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사마당 공영주차장이 있는 인사동11길로 들어서면

‘토포하우스’와 ‘관훈미술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아리수’. ‘갤러리 The K’, ‘아라아트’ 등 여러 전시장이 나온다.

 

그 골목에는 ‘부산식당’과 ‘메밀란’, ‘초당’ 등의 술집과 찻집도 있다.

‘초당’ 맞은편에 있는 담쟁이 건물은 오래전 아지트처럼 들락거린 곳이었다.

‘일광칼라’와 ‘꽃나라’ 흑백현상소가 있던 곳인데, 사우들이 자주 들려 어울리기 딱 좋았다.

 

‘꽃나라’현상소가 충무로로 옮기며 자연스레 발길이 끊겼는데,

그 뒤 ‘목인박물관’이 들어서며 전시 보러 간 기억들만 남았다.

한 동안 빈집으로 남아 궁금했는데, 엊그제 지나치다 보니

‘담쟁이집’이라는 간판을 단 찻집이 문을 열었더라.

 

담쟁이넝쿨이 뒤덮인 뒷 건물과 길가의 1층 전시장과 연결되어 공간이 넓었다.

옛 건물을 활용하여 꾸며 놓았는데, 몰랐던 옥상 공간도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공영주차장과 ‘아라아트’ 건물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오래된 기와지붕에 천막을 기와로 눌러놓았는데, 마치 판자촌을 보는 것 같았다.

눈에 자주 보이는 곳 같았으면 저렇게 둘까싶다.

 

전염병 때문에 장사가 되지않는데다 알려지지도 않았으니 손님이 많을리가 없다.

손님이 없어 그런지 주인도 종업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커피 한 잔 못 마시고 그냥 나왔지만, 걱정스러웠다.

이제 ‘담쟁이집’의 운명은 커피 맛이 결정할 것 같다.

 

그 맞은편에 있는 ‘아라아트’는 한 층이 100평이 넘는

9개 층 전관에 전시가 한 건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주차공간이래야 자동차 다섯 대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유료 주차 안내판을 붙여 놓았겠는가?

 

중국자본이 점유한 건물이라 쉽게 망하지는 않겠지만, 한 달 관리비만도 상당할 것이다.

때로는 초대전도 열고 때로는 대관료 활인도 해주며 좋은 전시를 계속 유치하여 끌어 모아야 하는데,

정해놓은 대관료만 고집하니 될 수가 있겠는가?

 

돈 좋아하는 중국 사람이라지만, 전략도 융통성도 없었다.

하기야! 버티기만 하면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지 내려가진 않을테니까...

인사동 문예부흥을 위해 세운 ‘아라아트’의 몰락에서 인사동의 현실을 본다.

 

사진, 글 / 조문호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지난 30일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겼다.

 

전시일정을 소개한 소식지 한 권 얻으러 갔더니, 비가 내렸다.

젖지 않을 정도라, 비를 맞으며 인사동 길을 걸었는데,

왜 비만 오면 술 생각부터 나는지 모르겠다.

비 소리조차 부슬부슬이 아니라 부술부술 내리는 것 같다.

 

마실 나온 젊은이들의 총총거리는 발걸음 속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눈길이 마주치자 “어~ 형!‘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한다.

마주친 고 헌은 한 때 가로등 찍는 사진가로 활동 했지만, 체질이 백수다.

지독한 애주가로 한 잔 들어가면 기타 연주하는 폼의 애드립 바로 들어간다.

 

형!이라고 부르고는 말을 못 잇는 간절함은 바로 술이다.

한 잔 하고 싶지만, 둘 다 개털이니 가자는 이야기를 못 꺼내는 것이다.

마트에서 소주 한 병 사서 한 컵씩 나누어 마시면 좋으련만,

차를 골목에 주차시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쉬운 듯 돌아서는 발길이 무거워 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버스킹 하는 우크라이나인의 비올라 소리가 감싼다.

열렬히 키스해 달라는 달콤한 멜로디가 장송곡처럼 들린다.

 

베사메 무초~

 

글, 사진 / 조문호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인사동,

전통의 거리인가. 예술의 거리인가.

 

오래 전에는 골동의 거리였고,

70년대부터 화랑가가 형성되었다.

 

전통과 예술이 어우러진 인사동도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었다.

 

노포는 문 닫고 새 가게가 들어섰다.

인사동 정취가 서서히 사라졌다.

 

골동가게가 화장품가게로 바뀌고

표구점이 옷가게로 바뀌었다.

 

술타령에 흥건했던 인사동 대폿집들,

예인들의 한숨이 시와 그림 되었다.

 

시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었다.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눈물이 되었다.

 

밀어닥친 역병은 마지막 풍류마저 앗아갔다.

폭우와 달리 물러 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작가들은 눈치 봐가며 작품을 내 건다.

전시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팔리기는 커녕 보는 이도 드물다.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거리는 안방에서 탈출한 사람으로 분주하다.

버스킹의 음율은 장송곡 같다.

 

신이시여! 이제 광란의 춤을 거두세요.

인사동에 봄바람 일게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길 아닌 길, 벽치기 길이 흐르는 세월따라 인사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나오면 ‘관훈주차장’과 ‘경찰 방범대’ 건물 사이로 개구멍 같은

샛길이 나 있는데, 주차장 땅 주인과 가게 주인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길이다.

최소한 50cm만 양보해도 장애인 휠체어 정도는 통과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 샛길을 통과하려면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확인하고 진입해야 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밤만 되면 취객들의 방뇨로 악취가 진동하는 지저분한 길이었다.

이젠 그 길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기다리고 선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종로구청’에서 적극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손을 놓고 있다.

어쩌면 길을 넓히는 일은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벽치기란 이름은 십여 년 전 인사동 술꾼들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다.

벽치기 하면 언뜻 성행위를 떠 올리지만,

샛길을 지나치는 행인들이 벽을 쳐 담을 허물어버리자는 뜻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허물어지기는 커녕 유명세까지 더해졌다

 

인사동에 대형건물이 여럿 들어서고, 점포는 물론 거리 풍경까지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그 벽치기 골목만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개구멍 같은 그 샛길에 위안받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흉물이 명물로 바뀐 것이다.

 

그 샛길은 인사동16길과 연결되는데, ‘유목민’을 비롯하여 ‘푸른별 이야기’,

‘누룩나무’, '홍어가 막걸리를 만났을때', ‘스토그’, '시골밥상', ‘산골물',

'우리선희', '사랑채', '다미’, '백화'등의 다양한 식당과 대폿집들이 있다.

찻집으로는 '유담'이 있고, 전시장은 ‘보고사’, 모텔은 ‘PEARL’이 자리 잡은 지름길이다.

 

왜 술꾼들을 외딴 골목의 꾀죄죄한 술집들을 좋아할까?

고향의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을 그곳에서 찾는 것은 아닐까?

 

인사동 주막에서 아련한 그리움을 술잔에 녹여보자.

 

사진,글 / 조문호

 

 

, 생일을 유달리 싫어한다.

나만을 위한 날이 부담스러워 어릴 적부터 생일은 어머니를 위한 날이라 우겼다.

정영신씨를 만나면서 피곤할 정도로 생일을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음력생일이 양력생일로 바뀌었고

미역국 먹는 일이 유일한 생일치레가 되어버렸다.

 

모르고 지나치기를 원하나, 페이스 북을 시작하며 더 큰 곤욕을 치룬다.

생일만 되면 페북에서 나팔을 불어대니, 잊어버리기는커녕

잘 모르는 페친까지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날려댄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생일을 맞는 것이 부담스럽다.

 

지난 생일은 수해 때문에 정선 만지산에 갇혀있었는데, 늦은 오후에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조찬 약속이 저녁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까지 합세하여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런데, 생일 지난 지가 일주일도 더 되었는데,.

지난 13일 정오 쯤 인사동 유목민에서 생일잔치를 갖는다는 기별을 보내왔다.

생일 핑계로 술 한 잔 하자는 전활철씨의 제안이라 안 갈 수도 없었다.

 

그 날은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김상현, 김수길, 유진오, 안원규, 정영신씨 등

여러 명이 모였는데, 백숙에다 장어까지 구워 음식이 푸짐했다.

김수길씨는 생일케익을 사왔고, 유진오씨는 초가을에 입을 티스쳐를 사왔다,

마침 날씨까지 쌀쌀해 선물을 그 자리에서 입을 수 있어 더 고마웠다.

모처럼 유목민에 모인 자리에서 엊그제 있었던 기가 막힌 뉴스를 풀어놓았다.

 

정영신씨의 전언에 의하면 지난 금요일 마약수사대에서 전화가 왔더라는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대마에 대한 글과 사진이 있다며 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짐작이 가는 누군가가 자기 요구에 씨알이 먹히지 않으니, 경찰서에 신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양아치보다 못한 인간과 긴 세월을 함께 한 것이 너무 분했다.

,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 정영신씨 전화 번호를 알으켜 준것도 그의 제보였다.

 

나야 대마합법화를 위해 발벗고 나선 입장이라 두려울 게 없으나

전화를 받은 정영신씨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경찰에서도 블로그를 꼼꼼히 살펴보아 나를 훤히 알더라고 한다.

동자동 쪽방에도 찾아왔다지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한 것이다.

 

직접 대면했더라면 교도소에 갈 지언 정, 개인 일기를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겁 먹은 정영신씨가 그들이 지적한 사진과 글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런데, 정영신씨가 블로그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바로 비밀번호를 바꾸어 버렸다.

 

법이 잘 못 되었지, 올린 내용이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애지중지 농사지은 걸 흔적도 없이 도둑질해 가는 놈이 없나,

자기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비정한 세상을 만드는

 모든 것들이 대마를 합법화하지 않아 생긴 일이다.

약초가 마약으로 둔갑되는 잘못된 법은 하루속히 고쳐져야 한다.

 

몇년 전에는 환경을 훼손한 엉터리 사진가를 탓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해 감방에서 벌금 대신 지낸 적도 있었다.

교도소 생활을 해보니, 쪽방에서 사는 것 보다는 훨씬 편하더라.

끼니 거정할 것도 없는데다 술과 담배를 할 수 없으니, 건강도 좋아졌다.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독방에 넣어주어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주변에 있는 지인들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을 것이다.

블로그에 올리는 직설적인 문제점 지적들은 친분관계를 따지지 않으니,

또 무슨 일이 터질까 항상 마음 조아리며 지낸단다.

 

그래서 생일 축하하는 건배사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 이제 사고 그만 쳐요.”라고 외친 것이다.

 

"그래! 미안하다.

나이가 일흔이 넘도록 철이 안 들어 몸이 너무 가벼운 걸 어쩌랴!"

 

유진오씨는 생일 축하곡을 봄날은 간다로 도전장을 냈다.

내 십팔번이지만, 유진오씨의 새로운 버전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현씨까지 그 노래를 불러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버렸다.

 

, 봄바람이란 노랫말만 들어도 왜 이리 슬퍼질까?.

노래가 슬픈 것인지, 사는 게 슬픈지 모르겠다.

 

술이 취해 일어났더니, 곰장어 덕인지 거시기가 구물구물 한다.

약발 하나는 정말 죽인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생일은 맞고 싶지 않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이 황량하다,

전시장도 매장도 개점휴업이다.

오래된 유령들만 떠 돈다.

 

  반 평생을 인사동에서 참기름 팔아 온 권경선씨,

단골은 다 떨어졌지만, 귀신에 홀린 듯 나온다.

역병으로 헛걸음인줄 알면서도 나온다.

 

인사동, 그 서러운 그리움에 끌려 온다.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아리랑 아리랑, 인사동 아리랑~ .

 

사진, 글 / 조문호

 

시사만화의 대부로 불리는 박재동화백이 인사동 ‘거리 화가’로 나섰다.

박 화백의 ‘오픈 스튜디오’가 '인사아트프라자'(인사동길 34-1)

건물 초입에 인사동 복덕방 처럼 둥치 튼 것이다.

 

인사동이 예술가 아지트로서 구심점을 잃어가는 현실이라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인사동에 70년대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이 있었다면, 80년대는 천상병시인의 ‘귀천’이 있었다.

문영태를 비롯한 여러 전사들이 꾸려간 민중미술의 요람 '그림마당 민'도 있었다.

정동용시인의 ‘시인대학’. 흑백 사진만 뽑던 신작가의 '꽃나라', 전유성씨의 ‘학교종이 땡땡땡’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던 아지트들이 있었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점포가 상징처럼 인사동에 똬리 틀어,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인사아트프라자'의 배려로 캐리커처 공간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니,

문 닫을 염려야 없겠지만, 노장의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다.

 

그동안 가짜 미투에 걸려  얼마나 곤욕스러운 시간을 보냈는가?

진위야 밝혀졌지만, 땅에 떨어진 작가의 명예는 어떻게 되찾겠나?

더 이상 미투가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은 순진한 박원순시장의 목숨까지 앗아가지 않았던가?

미투운동이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는데는 큰 몫을 했지만,

억울하게 이용 당한 남성의 인권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박화백의 대중 소통을 위한 접근은 권위적이고 물질적인 미술을 인본주의로 돌려놓았다.

미술작품이 가진 자들의 욕망에 컴컴한 수장고에 갇혀 잠자는 것이 좋겠는가?

살아가는 공간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눈웃음 짖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어디서, 재료값에 불과한 돈으로 박화백의 초상화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건 대중을 껴 안고자하는 박화백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쩌면 수행의 한 방편도 될 수 있고, 이보다 더 치열한 작업도 없겠다 싶다.

 

박화백이 인사동에 ‘오픈 스튜디오’를 차렸다는 반가운 소식은

보름 전 페북에서 보았는데, 한 번 찾아가 기록해 둔다는 게 영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박화백은 목, 금, 토요일만 나오는데다, 난 정선에서 화요일만 나오니 날자가 엇갈렸다.

 

지난 금요일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마침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그런데, 옆 자리에 영화평론가 강익모씨가 앉아 있었다.

“아! 이 얼마만인가?” 강교수와 소식 끊긴지가 10년은 된 것 같았다.

 

아직 사년 정도의 임기를 남겨두고 교수직에서 퇴임했다는 소식과

부친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 주었다.

 

인사동 건물 옥상에서 영화를 상영하던 이야기에서부터

옛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박재동 화백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스케치하는 눈빛이 내 마음을 뚫어 보는 것처럼 강렬했다.

마치 점쟁이가 사주 보듯 말이다.

 

여지 것 찻집에서나 술집에서 박화백을 뵐 때마다

항상 스켓치북에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듯이 항상 그의 손에는 붓이 잡혀 있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작품 값은 고사하고 수고비도 드리지 못하고 챙겨 둔 초상화가 석장이나 된다.

포인트만 잡으면 척척 그려가는 솜씨가 가히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날도 짧은 시간에 두 장이나 그렸는데, 징그러운 늙은이를 귀여운 늙은이로 둔갑시켜 놓았더라.

영감탱이의 엉큼한 심보가 뽀록 나도록 그렸는데, 화가인지 점쟁인지 도통 분간이 안 된다.

 

한 장은 사 와야 하는데, 큰 그림이라 솔직히 돈이 좀 부족했다.

돈 생기면 살 생각으로 어물쩍 넘겼는데, 거지 손님을 잘 못 골란 죄도 있다.

 

강익모 촬영

 

박재동선생 사진 찍으러 갔다가 도리어 내가 모델이 된 셈이다.

어쨋던, 박화백이 인사동 거리의 화가로 등장해 너무 기분좋다.

지난 달 ‘현실과 발언’ 창립 40주년을 맞아 열린 '학고제' 현장 작업과 바로 연결된 것 같다.

 

그의 초상화는 언제보아도 정겹다. 그림에 사람의 따듯한 체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박재동 화백의 숨겨진 얼굴 그리기 프로젝트의 따뜻함으로 인사동에 온기를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박재동 화백만 보면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부터 떠오른다.

19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 세대의 진보의식을 대변하는 '만화운동가'로 활동하지 않았던가?

권력의 본질을 예리한 메스로 파헤친 그의 만평은 시대 고발에 앞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가 보여준 시사만화 세계는 독창적이며 독보적이었다.

신문 만평을 독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기사의 핵심으로 만들었고,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시사만화’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조그만 사각 속에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 고민과 아픔을 웃음과 눈물로 버무렸다.

 

두 번째가 ‘한예종’교수로 일하며 후진을 양성한 시기라면,

이 '숨겨진 얼굴 그리기 프로젝트'는 세 번째의 대변신인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인사동 명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란 사회적 거리두기로 손님이 많지 않아

오히려 한가하게 이야기 나누며 자기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도 싶다.

박재동 화백의 붓 끝에 탄생한 당신의 초상화가 인사동 문화에 불을 지핀다.

 

인사동 나가는 걸음에 자신의 초상화 한 장 그려 두자.

 

사진, 글 / 조문호

 

광화문 집회의 코로나 확산으로 다시 인사동에 찬바람이 일고 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날 기미를 보이자 모처럼 인사동거리가 활기를 찾았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지난 19일 오후 ‘진인진출판사‘ 김태진 대표와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갔다.

인사동 거리부터 한 바퀴 돌았는데, 인파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거리는 한산했다.

한산한 곳이 비단 인사동만은 아니지만, 보기 안쓰러웠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인사동 큰길가에 자리 잡은 매장들이 많이 바뀌었더라.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하던 관광상품 매장이나 실타래과자 등 군것질 장사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를 의류매장이나 악세사리 매장이 대체했다.

 

싸구려 중국산 관광 상품이 사라진 것은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새로 생긴 매장들은 여성 고객들을 겨누어 고급화되어가는 추세였다.

아직 셔터를 내린 빈 점포도 많았으나, 머지않아 인사동 그림이 바뀌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오래된 노포들도 살아남아 있었다.

골동상, 탈방, 필방, 도예방 몇몇이 간신히 버텨, 그나마 인사동의 자존심을 지켰다.

또 하나의 변화라면 ‘통인가게’ 이층에 생긴 ‘태극당’을 비롯하여

금옥당, 수예당 등 대형 다과점이 생겨 난 것이다.

 

그리고 ‘통인가게’ 일층을 차지했던 실타래과자점이 대부분 사라지고

새롭게 단장한 미술품 매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쓸쓸한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는 유랑 악사들의 버스킹도 평소보다 많았고,

‘갤러리 이즈’ 일층에는 이용순씨의 사진전(25일까지)이 열렸다.

 

약속한 ‘사동집’으로 정영신씨와 함께 갔더니, 의외로 손님이 없었다.

텅 빈 식당을 지키던 노모 송점순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북적대던 평소와 달리 그토록 손님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벽에 걸린 민병산선생의 글씨에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태진씨와의 미팅은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었던 인사동 사진집 출판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저녁식사로 만두전골을 시켰는데, 이전보다 맛이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음식은 손님이 많아 제 때 제 때 소모되어야 맛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특별한 안은 없었으나 좋은 사진집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인사동 토박이들의 인터뷰로 내용을 다양화 하는 등

인사동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데 뜻을 모았다.

무엇보다 대중에게 팔릴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사진집이 나올 즈음에는 어떤 모습의 인사동으로 변할까?

사진으로나마 지난날을 오래오래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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