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조문호 다큐멘터리 사진가 부부 전시·출간

"요런거 폴아 갖고 밥묵고 살믄 존일이제. 욕심이 너무 많으문 나도 심들고, 남 눈에도 숭해 보인당께."

다큐멘터리 사진가 부부인 정영신(57), 조문호(68)씨는 30여년 간 전국 5일장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정(情)이 오가는 풍경 그리고 장날 쓸쓸한 변두리 풍경 등을 찍었다.

이들 부부가 15일 전한 한 장터 할머니의 말은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여느 시골 장터 상인의 소박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이렇게 전해 받은 장터 사람들의 마음이 1월 21부터 2월 17일까지 서울 인사동길 아라아트센터에서 사진으로 또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부부인 조문호(왼쪽), 정영신씨. <곽명우씨 사진>

 

'추억의 장터 풍경', '희망을 엮는 集魚燈(집어등)', '새로운 시장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 등으로 주제를 나눠 80여점을 전시한다.

 

정씨는 사진집 '전국 오일장 순례기'(눈빛출판사)도 출간할 예정이다.

 

조씨는 이날 통화에서 "한국에서 열리는 5일장 522개의 답사 기록을 지난해 11월 마무리했다"며 "

이번 전시와 출간은 그간 진행한 '장에 가자' 프로젝트를 알리고 사라져가는 5일장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가 각자 찍은 사진에는 전국 각지 장터 모습이 들어 있다

 

 

 

강원도 정선 장날에서 정씨가 포착한 장면에선 어느 아주머니가 나물 파는 상인의 입에 뭔가 먹을거리를 넣어주려 하고 있다.

 

정씨가 찍은 또다른 사진 속 경북 영천장에선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장을 본 다음이라 저마다 보따리 하나 이상을 갖고 있다. 눈까지 내리고 있어 빨리 집에 돌아가 고단한 몸을 쉬고 싶었던 마음을 짐작해 본다.

 

이곳은 또 어디일까.

조씨가 찍은 전북 완주 삼례장에선 한 할머니가 물건을 얹어 옮기는 도구를 허리를 굽혀 끌고 있다.

 

​사진에 비친 공간으로 미뤄봤을 때 촬영한 장소가 장터 인근 도로인 것 같다.

 

 

 

이들 부부는 장터를 방문하면서 시대의 달라진 모습,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등을 함께 느꼈던 듯 하다.

정씨는 작업노트에서 강원 삼척 근덕장과 양양장, 경기 동두천장, 경남 합천 초계장, 경주 건천장, 전남 함평 나산장, 전북 무주 무풍장, 충남 예산 덕산장, 충북 옥천 청산장, 제주 모슬포장 등 그간 방문한 장터를 나열한 뒤 "좋아하는 장터는 10번도 넘게 다녔다"고 말한다.

 

이어 "언제부터인가 대상에 대한 관점이나 접근하는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며 "포괄적인 인문학적 접근에서 벗어나 장을 지키는 개개인의 사람들에 집중됐다"고 돌아본다.

 

정씨는 "사진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달하고, 말을 건네는 사진을 만들고 싶었다"며 "아직도 따뜻한 인간의 정(情)과 덤이 살아있는 그곳, 장터는 희망을 엮는 집어등"이라고 정리한다.

 

조씨는 "5일장을 되살리려 하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조씨는 "정영신의 사진에서는 따뜻했던 연정이 피어오르고, 내가 찍은 사진에서는 암울한 적막감이 감돈다"며 "쓸쓸하고 적막한 풍경이 현실이어서 그런가 제 눈에는 그런 것만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지방에서도 이러한 전시를 이어가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고 싶다"며 "그동안 찍은 장터 사진을 정리해 책으로 펴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조씨가 자동차 운전기사를 자청하며 정씨와 함께 전국 장터를 장돌뱅이처럼 순회한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체성이 아직 거기에 끝물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는 바라봤다.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jsk@yna.co.kr




 

 

정선아리랑열차(A-train 트레인)개통식이 지난 15일 오전 9시 청량리역에서 열렸다.

시승단을 태운 열차는 4시간을 달려 오후2시 30분경 정선역에 도착하였는데, 개통을 축하하는 정선 군민들의 박수갈채가 뜨거웠다.


이날 시승단 도착 환영식에는 최연혜 코레일 사장을 비롯하여 전정환 정선군수, 차주영 군의회의장, 윤형중 문화원장, 김수복 정선군 문화관광과장과 많은 주민들이 참석하여 정선아라랑열차 개통을 축하하며, 첫 시승을 마친 관광객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시승단은 역전에 대기한 버스를 타고 정선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선스카이워크와 정선아리랑극 ‘메나리’관람, 정선5일장 등을 돌았는데, 정선아리랑시장에서는 사물놀이공연으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는 22일부터 운행되는 이 열차는 국내 여객열차 중 처음으로 지역명칭을 사용한 정선아리랑열차 (A-tarin 트레인)로 불리게 된다. 객실에서 개방형 통유리 창문을 통해 정선의 사계절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인류 무형유산인 아리랑과 정선지역의 정서와 정선아리랑을 표현해 꾸몄다고 한다.. 아울러 객차 내에서는 스토리텔링, 음악방송, 기념포토 서비스, 사연소개, 마술공연, 퀴즈게임, 노래자랑, 기다림 엽서 등 특별한 이벤트도 함께 진행돼 가족단위, 연인들에게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관광특수를 연계한 외국인 관광객 유치 마케팅을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정선아리랑열차는 정선 장날을 제외한 화요일과 수요일은 객차 정비를 위해 운행을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전정환 정선군수는 “이번 정선아리랑열차 개통으로 사계절이 아름다운 청정 정선을 대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연계상품 개발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3일은 아내 정영신의 생일이었다.

요즘은 전시 준비로 바쁜데다, 아내 생일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겹쳤다.
이른 새벽부터 정선으로 떠나야 하고, 저녁 약속까지 있어 생일 파티를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궁여지책,
전날 밤 케익과 와인을 준비해 두고, 이틀 날 차속에서 축배 들 작정을 했다.
그러나 새벽부터 눈이 내린 정선의 설원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하얀 눈밭에서 케익을 자르고 축배를 들었다.

정말 최고의 생일 파티가 되었다.
처음 맛보는 신선함도 있지만, 마냥 좋아하는 아내의 표정에서 큰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멋진 축하연이었다.

“사랑하는 영신아~ 생일 축하한다”

 

 

 

 

 

 

 

 



이 사람

대 끼가 철철 흐르는 최성월씨

고추모종을 심으며 정선아리랑을 부르던, 15년 전의 최성월씨 모습

 

 

최성월씨는 동강변 귤암리에 사는, 동네 소리꾼이다.

집에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시장에 나와 춤추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

 

15년 전 ‘동강 백성들’이란 제목의 전시와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할 무렵,

하귤화 마을의 밭이랑에서 고추모종 심는 최씨를 처음 만난 것이다.

그 날 일하며 불러 준 최씨의 구성진 ‘정선아리랑’ 노래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동안 들었던 ‘정선아리랑’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삶의 애환이 그의 소리에 배어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담아 풀어내는 가사의 진솔함도 너무 좋았다.

 

‘동강 백성들’ 작업을 마무리한 몇 년 후, 귤암리 ‘사진굿당’에서 ‘서낭당축제’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예정되었던 최성월씨 순서 전에, 음악인들이 록음악을 연주할 때였다.

그 신나는 음악에 가만있지 못하고, 최씨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 온 예술인들과 관람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보캅과 공옥진 문둥이 춤을 접목시킨 듯, 짧은 변화를 주는 춤동작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나,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한 그의 모습에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는 뮤지션들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라 최성월씨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 때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춤추던 그 분은 어떻게 지내냐?”며

그의 안부를 묻곤 한다. 신들린 듯 추는 그의 춤을 놓고 “본래 무당이 될 팔자”라고도 말했다.

 

 

 

 

그 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황기막걸리 출시를 기념하는 공연 단막극에 나와 그의 정선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는데,

나를 만나기만 하면 “영감이 시장에 못나게 하니 말 좀 해달라”는 것이다.

어느 남편이 마누라가 시장바닥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냐마는 참 안스러웠다.

농사일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장날만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고 나와 춤을 춘단다.

 

 지난 22일,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 춤추는 최씨를 만났다.

만난 김에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홑겹의 한복만 입은 채 추워 떨고 계셨다.

“날씨도 쌀쌀한데, 내복이라도 입고 나오시지 그랬냐?”고 했더니 대뜸 내복을 입으면

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지금 연세가 몇인데, 폼만 찾냐?”고 나무랐지만, 춤꾼으로서의 프로기질도 갖고 계셨다.

그리고는 남이 들을까봐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시장에 아는 사람 있으면 부탁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수고비만 받아 가면 영감도 끽소리 하지 않을 거라“며...,

“아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런 부탁할 처지는 아니다”고 둘러댔지만 마음이 짠했다.

 

 

 

최씨는 정선 윗만지골에서 태어나 18살 무렵 개바우골의 이한옥(75세)씨에게 시집왔다.

개바우골에서 8대째 살아 온 이씨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객지에 나가 산다.

시집왔던 어려운 시절엔 먹을 것이 없어 끼니때만 되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시집 온지 3년 만에 남편이 군에 입대했을 때, 군대도 산골처럼 먹을 것이 없어 고생스러운 줄 알았던

그는 늘 남편 걱정에 애태웠단다. 동내에 잔치라도 있어 떡이라도 얻게 되면 휴가 때 주려고 장롱 속에 숨겨 두다

번번이 썩혀 애석해 했다는 등, 어려운 시절 이야기들을 말 했다.

살아 온 게 한이 되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그 때 부른 최씨의 아라리 가락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꽃이라도 낙화하면

오던 나비 돌아가고,

비단 옷도 떨어지면

물걸레로 돌아가네.

좋은 음식 쉬어지면

수채 구녕 찾아간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2일의 정선아리랑시장은 간헐적으로 가랑비가 내리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난장에서 화롯불을 에워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겨웠답니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배추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정선장에는 배추가 보이지 않습니다.
특산물이 나는 장에 특산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지요. 대추로 유명한 보은장에 대추가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지역에서는 흔한 농산품이라 모두 외지로 빠져 나가기 때문인데, 정선의 배추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정선장에 배추가 팔릴 리가 있겠습니까?

장터 공연장에는 주연보다 조연이 더 빛나는 하루였습니다.
군립아리랑예술단의 정선아리랑 공연에 나와 춤을 춘 최성월씨가 더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귀로는 구성진 정선아리랑을 듣고, 눈으로는 최성월씨의 춤에 흠뻑 빠졌습니다.
로봇 춤과 공옥진씨의 문둥이 춤을 접목시킨 최성월씨만의 독창적인 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사진,글 / 조문호

 

 

 

 

 

 

 

 

 

 

 

 

 

 

 

 

 

 

 

 

 

 

 

 

 

 

 

 

 

 

 

 

 

 

 

 



정선 - <창의문>

허어, 너희 공훈 세웠다 뽐내지 말라 嗟爾勳臣, 毋庸自誇
그 집에 살며 그 땅 차지하고 爰處其室, 乃占其田
그 말을 타며 그 일 해댄다면 且乘其馬, 又行其事
너희와 그가 다를 게 뭐가 있겠느냐 爾與其人, 顧何異哉

- 민요, 「상시가(傷時歌)」, 『인조실록』 1625년 6월 19일자


정선, <창의문>, 장동팔경 중, 32×29cm, 종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상 가장 추악한 권력욕망을 상징하는 사건을 하나 들라면 단연코 인조정변(仁祖政變)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영웅이자 전후 국가재건을 이룩한 가장 뛰어난 군주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 1575-1641)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
(仁祖) 이종(李倧, 1595-1649)이란 인물은 그러므로 나라를 훔친 도적이요, 왕위에 오른 뒤에는 정책을 후퇴시켰고 또 다시 전쟁의 참화를 불러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최악의 군주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늘, 광해군은 광조(光祖)로, 인조는 다시 능양군(綾陽君)으로 환원시키는 게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다. 

창의문(彰義門)은 권력욕에 불타는 능양군이 심야에 군대를 이끌고 1623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서 세검정을 지나 도성으로 진입해 들어 올 때 통과한 문이다. 도끼로 문짝을 내리친 뒤 열린 문으로 조용히 진군하여 왕이 머물고 있는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미 훈련대장과도 내통해 놓았으므로 대궐문을 당당히 통과한 이들 반란군대는 왕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무려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창의문은 욕망의 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권력욕으로 더렵혀지기 전까지 창의문은 말 그대로 밝게 빛나는 의리의 문이었으며 사람들은 이 문을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렀다. 문이 있는 이곳 고개 아래 마을 청운동 일대가 골이 깊고 물과 돌이 많아 맑고 아름다우니 마치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청운동을 자하동이라 불렀으므로 그 위에 자리한 창의문을 자하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창의문을 나가 부암동으로 가다 보면 지금은 환기미술관이며 서울미술관이 있는데 1970년까지만 해도 부침바위라는 게 있었다. 바위는 높이 2m 쯤의 이 바위에는 겉이 벌집 모양 송송 뚫어진 것처럼 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많았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신의 나이 숫자만큼 문지르다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곤 하는데 그러면 아들 낳는다는 전설 때문에 벌집 자국이 더욱 생겨났다. 돌을 붙인다는 뜻의 부침이라 부암(付岩)이라는 동네 이름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그러다가 도로를 확장한다며 바위를 파괴하고 말았는데 요즘 우이동 계곡 하천을 정비한다면서 바닥의 천년 바위를 거침없이 파괴하고 정체불명의 돌을 가져다 붙여놓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만행이었다.  

부침바위가 여전하던 시절, 정선(鄭敾, 1676-1759)이 창의문을 그렸는데 영조가 창의문을 개수하고서 시도 짓고 또 정변공신의 이름을 새긴 현판도 걸어두도록 하는 이른바 창의문 현창사업에 발맞춰 그림을 그린 게 아닌가 싶다. 1740년 훈련대장 구성임이 인조정변의 일을 거론하면서 폐허가 된 창의문을 개수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영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저 구성임이란 자는 인조정변 공신의 후손이었고 영조 또한 저들에 의해 옹립된 왕이었으니까 창의문 보수는 서로의 이해에 들어맞는 사업이었던 게다. 

능양군이 왕이 된지 3년째인 1625년 6월 19일 밤 정변공신 신경진이 군사와 더불어 숙직하는 군영에 ‘격서(激書)’가 나붙었다. 격서에는 왕의 이름 이종을 거론하면서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므로 『인조실록』에서는 그 격서를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당시 백성들 사이에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노래 「상시가(傷時歌)」 한 편이 떠돌고 있었다고 하였다. 참으로 예나 지금이나, 보수나 진보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정치권력놀음에 빠져든 자들 모두가 저 욕망의 문 창의문을 들락거리고 있으니 어찌 그리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스크랩/ 김달진미술연구소]

‘정선아리랑시장’의 SNS 마케팅 교육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단(단장:강승권)에서 주최한 2014 ‘정선아리랑시장’ 감성변화관리 워크숍 및 SNS 마케팅 교육이
약 2개월에 걸쳐 진행된 교육일정을 마무리하고 지난 10월28일 간단한 수료식을 가졌다.

마지막 수업이 있었던 28일에는 하재은박사로부터 페이스북 활용법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이날 하명정강사는 수강생들의 스마트폰을 일일이 확인하며 작동방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이미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전체적인 룰을 파악한 듯 했다.

요즘 정선아리랑시장은 평일에도 손님들이 늘어나 점포를 비울 수 없는 조합원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날은 십여 명밖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 수강 열기는 여전했다.
참석하지 못한 분은 수강한 분들이 대신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선아리랑시장’이 전국의 재래시장 중 최초로 SNS마케팅을 도입하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래시장이 성공하려면 편의 위주로 변하는 상거래의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SNS마케팅 교육의 중요성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벌써 SNS마케팅을 적극 활용하는 분도 많지만, 중소상인들을 위한 모바일 마케팅 둘 스비스인
카카오톡 엘로우 아이디로 고객들과 대화하는 분들도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 흐름에 앞서려고 노력하는 시장사람들의 모습에서 ‘정선아리랑시장’의 내일을 내다 볼 수 있었다.

사진,글 / 조문호

 

 

 

 

 

 

 

 

 

 

 

 





이 사람

넘치는 신명 깔고, 장터 지키는 이옥분씨

 

 

 

"한냥 가서 산 댕기 두냥 주고 접었는데...

-중략-

영 글렀네 영 글렀네, 내 댕기 받기는 영 글렀네"

 

지난 해 '정선아리랑시장'의 '우수문화관광시장견학'에서 만난 가장 큰 발견은 바로 이옥분(71세)씨였다.

지루한 차안에서 부른 이옥분씨의 구전민요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처음 듣는 구전민요이기도 하지만 재미있게 부르는 그의 노래 솜씨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날 저녁 숙소 옆 음악 홀에서 가진 연희에서는 얼마나 신명이 많은지 아무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세상에~ 평소에는 시장에서 새색시처럼 얌전하게 앉아만 계시던 분이, 그 넘치는 신명을 어찌 다 감당했는지 모르겠다.

그 노랫말이 재미있어 받아 적기까지 하였으나 어느 수첩에 적었는지 찾질 못하고, 그 첫 구절과 후렴만 기억이 난 것이다.

  

이옥분 (71)씨는 50여 년전 증산에서 북평면 나전리로 시집왔다고 한다.

유봉식(80세)씨와의 사이에서 난 자녀가 3남 2녀지만 모두 출가해 버리고, 그냥 시장에 나와 장사하는 재미로 산단다.

 

“초가지붕이던 정선장에 강냉이 가지고 댕기미 장사했드래요. 반 평생을 산과 정선장에서 보낸 기래요.”

이씨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시집와서 시작한 장사를 지금까지 하고 있단다.

정선의 두 가지 자랑 중 하나가 산이고, 하나는 장이라는 이옥분씨의 말이다.

 

장날이 아닌 날은 영감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쩔쩔 흔든다.

"아이구! 장날 아니면 더 바쁘유~"

장에 내다 팔 나물이나 약초 캐러 산을 헤매느라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도시락을 싸 가지만 먹을 시간이 없어 그냥 가져올 때도 있다는 것이다.

 

하기야 손님들에게 댈 물건 장만하려면 그 일만도 여간 일이 아닐 것이다.

목에 건 신토불이증을 보며 '물건이 없어면 중국산도 파냐?'고 슬쩍 물었더니 펄쩍 뛴다.

 

“중국산을 팔다 적발되면 벌금도 많이 내지만 이 자리까지 뺏겨유~"

장날마다 단속 나와 산에서 캔 약초 아니면 집에서 농사 진 것만 판단다.

장사꾼 말은 못 믿는다고들 하지만, 그 표정을 보니 남을 속일 위인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날 장터에서 이옥분씨를 만나 장사는 잘 되느냐고 물었더니 환한 얼굴로 답한다.

“오늘은 첫 손님이 마이 사 장사를 잘했드래요.”

 즐거워 부르는 정선아리랑 노랫소리가 장마당으로 스며든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빙글 뱅글 잘도 돌아가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나를 안고 돌 줄을 왜 모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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