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가 무색한 날이었다.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에는 광화문광장 시위에 일장기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 손아귀에서 벗어 난지 75년이 지났건만,

친일 청산은 커녕, 오히려 일제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란 전시 제목이 실감났다.

 

다시 한 번 미치광이 전광훈 개독집단과 꼴통 보수 세력이 친일 잔재라는 걸 입증했다.

그 뿐이던가?  맞장구치며 부추기는 보수언론이 더 문제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씹는 보수언론 논리에 귀가 막혔다.

 

독재자 이승만의 일제 계승과 무고한 민중 학살을 몰라서 하는 말이던가?

그렇게 일제 치하가 그리우면 국적을 바꾸던지, 차라리 일본으로 이민가라.

언론이란 가면을 쓰고 국민을 이간질 시키는 무리부터 척결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위급한 때가 아닌가?

도저히 쪽방 구석에 처박혀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인사동으로 갔다.

시위를 끝내고 지하철로 몰려드는 늙은이들의 행렬이 측은해 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거리로 내 몰았을까? 역병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요즘 떠도는 유행어처럼 독립운동은 못해도 꼬장은 부리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원칙도 가치관도 없이, 젊은이들로 부터 지탄 받고 살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인사동의 모습은 변함없었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거리엔 발길만 분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거리 사진부터 찍었겠지만, 바로 술집을 찾아갔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유목민’ 앞에 연출가 기국서씨와 김명성씨 모습이 보였다.

김명성씨가 추진한 독립 자료전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개막식이 있던 날은 작업 때문에 밀양에 있었단다.

 

모처럼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기국서씨가 고충을 털어 놓았다.

아무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일에 답답해했다

결과에 돈이 걸려 있다는 대목에서는 미칠 것 같단다.

 

비록 기국서씨 혼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주변과 얽히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며, 돈에서 자유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작가의 재능이 뛰어나도 권력이나 돈에 치우치면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나 친일시인 서정주와 다를 게 무엇인가?

차라리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나을 것이다.

 

한 쪽 자리에는 ‘뮤아트’ 김상현씨가 후배 가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고,

유진오씨는 분주히 ‘유목민’ 일손을 돕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출연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인 이승철씨, 박재웅씨 일행에 이어 단청장 이인섭씨가 나타났다.

좀 있으니, 시인 정희성씨와 소설가 현기영, 산악인 박기성씨가 왔다.

 

이 우울한 날 어찌 술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때와 달리, 기국서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시국처럼, 술자리마저 흩어져 사분오열이었다.

‘유진커피숍’에서 팥빙수에 더운 속을 식히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꼭 찾아갈 곳이 있다.

바로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전이다.

그 전시를 보며, 독립을 위하여 몸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되새기자.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죽을 쑨다.

그 많던 관광객이 코로나 광풍에 휩쓸린지 오래다.

 

장사는 안 되어도, 친근한 오래전의 풍경은 되살아난다.

 

이제 물밀 듯 밀려오던 그 때의 호황은 꿈도 못 꾸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이미 점포 비운 가게들이 속출하고, 새 주인 기다리는 가게도 많다.

새로 들어 온 상인들은 기존 업종보다 다른 업종으로 바꾼다.

 

음식점에서 커피 집으로 바뀐 정도야 그게 그거지만

낙원상가와 가까운 인사동4길은 악기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아트프라자’의 대 변신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건물에,

인사동 문화에 애착을 가진 새로운 경영자가 들어왔다.

 

건물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든다고 한다.

이미 공예품매장으로 어수선 하던 1층이 갤러리로 바뀌어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백 여 평의 7개 층 전관에 한 달 동안 전시 한 건 없는 ‘아라아트’ 같이

파리 날리는 전시장이 더 많은 시절에 걱정은 되나 나름의 전략이 있단다.

 

오랫동안 임자 못 만난, 보물 없는 ‘보물창고’를 비롯한

인사동 큰 길가의 가게들이야 무슨 업종이 들어서던 명맥은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골목 안으로 한걸음만 들어가도 문 닫은 집이 속출한다.

 다시 채우려면 숱한 시일이 걸릴 것 같았다.

 

신통하게, 손님 몰리는 곳도 있다,

인사동 16길에서 벽치기 길로 이어지는 골목 술집들이다.

 

‘유목민’, ‘누룩’ 등의 몇몇 술집은 코로나 이전보다 손님이 많단다.

답답한 세상 술 잔에라도 풀지 않는다면 어찌 살겠는가?

 

앞으로 인사동에 어떤 업종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인사동 문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사동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 같다. 

 

희망사항에 불과하겠지만 인사동 미술시장이 더 활성화되고

전통문화와 예술가들의 풍류가 함께 어울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인사동만 젖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젖는다.

 

분주했던 수요일 거리치고는 한적했다.

 

찾아 간 전시는 어설픈 모방에 불과했다.

 

어차피 사는 자체가 모방이 아니던가?

 

비에 젖은 허탈감에 술 생각만 간절하다.

 

그런데, 그 많던 술벗들은 어디 갔는가?

 

전화를 버렸으니, 내가 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술 한 잔에 마음 달래려 해도 처량하게 궁상떨기는 더더욱 싫었다.

 

애잔하게 연주하는 ‘예스터데이’가 들려온다.

 

가사 후반부를 곱씹으니, 남의 말이 아니었다.

 

“Now I long for yesterday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now I need a place to hide a way

oh, I believe in yesterday“

 

“이젠 지난날이 자꾸만 그리워지네.

지난 날 사랑은 너무 쉬운 게임 같았어.

이제 난 어디든 숨을 곳이 필요해.

오! 그 때가 좋았었는데“

 

사진, 글 / 조문호

 

 

 

 

 

 

소설보다 더 기막힌 일이 많아, 이젠 소설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찰총장이 자신을 임명한 정권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지 않나,

대권에 뜻을 둔 유망 정치인들은 모조리 ‘미투’란 올가미에 걸려 잡혀 가거나,

목숨까지 잃는 별의 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다.

음모와 저주가 난무하는 드라마 같은 현실에 누가 소설을 읽겠는가?

 

느닷없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보를 접하며 한동안 멘붕 상태에 빠져 일손을 놓았다.

업 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마지막 희망으로 지지해 온 

정의당의 망자에 대한 부도덕한 처신도 마음을 뒤집었다.

조문하기 싫으면 안 가면 될 것이지, 왜 나팔을 불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잘난 채 하고 싶었을까?

 

시장으로 재임하기 전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할 때부터 존경해 온

박시장과의 첫 만남은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 시절이었다.

당시 ‘민예총’ 사무총장이었던 김용태씨 소개로 사진 5점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창녕군 장마면이 고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후배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친근감을 느꼈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한 호감에 금이 간 것은 2018년 여름 그가 동자동 쪽방 촌을 방문하면서다.

그 당시 쪽방 촌에 장관을 위시하여 여러 정치인들이 찾아 와

빈민들을 들러리로 정치 쇼를 벌이는 일이 잦아 심기가 불편했다.

더위에 지친 빈민들에게 수박화채를 나누어주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일이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대부분 기자들 사진촬영을 위해서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을 정치판 들러리로 내 세우지마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 나무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이번에 나팔 분 정의당 철부지가 한 말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일은 자신의 뜻이라기보다 보좌진들이 짜놓은 일정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사과드린다. 부디 용서하시고, 저승에서나마 못 다한 일 이루시길 바란다.

 

어저께는 동자동에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러나 신호에 걸려 출발하려니 갑자기 변속이 되질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 시동을 끈 후 다시 걸었는데, 이젠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빵빵 그리는 뒤차의 성화에 정신이 없었는데,

호출한 견인차마저 일이 많다며 늦게 출동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삼일 전에도 밤 늦게 정선에서 돌아오다 타이어가 터져 서울까지 견인해 오지 않았던가?

그 때 폐차해야 했는데, 당장 차 쓸 일이 많아 중고타이어 두 짝을 구입한 것이다.

이번엔 엔진을 들어 올리는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며 수리비만 40만원이 넘는단다.

노후경유차라 고장 나기 전에 폐차했더라면 백 오십만원이나 되는

서울시에서 주는 조기폐차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었다.

 

결국 애마를 폐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루 전에 구입한 타이어가 아까웠다.

좋은 타이어를 산 가격 그대로 준다던 주인 말이 생각나 다시 찾아간 것이다.

타이어 휠까지 끼워 줄 테니 산값의 반만 돌려 달랬으나 한사코 손사래 친다.

오히려 자기가 아는 곳에서 폐차시켜 줄 테니 차를 견인해 오란다.

아마 폐차장에서 주는 소개비가 탐나는 모양인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십여 년간 거래한 단골이지만, 돈 앞에서는 본색을 더러 냈다.

 

3년 전, 500만원에 사들여 끝 까지 운명을 같이 할 거라며 다짐했지만, 또 먼저 보내게 되었다.

장안평 중고차 장사꾼 말에 속아 탈 많은 고물차를 너무 비싸게 사, 수리비가 더 들어갔다.

이번 주말에는 울 엄마 제사도 있지만, 무덤 이장할 일로 정선 갈 일이 난감했다.

 

그동안 이십년 넘게 정선을 오갔지만,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은 없다.

정선에서 하루에 네 차례 다니는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귤암리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는 산길이라 차 없이는 힘든 곳이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구할까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데,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김명성씨와 김상현씨가 와 있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꼼짝하기 싫어 머뭇거렸는데, 정영신씨를 통해 독촉이 빗발쳤다.

 

도살장 끌려가듯 나갔더니, 그날 강찬모씨 딸 결혼식에 갔다 왔단다.

왜 나 한데는 연락하지 않았을까? 거지라 봐 주는지 모르겠으나,

아들 햇님이 결혼 때도 축의금을 보낸 터라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결혼식을 축하하며,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뮤아트’ 김상현씨가 반겼다.

이 친구도 병원에 입원해 수술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병문안을 가지 못했다.

요즘은 핸드폰을 멀리하며 사람 만나기를 기피하니, 사람 도리를 제대로 못한다.

사람 만나는 일은 커녕, 술 마시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지만, 이 날은 한 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술자리의 화제는 온통 비명에 떠난 박원순시장 이야기 뿐이었다.

김명성씨는 독립운동 자료전시 문제로 박시장이 만나자는 날짜를

문자 메시지로 보내 왔다는데, 갑작스런 비보에 난감해 했다.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딸로부터 원망을 듣고 나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마음 여린 분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다.

 

술 마시는 중에 최명철씨와 이인섭, 안완규 씨등 여러 명이 지나갔다.

너무 과음한 탓인지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눈물인냥, 비까지 하염없이 내렸다.

엎드려 있다 잠들기를 반복했는데, 김상현씨가 부른 노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란 슬픈 노래 소리가 빗물에 흘러내렸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고) 임인식선생

임인식(林寅植)(1920~1998)선생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49년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했다.

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하기까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에 투입된 한국전쟁 최초의 종군기자다.

 

1959년 인사동 사진전문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예편 후에는 ‘대한사진통신사’도 설립했고,

해방 직후에는 용산 삼각지 부근에서 ‘한미사진기’점을 운영했으며

1959년에는 인사동에서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개관하기도 했다는데,

사진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분이다.

 

1953년, 인사동 '청조다방' 앞에서 기념촬영

누구보다 기록을 중요시했던 임인식선생은 고향인 정주에서 포목점과 무역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부터 사진 활동을 했고, 1944년 서울로 이주했단다.

조선경비대 창설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등 정부 주요 행사를 비롯한

당시의 역사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1955년 인사동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에 사진대(隊)가 긴급 편성되었는데,

당시 중위였던 임인식선생께서 사진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참혹한 전쟁 발발부터 정전회담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주요 국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다.

 

1953년 폭격을 맞은 서울 재동국민학교 앞에서..

그의 임무는 사진대를 이끌고 군이 주둔하는 도시마다 사진관을 접수한 뒤,

필름을 현상해 국내외 언론사를 통해 전황을 전하는 일이었다.

‘밀리터리 포토(Military Photo)’ 명패를 단 지프를 타고 일선에 투입되었는데,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부근에서 촬영한

손이 뒤로 묶여 학살된 미군 사진은 미국 전역을 분노로 뒤집히게 했다.

 

1950년 서울, 소실된 보신각

1950년 8월 경북 월성에서 촬영한 안강·포항전투에 투입되는

교복 입은 학도병들의 출병 사진은 학도병 모습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꼽힌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하던 순간에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순간에도,

정전회담의 순간에도, 항상 그가 있었다.

 

1953년 청계천 범람으로 침수된 종로

19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그는 한국의 ‘매그넘’을 목표로

국내 최초의 사진전문 통신사인 ‘대한사진통신사’를 설립하였으며,

정부 행사를 포함한 삶의 현장을 촬영해 정부 및 해외 언론에 제공했다.

1953년부터는 육군본부에서 유엔 참전국에 배포한 영문판 사진화보집 ‘육군화보’

제작을 맡아 전쟁을 극복해나가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전하기도 했다.

 

1953년 종로의 전차행렬

사진에 대한 열정은 그로 끝나지 않고 아들 임정의씨와 손자 임준영씨로 이어졌는데,

두 살 위인 숙부 임석제(1918-1994)선생을 더한다면 4대째 사진을 이어 온 명문 사진집안인 셈이다.

아들인 임정의씨는 1973년 ‘코리아헤럴드’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나,

건축가 박수근씨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건축사진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손자 임준영씨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 AAU에서 광고사진을 공부하고,

뉴욕 SVA에서 디지털사진으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0년, 폐허가 된 서울시청 인근

임인식선생께서 5, 60년대 산업화 이전의 서울 풍경을 찍었다면,

임정의씨는 8, 90년대 급격하게 변모해 가는 서울을 촬영했다.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 그리고 디지털사진으로 이어진 사진 집안의 내력이다.

 

1955년, 종로

기록을 중요시하는 임인식선생의 빠짐없이 쓴 일기에는

당시의 카메라 시세를 알 수 있는 자료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39년에 일본제품인 럭키카메라를 27원에, 1940년 일본제 세미미놀타 카메라를 32원에,

1941년에 독일제 롤라이코드를 130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집 한 채 가격에 맞먹는다는 라이카3F를 구입해 애지중지했다고 기록되었단다.

 

1954년 서울뚝섬(지금의 건국대 부근) 채소밭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1959년 인사동에 국내 최초의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개관하였고,

한국사진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감사를 맡는 등,

우리나라 사진 문화와 사진 아카이브 개념 정립을 선도하였다는 점이다.

 

1956년, 서울 가희동 도로 포장공사

그러나 선생께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 난 후 은거하다 미국으로 이민하셨다.

1998년 건강에 이상이 생겨 귀국하여 서울에서 타계하셨다.

대개 대표적인 국내 종군사진기자로 임응식, 이경모, 이명동선생 등의 원로 분을 떠올리지만,

그 보다 사진대장이었던 임인식선생이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50년 국군 위문공연

벌써 한국전쟁 일어난지가 70년이 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되세겨본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1950년, 무기를 지고 가는 민간 부역자들
1951년, 1,4후퇴에서 청천강을 건너는 피난민
1950년, 맥아더 장군과 정일권 장군
1950년, 경북 안강, 학도병들이 전선으로 나가며..

종군기자로 참가한 영국 처칠의 아들 랜들프 처칠과 임인식 기자

 

 

전시 교체로 분주했던 인사동의 화요일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 광풍에 거리두기가 시작되며 생긴 썰렁한 풍경인데,

육 개월이나 끌어 온 전염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30일 들린 인사동은 '갤러리H' 전시 작가 등 몇 몇만 오갈 뿐,

작품 반입으로 분주했던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잡화상에 진열된 영혼 없는 작품만 손님을 기다렸다.

 

전염병으로 모든 사람이 고통 받지만, 예술가들 삶도 말이 아니다.

찾는 관객도 없지만, 작품 거래 자체가 되지 않는다.

전시장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나 건물주는 집세 챙기기에 바쁘다.

 

갤러리도 지탱하기 어려운 처지지만, 작가들도 손을 놓고 있다.

돈 벌이보다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여는 경우도 많은데,

찾는 사람이 없으니, 전시할 생각조차 않는다.

 

잘 나가는 작가야 살아남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전업해야 할 형편이다.

배운 도둑질이 그 뿐이라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할 것이다.

인사동 갤러리만 죽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도 다 죽는다.

 

작가들의 가난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작가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존심에 기초생활수급비도 마다했으나, 이제 생각을 바꾼 작가도 여럿 생겼다.

 

예술을 전공해도 전업 작가가 살아남기는 정말 힘들다.

그 중 어려운 분야가 문학과 연극 사진 등인데,

이제 예술 창작을 보상하는 구조적인 개선이 절실하다.

 

정부도 코로나 여파로 상인들 대책은 세우지만 예술가들 생계는 관심조차 없다.

정치판에 들어 간 도종환과 박양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예술가를 대표한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화를 위한 자리 같다.

 

이제는 월급쟁이가 제일 부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특혜 받는 국회의원 세비와 고위공직자 임금부터 줄여야 한다.

일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정치꾼은 모두 끌어내리자.

 

예술가는 왜 가난하게 살아야 하며, 가난한 예술가는 국민이 아니던가?

이제 작가들이 작업실에서 뛰쳐나와 화염병을 들 차례다.

 

사진, 글 /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전시한 박건씨

‘카메라 시인 상’ 받아 본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 봐라.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영예로운 상을 운이 좋아 받게 된 것이다.

 

지난달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인사동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로

‘인사동 그 정처 없는 발길’이란 글과 사진을 포스팅 했는데,

그 글을 본 작가 박건씨가 ‘카메라 시인상’이란 과분한 상을 준 것이다.

 

당시 박 건씨는 ‘나무아트’에서 ‘자가격리 F4’ 전시를 열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카메라 시인 상’ 작품을 만들어 찾아가라는 거다.

그러나 상을 받는 게 쪽팔려, 차일피일하다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페북 댓글에 올라온 ‘나무아트’ 김진하관장의 찾아가라는 독촉을 받아서야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한 달이나 지나버렸다.

그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상 받으러 간 25일은 인사동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쌈지 앞 담장에는 양반 꽃이라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슬픈 전설이 담긴 능소화 아래는

소녀들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무화랑’에 올라 가 김진하관장으로부터 상을 전해 받았는데,

마치 아파트 한 동을 통째로 받는 기분이었다.

내 평생 이런 영광스런 상은 처음 받아 보았다.

 

아파트 칸칸에다 상을 주게 된 행적을 적었는데,

마치 유적지에 세워 둔 공덕비 비문처럼 느껴졌다.

한 쪽에는 마스크를 쓴 신사임당 지폐에 재난기본소득이라며

작가의 서명까지 해 두었다.

 

그 돈도 작품의 일부지만, 뜻하는 바가 컸다.

돈이지만 사용할 수 없는 영원한 돈인 것이다.

이제 죽을 때까지 비상금은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 상 자체를 우습게 여겼는데,

이 상은 개인이 주는 순수한 상인데다, 상 자체가 작품이 아닌가.

볼 때마다 각오를 다지며 두고두고 기념해야겠다.

 

이런 게 제대로 된 상이다.

다른 상은 다 버려도, 이 상은 죽을 때 같이 화장할 거다.

다시 한 번 상을 준 박 건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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