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 많은 사람이 몰려 나왔다. 서서히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중국관광객이 없어 예전 같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발길은 꾸준이 이어졌다.

새로 생긴 악세사리 가게에는 손님들이 미어터졌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빌려 온 카메라가 이틀째 작동되지 않았다.

노출초과로 사진의 계조가 드러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셔터를 누른다.



 

 

먼저 이태호씨의 '근대짱돌의 역사"전이 열리는 '나무화랑'부터 찾았는데,

텅 빈 다른 전시장에 비해 의외로 관람객이 많았다.

전시된 작품들을 돌아보니 마치 박물관에 들어 선 느낌이었다.




일단 기존 미술개념의 제도적 틀을 깨려는 저돌적 자세가 돋보였다.

주로 일상에서 채집한 짱돌 같은 사물도 있지만, 회화, 목판화, 문자, 영상,

설치, 사진에 이르기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끌어들였다.


 

장소도 전시장에 국한되지 않았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타이포그라피가 첨가된 김수영시인의

목판화 벽보붙이기가 인사동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 나 붙었다.

상업광고가 판치는 거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미술이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을 찾아냈다.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분석에 의한 인식을 형상화하여 소통을 시도했다.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풍자로, 때로는 날선 비판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오래전 어느 매체에 소개된 작가의 말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 

미술은 성스럽고 순수한 게 아니다. 노동하는 현실과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 바로 이태호씨의 작업 태도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서문에 작가를 이렇게 말했다.

"곧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이태호는 1980년 이후 40여 년을 그렇게 줄탁동시啐啄同時와 줄탁동기啐啄同機로 한국미술과 현실의 모순과 허위,

그 단단한 껍질에 미학적 '짱돌'을 던져왔다. 자신도 미술도 거듭나기 위한 그의 깨우침이 사회문화와 역사에 대한 두드림으로 확장된 실천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과 현실에 대해서 할 말과 할 일이 아직도 많은 그는 청년이다. 한국사회의 허위에 거침없이 짱돌을 던지는 작가다."




이태호 화집발간기념전 '근대짱돌의 역사"전은 5월4일까지 열린다. 



두 번째는 김해에서 올라 온 신미숙씨의 초대전이 열리는 ‘31갤러리를 찾았다.

전시장은 정물과 누드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더러는 유물 단면이 배경이 되어 의아하기도 했으나,

그가 발표한 '가야유물의 회화적이미지 표현' 이라는 논문제목에서 이유를 찾았다.



이 전시는 4월28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반가운 벗들을 만났다.
출감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벼슬하고 온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전화 받기가 머쓱해 핸드폰을 없애버렸으나
정영신씨를 통한 쓰리 쿠숀으로 쳐들어 왔다.




사실, 구치소에서 작심한 것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핸드폰을 없애는 일과 페북을 끊는 것도 있는데,
전화 없애는 일은 간단했으나, 페북 탈퇴는 작심 삼 일을 못 넘겼다.




결국 출소 이틀 만에 글을 올리고 말았는데,
페북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차례만 접속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한다.



 
첫날은 정영신씨와 함께 일하는 ‘예술인협동조합’ 서인형씨가 찾아와
녹번동 ‘풍년집’에서 돼지 한 마리 잡아 몸보신 시키더니,
지난 주말에는 김명성씨 전화를 연결시켜주었다.




진관동 집 부근에서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데,
시인 조해인씨도 와 있었고, 뒤 따라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뮤아트’에서 음악 하는 낭자들도 셋이나 등장했다.




북한산 아래 ‘북한산 메기탕’에서 메기탕을 끓였는데,
수제비를 뜨도록 밀가루 반죽까지 넘겨주었다.
쪼물락 쪼물락 만지는 촉감이 꽤 좋을 것 같았다.
“아~ 옛날이여!”




술자리가 끝난 후, 김명성씨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청운씨가 그린 석양 포구에서 듣는 음악이 그리워서다.



그 날은 보슬비 내리는 창밖 풍경까지 한 몫 한 것은
북한산을 휘감은 구름이 장관을 연출해서다.



어찌 이 분위기에 술이 없을소냐?
중국집에서 유산슬 시켜 또 한잔 걸쳤는데,
김상현씨가 선곡한 음악까지 죽였다.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을 비롯한 축음기 시절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코맹맹이 음색의 간 들어진 노래 소리가 봄비마저 울렸다.



그날은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여배우 전옥 노래까지 나왔다.
배우 최민수씨 외할머니였던 전옥의 창법은
가슴 속 가라앉은 슬픔을 끌어내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전옥이 출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항구의 일야' 레코드자켓

봄비와 노래가 작당하여 늙은 놈 가슴을 후벼 팠다.
재미있게 살기로 한 시작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김명성씨가 새로 나온 명함을 한 장씩 돌렸다.
주식회사 ‘아트해피니스’ 연구실장이라 적힌 명함인데,
‘행복’이란 글씨가 도드라졌다.
김구선생 필체라는데, 글체처럼 뭉툭한 행복이 찾아들었으면 좋겠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야 한옥마을에서 걸쭉한 잔치 한 판 벌일텐데...

사진, 글 / 조문호


















코로나19 방역, 한국 사람들 자신감 확인


[스크랩] 브레이크뉴스 / 문일석


▲4월11일 오후 인사동 거리. ©브레이크뉴스

▲ 4월11일 오후, 인사동 거리. ©브레이크뉴스
 
 
4월11일 오후 3시, 인사동에 들렀습니다. 기자로서, 희망을 전달합니다!
종로구 인사동 거리 인파가 코로나19 이전과 비교, 80%쯤 돌아왔네요.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코로나19, 방역에 대해 한국사람들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생 끝, 새희망 시작...인사동에서 거리 풍광을 사진으로 긴급하게 전달합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습니다. 우리의 새 세상이 열렸습니다



서울남부교도소 정문


벌금대신 몸으로 때우려는 꼼수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보름동안 몸 관리하며 충전할 속셈인데, 막판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사전투표를 못하게 했다.


며칠 전 교도관 반말에 열받아 혼낸 일이 있었는데, 미운털 박혀 나만 못하게 한 것으로 알았다.

참정권 침해라며 교도소장 면담을 요청 했더니, 선거담당교도관이 찾아왔다.

이유인즉, 선관위의 지침에 따른 조치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재자 투표는 3월 28일 이전에 입소한 수용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일이 어디 있는가?

내가 입소할 때 들어 온 사람만도 열 명이 넘었는데, 13일까지 들어 온 수용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전국의 교도소를 더한다면 투표 못한 사람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닐 것이다.

선관위에서 투표률을 높이기 위해 방송이나 신문에 쏟아 붓는 나랏돈이 얼만데,

하려는 사람도 못하게 한단 말인가?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개판되도록 방임한 것만도 용서 못할 일인데,

투표마저 관료적인 관습에 빠져 자기네 편한데로 처리하고 있었다.

부재자 투표가 안 된다면, 사전투표나 거소투표에 참여시키면 될 일 아닌가?


이미 사전투표일이 지나버려 정해진 투표일에 찍는 방법뿐이란다.

남은 일 수만큼 벌금 내고 나가라는데, 그걸 누가 몰라서 못하나?

교도관들도 그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틀 당겨 나갈 수 있도록 벌금 20만원 내어 줄 사람이 없냐고 재차 다그쳤다.


하는 수 없어 정영신씨 전화번호를 일러 주었더니, 다음 날 바로 나가라고 했다.

아마 정영신씨가 빨리 내보내라며 십만원을 더보태 삼십만원을 보낸 것 같았다.

마무리 할 일도 남았는데, 정영신씨 선심에 갑자기 쫓겨나게 된 것이다.

나만의 시간을 즐기려는 복도 그것 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서울남부교도소


그런데, 처음 교도소 들어가는 날, 지문채취를 하였으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열 손가락을 다했으나 나오지 않아 별의 별 짓을 다했는데, 왜 지문이 없어졌을까?

지문이 닳아 사라졌다는데, 무슨 중노동 한다고 지문이 지워진단 말인가?

설마, 애무를 너무 진하게 해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


또 한가지 반가운 일은 그냥 모르고 넘어갈 뻔한 일을 알게 된 일도 있었다.

법원에서 판결문을 받지 못해 항소기일을 놓쳤는데,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왜 변호사 면담 때, 그 문제를 말해주지 않았을까?

이미 형기야 마쳤지만, 정식재판청구서를 서부지방법원에 제출했는데, 잘 못된 일은 기어이 바로잡을 것이다.


아무튼, 서울남부교도소에서 보낸 나날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감염자처럼 2주일 동안 독방에 격리시켜주어 좋았다.

눈치 볼 사람도 탓할 이도 없으니, 혼자 즐기기는 그지 그만이었다.

외부인 접견도 되지 않고, 목욕이나 운동조차 할 수 없었으나, 견딜만 했다.

한 자리에서 앉았다 눕기만 반복했는데도, 하루가 너무 빨랐다.


오전 여섯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열 두시에 점심 먹고, 오후 여섯시에 저녁 먹고,

여덟시에 자는 다람쥐 채 바퀴 도는 일정인데, 시계가 없으니 밥 주는 시간으로 감을 잡을 뿐이었다.

낮 시간에는 티브이나 라디오 방송을 듣기도 하고, 책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밤이 문제였다.


장장 열 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어찌 잠만 잘 수 있겠는가?

실컨 자다 깨어나면 곧 날이 샐 것 같았지만, 새벽 한시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가끔 순찰하는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만 지나칠 뿐, 적막강산이었다.

어쩔수 없이 다섯 시간 넘게 생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기회도 흔치 않을 것이다.


독방의 크기는 동자동 쪽방과 비슷하지만, 방안에 화장실이 포함되어 더 좁았다.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월요일마다 다른 방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옮길 때 마다 조금씩 주거 환경은 나아졌다.


처음엔 종이컵 한 개로 삼일을 버티고, 세재가 없어 휴지와 비누로 식판을 닦기도 했으나,

두 번째 방에 가니 다른 사람이 두고 간 머그컵도 있고, 요구르트 통에 담긴 세제도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옮긴 방은 세 사람이 사용하는 방이라  넓은데다 주방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자 지내는 데는 큰 방이 오히려 불편했다.


물품을 구입하는 것도 품목마다 신청하는 날자와 주는 날자가 제 각각이라 놓치기 일수였다.

없으면 없는 데로 지내면 될 텐데, 빵이나 비스켓 등을 주문하였더니, 밥맛을 잃게 되더라.

가끔은 담배 찾느라 주머니를 뒤지다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겪어 본 구치소 생활인데, 시정해야 할 점도 있었다.

주변 환경이나 시설은  나아졌지만, 억압적인 일제 잔재는 그대로였다.

좌변기 화장실이 방마다 있고, 티브이를 시청하는 시간이 주어지고,

제공하는 음식물은 좋아졌지만,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있는 군대식 점호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까지 짐승에게 먹이 주듯

식구통이란 구멍을 통해 밥 넣어 주는 형태는 여전했다.

다들 받아먹기야 편할지 모르겠으나, 이건 인간을 모독하는 짓이다.


낮 시간에는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따랐다.

티브이야 보기 싫으면 꺼 버리면 되지만, 라디오 방송이 문제였다. 

유일하게 시간을 알려주는 아침 일곱시 멘트 외는 대부분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음악이었다.

스피커가 천정에 달려 있어 껄 수도 없는 일이라 짜증스러웠다.


티브이는 하루 한차례 보여주는 생방송 뉴스 외에는 대부분 녹화방송인데, 어디를 가나 먹는 이야기 뿐이었다.

먹다 죽은 귀신이 화색도 좋다지만, 감방에 갇힌 놈들 침흘리게 하는 것은 무슨 악취미인가? 

오랜만에 본 티브이 방송이라 처음 보는 생소한 프로도 많았다.

보여준 프로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영화는 ‘그린 북’이었다.

취향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 두 남자의 특별한 우정을 다룬 영화였는데, 시사하는바가 컸다.


좌우지간, 12일 동안의 감옥생활은 나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처음부터 작정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주변 여건도 따라 주었다.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어찌 독방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덕분에 조용히 앉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일도 결국은 스스로를 위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이기심에 가족만 희생시켰다는 생각에 이르니. 돌로 머리를 찍는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여생은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난 14일 정오 무렵, 교도소에서 쫒겨나왔으나,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일단, 마을버스를 타고 오류동까지 나와 목욕탕부터 들어갔다.

머리에 남은 찌꺼기야 교도소에 버렸지만, 몸 찌꺼기를 버리기 위해서다.

뜨거운 탕에 들어 앉아 다짐에 다짐을 했다.

이젠 재미있게 살기로...


사진, 글 / 조문호



















그동안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지난 14일,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삼일을 앞당겨 나왔습니다.


수감자 참정권을 침해하는 중앙선관위의 투표규제에 맞서

거금 삼십만원을 내고 투표권을 행사했는데, 결과는 쪽팔리네요.


대부분 여당이 압승했는데, 하필이면 내가 찍은 용산만 미똥당이 될게 뭔가?

안 될 줄 알면서도, 빈민을 걱정해 준 정의당 정연욱 후보를 찍어 준 피눈물의 댓가였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진보정당의 자존심을 지켜 준 정의당의 몰락이었다.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내가 태어 난 경상도 창녕은 물론,

작업실 처럼 더나드는 정선에 이르기까지 나와 관련된 모든 지역은 미똥당이 되었다는 거다.

내가 찍으면 잘 떨어지는 오래된 나의 선거 징크스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건, 황교안, 나경원, 김진태, 차명진을 비롯한 미똥당 쓰레기들이 처리되었다는 점에 위안이 된다.

그리고 적페 청산에 힘이 실리게 된 더불어 압승은 기대해 볼만하다.

이제 눈앞에 닥친 검찰개혁은 물론 중앙선관위를 비롯한 모든 적폐들을 하나 하나 손봐야 한다.


힘없는 약자들도 더불어 함께 사는 그런 세상을 위하여...


사진, 글 / 조문호




코로나 증상이 나타난 게 아니라, 정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남부구치소에 2주간 보호격리 됩니다.

벌금 2백만원 판결은 공익이 중요하냐? 양아치 명예가 중요하냐?는 승복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후배가 벌금 내라며 사진까지 사 줘도 버틴 일인데, 정영신씨 압력에 꼬리 내린 일이지요.

넉 달로 나누어 벌금 50만원은 먼저 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입니다.


어차피 쪽방에 격리되어 굶기를 밥 먹 듯 하는데, 구치소에 있으면, 삼시세끼 밥걱정은 덜 수 있지요.
몸에 해로운 술 담배 안 하고 규칙적인 생활하니 몸은 또 얼마나 좋아지겠습니까?
도랑치고 게 잡는데다 님 까지 보는 격이 아닌가요?

오늘 서울남부교도소에 들어가서 오는 17일 나올 예정입니다.
그 때쯤 되면 사진에 있는 벚꽃도 다 지고, 쓰레기도 말끔히 치워지겠지요.
정치판도 깨끗이 청소되어 새로운 선량들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 포스팅도 폐북 질도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다시 뵐 때까지 다들 건강 잘 지키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DESIGNERSPARTY' facebook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니,
고 임인식 선생께서 1954년도에 찍은 인사동사진이 한 장 올라와 있었다.
너무 친근하면서도 낯선 장면이었다.



그 당시는 시골서 살던 꼬맹이 시절이라 인사동은 커녕 서울도 와보지 못한 때였다.




일단, 그 사진과 가까워 보이는 장소를 찾아 인사동에 나가 보았다.
월 말이 되면 다음 달 전시소식 나오는 안내 책을 구할 일도 있었다.




코로나 여파로 인사동은 마스크로 가린 사람들이 가끔 오갈 뿐, 한산했다.
돌 턱에 웅크려 자는 여인이,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봄 냄새 풍기는 울긋불긋한 여인네 옷들도 진열되었으나 구경꾼은 없었다.
모처럼 할머니 따라 구경나온 어린이들만 신났다.




50년대 인사동 사진 속 장소는 아무래도 옛날 엠비시 사옥 자리인 '덕원빌딩' 터가 아닌 가 싶다
‘통인가게’ 관우선생이 그 무렵 살았으니,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인사동 관광 안내소에서 ‘서울아트가이드’4월호 한 권을 구했는데,
책 두께가 예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 만큼 전시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럴 때 일수록 작가들이 하던 일을 평소처럼 이어 갔으면 좋겠다.
오프닝 파티 없이 쉬엄쉬엄 들리는 풍토로 바꾸고, 때에 따라 대관료도 활인받자.




나온 김에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주호씨 ‘태평천하’를 보러갔다.
요지경 속의 풍속을 펼쳐놓고, 오늘의 현실을 비판하며 풍자하고 있었다.
우습지만, 슬픈 것은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요즘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코로나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진심으로 정 부칠 수 있는 그런 인사동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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