며 연이어 전시를 하는 우리 내외가 안 서러워 도와주려는 마음이
앞섰겠으나, 사진을 소장하고 싶은 가치도 알았던 것 같다.

지난 26일 정오 무렵, ‘백련’에서 막걸리 반주에 추어탕을 같이 먹고 올라와서는

두둑한 돈 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며 작품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라  놀랐으나, 그 속 깊은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건 감동 자체다.
너무 고마워 정우일씨와 화신포차에서 한 잔 한 후, ‘무다헌’에서 한 잔 사고 싶었으나 술값을 먼저 내 미안하게 만들었다.
밤 늦은 시간, 술이 취해 마지막 전철을 타고 오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진집출판으로 우연찮게 연이은 전시를 하지만, 두 달 가까이 정신없이 뛰다보니 그의 탈진상태다.

주변 사람들 걱정처럼 스스로의 대책 없음도 자책했지만, 지난 작업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되었다.

세월의 무게에 실린 588사진들이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좀 더 부지런히 남기지 못했음도 한스러웠다.

전시 둘째 날에는 한국일보, 조선일보 기자들한테 잡혀 취조를 당하기도 했고,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기국서씨,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시인 정우일, 홍행숙씨, 무도인 김형진씨, 이종률,  공윤희씨 그리고 이계익선생을 모시고 나온 노광래, 편근희씨를 만났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사회현실을 풍자하는, “관객모독”의 연극연출가



연출경력
1970년대 : <수업> <장남의 권리> <마지막 테이프> <관객모독> <순장>
1980년대 : <作家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기국서의 햄릿> <햄릿 2>
<햄릿과 오레스 테스> <햄릿 4> <햄릿 5> <빵> <임금알>
<바람앞에 등을 들고> <일어나라 알버트> <방관 씨리즈>
1990년대 : <지피족> <미아리텍사스> <맥베드> <목포의 눈물>
<페밀리 바게트> <미친 리어> <作亂>
2000년대 : <길 떠나는 가족>외 23편
수상경력
- 서울 평론가 그룹 특별상 <기국서의 햄릿>
- 서울 평론가 그룹 연출상 <관객모독>
- 영희 연극상, 한국 예술가 협회 <오늘의 예술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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