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은 영문도 모른 채, 안성에 있는 변승훈씨 도예공방에 끌려갔다.
그 날은 여의도 집회 가는 토요일이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나?
일을 끝내고 여의도 갈 작정으로 일찍 출발했는데,
마포에서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우는 걸 보니 좀 불안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변승훈씨 공방이라면 한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를 알게 된지가 수십 년이 되었건만, 작업실은 커녕 그의 전람회조차 몇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도 ‘민예사랑’에서 초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스스로 전시장 금족령 내린 그간의 사정에 또 모른 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빚진 듯한 오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변승훈씨 전시를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일 처음 본 건 80년대 후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남다른 도예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번째 본 것은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민예사랑’의 ‘빙빙유람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영태씨 연락으로 갔는데, 변승훈씨가 전시하는 걸 모르고 간 것이다.



30여년 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놀랍게 변신해 있었다.

투박한 질감의 매혹적인 그릇에 마음을 뺏겼으나, 전시 후에 또 잊어버렸다.

변승훈씨 분청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는 여러차례 들었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다.

인사동 술자리에서 간혹 만나도 쓸데없는 술주정으로 시간 보냈다.



느닷없이 최석태씨와 변승훈씨 공방을 찾게 될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가서야 알았지만 작품집 제작에 필요한 사진찍을 일이 있단다.



일단, 작업실 주변에 늘려 있는 그의 도자 작품에 압도되었다.

변승훈씨의 작품 영역은 분청의 생활도자에 국한되지 않고, 회화적, 부조적 도자로 폭 넓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통 분청을 기반에 둔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분청세계를 개척했더라.

점심 때라 식당으로 안내되어 밥부터 먹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방황한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한 때 록그룹을 결성하는 등 음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계기로 홍익대에 진학하여 섬유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도중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85년부터 도예에 몰입했다고 한다. 

분청에 일가를 이룬 윤광조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다.



다시 공방에 돌아와 그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뒤늦게 듣게 된 많은 이야기와 작품집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난,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을 유달리 좋아한다.

분청하면, 분 바른 여인네가 술 한 잔 마신 듯한 불그레한 얼굴부터 연상되는데,

서민적인 인상을 주는 분청의 투박한 질감이 너무 정겨웠다.

한국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분청은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고있다.

우리네 정서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분청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숨소리를 듣는 듯 친근하다.



공방 입구에 자리 잡은 변승훈씨의 분청 항아리는 기존 형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 멋대로 생겼지만, 볼수록 정감 가는 작품이었다.



변승훈씨 작품 디테일에서 삼베같은 투박한 직조의 결을 느끼는 것은

섬유미술을 전공한 그만의 감성이요 감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형된 작품들이라 자칫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하나같이 자연스러웠다.

사진 찍을 때의 자연스럽다는 말에 앞서 모두 자연을 닮아 있었다.



분청사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분청자기에 머물지 않았다.

현대적인 형태의 기물제작에서부터 목탄 드로잉을 도자 부조로 표현한 벽화에 이르기 까지 폭 넓었다.

이미 분당 요한성당과 대화성당 등의 도자벽화에서 보여준 작업들은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분청사기의 평면화 작업에 일가를 이루었다.



작가의 실험적 도전정신도 돋보였다.

지금 작업 중인 작업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불상을 닮았다.



그리고 지금의 공방자리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자리라는데,

그곳에서 몇 백년 전의 분청사기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선조의 대를 잇는 필연의 업인지도 모른다.

그 게 분청에 전념한 계기라는데, 지금 사용하는 흙도 모두 그 터에서 나온 흙이란다.



변승훈씨는 술을 즐기는 애주가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일체 술을 마시지 않는단다.

그 날도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술을 마셨는데, 운전 때문에 나만 못 마시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체되어 여의도 가는 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비롯하여 

누님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다는 이야기 등 집안의 감추어진 이야기까지 들춰냈다.

청바지를 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눈치 챈 누님이 책갈피 속에 몰래 넣어 둔 5백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단다.



항시 돌이나 나무의 질감을 어루만져 그런지, 그 질감이 자연스럽게 옮겨 간단다.

작품에 드러난 질감도 그냥 생겨 난 것이 아니었다.




흙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스스로가 흙이라는 그의 말처럼, 아낌없이 작업에 불 태웠다.



술이 떨어져 다시 읍내 술집으로 옮겼는데,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음주면허라며 호기 부린 때가 엊거제 같은데, 뒤늦게 철든 셈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일어섰는데, 변승훈씨도 서울가겠다며 따라 붙었다.

공방 문단속도 하지 않고 불도 켜두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두 사내의 취중 잡담을 음악삼아 들어야 했다. 


"아이구~ 내 팔자가 와 이래 댓뿟노?"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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