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뵐 기회가 생겼다.

강민시인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인사동 어르신들을 뵐 기회가 없어졌다.

진즉부터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는데, 모처럼 연락을 주셨다.

안부 전화였으나, 내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뵙자고 말씀드리고,

늘 뵙고 싶어 했던 정영신씨 한데도 전화했다.

 

약속한 날,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매번 늦게 나가 민망했는데, 너무 일찍 와 버렸다.

한참을 ‘나주곰탕’ 앞에서 서성였는데, 시간이 가까워오니 정영신씨와 나타났다.

길에서 만난 모양인데,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셨다.

 

날씨가 더워 뜨거운 곰탕그릇 대하기가 두려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선생께서도 시원한 막국수 먹으러 가자신다.

마침 ‘나주곰탕’ 초입에 방선생님 성을 빌린 ‘방태막국수’가 있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간신히 자리 잡았다.

 

방 선생님은 술을 끊었다지만, 내 걱정에 한 잔만 하시겠단다.

막걸리 한 병을 마셨는데, 선생님 생각한다는 게 피차 입만 버렸다.

 

‘방동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으나, 혹시 간첩이라도 있을까 싶어 소개부터 한다.

방동규(85세)선생은 이름보다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잘 통한다.

젊은 시절 웬만한 사내는 한 주먹에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 번에 깡패 17명과 맞싸운 일도 있고,

희대의 주먹 이정재도 방선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했단다.

 

그는 백기완(현 통일문제연구소장), 황석영(소설가)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릴 만큼 입심도 최고라, 구비문학계의 전설로 남은 위인이다.

법을 잘 아는 법대출신이라 낭만주먹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사상범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아 해외 유랑도 했었다

한 때 농촌운동에도 나선 파란과 굴곡의 인생이었다.

 

2005년 유홍준 문화재청장과의 인연으로 경복궁과 연을 맺은 적도 있다.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특채되었는데,

‘몸짱 할아버지’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77세에 왕궁 지킴이가 된 그는 아직까지 육체미 대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체력단련에 혼신을 다한다.

 

2006년에는 "배추가 돌아왔다"란 두 권의 자서전을 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부분의 으뜸은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지만,

한 번도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단순노동이지만 일하러 다니시는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주장이시다.

 

그런데, 선생님 슬하에 딸이 둘 있는데, 부전여전이었다.

나이 쉰이 가깝도록 미혼인데, 방그래양은 중국 대련대학 조소과 교수로,

시래양은 중국에서 운동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두 딸이 아버지처럼 운동도 잘 하지만, 생각이 깨어 있었다.

 

그 날 막국수를 드시며 하시는 말씀이 그래양이 얼마 전 귀국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왔더란다.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인데, 예능은 말할 것도 없다.

조각으로 국제대회에서 수상도 여러 차례 했다는데,

그 날 방선생께서 핸드폰으로 보여 준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국내 전시라도 한번 주선해 보고 싶어졌다.

 

그날 들은 이야기 중 그래양이 가장 돋보였던 점은 자본주의의 부정이었다.

조각가로서의 예술세계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사람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고 했다는데, 아버지를 빼 닮았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선생께서 술이 부족한 것 같았다.

선생님을 생각해서 권하지 않았는데,

정영신씨 이야기로는 자꾸 빈 술잔에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아직 재난카드가 살아남아 ‘유목민’에 갔으나, 문이 걸려있었다.

인사동에 낮술 마실만한 곳이 없어, 아쉽지만 보내 드려야 했다.

 

내가 비실비실하니, 앞으로 인사동에서 선생님 뵐 일이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더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 조차 두문불출하니, 더 만나 뵐 수 없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인사동에서 포장마차라도 한 번 할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시가 종로 삼일대로 일대에 2개동(지상 17층과 12층)을 짓는 공평 15-16지구 도시정비형 재개발안이 통과되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서피맛골과 대로 사이의 금강제화 종로점, 클락스 종로점 등 노포 일부는 보존하고, 새 건물 2개동 중 12층은 누구나 이용 가능한 옥상정원으로 조성한다. 준공예정일은 2024년 3월이다.

 

개발지역 조감도

지난 16일 들린 서피맛골 현장에는 건축물을 철거한 후, 유적을 발굴하는 탐사작업이 시작되고있었다. 발굴된 유적은 아직 모르지만, 한국전쟁의 잔재인 대형포탄이 나오기도 했단다. 이제 서피맛골의 아름다운 추억도 아득한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통을 지나는 왕이나 고관대작들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 ’에서 유래되었다. 사극에서나 볼 수 있듯이 "어이 물럿거라. 좆 대감 나가신다!" 라며 앞에서 소리 소리 지르면, 이 거덜 행렬과 맞닥치는 아랫 것들은 말에서 내려 바짝 엎드려야 했다. 백성들도 양반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에 개같이 엎어져 숨 죽여야 했다. 그러다보니 출근하는 하급관리들은 매번 늦어지기 일쑤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큰길 뒤편에 양반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만든 것이다

이 길이 피맛길로, 요즘으로 치면 '하이패스'나 마찬가지다.

 

서민들이 오가는 이러한 뒷길에 어찌 술집이 빠질 수 있겠는가?

자연스럽게 음식 파는 밥집이나 대폿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피맛골에서 파는 빈대떡과 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근 관청들이 철거되면서 피맛골에 더 많은 선술집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 중반에 이미 200개 이상의 선술집이 들어섰다는 조선총독부 기록도 남았다는데, 해방 이후에도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정겨운 골목이었다.

 

자료사진

세월에 장사 없다.  이곳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2008년부터다.

당시 서울시에서 피맛골이 포함된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대한 정비계획안을 마련하며부터 피맛골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600년간 쌓여온 피맛골의 역사는 급격한 재개발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르메이에르 건물로 대체된 피맛골은 쇼핑몰의 푸드코트처럼 정갈한 상점으로 변신해 특유의 체취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 문화거리와 연결된 '서피맛골'은 살아남았으나, 그나마 재개발 열기에 대부분 문을 닫거나 간신히 연명한 상태였다. 막상 가보면 셔터가 내려졌거나, 전기사용을 해지한다는 고지서들이 나붙어 있었다. 이미 그 때부터 죽은 골목이 된 셈이다.

 

자료사진 / 고갈비 파는 이름없는 집

골목어귀에 을씨년스럽게 나붙은 '서피맛골 주점촌'이란 팻말만 흔적을 남겼다.

120년 전, 3·1 운동을 모의했던 ‘승동교회’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름 없는 주막'이 있었다.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저 '고갈비 파는 집'이라 불리지만, 오랫동안 정든 술집이었다.

처음 갈 때가 40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 집은 반세기의 풍상을 겪은 주막이다.

 

그리고 시인 박종수씨에서 수필가 한귀남씨로 이어진 ‘시인통신’에서부터 '열차집‘, '전봇대집' 등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빈대떡과 고갈비를 안주로 밤을 지세고, 아침 일찍 청진동 해장국에서 속 풀던 추억의 장소가 바로 피맛골이다. 뒤늦게 생겼지만, 마지막으로 들렸던 곳이 김완기씨가 운영하던 ’불타는 소금구이‘였다. 그 뿐인가 지금의 '남인사마당' 옆예는 '예총' 건물도 있었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려 '사진협회'나 '문인협회'는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다. 그뒤 건물이 철거되어 순라꾼들 아지트가 되었지만, 예술가들의 사연이 녹아 있는 곳이다.

이제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정들었던 서피맛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사동에 오래된 것과 정든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으니,  기억하는 늙은이가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

사람 마주하기도 무서워하는 유령의 도시를 살아야 할 사람들이 가엽다.

돈과 물질에 눈 먼 자업자득 인 걸 어쩌랴!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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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의 정체성은 골동품이나 예술품보다 예술가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10여 년 전부터 인사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명성씨가

인사동 대표적 묵객으로 여겨지는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관청의 협조를 얻지 못해 미루어져 왔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과 멋쟁이 방송작가 박이엽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귀천’ 찻집을 주 무대로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천상병 시인 동상만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일요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유진오씨를 데리고 녹번동을 급습했다.

주말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것을 알아 술안주까지 준비해왔는데, 어찌 술자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두 달 전 술을 사두고 갔으니, 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오씨는 이른 시간부터, 때 늦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흥겨운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술 마시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장소를 제공해 그 인근에 천상병시인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동상을 제작할 작가는 최민화씨로 정해져, 머지않아 인사동의 상징물 하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인사마당에 대형 붓 하나를 오래 전에 세워놓았으나, 사물보다는 사람이 더 정겨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천상병 선생이 인사동에 등장할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애들처럼 깔깔거리는 천상병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매력적이지만,

천국 갈 시간을 기다리는듯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장난 끼 넘치는 모습의 술자리도 연상되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서울아트가이드' 6월호 구하러 간다는 핑게로 따라나섰지만,

천상병시인 동상 세워질 장소가 궁금해서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건물 가까이는 자칫 건축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동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가 마땅할 것 같았다.

 

주말의 인사동거리지만 거리두기 정도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예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외계인들 세상 같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인사동도 세월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천상병시인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목여사 말씀은 곧잘 들었으니, 쓰기 싫은 마스크를 턱 아래 걸치고 거리를 휘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동집 골목 안에 있는 지금의 최대감집이 선생께서 자주 드나들던 ‘실비집’이었으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 골목을 돌아 서는 포즈도 연상되었다.

 

아무튼 최민화작가의 기발한 구상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일찍부터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으나,

인사동의 멋진 상징물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제공: 모델리스타 인터내셔널)

 

 

지난 20일 '인사아트플라자'에서 ‘2020 미스관광선발제전’이 개최되었다.

’2020 미스관광선발제전‘은 ‘관광한류의 새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모델리스타 인터내셔널에서 주최했다.

수상자들은 관광한류를 알리는 홍보모델로 다양한 관광관련 홍보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수상자명단

 

*본상

진-임하영, 선-이서진, 미-엄정희 금보란

예-이서연, 지-신수정, 덕-배우경, 체-여시연

 

*특별상

포토제닉-이시윤, 한류상-이지은, 뷰티상-김정희

패션상-이한지 이소연, 맵시상-김정은, 재능상-지미현, 미소상-신지영

 

 

 

'통인가게’에서 세종대왕 탄신623돌을 맞아 잔치를 벌인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그 날이 스승의 날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 두었다. 세종대왕이야 말로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 아니던가?

스승의 날은 일찍부터 마음이 바빴다. 스승 찾아 저승 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서울역으로 거리의 철학자 부터 만나러갔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스승이다.

그는 막걸리 한 잔에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다.

몇 잔의 낮술에 천하를 얻은 듯 하다. 축축하게 비에젖은 인사동조차 술 맛 땡기게 한다.

‘통인화랑’에는 반가운 분들이 모여 있었다.
'통인' 김완규, 이계선 내외를 비롯하여 권재일, 이윤영, 오치우, 배일동, 이동환, 송재엽씨 등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인사 나누랴! 사진 찍으랴! 술 마시랴! 혼자 바빴다.
그런데, 관우선생이 나만 알리지 않고, 참석하는 분은 자기 먹을 안주를 챙겨오라 했던 모양이다.
인사동 거리 악사까지 불러 잔치에 풍악을 울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차별한다면 거지같은 나를 친구로 여기겠는가?

전시장에는 화가 최승호씨의 ‘일지’가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차가운 철판에 인간 내면 심리를 서정적으로 드러냈다.

전시는 6월7일까지 열린다.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를 비롯하여 권재일 한글학회장,
‘훈민정음은 없다“는 영화 제작자 오치우씨 등 여러 명이 나와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배일동씨의 절창은 숨 쉴 틈조차 안 주는 무서운 폭풍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일찍부터 술이 취해 실수는 안 했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기자란 자가 정신을 놓아 기억도 잘 안 난다.

세종대왕께서 노비의 출산 휴가를 넉넉하게 주었다며, 정치로 인문정신을 구현했다는 권회장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세종대왕, 이순신, 제갈공명, 이 세 분의 공통점을 묻는 퀴즈도 나왔는데, 답은 모두 54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분들에 비하면 징그럽게도 오래 산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지하철 타러가다 만다라 화가 전인경씨를 만났다. 스승이신 이인섭선생 만나러 ‘유목민’ 간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으며 스승의 날을 마무리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여파 이주원씨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잘 모르는 분이라 궁금했는데, 칡뫼선생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나만 모르는 주변 분 같았다.




12일 오전엔 김명성씨 따라 장호원에 갈 일이 있어 일찍부터 차를 끌고 나왔다. 
서울로 돌아오니, 약속시간인 다섯시가 임박해 차 돌려 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인사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주원씨와 약속한 ‘화인갤러리’로 간 것이다.




그 자리는 옛날 이해림씨가 운영한 술집 ‘평화만들기’ 자리였다.
수안스님 전시 뒷풀이를 비롯한 많은 일들이 생각나는 예사롭지 않은 장소였다.



쌈지 뒷골목은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는데, 이름도 반가운 '정선곤드레쌈밥'집도 생겼더라.



'화인갤러리'로 바뀐 후 첫 걸음인데, 마침 전시작을 철수하고 있었다.
칡뫼 김구, 여파 이주원 선생 등 여러 명이 참여한 단체전이었다.



칡뫼선생이 먼저 와 있었는데, 걷어내기 직전의 출품작 두 점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개인전을 못 봐 아쉬웠는데, 두 점이라도 봐 천만다행이었다.



뒷골목 밤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에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칡뫼선생 이야기로는 몇 년 전에 한 작업으로, 그 때는 작품도 제법 팔렸다고 한다. 
왜 주제를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계속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그리움에 병든 세상이 아니던가?




뒤 이어 여파선생이 나타났는데, 서울이 아니라 천안에서 왔다고 했다.
하기야! 칡뫼선생도 김포서 왔지 않았는가? 서울역 부근에 사는 거지 팔자가 상팔자가 아닌가 싶다.




난, 이주원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는 우리 집 숟가락이 몇 개인 것 까지 다 알고 있었다.
블로그 ‘인사동 사람들’ 단골손님으로 가끔 정다운 댓글로 위안도 준 분이다.
온라인 인연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진 몇 안 되는 귀한 인연이었다.




뒤늦게 임경일씨가 나타나 술 마시러 갈 때가 되었는데, 끌고 온 차가 골칫거리였다.



'툇마루'로 가기 위해 골목을 나서는데, 정영신씨가 지나가다 손을 흔들었다.

사진으로 본 정영신씨보다 더 젊어보인다는 여파선생 말에 내가 사진을 잘 못 찍은 것 같았다. 




술 마시려면 차는 어쩔 것인가?  일단 마시고 보자.
‘툇마루’에서 녹두빈대떡 안주로 막걸리 한 사발 마셔버렸다.
이 좋은 날, 술 한 잔 마시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이차로 간곳은 벽치기 골목에 있는 ‘유목민’이었다.
요즘 술 마시러 인사동에 잘 나오지 않아 몇 달 만에 들렸는데, 대개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화가 여파선생은 사진 작업도 병행한다는데, 그 작업들이 궁금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인섭선생과 주인장 전활철씨가 나타났다.



술은 땡기지만, 몸에서 그만 마시라는 신호가 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멀리서 온 손님이라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대리운전을 부르라며 여파선생이 따라 나섰지만, 손을 흔들었다.
주차비도 제법 나왔을 텐데, 여파선생이 계산해 버렸다.
차를 끌어 내 ‘아라아트’ 옆 빈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 타러 간 것이다.



내일 새벽 다시 나올 생각하면 귀찮지만, 어쩌겠는가?
“성질 마이 죽었다. 음주면허증으로 그 술 마시고 두 번 걸음하다니...”

사진, 글 / 조문호






























몽유병에 걸렸나? 인사동 귀신에 홀렸나?




볼 일도 만날 이도 없지만 무작정 인사동 간다.
전화도 멀리하며 몽유병 환자처럼 떠돈다.



병중의 병이지만 나만 걸린 병은 아닌 것 같다.
인사동 나온 사람들이 무슨 볼일 있겠는가?




우크라이나 악사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연주하고,
또 한 명의 거리 악사는 ‘베사메무초’를 부른다.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도 없지만
키스할 사람도 없다. 있어도 마스크 걸려 못하겠네.




꼬맹이는 솜사탕을 즐기고 부랑자는 단잠을 즐긴다.
세상살이 길든 사람은 즐길 겨를조차 없다.




길가는 사람은 바람만 날리고, 가게는 파리만 날린다.
있는 놈은 버티겠으나, 없는 놈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중국 놈들 없어 속은 후련하지만, 장사꾼 마음은 새까맣다.
그래도 새로운 건물은 자꾸만 들어선다.




‘동일빌딩’ 옆에 없던 건물이 떡 버티고 섰네.
눈 감고 다녔는지, 벼락에 콩 볶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 거리에 그 풍경이나, 카메라 셔터만 날린다.

사진, 글 / 조문호







































‘통인가게’ 관우선생 만나러 인사동에 갔는데, 김이하시인 사진전부터 들리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어 버렸다.




늦었지만 발길을 재촉했는데, ‘상광루’에 있어야 할 관우선생 일행이 인사동 거리에서 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배일동 명창과 권재일 한글학회장, 변작가 등 여러 명이 낙원동 ‘다리밑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관우선생이 발굴한 단골집 ‘다리밑 집’은 이제 낙원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다른 집은 손님이 없어도 포차나 다름없는 그 집은 항상 손님이 넘쳐난다.
그 날도 손님이 많아 길가에 자리 잡았는데,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한지 코로나도 도망칠 것 같았다.




관우선생이 조제한 막맥에다 감자부침, 닭발 등의 일품 안주가 나왔다.
난, 통풍 때문에 한 번도 막맥은 마셔보지 못했지만, 맛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생맥주에 막걸리를 회석하는 막맥은 냉동시켜 차게 만든 생맥주 잔도 한 몫 한다.
결국은 생맥주와 막걸리의 회석 비율이 맛을 좌우하는데, 관우선생의 칵테일 비결은 아무도 따를 자 없다.




관우선생은 ‘통인가게’를 찾는 벗들을 대부분 이곳으로 안내한다.
처음엔 돈 많은 재벌이 코 구멍만 한 가게를 찾아 의아해 하지만,
막맥과 안주를 맛보고는 다들 역시를 연발하며 단골이 되어버린다.




그 날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웃지 못 할 헤프닝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패션과 아트, 음악, 그림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독특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팝아티스 까스텔 바작이 통인가게를 방문하여 이 집으로 안내했단다.
그 역시 막맥의 독특한 맛과 포차 같은 술집 분위기에 반해버린 것이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낙원상가 계단 벽에 멋진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 장소가 아니면 어울 릴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 탄생해 다들 인사동 명물하나 생겼다고 좋아했다는데,
다음 날 가보니 깨끗하게 지워지고 없더라는 것이다.




알아보니, 건물관리인이 고생스럽게 지웠다는데,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명작이 무지한 관리인의 실수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척 보면 똥인지 된장인지는 분별해야 할 것 아닌가?




작가도 그 때 기분이 아니면 다시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며 아쉬워했다는데,
직무에 충실했다는 건물 관리인만 탓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권재일회장은 그 벽화를 지운 이야기 자체가 예술로 더 오래 회자될 수 있을 것이라며 위안했다.



이차를 가자는 관우선생 말에 다들 일어났다.
잘 가던 ‘유진식당’ 가는 줄 알았는데, 경운동 방향으로 이끌었다.
흥선대원군 집터 골목으로 한 참 끌고 가서는 허름한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싸고 맛있는 집만 찾아다닌다.




그런데, 이차로 간 음식점에서 아쉽게도 음식 맛을 보지 못했다.
전 날 밤 컴퓨터와 노느라 날밤을 깠는데, 취기가 오르니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배일동 명창이 부르는 ‘사철가’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깬 것이다.
관우선생이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이산 저산 찾는 노래가 아니던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우람한 소리와 애간장 녹이는 절절한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언제 이런 술집에서 대명창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까스텔 바작의 벽화는 하루라도 버텼지만, 배명창 소리는 그 자리서 날아갔다.
어차피 예술이나 인생이나 사라지는 것은 매일반이니, 어디 한 번 멋지게 놀아 보자구나.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고
여름이 오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 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 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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