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0년 8월호]

다이어리알 추천 맛집 / 인사동

 

스페이스오/사진=장동규 기자

 

한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거리인 인사동. 다양한 기념품 상점, 공예품, 화랑 등 볼거리와 함께 전통 음식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상권으로 여행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이기도 하다. 다만 미식의 영역에 있어서는 인근의 삼청동, 익선동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몇 달간 막혀버린 하늘길로 인해 인사동 거리 역시 기존의 모습보다 다소 쓸쓸한 표정이지만 그만큼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시기인 듯도 하다. 전통과 문화의 거리 속에서 맛과 멋을 응연(凝然) 한 자태로 지켜나가는 공간을 방문해 보자.

◆스페이스오

인사동의 복합 문화 공간 ‘안녕인사동’에 개관한 ‘나인트리 프리미어 호텔‘의 최상층에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예술적 영감, 그리고 미식을 통한 즐거움을 모두 채울 수 있는 특별한 루프탑(Rooftop) 바&다이닝 ‘스페이스오’가 자리하고 있다.

‘만국 공통’ 긍정의 대답인 ‘O’ 그리고 ‘오(五)’감을 일깨우는 공간을 의미하는 상호처럼 서촌에서인사동까지, 역사의 향기를 보듬은 장소에서 한식과 전통주를 소개하며 새로운 한식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음은 물론, 우리 문화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컬쳐톡(Culture talk)프로그램’, 전통문화와 관련된 전시와 공연 등 다채로운 콘텐츠를 통해 문화의 경계에 국한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일상의 가치를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라 하겠다.

입구에 도착한 순간부터 다양한 예술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주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거나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만을 엄선해 전시하고 있어 식사를 하며 머무는 것만으로도 갤러리 투어를 함께 하는 셈이다.

또한 호텔의 최상층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탁 트인 루프탑에서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데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진 야외 테라스 공간과 조계사의 알록달록한 연등과 아름다운 곡선의 기와지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좌석이 특히 인기다. 공간을 꾸민 내부 요소로부터는 영감을, 외부 환경으로부터는 정서적 치유를 얻는 셈.

이곳의 메뉴는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한 한식을 표방한다. 일상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건강하고 유려한 한 상을 차려내는데 단지 전에 없을 새로움을 추구한다기 보다 음식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입거리 메뉴로 술과 함께 즐기면 더욱 좋은 ‘송이낙락’은 이름 그대로 양양의 송이와 통영의 낙지가 만나 일으키는 즐거운 시너지를 이야기한다. 낙지를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는 송이의 불맛과 낙지 젓갈의 감칠맛이 식욕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완도산 김부각에 초당두부 반죽과 청홍고추, 청포도를 올려내 다채로운 식감을 선사하는 한입거리 또한 각 산지의 명물과 제철 식재료의 맛을 조화롭게 담아내기까지의 즐거운 고민이 전해진다. ‘오미자 숙성 한우 살치살 구이’는 간장 양념에 마리네이드 하여 불맛을 입혀 구워내는데 함께 올려진 새콤한 오미자 열매가 맛의 밸런스를 잡아준다.

또한 흑미 주먹밥과 고소한 들기름의 풍미를 머금은 샐러드가 고기와 함께 즐기도록 하나의 요리로 제공되는데 한국인의 ‘고기와 쌈 채소’ 문화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좋은 예다.

이곳의 음식을 이야기할 때 토종의 과실인 오미자를 활용해 ‘오미로제’ 와인을 탄생시킨 오미나라 양조장의 전통주를 빼놓을 수 없다. 모든 메뉴가 오미나라의 와인, 전통주의 마리아주를 염두해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식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하우스 칵테일 한 잔과 함께 무르익은 여름밤을 싱그러운 오미자 향기로 채워봐도 좋겠다.

메뉴 점심 오늘의 한상차림 2만7000원, 저녁 담차림 4만9000원 / 영업시간 (매일)10:00-24:00

 

◆꽃 밥에피다

꽃밥에피다/사진제공=다이어리알

 

인사동에 위치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재료를 사용하는 유기농 한식당. 건강에 민감한 이들은 물론 맛과 정갈한 담음새로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이다. NON-GMO, 무농약, 무항생제 축산물의 사용, 합성 첨가물의 비사용 등을 강조해 까다롭게 엄선하고 조리한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빕그루망에 3년 연속 등재됐다.

점심 보자기비빔밥 세트 1만8000원, 저녁 해질녘텃밭상 3만2000원 / (점심)11:30-15:00 (저녁)17:30-22:00

 

◆담장옆에국화꽃CCOT(인사동점)

담장옆에국화꽃CCOT(인사동점)/사진=다이어리알

 

한식 디저트에서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자 하는 오숙경 대표의 아이디어 넘치는 한국의 전통 떡과 과자, 차, 빙수 등 코리안 디저트를 선보이는 곳. 여름철에는 국내산 팥을 건강하게 삶아낸 고명과 아이스바 하나가 통째로 올려진 ‘팥바팥빙수’가 인기. 은은한 단맛의 단팥죽과 구움 떡류도 시그니처다.

팥바팥빙수 1만1000원, CCOT시그니처세트 1만2000원 / (매일) 10:00-22:00 / 02-6954-2979

◆발우공양

발우공양/사진=다이어리알

 

대한 불교 조계종 산하 불교문화 사업단에서 운영하는 사찰음식 전문 레스토랑. 사찰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이나 외국인들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사찰음식의 고정관념을 깼다. 모든 메뉴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 시즌 메뉴가 변경된다. 사찰에서 전해내려온 비법으로 담근 재래식 장을 활용하며 사찰 만두, 강정 등 다양한 사찰음식을 맛볼 수 있다.

선식(점심) 3만원, 원식 4만5000원 / (점심) 11:30-15:00 (저녁) 18:00-21:30 / 02-733-2081

 

  

박재동 (화가 / 시사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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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인식선생

임인식(林寅植)(1920~1998)선생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49년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했다.

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하기까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에 투입된 한국전쟁 최초의 종군기자다.

 

1959년 인사동 사진전문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예편 후에는 ‘대한사진통신사’도 설립했고,

해방 직후에는 용산 삼각지 부근에서 ‘한미사진기’점을 운영했으며

1959년에는 인사동에서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개관하기도 했다는데,

사진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분이다.

 

1953년, 인사동 '청조다방' 앞에서 기념촬영

누구보다 기록을 중요시했던 임인식선생은 고향인 정주에서 포목점과 무역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부터 사진 활동을 했고, 1944년 서울로 이주했단다.

조선경비대 창설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등 정부 주요 행사를 비롯한

당시의 역사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1955년 인사동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에 사진대(隊)가 긴급 편성되었는데,

당시 중위였던 임인식선생께서 사진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참혹한 전쟁 발발부터 정전회담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주요 국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다.

 

1953년 폭격을 맞은 서울 재동국민학교 앞에서..

그의 임무는 사진대를 이끌고 군이 주둔하는 도시마다 사진관을 접수한 뒤,

필름을 현상해 국내외 언론사를 통해 전황을 전하는 일이었다.

‘밀리터리 포토(Military Photo)’ 명패를 단 지프를 타고 일선에 투입되었는데,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부근에서 촬영한

손이 뒤로 묶여 학살된 미군 사진은 미국 전역을 분노로 뒤집히게 했다.

 

1950년 서울, 소실된 보신각

1950년 8월 경북 월성에서 촬영한 안강·포항전투에 투입되는

교복 입은 학도병들의 출병 사진은 학도병 모습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꼽힌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하던 순간에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순간에도,

정전회담의 순간에도, 항상 그가 있었다.

 

1953년 청계천 범람으로 침수된 종로

19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그는 한국의 ‘매그넘’을 목표로

국내 최초의 사진전문 통신사인 ‘대한사진통신사’를 설립하였으며,

정부 행사를 포함한 삶의 현장을 촬영해 정부 및 해외 언론에 제공했다.

1953년부터는 육군본부에서 유엔 참전국에 배포한 영문판 사진화보집 ‘육군화보’

제작을 맡아 전쟁을 극복해나가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전하기도 했다.

 

1953년 종로의 전차행렬

사진에 대한 열정은 그로 끝나지 않고 아들 임정의씨와 손자 임준영씨로 이어졌는데,

두 살 위인 숙부 임석제(1918-1994)선생을 더한다면 4대째 사진을 이어 온 명문 사진집안인 셈이다.

아들인 임정의씨는 1973년 ‘코리아헤럴드’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나,

건축가 박수근씨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건축사진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손자 임준영씨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 AAU에서 광고사진을 공부하고,

뉴욕 SVA에서 디지털사진으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0년, 폐허가 된 서울시청 인근

임인식선생께서 5, 60년대 산업화 이전의 서울 풍경을 찍었다면,

임정의씨는 8, 90년대 급격하게 변모해 가는 서울을 촬영했다.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 그리고 디지털사진으로 이어진 사진 집안의 내력이다.

 

1955년, 종로

기록을 중요시하는 임인식선생의 빠짐없이 쓴 일기에는

당시의 카메라 시세를 알 수 있는 자료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39년에 일본제품인 럭키카메라를 27원에, 1940년 일본제 세미미놀타 카메라를 32원에,

1941년에 독일제 롤라이코드를 130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집 한 채 가격에 맞먹는다는 라이카3F를 구입해 애지중지했다고 기록되었단다.

 

1954년 서울뚝섬(지금의 건국대 부근) 채소밭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1959년 인사동에 국내 최초의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개관하였고,

한국사진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감사를 맡는 등,

우리나라 사진 문화와 사진 아카이브 개념 정립을 선도하였다는 점이다.

 

1956년, 서울 가희동 도로 포장공사

그러나 선생께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 난 후 은거하다 미국으로 이민하셨다.

1998년 건강에 이상이 생겨 귀국하여 서울에서 타계하셨다.

대개 대표적인 국내 종군사진기자로 임응식, 이경모, 이명동선생 등의 원로 분을 떠올리지만,

그 보다 사진대장이었던 임인식선생이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50년 국군 위문공연

벌써 한국전쟁 일어난지가 70년이 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되세겨본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1950년, 무기를 지고 가는 민간 부역자들
1951년, 1,4후퇴에서 청천강을 건너는 피난민
1950년, 맥아더 장군과 정일권 장군
1950년, 경북 안강, 학도병들이 전선으로 나가며..

종군기자로 참가한 영국 처칠의 아들 랜들프 처칠과 임인식 기자

 

 

전시 교체로 분주했던 인사동의 화요일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 광풍에 거리두기가 시작되며 생긴 썰렁한 풍경인데,

육 개월이나 끌어 온 전염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30일 들린 인사동은 '갤러리H' 전시 작가 등 몇 몇만 오갈 뿐,

작품 반입으로 분주했던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잡화상에 진열된 영혼 없는 작품만 손님을 기다렸다.

 

전염병으로 모든 사람이 고통 받지만, 예술가들 삶도 말이 아니다.

찾는 관객도 없지만, 작품 거래 자체가 되지 않는다.

전시장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나 건물주는 집세 챙기기에 바쁘다.

 

갤러리도 지탱하기 어려운 처지지만, 작가들도 손을 놓고 있다.

돈 벌이보다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여는 경우도 많은데,

찾는 사람이 없으니, 전시할 생각조차 않는다.

 

잘 나가는 작가야 살아남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전업해야 할 형편이다.

배운 도둑질이 그 뿐이라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할 것이다.

인사동 갤러리만 죽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도 다 죽는다.

 

작가들의 가난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작가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존심에 기초생활수급비도 마다했으나, 이제 생각을 바꾼 작가도 여럿 생겼다.

 

예술을 전공해도 전업 작가가 살아남기는 정말 힘들다.

그 중 어려운 분야가 문학과 연극 사진 등인데,

이제 예술 창작을 보상하는 구조적인 개선이 절실하다.

 

정부도 코로나 여파로 상인들 대책은 세우지만 예술가들 생계는 관심조차 없다.

정치판에 들어 간 도종환과 박양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예술가를 대표한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화를 위한 자리 같다.

 

이제는 월급쟁이가 제일 부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특혜 받는 국회의원 세비와 고위공직자 임금부터 줄여야 한다.

일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정치꾼은 모두 끌어내리자.

 

예술가는 왜 가난하게 살아야 하며, 가난한 예술가는 국민이 아니던가?

이제 작가들이 작업실에서 뛰쳐나와 화염병을 들 차례다.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0년 7월호]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뵐 기회가 생겼다.

강민시인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인사동 어르신들을 뵐 기회가 없어졌다.

진즉부터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는데, 모처럼 연락을 주셨다.

안부 전화였으나, 내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뵙자고 말씀드리고,

늘 뵙고 싶어 했던 정영신씨 한데도 전화했다.

 

약속한 날,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매번 늦게 나가 민망했는데, 너무 일찍 와 버렸다.

한참을 ‘나주곰탕’ 앞에서 서성였는데, 시간이 가까워오니 정영신씨와 나타났다.

길에서 만난 모양인데,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셨다.

 

날씨가 더워 뜨거운 곰탕그릇 대하기가 두려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선생께서도 시원한 막국수 먹으러 가자신다.

마침 ‘나주곰탕’ 초입에 방선생님 성을 빌린 ‘방태막국수’가 있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간신히 자리 잡았다.

 

방 선생님은 술을 끊었다지만, 내 걱정에 한 잔만 하시겠단다.

막걸리 한 병을 마셨는데, 선생님 생각한다는 게 피차 입만 버렸다.

 

‘방동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으나, 혹시 간첩이라도 있을까 싶어 소개부터 한다.

방동규(85세)선생은 이름보다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잘 통한다.

젊은 시절 웬만한 사내는 한 주먹에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 번에 깡패 17명과 맞싸운 일도 있고,

희대의 주먹 이정재도 방선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했단다.

 

그는 백기완(현 통일문제연구소장), 황석영(소설가)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릴 만큼 입심도 최고라, 구비문학계의 전설로 남은 위인이다.

법을 잘 아는 법대출신이라 낭만주먹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사상범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아 해외 유랑도 했었다

한 때 농촌운동에도 나선 파란과 굴곡의 인생이었다.

 

2005년 유홍준 문화재청장과의 인연으로 경복궁과 연을 맺은 적도 있다.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특채되었는데,

‘몸짱 할아버지’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77세에 왕궁 지킴이가 된 그는 아직까지 육체미 대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체력단련에 혼신을 다한다.

 

2006년에는 "배추가 돌아왔다"란 두 권의 자서전을 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부분의 으뜸은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지만,

한 번도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단순노동이지만 일하러 다니시는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주장이시다.

 

그런데, 선생님 슬하에 딸이 둘 있는데, 부전여전이었다.

나이 쉰이 가깝도록 미혼인데, 방그래양은 중국 대련대학 조소과 교수로,

시래양은 중국에서 운동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두 딸이 아버지처럼 운동도 잘 하지만, 생각이 깨어 있었다.

 

그 날 막국수를 드시며 하시는 말씀이 그래양이 얼마 전 귀국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왔더란다.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인데, 예능은 말할 것도 없다.

조각으로 국제대회에서 수상도 여러 차례 했다는데,

그 날 방선생께서 핸드폰으로 보여 준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국내 전시라도 한번 주선해 보고 싶어졌다.

 

그날 들은 이야기 중 그래양이 가장 돋보였던 점은 자본주의의 부정이었다.

조각가로서의 예술세계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사람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고 했다는데, 아버지를 빼 닮았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선생께서 술이 부족한 것 같았다.

선생님을 생각해서 권하지 않았는데,

정영신씨 이야기로는 자꾸 빈 술잔에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아직 재난카드가 살아남아 ‘유목민’에 갔으나, 문이 걸려있었다.

인사동에 낮술 마실만한 곳이 없어, 아쉽지만 보내 드려야 했다.

 

내가 비실비실하니, 앞으로 인사동에서 선생님 뵐 일이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더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 조차 두문불출하니, 더 만나 뵐 수 없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인사동에서 포장마차라도 한 번 할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정체성은 골동품이나 예술품보다 예술가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10여 년 전부터 인사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명성씨가

인사동 대표적 묵객으로 여겨지는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관청의 협조를 얻지 못해 미루어져 왔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과 멋쟁이 방송작가 박이엽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귀천’ 찻집을 주 무대로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천상병 시인 동상만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일요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유진오씨를 데리고 녹번동을 급습했다.

주말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것을 알아 술안주까지 준비해왔는데, 어찌 술자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두 달 전 술을 사두고 갔으니, 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오씨는 이른 시간부터, 때 늦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흥겨운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술 마시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장소를 제공해 그 인근에 천상병시인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동상을 제작할 작가는 최민화씨로 정해져, 머지않아 인사동의 상징물 하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인사마당에 대형 붓 하나를 오래 전에 세워놓았으나, 사물보다는 사람이 더 정겨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천상병 선생이 인사동에 등장할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애들처럼 깔깔거리는 천상병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매력적이지만,

천국 갈 시간을 기다리는듯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장난 끼 넘치는 모습의 술자리도 연상되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서울아트가이드' 6월호 구하러 간다는 핑게로 따라나섰지만,

천상병시인 동상 세워질 장소가 궁금해서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건물 가까이는 자칫 건축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동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가 마땅할 것 같았다.

 

주말의 인사동거리지만 거리두기 정도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예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외계인들 세상 같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인사동도 세월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천상병시인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목여사 말씀은 곧잘 들었으니, 쓰기 싫은 마스크를 턱 아래 걸치고 거리를 휘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동집 골목 안에 있는 지금의 최대감집이 선생께서 자주 드나들던 ‘실비집’이었으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 골목을 돌아 서는 포즈도 연상되었다.

 

아무튼 최민화작가의 기발한 구상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일찍부터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으나,

인사동의 멋진 상징물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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