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는 정영신 동지의 세 자매가 어머니 계신 용인 성당묘지 간다기에 따라갔다.

갈 때마다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와 같이 갔는데,

이번에는 미국에 체류 중인 언니 정정자씨도 함께한 귀한 자리였다.

 

인천에 사는 정정자씨는 인천에 대궐 같은 집을 두고

딸이 사는 미국에서 감옥살이한 지도 오 년이 넘었다.

미국에는 병원비가 비싸 치료차 귀국하여 병원을 오간 지가 두어 달 되었는데,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인사라도 드린다며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다.

 

요즘은 멀리 떨어져 살면 가족도 남이나 마찬가지다.

인천 집에는 정정자씨 남편 김명구씨 혼자 살고 있는데,

오년 만에 내외가 만났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두 달이 넘도록 한집에 살며 밥 한 끼 같이 먹지 않았다는 걸 보니,

다들 돈이 너무 많아 탈인 것 같았다.

 

인천에서 만나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로 갔는데, 모처럼 세 자매가 모인 자리다.

성당 묘역 입구에 있는 꽃집에 잠시 내리기에, 다들 불러 세웠다.

세 자매의 마지막 기념사진이 될지도 모를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다.

명예와 돈은 남지 않지만, 사진은 남는다고 허풍을 떨어대며...

 

다들 시골에서 상경해 힘겹게 사느라,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한 번

돌아볼 겨를 없이 늙어 버린 것이다.

 

용인 성당 묘지를 돌고 돌아 정동지의 모친 고 김덕순여사와

둘째 언니 고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위로 나란히 모셔진 묘역에 섰다.

챙겨간 국화와 음식으로 안부 전하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정영신씨는 이번에 만드는 장항성 장터여행 책 좀 팔리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언니 정정자씨의 간구에 배꼽을 잡았다.

애먹이는 영감 김명구 좀 빨리 데려가라고 부탁하더니,

동생 고 정정숙 유골에도 같은 부탁을 했다.

얼마나 미웠으면 그런 말을 할까? 늙으면 자식보다 내외가 더 좋은데...

 

뜨거운 햇살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는데, 마침 유골함 아래턱에

그늘이 생기면서 맞바람 까지 불어 엄청 시원했다.

모처럼 왔으니 빨리 가지 말라는 엄마의 배려라며 다들 입을 모았다.

세 자매가 나누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인천에서 잘한다는 사리원 냉면집을 찾아갔다.

모처럼 맛있는 함흥냉면에다 만두와 수육까지 나왔으나,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기사의 설움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밥 값낸 정정자씨 더러 고맙다는 인사 한다는 게,

정자씨 입술 라인이 죽이네요!“라며 알랑방귀 뀌었다.

 

사진, / 조문호

 

 

명절이 되면 빌린 돈도 갚아야 하지만, 차례상 차림에서 선물에 이르기까지

돈 들어 갈 곳이 너무 많아 명절 다가오는 것이 무서운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삶을 살아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다.

더러 불편한 점도 있으나 돈으로 생기는 폐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행스럽게 기초생활수급자라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어 사는데 불편함은 없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생기 듯,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모든 사건이 돈에서 비롯된다.

정치인들이나 재벌이나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무섭다.

공직에서 옷을 벗거나 감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하며 돈에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돈은 ‘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돈 놓고 돈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돈은 밑천이 있어야 벌 수 있다.

그 돈을 굴려 버는 과정에서 온갖 몰염치와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하고,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춘다.’는 말은 사람의 능력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에서는

돈의 위력을 강조하느라 불가능한 일 까지 끌어들여, 돈 때문에 세상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돈이 없을 때도 돈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 ‘돈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 있으면 금수강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돈 벌기가 힘들어 ‘돈 한 푼 쥐면 손에서 땀난다.’고도 한다.

 

그래서 ‘돈에 침 뱉을 놈 없다’지만, 돈 많은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특히, 돈을 벌어 모으기만 하고 쓰지 않는 구두쇠는 비난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해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고도 한다.

 

그처럼 돈은 버는 것 보다 쓰길 잘 쓰야 한다.

돈 때문에 친구는 물론, 등 붙이고 사는 가족까지 헤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하고...

 

 돈이란 똥과 같아서 돈이 모이면 구린내가 진동을 하나 골고루 나누면 좋은 거름이 된다.

나 역시 돈이 있을 때는 걱정을 달고 살았으나, 돈이 없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종종 인용하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는 속담도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경구다.

돈에 대한 속담까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돈이 요물은 요물인 모양이다.  

 

정초부터 재수 없는 돈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은,

돈이 없어 빌려가며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사람이 있어서다,

 

주말에 녹번동 가면 찾아오는 지인이 더러 있다.

지난 토요일에는 정동지 동생 정주영씨가 다녀갔고, 일요일엔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왔다.

활철씨는 용돈 하라며 돈 봉투를 내놓아 정동지 팁이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지난 20일은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해 바뀌기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며 불광동 '대조시장'에서 만나자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웠다.

동자동에서 시간 맞춰 갔으나, 조해인씨와 먼저 도착해 길에서 떨고 있었다.

 

'대조시장'에 온 것은 며칠 전 홍어무침을 샀는데, 맛이 있어 다시 사러 왔다는 것이다.

홍어무침을 배낭에 집어넣고 추위를 피해 인근 ‘남도술상’이란 주막에 들어갔다.

맛있는 집만 찾아다니는 그였지만, 추위에는 도리가 없었다.

 

연포탕을 안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김명성씨가 두 사람에게 용돈을 내놓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이청운화백을 비롯한 몇 몇 분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아라아트’를 운영할 때는 종종 가난한 예술가들을 도왔으나,

지금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 빚더미에 앉은 처지가 아니던가?

가져 온 돈도 외국기업에서 지사장으로 근무하는 딸에게 빌린 돈이라고 한다.

제 코가 석자인데, 남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겠나?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받으면서도 "씰데없는 짓 그만하라"는 염장 지르는 소리를 했다.

 

다들 갈 길이 바빠 소주 두병만 까고 일어섰는데, 마침 돈 쓸 곳이 생겼다.

밥만 올리려던 차례상을 차리려고 '대조시장'에서 장을 본 것이다.

술김에 이것저것 안 살 것까지 사며 돈을 다 써 버렸다.

돈이 생기면 그냥 두지 못하는 버릇을 탓하지만,

차례음식도 귀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을 것 아닌가?

 

아무튼, 김명성씨 덕분에 푸짐한 명절상을 차렸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 아무리 없어도 밥 굶는 사람은 없는데,

그득한 제사상 또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부스러기 일 뿐이다.

 

새해에는 더 이상 민폐 끼치지 않기로 다짐했다.

돈이 인간성을 갉아 먹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주에는 줄초상으로 연이어 문상 가는 일이 생겼다.

조정순(91)씨는 연세가 많아 지병으로 돌아가신 호상이지만,

안애경(64)씨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안애경씨는 하는 일도 많은데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 난세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더 안타깝다.

 

지난 8일 늦은 오후, 안애경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았다.

평소 아픈 적도 없는 건강한 분이라 믿기지 않지만, 다가온 현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정동지와 서둘러 시신이 안치된 이대목동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그녀는 독신이라 상주로는 자매 세 사람과 조카뿐이었다.

조카 이야기로는 뇌출혈로 쓰러져 두 차례나 수술받았지만,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안애경씨는 문화 전도사처럼 부지런한 삶을 살다 간 예술가다.

핀란드와 서울을 오가며 북유럽 문화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친환경적인 예술을 추구하며 우리네 삶을 개선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자유로운 삶을 누리거나 일을 놀이로 즐기는 행위를 비롯하여,

예술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 등 비슷한 생각을 가져 죽이 맞았다.

 

서서울호수공원에 만든 예술로 놀이터와 어린이 아트캠프 ‘TO BE FREE'

오산에 만든 어린이 놀이공간 나무처럼같은 어린이를 위한 일을 많이 했다.

'우리는 지금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린 워크숍에서도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한번은 동자동에서 어버이날을 맞아 빨래줄 사진전을 열었는데,

빨간 종이꽃 한 송이를 만들어 와, 숱한 사람 중 강씨 머리에 꽂아주었다.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짓는 강씨는 처음 보았다.

어린이와 가난한 약자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존경심이 일었다.

 

이제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누가 그의 일을 대신하겠는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사진이 위안했다.

부디 못다 이룬 꿈은 저승에서라도 이루길 바랍니다.

 

그 다음 날은 정동지의 고향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정영신, 정주영씨 자매를 태워 인천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따라갔는데,

마치 장례식장이 이산가족 만나는 자리같았다.

다들 얼마나 반가웠던지, 상을 당한 슬픔은 뒷전이었다.

돌아가신 분이 집안 어른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이웃에서 살아 남다른 관계였다고 한다.

옛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한 아낙은 반가워 눈물까지 훔쳤다.

 

장성하여 다들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마침 고인의 아들 정경갑씨가 정영신씨와 초등학교 동창이라 동창명부를 뒤져 알아 냈다고 한다.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시절이라

다들 시골에서 서울가야 사람답게 사는 줄 알았다.

노인만 남은 오늘의 시골이 잘 말해주지 않는가?

 

공부하여 돈 벌려면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리 아는 게 많고 돈이 많아도 인정이 메말라버린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핵가족화가 비정의 세상을 부추겼다.

이제부터라도 잊고 있었던 사람을 찾아내어 옛정도 되 찾자.

죽고 나면 지식이고 돈이고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튼, 세상을 떠나신 두 분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궁극의 자유는 죽음밖에 없다는 김용옥선생 말로 위안한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에는 정동지 자매 따라 용인 천주교 성당 묘역을 찾아갔다.

그곳은 정영신씨 어머니 김덕순씨와 언니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 위로 모셔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만 되면 평소 좋아하시던 복숭아와 옥수수, 고구마 등을 삶아 가는데, 

성묘 가는 길은 항상 소풍 가는 것 처럼 즐겁다.

성묘객이 없어 한적한 이번 성묘 길에는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도 함께 했다.

 

 국화를 영전에 놓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두 자매의 모습이 정겨웠다.

 

이런저런 옛이야기로 추억을 떠올리던 정주영씨 말끝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엄만 맨 날 언니만 챙겼잖아

자식 중에 유별나게 언니를 편애한 지난 생각이 떠오른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정주영씨가 저녁을 사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일인분에 삼만원이나 하는 섬진강 민물 장어를...

돌아가신 현대 정주영 회장님 이름값을 했다.

 

하기야! 불광동 역세권에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가졌으니, 회장보다 배짱은 더 편할 것이다.

정력에 좋다는 장어 안주 덕에 소주 한 병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하루 걸러서는 정동지의 돌아가신 언니 정정숙씨 기일이었다.

오후 늦게 정동지 자매와 함께 김포 조카 지윤씨 댁을 찾아간 것이다.

 

오랜만에 갔더니, 조카사위 김중오씨는 다리에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빨리 완쾌되길 빌 뿐이다.

그리고 꼬맹이 시절 보았던 유원이는 키가 엄마보다 더 큰 소녀가 되어있었다.

애들 자라는 모습에서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상다리가 부르지도록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기에,

생전에 한 번도 뵌적은 없으나, 술 한잔 올린 후 고인을 기리며 절을 올렸다.

 

제사상을 물린 후 먹는 제삿밥 또한 자주 맛볼 수 없는 추억의 음식이다.

운전 때문에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제삿밥을 비벼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돌아가신 분들 덕에 연이어 몸보신을 했는데,

이 넘치는 정력은 어찌할까나...

 

사진, / 조문호

 

 

좌로부터 정주영 아들 김희중, 외손자 김동훈, 사위 김상균, 정주영 본인, 딸 김현아, 김소연, 언니 정영신, 사위 이성표

 

정주영 (62세)은 정영신동지의 친동생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녀의 지난한 삶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얼마나 살길이 막막했으면 백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6개월 동안 울었을까?

 

그러나 왈순아지매처럼 억척스럽게 자식 셋을 잘 키워 낸 것이다.

다들 대학을 졸업한 후 딸은 간호사로 아들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소현이와 현아 두 딸 모두 결혼식도 코로나 시국에 치루었다.

하필 하객 초청도 못할 시절에 식을 올려 부모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자식들을 위해 축의금 적금 든 돈이 얼만데...

 

이제 두 딸 모두 시집을 보내 한시름 덜었지만,

텅 빈 집에 홀로 남아야 하는 외로움은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둘째 사위 김상균과 김현아의 결혼 날이 어저께 같은데, 삼 개월 전에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손자를 보았다는 소식만 들었지, 딸네 집에 가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코로나에 발목 잡혀 친정어머니까지 갈 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나?

백일이 지나도록 손자 한 번 안아보지 못했으니... 

 

그러나 현아가 찍어 보내 준 손자 옹알거리는 사진을 들고 동내방내 자랑하며 신바람 난 것이다.

 

이제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살림이라 연신내에서 불광동으로 줄여 이사했는데,

처음으로 가족들이 이사한 불광동 집에 다 모인 것이다.

 

아들 김희중은 휴가받아 나왔고, 큰딸 소현이와 큰사위 이성표,

둘째 딸 현아와 둘째 사위 김상균까지 온 가족이 모였는데,

거기다 복덩이 손자 동훈이까지 안고 왔으니, 완전 봄 사건 난 거지.

 

이제 덤직한 사위들과 달덩이 같은 손자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든든하겠나.

사위들 먹이려고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는데,

정 동지 따라 나까지 달라붙어 음식을 축냈다.

 

시종일관 손자 재롱에 푹 빠진 모습에서 첫 손자 본 할머니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릿다운 아낙이 할머니로 변한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도 실감했다.

 

이것이 평범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고, 이름 없는 소시민의 성공담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남은 생을 즐겁게 가꿔, 늘 행복하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2021.9.15

추석을 며칠 앞둔 엊그제, 정동지가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에 계신 어머니 뵈러 가잔다.

추석 연휴가 끝나면 시작될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전시 때문에 미리 다녀올 심사인 것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고구마와 옥수수부터 장만했다.

정영신, 정주영 자매와 함께 떠난 용인 가는 길은 갈 때마다 소풍 가는 것처럼 즐겁다.

한적한 외곽으로 들어서니 농작물에 새가 달라들지 못하도록

망을 덮어 두었는데, 마치 농부들의 설치미술처럼 보였다.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는 찾아 온 성묘객이 없어 한적했다.

그 곳에 정영신씨의 어머니 고 김덕순씨와

언니 고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위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챙겨간 국화와 음식을 영전에 놓고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이번에 열릴 정영신씨의 전시작품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절절해 관람자들의 호응을 받아 낼 것으로 생각되지만,

길가에 펼쳐질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전은 거부감을 일으키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하잘것없는 전시지만, 그들의 아픔이 모든 이에게 공감되었으면 좋겠다.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들의 환경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기를 빌고 빌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정주영은 정영신동지의 친동생이고, 한 때 나에게는 처제이기도 했다.

지난 토요일 둘째 딸 현아 결혼식이 마포에서 열린다는 기별에 집안 식구들이 다 모였다.

작년에 치룬 첫딸 소현이 결혼식에 이은 두 번째 경사였다.

 

둘 다 사랑이 얼마나 고팠으면 사람을 많이 모울 수 없는 코로나 시국에 날을 잡았겠나?

제 애미가 어려운 살림살이에 자식들 혼례 치루려고

남의 집 길융사마다 적금 들어 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철부지 딸에게 듬직한 사위를 짝지어 주는 기쁨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오죽하면 정동지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 엄마가 말썽꾸러기 두 딸 시집보냈다는 이야기 들었으면

너무 좋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라" 말하겠는가?

 

작년에 환갑을 맞은 정주영씨의 삶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운명의 드라마다.

나이 삼십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병아리 같은 두 딸과 아들을 혼자 키워냈으니,

그 고생이야 보나마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름까지 바꾸었겠는가?

친일파 김활란이가 싫었겠지만, 활란이란 이름을 돈 많은 정주영으로 개명한 것이다.

 

청상과부의 불타는 가슴도 생존의 절박함 앞에는 눈 녹듯 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 살 파먹는 보험회사 외판원에서부터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제 아들 딸 대학 졸업시켜 시집까지 보냈으니, 그 뿌듯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게 평범한 어머니들의 자식을 향한 마음이고, 이름 없는 소시민의 성공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좋은 잔칫날, 코로나 역풍에 축배대신 눈물을 훔쳤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나간 남편 김영덕씨는 전기공학과를 나와 전기차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자동차정비소로 생계를 끌어갔는데, 

어느 날 감기증세로 입원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얼마나 살 길이 막막했으면 백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6개월 동안 울었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듯 시집 간 현아는 강북삼성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코로나와 싸우는 방역의 전사로 나섰고,

첫째 딸 소현이는 시집살이도 없이 편하게 잘 살고 있다.

막내아들 희중이는 스스로 나라 지키는 직업군인을 택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된 것이다.

 

김현아양의 결혼과 정주영씨의 헌신적인 삶에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그 날은 신부대기실 들리는 틈에 순서를 놓쳐 식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50명까지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식당으로 가야했다.

친지 결혼식장 와서 예식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지난 해 소현이 시집 갈 때는 식사 대신 기념품을 주더니, 장사가 안 된다며 다시 뷔페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사육장 먹이처럼 칸칸이 갇혀 먹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고,

뒤통수에는 결혼식 스크린이 왕왕거리는데다 사람까지 많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 없었다.

이승 풍경인지 저승 풍경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뒤늦게 특혜 아닌 징벌의 보너스까지 받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온지 사흘 만에 방역당국에서 자가 격리라는 통보가 왔는데,

결혼식장에 확진자가 생긴 바람에 집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청천벽력이었다.

결혼식장 CCTV를 샅샅이 뒤져 확진자 동선 따라 마스크를 벗은 사람만 찾아냈다는데,

하필이면 커피 마시는 모습이 찍혀버렸다.

앉으나 서나 마스크만 쓰면 살아 남는다는 교훈이다.

 

격리가 끝나는 7월 4일까지 집에서 징역 아닌 징역살이를 해야한다.

세상에! 쓰레기까지 내 오지 말라는데, 화장실 없는 쪽방에서 똥은 어디다 쌀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한 때는 장모님이셨던 정영신씨 어머니 김덕순씨는

100수를 일주일 남긴 지난 2018년 12월 25일에 임종하셨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이 탄생하는 날 제사를 지내는 반역처럼 보이지만,

가족들이 잊지 말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난, 솔직히 제사보다 젯밥을 더 좋아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제삿밥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제삿밥 먹기위해 기다리다 잠이 들어버린 적이 있었다.

이튿날 깨우지 않았다며, 울며 생 때를 쓴 적도 있었다.

 

일찍부터 정영신씨가 장보러 가는데 따라 나섰다.

봉지 봉지 싸들고 왔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십 만원은 날아간 것 같았다.

좁은 집에서 다듬고 부치고 한바탕 난리를 쳤는데,

나야 시키는 대로만 하지만, 시다바리가 더 고달픈 것은 사실이다.

 

온 종일 난리법석을 친 결과 드디어 제사상이 차려졌다.

요즘은 가족까지도 거리두기를 하는 시대라

둘이서 오붓하게 제사를 지내려는데. 동생 주영씨가 오기로 했단다.

뒤늦게 오면서 제사상에 놓으라고 큰 문어 한 마리를 사왔는데,

문어 삶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어버렸다.

 

내 이름을 닮은 문어라 한 번도 먹어 본적은 없으나 제사상이 그득했다.

어머니께서 살아 생 전 좋아하시던 고구마도 제사상에 올랐고.

바닷가 추억이 담긴 홍어와 문어까지 올랐으니, 흐뭇하셨을 것 같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즐거웠던 추억보다 안쓰럽고 가슴 아픈 일이 더 많았다.

십 오년 넘도록 병석에 누워 계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평소 말씀이 없어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해 하셨는데,

썰렁한 내 농담에 웃음 머금고 고개돌리시던 모습도 선명하다.

 

자리가 비좁아 운신하기 불편했지만 다들 엎드려 제사를 지냈다.

다섯 자식 중에 유독 셋째 딸 영신이를 좋아하셨는데,

이제 딸 걱정이랑 마시고 편히 계시라며 빌었다.

약식의 제사 였지만, 음복시간은 길어졌다.

 

홀짝 홀짝 마신 술에 취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제삿밥에 밥을 너무 많이 넣은데다 술 안주로 사온 소고기까지 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제삿밥으로 울고, 늙어서는 제삿밥 때문에 화가 났다.

늙어지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딱 맞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아닌 씁쓸한 제삿날이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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