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째 주 토요일인 지난 7일은 영하권으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 여의대로를 가득 메웠다..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가 마련한 ‘14차 여의도 촛불문화제’는

오후 2시부터 사전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지하철 입구에는 시민들의 바램을 포스트 잇에 담아 붙이고 있었다.



최근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과 유재수 전 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 등으로 인해

청와대와 검찰 간의 갈등이 격화된 시점이라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좀 늦게 여의도에 도착했는데, 이미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어차피 흩어지기 마련인데, 왜 정영신씨와 짝 맞추어 가려 집회 시간을 넘겼을까?



어두워지면, 사진 찍는 것도 용이하지 않아 아예 자리 잡아 앉아버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여의도공원 앞 교차로에서 여의대로 5∼7개 차로를 대부분 매웠다.

검찰 개혁을 향한 열기는 뜨거웠으나, 움추린 어린이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로 꽁꽁 싸맨 시민들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킬 것을 촉구했다.

대부분의 집회 참가자들은 노란 풍선과 ‘공수처를 설치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공수처 설치하라”, “자한당 해체하라”, “검찰개혁 이뤄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계엄령문건 특검을 실시하라!“는 새로운 피켓도 등장했다.



집회 중 단상에 오른 독립영화감독 박두혁씨는 “정치 검사에게 불법으로 감금당해 2년간 옥살이를 했다”며

“검사의 불법 행위를 수차례 고발했지만,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영화 ‘법피아’를 제작했다며, “법피아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김민석 전 국회의원은 “검찰은 충심에서 저런다는데 무슨 충심이 정권만 겨냥하냐”며

“이것은 충심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고 역심이기에 반드시 진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조국 전 장관이 그린 그림을 열배, 백배로 이뤄낼 수 있도록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자”는 말도 했다.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빠질 수 없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나경원, 황교안 고발 서명 동참자가 십만 명을 넘었다며 고발장을 제출해 처벌받게 할 것이라 했다.

“끝까지 함께 투쟁하여 그들을 국회에서 영원히 몰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청와대를 상대로 한 검찰 수사가 노골적인 정치수사라고 비판했다.

김남국 변호사는 “청와대까지 압수수색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되물었다.

“검찰이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검찰이 묵혀뒀던 사건을

아무 이유도 없이 총선 전에 꺼내 수사하는 것이 어찌 정치 개입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날의 집회는 축제 분위기도 감돌았다.

최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추미애 후보자에 대한 믿음도 작용했겠지만,

공수처 설치는 돌이킬 수 없는 물줄기라 통과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선 것 같았다.



여러 가지 공연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수 플라워가 ‘걸음이 느린 아이’등 자신의 인기곡을 불러 분위기를 띄웠다.



집회가 끝난 참석자들은 마포 대교 남단에서 자유한국당 당사 앞까지 행진하며,

“공수처가 설치 될 때 까지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날은 집회가 열리는 동안 아는 분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광화문미술행동’ 팀은 어디 있는지, 사진 찍는 동지들은 어디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헤어진 정영신씨만 어렵사리 만났는데, 지나치다 하형우씨를 보았다며 연락을 했다.



사진가 하형우씨 뿐 아니라 도예가 박응향씨와 정현주, 정휴씨도 함께 왔다.

정현주씨는 촛불집회에 노란풍선을 제공하는 ‘풍선공장 공장장’이고, 정휴씨는 제자라고 소개했다.



집회 때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인쇄한 노란풍선을 나누어 주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박응향씨도 정현주씨의 열정을 돕고자 나온 듯 했다.

하형우씨가 안동찜닭까지 시켰는데, 다들 운전 때문에 술을 사양해 혼자 마셔야 했다.



지하철 막차시간이 임박하도록 마신 것 까지는 좋았는데. 건물 밖으로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나온 길을 잃어버렸다.

이리 저리 헤메다 어렵사리 만났으나, 이번에는 정영신씨가 늦장을 부렸다. 



휘왕찬란한 조형물에 마음 뺏겨, 낯선 길을 헤매다 결국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지하철은 놓쳤지만, 공수처법은 꼭 통과될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역촌사거리 고기집에서...좌로부터 서인형, 전세미, 황경아, 박권주, 최석태씨



지난 24일 저녁무렵, 정영신씨로 부터 밥 먹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역촌 사거리에 있는 고기집인데, 그 곳은 1인당 12,900원만 내면 무한정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집이다.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이라면 본전 뽑고도 남는다.

정영신씨가 부탁한 서류를 가져가니, ‘예술인 협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는 서인형씨와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비롯하여 '서울민예총' 사무국장 황경하씨와 박권주, 세민씨 등 젊은 분도 세명이나 있었다. 

예술인 협동조합 창설에 따른 회의를 마친 후 마련한 자리 같았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속담처럼, 술과 고기를 양껏 얻어 먹었다.

정영신씨 집으로 옮겨 와 차 한 잔 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집이 너무 넓어 주인과 장정 세 사람 들어가니 꽉 찼다.

의자까지 부족해 옆에 쪼그려 앉아야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영신씨 집에서...좌로부터 최석태, 서인형씨


이미 사진시장에 대해서는 정영신씨가 많은 조언을 했겠지만,

술김에 사진판 돌아가는 이야기나 지껄였다. 얻어먹은 술 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사실 ‘예총’에서 만든 ‘한국예술인협동조합’이나 연극인들이 하는 ‘만리동 예술인 협동조합’,

‘온누리 국악 예술인 협동조합’ 등 기존 예술인 협동조합도 있으나 이름만 협동조합이지 제 기능을 못한다.

특히 미술이나 사진 등 시각예술 부문에 몸 담은 분들이 만든 협동조합은 아직까지 없는 실정이라

작품 시장의 활성화나 저작권 문제 등 도맡을 일이 한 둘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기구다. 

제일 관건은 많은 예술인들이 함께 동참하는 결집력인데, 작가들에게 도움만 된다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여러 협동조합을 성공시킨 경험을 갖고 있는 서인형씨가 주도하는 일이라 신뢰가 간다.

이미 성공한 다른 나라 경우를 벤치마킹 할 것이란다.


얼마전 회의를 마치고 정영신씨 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좌로부터 서인형, 정영신, 최석태씨


기존의 미술시장은 재력있는 삼성이나 가나 등 몇몇 갤러리에서 시장을 주도해 작품 값을 튀기지만, 사진판은 아직 미미하다.

'한미', '스페이스22'등 재력가들이 운영하는 사진갤러리에서 이름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정도다.

내가 볼 때는 이름 있는 몇 몇 작가보다 가난한 작가들의 그림이나 사진에 올인 해야된다.

이미 제벌갤러리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작가들은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술판은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자문하고 있지만, 사진판은 사진평론가 이광수교수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눈빛출판사' 대표 이규상씨의 협력도 얻어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예술인협동조합의 성공적 정착을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회의를 마치고 정영신씨 방에서 찍은 사진이다,좌로부터 서인형, 최석태씨








지난 22일 마포 시민공간 ‘나루’에서 열리는 정영신씨의 현장사진 강의에 따라 나섰다.
강좌가 열리는 문화협동조합 ‘나루’라는 공간은 처음 가보았는데,

‘성미산마을극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시민단체가 입주해 있었다.

그 날은 사진 강의 뿐 아니라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라는 연극 등 다른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곳에서 ‘사회적공론화미디어투쟁단; 정재권대표와 장기민 기자도 만났다.



강의실에 들리기 위해 차를 후진하다보니 어딘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이쿠! 큰 일 났구나‘싶어 잔뜩 겁 먹고 내려와 보니 주차된 차의 뒷바퀴 펜더에 살짝 부딪혔다.

부딪힌 곳에는 이전에 부딪힌 자국도 있었지만, 뒷 문짝에도 끌킨 자국이 선명했다.

보나마나 내가 상처내지 않은 문짝까지 덤터기 쓰기 십상이었다.

팬더야 교체해도 보험수가가 얼마 되지 않지만, 문짝을 수리해 달라 할 것 같아 걱정되었다.

모른 체 지나칠 수도 있으나,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보험회사 전화번호부터 확인한 후, 차주에게 전화해 후진하다 부딪혔다고 이실직고했다.




좀 있으니 60대 초반의 남자 한 분이 나타나 차를 살펴보더니, 괜찮다며 그냥가라는 것이다.

미리 덤터기 쓰겠다고 의심부터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죄송스럽고 고맙다”며 정중하게 인사는 했으나, 운전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며 돌아갔다.

얼마 전에는 자동차 번호판에 살짝 부딪혀 조그만 점 하나 찍혔는데도 교체비용까지 청구한 야박한 세상에,

이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도 있으니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강의 듣는 분이 고작 다섯 명이었다.

수강료가 없는 무료강의지만, 무료강의 일수록 강의 듣는 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 자리라도 메꾸어 주려고 자리에 앉았지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수강생이 없으면 이야기하는 강사가 얼마나 김빠지겠는가?

시간만 메우면 강사료야 받겠지만, 다 국민이 낸 세금 축내는 일이 아니던가.




몇 사람 되지 않는 강좌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진지하게 들어 다행이다 싶었다.

이처럼 무료로 진행하는 다양한 강좌들이 곳곳에서 열려 생각만 있으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이라 불신의 벽은 높지만, 이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분도 있으니 아직은 살만한 세상 아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한정식선생께서 인사동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서초동 자택으로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다.

해마다 신년이면 가까운 분들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을 베풀었으나, 올 해는 그 모임도 갖지 못했다.

초여름에 한번 찾아뵌 후로 정영신씨를 통해 간간히 안부나 전해 들었는데,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일 뿐인데, 소심한 성격이 병세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5-6년 전에는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는데, 모두 생각의 병이고 마음의 병이다.

우울증에는 대마가 최고의 명약이라고 권했으나, 대마에 대한 선입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 바뀌기 전에 한 번 찾아 뵈어야 할 것 같아, 지난 19일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자택에 들린 적이 있으나, 갈 때마다 내비에 의존해 잘 몰랐는데,

그 곳이 몇 달 동안 검찰개혁하자며 주말마다 쫒아 다녔던 검창청 옆이었다.

육개월 만에 뵌 선생의 모습은 더 수척하셨고, 사모님은 오히려 좋아진 것 같았다.
외출은 물론 책도 전혀 못 보시고, 사모님 귀가 어두워 대화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잘 때마마 수면제에 의존해야하는 처지가 지겹다고 했다.

식탁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저 때가 가장 좋았던 꽃 시절이라고도 했다.

죽는 것도 어렵다며, 생에 대한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여전하셨다.

“검찰청이 선생님 댁 지척에 있는 걸 미쳐 몰랐네요”라고 말했더니, 나더러 ‘집회에 왔냐?“고 물었다.

”당연히 와야지요“라는 나의 대답에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화제를 돌리셨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선생님댁 거실과 연결된 정원이 연립 주택 공용이 아니고 전용 이었다.

연립주택에 그렇게 넓은 정원이 조성된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한 쪽의 큰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선생님께선 “얼마 전만해도 손자들이 저 곳에서 놀았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며 세월의 빠름을 안타까워했다.




한정식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어우러져 선생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했지만,

이젠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인다.




선생께서는 재력이나 명성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라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죽고 나서의 명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성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황혼기의 삶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여건은 되었건만,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아들과 며느리가 의사건만, 마음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파출부의 음식솜씨가 입맛에 맞지 않아 점심 한 끼는 늘 외식을 한다고 하셨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며 생선구이 전문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잔 걸음이지만 걷는 데도 지장 없고 음식도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외출이라도 가끔 하시면 저녁에 잠들기가 훨씬 쉬울 것 같건만,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내년 봄에는 인사동으로 가까운 지인들 불러 모아 생신 잔치라도 한 번 마련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우리나라 최초의 협동조합 프랜차이즈 ‘피자 유니온’은
미스터 피자의 갑 질에 지친 점주들이 본사와 가맹점이 상생하는
좋은 프랜차이즈 모델을 만들기 위해 창설한 피자연합이라 한다.




서인형씨로 부터 피자 홍보할 사진을 의뢰받은 모양인데,
정영신씨 운전기사를 자청하여 현장에 따라 붙은 것이다,
매장은 송파구 방이동에 있었다.




좀 있으니, 피자협동조합 컨설팅을 맡은 서인형씨가 나타났다.
서인형씨와 피자연합 정종열 이사장, 피자 만드는 이경민씨 등
몇 분의 도움을 받아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난 서양 빈대떡이라 말하며 피자를 별 좋아하지 않았다.




피자를 계속 바꾸어 찍는 걸 보고 피자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정말 많은 종류의 피자가 있었고, 맛도 천차만별인 것 같았다.
빈대떡 촌놈 소리 듣지 않으려면 앞으로 피자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서인형씨는 정종열이사장과 점주에게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친절에 관한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만 하면 단골손님이 저절로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정말 마음 비우지 않으면 장사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장사하기 위해 억지로 친절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친절이 몸에 베여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
마음에 없는 친절은 금방 뽀록나기 마련이다.
요즘 매장은 젊은 사람 일 수록 더 친절하더라.




정종열이사장 덕에 점심도 잘 얻어먹었다.
술 안주가 아니라, 밥 반찬으로 삼겹살을 먹어본 지가 있었던가?
오래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해 꼰대소리 듣는데,
그 소리 듣지 않으려면 모든 습관을 바꿔야 했다.




삼겹살 백반 뿐 아니라 피자도 열 판이나 선물 받았는데,
그 날 저녁은 피자 배달부가 되어 나누어주느라 바빴다.
멀리는 갈 수 없어 은평구만 다녔는데 
제일 먼저 아들 햇님이 부터 주고 두 번째는 '서울민예총' 황경하씨,
세 번째는 정영신씨 친구, 남은 두 판은 둘이서 갈라 먹었다.
이제사 피자 맛을 좀 알것 같네.




젊은이들이 정성껏 구워내는 ‘피자 유니온’을 꼭 기억해 주세요.
뒤늦게 피자 맛을 알게 해 준 메이커가 바로 ‘피자 유니온’ 입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몇일 전 부산 친구 신윤택씨의 막내아들 정환군이 장가간다는 소식을
창원의 김의권씨로부터 전해 들었다.
결혼식 있는 토요일엔 일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부랴부랴 예식장이 있는 울산으로 가기위해 서둘러야 했다.

 

 

 

, 다양한 층의 친구들이 있지만, 부산이나 마산, 울산 등 경상도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청춘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라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다.

히피문화에 빠져 있을 때로, 속된 말로 분류하면 화류계 친구들이다.

좋게 말하면 한량이요, 안 좋게 말하면 난봉꾼 시절이었다.

다들 음악과 관련된 유흥업을 하던 친구들이라 화류계로 분류하는데,

음악과 사랑에 빠져 보낸 청춘시절, 아니 순정시절이었다.

 

 

    

아들 장가보내는 신윤택씨를 비롯하여 황성건, 김의권, 조진현씨 등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버린 정남규, 홍수진씨는 만날 수 없지만...

 

 

 

이들은 40여 년 전부터 어울린 친구들로,

하단에 있던 에덴공원 난향음악실에서 남포동으로 옮겨 국악주점 한마당을 할 때다,

신윤택씨는 서면 우드스탁을 거쳐 남포동에서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전원다방 운영할 무렵 만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가 최민식 선생께서 자갈치시장에 나오시면,

낮에는 전원다방에서 죽치다 어두워지면 한마당에 들리셨는데,

그 때 선물한 인간사진집 한 권이 내 인생을 바꿀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황성건씨는 하수진이란 가명으로 홍수진씨와 함께 음악실 디스크 자키로 떠돌았다.

둘 다 그림에도 재질이 많아 판돌이 주제에 화판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는데, 음악실이나 여러 곳의 실내장식을 맡기도 했다.

밥 딜런이나 지미 핸드릭스 등 뮤지션들의 연주 장면을 극장 간판처럼 크게 그리기도 한 재주꾼들이다.

긴 머리를 출렁이며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던 그 당시 모습들을 떠 올리면 웃음이 절로난다.

 

 

 

그 뒤 김의권씨는 마산으로 옮겨 수림음악실을 운영했는데,

부마민주항쟁’에 휩쓸려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 당시의 수많은 일화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십년전 찍은 고인 홍수진씨의 모습

 

홍수진씨는 울산 엠비시 디스크 자키로 시작하여 편성부장까지 맡았으나, 안타깝게 위암에 걸려버렸다.

자칭 공인이라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죄였다.

음악과 문학 그림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친구지만,

슬픔은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는 시집을 남기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양호 까타리나에서 시작된 황성근씨의 화류계 인생은 신촌의 장미 빛 인생으로 이어졌다.

말년에는 울산대 앞에서 유혹이란 카페로 유혹하다, 결국 문 닫고 말았다.

 

 

 

다들 유흥업에 종사한 셈인데, '해태제과'에서 일한 조진현씨도

동래 온천장에서 호텔을 운영한 적이 있으니, 유흥업 친구에 끼어도 뒷말은 없을 듯 하다.

 

 


  

신윤택씨는 일종의 흥행사 기질을 갖고 있었다.

개성 있는 업소를 만들어 손님이 넘쳐날 때 프리미엄 붙여 팔아넘겼으니까...

그렇지만 그나 나나 상호 잘 못 붙인 죄로 부정 타, 망한 케이스다.

나는 서면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하다 망하여 서울로 도주했지만,

그는 초량에 문을 연 크라이막스로 망했다. 절정에 오르면 그 다음은 끝이 아니던가?

 

 

고인 정남규씨의 6년전 모습

 

지금은 떠나고 없는 정남규씨가 그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부산 서면을 관활로 둔 부전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공무원이 음악을 좋아하는 히피니즘에 빠진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세상 어떤 일도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불치의 병에 걸리며, 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스스로 목 매달아 죽었다.

 

 

 

그런데, 정환군 결혼식 이야기는 간데없고, 친구들 이야기로 입이 말라버렸네.

 

 

    

정환군 결혼식에 갈 것을 뒤 늦게 작심하는 바람에 열차 좌석을 얻지 못해, 차를 끌고 가야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지랄같은 습관이 하나 있다.

이튿날 새벽에 먼 길을 떠나게 되면, 그 전날 밤은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소풍가기 전 날, 잠 못 이루는 애들처럼 말이다.

 

 

 

전 날 밤늦게 신학철선생 상가에 다녀 와서, 부고를 올리고 자정 무렵 자리에 들었는데,

한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려고 몸부림쳤으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섯 시간 넘게 이불을 뒤척이며 온갖 잡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꼬박 밤을 지새고 여섯시에 일어나 울산으로 출발한 것이다.

 

 

결혼식이 열두시라 여유롭게 출발했는데도, 토요일이라 그런지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달렸지만, 울산 톨게이트에 들어서니, 결혼이 시작될 열두시였다.

장장 여섯시간을 고속도로에서 시달린 셈이다.

 

 

차주인 정영신씨가 같이 가지 않았으니, 길 안내 할 핸드폰이 없어 더 곤욕스러웠다.

고속도로야 장님도 찾아 갈 수 있겠지만 울산시내로 접어드니,

서울 올라 온 시골영감이 김서방 집 찾는 격이었다.

차에서 내려 '목화예식장'을 물어보았으나 이리가라 저리가라 끌려만 다니다,

결국은 택시를 앞세우고 와야했다.

 

 

 허겁지겁 들어가니, 이미 결혼식은 끝나고 친구들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날 신윤택씨 아들 정환군을 처음 보았는데, 땅잘막한  애비와는 달리 키가 훨신한 게 잘 생겼더라

예쁜 며느리도 야무지게 생겨, 잘 살것 같았다.

너무 서둘러 오느라 축의금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지만, 뒷날 시간나면 신방 꾸밀 사진 한 장 보낼 작정이다.

 

 

    

정장 차림의 신윤택씨 행색은 마치 꾸어다 놓은 보리쌀자루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을 깜짝거리며 생글거리는 특유의 표정을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정신없이 예식장에 뛰어 든 터라, 입구에서 눈인사만 주고받은 친구들을 다시 찾았다.

인사동을 자주 들락거리던 창원의 김의권씨는 본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 이종호씨 상가에서 볼 때처럼, 손만 대면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만의 캐릭터는 여전하지만, ‘힘 빠진 안마사 같다고 한 나의 말이 결코 어거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옛날부터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자가 바로 조진현씨가 아니던가?

반가워하는 조진현 내외와 건장한 아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호탕한 그의 웃음과 환한 표정에 온갖 시름이 달아났다

 

 

 

 

본지가 십년은 족히 된 것 같은 황성근씨도 여전했다.

요즘은 아파트 경비실을 직장으로, 남는 시간을 한시에 푹 빠져 산단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가며 재미있게 사는 모양인데,

설마 예전처럼 사슴처럼 슬픈 눈빛으로 여인의 마음을 홀리는 그런 일은 없겠지...

 

 

 

죽은 홍수진씨를 대신하여 미망인 최정순 여사도 만났고,

음향시설에 일가견이 있는 김화식씨도 오랜만에 만났다.

예식장 뷔페 음식만도 충분했지만,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신윤택, 김의권, 황성근씨 등 다섯 명이 최여사 따라 나선 곳은 한탄강이라는 중태기 매운탕 집이었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도 신윤택씨가 이야기를 끌어갔지만, 이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지만, 술자리를 맛지게 하는 재미가 있다.

손으로 가려가며 옆 사람이 들릴 정도의 귀엣말을 소곤거리는 그 유치찬란한 구라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행여 이야기 중에 누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조금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분명한 주제도 없고 이야기의 연결성도 없지만, 심각하게 구라를 푸는 것이 특징이고 재미다.

때로는 비참하다는 말을 참비하다고 돌리는 등 잘 새겨들어야 안다.

, 귀가 어두워 그가 하는 귀엣말 외는 대충 감으로 짐작하지만. 보기 만해도 유쾌한 친구다.

 

 

 

여지 것 차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나, 이차에서는 술이 땡기기 시작했다.

파리약 병처럼 생긴 진로 두꺼비를 몇 병이나 깠는지, 슬슬 맛이 갔다.

틀니를 빼어 낄낄거리지를 않나, 얼굴 간지러운 이야기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오죽하면 술자리에 여러 차례 어울린 적 있는 정영신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제발 아는 채 하지마라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퇴박을 주었을 최여사도 세상을 달관한 듯 아무 소리 없었다.

 

 

 

술자리 말은 양반처럼 고상한 것 보다 쌍놈처럼 저질스러워야 재밋다며 우겼다.

그 날은 말을 잘하지 않는 황성건씨도 파안대소 하는가하면, 농담도 곧 잘 했다.

 

 

 

최여사와 황성건씨만 보내고, 셋이서 여관방을 찾아들었는데, 술이 취해 방을 잘 못 잡은 것 같았다.

, 피로가 몰려와 정신없이 쓰러져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신윤택씨는 누울 자리가 없어 의자에 꼬꾸라져 있었다.

 

 

 

다들 늦게 일어나, 속 푼다며 정관까지 밥 먹으러 가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지극정성이었다.

한 참을 돌아 찾아 간 곳은 부자집 보쌈으로 기억되는 정식집인데, 음식들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할 일 없는 늙은이들이 기장 바닷가를 맴돌며, 커피 집에서 시간 죽이는 것 또한 얼마만이던가

 

 

     

처 자식에 코 끼어 끌려간 조진현씨가 오후 4시쯤 광안리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온 듯 했다.

일찍부터 광안리 칠성횟집에 자리 잡았으나, 운전해 집에 가려면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친구가 있어도 술이 없으니, 앙코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신경림선생의 시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그래! 바로 이거다.

다들 개털로 살지만, 하고 싶은 것 하며 재미있게 살았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치 보지 않고 꼴리는 대로 살아온 친구들의 쌍다구를 바라보니, 다들 잘 살았다 싶었다.

죽고 나면 돈도 명예도 아무 소용없는 물거품에 불과하지 않던가.

우린 다시 청춘시절을 즐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 되니 조진현씨가 다가와 기름 값을 찔러주었다.

기름 떨어진 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친구니까 이심전심인 게야.

고맙다! 친구들아~ 부디 건강이나 잘 챙겨라.

 

사진, / 조문호

 

 

 

 

 

 

 

 

 

 

 

 

 

 

 

 

 

 

 

 

 

 

 

 

 

 

 

 

 

 

 

 

 

 



정광원, 박옥순씨의 장남 정성태군과
권태영, 박동자씨의 장녀 권민숙양이
지난20일 오전11시 분당 ‘메종드베르’8층 베르사유홀에서 화촉을 밝혔다.




정영신씨의 조카인 성태군은 권민숙양과 오래전부터 연인관계였다고 한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서로 헤어져 노총각으로 살았는데,
9년 만에 권민숙양이 아들 정 훈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 둘 다 결혼 하지 않았던 것도 서로를 못 잊은 것 같았다.
애인만 돌아온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아들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어찌 경사중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입이 쩍 벌어져,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아들 꽃다발 받는 결혼식을 치룰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결혼한다기에 정영신씨 따라 갔더니, 서울과 분당 사는 가족은 물론,
광양과 함평 사는 친척까지 모두 만나게 되었다.
다들 건강한 모습을 뵈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성태야! 행복하게 잘 살아라.

마누라 만 그런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이광수교수의 페북 대화창 ‘서울사진가와 소총수’에 술꾼들 모이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한국언론정보학회’의 세미나 토론자로 서울 올라가는 김에 술 한 잔하자는 것이다.

 

 

 


모처럼 반가운 자리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겨버렸다.
전 날 저녁 동자동에 갔더니 방문 앞에 우편물 한 통이 꽂혀 있었다.
뜯어보니 용산구청에서 보낸 ‘복지대상자 자격 및 급여변동 안내문’이었는데,
자격중지(급여중지)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격 중지될 이유가 없었다.

 

 


11일 작성된 공문으로, 이미 소명기간이 지나버렸다.
우편물이 왜 이리 늦게 왔는지도 모르겠고, 왜 중지되었는지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공무원들 퇴근 후라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짤릴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혜택 받은 3년 동안 돈 걱정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당장 내야 할 방세부터 걱정되었다.

 

 


난데없는 걱정에 밤을 꼬박 샌 후, 아침에 구청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다. 당하는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이유는 아들 햇님이 재산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들어보니, 결혼 후 방을 얻기 위해 처가에서 빌린 전세자금이 재산으로 둔갑된 것 같았다.

 

 


충분히 소명할 수 있는 문제라 걱정은 덜었으나, 잠 안 자고 신경을 많이 쓴 탓에, 힘이 쫙 빠졌다.
스트레스 받아 그런지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어지럽기 까지 했다.

 

 

그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어 녹번동 정영신씨 집으로 찾아갔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해소에는 최고인 비상약을 먹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해져, 저녁 술 약속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25일 오후8시 북창동 ‘행복전집’으로 김남진, 김문호, 김봉규, 김태진, 이규상, 정영신씨가 호출되었는데,

그 날이 신문사 당직인 김봉규씨만 못 나왔다.

 

 


김태진씨가 미리 예약해 둔 북창동 ‘행복전집’에 가보니 김문호씨가 먼저 와 있었다.
좀 있으니, 그리웠던 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막걸리를 마셨지만 혼자 소주를 마셨는데, 이광수씨가 추천해 준 ‘진로’가 참 좋더라.
술병은 파리약병 처럼 못 생겼으나, 술이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 날 모임은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술 마실 일 밖에 없었다.

 

 


술독을 얼추 비웠으나, 그냥 헤어질 수 없었다.
스트레스 해소에는 노래방이 최고가 아니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방으로 따라 갔는데, 다들 잘 부르더라.

 

 

 

이광수씨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렀는데,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났다.
어디서 그토록 시원하게 욕 할 수 있겠는가? “이 씨발넘들아~”
듣는 내가 다 속이 후련했다.

 

 


나도 한 곡 뽑기는 했지만, 이제 끝난 것 같았다. 젠장~ 소리가 나야지...
분명 봄날은 갔고, 노래라기보다 지랄발광에 가까웠다.
그러나 윤석렬로 받은 스트레스까지 모두 풀었다.
교주님께서 다음엔 부산에서 한 판 벌이자지만, 어디엔들 못 갈소냐?

 

 


기차 시간을 넘긴 이광수씨만 여관에 들어가고, 다들 뿔뿔이 헤어졌으나 자정이 넘어 택시가 없었다.
시청 앞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선동하는 앰프 소리만 요란스러웠다.
대형 전광판에는 목사란 자가 ‘문재인을 구속시켜야 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전광판 대 여섯 개가 나란히 들어선 걸 보니 광화문광장까지 연결된 것 같았다.
택시 잡으러 광화문까지 가보니, ‘구국철야기도회’란 이름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라, 다들 담요 같은 걸 뒤집어쓰고 구호를 외쳤다.

 

 


무슨 찬양가 인지도 모를 신나는 곡도 있었다.
술이 취해 엉덩이춤을 추가며 사진을 찍었는데,
나만 미친 것이 아니라 다들 미쳐가고 있었다.

"할렐루야~"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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