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 인사동이 아니다.
인사동 혼 나간지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건만,
실오라기 같은 미련이라도 잡고 싶었다.




엊그제, 응향선생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사동은 끝났다”는 것이다.
차마 끝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는데, 꿈 깨라는 말로 들렸다.
인사동 전통도 풍류도 다 바뀌었는데, 사람인들 왜 안 바뀌겠는가?




이젠 인사동을 좋아하던 80대 원로 선생은 대부분 떠났거나,
살아 계셔도 몸이 편 찮아 발길을 끊으셨다.
유일하게 나오는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마저 노망들어 집에서 금족령이 내렸단다.




70대는 끝 난지 오래고,  그나마 60대가 인사동을 주름잡았는데,
그 들도 밥줄 걸린 사람 외에는 등 돌린 지 오래다.
인사동을 챙기던 김명성마저 은평예술촌에 푹 빠져있다.




응향 말이 마음에 걸려 인사동 나갔으나,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제 지난 추억이라도 정리해야겠다.

올 겨울 인사동 사진책 만들어지면, 나도 잊으련다.




그래!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도,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12월호]











지난13일 연극 연출가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아니라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전갈에 괜히 쫄았네.

주인공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와 언론인 윤상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비가 내리다 멈춘 인사동 길은 은행잎이 떨어져 보도블록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발 걸음에 밟혀  은행 터지는 소리조차 정겨웠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가니, ‘유담커피숍에 김명성씨가 기다리고 있었.


 

 전활철씨의 안내로 유목민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춘천의 유진규씨가 나타났다.

뒤 이어 김상현씨와 조해인씨가 왔고, 나중에는 김수길, 이인섭, 최일순씨도 만났다.

기국서씨 훈장 덕에 반가운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귀한 훈장 술이라 술은 술술 넘어갔으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

매년 30명이나 훈장과 상을 주면서 기국서씨를 왜 이제 주었을까? 

기국서씨 수훈도 공적에 비해 늦지만, 유진규씨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리고 문화훈장은 상금도 없는데다, 아무런 혜택이 없다고 했다.

무공훈장처럼, 사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특혜도 없지 않은가.

금붙이가 아니라 전당포에도 잡혀주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밥 먹지 않고 명예만 먹고 사나?

대개의 예술가들이 가난하게 사는, 도움 되지 않는 훈장이 무슨 소용인가.

정부에서 주는 훈장이 이 모양이니, 신문사에서 주는 문화대상도 상금 한 푼 안 주는 곳도 있다.

상으로 작가를 우롱하고 장난 치는 곳이 많으니, 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관객모독이 아니라 훈장모독이란 연극도 무대에 올려야겠다.


 

몇 일전에는 '이중섭미술상' 받는 정복수씨 시상식에 갈 일도 있었지만

주관하는 조선일보가 꼴 보기 싫었다. 어찌 치욕적인 사옥에 발 디딜 수 있겠는가?

그 곳에는 상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권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

일억을 상금으로 내놓은 '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이 더 좋은 상으로 친다.


 

훈장에 초치는 소리 집어치우고, 술자리 이야기나 해야겠다.

그 날의 화제는 70년대 시절 이야기가 많았는데, 명동 심지다방을 비롯한 다양한 추억담이 나왔다.

그 당시는 부산에 살아 귀를 곤두세우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말짱 도루묵이네. 


 

조해인씨는 영화 도둑들에 출연한 기국서씨의 연기가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장면들이 너무 인상 깊었는데, 기국서씨는 연출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명성씨는 몇 일전 무세중씨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는데,우리 상복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 했단다.

그렇기야 하지만, 한복이라면 모르나 흰 양복이 어울리겠는가? 전통장례를 두고 다들 서양식 장례를 택하니 어쩌겠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유진규씨는 어머니 임종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곁에 누워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갑자기 말씀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잠 들듯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는데, 이보다 행복한 임종이 어디 있겠는가?


 

70여 편의 창작으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씨 문화훈장 수훈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번 수훈이 창작활동의 결실인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계기라고 입을 모았다.


    

기국서씨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며 늦도록 축배를 들었다.

기분좋게 만취한 것은 좋으나, 버스타고 졸다 종점까지 가버렸네.

 

사진, / 조문호
















김수길사진















김수길사진

















조해인사진




















 

 



엊그제 인사동에 들려 어느 외국관광객 팀을 따라 다니며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대부분 큰 길가에 있는 잡화상만 기웃거리며 군것질만 하다 돌아갔다.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 한데, 그런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인사동을 찾겠는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는 인사동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예술의 거리로 살려 낼 방법을 다 같이 찾아내야 한다.
정체성을 잃고 잡상들만 득실댄다면, 인사동의 유명세를 언제까지 유지하겠는가?




인사동은 우리 전통과 함께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다.




먼저, 인사동의 역사부터 한 번 살펴보자.
조선 건국으로 수도가 된 한양은 창덕궁이 있는 북촌 주변에
고관들의 집과 양반들의 저택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멀리 떨어진 북악산과 남산자락에 모여 살던 양반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후 북촌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500년의 역사를 지켜왔지만,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사라지며,
북촌 양반들의 가세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살기 막막해진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집안의 귀중한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하며
북촌주변이 점차 골동품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1914년 관인방 일대의 이름을 인사동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에는 전통과 현대의 모습이 뒤섞인 매력에 끌려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전통찻집과 전시장들이 생겨나며 전통과 낭만의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인사동에 화랑과 표구점이 많이 들어서며 미술인의 출입이 꾸준히 늘어났다.
60년대 명동을 거점으로 모이던 문인들이 관철동을 거쳐,

70대 후반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사루비아'다방을 거점으로 인사동 문화가 꽃 피우게 된다. 
80년대 초반에 생긴 천상병시인의 찻집 ‘귀천’과 '누님칼국수'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실비집'과 '하가'는 물론 피맛골'에 박종수시인이 문을 연 '시인통신'도 많은 예술가들이 더나들었다.

90년대 들어 이해림씨가 개업한 '평화만들기'에는 예술가들과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기도 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인사동에 시인들과 관련된 자리가 많았다는 점이다.

63년 김상옥시인이 '아자방'이란 골동품점을 차려 문인들의 교류처가 되었고,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에 이어 84년도에는 정동용시인이 교장으로 있던 '시인학교'도 개업했다.

그 이후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에서 이생진시인이 정기적인 시낭송회를 가졌으며,

음유시인 송상욱씨가 인사동에 집필실을 차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소리시인 이춘우씨가 시 낭송회를 위한 업소 '시가연'을 개업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시공간이 몰려 있어 미술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반면, 문인들의 출입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 이후 '귀천'의 천상병선생과 목순옥여사를 비롯하여 민병산, 박이엽, 강 민, 심우성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살아계시는 분마저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대형건물이 여기 저기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옛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서서히 끊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애정을 쏟아 붙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명성씨는 긴 세월 동안 사재를 털어 인사동 예술가들을 지원해 왔다.

틈틈이 모임을 주선하여 예술가들의 판을 만들고, 원로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는 애정을 보였다.

‘통인가게’ 김완규회장은 무료 판소리공연을 정기적으로개최하여 우리문화를 알리는데 힘 써 왔으며,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좋은 전시들만 유치하여 인사동 전시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작고한 김수영시인이 찍힌 판화를 담벼락에 붙이는 Street Art를 펼치는 이태호교수 같은 분이 있기에

인사동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내가 몰라 그렇지, 어디 이 뿐이겠는가?




지금이라도 전통과 낭만의 거리를 되찾기 위해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먼저 인사동에 몰려 있는 전시장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자.




그 첫 번째 시도로 인사동 전시 소식을 알려주는 간단한 주간지를 만들어 안내소에 배치하자.
미술평론가 한 분을 선정하여 전시 소식지를 만들고 좋은 전시를 집중적으로 소개하자.
또한 인사동에서 전시되고 있는 다양한 전시를 홍보하므로서, 명실상부한 전시문화의 본거지로 만들자.




둘째, 예술가들이 다시 인사동으로 모여들게 만들어 인사동 낭만을 부활시키자.
천상병시인, 민병산선생, 박이엽선생, 중광스님 등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을 골목에 세우는 등

인사동에 예술혼을 불어넣자.




인사동의 매력은 이리 저리 얽힌 수 많은 골목이 아니던가?
골목마다의 특징을 살려 문학의 거리나 미술의 거리로 지칭해
예술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찻집이나 술집, 어디를 가도 반가운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모여 들 것이고,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멋이 낭만의 거리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기존의 ‘인사전통문화보존회’는 상인들의 모임이라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종로구청’ 또한 그들의 눈치나 보는 탁상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제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나서는 길 밖에 없다.
다 같이 지혜를 모아 종로구청과의 협의체부터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11월호]










지난 토요일은 여의도 촛불집회장에서 인사동으로 호출되었다.
인사동에서 김명성씨와 화가 최울가씨를 만나기로 했다.

최울가는 유목민처럼 떠도는 작가라 쉽게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같이 간 동지는 어디로 갔는지 연락이 끊겨, 나 혼자 지하철 타고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은 위치만 바뀐 게 아니라 주인까지 바뀐 건지,
예약한 게 없다며 불친절 했다.
뒤 따라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여자만’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울가는 70년대 후반, 내가 서울 올라 올 무렵 상경했다.
부산에서 비슷한 시기에 올라 온 화가로는 박광호, 이존수씨도 있다.
이존수씨는 대학로에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대관절 그 놈의 돈이 무엇인지, 돈이 생기니 사람이 변하더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뒤늦게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생선 뼈만 줄창 그리던 박광호도 지난 달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게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제 세 사람 중 최울가만 남은 것이다.




최울가는 20여 년 넘게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며 작업해 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순수하고 자유롭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는데, 곧 강남에서 전시를 한단다.




최울가는 요즘 잘 나가는 몇몇처럼 스타 반열에 오른 작가다.
오랜 만에 쌍팔 년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백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 놓았다.




날 더러 쓰라기에 두 눈이 번쩍 뜨이기는 하나
분에 넘치는 돈이라, 돈이 돈 같아 보이지 않더라.
그의 말로는 “40여년 전 부산에서 ‘한마당’할 때 준 삼 천원을 갚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 말을 하며 작품을 준적도 있지만, 난 오래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 때는 라면도 마음대로 끓여 먹을 돈이 없었다고 했다.
모처럼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물끄러미 쳐다보는 개가 눈에 밟혔다는 것이다.
그 어려울 때 쌀을 살 수 있는 삼천 원이 너무 고마웠던 것 같았다.
아픈 시절이지만, 그 시절이 그리운 듯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단다.
처음 서울 올라 와 그림 둘 곳이 없어 박광호씨 셋방에다 맡겨두었는데.
‘집에 불이나 작품이 다 타버렸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그래서 초기의 그림이 하나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도 스폰서 나타나기만 기다린 일이 하나 있었다.
몇 달 전 안경을 잃어버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빌려 쓰고 다니니,
세상 모든 게 흐리게 보였다.
더구나 밤에 운전하다 위험한 고비를 많이 넘겨, 염체 없지만 챙겨 넣었다. 


 

김명성씨가 이차를 가자며 데려 간 곳은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였다.
모처럼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박성식씨도 만났다.
와인에 젖는 기분 좋은 늦가을의 밤이었다.




울가 덕에 다음날 다초점 렌즈를 장착한 30만 원짜리 안경을 맞추었더니 세상이 거울처럼 밝아졌다.
밀린 과태료도 내고 어려운 동지도 도와주며 고맙게 잘 썼다.



언젠가 갚아야 할텐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인천부두에 라이타돌 실은 배 들어오는 날 말이다
그 배만 오면 백배로 갚아 줄 텐데, 기별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이 급변하고 있다.



인사동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지역인데다 인근 익선동 일대가 최근 '뉴트로(새로움+복고·Newtro)'

유행에 의한 유동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대형호텔 체인점들이 눈독 들이는 지역이다.




기존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에 이어 파르나스호텔의 체인점인 '나인트리 프리미어호텔 인사동'이 문을 열었고,

뒤이어 ‘목시 서울 인사동’도 개업을 서두르고 있다. 각 호텔들은 20~30대 국내 고객을 집중 공략한다는 방침이다.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은 밀레니얼(1980~2000년대 초반 출생자) 세대를 겨냥한

셀렉트(비즈니스) 브랜드 '목시'의 첫 국내 지점인 '목시 서울 인사동'을 오는 30일 문을 연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인도네시아와 일본에 이어 3번째라고 한다.




'목시 서울 인사동'은 지상 16층 규모로 스탠다드 객실 140개와 3개의 스위트룸으로 구성한다.

종로3가역 인근에 자리 잡아 인사동은 물론 창경궁과 익선동 관광까지 겨냥하고 있다.

타인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을 고려해 로비는 사교 공간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큰 테이블을 비치하고, 빠른 속도의 무선 인터넷과 많은 전기 콘센트를 제공한단다.




그리고 파르나스호텔은 지난 9일 자체 비즈니스호텔 브랜드인 나인트리의 3번째 지점 '나인트리 프리미어호텔 인사동'을 개관했다.

인사동 신규 복합몰인 '안녕인사동'의 5~14층에 301개의 객실과 올데이다이닝 레스토랑, 루프탑 바, 루프탑 가든, 미팅 룸 등을 구성했다.

‘안녕인사동’은 파르나스호텔의 모회사인 GS리테일과 엑티스, 이지스자산운용이 투자 및 운영하는 복합몰이다.




‘나인트리 프리미어 호텔 인사동’은 관광객 공략을 위해 객실과 라커룸 등을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객실의 경우 관광 목적으로 투숙하는 가족 단위 고객을 위한 패밀리룸을 전체(301개)의 20% 이상인 64개를 배정했다.

3인을 위한 트리플룸, 4인을 위한 쿼드룸 등 다인실 객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호텔 투숙 고객은 최대 12시간까지 170개의 셀프 라커룸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숙박료는 2인실 기준으로 15만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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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새 비즈니스호텔이 인사동에 경쟁적으로 들어선 것은 국내 호캉스 유행 덕이다.

포화상태인 '관광 1번지' 명동 혹은 '핫플레이스' 홍대입구 외에 강북권에서 새 기회를 찾던 호텔 체인이

익선동 일대의 유동인구 급증에 주목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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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대형 체인 호텔인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을 제외하면 ‘센터마크호텔’, ‘아벤트리’ 등

규모가 작은 소형호텔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틈새 기회를 찾았다는 분석이다.




실제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의 경우 외국관광객보다 국내 고객, 특히 20~30대 여성 고객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각 신규 호텔은 밀레니얼 세대 여성을 주요 공략 층으로 잡고 있다.




호텔관계자는 인사동은 관광객뿐 아니라 주요 기업들이 밀집한 종로 지역과 접근성이 높고,

20~30대 여성 유동인구가 많은 것이 강점"이라며 "동남아시아(35%)와 한국(20%) 고객을 주력 고객으로 설정했고

가족 단위 고객과 함께 여성 레저 고객을 적극 공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9일, 옛 민정당사 자리에 문을 연 복합몰 ‘안녕인사동’은 마치 호텔을 위한 부대시설 같았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인사동 문화를 반영하는 업소나 시설은 없었다.

이제 인사동은 인사동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이름만 남게 된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나이프갤러리' 한정욱관장 인터뷰]


"칼 전시한다니 처음엔 `조폭 무기고` 의심, `이태원살인` 진범 가려주자 경찰 태도바꿔.."


사진설명칼의 매력에 빠졌던 보이스카우트 소년은 세월이 흘러 전통 도검을 만드는 칼 전문가가 됐다.

서울 인사동 나이프갤러리에서 한정욱 관장이 자신이 직접 만든 환두대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승환 기자]



"한국 전통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 있나?"

한정욱 나이프갤러리 관장(66)이 일본인 친구에게 받은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칼을 수집하며 지식을 쌓아 왔지만 모래에서 쇠를 얻는 `사철 제련` 방식으로 칼을 만드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관장은 그때부터 역사 자료를 공부하며 전국 각지 사철 광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면 자신이 전통 문화를 복원하겠다는 의지였다. 보이스카우트에서 처음 만났던 칼은 한 관장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가 됐다.

국내 최초로 도검 전시장을 연 인물. 전통 제련 기술을 복원해 칼을 만드는 인물. `이태원 살인사건` 해결에 기여한 도검 전문가.

모두 한 관장을 설명하는 단어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나이프갤러리를 찾아가 한 관장을 만났다.

칼에 대한 얘기를 쏟아내던 그는 자신이 사라진 뒤에는 사철 제련 방식의 명맥이 끊어질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칼에 빠지게 됐나.

▷중학생 때였다. 보이스카우트에 들어갔더니 제복을 입을 땐 군용 대검 하나를 차고 다니는 걸 용인해 줬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 미국 M1 대검을 샀다. 당시 1000원 정도였다. 1960년대 초반이라 물자가 흔한 세상은 아니었지만 전쟁 직후라 그런지 칼은 많이 있었다. 그때부터 칼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도검 박물관이라는 게, 의심스러운 시선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처음에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조폭 무기고 같다는 말도 들었다. 신청서가 두어 번 반려됐는데 이후 새로운 분이 담당 과장으로 왔다. 성매매와 전쟁을 치르며 `청량리588` 없앴던 김강자 총경이었다. 그분이 그냥 반려하지 말고 직접 둘러보고 확인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하더라. 찾아온 경찰에게 인사동 문화거리에서 도검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봐달라고 했다. 그 뒤에 허가가 났다.

―그래도 경찰에서는 여전히 껄끄러운 시선을 보냈을 것 같다.

▷불법무기 판매 혐의로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검찰에서 몇 시간씩 조사를 받다 보니 자살하는 사람 심정도 이해가 가더라. 경찰 과학수사대(CSI)가 생겼는데, 여기서 자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그때부터 관계가 많이 나아졌다.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흉기가 있으면 사진과 실물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유통 경로나 제작자를 물어봤다. 상처를 보고 살의를 갖고 찔렀는지, 그냥 찔렀는지 이런 것도 물어본다.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을 잡는 데에 기여했다고 하던데.

▷그게 결정적이었다. 재수사를 맡은 검찰에서 경찰에 연락해 자상 전문가를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나를 추천했다고 하더라. 검찰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불법무기 판매로 조사받던 그 방이었다. 아직도 조사할 게 남았느냐고 했더니 도움받을 일이 있다며 2시간만 내달라고 하더라.(웃음) 당시 용의자가 두 명이었는데, 진술서를 각각 검토하고 의견을 달라고 했다. 진술서가 누구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한쪽에는 여섯 개를 붙이고 한쪽에는 아무것도 안 붙였다. 자상을 보니 평소 칼을 다뤄본 사람의 소행이었다. 이런 걸 이야기하고 직접 실연해 줬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법정에 가서도 세 번이나 실연했다. 그렇게 실연하는데 먼발치에서 학생 어머니 모습이 보이더라. 얼마나 힘드셨겠나.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피의자가 확정됐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겠다.

▷증인 출석 때였는데, 우발적인 범행인지 의도적인 살해인지 질문을 받았다. 다른 곳을 먼저 찔러 쓰러뜨린 다음 작심하고 목을 찔렀다는 의견을 냈다. 그 용의자(패터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건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이프갤러리는 어떤 사람이 찾나.

▷다섯 살 난 친구부터 여든 노인까지 찾아온다. 디자인과 다니는 대학생도 오고, 만화가도 온다. 단순해 보이는 칼도 디자인이 수천 가지가 된다. 네이버에서 웹툰 `칼부림`을 연재하는 고일권 작가도 1년에 1~2회씩 방문한다.

―기억에 남는 손님도 많을 듯하다.

▷조그마한 칼을 수집하던 손님이 있었다. 이분이 1개당 단가가 100만원 정도 하는 걸 100개가량 모았는데, 암으로 돌아가셨다. 부인에게 이 칼을 나이프갤러리에 가서 상담받고 처분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더라. 그렇게 주인이 죽으면 칼이 다시 갤러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참 묘해진다.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며 돈과 관계없이 내림굿에 쓸 정말 좋은 칼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사람도 있고, 칼을 불당에 놓고 싶다며 찾아온 스님도 있었다.

―원래 칼과 관련된 일을 했는지.

▷아니다. 대학 때만 해도 교육학을 전공했다. 처음 꿈은 교사였다. 교생 실습도 나갔다. 그러다 집안이 어려워졌고 직종 불문하고 취직을 했다. 당시 OB오리콤에서 마케팅을 하고 금강기획에서 국장까지 재직했다. 문화일보에서도 부국장으로 1년 있었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아침 7시 30분 전에 경기 양주에 있는 공방에 도착한다. 대장장이 일이 쉽지 않다. 하루에 한 4시간 하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 일을 하고 나면 젓가락질이 제대로 안 된다. 손가락이 꺾이지 않는다. 여름엔 더운 게 문제다. 더운 날 불을 제대로 때면 실내 온도가 52도까지 올라간다. 오전 내내 작업을 하고 오후 2시쯤 나이프갤러리로 와 손님맞이를 한다. 




―칼을 만드는 사람은 종종 있다. 그런데 자연에서 원재료를 구해 칼을 만드는 사람은 처음 들어봤다.

▷나이프갤러리를 열자 일본과 미국 친구들이 놀러왔다. 일본 친구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전통 방식으로 칼을 만드는지 물어보더라.

미국 친구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한국이 5000년 역사를 가졌다고 하는데, 무기 문화는 누가 이어받았느냐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냥 철판 잘라 만든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에 전통 방식으로 칼 만드는 사람은 10명 정도 된다.

그런데 도검 원료인 철이 없어 강철판을 많이 쓴다.

―양산되는 철을 쓰면 안 되나.

▷철은 넓은 범위다. 칼을 만들 때 쓰는 건 강철이다. 사철을 가지고 녹이는 것을 제련, 철광석을 갖고 만드는 건 제철이라고 한다.

제철소는 철광석을 가져와 녹인 뒤 쇳물을 뽑는다. 사철을 통해서 나온 쇠와 철광석을 갖고 만드는 쇠가 다르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칠지도는 사철이다. 전통 방식은 사철을 써야 한다.

―모래에서 철을 뽑으면 칼을 만들 정도로 쇠가 만들어지나.

▷순도가 뛰어나지 않다. 그냥 만들면 시커먼 칼이 나온다. 쇠를 자르고 접어 안에 들어 있는 불순물을 뺀다.

이 과정을 반복해 강철을 만든다. 단접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백제시대부터 있던 기술이다.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이 기술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 기술이 다 사라졌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

▷4년 정도는 쇠를 만드는 게 잘 안 됐다. 많이 실패했다. 사철을 녹이려면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숯을 피워야 한다.

거기에 바람을 넣어야 하는데 잘 녹지 않는다. 조건을 맞춘 실험실이 아닌 야외 흙바닥에서 하다 보니 잘 안 됐다.

그때 돈도 많이 까먹었다.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다.

▷제련작업이란 게 사람 뜻대로 잘 안 된다. 귀신이나 부처님에게 기도를 많이 한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자연에 도와달라는 의미다.

제련을 1년에 1~2회 한다. 작업 들어가기에 앞서 북어와 막걸리를 놓고 제를 지낸다.

절을 할 때 부모님에게 1배 반, 돌아가신 분께 2배 반, 부처님께 3배 반을 한다.

제련에 앞서 하늘에 절을 드릴 때는 4배 반을 한다. 이런 절차는 꼭 지킨다.

―전통 기술 복원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해오셨는데, 국가에서도 지원이 나오지 않나.

▷2015년에 중요문화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전승 활동이 미비했다는 이유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걸 중요하게 평가하는데, 아버지나 스승에게 전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다.

사실 전승이 안 되고 끊어진 걸 복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인데 그걸 모른다. 사철을 캐는 방법을 아는 학자는 있다.

그런데 사철을 얻어 제련을 해본 사람은 없다.

호주 철광석을 가지고 와서 만든 은장도를 우리 칼로 볼 수 있나.

정부는 재료에 대한 원천기술을 보존하는 데는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평생 망치질을 하기는 힘들지 않은지, 후계자에 대한 생각은.

▷망치질은 75세까지만 할 예정이다.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이 나와서 이런 문화를 유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고, 지원도 없다. 내가 75세가 되면 사철 제련 명맥이 다시 끊기는 것이다. 후계를 구할 생각도 없다. 포기했다는 게 정확하다.

지금 다섯 명이서 공방과 나이프갤러리를 운영한다. 월세와 인건비만 생각해도 칼 팔아서 2500만원이 남아야 한다. 너무 힘들다.

체계적으로 제련 문화가 이어지려면 대학에서 후계자를 길러내는 방법밖에 없을 듯하다.

▶▶한정욱 관장은… 

1954년 서울시에서 태어났다. 경복중과 경복고를 거쳐 성균관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중학생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면서 칼에 흥미를 느꼈다.

1981년부터 전통 방식으로 채굴과 제련 작업을 시작해 칼 제작에 뛰어들었다.

오리콤 금강기획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2001년 수집한 칼과 액세서리 1000여 점을 가지고 국내 최초 나이프갤러리를 개관했다.

2016년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을 가려내는 데 일조하며 이름을 알렸다.


[스크랩] ⓒ 매일경제 & mk.co.kr,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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