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가슴 터질듯한 첫사랑의 감정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손에 잡힐듯 생생하니,

사랑의 바이러스가 어지간히도 진하고 강한 것인가 보다.
주체할 수 없었던 아득한 옛 사랑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린다.




그 아름다운 사랑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가'가 잘 말해준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노래 불렀겠는가?
고려장해야 할 나이의 사랑타령이 좀 껄쩍지근하지만, 좋은 건 좋은 것이다.
비단 연인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혈육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난 설날 연휴에 쪽방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저장된 사진을 옮겨 담느라 정신없는데,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와! 하랑이 왔어”
아무리 다급한 일이지만, 모든 걸 팽개치고 부리나케 달려간 것이다.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아들 햇님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와 있었다.
콧구멍한 집구석에 이토록 정이 철철 넘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몇일 전 돌잔치에서 본 하랑이와는 완전 달랐다.
무표정하게 폼만 잡은 그 때와는 달리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며 신났다.




어른들이야 좁은 집이 불편하겠지만, 하랑이는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달라진 환경에 흥미를 느꼈는지, 책을 꺼내기도 하고 설합장을 열어보기도 하고,
문짝에 붙어 있는 장터할머니들의 다양한 표정을 보며 웃기도 했다.
심지어 제 모습을 찍는 카메라를 돌려보며 깔깔거렸다.
호기심 가득 찬 하랑이는 모든 게 신기하고 즐거울 뿐이었다.


 

나 역시 처다보기만 해도, 그 행복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혈육의 정을 이렇게 뜨겁게 느낀 적이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햇님이 어릴 때 느꼈던 40 여 년 전으로 거슬렀다.




꼭 껴안고 싶어도, 행여 다찰까 손도 댈 수 없었다.
하랑이가 집에 머문 두 시간 동안은 행복감에 부풀어 잠시도 눈을 땔 수 없었다.
쉬지 않고 사방을 기어 다니며 세상의 재롱은 다 떨었다.

음식도 잘 먹고, 보채지도 않았다.



하랑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카메라 화인더로 지켜보았는데,
어른 같았으면 몸살 날 정도로 바삐 움직이며 표정도 변화무쌍했다.

붙잡고 일어서기도 하고, 말도 한마디씩 하며 숟가락 질도 곧잘 했다.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행복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늘보다 더 높은 사랑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체감한 것이다.

아름다운 환경에 취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과는 수준이 달랐다.
잠시도 떨어지기 싫었던 연인의 사랑과도 또 다른 차원이었다.



하랑아! 할애비를 행복하게 해 주어 고맙구나.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23일 정영신씨의 ‘장터길 문화탐방(가제)’ 출판 마무리 작업에 따라 나섰는데,
문경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마침,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의 기념관에 간다는 것이다.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의 궤적도 인상적이지만,
항일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적에 비해 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하여 일본 히로히토 암살을 모의한 당사자다.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어 23년간 옥고를 치루고 해방으로 출옥되어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조선인거류민당’을 차례대로 창립하기도 했다.



2012년 생가 터에 박열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 부터 자리 잡았다는 가네꼬 후미코의 묘소도 있었다.
감옥에서 꽃다운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가네꼬 후미코는
일제에 저항한 공로로 일본인으로 두 번째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얼마 전 김명성씨가 소장한 박열의사의 많은 친필서한들을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서한들을 접하며 그를 다시 알게 된 것이다.
기념관에는 어떤 유적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문경새재에서 아침시간을 보내고, 정오 가까이 기념관에 도착했는데,
공원화한 유적지의 기념관은 엄청난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람객은 커녕 관리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가 터도 복원해 놓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는, 민속촌에서나 본듯 한 초가였다.




기념관에는 여러가지 사료들을 모아두었으나, 원본이 아니라 대부분 복제였다.
눈 짐작에도 몇 백억 예산은 족히 들어갔을 텐데, 껍데기에 불과한 토목공사에 돈 처바르고,
유적구입에는 왜 소홀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유적 구입에 들어가는 돈은 남는 게 없어서일까? 아니면 몰라서일까?
비록 여기만이 아니라 지자체에서 건립한 대개의 유적들이 이런 식이다.
엄청난 규모로 만들기만 해놓고, 관리나 홍보는 뒷전인 이런 식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다음 행선지는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 온 천연의 요새, ‘고모산성’이었다.
이곳은 옛날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의 애환이 담긴 산길이기도 한데,
포곡식 산성으로 본성과 익성을 합해 총 1,646m에 달하는 성이다.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데,
선인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건축미와 세월의 흔적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마지막 들린 곳은 한 때 문경선 역사였던 ‘불정역’이었다.
1954년 문을 열어 1993년 문을 닫은 불정역은 문경탄광의 석탄산업과 연계된 역사적 장소성이 있다.




역사 아래는 화강석으로 마감했으나, 상부는 인근의 구랑리 천 강자갈을 사용했다고 한다.
멈춰 선 기차의 객실은 문이 닫혔으나,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 듯 했다,

비록 찾는 이는 없으나, 아담한 간이역이었다.




오후1시가 넘도록 아침식사를 못해, 허기져 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배가 고프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경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먹었는데, 오천원짜리 정식을 시켜 엄청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 이라 듯, 무엇을 먹은들 맛없는 음식이 있겠는가?



 
문경까지 와서 그냥 가면 안 될 분이 있다며, 정영신씨가 이선행씨에게 연락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달려 나온 그의 안내로 인근의 단골집 ‘커피 가 로스터스’에 들렸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지만, 가격도 저렴한데다 커피마니아가 운영하는 괜찮은 커피집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일어나 혼자 장터에 갔다.




대목장이라 장터는 붐볐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방앗간에 떡 만들러 온 사람들의 행렬도 보이지 않았고, 생선가게만 붐볐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장터 풍경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장터에서 멋쟁이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연세의 할머니가 뽀얗게 분을 바르고, 빨간 하이일 까지 신었더라.
마지막까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 할머니가 존경스러웠다.




좀 있으니,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장터 촬영도 촬영이지만, 우리도 제사상 차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엊그제 서산장에서도 몇 가지 샀지만, 나물거리와 생선을 사야 한단다.
따라 온 이선행씨가 단골집에 들려 시금치 한 단을 사주었는데,
가격은 서울과 똑같은 오천원이나, 양은 서울의 곱절이나 되었다.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었다'는 ‘문경새재’라 그런지, 나도 힘들었다.
대목장 마지막 촬영지라 누적된 피로가 몰려 온 듯 했다.
무사히 집까지 오긴 했으나, 졸음운전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사는 것 자체가 곡예 아니던가?

사진, 글 / 조문호













































늦은 시간에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청진동 술집으로 나오라며 화가 손연칠씨를 바꾸어 주었다.
반갑기야 하지만, 술에 골병들어 술자리는 피하는 처지라 난감했다.
그렇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술집 위치를 몰라 가서 전화했더니, 손연칠씨가 데리러 나왔다.
날더러 ‘서울문화투데이’와 무슨 일이 있었냐며 캐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미운 돌맹이’란 카페에 들어가니, ‘서울문화투데이’ 이대표와
화가 전인경, 정영신씨등 여러 명이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과메기 안주에 고급 위스키까지 나온 푸짐한 술상이었다.




그 날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해 중 가장 큰 일을 치루고 난 뒤풀이였다.
문화에 한정된 신문이라 광고 얻기도 어려운데,
십일 년 동안 ‘문화대상 시상’을 끌어 온 것이다. 


 

처음엔 술을 사양했지만, 연이은 권주에 못 이긴 척 술잔을 받았다
사나이 맹세 개 맹세되는 건 순식간이지만, 어쩌겠는가?
딱 석 잔만 마시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으로 아껴 마시기는 했지만,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손연칠씨가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를 완성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 대표는 왜 나를 싫어하냐며 따져 물었다.
술집에 들어오기 전 손연칠씨의 말과 겹쳐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신문에 글을 쓰지 않는데 따른 오해 같았다.


화가 손연칠씨가 완성한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

처음엔 문화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발행인의 열정에 감화하여 동참한 일이지만,
대가없는 봉사라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일이었다.
종이신문을 고집하는 자체가 운영을 더 어렵게 하는데, 그 걸 지켜보기도 편치 않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고 정한 칼럼 제목도 발목 잡았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잘못된 것을 찾아야 하는 절박감도 따랐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빼딱해 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2년간의 칼럼 투고를 끝으로 전시리뷰만 쓰겠다며 슬며시 빠져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가를 잘 아는 처지라 전시리뷰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누군 쓰고 누군 안 쓸 수도 없는데다, 아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지적하기 힘들었다.
안 좋은 작품을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쪽팔리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 쏟고 뭐 데인다는 속담처럼, 힘들게 글 써주고 욕 얻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일 년쯤 하다 전시리뷰도 손을 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야 처음부터 원고료 없이 봉사할 마음으로 나섰지만, 뒤늦게 끌어들인 정영신씨는 달랐다.
수고비도 없는 취재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일로 수시로 부려먹지 않았는가?
공과 사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 처리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도 있다.




나로서는 ‘서울문화투데이’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고,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며 오해는 풀었지만,
정영신씨가 하고 있는 전시리뷰도 하루속히 그만두어야 해 걱정되었다.
이 날도 시상식을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불려나간 모양인데,
아무리 좋은 일도 민폐 끼쳐서는 안 된다.




아무튼 ‘서울문화투데이’가 좋은 매체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존수의 재조명전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가 인사동 갤러리 미술세계‘ 5층에서

오는 213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서 화가 정복수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를 만났다.


 

이존수씨는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불운의 화가다.

경남 남해 출신으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변방의 작가였다

 

부산에서 활동한 70년대 만난 오랜 지기지만80년대 초반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많은 벗들을 사겼으나, 특히 중광스님과 친하게 어울렸다.

어떻게 보면 이존수씨가 중광스님의 그림 스승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상경할 때는 그도 개털신세라 사는 게 어려웠다.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빨래집게 전시로 조명받아 유명세를 탔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자 유명 화랑의 전속화가가 되었는데,

없는 사람이 돈이 생기면 이렇게 변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유명화랑과의 전속계약을 노예계약이라며 법정투쟁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작가의 생명줄을 쥔 화랑 측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였다.


 

한 동안 그를 잊었는데,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것도 죽은지가 한 참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기구한 운명에 억장이 무너졌으나 흐르는 세월에 잊고 살았는데,

갑작스런 전시소식에 죽은 사람 살아 온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파격적인 작품 성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대개의 작품들은 줄거리 없는 설화성을 띄고 있다.

마치 전설이나 동화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 조각들을 형상화시켜 놓았다.


그건 작가에게 잠재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같았다.

그 형상들은 전설로 떠도는 설화가 아니라

오늘의 신화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작가의 마음이었다.


 

전시장에는 세로 1,4미터에 가로 26미터에 이르는 대작이 걸려 있었다.

평생도라 이름붙인 작품에는 삼라만상 희노애락과 우주의 신묘를 다 담아 놓았다.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 이존수의 선험적인 신기어린 세계는

갤러리 미술세계에서 오는 213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나이 먹어 늙어가는 거야 서럽지만,
경자년이 왔는데 그냥 넘어 갈 수야 없지 않은가?

 

 



기해년 간다고 마시고 경자년 온다고 마시니, 이러다 술로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갈 땐 가더라도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지 않더냐.

 

 

 

 

 

정초부터 연 이어 술 복이 터졌다.
정월 초하루에는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얻어 먹는데,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찾아왔다.
소주와 장어를 등짐에 넣어 왔는데, 어찌 술을 마다 하겠는가?

 

 

 

 

빵을 좋아 하는건 어떻게 알았는지, 빵도 잔뜩 사 왔더라.

동자동 살면서 배급주는 빵 맛에 길들었는데, 이젠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양놈도 아닌 주제에 밥보다 빵을 더 많이 먹는 편인데, 술 안주로도 괜찮다. 
빵 안주는 술도 취하고 배도 부르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소주가 모자라 꼬불쳐 둔 상황버섯 술을 꺼내 마셨다.

 

 



그 다음 날은 여섯시에 모임이 있다는 정영신씨의 전갈을 받았다.
예술인협동조합을 준비하는 서인형씨가 마련한, 시무식을 겸한 술자리란다.
서인형씨를 만나 구산동 ‘싸리골’에 갔더니, '서울민예총' 사무국장 황경하씨가 와 있었다.
뒤늦게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나타났는데, 일을 추진할 사무실도 곧 차린다고 했다.

 

 


삼겹살에다 갈비까지, 정초부터 육고기로 배를 채웠는데,
금주령이 해제된 서인형씨가 많이 마시는 바람에 덩달아 취해버렸다.
이차 가자는 걸 줄행랑쳤는데, 녹번동까지 따라 온 것이다.
술 귀신이 따로 없었다.

 

 



방이 좁아, 겨울에는 사용하지도 않는 다락방에 술상을 차린 것이다.
추워 떨며 마시니 좀 덜 취하는 것 같았다.
아들 햇님이 까지 찿아 와, 동자동에서 가져 온 초코파이 한 상자를 손녀 하랑이 주라고 선물했다.

 

 



이 술 저 술 닥치는 대로 마시다보니, 죽을 때나 마실 작정인 ‘불사주’까지 나와버렸다.
그 날은 술이 취해 맛도 모르고 마셨는데, 남은 술로 아침 해장을 하니, 정말 좋은 술이더라.

올 해는 술독에 빠져 아무래도 제 명에 죽기는 틀린 것 같다. 

 

 

 

다들 고마웠어요.  새해에는 만사형통하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황경하 /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살아 생선 강민선생께서 주도하신 인사동 오찬 모임이 오랜만에 다시 열렸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부터 서서히 잊혀져갔는데,
강민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김승환, 방동규선생 등 다른 분마저 뵐 수 없었다.
언젠가 자리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서정란씨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이다.



조문호샘 올해 가기 전에 송년회 한 번 해요. 강민 선생님과 친분 있는 분들이랑요

그래서 "얼씨구나" 만들어진 자리가 지난 30일 정오에 뭉친 나주곰탕오찬모임이다.

인사동 툇마루일층의 나주곰탕은 강민선생 단골이기도 했지만,

탕 속에 고기가 푸짐해 술안주로 안성마춤인 밥집이다.


 


약속장소는 손님이 꽉 차, 다들 그 옆에 있는 찻집에 앉았는데,

방동규, 김승환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희연, 서정란, 이명옥,

이은정, 전태수씨 등 여러 분들이 자리 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보면 반갑고, 앉으면 빨고 싶은 분들이 아니던가?

강민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인가?

서정란씨 이야기가 오늘 점심은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산다는 것이다.

모임이 정해지고 생각지도 않은 전화를 받았는데, 강민선생 아드님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자주 만났던 분들께 인사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었다.

이건 분명 강민선생님께서 저승에서 아들에게 지령내린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기국서씨가 '나주곰탕'으로 급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가서 찻집으로 데려 왔는데, 차라도 한 잔 하며 여유롭게 즐기라는 계시였다.

다들 연말이라 모이는 곳이 많은 모양인데, 뒤늦게 이행자시인도 나타났다. 

뚜꺼비 같은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인증 샷만 찍고 도망치셨다.




 나주곰탕’에서 자리 비었다는 전갈에 다들 밥집으로 옮겼다.

소주 한 잔하며 탕 그릇에서 건져 놓은 수육을 보니,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생각났다.

술 안주로 건져놓은 수육을 매번 슬며시 내 접시로 옮겼는데, 마치 죽은 울 엄마 같았다.

불의에는 칼날처럼 매서웠던 강민선생님의 그 자상한 모습이 떠오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눈물이 탕 그릇에 떨어지는 거야 괜찮으나, 누가 볼까 쪽팔려 미치겠더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요량도 못한 채 취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밀정원으로 차 마시러 갔다.

, 까발리는 걸 좋아하는데, 다들 비밀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비밀정원에 가 있으니, 다른 곳에서 한 탕 뛰고 온 김명성씨가 나타났.

기국서씨는 술이 부족했던지, 보드카처럼 생긴 독주 한 병을 사 왔다.

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두 잔만 마셨는데, 그 술을 혼자 홀짝 홀짝 다 마셨다.


 

오늘은 빠질라고 작정하고 왔어요’라고 했던 귀엣말이 생각났다.

기상천외의 퍼포먼스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자리에서 일어 나 남녀가 약속이나 한 듯 갈라졌다.

방배추선생께서 기국서, 김명성씨등 꼬봉들을 거느리고 유목민을 습격한 것이다

가보니 송일봉씨가 입구에서 뭔가를 정탐하는 것 같았고,

안쪽에는 시인 정동용, 기타리스트 김광석, 발렌티노김도 보였다.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 찍을 일도 많은데, 방배추선생 구라 듣느라 퍼져버린 것이다.

방동규선생이 누구더냐?

백기완,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선생은조선의 주먹등 최고로 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노동판에 일하러 가고, 체육관에 다니며 체력 관리하는 분이다.

, 한마디로 선생님을 義人이라고 생각한다. 옳지 못한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태극기부대나 가셔야 할 분이 촛불집회마다 쫒아 다니신다.

얼마 전 김정헌씨 작품 보러 간 영종미술관에서 그림 보며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

엠블란스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뒤늦게 들었다.


 

그 날 하신 말씀도 놀랄 노자다.

여지 것 청년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노인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살아온 그 소설 같은 실화를 기국서씨 더러 극화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그 날 이야기만도 밤 샐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려야겠다.


 

기국서씨는 귀가 어두워 여기 저기 귀 기울이는 꼴을 보더니, 날 더러 탐색가라 했다.

내 귀에는 색을 탐하는 자로 들렸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두 번째 툇마루에서 열릴 인사모시간이 늦어버렸다.

정동용씨 더러 있으라 해놓고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달려갔는데,

가서 된장비빔밥에 술말아 또 한 잔 걸친 것이다.

반가운 분들과 노닥거리니, 시간은 잘도 갔다.


 

작별 인사하기가 무섭게 유목민으로 달려가니, 이미 술꾼이 바뀌었더라.

방동규선생을 비롯한 잔당은 물론 정동용, 발렌티노김, 김광석씨도 다 사라져버렸다.

새로 등장한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사진하는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다.

금주 한지가 두 달이 넘었다는 이정환씨는 소주잔에 음료수를 따라 마셨다.

그 술 좋아하는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살아남기 힘든 것이다.


 

그나저나 긴장이 풀려 그런지, 술이 슬슬 올랐다.

쪽방 계단 오를 일이 겁나 줄행랑쳤는데, 인사동 밤거리는 축축했다.

어떤 미친 할매라도 납치되고 싶었다.



쇼윈도를 올려다보니, 처녀귀신이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았다.

네 이놈! 아직 정신 못 차리고 탐색하냐?

강민선생께 일러바쳐, 저승 오면 곤장이 백대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사진






































년 말이 다가오니 사방팔방 술 마실 일 뿐이다.
문제는 몸이 받쳐주지 못하니 탈이다.




지난 19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망년회가 있었다.
연극연출가 기국서씨 시상식에서 뒤풀이도 마다하고 달려갔더니‘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시인 조준영씨, 화가 김 구, 장경호, 전강호, 조경석씨,
미술평론가 유근오, 최석태씨, 연극배우 이명희씨, 연출가 강경석씨
사진가 정영신씨, 중문학자 임계제씨 문화기획가 서인형씨,
안쪽에는 불화가 이인섭씨와 사진가 이유홍씨도 있었다
그 외에도 안원규, 전활철, 김대웅, 노광래씨 등 많은 분을 만났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분도 많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났으니, 기분 좋아 술이 술술 넘어갔다.
기분 좋게 즐긴 건 좋았으나, 그 다음 날 죽어났다.
술자리에서 실수도 많이 한 것 같은데, 필름이 끊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자에 달라 붙은 김치조각이나, 튀어 나온 정영신씨 입을 보니 알만하다.


정영신사진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누군가 욕을 하는 모양이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으니 할 말도 없다.
차라리 술 마시다 뒈져 버렸으면 이런 낭패는 없을텐데...



정영신사진


주머니를 뒤져보니, 김구씨 전시 엽서가 한 장 나왔다.

내년 1월3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화인'에서 열린단다.

'갤러리 화인'은 옛날 '평화 만들기'자리에 있고,

개막식은 1월3일 오후5시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오늘은 '브레송'에서 사진인들 망년회라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술 마시다 죽는 건 주사인가? 아니면 순직인가?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예술인을 규합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술을 빙자한 기존의 사기꾼 패거리는 예술가 이름이나 붙여주는 것으로 장사를 하지만,
제대로 작업 하는 작가라면 아무도 그런 곳엔 관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 개인주의가 예술가를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로 정착시킨 것이다.
기존 협회에서 안 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찾자는 것이다.



도둑놈 심보로 원고료도 안 주고 공짜로 써먹는 대형언론사의 횡포는 물론
초상권이나 사진저작권 등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살아가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돈이다.




작가마다의 작업을 분류하고 작품가격 등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책정하여
작품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소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안정적으로 생활비와 작업비가 마련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 꿈같은 일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
바로 서인형씨가 추진하려는 예술인협동조합 프로젝트였다.



아무리 좋은 일도 추진하는 이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사심이 개입되어 있다면 성공하기 힘들다.
서인형씨라면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한 것이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이지만, 안정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잘 못된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그동안의 행적이 말해주듯,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 꾸준히 프로젝트를 만들어 도움을 주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깍듯 그는 늘 가난하게 산다.
가난하게 사니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는 한 때 ‘민예총’ 사무국장을 지낸바 있는 문화전략가로
협동조합 결성에 대한 경험이 많은데다 대부분 성공시킨 경력자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여러 사람이 협의하기 시작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사진가 정영신씨, 서울민예총 사무국장 황경아씨와 세민씨 등
여러 명이 협력하여 매주 일요일마다 역촌동에서 모여 회의를 가져왔다.
난, 얌체같이 한 번도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회의가 끝난 후 밥 먹는 데만 매번 따라붙어 술만 축낸다.




지난 1일에는 역촌동 ‘북경반점’에서 청요리와 고랑주를 얻어 먹었는데,
8일은 최석태씨 연락 받아 갔더니, 다른 분들은 볼 일이 있는지 모두 가고 없고,
최석태씨와 정영신씨만 정답게 앉아 있었다. 눈깔 튀어 나오게...




따라주는 이과두주를 홀짝 홀짝 마시기는 했는데, 겨우 몇 잔에 슬슬 맛이 갔다.
정영신씨 집으로 옮겨 와 다방커피 마시며, 술 깨려고 사진기를 들고 설쳤는데,
집이 너무 넓어 화각이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 찍은 사진을 보니, 위험하게 씽크대에 올라가기도 하고
바닥에 드러눕는 등 별 지랄을 다 했더라. 


 
그 날 밤은 최석태씨가 자정이 가깝도록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나,
자고 일어나니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았다. 좋게 말해 치매지, 노망든 것이다.
그래서 예술인협동조합에 앞서 대중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몇 자 적는다.




대중들의 예술품에 대한 가치기준, 즉 의식변화가 시급하다.
작품을 돈으로 보지 말고 즐기는 기호품으로 보라는 것이다.
작가 이름이나 값 비싼 작품만 관심을 가지거나,
평론가 말 듣고 작품을 구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던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입하여 즐겨라.
벽에 걸어두다 지겨우면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다 보면 작품을 보는 나름의 안목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돈이 아니다. 비쌀 수록, 유명 할 수록 사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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