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지난 주말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푸른 사상’ 여름호에 게재될 특집 대담을 위해 맹문재교수가 진행했다.

 

'한국출판콘텐츠센터'에 있는 ‘푸른사상사’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만나뵙고 이야기 들은 좋은 시간이었는데, 방배추 선생의 입심은 여전하셨다.

 

오후2시부터 시작된 대담이 어둑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했다.

긴 시간 대담이 이어졌으나 여쭈어보지 못한 게 많아 한 번 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단다.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은 선생의 또렷한 기억력이다.

나 역시 오래된 일은 물론, 엊그제 일도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팔순 후반인 선생의 기억력은 아직까지 생생하셨다.

 

하기야! 방동규선생은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위인이 아니던가?

방선생의 입심보다 살아오신 내력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 때는 조선 최고의 주먹인 방배추란 별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쳤다.

그 것도 정치깡패나 돈에 팔린 주먹이 아니라 의협의 주먹이었다.

 

잘 못된 것을 그냥 못 보는 선생의 기질은 어릴 때부터 타고 난 것 같았다.

못된 놈은 상급자를 가리지 않고 손을 보았으니, 다섯 번이나 퇴학 당하여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그런 전력을 가진 방선생께서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뺨 석대 맞고

시작된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그 센 주먹을 나라를 위해 쓰라는 뜻을 누가 모르겠는가?

 

백기완선생은 노동자의 세상을 설파하셨지만, 방동규선생은 노동을 일상화하는 분이다.

탄광에서 부터 농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그 연세에 아직까지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신념의 소유자다.

 

두 분에 대한 이력이야 여러 권의 자서전에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나,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는 일제강점기 때 국민학교 5년 다닌 게 전부인 백기완 선생께서

장관 집이나 부자 집 자식들 영어 과외 공부를 도맡았다고 한다.

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은 백기완선생은 외국말을 지독히 싫어하는데다,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는 분이 아니던가?

 

그 이유는 적과 싸우려면 적을 모르고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독학의 피나는 노력도 따랐겠지만,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정도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정보부 고문실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고 나오다 백기완선생을 만났으면

다친대는 없냐고 걱정해 줘야 마땅한데, 기죽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또 하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역사가 모든 것을 기록 한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인 너도 기록될 수 밖에 없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언질이었다.

한 평생 육체적 고통에 더해 마음의 자물쇠마저 차고 계셨으니,

어디 마음 편한 날이 하루라도 있었겠는가?

 

불쌈꾼’이고 민중사상가인 백기완 선생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자체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온몸을 던지셨다.

 

진행자인 맹문재씨가 대담 말미에 백기완선생과의 관계를 내게도 물었는데,

오래된 인연이긴 하나 뚜렷한 기억이 떠 오르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선생의 존함만 알았던 어느 날,

기자로 일하던 후배로 부터 백기완선생 사진 좀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함께 자택을 찾아 간 것이 선생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 인상은 온화하게 느껴졌으나,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범상한 모습에 기가 죽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날이 서 있었다.

낙천주의자인 나로서는 선생 앞에 쫄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고개도 못 고 말씀만 들었던 기억이다.

 

그 뒤 1987년 대선에 출마하셨을 때는 87 민주항쟁’ 기록 자체를 선생의 행보에 맞추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대학로 유세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쇳소리 같은 선생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타고 난 선동가였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룰 것 같은 신념으로 희망찼으나, 양김 단일화를 위해 뜻을 접어셨다.

백기완 선생은 “그때 내 말만 들었으면 군사독재가 진즉 청산됐을 것”이라며

이루지 못한 뜻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그 뒤 90년대 중반 무렵, 양평의 어느 행사에 참석하신 적이 있었다.

사진하는 김영수 작업실에 들려 오랜시간 함께 했는데, 처음으로 자상한 모습을 보았다.

김영수의 소변 색이 이상하다는 말에 확인해 보고는

당장 술을 끊으라고 나무라던 큰형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성격이 암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죄인처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지만,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백 팔십도로 바뀐다. 

그렇지만, 선생 앞에서는 감히 술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그 이후엔 전시 개막식에나 광화문광장 등에서 자주 뵐 수 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반가워하며 기념사진 찍기 바쁘니, 나 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나서기 싫어하는 소인배 임을 감지하셨는지, 떨어져서 올리는 목례에 늘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면 카메라로 인사드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면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르장머리는 그 때부터 생겨 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보지 못한 채, 선생께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본주의를 뛰어 넘어 모두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도 보지 못하고 가셨다.

 

한 평생 자신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힘겹게 사신 선생의 지난한 생애가 너무 가슴 아프다.

찬바람 부는 '광화문광장'에서 버티던 선생의 모습은 보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역사란 족쇄에 갇혀 재미있게 한 번 놀아보기라도 하셨겠나?

 

백기완 선생은 이 시대 마지막 투사였다.

민중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산 자여 따르라"는 선생의 노랫 말이 귓가에 아롱거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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