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이야기


시 : 황인철 / 사진 : 조문호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 
사랑하는 가슴 하나만으로는 다 품고 오지 못할 
하늘과 그림이 있고 
시가 있고 
산문에 피는 꽃향기가 있다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떠돌다 
비밀이 되어 
인사동에 가면 
너를 생각하게 되고 너를 생각하면 
여기저기 골목마다 들려오는 
묵향 그윽한 노래가 된다 
인사동은 비밀을 감추지 않아 
스스로가 비밀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차 한잔 나누면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도시는 진화(進化)한다.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도시가 진화할 수 있도록, 전략을 바르게 세우고 정책의 물꼬를 잘 터주어야 한다.
인사동도 자연스럽게 진화해야 한다.
상업주의에 물든 난개발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언제까지나 현상 유지만 고집할 수는 없다.
이제 진지하게 방향을 생각할 때가 왔다.

인사동이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략이 필요할 것인가.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워’, 인사동에 그리도 많이 모여드는가.

나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그리워, 인사동에 온다고 생각한다.
인사동의 작은 골목길에는 세월이 퇴적되어 있다.
그리고,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이끼처럼 덮혀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나지막하고, 정겹고, 따스하다.
마치 시골 누이와도 같다.

인터넷 세상도 결국은 사람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사는 세상의 작은 ‘이야기’가 그리워, 사람들은 인사동을 찾아온다.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해법은 스스로 분명해진다.

인사동 거리는 점차 잊혀가고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정겹게 들려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진화의 방향이다.
점차 잊혀져가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곳? 바로, 박물관이 그런 곳이다.
나는 인사동에 작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믿는다.

방법은 있다.
서울시가 매년 시예산으로 백여평의 땅을 사고, 기업에서 작고 이쁜 박물관을 지어주면 된다.
일단 땅이 있고, 건물이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기업에서도 흔연히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한 복판인 인사동에 작고 이쁜 박물관이 지어지면, 기쁜 마음으로 평생모은 소중품을 내어놓을 소장자들은 많다.
그 분들은 평생을 다해서 한 분야의 물건들을 모아왔지만, 교통이 좋은 곳에 박물관을 지을 돈들은 대부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 사실을 항상 안타까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면 열 개의 박물관들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맑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이 들려올 것이다.
서울시는 예산을 생산적으로 쓰는 셈이 된다.
그 땅이 서울시의 소유이기 때문에 시유지를 사두는 셈이 되고, 건물과 소장품도 덤으로 생기니 손해볼 것이 없다.
우리 옛 지도 박물관, 한지 박물관, 국악 박물관…

외국 관광객들이 오면 인사동에서 우리 문화의 빛깔과 아름다움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난초가 멀리까지 그 향(香)을 전하듯이,열 개의 박물관은 인사동 전체의 품격(品格)을 만들어 가는 추진축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천년의 화두는, 어쩌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일 것이다.
1조 5천억불의 자본이 투기 자본화하여 빛의 속도로 지구를 휘감고 도는 이 미친 ‘돈 황제’의 세상에,

인사동에 작고 이쁜 박물관 열 개를 만드는 것.
이것이 나는 국가와 서울시 정부가 추진해야 할 ‘문화전략’이라고 믿는다.


글 / 이두엽(문화전략연구소장·주식회사 문화전략21 부사장)



몇 일전 정영신씨로 부터 인사동 사진집 출판에 대한 제안이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출판사 ’ZININZIN’ 김태진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는데,
김태진씨는 이광수교수 강의 때 한 두 차례 만난 적도 있지만,
정의당원인데다 페친 중의 한 분이라 관심 두고 지켜 본 분이다.




얼마 전 페북에 인사동 사진집을 년 말까지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을 밝힌 적은 있지만,

어떻게 절묘하게 출판 제안이 맞아 떨어졌는지 궁금했는데, 아마 이광수교수의 입김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지난 3일 오후6시경 정영신씨를 만나, 김태진씨와 약속했다는 인사동 ‘툇마루’로 갔다.
귀가 어두운데다 말이 어눌해 소통이 어려울 것 같아 정영신씨에게 모든 걸 위임한다고 했으나,

처음 상의하는 자리라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안경까지 깨져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진데, 자리만 지키는 로봇 신세였다.




안국역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벽치기 골목은 한적했고,
‘조금’ 앞에서는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이 기념사진 찍느라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인사동 박람회가 끝난 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아 청사초롱이 훤하게 불 밝혔는데,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김태진씨가 바로 옆에 지나가고 있었다.




‘툇마루’에서 된장비빔밥에다 막걸리와 빈대떡을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대화 내용을 대충 짐작만 할 뿐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꾸어다놓은 보리자루처럼 밥그릇만 비웠다.




 김태진씨와 오래전에 명함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라오는
‘인사동이야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고 했다.
아마 인사동 이야기 출판에 관한 전체적인 가닥은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진인진’은 그동안 고고학이나 미술사학 등 학술지출판이나 학술정보DB개발에 주력해 온 출판사지만,

이번에 사회문화 방향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작업 중인 책은 역학에 관한 만화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 만들 책이 인사동 사진집이라 한다.




시끄러운 식당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울 것 같아 찻집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김태진씨가 너무 맛있게 식사를 하셨다.
옆에 있는 사람이 군침이 돌 정도로 드셨는데, 큰 복 하나 타고난 것 같았다.
한 조각남은 빈대떡까지 싸 가지고 찻집 ‘수요일’로 자리를 옮겼다.




책 내용은 내가 먼저 정리할 일이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출판계약서를 전달 받는 등 가닥만 잡았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 위주로 책을 만들고 싶겠지만, 출판사는 팔리는 책으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여지 것 책을 만들 때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출판사에 위임해 왔다.
아무리 좋은 책도 독자가 외면하면 쓰레기에 불과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작가의 의향을 존중해 그런지 별 말씀이 없었다.
원고를 정리하는 중에 여러 가지 조언을 줄 것으로 여겨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삼개월 가까이 인사동 작업에만 주력해야 할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인사동 풍류를 어떻게 보존할 것이며, 인사동다운 환경이 지켜지도록 최선을 다 할 작정이다.
아무쪼록 인사동의 정체성이 정립될 수 있는 좋은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바라며, 내년 초에 선보이게 될 인사동 사진집을 기대하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1일 오후3시 무렵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화려한 궁중의상 한복 패션쇼가 펼쳐졌다.






'인사동 국제문화 박람회' 부대행사인 한복패션쇼는 우리나라 시대별 궁중의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인사동을 찾은 관광객들이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본 박람회 행사였다.

드라마에서나 보아 왔던 화려한 궁중의상을 만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뜻밖에 볼거리를 만난 외국관광객들은 “원더풀”을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인사동에서 궁중의상 패션쇼가 처음 열린 것은 아니지만, 인사동 박람회 중 가장 돋보이는 행사였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 주관으로 열린 '인사동 국제문화 박람회'는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5일 동안 인사동 전역에서 열렸다.

첫 날 '비빔밥 행사'를 시작으로 열린 전통음식 축제', 도예 및 전통 장식품 만들기 체험,

'취타대 퍼레이드', 인사동의 고미술과 현대미술로 이루어진 아트페어 등 다양하게 치러졌으나

홍보부족으로 박람회를 보기위해 찾아 온 관광객은 더 물었다.






박람회 기간동안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북인사마당에서 전통 장식품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열렸다.

전통도예와 장명루, 솟대, 장승, 노리개, 엽서, 한지, 연꽃 등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이 열렸으나, 관광객의 관심은 저조했다.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인사아트센터' 앞에서 열린 전통 차 음식 행사는 공짜라 그런지  인기를 끌었다.

향긋한 차 내음을 맡으며 다양한 전통음식을 시식 해 볼 수 좋은 기회였지만, 대기한 사람의 줄이 너무 길었다.

동자동에서 수시로 줄 세우는 것에 진절머리난 나로서는, 배가 고팠지만 포기해야 했다. 






이번 인사동 박람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의 작품을 ‘인사아트센터’전관에 집약시킨 특별전이다.

1층에 ‘인사동 고미술 아트페어’, 2층에 인사동 공예 아트페어, 3, 4층에 ’인사동 현대미술 아트페어‘, 5층에 ’인사동 국제문화전‘ 등

인사동 문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특별전이었으나, 홍보부족으로 관람객의 발길을 끌어 모우는 데는 실패했다. 



 


아프리카미술 전문가인 정해광씨를 ‘통큰 갤러리’ 부스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인사동 아트페어를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결국은 작가들의 협조와 전문가들의 자문아래 이루어진 치밀한 기획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사를 위한 행사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인사동의 정체성을 알리는 박람회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이제 인사동을 위해 다 같이 머리를 맞대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인사동에 흩어진 수많은 갤러리들의 특성화, 전문화가 요구되기도 하지만,

인사동 전 구역을 연결하는 인사동 갤러리 지도를 만들자.

좋은 전시를 소개하는 홍보물을 매주 발행하여 홍보안내소에 비치하는 것은 어떨까?

뭘 알아야 전시장을 찾을 것 아닌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것 같다.



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오가고,
관광객들이 사진들을 찍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뭔가 구멍 뚫린 듯 허전하다.




인사동, 인사동, 노래 부른 강민선생이 떠나서 일까?
인사동 터줏대감이 사라진 허전함 같았다.
날씨까지 비가 왔다 갔다 지랄 같았다.




인사동의 거리도 낯설고 사람들도 낯설다.
옛 시인이 한탄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가 아니라
“산천도 인걸도 모두 간 데 없네”가 되고 말았다.




세월 따라 인사동은 또 바뀔 것이고,
거리를 메우는 사람도 쉼없이 바뀔 것이다.
그게 필연이나 하나는 지켜야 한다.




인사동 정신과 풍류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한 원로시인 강민선생께서 지난 22일 오전 6시 55분 먼 길을 떠나셨다.
이제 천국에 잘 도착하여 사랑하는 이국자선생님도 만나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신봉승, 심우성선생 등 먼저 가신 친구들 만나
인사동 이야기들 하시느라 바쁠 것이다.




 선생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틀린 말이지 예?

 그 곳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는 차별의 세상도 아니고요.

설사 차별이 있다 해도 집사님 빽으로 지옥에 내치지는 않겠지요.

머지않아 선생님 좋아하시는 복분자술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가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눈물이 말랐네요.

고마웠다는 인사도. 먼저 떠나 섭섭하다는 원망도,

모두 바람에 날아 가 버렸습니다.


선생님! 사람 사는 게 바람처럼 이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요즘 부쩍 눈물이 자주 흐르는 걸 보니, 나도 늙었나봅니다.

후회가 더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인사동은 불 꺼진 등불입니다.

누가 선생님처럼 가슴 아파하며 골목골목을 찿겠습니까?

외로운 친구들과 사랑하는 제자들 불러내어 곰탕 건대기 건져놓고

소주 잔 부딪히는 그런 시간을 어찌 만나겠습니까?

또, 김승환선생과 방동규선생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인사동을 방황하던, 골목골목의 가게들이 생각납니다.

단골로 드나드셨던 나주곰탕을 비롯하여 귀천’, ‘인사동 사람들’, '여자만'

포도나무집’, ‘유목민어디를 가도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선생님의 시에 대한 지조를 사랑했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노래 인사동 아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주인 바뀐 황량한 인사동 골목 어디에선가 선생님의 시가 흘러나올 것이다.

선생님의 슬픈 인사동 노래가...


 

그동안 미친 망둥이처럼 날 뛰는 나를 보며 마음은 또 얼마나 졸였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더러운 세상, 어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선생님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전시 사진 들고 동오리 찾았을 때 일입니다.

그 날 선생님 내외분의 행복한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네요.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기어이 끌어 앉혔는데,

이국자 선생님께서 끓어주신 된장국은 콧등이 시리도록 맛있었습니다.

문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은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어쩌면 행복이란 것 자체가 슬픈 것일까요


 

 

그리고 천상병선생 20주기 맞았을 때 일입니다.

인사동 봄 소풍 잔치 때도 오직 선생님만 걱정에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구걸하여 만들어 준 그 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없지만, 그 따뜻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돌아 가실 때마다 선생님 뒷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아마 선생님은 속울음을 삼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못난 조문호가 큰 절 올립니다.


 

 강민 선생의 장례식은 지난22일부터 24일까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국제 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 한국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인장으로 열렸는데,

824일 오전 930분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도 열었다.

8241030분에 발인하여 용인, ‘양주 장충동산에 안장되었다.




 

지난 23일 오후 4시경 정영신씨와 분당 장례식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담배 피우던 김명성씨와 김상현, 김상윤, 전태수씨를 만났는데.

장례식장에는 정승재, 조준영, 서정란, 김가배, 이도연, 김이하, 정복수, 전활철, 노광래,

서정춘씨가 있었고 뒤늦게 구중서선생님도 오셨다.




- 강민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시-  


<이승의 간이역>

내 떠나야 할
인생의 간이역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꽃밭이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 난 강민 시인은 1962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 파도, 세월’,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펴냈다 공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도 있다.

전쟁과 분단, 독재로 이어진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삶의 애환과 고통스러운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시 동인지 현실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도 참여했다.

고인은 학원을 비롯해 주부생활편집국장, 금성출판사 상무이사 등 출판계에 몸담았고

많은 문인과 교류해 걸어 다니는 한국 문단사로 불렸다.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초복 날, 인사동에서 사진동지 정영신씨와 삼계탕 미팅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몸보신하는 날로, 인사동 ‘무교 삼계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유달리 이집 삼계탕만 찾는 것은 인사동의 오래된 맛집이기 때문이다.
맛은 변함없었지만, 작년에 비해 삼천원이나 올라 한 그릇에 만 오천원 했다.
분에 넘치는 밥 값을 물었지만, 너무 맛있어 살찌는 소리가 “뿌드득”하더라.





그런데, 식사하고 나오는 길에 인사동의 유서 깊은 회화나무를 만난 것이다.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볼거리 중 하나가 ‘이율곡 집터‘ 자리에 있는 이 회화나무 고목이다. 
비록 은행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400년을 지켜 온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다.
입구에는 흡연금지라는 큼직한 팻말이 있으나 인근 회사원들의 흡연 장소가 되어버렸는데,
회화나무가 담배연기에 절어 죽을 맛일 게다.





옛날에는 회화나무가 있는 이 곳을 독녀혈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녀혈은 과부가 많이 나온다는 말로 과부골이란 뜻이란다.
그런데 과부골에 율곡 같은 대학자가 살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탑산사’ 학암스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인데,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여인의 자궁을 상징하는 곳으로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따른다. 
큰 구멍을 막으려 나무를 심는데, 이 회화나무도 그래서 심은 것이다.
율곡도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





인사동에는 이율곡의 절골(인사동의 옛 이름)집터를 비롯하여 세도가 김좌근 집터도 있다.
민익두, 민영환, 박영효가 살았던 고가를 비롯하여,
책방이나 집필묵 가게, 표구점, 골동가게, 화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 인사동 본래의 예스러운 모습이다.






인사동하면 뺄 수 없는 사람으로는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가게 여기저기에 남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과 '귀천'의 시인 천상병, 작가 박이엽선생이 먼저 떠 오른다.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민화를 전통문화로 처음 드러내신 조자용 선생, 통인가게 김정환선생,
백자를 품위 있게 누리신 ‘아자방’의 시인 김상옥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도 기억할 수 있겠다.

 


 


이제 그러한 오래된 역사와 전통은 점점 묻혀가고,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싸구려 거리로 변해 가고 있다.
어쩌겠는가?
돈에 묻혀가는 세월이지만, 이렇게라도 추억할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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