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꼬여 구치소에 들어가 수양 좀 하고 오려는데, 그마저 마음대로 안 된다.
지난 3월16일부터 4월4일까지 20일 동안 구치소에 갈 작정으로,
병원에서 평소 먹는 약 처방전도 받아오고, 쪽방 달세도 미리 줘야했다.
정선 가서 땅도 파 뒤집어 둬야 하는 등 이리저리 마음이 바빴다.


그 일은 5년 전 수난 당하는 동강할미꽃이란 칼럼을 신문에 투고했는데,

야생화 사진하는 사람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뒤늦게 벌금이 이백만원 나온 것이다.

벌금 낼 돈도 없지만, 승복하기 싫어 몸으로 때울 작정을 했다.

친구나 후배들께 빌릴 수도 있지만, 민폐 끼치기도 싫었다.

구치소에서 편한 밥 얻어 먹고 규칙적인 생활로 몸 관리하면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정영신씨를 비롯한 몇몇 지인들이

한사코 벌금을 마련할 테니 들어가지 말라고 종용했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공윤희씨와 김수길씨가 찾아와 잘 다녀오라며 위로주 까지 얻어 마셨다.

 

그런데, 다음 날 김명성씨가 오래전에 부탁해 만들어 둔 작품을 팔아주겠다며 벌금을 내란다.

벌금은 안 낸다고 버티니, 정영신씨 한데 다시 전화했던 모양이다.

정영신씨 말로는 남에게 도움 받는 것만 민폐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 부담 주는 것도 민폐란다.

구치소 가는 사람이야 마음 편할지 모르겠으나, 밖에 있는 사람이 어찌 다리 펴고 자겠냐는 것이다.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정영신씨 된소리에 그만 깨갱하고 꼬리 내린 것이다.


 

그렇지만, 명예훼손 건은 무혐의 판결받았어야 할 사건이었다.

판결 통보서만 받았다면 당연히 항소할 사건인데, 항소기한이 지난 후에야 독촉장을 받은 것이다.

왜 판결통지서는 보내지 않았을까?

 

쪽방 우편물은 일층계단에 40여개 쪽방의 우편물을 한꺼번에 모아두는데,

대부분 독촉장이나 행정명령 등의 불편한 우편물인데다 량이 너무 많아 잘 보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십 통이 쌓여 딩굴다 유실되고 마는데, 거지들이라 우편배달부도 무시 하는것 같다                                            

다른 곳에서 우편물을 이렇게 처리하면 가만 두겠는가?

그리고 판결통보서 같은 중요한 문서는 등기로 보내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닌가?

그래서, 누가 책을 보내준다 해도 분실되니 보내지 말라고 한다.

 

그건, 이미 엎질러 진 물이라 말할 필요조차 없겠으나,

봄만 되면 동강할미꽃을 예쁘게 찍기 위해 마른 풀을 뽑아내거나

물을 뿌려 말라죽게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해 기어이 고쳐야 할 일이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자가  전시했던 사진을 보면 햇볕이 나야 피는 꽃에 이슬이 맺혔거나

꽃 주변이 말끔한데다, 심지어는 배경에서 인공조명까지 사용한 흔적이 뚜렷해 

검찰에 소명서까지 제출했으나, 몇 년이 지나서야 벌금 독촉장이 날아온 것이다.

물론 그자는 야생화 전문가라 캘린더를 만들어 팔거나 사진 원고로 살아 개인적인 피해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사건은 개인의 명예에 앞서 공익에 관한 문제다.




그 신문기사와 블로그 포스팅으로 많은 아마츄어 사진인들이

야생화는 말끔하고 예쁘게 찍은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그처럼 자연을 해치는 사진인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그 사람은 사협공모전에 심사도 하니 공인이나 마찬가지다.

 

요즘은 이 사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명예훼손 문제로 신경이 날카롭다.

, 원칙에 벗어나는 나쁜 일은 아무리 가까운 분이라도 그냥두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에서가 아니라 더러운 세상 바로잡기 위한 고충이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잘 못해도 싫은 소리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데 있다.

나 역시 남에게 미움 받는 소리 하기 싫지만, 나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더구나 신문 발행인이 칼럼 제목을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로 정해 놓았으니, 안 할 수가 없었다

매번 빼딱한 소리만 하니 고개까지 돌아갈 지경인지라, 칼럼은 2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동안 그러한 일로 고소를 당 하거나 등 돌리는 분들이 많았는데,

오죽하면 사람이 좋아 한 평생 사람만 찍어 왔으나, 사람이 싫어진다.

 

구속이 아니라 사형을 시킨다 해도 원칙을 지키지 않는 나쁜 일이라면

죽을 때까지 까 발릴 생각에는 변함 없으나, 이제 합리성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요즘 이광수교수의 정치평론에 관심 가지면서, 꼭 원칙만이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칙을 지키려는 진보정당과 개혁을 위해 합리성을 택하는 여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사인에 게재된 폭력성에 도취된 사진가의 거리 사진이란 기사를 우연히 보았는데,

일본의 스즈키 다쓰오란 거리사진가의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촬영모습에 깜짝 놀랐다.

나 역시 인사동에서 거리사진을 종종 찍기 때문에 남의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아는 분이야 가깝게도 찍지만, 대부분 멀리서 가리풍경 위주로 찍는데,

얼굴을 가리거나 싫어하면 지웠으니, 촬영으로 여지 것 문제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동자동이나 부랑자의 사진도 대부분 인터뷰하며 찍거나 양해를 구해 찍는다.

삶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이라 다들 이해하는데,

실상을 모르는 분들은 몰카로 오해할 지도 몰라 심기가 편치 않았다.


좌우지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상충하는 문제들이라 조심해야 할 일은 틀림없다.

요즘, 공익과 개인의 명예, 원칙과 합리에 대한 갈등으로 머리가 아프다.

때로는 비겁하게 다 떨쳐버리고 정선에 처박혀 조용히 살고 싶지만, 그마저 마음대로 안 된다.

솔직히 옛날같이 바보처럼 살고 싶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만 해도 황야의 무법자가 휩쓸고 간 택사스의 황량한 풍경처럼
적막감에 휩싸였던 인사동이 봄바람 실은 온정에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손님 잃은 가게들을 위해 임대료를 안 받거나 감해주는
건물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감기에 걸려 목이 퉁퉁 부었지만,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만 없었다.
떠나기 전에 처리할 일도 많지만, 봐야 할 전시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마스크로 무장하고 나선 인사동 나들이에 반가운 현수막들이 반겼다.
거리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건물주님 감사합니다’, ‘착한 임대료 운동 지지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닫혔던 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고, 길거리에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바이얼린 소리가 인사동의 침묵을 걷어내고 있었다.






인사동에서 옷가게를 하는 차모씨가 지난 2월 한 달 치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건물주가 전화를 걸어 “이번 달 임대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단다.
서울의 최상위에 속하는 인사동 상권에서 벌어진 이례적인 일이었다.
차씨는 “지난해 11월 가게를 오픈한 이후 내리 장사가 안 된 데다 코로나까지 덮쳐
막막하던 차에 주인이 먼저 연락 줘 깜짝 놀랐다”며“ 이 가게 열기 전부터
5년이나 인사동에서 장사를 해 왔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낙원떡집 인사동점’이 입점한 건물도 3~5월 임대료를 20%정도 인하할 계획이란다.
낙원떡집 주인은 “지난달 매출이 급감해 적자가 난 상황이라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착함 임대료’ 바람이 일고 있었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 사무국장의 말에 의하면 “구체적인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 건물주가 자발적으로 임대료 인하에 동참하고 있다며,
착한 임대료 운동에 참여하는 건물주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도심 상권에서 임대료 인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부동산업을 하는 한 전문가는 경기 불황을 이유로 건물주가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내려 받은 적이 없단다.
‘임대료 불변의 원칙이 깨져 차후 임대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인 갤러리 임대료도 면제나 삭감이 뒤따라야한다.
가진 자들의 온정이 확산되어 인사동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지난20일은 졸음을 견디지 못해, 인사동으로 바람 쐬러 나가야 했다.




오늘까지 ‘부랑자’원고를 정리하여 출판사에 넘겨야 하는데,

며칠 동안 하루에 한 두 시간 밖에 못자며 여기 저기 흩어진

사진 이미지 찾느라 파김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시장이나 들렸다 올 작정에 인사동 벽치기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유목민’ 문 앞에 단체손님 예약으로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궁금증을 자극해 들어가 보니, 영화 ‘기생충’ 제작팀들이 ‘유목민’을 접수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사진가 이유홍씨를 비롯하여 조성표, 안완규씨가 술자리를 마련해 잠깐 합석했는데,

그 날 국민들의 영웅이 된 봉준호감독을 비롯한 일행들이 청와대 다녀와서 주연을 갖는 자리라고 했다.



이유홍씨는 요즘 우울증에 시달려 몸무게가 육킬로나 빠졌다고 했다.

사진가 황규태선생과 점심식사를 한 후, 인사동으로 옮겨 술 한 잔하고 있었는데,

모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



안쪽에는 봉준호감독을 비롯하여 송강호, 장혜진, 조녀정, 박소담, 박만철씨를 비롯한

20여명의 ‘기생충’ 출연진과 스탭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쪽팔리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어 가끔 화장실을 더나들 때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축하연에서 나온 케익이나 얻어먹고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인섭씨를 비롯한 몇몇 분들이 들어 와 예약 팀들을 불편하게 할 것 같아서다.


 

이유홍, 조성표, 박혜영씨와 옆 골목에 있는 ‘꽃, 밥에 피다’로 옮겼다.

이 집은 생긴 지가 오래지 않아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으나,

지나치다 좆밥이라는 등 농담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유홍씨 단골집이란다.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기생충’ 대본이라도 한 권 얻기 위해 다시 ‘유목민’에 갔는데,

사진가 이정환씨를 비롯하여 심보겸, 성유나, 이미리씨 등 여러 명을 골목에서 만났다.

반갑기는 했으나,그들도 ‘유목민’ 예약 팀 때문에 다른 술집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가보니 이미 대본을 다 나눈 뒤라 허탕치고 돌아왔으나, 더 이상 술은 마실 수가 없었다.

오늘까지 마무리해 넘겨야 할 원고 걱정에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동자동으로 돌아왔으나, 술 마신 자체가 문제였다.

몰려오는 졸음에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 일한다는 게, 일어나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그날까지 원고를 모두 넘겨주어야 다음 날 책을 편집하고 가제본하여

마감일인 월요일까지 지원금을 신청한다고 했는데, 이미 날 샌 것 같았다.

복에 없는 지원금 신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더 꼼꼼하게 보충 작업하여 좋은 책 만들라는 계시로 생각하며 위안했다.



모든 것은 준비된 자가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발에 닭 알이라’는 옛말이 생각나 혼자 웃었다.


사진, 글 / 조문호
















2020.1.31


의왕 사는 박완호씨는 인사동 광대이기를 자처한다.



2019, 8.


그는 시집 ‘내가 꿈꾸는 배려’를 낸바 있는 시인이다.
인사동 거리 축제만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달려온다.
어떤 때는 가장행렬 앞줄에 서서 지휘자 행세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려한 복장으로 지나치는 이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2019, 8.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오는 단 하나의 이유는 인사동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칭찬하는 이 없다. 여비는 커녕 차 한 잔 사주는 사람 없어도 관계없다.
행사가 없는 날도 인사동 거리를 오가며 광대 임무를 다 하지만,
마치 미친 사람 취급하듯 눈길도 주지 않는다.



2020.1.31


지난 1월31일 밤늦은 인사동 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울긋불긋한 화려한 복장이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너무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포즈를 취해주며 말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사동, 선생님 뿐입니다”.




인사동 무명광대가 살아 있는 한 인사동의 풍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 글 / 조문호


2019, 9











난 1일, 인사동에 ‘서울아트가이드’ 책 한 권 얻으러 갔더니,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로 다른 주말보다 사람이 적은데다,
나온 사람도 대부분 마스크로 가려, 마치 죄지은 범법자나 외계인처럼 낯설었다.
그런데, 얼굴 가리는 것에 왜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겼을까?




새로 나온 코로난지 세단인지 모르겠으나, 그놈의 전염병 때문에 죽을 맛이다.
밥장사도 술장사도 다 문 닫을 지경이지만, 다들 방안에서 감옥살이 한다.
동자동 쪽방도 모두들 방안에서 알 낳는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확실한 격리는 되니. 그 중 안전지대가 쪽방 촌이 아니겠는가?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낙연씨

인사동 거리에 나타난 외계인 아닌 외계인들을 살펴보니,
외계인 속에 낯익은 분의 모습이 보였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낙연씨가 빙그레 웃으며 찍사를 처다 본다.
그런데, 이분은 겁도 없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네.
하기야! 지역구 표밭에서 얼굴가려서야 어떻게 장사 하겠나?
목숨 걸고 하는 것이 정치인인 모양이다.




아마, 외계인처럼 얼굴가리고 다니는 게, 앞으로 일상화될 것 같다.
별의 별 지독한 점염병도 다 생기지만, 환경오염으로 대기도 독가스 수준이다.
모든 게 인간들이 저지른 업보다.
좀 불편해도 원시인처럼 살며 인간성을 찾는 것이 답인데, 꿈 같은 일일 뿐이다.
다들 돈과 편리함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지구는 원시인과 외계인의 전쟁터가 될 것 같다.




그 날 인사동에 원시인 사령관이 나타나, 외계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라며 연신 허리를 굽혔으나,
다들 미친 사람 처다 보듯, 시큰둥하다.
이 분은 부천 사는 박덕술씨로, 가끔 파고다공원이나 인사동에 나타나 퍼포먼스를 한다.
큰 칼 옆에 찬 폼이 마치 원시인 사령관처럼 보였다.




전쟁 하려면 인사동에 원시인 부대부터 만들어야 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랜 세월 인사동을 지켜 온 ‘통인가게’ 관우선생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 전에도 전화를 하신 모양인데, 일할 땐 전화기를 곁에 두지 않아 못 받았다.
해 바뀌었으니, 점심식사라도 한 끼하자며 날자를 잡았다.



이젠 나이 들어 몸이 신통찮으니벗들의 술 마시자는 연락도 잘 따르지 못한.

예전에는 술 마시자는 연락만 오면 쪼르르 달려갔으나, 일 끝내기 전엔 천하일색 양귀비가 꼬셔도 못 간다.


 

한 때는 일 보다 노는 것이 먼저였다

노세노세 살아 노세! 죽고 나면 못노나니“ 를 외쳤는, 힘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지난 30, 점심시간 맞추어 통인가게상광루에 올라가니, 한겨레기자로 정념퇴임한 임종업씨가 와 있었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진로포도주 한 잔 따라 주었는데, 옛날 생각나는 술로 맛도 괜찮더라.

빈속에 짜~리리리 내려가는 술기운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역시 술과 사랑은 배부르면 갓댐이다.


 

그날은 새해 복 받아라는 뜻인지, 낙원동 복집으로 데려갔다.

복지리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애주가인 관우선생이 말을 꺼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캔 맥주 하나 들이키는 게 최고의 재미야"

다들 건강 생각하느라 아무리 좋아도 몸에 해로우면 삼가지만, 관우선생은 못 말린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생전의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는데, 술도 말술이라 아무도 못 당한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며, 자기 죽으면 수의는 물론 쓸데없는 장례에 낭비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단다.

장의차도 필요 없고, 그냥 잠옷 입은 채 화장하여 강화 집터 주변에 뿌리라 했다는데, 역시 관우선생 다웠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개 돈에 중독되어 인간성을 잃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선생은 다르다.

일찍부터 부친이신 인제 김정환 옹으로 부터 통인가게를 물려받아 한 평생을 예술과 문화에 천착한 때문인지,

사람사는 근본을 중시하고, 풍류와 멋을 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마당도 쓸고 가구도 닦고 배달도 했다.

열 일곱 살에 부친께서 "오늘부터 고사를 네가 지내라"고 했단다. 수시로 지내는 고사는 장사꾼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화여대' 학생들이 가게에 왔단다. 본인에게는 항아리 때 닦는 일만 시키던 부친께서 학생들은 잘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가게에 나가지 않고 "아버님 밑에서 안 배우겠습니다. 이대생들에게는 잘 가르쳐주시면서"라고 투정을 했단다.

"항아리 때를 빼거나 고가구를 닦다 보면 서랍의 크기와 위치 등 디테일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크게 나무랐는데,

말보다 손으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스무 세살 되던, 어느 날 부친께서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오늘부터 네가 통인 주인이다"라고 했단다.

그러고는 "어느 장사든 망하지 않는 장사가 없다. 네가 주인이기 때문에 망하던 흥하던 모든 건 너 하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망하면 동대문시장에서 다시 리어카를 끌고 시작하라"고 했다는데, 무서운 얘기였다.

어린 자식에게 사업을 물려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때 부친께서 "난 내 아들을 믿는다"고 했단다.

`아버지가 날 믿어주는데 실수하면 안 되겠다. 놀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고미술상에서 시작하였으나,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인터내셔날','통인안전보관','파쇄컴퍼니' 등

21개 자회사를 거느린 연매출 8000억원 대의 세계적 물류회사로 키운 것이다.

골동품을 취급하다 보니 고미술품을 국내외에 안전하게 운송하는 일을 생각했고, 운송 일을 하다 보니

서류 보관 업무도 하게 됐는데, 외국계 보험회사와 신용카드사들이 다 고객이란다.

사업과 연관된 고객이 필요한 걸 생각하다 보니 사업이 확장된 것이다.

어느 정도 사업이 자리 잡자, 젊은 시절 못다 한 미술 사업에 매달렸다고 한.



 

그렇지만 그의 명함에는 대표나 회장 대신 늘 통인가게주인 직함을 고집한다.

인사동 허름한 주막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기를 즐기는 낭만파로 살아간다.



'통인가게'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바른 문화에 바탕이 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 전통 문화와 미술의 가치를 높이고 보존하며, 우리 문화를 바르게 전달 정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에 세워졌으니, 4년만 지나면 100주년이 되는 인사동 명물이 되었다.

인사동에서 동헌필방’, ‘통문관’, ‘이문설농탕’, ‘통인화랑등이 서울문화유산에 지정되었으나,

찻집으로 바뀐 동헌필방이나 문 닫은 날이 더 많은 통문관에 비한다면, ‘통인화랑은 인사동 꽃중에 꽃인 셈이다.

통인가게70년 부터 문화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왔다.


 

지하1층에 있는 '통인화랑'은 올해로 42년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화랑이다. 당시 분청작가인 윤광조씨 전시가 첫 전시였다.

통인화랑이 공예 부문이라면, 5층에 있는 통인옥션갤러리는 모던 아트 쪽으로, 2주마다 초대전을 연.

"팔리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우리가 그 작품을 사준다. 다행히 나는 선친에게 물려받아 집세를 내지 않아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사들인 작품들이 지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통인화랑에서 전시한 현대미술 화가로는 박서보씨가 대표적이다. 그1976`묘법` 화풍의 첫 개인전을 '통인화랑'에서 열었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2010년 이후 `단색화` 열풍이 불면서 지금은 호당 단가가 가장 비싼 인기 작가가 됐다.

이동엽씨도 '통인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전시된 작품이 모두 팔려 전체 판을 두 번 바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이동엽씨가  생애 최초로 큰 돈을 만져봤다고 자랑 했지만, 죽고니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김구림, 황성준, 강경구 등 수 많은 유명작가들이 '통인화랑'을 거쳐갔다.




그리고 '통인가게'1층은 생활도자기와 규방공예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다류와 청자, 나전칠기 제품이 즐비하다.

3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되살림 가구를 전시하는데, 되살림 가구란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가구를 재현하는 것이다.

오래된 한옥에서 나온 고재를 사용해 새로 만든 가구를 말한다. 4층은 백자와 17세기 후반의 앤틱가구가 전시되고 있다.

 


또 한 가지 통인가게의 자랑은 외교사절을 비롯한 각 분야 내로라하는 분들을 초청하는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두 달에 한 번씩 통인오페라를 열고, 일 년에 서너 번 판소리와 국악 공연도 한다.

판소리나 오페라 공연을 정기적으로 여는 것은 고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이기도 한데,

주한 미대사는 테러를 당해 얼굴에 상처를 입은 후에도 오페라 공연을 찾았을 정도로 인기다.


 

나는 음악과 미술은 한 통속이라 음악이 미술을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문화예술 수준이 그 나라 품격이고 선진화의 기준이다. 예술인과 예술 애호가들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다.

통인 판소리와 오페라가 우리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관우선생은 말한.


 

그는 거상 임상옥이 말한 상인이 아니라 상도를 지키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산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널리 베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을 사서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통인가게' 주인은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통인가게’ 100주년을 맞이하여 통인도자연구소가 있는 강화 고려산 자락에 1, 2200평 규모의 10개 미술관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박물관 아래 절집’, ‘미술관 속 예배당’, 통인현대도자박물관, 청자박물관, 섬유박물관 등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기보다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전시공간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다.

그동안 그가 수집해온 한국 고가구, 청자, 백자, 미술품 등을 일반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건축가 김동주씨의 설계로 추진되고 있다.


 


미술관에서 불공 드릴 수 있는 불당은 첨단 영상 등으로 꾸며 평소엔 오페라 공연도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될 것이라 한다.

2탄은 미술관 속 예배당이다. ‘박물관 아래 절집과 같은 콘셉트다. 스님과 목사도 큐레이터처럼 근무하게 된단다.


 

관우 김완규씨는 돈을 쫓는 거상이라기보다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

고급 요정이 아니라 간판도 없는 인사동 다리밑 선술집을 즐겨 드나들며 주당자리를 꿰차고 있다.

집에선 수시로 난을치는 서화를 즐기기도 하지만화가나 글쟁이들이 모여 막걸리 한 사발 하는 풍류를 더 즐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예술가들의 참새 방앗간이나 다름없는 '통인가게'에 문화예술인들은 꾸준히 드나들 것이며,

대폿집 어디에선가는 그가 즐겨 부르는 단가 이 산 저 산이 구성지게 흘러나올 것이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사진, / 조문호






















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하지만, 모든 건 바뀔 수밖에 없다.
세월 따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고, 바뀐 손님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장사 속성 아니겠는가?

싸구려 기념품점과 장신구점,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지만,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세가 듬직한 분들이야 아쉽겠지만. 젊은이들은 오늘의 인사동이 즐거운 걸 어쩌랴?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변화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쉼 없이 변모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사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곳곳에는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집은 민가다헌이란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도 아직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인사동 초입의 승동교회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태화빌딩 자리는 태화관에서 명월관으로 바뀐 역사적 자리다.

그곳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자리가 아닌가.


 

인사1길 골목 깊이 숨은 100년 넘은 오동나무와 오래된 한옥 서까래들이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인사동이 구한말부터 문화의 거리로 불려왔지만,

우리시대의 인사동은 1960대부터 70년대에 형성된 인사동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그 무렵 골동품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는 가운데, 표구점, 고서점, 화랑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인사동 대로변에 표구점들이 30여 곳이나 몰린 적도 있었다.

표구하던 그림을 길가에서 말려 인사동 거리자체가 미술관 같았다.


 

인사동에 돈이 몰린 시절도 있었다.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하며 화상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라도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들이 몰렸단다.

가끔은 추사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눈 밝은 자들이 보석을 찾아내는 금광 같은 곳이었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인사동에서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화랑을 만드는 등 인사동에 돈이 몰리며 인사동의 판도가 서서히 바뀐 것이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그림을 사들였는데,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필방은 대부분 남아있다.



지금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은 대부분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은밀하게 보여주며 거래하던 시절은 끝난 셈이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어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거래된다.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나 액세서리가게, 옷가게가 대세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는 보석상과 악기점까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이젠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영세업자들은 버텨나지 못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은 서서히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화방과 필방, 지물포, 갤러리들이 남아있어 화가나 서예가 등 작가들은 드나들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 한 가닥은 자리를 지키는 셈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을 정겹게 만든 것은 골목골목마다 박혀있는 술집들이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한옥으로 된 음식점들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리 저리 연결된 골목에는 술집과 한식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맛 집들이 몰려있어 그나마 옛 분위기를 일깨워준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가 개막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인사동 골목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전시 작가는 물론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울려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데,

예전 같았으면 담배연기 자욱한 주청에서 노래 가락도 간간히 흘러나왔다.

술자리에서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 된소리도 났으나, 요즘은 술 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주청에서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풍류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사동집정도다,

실비집’, ‘하가’, ‘누님칼국수’, ‘실내악’, ’춘원‘ ‘시인통신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뒤에 생겨났던 평화만들기뜨락마저 사라졌다.

사라진 가게를 대신해 유목민’, ‘낭만’, ‘시가연등이 옛날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길가에 자리했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나고

초당또한 어렵사리 지탱하지만,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던 수희재인사동 사람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변하는 인사동을 어쩌겠는가?

변한 인사동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정들었던 벗들도 가고, 훈훈한 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늦은 시간에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청진동 술집으로 나오라며 화가 손연칠씨를 바꾸어 주었다.
반갑기야 하지만, 술에 골병들어 술자리는 피하는 처지라 난감했다.
그렇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술집 위치를 몰라 가서 전화했더니, 손연칠씨가 데리러 나왔다.
날더러 ‘서울문화투데이’와 무슨 일이 있었냐며 캐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미운 돌맹이’란 카페에 들어가니, ‘서울문화투데이’ 이대표와
화가 전인경, 정영신씨등 여러 명이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과메기 안주에 고급 위스키까지 나온 푸짐한 술상이었다.




그 날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해 중 가장 큰 일을 치루고 난 뒤풀이였다.
문화에 한정된 신문이라 광고 얻기도 어려운데,
십일 년 동안 ‘문화대상 시상’을 끌어 온 것이다. 


 

처음엔 술을 사양했지만, 연이은 권주에 못 이긴 척 술잔을 받았다
사나이 맹세 개 맹세되는 건 순식간이지만, 어쩌겠는가?
딱 석 잔만 마시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으로 아껴 마시기는 했지만,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손연칠씨가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를 완성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 대표는 왜 나를 싫어하냐며 따져 물었다.
술집에 들어오기 전 손연칠씨의 말과 겹쳐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신문에 글을 쓰지 않는데 따른 오해 같았다.


화가 손연칠씨가 완성한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

처음엔 문화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발행인의 열정에 감화하여 동참한 일이지만,
대가없는 봉사라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일이었다.
종이신문을 고집하는 자체가 운영을 더 어렵게 하는데, 그 걸 지켜보기도 편치 않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고 정한 칼럼 제목도 발목 잡았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잘못된 것을 찾아야 하는 절박감도 따랐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빼딱해 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2년간의 칼럼 투고를 끝으로 전시리뷰만 쓰겠다며 슬며시 빠져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가를 잘 아는 처지라 전시리뷰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누군 쓰고 누군 안 쓸 수도 없는데다, 아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지적하기 힘들었다.
안 좋은 작품을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쪽팔리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 쏟고 뭐 데인다는 속담처럼, 힘들게 글 써주고 욕 얻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일 년쯤 하다 전시리뷰도 손을 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야 처음부터 원고료 없이 봉사할 마음으로 나섰지만, 뒤늦게 끌어들인 정영신씨는 달랐다.
수고비도 없는 취재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일로 수시로 부려먹지 않았는가?
공과 사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 처리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도 있다.




나로서는 ‘서울문화투데이’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고,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며 오해는 풀었지만,
정영신씨가 하고 있는 전시리뷰도 하루속히 그만두어야 해 걱정되었다.
이 날도 시상식을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불려나간 모양인데,
아무리 좋은 일도 민폐 끼쳐서는 안 된다.




아무튼 ‘서울문화투데이’가 좋은 매체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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