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가 하나님의 은총이고 밥”이라던 천상병시인

 

서울 인사동 낙원상가 주변과 동묘 주변은 백발이 성성한 사람들이 주름지고 굳은살 박힌 손으로 ‘장’과 ‘’멍을 외치며 싸우는 인생의 장기판이다. 
40년대의 노년들이 6.25와 월남전을 이야기하며 젊은 시절 숨겨놓은 안주를 꺼내 마지막 몸을 술에 절이며 자신들의 생명을 태우고 있다.
그 모습은 같은 수업 시간을 보낸 어린 시절의 학생들이 오랜 노트를 꺼내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풍경과 다를 바 없다.

그곳에 가면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가 생각난다.

막걸리/천상병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걸 잘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아진다.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그는 낮에도 마시고 저녁에도 마신다.

그는 막걸리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듯 매일 마시다 1993년 63세로 하늘 소풍을 떠났다.
인사동에서 '귀천(歸天)'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던 부인 목순옥 여사를 남기고 말이다.

목여사도 천상병시인 따라 2010년 귀천했다. 


천상병시인 같은 백발의 노인들에게 인사동과 동묘와 종로의 하늘은 천국이고 안식처다.
노인들만 사는 나라에는 시간이 거북이 걸음처럼 느리게 간다.

그곳은 마치 인생의 황혼 역처럼, 다들 떠날 열차를 기다리며 시간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그렇게 인사동과 파고다 공원, 동묘에는 노인들의 나라가 만들어진다.
하나 둘 소풍을 떠나는 마지막 낙원에서 느리게 가는 황혼의 풍경을 다시 본다.

내가 황혼에 들면 이곳에 있을까? 

글 / 주홍수 (애니메이션 감독) 

 

 

주홍수 약력 


1992년 세영 애니메이션 총괄 제작 프로듀서
KBS 옛날 옛적에, 은비까비, 일본 합작 ‘나디아' 제작 프로듀서
1994~미국 할리우드 게임 JOY CINE 총감독
경민대 만화예술과 출강.일요시사 정치삽화 ’탱자가라사대‘ 연재
1998~ (주)프레임엔터테인먼트 슈퍼패밀리 원작, 각본, 감독
2001~2004 KBS TV시리즈 날아라 슈퍼보드 스토리보드, 감독
2004~㈜ 선우엔터테인먼트 스페이즈 힙합 덕 총감독
2005~2010 한국 KBS,중국CCTV '도야지봉' 원작 및 총감독. 상하이미디어그룹(SMEG). 상하이 술영화제작소 총감독.
2010 하문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해외심사위원
중국 SMG 방송 TV 시리즈, ’토끼방’ 기획, 데모제작, 총감독
2014~한국MBC,중국CCTV ‘판다랑’ 원작, 각본, 총감독
웹툰협회 고문/음원협동조합 이사


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인사동의 정체성은 골동품이나 예술품보다 예술가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10여 년 전부터 인사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명성씨가

인사동 대표적 묵객으로 여겨지는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관청의 협조를 얻지 못해 미루어져 왔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과 멋쟁이 방송작가 박이엽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귀천’ 찻집을 주 무대로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천상병 시인 동상만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일요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유진오씨를 데리고 녹번동을 급습했다.

주말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것을 알아 술안주까지 준비해왔는데, 어찌 술자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두 달 전 술을 사두고 갔으니, 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오씨는 이른 시간부터, 때 늦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흥겨운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술 마시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장소를 제공해 그 인근에 천상병시인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동상을 제작할 작가는 최민화씨로 정해져, 머지않아 인사동의 상징물 하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인사마당에 대형 붓 하나를 오래 전에 세워놓았으나, 사물보다는 사람이 더 정겨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천상병 선생이 인사동에 등장할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애들처럼 깔깔거리는 천상병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매력적이지만,

천국 갈 시간을 기다리는듯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장난 끼 넘치는 모습의 술자리도 연상되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서울아트가이드' 6월호 구하러 간다는 핑게로 따라나섰지만,

천상병시인 동상 세워질 장소가 궁금해서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건물 가까이는 자칫 건축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동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가 마땅할 것 같았다.

 

주말의 인사동거리지만 거리두기 정도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예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외계인들 세상 같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인사동도 세월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천상병시인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목여사 말씀은 곧잘 들었으니, 쓰기 싫은 마스크를 턱 아래 걸치고 거리를 휘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동집 골목 안에 있는 지금의 최대감집이 선생께서 자주 드나들던 ‘실비집’이었으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 골목을 돌아 서는 포즈도 연상되었다.

 

아무튼 최민화작가의 기발한 구상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일찍부터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으나,

인사동의 멋진 상징물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천상병(1930-1993)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았다.


“간첩인 친구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500원, 1000원씩 받아쓰면서도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것이 중앙중보부의 주장(불고지죄, 국가보안법 위반, 공갈죄)이었다.


훗날 그는 당시의 고초를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그 날은 새, 1971)이라고 한 바 있다.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이 연루됐다던 그 사건은 2006년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중앙중보부가 과장한 것으로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고문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마저 파괴했다.

재판정 뒷줄에 서 있는 피고 천상병의 모습이 평소의 그와 같지 않게 비감하다.

다리미에 눌렸던 그는 그의 ‘아름다운 소풍’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이라도 한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은 후 그는 실종과 정신병원 입원 그리고 가난 속에서 살다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


늦었지만, 사건을 조작했던 당사자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물론

천상병선생의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진: 재판정에 서 있는 천상병 시인, 1967년 12월 13일, 경향신문 사진부]




 



엊그제 인사동에 들려 어느 외국관광객 팀을 따라 다니며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대부분 큰 길가에 있는 잡화상만 기웃거리며 군것질만 하다 돌아갔다.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 한데, 그런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인사동을 찾겠는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는 인사동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예술의 거리로 살려 낼 방법을 다 같이 찾아내야 한다.
정체성을 잃고 잡상들만 득실댄다면, 인사동의 유명세를 언제까지 유지하겠는가?




인사동은 우리 전통과 함께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다.




먼저, 인사동의 역사부터 한 번 살펴보자.
조선 건국으로 수도가 된 한양은 창덕궁이 있는 북촌 주변에
고관들의 집과 양반들의 저택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멀리 떨어진 북악산과 남산자락에 모여 살던 양반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후 북촌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500년의 역사를 지켜왔지만,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사라지며,
북촌 양반들의 가세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살기 막막해진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집안의 귀중한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하며
북촌주변이 점차 골동품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1914년 관인방 일대의 이름을 인사동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에는 전통과 현대의 모습이 뒤섞인 매력에 끌려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전통찻집과 전시장들이 생겨나며 전통과 낭만의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인사동에 화랑과 표구점이 많이 들어서며 미술인의 출입이 꾸준히 늘어났다.
60년대 명동을 거점으로 모이던 문인들이 관철동을 거쳐,

70대 후반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사루비아'다방을 거점으로 인사동 문화가 꽃 피우게 된다. 
80년대 초반에 생긴 천상병시인의 찻집 ‘귀천’과 '누님칼국수'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실비집'과 '하가'는 물론 피맛골'에 박종수시인이 문을 연 '시인통신'도 많은 예술가들이 더나들었다.

90년대 들어 이해림씨가 개업한 '평화만들기'에는 예술가들과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기도 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인사동에 시인들과 관련된 자리가 많았다는 점이다.

63년 김상옥시인이 '아자방'이란 골동품점을 차려 문인들의 교류처가 되었고,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에 이어 84년도에는 정동용시인이 교장으로 있던 '시인학교'도 개업했다.

그 이후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에서 이생진시인이 정기적인 시낭송회를 가졌으며,

음유시인 송상욱씨가 인사동에 집필실을 차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소리시인 이춘우씨가 시 낭송회를 위한 업소 '시가연'을 개업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시공간이 몰려 있어 미술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반면, 문인들의 출입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 이후 '귀천'의 천상병선생과 목순옥여사를 비롯하여 민병산, 박이엽, 강 민, 심우성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살아계시는 분마저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대형건물이 여기 저기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옛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서서히 끊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애정을 쏟아 붙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명성씨는 긴 세월 동안 사재를 털어 인사동 예술가들을 지원해 왔다.

틈틈이 모임을 주선하여 예술가들의 판을 만들고, 원로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는 애정을 보였다.

‘통인가게’ 김완규회장은 무료 판소리공연을 정기적으로개최하여 우리문화를 알리는데 힘 써 왔으며,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좋은 전시들만 유치하여 인사동 전시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작고한 김수영시인이 찍힌 판화를 담벼락에 붙이는 Street Art를 펼치는 이태호교수 같은 분이 있기에

인사동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내가 몰라 그렇지, 어디 이 뿐이겠는가?




지금이라도 전통과 낭만의 거리를 되찾기 위해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먼저 인사동에 몰려 있는 전시장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자.




그 첫 번째 시도로 인사동 전시 소식을 알려주는 간단한 주간지를 만들어 안내소에 배치하자.
미술평론가 한 분을 선정하여 전시 소식지를 만들고 좋은 전시를 집중적으로 소개하자.
또한 인사동에서 전시되고 있는 다양한 전시를 홍보하므로서, 명실상부한 전시문화의 본거지로 만들자.




둘째, 예술가들이 다시 인사동으로 모여들게 만들어 인사동 낭만을 부활시키자.
천상병시인, 민병산선생, 박이엽선생, 중광스님 등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을 골목에 세우는 등

인사동에 예술혼을 불어넣자.




인사동의 매력은 이리 저리 얽힌 수 많은 골목이 아니던가?
골목마다의 특징을 살려 문학의 거리나 미술의 거리로 지칭해
예술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찻집이나 술집, 어디를 가도 반가운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모여 들 것이고,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멋이 낭만의 거리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기존의 ‘인사전통문화보존회’는 상인들의 모임이라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종로구청’ 또한 그들의 눈치나 보는 탁상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제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나서는 길 밖에 없다.
다 같이 지혜를 모아 종로구청과의 협의체부터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초복 날, 인사동에서 사진동지 정영신씨와 삼계탕 미팅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몸보신하는 날로, 인사동 ‘무교 삼계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유달리 이집 삼계탕만 찾는 것은 인사동의 오래된 맛집이기 때문이다.
맛은 변함없었지만, 작년에 비해 삼천원이나 올라 한 그릇에 만 오천원 했다.
분에 넘치는 밥 값을 물었지만, 너무 맛있어 살찌는 소리가 “뿌드득”하더라.





그런데, 식사하고 나오는 길에 인사동의 유서 깊은 회화나무를 만난 것이다.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볼거리 중 하나가 ‘이율곡 집터‘ 자리에 있는 이 회화나무 고목이다. 
비록 은행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400년을 지켜 온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다.
입구에는 흡연금지라는 큼직한 팻말이 있으나 인근 회사원들의 흡연 장소가 되어버렸는데,
회화나무가 담배연기에 절어 죽을 맛일 게다.





옛날에는 회화나무가 있는 이 곳을 독녀혈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녀혈은 과부가 많이 나온다는 말로 과부골이란 뜻이란다.
그런데 과부골에 율곡 같은 대학자가 살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탑산사’ 학암스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인데,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여인의 자궁을 상징하는 곳으로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따른다. 
큰 구멍을 막으려 나무를 심는데, 이 회화나무도 그래서 심은 것이다.
율곡도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





인사동에는 이율곡의 절골(인사동의 옛 이름)집터를 비롯하여 세도가 김좌근 집터도 있다.
민익두, 민영환, 박영효가 살았던 고가를 비롯하여,
책방이나 집필묵 가게, 표구점, 골동가게, 화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 인사동 본래의 예스러운 모습이다.






인사동하면 뺄 수 없는 사람으로는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가게 여기저기에 남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과 '귀천'의 시인 천상병, 작가 박이엽선생이 먼저 떠 오른다.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민화를 전통문화로 처음 드러내신 조자용 선생, 통인가게 김정환선생,
백자를 품위 있게 누리신 ‘아자방’의 시인 김상옥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도 기억할 수 있겠다.

 


 


이제 그러한 오래된 역사와 전통은 점점 묻혀가고,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싸구려 거리로 변해 가고 있다.
어쩌겠는가?
돈에 묻혀가는 세월이지만, 이렇게라도 추억할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고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신명난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단, 음식준비를 위해 참가할 의향이 있는 분은 댓글이나 별도의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인사동 백년을 걷자” 잔치에 많은 참석있기를 바랍니다.

일시 : 2019년 6월 28일 (정오부터 오후9시까지)
장소 : 인사동 ‘아리랑가든’ (전화 02-723-7311)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9-7


회비 :
60세 이하 : 회비 무료
60세 이상 : 회비 6,000원
70세 이상 : 회비 7,000원
80세 이상은 16만원을 드립니다.
90세 이상은 100만원을 드립니다.
단, 지방에서 참여하는 분은 1박2일 동안 무료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고) 천상병시인 기념사업회 재건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단합을 위해
김명성회장이 초대하는 자리로 ‘아리랑’의 유재만회장이 돕고, 

'광진상공', '엠에스오토텍', '이엘에스솔루션'에서 후원합니다.


그리고 80세가 넘은 분에게 돈을 드리는 건 무조건 다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인사동에 자주 출입하는 원로작가(전 창예헌 고문 및 자문위원)에 한합니다.
일부는 여비로 드리고, 일부는 생계가 어려운 유고작가를 돕기 위한 배려니,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주최 :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주관 : ()천상병기념사업회, 농심마니

후원 : )엠에스오토텍, )광진상공, 이엘에스솔루션(), 아리랑가든







      




안 간다던 인사동에 또 나갔다.
갈 곳도 없고 만날 놈도 없지만 좀이 쑤셨다.
한 때는 정 주었던 고향 같은 년이 아니던가.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데.




인사동서 붓글 쓰는 사내가 한 소리 한다.
초지일관이란 글만 휘갈긴다.
초상화 그리는 꼬맹이도 열심히 그린다.
변함없이 열심히 하라는 말이다.




바람난 딸년이 갈보처럼 놀지만,
바람난 딸년은 딸이 아니던가.
돈에 눈멀고 유행에 맛이 갔지만,
둘도 없는 내 딸이고 정들었던 년이다.




눈치만 보는 아우들은 보이지 않고
천상의 천상병선생이 한 마디 하셨다.
미워도 내 새끼고 고와도 내 새끼란다.
몽둥이로 잡지 말고 사랑으로 잡어라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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