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 계단 아래 자리 잡은 다리밑집은 다리 밑의 음습함이 정겹다.
테이블이라고는 두 개 뿐인 코 구멍만한 대폿집인데, 닭 똥집이 별미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좁은데서 부딪히는 사람냄새가 더 좋다.






지난 7일저녁 무렵, 편완식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인사동 찍사가 인사동에 안 있고 어딧냐?’는 것이다.
산토끼가 어디를 못 가겠냐마는, 동자동 쪽방에 살림 차린 걸 모르진 않을텐데...
연휴라 방구석에만 쳐 박혀 있어 목구멍이 근질 근질하던 차에 반가운 기별이었다.
라면 끓이려 물을 올려놓았으나, 꺼버리고 나갔다. 


 



다리밑집에 들어가니 편완식기자와 건축가 김동주, 화가 이목을씨가 있었는데, 옆자리에 미모의 여인도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여인인데, 일전에 인사를 나누었다기에 더 이상 묻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틀니라고 끼고 나올 걸 후회막급이었다.






그런데, ‘통인’ 관우선생은 춥다며 옷 가지러 간 사람이 강원도 포수란다.
김동주씨가 설계한 강화도의 ‘통인미술관’ 준공검사가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날의 화제는 단연 미투였다.






화가 이목을씨가 국회의사당에서 초대전을 열었는데, 미투에 휘말려 전시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큐레이터에게 수제 명함을 주기위해 성향을 물은 것이 화근이란다.
명함에 그림 그리려, ‘굵은 것을 좋아하냐? 가는 것을 좋아하냐?’고 물었단다.
펜그림 굵기를 물었으나, 그 여인은 요상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다들 한바탕 웃고 넘겼으나, 편완식기자가 말을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있던 최효준씨가 당한 황당한 이야기였다.

부하 직원인 큐레이터에게 보낸 동영상이 문제가 되었는데,
작업에 상상력을 주려 보낸 동영상이 미투의 올가미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찌, 웃기 위해 농담도 못하는 이런 살벌한 세상이 되었는가?
집에서는 마누라 한테 엎어지고, 밖에선 입도 벙긋 못하는 남자 수난시대다.




 


농담 잘하기로 소문 난 나는 왜 시비 거는 여인이 없는건가?
사람 차별한다며 투덜거렸더니, 돈도 권력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란다.
그 날도 전시 기획하는 미모의 여인에게 진한 농담을 했으나,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주둥이만 살아있는 능력 없는 사내로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구 서러버라! 사내 취급도 못 받을 바에야 차라리 잘라 버릴까보다.


'




역시, 술타령은 미투가 최고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월 3일은 달세 방에서 쫓겨 난 노숙자 거처에서 낮술에 취한 날이다.
이덕영씨와 씨잘 데 없는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공윤희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나오지 않냐?”는 말에 나가기는 했으나,
숨이 가쁘기 시작해 더 이상 술을 마시기는 힘들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인사동 거리를 찍으며 지나가는데,
세계일보 편완식기자가 도화가 이흥복씨와 미녀 한 분을 데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흥복씨를 보니, 지난 4월 하순 ‘통인’에서 개최한 개인전에 가보지 못한 미안함이 앞섰다.
개막식 날 작정하지 않으면 미루다 놓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흥복씨는 백자도판을 픽셀 삼아 평면에다 입체적인 작업을 하는 도판화가인데,
고향인 거창에 작업실이 있어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여럿이 가는 것으로 보아 무슨 약속이 있는 것 같아,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 



 


공윤희와 약속한 ‘유목민’으로 갔더니, 민영기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그만 마시기로 작정했으나, 마시고 있는 ‘한라산’소주에 구미가 땡 겼다.
맛이나 본다며 시작한 술이 서너 잔은 족히 마셨는데, 그때서야 용건을 꺼냈다.
지난 번 말썽을 일으킨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 결산 내용을 정리해 줄 테니,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차례 구설수에 몰렸던, 그 지긋지긋한 일을 왜 다시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았으면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순리이지만, 
남은 일은 돈 받은 사람들 거명할 일인데. 잘 아는 분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내용을 보고 결정할 생각으로, 자료나 정리해 보내 달라며 나왔다.






그 후 잊고 있었는데, 이틀 뒤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노광래씨가 녹번동에 들려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햇님을 위한 조각가 박상희씨의 마음을 전해주러 왔다는데, 나한테 꼭 전하라는 말도 있단다.







첫째는 채현국선생과 자기에게 사과하는 글을 올려 달라 했고,,
둘째는 채현국 선생께서 날더러 “동냥 보따리를 찢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에 인사동의 가난한 작가들이 엄청 자존심을 다쳤다는 이야기도 덧 붙였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만약 그런 일만 없었다면, 문제의 그 전시를 계속 할 작정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시가연’에서 채현국선생께 드린 말이 와전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갑의 입장에서 사셨기에 을의 입장을 모르지 않느냐?”는
내 말이 ‘최현국선생께서 갑 질 했다“는 말로 둔갑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더러 무엇을 사과하라는지 모르겠다.
‘시가연’에서 채현국 선생께 인간적으로 심려를 끼친데 대해 큰 절 올리며 사과했고,
노광래 씨에게는 개인적으로 밥그릇 걷어찬데 대하여 사과하지 않았던가?






난, 머리가 나빠 판단이 잘 안 되니,
내가 올린 글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해 주면 충실한 답을 공개할 것이고,
잘 못된 일이라고 판단되면, 정중히 사과하겠다고 전하라 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랴! 다 돈이 원수다.
제발 굶어 죽어도 쪽팔리게는 살지 말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8일 오후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린 ‘인사아트센터’에는 많은 분들이 찾아들었다. 

참여작가인 신학철, 임옥상, 민정기, 이종구씨를 비롯하여 전시자문을 맡았던 유홍준 교수와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도 있었고, 신경림, 안정환, 조준영씨 등 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외에도 장경호, 박불똥, 윤범모, 김형국, 타이거백, 정영신, 이갑철, 조정연, 김정대,

이인철, 최석태, 김형배, 최 열씨 등이 참석했다.

별도의 개막식이 없는데다, 전시가 6개 층에 분산되어, 얼굴도 못 본 분들이 많았다.

뒤늦게 편완식기자가 여기자 두 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신학철화백과의 인터뷰에 슬쩍 끼어들어 말을 건냈다.
“신학철 형님이 홀애비니, 주변에 참한 여자 있으면 소개 좀 해 주이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답했다.

“저 혼자 사는 독신인데, 전 어때요”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순진한 형님께서 “아니야! 나 임자 있어”하며 실토하고 만 것이다.

사실 형님은 10여 년 동안 형수님 병수발 하다 작년에야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셨다.

혼자 사는 게 안 서러워 주변에서 재혼을 권해 오던 중이었으나,

난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꺼낸 덫에 형님께서 실토하고 만 것이다.

올 해는 떡국 한 그릇 얻어먹게 생겼다.

그리고 기존의 작품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서정적 향토성을 띤 작품을 본

여 기자가 이런 작품도 그렸냐고 묻자, 그 대답이 걸작이다.
“나도 속살이 있어요”

이 전시는 2월28일까지 '가나인사아트' 전관에서 열린다. 입장료 3,000원


사진, 글 / 조문호















































 

 

 

 

 

‘세계일보’ 창간26주년을 기념하는 서양화가 김가범씨의 “Dream" 전이 지난 11일부터 오는 15일까지

서울시립경희궁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 11일, 오후4시에 열린 개막식에는 작가 김가범씨를 비롯하여 세계일보 조한규사장, 서울미술협회 이인섭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유남순관장, 미술평론가 신항섭씨, 김태식, 류석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해 전시를 축하했다.

몇 일 전 인사동 마당발 편완식기자로 부터 전시를 기획, 추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무거운 질량의 색채이미지에서 신비한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의 이력도 특이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40대에 미국 미술대학에 들어가 50대 초반에 전업 작가로 나섰단다.
60대에 화단의 조명을 받게 되어 한국단색화를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에 알렸고, 우면산이 작가의 그림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밀라노와 베이징의 해외 초대전 준비로 하루 열 시간 씩이나 붓질하는 맹렬작가로 소개되어 있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씨는 ‘단조로운 단색조의 색채이미지가 대다수를 차지하는데도 그 미묘한 색채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영은 회화의 마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깨닫게 해 준다’고 말했다.

그 신비의 요소를 끄집어내는 힘은 무엇이고, 그 강렬한 색채이미지가 주는 언어는 무엇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설치음악가 옐로우잼의 색스폰 연주를 들으며 무릎을 쳤다.
“맞아! 찬란한 슬픔이야”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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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둘러싼 대립 사회 고질병 보여줘
거친 울분 표현보다 정제된 예술미 절실

 

민주화 투쟁 시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걸개 그림 하나가 미술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광주 비엔날레가 창설 20주년을 맞아 본행사 개막(9월5일)을 앞두고 마련한 특별전에 내걸릴 작품 하나를 전시 유보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풍자한 부분이 문제가 됐다. 과거 민중미술이 풍미하던 시절 갑론을박의 풍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이 사태를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다. 세월호 사고 이후 정치권 등 우리 지도층이 보여 준 처참한 행태들이 다시금 민중미술을 호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는 늘 걸개그림이 등장했었다. 투쟁의 최전선인지라 표현도 거칠고,직설적이고 전투적이었다. 미학적 논의는 차후의 일이었다.

‘광주 정신’을 승화한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이번 특별전에 초대된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이런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준다. 여성 작가인 그는 1차 세계대전엔 아들을, 2차 세계대전엔 손자가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겁먹고 놀라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의 세 아이를 두 팔을 벌려 품에 안고 있는 작품은 강렬하다. 적의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니다”라고 절규하는 듯한 울림이 전해질 뿐이다.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 어떤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모습에서는 기댈 곳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대변이 느껴진다. 민중 판화가들이 그를 모델로 여겼던 이유다. 그 힘은 강한 ‘순수’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전시가 보류된 작품으로 시선을 돌려 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북한 삐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라고까지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다. 현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척박한 우리 현실의 반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전시를 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광주 비엔날레재단이 대토론회를 거쳐 결정하겠다는 것은 해결책이 못 된다. 또 다른 논란만 부를 것이다. 벌써부터 ‘꼼수’라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오고 있지 않은가. 상황만 모면하려는 생각들만 많아서는 안 된다. 작가와 작품 선정은 큐레이터의 책임이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라는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성숙해 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전시를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대립적 양상들의 배경엔 우리 사회 고질병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각각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에 성공유산을 가진 이들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기득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다.

혁명의 완성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서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순수, 진실성의 추구가 그것을 가능케 해준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이 그 출발점이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다.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없는 자기 부정의 순수가 있어야 한다. 새빨간 색은 꼭 새빨간색으로만 표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옅은 빨강을 통해 새빨강을 드러내 줄 수 있는 게 미술이고 예술이다. 희미한 빨강으로도 더 감동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정제된 예술적 승화다.

중국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팔대산인은 청나라에게 나라가 망한 허탈감과 원한을 그림으로 승화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 어디에서도 거친 울분을 볼 수 없다. 다만 새의 눈을 백안시(흰 눈동자)로 표현함으로써 깊은 울림으로 승화시켰다. 사람들을 그의 슬픔에 더 공감케 했다는 팔대산인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준다. 이제 우리 사회도 순수가 필요한 시대다.

세계일보 /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지난 7월12일 오찬 약속으로 아내와 함께 일찍부터 인사동에 나갔다.
대상포진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 이젠 우울증까지 생긴 사진가 한정식선생을 만났는데,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아내와는 동병상련의 심정일게다.
‘여자만’에서 식사하고, 선생의 오피스텔에서 차 마시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건강이야기, 사진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등등..

아내가 ‘허리우드’에서 조경석선생을 만나는 사이 인사동거리를 쏘다녔다.
관광객들로 번잡한 인사동 거리에서 송상욱시인과 고창수시인을 만났다.
오랜만이라 반갑다는 송상욱선생의 손에 끌려 ‘인사동사람들’에서 차도 한 잔했다. 
헤어진 후  심우성선생을 만났고, 통인가게 김완규회장과 세계일보 편완식기자도 만났다.

저녁 무렵에는  김명성시인과 사업가 정기범씨를 거리에서 만났고,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오랜만에 나온 김신용시인을 만났다.
“새를 아세요”(가칭)란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왔다는데,
긴 작업을 마무리한 후련함이야 짐작할 만 했다.
'황야의 무법자'를 연상케 하는 그의 휘바람소리가 말해주었다.

예전에는 술자리에서 흰소리라도 지껄이고 노래를 불러가며 마셨기에

긴 시간 술을 마실 수 있었으나, 요즘은 조용히 마셔서인지 금새 취해 버린다.
조경석, 공윤희, 전은미, 김영길, 유진오, 노광래, 김상현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몸이 견디지 못해 먼저 줄행랑쳤다.

 

그 이틑 날은 마산에서 서양화가 이강용씨가 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울만 오면 하는 일 없이 인사동에서 사람 만나느라 바쁘다.
‘서울순대’에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패션디자이너 손성근씨와

함께 있었으나, 끌고 나간 자동차 핑게로 일찍 들어왔다.

 

정선은 정선대로, 서울은 서울대로 가는 곳마다 할 일이 밀려있다.

당장 출판사 넘길 사진원고 찾는 일이 급하지만 인사동이 가만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떠도는 유목민마저 사라진다면 인사동이 얼마나 삭막해 질까...

 

 

 

 

 

 

 

 

 

 

 

 

 

 

 

 

 

 

 

 

 

 

 

 

 

 

 

 

 






한국미술 저평가 세계시장서 소외
문화리더십 없어 덩달아 사고 파는 악순환 고리 끊길


 

“생선장수보다 못하다.” 20여년간 갤러리 일을 해 온 한 화상(畵商)의 자조 섞인 말이다. 시장 좌판에서 몇년만 장사를 해도 단골들은 생선장수가 골라주는 ‘신선도’를 신뢰하고 사주는데, 자신들의 단골인 컬렉터들은 그러지 못하다는 얘기다. 화상들의 말이 컬렉터들에 잘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다. 예전엔 화랑 위주로 그림이 거래됐다. 미술품 경매사들이 생기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공개된 시장에서 입맛에 맛는 그림을 골라 살 수 있게 되면서 화랑의 그림 거래 비율은 50% 이하로 추락하고 있다. 화랑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화랑 무용론까지 거론되는 형국이다.

태생적 한계를 꼽기도 한다. 초기 고미술 화랑가에선 도굴꾼이 전문가 행세를 했고, 현대미술 화랑들은 집사 수준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컬렉터를 이끌 수 있는 문화적 리더십은 기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서양의 그림딜러들은 달랐다. 몰락한 왕족이나 귀족들이 생계를 위해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던 미술품을 내다 팔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품 딜러로 자리를 잡았다. 고품격 문화를 이끌었던 당사자들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안목과 식견은 신뢰를 받았고 미술시장에서 문화적 리더십으로 작용했다.
중국 청대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한 무리의 화가들인 ‘양주팔괴(揚州八怪)’도 문화적 리더십의 산물이었다. 대운하와 소금 거래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중국의 상업 도시 양저우(揚州)에는 명나라 중기부터 부호들의 후원으로 전국의 시인 묵객·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양주팔괴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판교(鄭板橋)는 만년에 양저우에서 그림 장사를 했을 정도다. 이들의 문화적 리더십이 양저우 미술시장의 풍요를 가져온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 사회 전반의 리더십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다. 문화도 미술시장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미술이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세계 미술시장에 비해 침체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요인도 전문가들은 문화적 리더십 부재에서 찾고 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대표적인 사례로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의 작품 가격을 들 수 있다. 국내에서 괜찮은 작품조차도 3억∼5억원대에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한 미술전문가는 작품가격에 ‘0’ 하나가 더 붙어도 과하지 않은 가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세계미술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인물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됐다는 얘기다.

오는 11월 중국의 베이징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국내의 기획자와 중국 주류 미술계 인사가 함께 마련하는 전시다. 중국 미술시장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관심 속에 마련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백남준 작품을 오랫동안 거래해 온 한 화랑 관계자는 중국사람들에게 작품을 헐값에 다 뺏기는 것은 아닌가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를 계기로 국내의 푸대접이 개선되길 기대하고 있다.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의 문화 리더십에라도 의존하겠다는 심정은 처절하기 그지없다.

백남준 작가가 누군가. 서구의 기술문명 비관론을 넘어선 작가가 아닌가. 기술문명에 동양적 미래 낙관론을 처방한 것이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을 보자. 태초부터 인류의 밤하늘에 유일한 빛의 원천이었던 달과 별빛을 환기시켜 준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인공빛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바쁜 삶에서 사라진 ‘기억의 빛’이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의 차가운 빛을 가지고도 달빛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중국 미술시장에서 백남준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한국 컬렉터들은 벌떼처럼 덤벼들것이라고. 그만큼 한국 미술시장의 문화 리더십이 취약하다는 말이다. 누가 사면 덩달아 샀다가 누가 팔면 모두가 던져버리는 것이 한국 미술시장의 현주소다. 이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다.

세계일보 /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오래전 그를 만난 것은 경기도 이천에서다. 지인의 집을 빌려 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히말라야로 떠났다. 최근 그가 대구에 작업실을 빌려 작업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떠도는 삶 속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이다. 화가 최동열(63)을 그렇게 다시 마주하게 됐다.


처음 그를 만났을때 들려주었던 그의 이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문학 지망생이었던 그는 수재들의 코스였던 경기중학에 입성을 하게 된다. 규격화된 성공코스에 떠밀려서다.

하지만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그는 ‘사회의 규격’에서 벗어나게 된다. 검정고시를 거쳐 15살의 나이로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했지만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베트남전에 첩보대원으로 참전했다. 22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공장 노동자, 유도와 태권도 사범, 바텐더 등을 하며 술과 마약에 빠져 밑바닥 인생을 살기도 했다.

그러다 1977년 뉴올리언스에서 지금의 아내 엘디(L.D.로렌스)를 만나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하게 된다. 재즈의 고장인 뉴올리언스는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간 한국청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평생 화업의 동지가 된 아내는 그에게 화필을 들게 만들었다. 그는 이후 멕시코 유카탄 정글지대과 미국 서북부 지역, 중국 우루무치, 티베트, 네팔 등에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2년씩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이번에도 그에게 왜 떠도는지 짓굳게 다시 물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지겹도록 던진 질문이다.

“인간이 정착을 한 건 떠돌던 기간에 비해 매우 짧습니다. 북방민족인 우리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긴 역사에서 보면 인류는 떠도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할 때도 대강 목적지만 정한다. 비행장에서 내려 버스를 탈지, 기차를 탈지,어느 길로 갈지는 늘 유동적이다,

“모든 것을 예약을 하면 왠지 저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져요. 물론 생전 처음 다다르는 곳에서 모든 것을 정하자면 황당하고 두렵기도 하지요. 하지만 안개 너머의 풍경을 기대하는 것 같은 가슴의 설렘이 있어요” 

 

단촐하기 그지없는 히말라야 베이스캠프 작업실 풍경.

 

지난해 히말라야 트랙킹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같이 갈 가이드, 야크, 조랑말, 포터 등을 닷새 걸려 구했다.

“우리 인생도 미리 정해진 것이 없잖아요. 예약 같은 삶을 산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할까요.”

한달 식량을 등에 진 조랑말 두마리가 눈 쌓인 계곡에서 100m 아래 강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모든 식량이 물에 젖었지만 다행히 말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4500m 고지에서 식량을 널어 말리느라 3일을 고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주위의 만년설 덮인 설산을 그렸다.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 후 그리스의 집으로 돌아가는 삶을 그린 호머의 오디세이에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인 님블(nimble)이 자주 나온다. 새로운 환경에 접했을때 적응하는 마음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동작이 민첩하고 생각이 날렵함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볍고 생각이 비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짐이 없고 고정관념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다.

“인간이 집을 짓고 정착하기 전에는 새로운 곳에서 언제나 움직이는 삶이었습니다.주위를 살피느라 언제나 님블해야 했을 겁니다.” 사실 율리시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긴 여로로서 하나의 삶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

“정착이 불규칙한 자연에서의 분리라 한다면, 움직이는 삶은 불규칙한 자연속에서 쉬는 리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착에 안정감을, 떠도는 삶에선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무서움을 받아들일 때 힘과 여유가 생긴다고 한다. 이것이 예술의 출발점이라 했다.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같은 곳에 한 번 가 보십시요. 짐승들은 먹고 먹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놀고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촉감이 열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자연에서 분리된 인간은 이런 긴장감 마저도 스릴이라 부르며 하나의 오락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가 정한 스케줄 없이 떠도는 삶을 선택한 것은 그의 촉감을 열기 위한 과정이다.

“떠도는 삶에선 내일과 어제도 희미하고 그저 새 환경이 연달아 나타나는 지금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몇달 떠돌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는 가끔 밤에 깨어 지금 여기 침대가 어디인지 모르는 공포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아직 오늘로 마음이 따라오지 못해서이지요.”

오지에서 그의 작품은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한다. 몸은 와 있어도 마음은 아직 그 곳에 도착하지 못해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시간이 끊겨진 공간에서다.

“상상하지 못한 묘한 시간이지요. 아니 시간이 얼어 붙은 공간입니다. 원초적 공간이 이럴 것입니다. 영원이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라 할 수 있지요.”

그에게는 극한상황이 두려움이 아닌 쉼이 되고 그림이 된다. 산을 신으로 섬기는 원주민들은 그에겐 산의 정기를 터득케 해주는 스승이다.



스스로를 홈리스라고 칭할 정도로 고정적으로 사는 집이 없는 최동열 작가. 그는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낯선 지역에서 장기간 머물며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어느 순간 히말라야에 오를 때 갑자기 집에 온 느낌을 받았어요. 진정한 휴식이 된 것이지요.”

원초적인 공간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요즘엔 좀처럼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르네상스시대 무역으로 온 세상들이 연결되어 모르는 곳들이 사라지고 모든 곳이 단지 신기함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중세시대만 해도 사회가 고립이 되어 저 숲 속은 모른다는 개념이 있었고, 매일 숲속을 들어갈 때는 강렬한 긴장감이 형성되었지요. 무역과 소통의 열린 르네상스에서는 모든것을 다 알 수 있다는 호기심만 더 강렬해졌습니다.”

모든 스케줄이 잡힌 관광객으로의 여행은 르네상스 같이 벌써 많이 알고 호기심으로 하게 되지만, 그가 아무 계획 없이 하는 떠돎은 중세시대 처럼 모른다는 개념으로 시작한다. 인터넷시대의 21세기는 태도상 다 아는 르네상스시대와 흡사하다.

“20세기나 중세시대에는 모르는 곳이 많아 깊이 생각하며, 모르는 곳과 대상을 대하는 두려움과 깊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모르는 상황에 처하면 온몸의 세포가 열릴 자세가 되었지요.이것이 매일 일어나는 일이 되고 습관이 되면서 인간의 행동력이 됐어요.”

그는 온 몸의 세포가 열리는 원초적 공간을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그에겐 사랑놀이 같은 희열이다. 그가 40년 가까이 보헤미안으로 사는 이유다. 10월에 그는 다시 히말라야로 떠날 계획이다.

유고의 철학자 지젝은 개인의 삶이 전체의 삶과 융합되지 않고 따로 노는 이야기는 진정한 비극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비극인 예술을 택했다.

인사동 선화랑에서 26일부터 3월11일까지 열리는 ‘최동열의 타임라인 : 1977∼2014’전은 파란만장한 작가 최동열의 작품 전반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자리다.

[세계일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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