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협동조합 프랜차이즈 ‘피자 유니온’은 미스터 피자의 갑 질에 지친 점주들이 본사와 가맹점이 상생하는 좋은 프랜차이즈 모델을 만들기 위해 창설한 피자연합이라 한다.
서인형씨로 부터 피자 홍보할 사진을 의뢰받은 모양인데, 정영신씨 운전기사를 자청하여 현장에 따라 붙은 것이다, 매장은 송파구 방이동에 있었다.
좀 있으니, 피자협동조합 컨설팅을 맡은 서인형씨가 나타났다. 서인형씨와 피자연합 정종열 이사장, 피자 만드는 이경민씨 등 몇 분의 도움을 받아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난 서양 빈대떡이라 말하며 피자를 별 좋아하지 않았다.
피자를 계속 바꾸어 찍는 걸 보고 피자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정말 많은 종류의 피자가 있었고, 맛도 천차만별인 것 같았다. 빈대떡 촌놈 소리 듣지 않으려면 앞으로 피자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서인형씨는 정종열이사장과 점주에게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친절에 관한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만 하면 단골손님이 저절로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정말 마음 비우지 않으면 장사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장사하기 위해 억지로 친절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친절이 몸에 베여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 마음에 없는 친절은 금방 뽀록나기 마련이다. 요즘 매장은 젊은 사람 일 수록 더 친절하더라.
정종열이사장 덕에 점심도 잘 얻어먹었다. 술 안주가 아니라, 밥 반찬으로 삼겹살을 먹어본 지가 있었던가? 오래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해 꼰대소리 듣는데, 그 소리 듣지 않으려면 모든 습관을 바꿔야 했다.
삼겹살 백반 뿐 아니라 피자도 열 판이나 선물 받았는데, 그 날 저녁은 피자 배달부가 되어 나누어주느라 바빴다. 멀리는 갈 수 없어 은평구만 다녔는데 제일 먼저 아들 햇님이 부터 주고 두 번째는 '서울민예총' 황경하씨, 세 번째는 정영신씨 친구, 남은 두 판은 둘이서 갈라 먹었다. 이제사 피자 맛을 좀 알것 같네.
젊은이들이 정성껏 구워내는 ‘피자 유니온’을 꼭 기억해 주세요. 뒤늦게 피자 맛을 알게 해 준 메이커가 바로 ‘피자 유니온’ 입니다.
몇일 전 부산 친구 신윤택씨의 막내아들 정환군이 장가간다는 소식을 창원의 김의권씨로부터 전해 들었다. 결혼식 있는 토요일엔 일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부랴부랴 예식장이 있는 울산으로 가기위해 서둘러야 했다.
난, 다양한 층의 친구들이 있지만, 부산이나 마산, 울산 등 경상도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청춘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라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다.
히피문화에 빠져 있을 때로, 속된 말로 분류하면 화류계 친구들이다.
좋게 말하면 한량이요, 안 좋게 말하면 난봉꾼 시절이었다.
다들 음악과 관련된 유흥업을 하던 친구들이라 화류계로 분류하는데,
음악과 사랑에 빠져 보낸 청춘시절, 아니 순정시절이었다.
아들 장가보내는 신윤택씨를 비롯하여 황성건, 김의권, 조진현씨 등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버린 정남규, 홍수진씨는 만날 수 없지만...
이들은 40여 년 전부터 어울린 친구들로,
하단에 있던 에덴공원‘난향음악실’에서 남포동으로 옮겨 국악주점 ‘한마당’을 할 때다,
신윤택씨는 서면 ‘우드스탁’을 거쳐 남포동에서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전원다방’을 운영할 무렵 만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가 최민식 선생께서자갈치시장에 나오시면,
낮에는 ‘전원다방’에서 죽치다 어두워지면 ‘한마당’에 들리셨는데,
그 때 선물한 ‘인간’ 사진집 한 권이 내 인생을 바꿀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황성건씨는 하수진이란 가명으로 홍수진씨와 함께 음악실 디스크 자키로 떠돌았다.
둘 다 그림에도 재질이 많아 판돌이 주제에 화판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는데, 음악실이나 여러 곳의 실내장식을 맡기도 했다.
밥 딜런이나 지미 핸드릭스 등 뮤지션들의 연주 장면을 극장 간판처럼 크게 그리기도 한 재주꾼들이다.
긴 머리를 출렁이며 목이 긴 부츠를 신고 다니던 그 당시 모습들을 떠 올리면 웃음이 절로난다.
그 뒤 김의권씨는 마산으로 옮겨 ‘수림음악실’을 운영했는데,
‘부마민주항쟁’에 휩쓸려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 당시의 수많은 일화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십년전 찍은 고인 홍수진씨의 모습
홍수진씨는 울산 엠비시 디스크 자키로 시작하여 편성부장까지 맡았으나, 안타깝게 위암에 걸려버렸다.
자칭 공인이라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죄였다.
음악과 문학 그림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친구지만,
‘슬픔은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는 시집을 남기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양호 ‘까타리나’에서 시작된 황성근씨의 화류계 인생은 신촌의 ‘장미 빛 인생’으로 이어졌다.
말년에는 울산대 앞에서 ‘유혹’이란 카페로 유혹하다, 결국 문 닫고 말았다.
다들 유흥업에 종사한 셈인데, '해태제과'에서일한 조진현씨도
동래 온천장에서 호텔을 운영한 적이 있으니, 유흥업 친구에 끼어도 뒷말은 없을 듯 하다.
신윤택씨는 일종의 흥행사 기질을 갖고 있었다.
개성 있는 업소를 만들어 손님이 넘쳐날 때 프리미엄 붙여 팔아넘겼으니까...
그렇지만 그나 나나 상호 잘 못 붙인 죄로 부정 타, 망한 케이스다.
나는 서면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하다 망하여 서울로 도주했지만,
그는 초량에 문을 연 ‘크라이막스’로 망했다. 절정에 오르면 그 다음은 끝이 아니던가?
고인 정남규씨의 6년전 모습
지금은 떠나고 없는 정남규씨가 그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부산 서면을 관활로 둔 부전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공무원이 음악을 좋아하는 히피니즘에 빠진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세상 어떤 일도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불치의 병에 걸리며, 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스스로 목 매달아 죽었다.
그런데, 정환군 결혼식 이야기는 간데없고, 친구들 이야기로 입이 말라버렸네.
정환군 결혼식에 갈 것을 뒤 늦게 작심하는 바람에 열차 좌석을 얻지 못해, 똥차를 끌고 가야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지랄같은 습관이 하나 있다.
이튿날 새벽에 먼 길을 떠나게 되면, 그 전날 밤은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소풍가기 전 날, 잠 못 이루는 애들처럼 말이다.
전 날 밤늦게 신학철선생 상가에 다녀 와서, 부고를 올리고 자정 무렵 자리에 들었는데,
한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려고 몸부림쳤으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섯 시간 넘게 이불을 뒤척이며 온갖 잡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꼬박 밤을 지새고 여섯시에 일어나 울산으로 출발한 것이다.
결혼식이 열두시라 여유롭게 출발했는데도, 토요일이라 그런지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달렸지만, 울산 톨게이트에 들어서니, 결혼이 시작될 열두시였다.
장장 여섯시간을 고속도로에서 시달린 셈이다.
차주인 정영신씨가 같이 가지 않았으니, 길 안내 할 핸드폰이 없어 더 곤욕스러웠다.
고속도로야 장님도 찾아 갈 수 있겠지만 울산시내로 접어드니,
서울 올라 온 시골영감이 김서방 집 찾는 격이었다.
차에서 내려 '목화예식장'을 물어보았으나 이리가라 저리가라 끌려만 다니다,
결국은 택시를 앞세우고 와야했다.
허겁지겁 들어가니, 이미 결혼식은 끝나고 친구들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날 신윤택씨 아들 정환군을 처음 보았는데,땅잘막한 애비와는 달리 키가 훨신한 게 잘 생겼더라.
예쁜 며느리도 야무지게 생겨, 잘 살것 같았다.
너무 서둘러 오느라 축의금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지만, 뒷날 시간나면 신방 꾸밀 사진 한 장 보낼 작정이다.
정장 차림의 신윤택씨 행색은 마치 꾸어다 놓은 보리쌀자루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을 깜짝거리며 생글거리는 특유의 표정을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정신없이 예식장에 뛰어 든 터라, 입구에서 눈인사만 주고받은 친구들을 다시 찾았다.
인사동을 자주 들락거리던 창원의 김의권씨는 본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 이종호씨 상가에서 볼 때처럼, 손만 대면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만의 캐릭터는 여전하지만, ‘힘 빠진 안마사 같다’고 한 나의 말이 결코 어거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옛날부터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자가 바로 조진현씨가 아니던가?
반가워하는 조진현 내외와 건장한 아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호탕한 그의 웃음과 환한 표정에 온갖 시름이 달아났다.
본지가 십년은 족히 된 것 같은 황성근씨도 여전했다.
요즘은 아파트 경비실을 직장으로, 남는 시간을 한시에 푹 빠져 산단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가며 재미있게 사는 모양인데,
설마 예전처럼 사슴처럼 슬픈 눈빛으로 여인의 마음을 홀리는 그런 일은 없겠지...
죽은 홍수진씨를 대신하여 미망인 최정순 여사도 만났고,
음향시설에 일가견이 있는 김화식씨도 오랜만에 만났다.
예식장 뷔페 음식만도 충분했지만,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신윤택, 김의권, 황성근씨 등 다섯 명이 최여사 따라 나선 곳은 ‘한탄강’이라는 중태기 매운탕 집이었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도 신윤택씨가 이야기를 끌어갔지만, 이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지만, 술자리를 맛지게 하는 재미가 있다.
손으로 가려가며 옆 사람이 들릴 정도의 귀엣말을 소곤거리는그 유치찬란한 구라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행여 이야기 중에 누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조금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분명한 주제도 없고 이야기의 연결성도 없지만, 심각하게 구라를 푸는 것이 특징이고 재미다.
때로는 비참하다는 말을 참비하다고 돌리는 등 잘 새겨들어야 안다.
난, 귀가 어두워 그가 하는 귀엣말 외는 대충 감으로 짐작하지만. 보기 만해도 유쾌한 친구다.
여지 것 차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나, 이차에서는 술이 땡기기 시작했다.
파리약 병처럼 생긴 진로 두꺼비를 몇 병이나 깠는지, 슬슬 맛이 갔다.
틀니를 빼어 낄낄거리지를 않나, 얼굴 간지러운 이야기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오죽하면 술자리에 여러 차례 어울린 적 있는 정영신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제발 아는 채 하지마라”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퇴박을 주었을 최여사도 세상을 달관한 듯 아무 소리 없었다.
술자리 말은 양반처럼 고상한 것 보다 쌍놈처럼 저질스러워야 재밋다며 우겼다.
그 날은 말을 잘하지 않는 황성건씨도 파안대소 하는가하면, 농담도 곧 잘 했다.
최여사와 황성건씨만 보내고, 셋이서 여관방을 찾아들었는데,술이 취해 방을 잘 못 잡은 것 같았다.
난, 피로가 몰려와 정신없이 쓰러져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신윤택씨는 누울 자리가 없어 의자에 꼬꾸라져 있었다.
다들 늦게 일어나, 속 푼다며 정관까지 밥 먹으러 가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지극정성이었다.
한 참을 돌아 찾아 간 곳은 ‘부자집 보쌈’으로 기억되는 정식집인데, 음식들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할 일 없는 늙은이들이 기장 바닷가를 맴돌며, 커피 집에서 시간 죽이는 것 또한 얼마만이던가?
처 자식에 코 끼어 끌려간 조진현씨가 오후 4시쯤 광안리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온 듯 했다.
일찍부터 광안리 ‘칠성횟집’에 자리 잡았으나, 운전해 집에 가려면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이광수교수의 페북 대화창 ‘서울사진가와 소총수’에 술꾼들 모이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한국언론정보학회’의 세미나 토론자로 서울 올라가는 김에 술 한 잔하자는 것이다.
모처럼 반가운 자리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겨버렸다. 전 날 저녁 동자동에 갔더니 방문 앞에 우편물 한 통이 꽂혀 있었다. 뜯어보니 용산구청에서 보낸 ‘복지대상자 자격 및 급여변동 안내문’이었는데, 자격중지(급여중지)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격 중지될 이유가 없었다.
11일 작성된 공문으로, 이미 소명기간이 지나버렸다. 우편물이 왜 이리 늦게 왔는지도 모르겠고, 왜 중지되었는지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공무원들 퇴근 후라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짤릴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혜택 받은 3년 동안 돈 걱정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당장 내야 할 방세부터 걱정되었다.
난데없는 걱정에 밤을 꼬박 샌 후, 아침에 구청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다. 당하는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이유는 아들 햇님이 재산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들어보니, 결혼 후 방을 얻기 위해 처가에서 빌린 전세자금이 재산으로 둔갑된 것 같았다.
충분히 소명할 수 있는 문제라 걱정은 덜었으나, 잠 안 자고 신경을 많이 쓴 탓에, 힘이 쫙 빠졌다. 스트레스 받아 그런지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어지럽기 까지 했다.
그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어 녹번동 정영신씨 집으로 찾아갔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해소에는 최고인 비상약을 먹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해져, 저녁 술 약속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25일 오후8시 북창동 ‘행복전집’으로 김남진, 김문호, 김봉규, 김태진, 이규상, 정영신씨가 호출되었는데,
그 날이 신문사 당직인 김봉규씨만 못 나왔다.
김태진씨가 미리 예약해 둔 북창동 ‘행복전집’에 가보니 김문호씨가 먼저 와 있었다. 좀 있으니, 그리웠던 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막걸리를 마셨지만 혼자 소주를 마셨는데, 이광수씨가 추천해 준 ‘진로’가 참 좋더라. 술병은 파리약병 처럼 못 생겼으나, 술이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 날 모임은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술 마실 일 밖에 없었다.
술독을 얼추 비웠으나, 그냥 헤어질 수 없었다. 스트레스 해소에는 노래방이 최고가 아니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방으로 따라 갔는데, 다들 잘 부르더라.
이광수씨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렀는데,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났다. 어디서 그토록 시원하게 욕 할 수 있겠는가? “이 씨발넘들아~” 듣는 내가 다 속이 후련했다.
나도 한 곡 뽑기는 했지만, 이제 끝난 것 같았다. 젠장~ 소리가 나야지... 분명 봄날은 갔고, 노래라기보다 지랄발광에 가까웠다. 그러나 윤석렬로 받은 스트레스까지 모두 풀었다. 교주님께서 다음엔 부산에서 한 판 벌이자지만, 어디엔들 못 갈소냐?
기차 시간을 넘긴 이광수씨만 여관에 들어가고, 다들 뿔뿔이 헤어졌으나 자정이 넘어 택시가 없었다. 시청 앞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선동하는 앰프 소리만 요란스러웠다. 대형 전광판에는 목사란 자가 ‘문재인을 구속시켜야 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전광판 대 여섯 개가 나란히 들어선 걸 보니 광화문광장까지 연결된 것 같았다. 택시 잡으러 광화문까지 가보니, ‘구국철야기도회’란 이름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라, 다들 담요 같은 걸 뒤집어쓰고 구호를 외쳤다.
무슨 찬양가 인지도 모를 신나는 곡도 있었다. 술이 취해 엉덩이춤을 추가며 사진을 찍었는데, 나만 미친 것이 아니라 다들 미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