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에는 인사동 거리에서 제법 긴 시간을 맴돌았다.

봐야 할 전시도 두 곳인데다 길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서로 만나기로 한 시간조차 달랐다.

 

인사동 사진은 거리를 지나치며 찍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지만,

이번에는 한 시간 넘게 거리를 방황했더니 다리가 아팠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라도 둘러 보았으면 좋으련만

정영신씨와 같이 보기로 해 먼저 볼 수도 없었다.

 

거리는 구정을 앞둔 주말이라 평소에 비해 많은 사람이 오갔다.

더러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는 모습에서 명절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반가운 풍경은 행인들이 거리에 내놓은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아무리 작가의 영혼이 빠진 그림이지만, 가격이 너무 쌌다.

이 삼만원 대가 주류고 비싼 게 오 만원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져 나왔는지 모르나 물감을 이겨 그린 그림도 있어,

인건비는 차지하고 재료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나무아트’에서 김진하관장이 나오고 있었다.

박건씨의 ‘나는 산다’전에 가자기에 사람 만나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한 사진가 최인기씨가 드디어 나타났다.

조그만 양반이 도르르 굴러오듯 바쁘게 걸어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빙그레 웃는 동안에 마음까지 포근해 졌다.

 

그를 만나기로 한 건, 며칠 전 경남 함안장에서 연락 받았다.

‘눈빛출판사’에서 노량진구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집을 만드는데,

서문 좀 쓰 달라는 원고청탁이었다.

 

그는 사진가이기에 앞서 노동운동가다.

가끔 현장에서 만나 지켜본 바로는 성실하고 겸손한데다 투쟁력 또한 치열했다.

좋아하는 후배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 바쁜 시간이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명절선물이라며 보리굴비까지 들고 왔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받은 선물도 다른 분 줄 정도로 선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굴비는 정영신씨가 좋아하는 생선이라 점수 따기 딱 좋았다.

 

마침 정오 무렵이라 ‘툇마루’에 밥 먹으러 갔다.

술 마시러 간 것이 아닌데도, 쥔장의 도토리묵 서비스까지 받았다.

맛있게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고, ‘귀천’ 목영선씨의 모과차도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사진 자료 담긴 유에스비를 건네받고 헤어졌다.

 

그도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나 또한 정영신씨를 만날 시간이 되어서다.

지하철 역 방향으로 마중가니, 총총걸음으로 정동지가 나타났다,

바쁜 분 만나려니, 이 몸까지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루의 ‘아지트갤러리’로 갔더니, 눈에 익은 작품들이 줄줄이 걸렸더라.

전시 개막 직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가 최경태씨 그림에 마음이 아팠는데,

작가 박 건씨와 김진하씨가 나타났다.

 

박건씨의 공산품 아트를 비롯하여 김주호, 김환영, 류연복, 박불똥, 박영숙,

성병희, 안창홍, 이윤엽, 이현정, 이하, 정영신, 정보경, 정복수, 정정엽, 하일지 씨 등

내 노라 하는 분들의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었다.

 

박건씨의 혜안으로 모운 작품이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 기분 좋은 건 작가의 권위를 지키려는 거품은 모두 빼버렸다,

작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이치에 대한 도전장에 다름 아니었다.

 

다음에 들려야 할 전시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었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지 35년 만에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자음을 윷놀이 하듯 화면에 던져놓았는데, 문자와 디자인이 결합한 독창적 언어였다.

작가로부터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인사동에서의 일정은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동자동에서 일해야 하고, 그 다음 날은 경북 상주장에 가야했다.

무슨 놈의 일이 한꺼번에 몰려 똥오줌 못 가릴 지경이다.

 

서울역 홈리스 원고는 탈고한지 오래지만, 노숙인 코로나 확진자가 100여명이나

나온 데다 동자동 쪽방 촌 공공 개발 소식에 추가 할 원고가 생겨서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아산시를 시작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전시를 기획했다며,

필요한 사진 자료를 수집해 보냈는데, 정말 난감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한 사진도 있었는데,

필름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했던 사진도 수정 이미지를 못 찾아 재 수정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얼마나 마우스를 잡고 낑낑거렸으면 아직까지 어깨가 결린다.

오죽하면 오래된 필름 정리해 스캔 받아 두라는 정동지의 성화를 뭉갠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고려장 할 나이에 이처럼 일이 많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고, 욕이라면 욕이다.

 

그토록 바삐 쫓겨 다녔으니 최인기씨 원고 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2월 중순까지 요구한 글이라 추석연휴에 쓰려고 밀쳐두었으나,

원고료 부담에다 자료 담긴 유에스비 조차 열어보지 못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믐 날 제사음식 준비 하는 중에 최인기씨로 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어렵게 전화한 듯, 정중하게 원고 청탁을 거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앓던 이 빠진 것 시원해 받은 원고료를 즉각 돌려보냈는데,

거절한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더 좋은 필자를 구했거나, 다른 이유라면 모르겠으나,

20여일 전 '인사동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말하고 싶다'전 포스팅에

“언제까지 미투로 생사람 잡을거냐?“는 글을 본 모양이다.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미투였다.

 

고질적인 성희롱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미투 운동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진짜 미투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폐단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부산의 이광수교수가 여러 차례 페북에서 지적한 바 있는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가들이 페미니즘에 집착하는 폐단이 떠올랐다.

그 문제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걸 여태 보지 않았던가?

 

개안적 견해에 불과한 미투의 문제점 제기에 안면까지 몰수할 정도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로 흐르는 세태가 안타까운 실정에, 페미니즘 문제까지 부채질 한다.

 

메주알고주알 까발리다 보니 말이 엄청 길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사동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 ‘말하고 싶다’전이 막 내리는 날이었다.

겨울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인사동 거리는 번개의 노래 소리만 처량하게 울려퍼졌다.

 

작품을 발송하러 전시장에 갔더니, 박 건씨 혼자 지키고 있었다.

코로나로 꽁꽁 얼어붙은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많이 팔린 이변은

박 건씨의 참신한 기획과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대개 전시가 끝나는 날은 다음 전시를 위해 일찍 철수하지만, 그 날은 늦게까지 진행되었다.

 

박건씨 도움을 받아 포장하고 있는데, 반갑게도 안성의 류연복 작가가 나타났다.

류연복씨는 3년 전 충무로에서 열린 ‘사람이다’전시에도 찾아와

이번에 네 점이나 팔린 '부랑자' 10번 중 1번을 소장해 준 분이 아니던가?

 

좀 있으니, 광주에서 귀한 손님들이 몰려 오셨다.

먼 걸음 해주신 것도 고마운데, 4층까지 무거운 막걸리를 한 상자나 들고 오셨더라.

전시 작가 주홍씨와 함께 오신 분은 5,18 역전의 용사라고 소개하셨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가두 방송을 맡았던 차명숙선생은 꽃다운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정열여사와 놀부지부장으로 통하는 김순흥교수도 함께 오셨다.

뒤 따라 전시 작가 고경일씨와 김진하 관장도 등장했다.

 

그런데, 김순흥교수께서 쓰고 있는 안경은 알이 하나 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이야 멋으로 안경테만 쓰고 다니기도 하지만,

연세 지긋한 분이라 의외였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한 쪽 눈은 이상이 없으니, 안경알 하나라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날 광주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왔다는 막걸리가 보통 막걸리가 아니었다.

막걸리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맛이 귀가 막혔다.

막걸리 뿐 아니라 곰삭은 홍어와 묵은지 김치까지 챙겨 오셨는데,

둘이 먹다 한 놈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었다.

 

하필이면 이날따라 차를 끌고 와, 술은 맛만 보아야 했다.

지지리도 술 복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손님이 남아 계셨지만,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주차비 아끼려고 인사동 골목에다 차를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포장 마무리도 하지 못한 채 빠져 나와야 했다.

 

그날 광주전시도 거론된 것 같은데,

불 붙은 김에 한 판 더 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말하기 싫을 때 까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은 ‘말하고 싶다’ 전시 지키러 인사동 가는 날이었다.

집 나오며 페북에서 본 미투 소식에 억장이 무너졌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공공장소에서 무슨 성추행을 한단 말인가?

어 다르고 아 다를 수 있으나, 한 식구로서 친밀감에 비롯된 언행이 아니겠는가?

 

양심적인 박원순 시장 죽음에도 쌍심지를 켜더니, 또 일을 쳤구나.

 갈아 치워야 할 적폐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메갈이 도대체 뭐길래 그것만 물고 늘어지는가?

그런 몰인정한 인간들이 정치판에 득실거리니, 어찌 정치가 개판이 아니겠는가?

 

인사동 거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으나 내 눈에는 잿빛으로 보였다.

버스킹 나온 번개는 때 이른 ‘봄비’를 청승스럽게 부르고 있었고.

또한 젊은이의 ‘베사메무쵸’ 연주가 어찌 그리 애잔하게 들리는지 콧잔등이 시리더라.

내 평생 '베사메 뮤쵸' 선율에 슬퍼한 적이 있었던가?

 

‘나무아트’에 올라가니 김진하관장이 먼저 와 있었다.

노트북을 챙겨왔으나 도저히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박재동씨 만평 작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시중인 박재동씨와 하일지씨도 가짜 미투에 곤욕을 치룬 적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억한 심정으로 돌을 던졌는지 모르지만,

돌 맞은 자는 아직까지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궁지로 몰아넣어야 성이 차겠는가?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적 감정으로 상대를 미투로 매장시키는 짓을 밥먹듯이 하는데,

더 열 받는 것은 좋을 땐 죽자 살자 자빠지다 다른 목적으로 뒷다리 거는거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문제 삼아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장 시키는 무서운 무기로 성을 이용한다. 

그 사랑 놀음을 남자만 좋아하는 것이더냐?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일손을 놓고 있었으나, 관람객은 띄엄띄엄 들어 왔다.

작품들을 돌아보다 이하씨의 “두환이를 살려내라“ 앞에서는 하나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루'에서 전시 중이라는 안병남씨는 박건씨의 작품을 관심있게 살펴보더니,

작가를 한 번 만나고 싶다고도 했다. 

 

사진가 양시영씨와 박윤호씨는 전시장을 두 차례나 들렸다.

고맙게도 양시영씨가 내 사진을 사겠다며 돈을 주었으나, 반갑지도 않더라.

 

다섯 시 무렵, 김진하관장이 들어옴에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 나왔다.

'유목민’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도 했지만, 도저히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골목 어귀에 접어드니, 멀찌감치 사진가 김수길씨와 ‘샘터’ 이종원 편집장 모습이 보였다.

김수길씨야 가끔 만나지만, 이종원씨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술집에는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최석태, 장경호씨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뒤이어 최민화, 임경일, 박윤호, 최원규, 이인섭씨 등 많은 분들이 들어 왔다.

 

다들 얼마 만이냐? 마치 코로나 시절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더구나 최민화씨는 같은 동네 후암동 살지만, 몇 년만에 만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전활철씨가 김기덕감독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라트비아에서 화장한 유골을 가져와 몇 몇 지인들이 조촐하게 장례를 치루었단다.

그 역시 미투에 매장되어 외국을 떠돌다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국위를 선양한 그의 예술성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짓밟아야 했는가?

 

술을 제법 마셨지만, 취하지도 않았다.

이런 기분이면 사고치기 딱 좋은 상황이라, 아쉽지만 먼저 빠져나왔다.

 

이제 고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

여자 보기 무서버 어느 놈이 기집 가까이 가겠나?

이러다 인간 멸종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말하고 싶다’전이 이제 종반에 접어들고 있다.

요즘은 인사동 전시도 대폭 줄었지만, 갤러리를 찾는 관객조차 뜸한 코로나 정국이 아닌가?

그러나 이 전시는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며 많은 작품이 팔리는 이변을 보이고 있다.

물론 참여 작가 열일곱 명의 역량과 작품 내용에 따른 관심이겠으나

아무리 좋은 전시라도 홍보에 따라 관객 수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

 

 공산품아트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박 건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전시다.

혼자 전시장을 지켜가며 작품 판매에 올인 하고 있다.

물론 김진하관장도 틈틈이 도와주지만, 신들린 듯 전시에 몰두한다.

안 팔리기로 소문난 내 사진이 세 점이나 팔렸다니, 다른 작품이야 말할 것도 없다.

 

불황에 맞서 작품 가격을 파격적으로 책정한 것도 한 몫 했으나,

오로지 박 건씨 노력에 따른 결과다. 화가가 화상으로 전업할까 걱정된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매일 매일의 경과를 페북에 올리고 있는데,

어찌 배짱 편하게 방구석에서 뭉갤 수 있겠는가?

 

정 동지 옆구리를 찔러 인사동 나가 밥이라도 한 끼 사라고 했다.

출품 사진도 정동지가 프린트했지만, 사진 판 돈도 정동지가 챙기니

밥도 그가 사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지난 1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툇마루’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추가로 프린트한 사진 때문에 ‘나무아트’부터 들렸다.

전시장에는 박 건씨를 비롯하여 관객 두 명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작품 판매로 연결되진 않았으나,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여지 것 판매보다 보여 주는 전시에 그쳤으나 이 전시는 달랐다.

다들 작품 가격을 살펴보며 지갑 사정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서둘러 ‘툇마루‘에 갔더니, 정영신씨와 김진하관장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된장비빔밥에다 막걸리와 녹두전 등 음식도 푸짐하게 시켰더라.

 

그런데, 요즘 김진하 관장이 틈틈이 산에 오르더니 몸 짱이 되었단다.

몸도 몸이지만, 산사진에 더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이제 화가와 미술평론가에서 사진가란 이름도 더하게 되었다.

누구나 산에 오르면 사진이야 찍지만, 그가 보는 산은 달랐다.

별거 아닌 풍경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았다.

덕분에 요즘 김관장이 페북에 올려주는 산 사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안주는 남았으나 술이 모자랐는데, 낮술에 맛이 갈까 더 시켜주지 않았다.

'툇마루'는 갈 때마다 서비스 안주가 나와 하나만 시켜도 될 텐데,

음식이 남아돌아 이 것 저 것 싸오는 주접을 떨게 만들었다.

좌우지간 원님 덕에 나팔 한번 잘 불었다.

 

그 날은 날씨가 포근해 그런지 인사동에 사람이 제법 나왔더라.

이 처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사동은 길거리만 돌아 다녀도 많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일층 쇼 케이스마다 전시하는 대표작이 걸렸기 때문이다.

 

전시장으로 올라 와 ‘나무다방’ 미쓰터 김이 타주는 다방커피를 마시며

최백호의 노래처럼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허전함도 느꼈다.

 

한국조폐공사에서 인사동 지점을 냈는지, 박건씨는 전시장에서 지폐를 그렸다.

돈이 박 건 작가의 손을 거치게 되면 지폐 단위가 배로 올라간다.

작가의 말로는 아주 정교한 판화이며 공산품이라는 것이다.

천 원권 지폐에 새겨진 퇴계선생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고 거기다 서명을 하면,

돈에 앞서 한 해의 액운을 물리치는 부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정영신씨는 십 만원하는 신사임당 지폐는 엄두를 못 내고

만 원 내고 다섯 장을 사 갔는데, 어찌 작가의 품값에 미치겠는가?

그나저나 전시장을 매일 지키는 박 건씨가 안쓰러워 못 보겠다.

환갑이 지난 처지에 보름동안 전시장을 지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단체전이라 하루에 한사람씩 나누어 지키면 좋으련만, 괜찮단다.

 

하기야! 그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흥행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번 주말이면 관심 있는 분은 대충 다녀갈 것 같아

월요일은 내가 전시장을 지키기로 했다.

 

월요일에 인사동 나올 걸음 있는 분은 ‘나무아트’로 구경 오세요.

전시장 문 닫는 오후6시 무렵에 ‘유목민’에서 술 한 잔 합시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이 인사동 같지 않다.

그 많은 인파는 오간데 없고, 북한 거리처럼 적막강산이다.

전시장이나 가게들은 겨울철이라 날릴 파리조차 없다.

빈 점포에 임대 쪽지 붙은 곳이 도처에 늘렸다.

 

전염병이 끝나면 본래의 인사동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마 많은 것들이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갤러리들은 밀린 임대료에 버텨내지 못하고,

팔리는 작품조차 없으니 작가인들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코로나에 주눅 들어 인사동 출입을 자제하지만,

요즘은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이다.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말하고 싶다’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말하고 싶다’가 드디어 말했다.

 

이 전시는 정치 풍자와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이야기.

현실의 아픔과 분노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인사동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좋은 작품을 싼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말하고 싶다’는 소통만이 아이라 유통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반출 없는 완판 전을 목표로 세웠기 때문이다.

이 불경기에 전시 닷새 만에 숱한 작품이 팔려나갔는데,

팔리지 않는 나의 홈리스 사진도 두 점이나 팔렸다.

 

전시작은 고경일, 김우성, 레오다브, 박건, 박순철, 박재동, 성완경,

아트만두, 이윤엽, 이하, 이태호, 이현정, 조문호, 주 홍, 정보경,

하일지, 홍성담씨 등 열 일곱 명의 야전 작가가 참가하고 있다.

 

인사동 활성화와 작가 생존을 위해 인사동에 전시 보러 가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는 아니다.

전시는 26일까지다.

 

사진, 글 / 조문호

 

위쪽 사진은 1월 13일 찍었고, 아래 사진은 12일 찍었다

지난 주말 정오 무렵,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동안 거리두기 핑계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뮤지션 김상현씨와 하양수씨 일행이 찾아 온 것이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설거지 하는 중이라 난처했다.

손님 대접할 음식이 없어 가래떡과 대마불사주로 한 해의 건강을 축원했다.

 

그 날 김상현씨로 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들었다.

청담동에 ‘뮤 아트2’를 열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이란다.

후배가 후원하는 업소라 임대료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김상현씨가 병마를 털고 일어난 지가 오래지 않았는데, 연이어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

 

김상현씨 일행이 일어난 후, 인사동 ‘유목민’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 주말 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왔으나, 일이 있어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즉 연락하지 못한 것은 집이 비좁아 한꺼번에 앉을 수도 없지만,

다섯 사람 이상 모이지 말라는 거리두기 지침에도 맞지 않은가?

 

전활철씨와 한 잔 하는데, 때 마침 조해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듯이, 자리 만든 김에 조해인씨를 초대했다.

손님이 사 온 떡과 케잌을 안주로 기분 좋게 마셨다.

 

그 날은 일찍 세상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씨와

땡초스님 최영해씨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떠난 친구 그리워하기 전에 살아 있는 친구라도 자주 만나야 할 텐데, 그게 잘 안된다.

이제 언제 떠날지 모르는 연식이라, 올 해는 친구 자주 만나는 해로 정했다.

"우리가 살면 언제까지 사나?"유행가 구절도 갱각난다.

 

코로나가 한 풀 꺾일 오는 5월 무렵, 인사동에서 심봉사 잔치 한 번 열기로 했다.

새해들어 시무주로 마신 대마불사주가 건강과 함께 깨우침을 준 것 같다. 

 

기대하시라! ‘인사동 기 살리기 잔치’를...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암울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으나 먹구름은 걷히지 않는다.

코로나는 변종까지 만들어 위협하고, 정치판도 개판 일분 전이다.

부자들이야 문 걸어 닫고 안전하게 지내면 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민초들은 목숨 걸고 먹이 찾아 나서야 한다.

 

몇일 전 노숙하는 김씨로 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끝장냈으면 좋겠다. 코로나는 사람 차별하지 않으니, 똑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세상을 원망했으면 이런 말을 하겠는가?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죽을 지경이다.

 

예술가들의 생계가 걸린 인사동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해가 바뀌면 좀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한치 앞이 안 보인다.

년 말과 정초에 찍은 사진을 비교해보니, 올 해는 더 한산했다.

년말에는 구세군 종소리라도 딸랑거렸으나, 정초에는 삭막했다.

 

-아래 사진부터 12,월 22일 촬영한 거리풍경-

코로나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며 개인주의로 몰아넣고 있다.

사람 만나기를 꺼리니, 인사동 뿐 아니라 어디나 한산하다.

이러한 생활이 장기화되면 모든 게 바뀔 수밖에 없다.

전화와 인터넷과 택배만 통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전시도 온라인으로 하는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젠 갤러리도 온라인 전시를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온라인에서 작품크기는 물론 거품 뺀 가격까지 투명하게 밝혀

살 사람을 갤러리로 끌어들이는 실리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갤러리가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떤 작품을 내놓느냐가 승부수다.

 

요즘은 다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 실내장식 업이 성행한다고 한다.

거실에 근사한 그림 한 점 걸고 싶고, 있는 그림도 바꾸고 싶지 않겠는가?

작가는 열심히 작업에 매진하고 갤러리는 판매에만 올인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

 

사진, 글 / 조문호

 

발길 끊긴 인사동, 날릴 파리도 없다.

 

화랑들은 건물주 눈치만 보고

작가들은 희멀건 하늘만 본다.

 

세말의 구세군 종소리조차 처량하다.

 

그 와중에 골목골목 포스터가 나붙었네.

나서는 자 제대로 된 작가 보지 못했다.

 

똥파리들 몰리니 똥은 많은 모양이다.

 

코로나야! 코로나야! 너는 누구 말만 듣니?

하나님이냐? 부처님이냐? 신령님이냐?

 

신도 손쓰지 못하는 걸 보니, 말세는 말세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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