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간다고 마시고 경자년 온다고 마신 연말 술로 몸이 말이 아니다.
동자동과 녹번동을 오가며 이부자리 감고 살았던 셈이다.
오래된 년식이라 몸이 삭아 철철하는데도, 겁 없이 마신 벌이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해가 바뀜에 따른 스스로의 자책이었다.
안 좋은 건 모조리 씹어 돌렸으니, 사람을 많이 잃었더라.
잘 못된 것을 고치고 싶은 말이었지만,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이다.
상대의 마음만 다친 것이 아니라, 내 마음도 다쳤다.
그래서 올해 다짐한 것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보는 습관이다.



지난 토요일에 나선 인사동 외출은 일주일 만이었다.
점등식 한 태화관 터의 ‘3,1독립선언광장’을 재확인할 일이 있어서다. 
나간 김에 인사동을 다시 살펴 볼 속샘도 있었다.

포기했던 인사동이지만, 부정적 시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보고 싶었다.
가는 세월을 누가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안국역 4번출구로 나가니, 한 젊은이가 큰 소리로 구걸했다.
“선생님! 천원만 주세요~. 누님! 천원만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주지 않았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고 너무 상습적인 냄새를 풍겨서다.
이젠 구걸을 해도 연기를 잘해야 얻어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많이 나와 거리는 활기찼으나, 골목은 한산했다.
‘인사마루‘의 신나는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다.




연세 듬직한 분이 드나 들었던 ‘통인가게’에 젊은이들 행열이 이어지는 걸 보니,

이 곳도 서서히 세대교체가 되는 것 같았다.




요즘은 인사동 나와도 전시장에 들리지 않으니 갈 곳이 없다.
반가운 인사동 사람을 만나거나, 전시장에서 작품 감상할 일이 아니라면 인사동이 무슨 소용이랴?




통기타나 마술로 행인들의 관심을 끄는 버스커도 다들 열심히 놀며 살아가더라.
태화관 터 골목어귀에 있는 헌책방이 그나마 옛날 인사동 냄새를 풍겼다.




지난 년 말  ‘3,1독립선언광장’ 점등식에 갔으나, 밤이라 자세히 보지 못해 다시 찾은 것이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비스듬한 광장 바닥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광장 바닥을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미끄러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광화문광장’으로 행선지를 바꾸려 ‘부산식당’있는 '인사동11길'로 접어드니,

한 동안 부푼 기대와 안타까움을 차례로 안겨 준 ‘아라아트’가 눈에 들어왔다.
김명성씨가 전관을 전시장으로 만들어 공 들인 건물인데, 결국 중국 자본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넓은 전시관에 ‘미래의 꿈, 게임에 담다’는 한 가지 전시만 열리고 있었다.
잠시 지난 날의 회한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인사동과 사연이 깊은 사진가 김수길씨 였다.




술 한 잔 하자며 유혹했건만, 그 날은 술이 무서웠다.
'광화문광장' 갈 일로 아쉽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사동을 돌아 다닌 두 시간 동안 아는 분이라고는 김수길씨 딱 한 사람 만난 것이다.




조계사 앞 길에서도 아는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나는 치매환자다.
이제부터 인사동의 오래된 추억은 물론, 악연도 잊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살아 생선 강민선생께서 주도하신 인사동 오찬 모임이 오랜만에 다시 열렸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부터 서서히 잊혀져갔는데,
강민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김승환, 방동규선생 등 다른 분마저 뵐 수 없었다.
언젠가 자리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서정란씨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이다.



조문호샘 올해 가기 전에 송년회 한 번 해요. 강민 선생님과 친분 있는 분들이랑요

그래서 "얼씨구나" 만들어진 자리가 지난 30일 정오에 뭉친 나주곰탕오찬모임이다.

인사동 툇마루일층의 나주곰탕은 강민선생 단골이기도 했지만,

탕 속에 고기가 푸짐해 술안주로 안성마춤인 밥집이다.


 


약속장소는 손님이 꽉 차, 다들 그 옆에 있는 찻집에 앉았는데,

방동규, 김승환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희연, 서정란, 이명옥,

이은정, 전태수씨 등 여러 분들이 자리 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보면 반갑고, 앉으면 빨고 싶은 분들이 아니던가?

강민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인가?

서정란씨 이야기가 오늘 점심은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산다는 것이다.

모임이 정해지고 생각지도 않은 전화를 받았는데, 강민선생 아드님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자주 만났던 분들께 인사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었다.

이건 분명 강민선생님께서 저승에서 아들에게 지령내린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기국서씨가 '나주곰탕'으로 급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가서 찻집으로 데려 왔는데, 차라도 한 잔 하며 여유롭게 즐기라는 계시였다.

다들 연말이라 모이는 곳이 많은 모양인데, 뒤늦게 이행자시인도 나타났다. 

뚜꺼비 같은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인증 샷만 찍고 도망치셨다.




 나주곰탕’에서 자리 비었다는 전갈에 다들 밥집으로 옮겼다.

소주 한 잔하며 탕 그릇에서 건져 놓은 수육을 보니,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생각났다.

술 안주로 건져놓은 수육을 매번 슬며시 내 접시로 옮겼는데, 마치 죽은 울 엄마 같았다.

불의에는 칼날처럼 매서웠던 강민선생님의 그 자상한 모습이 떠오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눈물이 탕 그릇에 떨어지는 거야 괜찮으나, 누가 볼까 쪽팔려 미치겠더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요량도 못한 채 취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밀정원으로 차 마시러 갔다.

, 까발리는 걸 좋아하는데, 다들 비밀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비밀정원에 가 있으니, 다른 곳에서 한 탕 뛰고 온 김명성씨가 나타났.

기국서씨는 술이 부족했던지, 보드카처럼 생긴 독주 한 병을 사 왔다.

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두 잔만 마셨는데, 그 술을 혼자 홀짝 홀짝 다 마셨다.


 

오늘은 빠질라고 작정하고 왔어요’라고 했던 귀엣말이 생각났다.

기상천외의 퍼포먼스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자리에서 일어 나 남녀가 약속이나 한 듯 갈라졌다.

방배추선생께서 기국서, 김명성씨등 꼬봉들을 거느리고 유목민을 습격한 것이다

가보니 송일봉씨가 입구에서 뭔가를 정탐하는 것 같았고,

안쪽에는 시인 정동용, 기타리스트 김광석, 발렌티노김도 보였다.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 찍을 일도 많은데, 방배추선생 구라 듣느라 퍼져버린 것이다.

방동규선생이 누구더냐?

백기완,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선생은조선의 주먹등 최고로 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노동판에 일하러 가고, 체육관에 다니며 체력 관리하는 분이다.

, 한마디로 선생님을 義人이라고 생각한다. 옳지 못한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태극기부대나 가셔야 할 분이 촛불집회마다 쫒아 다니신다.

얼마 전 김정헌씨 작품 보러 간 영종미술관에서 그림 보며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

엠블란스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뒤늦게 들었다.


 

그 날 하신 말씀도 놀랄 노자다.

여지 것 청년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노인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살아온 그 소설 같은 실화를 기국서씨 더러 극화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그 날 이야기만도 밤 샐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려야겠다.


 

기국서씨는 귀가 어두워 여기 저기 귀 기울이는 꼴을 보더니, 날 더러 탐색가라 했다.

내 귀에는 색을 탐하는 자로 들렸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두 번째 툇마루에서 열릴 인사모시간이 늦어버렸다.

정동용씨 더러 있으라 해놓고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달려갔는데,

가서 된장비빔밥에 술말아 또 한 잔 걸친 것이다.

반가운 분들과 노닥거리니, 시간은 잘도 갔다.


 

작별 인사하기가 무섭게 유목민으로 달려가니, 이미 술꾼이 바뀌었더라.

방동규선생을 비롯한 잔당은 물론 정동용, 발렌티노김, 김광석씨도 다 사라져버렸다.

새로 등장한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사진하는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다.

금주 한지가 두 달이 넘었다는 이정환씨는 소주잔에 음료수를 따라 마셨다.

그 술 좋아하는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살아남기 힘든 것이다.


 

그나저나 긴장이 풀려 그런지, 술이 슬슬 올랐다.

쪽방 계단 오를 일이 겁나 줄행랑쳤는데, 인사동 밤거리는 축축했다.

어떤 미친 할매라도 납치되고 싶었다.



쇼윈도를 올려다보니, 처녀귀신이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았다.

네 이놈! 아직 정신 못 차리고 탐색하냐?

강민선생께 일러바쳐, 저승 오면 곤장이 백대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사진






































지난 28일은 인사동 가는 길을 소녀상이 있는 일본대사관 방향으로 잡았다.
나올 때 치를 떨며 보았던 위안부 사진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녀상을 지키는 학생도 천막 안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사진은 위안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길 때, 주변을 보지 못하도록 트럭에 장막을 쳤다.
잠시 멈춘 트럭 주변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서성거리는 여성은, 일본놈 완장인 것 같았고,
트럭 안에서는 한 여인이 뭔가 적은 쪽지를 전달하고 싶어 안달했는데,
그 안타까운 마음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이런 걸 보고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놈들은 사람새끼가 아니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하니,
소녀상 철거가 아니라, 일본대사관을 철거해야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북인사 마당으로 옮기니, 인사동 상징 조형물이 좆처럼 서 있었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다른 때보다 사람도 적은데다 거리도 낯설었다.
큰 길가의 상점도 바뀐 곳이 많지만, 골목 안 술집 간판도 많이 달라졌다.
그중 아쉬운 건, 추억이 오롯이 남은 ‘인사동 사람들’이 곰탕집으로 바뀌었더라.




가게가 바뀌고 술집이 바뀌는 건, 주인이 바뀌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인사동 풍류가 사라지고, 사람들 마음이 바뀌는 게 더 서글펐다.
온 종일 거리를 헤매었으나,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가고 싶은 찻집이나 술집도 없었다. 마치 무인도에 홀로 선 것처럼...




밤에는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백상사우나’에 들어갔다.
예전에는 백상사우나에 가도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탕 안에서 가만히 생각하니, 헛 웃음만 나왔다.
대관절 무엇을 찾는 것인가? 누굴 기다린단 말인가?




실연한 사람처럼 밤거리를 휘적거리다, 지하철을 탔다.
마침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형 뭐해? 저녁이나 같이 먹지” 김명성씨 전화였다.
인사동에서 녹번동으로 발길을 옮겼드니, 조해인씨와 김광만씨도 있었다.




중국집에서 유산슬 요리시켜 고량주 한 잔 했다.
독립운동사를 훤히 꿰고 있는 김광만씨와 김명성씨가 뭉쳐
큰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날 우연히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복동 할머니의 편지도 읽었다.
또박 또박 써 내려간 피눈물 나는 사연에 가슴이 미어졌다.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어디 인사동뿐이더냐?
아! 졸라 슬픈 하루였다.




30일 정오에는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방배추선생과 기국서씨를 만나고,
그 뒤 인사동을 돌아다니다, 저녁 여섯시에는 '툇마루'에서 ‘통인’ 인사모 팀과 술 마시고,
일곱시가 넘으면 ‘유목민’에서 놀다, 인사동을 마무리하련다.




온 종일 인사동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만 찍을 작정이니,
시간 있으신 인사동 사람들은 모두 나와 함께 추억합시다.
약장사 말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인사동 마무리를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년 말이 다가오니 사방팔방 술 마실 일 뿐이다.
문제는 몸이 받쳐주지 못하니 탈이다.




지난 19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망년회가 있었다.
연극연출가 기국서씨 시상식에서 뒤풀이도 마다하고 달려갔더니‘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시인 조준영씨, 화가 김 구, 장경호, 전강호, 조경석씨,
미술평론가 유근오, 최석태씨, 연극배우 이명희씨, 연출가 강경석씨
사진가 정영신씨, 중문학자 임계제씨 문화기획가 서인형씨,
안쪽에는 불화가 이인섭씨와 사진가 이유홍씨도 있었다
그 외에도 안원규, 전활철, 김대웅, 노광래씨 등 많은 분을 만났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분도 많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났으니, 기분 좋아 술이 술술 넘어갔다.
기분 좋게 즐긴 건 좋았으나, 그 다음 날 죽어났다.
술자리에서 실수도 많이 한 것 같은데, 필름이 끊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자에 달라 붙은 김치조각이나, 튀어 나온 정영신씨 입을 보니 알만하다.


정영신사진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누군가 욕을 하는 모양이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으니 할 말도 없다.
차라리 술 마시다 뒈져 버렸으면 이런 낭패는 없을텐데...



정영신사진


주머니를 뒤져보니, 김구씨 전시 엽서가 한 장 나왔다.

내년 1월3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화인'에서 열린단다.

'갤러리 화인'은 옛날 '평화 만들기'자리에 있고,

개막식은 1월3일 오후5시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오늘은 '브레송'에서 사진인들 망년회라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술 마시다 죽는 건 주사인가? 아니면 순직인가?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연극연출가 기국서씨가 뒤늦게 상복이 터졌다.
얼마 전에는 문화훈장을 받아 축하연까지 가졌는데,
이번에는 ‘한국연출가협회’에서 주는 ‘2019 올해의 연출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지난 9월 공연한 ‘엔드게임’이 원로 연극인 지원작으로 결정되어
내년 2월부터 재 공연된다고 한다.




지난 19일 오후5시 무렵, 대학로 좋은공연 안내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시상식에 축하하러 갔더니, 기국서씨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영 느낌이 안 좋아요. 상을 계속 주는 걸 보니 연극 그만하라고 밀어내는 것 같아요”
별 말씀을... 밀어낸다고 밀릴 사람인가.
노장은 살아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거지요.




‘한국연출가협회’에서 매년 연말에 시상하는 ‘올해의 연출가상’은
그동안 많은 연출 작업을 통해 자기 세계를 구축해왔고, 당해 연도까지 두각을 나타내며

대한민국 연극발전에 공헌한 연출가에게 매년 시상하는 상이다.
올 해부터 '젊은 연출가상'이 새로 생겨 그 상은 이기쁨씨가 받았다.




수상자에게는 소정의 상금도 주어진다기에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는데, ㈜로드워크가 후원한단다.




‘올해의 연출가상’에 선정된 기국서씨는 1976년 ‘극단76’을 창단하면서
연출 작업을 시작한 이래,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치 않는 연극열정은
보여 많은 연출가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특히 올해 공연한 ‘엔드게임’은 관습에

안주하지 않으면서도 시대와 공명하는 기국서 연출의 일관된 연극관과 연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한결같은 청춘으로 쉼 없이 연극을

만들어내는 기국서 연출을 ‘올해의 연출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윤우영 이사장이 말했다.




축하연이 있다지만, 인사동의 망년회모임에 쫒겨 도망쳤더니, 전화가 빗발이다.

기국서씨는 상복이 터졌지만, 나는 년 말이라 술 복이 터졌다.


아무튼, ‘올해의 연출가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그루스랩(Grus Lab) 설치전경



연말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캐릭터 미니언즈를 주제로 한 전시가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안녕인사동’ 지하 1층에 위치한 인사 센트럴 뮤지엄에서 내년 3월 15일까지 열린다.

국내 최초 미니언즈를 주제로 진행되는 <미니언즈 특별전>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은 애니메이션 '슈퍼배드'

시리즈와 '미니언즈 (Minions)'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콘텐츠 – 아트웍, 영상, 인터랙티브 멀티미디어, 체험,

굿즈 등을 한자리에 모은 글로벌 공식 투어 전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비스트킹덤, 지엔씨미디어가 약 800평 규모 전시장에 펼쳐져

미국 인기 캐릭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미니언즈 특별전' 전경.


'전시장은 '극장과 갤러리'를 시작으로, '악당 그루의 실험실'과 '걸즈룸' '미니언즈 연대기' 등 테마별로 섹션이 나뉘어 구성된다.

'극장과 갤러리'에서는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아트워크과 인터뷰 영상 등이 전시된다.

'악당 그루의 실험실'에는 대형 그루스 카(자동차)가 관람객을 몰입시킨다.

그루의 무기를 만들어보는 게임 외에도 각종 소품이 마련돼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4대 악당 캐릭터인 스칼렛 오버킬, 벡터 퍼킨스, 엘 마초, 발타자르 브랫은 실물 크기로 화려한 무대와 함께 꾸며져 있다.

'걸즈룸'은 귀여운 소녀 아그네스가 제일 좋아하는 대형 유니콘으로 장식했다.

핑크빛 색감과 아늑한 연출로 관람객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장소다.


 '걸즈룸'

또한 최고의 악당을 찾아 떠나는 미니언즈의 모험 일대기가 펼쳐지는 전시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상들이 재생된다. 미니언들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거나 함께 사진을 찍고 즐기면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바나나 볼 풀장'은 거의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큰 바나나 풍선과 더불어 수만 개의 하얀색, 노란색 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모든 연령대 관람객들이 함께 뛰어들어 놀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 백미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소통하는 인터랙티브 체험물이다.

관람객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디지털 기기 기반의 멀티미디어 게임과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그루의 방귀총을 쏘고, 브랫의 춤을 따라해볼 수 있다.


바나나볼 풀장

전시는 내년 3월 15일까지 열리고 관람료는 일반인(만 19세 이상) 1만5000원, 청소년(만 18세 이하) 1만3000원,

어린이(만 7~12세) 1만1000원이다.


나인트리 프리미어 호텔의 ‘미니언즈 특별전 패키지’를 이용하면 객실에서의 1박을 포함해 2인 조식뷔페 이용과

미니언즈 특별전 입장권 2매가 함께 제공된다.

‘미니언즈 특별전 패키지’는 12월 19일(목)까지 운영되며, 나인트리호텔 공식 웹사이트 또는 유선으로 예약 가능하다









지난 14일은 영문도 모른 채, 안성에 있는 변승훈씨 도예공방에 끌려갔다.
그 날은 여의도 집회 가는 토요일이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나?
일을 끝내고 여의도 갈 작정으로 일찍 출발했는데,
마포에서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우는 걸 보니 좀 불안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변승훈씨 공방이라면 한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를 알게 된지가 수십 년이 되었건만, 작업실은 커녕 그의 전람회조차 몇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도 ‘민예사랑’에서 초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스스로 전시장 금족령 내린 그간의 사정에 또 모른 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빚진 듯한 오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변승훈씨 전시를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일 처음 본 건 80년대 후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남다른 도예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번째 본 것은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민예사랑’의 ‘빙빙유람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영태씨 연락으로 갔는데, 변승훈씨가 전시하는 걸 모르고 간 것이다.



30여년 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놀랍게 변신해 있었다.

투박한 질감의 매혹적인 그릇에 마음을 뺏겼으나, 전시 후에 또 잊어버렸다.

변승훈씨 분청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는 여러차례 들었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다.

인사동 술자리에서 간혹 만나도 쓸데없는 술주정으로 시간 보냈다.



느닷없이 최석태씨와 변승훈씨 공방을 찾게 될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가서야 알았지만 작품집 제작에 필요한 사진찍을 일이 있단다.



일단, 작업실 주변에 늘려 있는 그의 도자 작품에 압도되었다.

변승훈씨의 작품 영역은 분청의 생활도자에 국한되지 않고, 회화적, 부조적 도자로 폭 넓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통 분청을 기반에 둔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분청세계를 개척했더라.

점심 때라 식당으로 안내되어 밥부터 먹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방황한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한 때 록그룹을 결성하는 등 음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계기로 홍익대에 진학하여 섬유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도중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85년부터 도예에 몰입했다고 한다. 

분청에 일가를 이룬 윤광조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다.



다시 공방에 돌아와 그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뒤늦게 듣게 된 많은 이야기와 작품집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난,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을 유달리 좋아한다.

분청하면, 분 바른 여인네가 술 한 잔 마신 듯한 불그레한 얼굴부터 연상되는데,

서민적인 인상을 주는 분청의 투박한 질감이 너무 정겨웠다.

한국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분청은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고있다.

우리네 정서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분청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숨소리를 듣는 듯 친근하다.



공방 입구에 자리 잡은 변승훈씨의 분청 항아리는 기존 형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 멋대로 생겼지만, 볼수록 정감 가는 작품이었다.



변승훈씨 작품 디테일에서 삼베같은 투박한 직조의 결을 느끼는 것은

섬유미술을 전공한 그만의 감성이요 감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형된 작품들이라 자칫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하나같이 자연스러웠다.

사진 찍을 때의 자연스럽다는 말에 앞서 모두 자연을 닮아 있었다.



분청사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분청자기에 머물지 않았다.

현대적인 형태의 기물제작에서부터 목탄 드로잉을 도자 부조로 표현한 벽화에 이르기 까지 폭 넓었다.

이미 분당 요한성당과 대화성당 등의 도자벽화에서 보여준 작업들은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분청사기의 평면화 작업에 일가를 이루었다.



작가의 실험적 도전정신도 돋보였다.

지금 작업 중인 작업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불상을 닮았다.



그리고 지금의 공방자리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자리라는데,

그곳에서 몇 백년 전의 분청사기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선조의 대를 잇는 필연의 업인지도 모른다.

그 게 분청에 전념한 계기라는데, 지금 사용하는 흙도 모두 그 터에서 나온 흙이란다.



변승훈씨는 술을 즐기는 애주가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일체 술을 마시지 않는단다.

그 날도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술을 마셨는데, 운전 때문에 나만 못 마시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체되어 여의도 가는 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비롯하여 

누님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다는 이야기 등 집안의 감추어진 이야기까지 들춰냈다.

청바지를 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눈치 챈 누님이 책갈피 속에 몰래 넣어 둔 5백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단다.



항시 돌이나 나무의 질감을 어루만져 그런지, 그 질감이 자연스럽게 옮겨 간단다.

작품에 드러난 질감도 그냥 생겨 난 것이 아니었다.




흙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스스로가 흙이라는 그의 말처럼, 아낌없이 작업에 불 태웠다.



술이 떨어져 다시 읍내 술집으로 옮겼는데,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음주면허라며 호기 부린 때가 엊거제 같은데, 뒤늦게 철든 셈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일어섰는데, 변승훈씨도 서울가겠다며 따라 붙었다.

공방 문단속도 하지 않고 불도 켜두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두 사내의 취중 잡담을 음악삼아 들어야 했다. 


"아이구~ 내 팔자가 와 이래 댓뿟노?"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화사집' 초판에 얽힌 이야기


▲ 표지 화사집 초판 표지
ⓒ 소명출판사



상상속의 동물인지 실존하는지 헛갈리는 희귀본이 있다. 김구 선생이 직접 서명해서 증정한 <백범일지>라든가, 1973년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월간문학사판 <농무>는 구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소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구경은 할 수 있다. 근대 서지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조차 존재한다는 것만 알뿐 그 실물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한탄한 책이 있다. 1941년 오장환 시인이 경영하던 <남만서고>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한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특제본이 그 주인공이다. 

미당 서정주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 국립중앙도서관이 <화사집> 특제본을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근대 서지 전문가들조차도 그제야 <화사집> 특제본이 있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특제본 <화사집>은 경매에 낙찰된 가격이 무려 1억 원이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제본이란 말 그대로 특별히 제작한 한정판이라는 의미인데 이 사전적인 설명만으로는 <화사집> 특제본의 귀함을 다 담지 못한다.

<화사집>과 시인 오장환

먼저 서정주의 <화사집>을 발행한 오장환 시인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다. 오장환 시인은 1937년 시집 <성벽>을 발표했으며 서정주, 이용익과 함께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고 심지어 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문인들이 친일성향을 보였지만 오장환 시인은 꿋꿋하게 지조를 지켰다.

서정주 시인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우정을 나눈 것이 <화사집>을 출간하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부락>은 1936년 당시까지만 해도 문단에서 그럴듯한 명성이나 경력이 없는 서정주가 주도를 해서 창간을 한 소박한 시 동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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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 또한 서정주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무명신인들로 김진수, 김달진, 오상원 등이었다. 부락이라는 명칭 또한 무슨 심오한 뜻이 아니고 그냥 여러 민가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뜻하는 그 부락이다. 시작이 미약했고 끝도 미약했으니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오장환은 미당이 친일활동을 한 이후로는 교류를 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인사도 하지 않으며 친일파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은 1946년이 되자 임화 등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8년 월북했다. 오장환 시인의 시는 강건하고 치열했지만 그의 일생은 짧았다. 많은 월북 작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사망시기와 사망원인이 분명치 않다. 늦어도 1953년경 결핵 또는 숙청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에 유학 생활을 하였었는데 이때 일본의 화려한 장정 책을 접하고 장차 본인도 아름다운 장정으로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서양 서적이 많이 유입되고 출판 산업이 발달한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오장환 시인은 주 책방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가죽을 비롯한 고급 재료로 장정을 하고 화려한 마감을 한 서양의 고서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보고 오장환 시인은 조선에 돌아간다면 한정판을 전문으로 만드는 단체를 만들어서 춘향전이나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고전이나 조선 현대 문인들의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오장환은 시인이면서 발행인이기도 하고 한정판 애호가였다.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가 이봉구의 기억에 의하면 오장환이 일본에서 귀국하고 나서 1938년에 차린 책방 '남만서방'는 시집, 문학, 역사, 철학책을 주로 취급했고 희귀본과 호화장정본이 가득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의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 물려받은 유산을 밑천으로 해서 서점을 열은 서점이다.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 시집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차린 것을 두고 세간의 사람들은 '일 년에 시집이 몇 권 출간되지 않는 나라에서 웬 시집 전문 서점이냐?'며 오장환 시인의 객기를 어지간히 걱정했다고 한다. 

서점 정면 벽에는 이상이 선물한 자화상이 걸려있었다. 1940년대 '남만서방'에 자주 드나들면서 벽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과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책들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느낀 십대 후반의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인환 시인이다. 

'남만서방'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은 보통의 그것처럼 근엄하고 멋있는 모습이 아니고 연필로 그렸는데 머리는 무성한 잡초처럼 보였고 수염은 면도를 하지 않아 갈대밭처럼 보였다니 소년 박인환은 적잖이 놀라기도 했을 터였다. 서점이름도 평범함을 거부하고 '남쪽 오랑캐'를 뜻하는 '남만'이지 않는가.  



          

오장환 시인이 유학하던 시절 도쿄에는 '남만서점'이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책을 펴내다가 판금을 당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오장환 시인이 서울에 서점을 차리면서 도쿄의 서점 상호를 따온 것이 아니겠냐는 설이 있다. 아쉽게도 서점은 문을 연 지 2년이 채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만다. 대신 남만서점의 고객이었던 박인환이 파고다 공원 근처에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열었고 그 이름처럼 외국 서점을 연상케 하는 서양 책들이 많이 진열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이유

다시 <화사집> 특제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장환 시인은 본인의 시집을 수수하고 평범한 장정으로 출간했지만 한때 동인으로 활동했고 절친했던 후배 미당의 <화사집>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으로 출간을 했다. 한마디로 미당의 시에 홀딱 반한 오장환 시인은 발표작도 얼마 되지 않은 미당에게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미당은 일지감치 오장환 시인에게 시집에 수록할 시를 넘겼지만 1941년에 와서야 출간이 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것은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결국 당시 남대문 약국의 주인이자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했던 김상준이 500원을 출연해서 간신히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화사집> 모두를 호화 장정판으로 출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과 한정판을 따로 제작했다.

한정판들은 가로 14.5cm, 세로 23cm인 데 비해서 보급판은 가로14.5cm, 세로21cm로 작은 크기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100부 한정판 시집'이라는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보급판도 하드커버였는데 몇 부나 발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정판이라고 해도 표지나 용지를 조금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제작하는 우리의 출판 관례와는 달리 <화사집> 한정판은 그 외관이 보급관과는 차원이 다르게 제작했다. 총 100부로 발행했으며 초판본 속지에 번호별로 용도가 아래처럼 기재돼 있었다. 
 

正壹百部限定印行中
第壹番에서 第拾五番까지 著者寄贈本
同拾六番에서 同五拾番까지는 特製本 
同五拾壹番에서 同九拾番까지 竝製本

同九拾壹番에서 第百番까지는 印行者寄贈本 
本書는 其中第 番 


정리하면 1번에서 15번까지는 저자 증정본, 16번에서 50번까지가 문제의 특제본, 51번에서 90번은 병제본(병제본의 의미가 분명치 않지만 대략 보급판 정도의 뜻으로 추측된다), 91번부터 100번까지는 발행인 증정본이라는 것이다. 번호별로 정확한 용도가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번호가 인쇄돼 있지 않은 책이 많았고 수기로 임의로 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화사집>은 오장환 시인이 장정을 책임졌고, 정지용 시인이 표지 제호를 썼으며 근원 수필로 유명한 김용준의 그림을 수록한 그야말로 당시 내로라하는 문인이 동원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특제본만은 내지를 태지(닥나무와 이끼를 섞어서 제작하는 한지)를 사용했고, 비단으로 책 등을 만들었으며 책등의 책 제목을 붉은 색 실로 수를 놓아 만들었다. 특제본은 한눈에 보기에도 증정본과 병제본과 확실히 구별되는 군계일학이었다. 저자와 발행인 증정본은 말 그대로 증정된 비매품이었다. 그러니까 35권의 특제본은 한정판의 한정판이었던 셈이다. 

보급판이 1원 80전, 병제본이 3원이었고 병제본보다 크기가 크고 장정이 화려한 특제본은 5원이었다. 특제본을 제외한 나머지 한정판들은 능화판 문양의 누런색 표지다. '모두 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병제본과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은 의미가 비슷해서 헛갈리는데 가격이 다르고 장정도 달랐다.

보급판은 두껍고 딱딱한 종이 위에 천을 덧씌운 하드 커버형태로 제작되었다. 보급판이지만 상당히 고급스럽게 제작되었다. 최근 경매에서 원저자와 발행인 증정본도 경매에서 5천만 원에 낙찰되었고 한정판과 한날한시에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된 보급판마저 1천만 원에 팔리기도 한다.

< 화사집>은 당시 문단의 큰 자랑거리였다. 김기림, 임화, 김광균을 비롯한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9명의 문인들이 명월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워낙 오장환 시인이 술을 좋아해서 나온 말일 수도 있는데 명월관 기생 치마폭에 붉은 실로 '花蛇集' 석 자를 수놓은 다음 특제본 표지로 삼았다고 한다. 자줏빛 실로 제목을 수놓은데 오장환 시인이 직접 수 놓은 집에 가서 한 권 한 권 제대로 하는지 참견했다고 한다. 



화사집 내지 그림 뱀이 사과를 물고 있는 아름다운 내지 그림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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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사집>출간 50주년이 되는 1991년에 도서출판 전원에서 명월관 기생 치마폭으로 표지를 삼은 <화사집> 특제본을 재발간하기 위해서 원본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서정주 시인의 기억에 의지해서 <화자집> 특제본의 복간본을 출간했다. 1941년판 특제본을 그대로 구현한 복각본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500부 한정판이었고 지금은 이 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나중의 일이지만 김광균 시인조차도 <화사집> 특제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세월이 흘러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7년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전20권 미당 서정주 전집을 발간했다. 물론 친일과 군사정권을 찬양한 글들은 포함하지 않은 전집이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화사집>은 한국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며 화사집을 읽고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찬사가 그리 틀리지 않는다. 읽을 때 마다 아름다움에 몸서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찬사도 수긍하게 된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말이다. 


 [스크랩] 오마이뉴스(시민기자)박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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