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31


의왕 사는 박완호씨는 인사동 광대이기를 자처한다.



2019, 8.


그는 시집 ‘내가 꿈꾸는 배려’를 낸바 있는 시인이다.
인사동 거리 축제만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달려온다.
어떤 때는 가장행렬 앞줄에 서서 지휘자 행세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려한 복장으로 지나치는 이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2019, 8.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오는 단 하나의 이유는 인사동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칭찬하는 이 없다. 여비는 커녕 차 한 잔 사주는 사람 없어도 관계없다.
행사가 없는 날도 인사동 거리를 오가며 광대 임무를 다 하지만,
마치 미친 사람 취급하듯 눈길도 주지 않는다.



2020.1.31


지난 1월31일 밤늦은 인사동 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울긋불긋한 화려한 복장이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너무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포즈를 취해주며 말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사동, 선생님 뿐입니다”.




인사동 무명광대가 살아 있는 한 인사동의 풍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 글 / 조문호


2019, 9











인사동에 볼 만한 전시가 여럿 열려, 내친 걸음에 모두 돌아보았다.

정영신씨와 인사동 간 지난 5일은 날씨가 추워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었는데,

전시장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리는 이재삼씨의 달빛 녹취록이었다.

목탄으로 드러낸 자연의 형태는 단순한 풍경을 너머, 깊은 어둠속에 잠긴 침식된 풍경을 보여주었다.



홍매화를 비롯한 소나무, 대나무, 물안개, 폭포 등의 대작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빛이란 제목을 붙인 거목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고요한 적막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장엄한 분위기가 처음엔 긴장감을 주었으나, 이내 마음이 편해지며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마치 깊은 산중의 새벽 법당에 홀로 선 것처럼...



수행하는 스님 방에 작품을 걸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을 꿈틀거리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달빛 소리 같기도 했다.



가슴에서 밀려오는 감흥은 보는 이의 신체 오감을 자극했다.

신종 코로나에 주눅들지말고, 신비로운 달빛에 한 번 취해봄이 어떨까?


아래를 클릭하면 네오록에 소개된  이재삼씨의 글과 작품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mun6144/5459



 

두 번째는 갤러리 미술세계’ 5층에서 열리는 고 이존수의 재조명전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를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화가 정복수씨를 만나 전시장 순방에 함께 했다.


 

이존수씨는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불운의 화가다.

경남 남해 출신으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변방의 작가였다.

부산에서 활동한 70년대 만난 오랜 지기지만 80년대 초반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많은 벗들을 사겼으나, 특히 중광스님과 친하게 어울렸다.

어떻게 보면 이존수씨가 중광스님의 그림 스승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상경할 때는 그도 개털신세라 사는 게 어려웠다.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빨래집게 전시로 조명받아 유명세를 탔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자 유명 화랑의 전속화가가 되었는데, 없는 사람이 돈이 생기면 이렇게 변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유명화랑과의 전속계약을 노예계약이라며 법정투쟁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작가의 생명줄을 쥔 화랑 측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였다. 


 

한 동안 그를 잊었는데,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것도 죽은지가 한 참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기구한 운명에 억장이 무너졌으나 흐르는 세월에 잊고 살았는데,

갑작스런 전시소식에 죽은 사람 살아 온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파격적인 작품 성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대개의 작품들은 줄거리 없는 설화성을 띄고 있다.

마치 전설이나 동화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 조각들을 형상화시켜 놓았다.

그건 작가에게 잠재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같았다.

그 형상들은 전설로 떠도는 설화가 아니라 오늘의 신화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작가의 마음이었다


 

 

전시장에는 세로 1,4미터에 가로 26미터에 이르는 대작이 걸려 있었다.

평생도라 이름붙인 작품에는 삼라만상 희노애락과 우주의 신묘를 다 담아 놓았다.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 이존수의 선험적인 신기어린 세계에 한 번 푹 빠져보시길...


 

 

그 전시장에서 한층 내려와 유혜정씨의 그림읽기 내친걸음전에 들렸다.

이 전시는 평창동 아트스페스 퀼리아에서 끝난 지 사흘 만에 다시 열려 내친걸음이라 했으나,

뜻은 내친(內親) 걸음이다.



마침 작가가 자리에 있어 차 한 잔 얻어 마셨는데,

마치 은밀한 여인의 방에 들어온 듯, 눈 높이을 깔아야 했다.

작품들이 도발적이라, 훔쳐보듯 살펴보았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성에 대한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냈는데,  작가의 그림일기 같았.


 

작가는 이 작업을 하게 된 동기가 무의식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연스럽게 그렸는데, 성에 과민 반응하는 세태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을 쉬쉬하며 웃음거리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춘화라고 하대했던 옛날이야 그렇다치고, 지금이 어느 때인가?

세상에 성애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게 어디 있나.


 

이 그림들은 남성의 입장에서는 이성으로 볼 수 있으나,

작가는 여성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를 그렸다.

그 본질은 여자라기보다 그녀가 아우르며 풍기는 밝음이다.



아무튼, 유혜정씨의 그림은 매혹적이다.

때에 따라 변하는 감정의 찌꺼기까지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적나나하게 드러냈으나 작품들이 음란하기보다 맑다.  

그 해맑은 여인의 꿈길을 한 번 걸어보심은 어떨까요?


 

네 번째 들린 곳은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류연복씨의 온 몸은 길이다전이다.


 

이 전시가 열리는 나무아트는 민중미술의 본산이다.

그림마당 민에 이어 93년도에 문을 열었는데,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다.

'나무화랑'처럼 좋은 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이 인사동에 별로 없다.

오층 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보석같은 알짜배기다. 


 

정복수, 정영신씨와 전시장으로 올라가니, 전시작가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화가 이흥덕, 송 창, 김재홍, 장경호, 성기준, 김이하씨 등 많은 분이 와 있었다.

반가워도 전염병에 주눅들어, 싫어 할까바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전시작들을 돌아보니, 진천 전시 빠진 작품과 신작도 있었다.


 

류연복씨의 목판화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베어있다.

때로는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칼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정적이다.

국토를 온 몸으로 껴안은 내면에는 민중의 한이 서려있다.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류연복씨를 좋아하는 이유다.

비실비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목판화와 함께 한 세월이 어언 35년인데, 한결 같은 뚝심의 화가다.

우리 현대목판화사에서 족적을 분명하게 남긴 문제 작가다.

그의 목판화는 우리민족의 정신과 국토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아래를 클릭하면 네오록에 올린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글과 전시작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mun6144/5475



한 걸음에 장엄함과 선험적이고 매혹적이며, 민족적 한의 정서까지 골고루 느낄 수 있으니,

일타 쌍피가 아니라 일타 사피가 아니겠는가?

주말부터 날씨도 풀린다니, 인사동에 전시보러 가자.



이재삼 달빛 녹취록‘ / 3월 3일까지 / 갤러리 그림손

이존수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 / 2월 13일까지 / 갤러리 미술세계 5층

유혜정, '그림읽기, 내친걸음' / 2월13일까지 / 갤러리 미술세계 4층

류연복 '온몸은 길이다. / 2월 24일까지 / 나무화랑

 

사진, 글 / 조문호













 

 

 

 




난 1일, 인사동에 ‘서울아트가이드’ 책 한 권 얻으러 갔더니,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로 다른 주말보다 사람이 적은데다,
나온 사람도 대부분 마스크로 가려, 마치 죄지은 범법자나 외계인처럼 낯설었다.
그런데, 얼굴 가리는 것에 왜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겼을까?




새로 나온 코로난지 세단인지 모르겠으나, 그놈의 전염병 때문에 죽을 맛이다.
밥장사도 술장사도 다 문 닫을 지경이지만, 다들 방안에서 감옥살이 한다.
동자동 쪽방도 모두들 방안에서 알 낳는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확실한 격리는 되니. 그 중 안전지대가 쪽방 촌이 아니겠는가?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낙연씨

인사동 거리에 나타난 외계인 아닌 외계인들을 살펴보니,
외계인 속에 낯익은 분의 모습이 보였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낙연씨가 빙그레 웃으며 찍사를 처다 본다.
그런데, 이분은 겁도 없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네.
하기야! 지역구 표밭에서 얼굴가려서야 어떻게 장사 하겠나?
목숨 걸고 하는 것이 정치인인 모양이다.




아마, 외계인처럼 얼굴가리고 다니는 게, 앞으로 일상화될 것 같다.
별의 별 지독한 점염병도 다 생기지만, 환경오염으로 대기도 독가스 수준이다.
모든 게 인간들이 저지른 업보다.
좀 불편해도 원시인처럼 살며 인간성을 찾는 것이 답인데, 꿈 같은 일일 뿐이다.
다들 돈과 편리함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지구는 원시인과 외계인의 전쟁터가 될 것 같다.




그 날 인사동에 원시인 사령관이 나타나, 외계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라며 연신 허리를 굽혔으나,
다들 미친 사람 처다 보듯, 시큰둥하다.
이 분은 부천 사는 박덕술씨로, 가끔 파고다공원이나 인사동에 나타나 퍼포먼스를 한다.
큰 칼 옆에 찬 폼이 마치 원시인 사령관처럼 보였다.




전쟁 하려면 인사동에 원시인 부대부터 만들어야 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윤진섭 미술시평]

좌) 70년대 중반의 필자와 강용대(오른쪽) 우) 강용대, 미완성 우주, 연대미상, 한지, 먹, 단청, 아크릴 73×143cm


‘별이 된 아이’, 화가 강용대(1953-97).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흔히 그렇게 부른다. 작은 키에 가볍고 날렵한 몸매, 검도로 단련된 그는 80년대 초반, 이대 입구로 넘어가는 굴레방다리 대로변에서 6척 장신의 거한을 무너뜨렸다. 이슥한 밤에 근처의 카페 술자리에서 여성을 괴롭히던 불량배를 말리다 시비가 붙자 벌어진 순식간의 일이다. 이때, 그가 원숭이처럼 빠른 동작으로 붕 떠서 거한의 머리를 양팔로 감싸자, 마치 대나무가 휘듯 그 큰 몸이 무너지던 장면을 지금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세상에 초연하며, 예술 하는 한 줌의 벗들과 사귀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강용대, 나는 그를 가리켜 이 시대의 마지막 ‘아웃사이더’요, ‘로맨티스트’로 기억하고 싶다. 1981년, ‘대성리’전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막걸리에 취해 주흥이 도도해지면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鄕愁)>를 카랑카랑한 높은 톤의 목소리로 낭송을 하곤 했다.

가진 거라곤 빈손밖에 없었지만, 도전과 저항 정신에 충일했던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우리는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대성리 화랑포 강변의 눈밭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강용대는 죽기 전에 은밀히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1997년 금산갤러리에서 열린 초대전은 졸지에 유작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들이 문화면 톱으로 그의 기구한 삶과 예술을 소개해서 화제가 되었다.

‘별이 된 아이’ 화가 강용대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지만, 별을 소재로 한 주옥같은 500여 점의 작품들이 남아 우리를 위로해 준다. 한지의 뒷면에 여러 차례에 걸쳐 먹물을 입히는 ‘배압법(背壓法)’을 기본으로 한 그의 그림은 요즈음에 한창 재조명 바람이 불고 있는 수묵화의 입장에서도 다시 생각해 봄 직하다. 그는 검은색의 짙은 먹빛에 화려한 단청의 무수한 점들을 찍었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우주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핀 화단 같기도 했다. 그는 그 그림들에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주로 별자리 이름과 관련된 것이었다. 접시꽃좌, 감자좌, 연꽃좌 등 상상 속의 별자리들을 그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를 졸업한 그가, 전위미술 단체 ‘S,T’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 훌쩍 유럽으로 떠나간 게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는 유럽, 캐나다, 동남아 등지를 주유천하 한 후에 국내에 정착하려 했으나, 제도권 미술계는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오랜 화우들은 그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는 점차 마음이 통하는 몇몇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기행을 벌이고 예술을 논하는 길거리 예술가가 돼 갔다. 그는 어느 날 철모를 쓰고 인사동 길거리에서 바나나를 팔기도 했다. 신문지에 바나나 몇 송이를 놓고 한 개에 10원씩 받았다. 10원짜리 잔돈이 없어 백 원을 내면 안 된다고 했다. “왜? 그럼 밑지잖아?” 하고 물으면 “세상에 밑지는 놈도 있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세상에 밑지는 놈도 있어야 한다! 그가 죽은 지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가 남긴 이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밑지지 않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밑지지 않기 위해서는 남에게 덤터기를 씌우거나 때로는 야바위꾼이 돼야 한다. 미술계로 말하면 각종 공모에서 당당히 실력을 겨루기보다는 편법과 야합에 편승하며, 아트페어 참가를 둘러싼 일부 화상과 작가 간의 갈등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벼룩의 간을 내먹는다고 가난한 작가나 기획자의 등을 치는 미술 관계자들은 우리 주변에 또 얼마나 많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오로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며, 우리는 그렇게 천민 자본주의의 시대를 속절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서울아트가이드 2020년2월호 스크랩]


아래 사진은 조문호 사진첩에서 옮겼다


인사동 거리에서 한 잔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이청운, 강용대,

고 민병산선생 49제에서 찍은사진 / 앞줄에 돌아가신 박이엽선생과 강용대의 모습도 보인다.

신동여 결혼식에 참석한 우인들 / 왼쪽에서 두번째가 강용대

김용문씨의 대학로 옹관장전에서 강용대 포퍼먼스: 

옹관장전에서 왜 강용대는 상여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했을까요?


화폐질서를 어지럽힌 화가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가 어느 날 인사동 거리에서 동전 바꾸기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어디서 돈이 좀 생겼는지 모두 십 원짜리 동전으로 바꾸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일원짜리 동전이 나오면 십원짜리 동전과 맞 바꾸어주는 돈 장사를 한 것이다.

행인들이 모두들 의아해하면서도 일원짜리 찾느라 난리를 피웠다.

그는 주머니에 가득한 일원짜리 동전으로 소주 한 병을 샀다.

투덜거리는 구멍가게 주인의 짜증도 마다하고, 큰돈이나 번 것처럼 낄낄거리며 안주도 없이 나팔 불었다.”


-조문호 사진집 ‘인사동이야기’에서-







오랜 세월 인사동을 지켜 온 ‘통인가게’ 관우선생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 전에도 전화를 하신 모양인데, 일할 땐 전화기를 곁에 두지 않아 못 받았다.
해 바뀌었으니, 점심식사라도 한 끼하자며 날자를 잡았다.



이젠 나이 들어 몸이 신통찮으니벗들의 술 마시자는 연락도 잘 따르지 못한.

예전에는 술 마시자는 연락만 오면 쪼르르 달려갔으나, 일 끝내기 전엔 천하일색 양귀비가 꼬셔도 못 간다.


 

한 때는 일 보다 노는 것이 먼저였다

노세노세 살아 노세! 죽고 나면 못노나니“ 를 외쳤는, 힘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지난 30, 점심시간 맞추어 통인가게상광루에 올라가니, 한겨레기자로 정념퇴임한 임종업씨가 와 있었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진로포도주 한 잔 따라 주었는데, 옛날 생각나는 술로 맛도 괜찮더라.

빈속에 짜~리리리 내려가는 술기운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역시 술과 사랑은 배부르면 갓댐이다.


 

그날은 새해 복 받아라는 뜻인지, 낙원동 복집으로 데려갔다.

복지리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애주가인 관우선생이 말을 꺼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캔 맥주 하나 들이키는 게 최고의 재미야"

다들 건강 생각하느라 아무리 좋아도 몸에 해로우면 삼가지만, 관우선생은 못 말린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생전의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는데, 술도 말술이라 아무도 못 당한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며, 자기 죽으면 수의는 물론 쓸데없는 장례에 낭비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단다.

장의차도 필요 없고, 그냥 잠옷 입은 채 화장하여 강화 집터 주변에 뿌리라 했다는데, 역시 관우선생 다웠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개 돈에 중독되어 인간성을 잃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선생은 다르다.

일찍부터 부친이신 인제 김정환 옹으로 부터 통인가게를 물려받아 한 평생을 예술과 문화에 천착한 때문인지,

사람사는 근본을 중시하고, 풍류와 멋을 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마당도 쓸고 가구도 닦고 배달도 했다.

열 일곱 살에 부친께서 "오늘부터 고사를 네가 지내라"고 했단다. 수시로 지내는 고사는 장사꾼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화여대' 학생들이 가게에 왔단다. 본인에게는 항아리 때 닦는 일만 시키던 부친께서 학생들은 잘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가게에 나가지 않고 "아버님 밑에서 안 배우겠습니다. 이대생들에게는 잘 가르쳐주시면서"라고 투정을 했단다.

"항아리 때를 빼거나 고가구를 닦다 보면 서랍의 크기와 위치 등 디테일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크게 나무랐는데,

말보다 손으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스무 세살 되던, 어느 날 부친께서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오늘부터 네가 통인 주인이다"라고 했단다.

그러고는 "어느 장사든 망하지 않는 장사가 없다. 네가 주인이기 때문에 망하던 흥하던 모든 건 너 하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망하면 동대문시장에서 다시 리어카를 끌고 시작하라"고 했다는데, 무서운 얘기였다.

어린 자식에게 사업을 물려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때 부친께서 "난 내 아들을 믿는다"고 했단다.

`아버지가 날 믿어주는데 실수하면 안 되겠다. 놀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고미술상에서 시작하였으나,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인터내셔날','통인안전보관','파쇄컴퍼니' 등

21개 자회사를 거느린 연매출 8000억원 대의 세계적 물류회사로 키운 것이다.

골동품을 취급하다 보니 고미술품을 국내외에 안전하게 운송하는 일을 생각했고, 운송 일을 하다 보니

서류 보관 업무도 하게 됐는데, 외국계 보험회사와 신용카드사들이 다 고객이란다.

사업과 연관된 고객이 필요한 걸 생각하다 보니 사업이 확장된 것이다.

어느 정도 사업이 자리 잡자, 젊은 시절 못다 한 미술 사업에 매달렸다고 한.



 

그렇지만 그의 명함에는 대표나 회장 대신 늘 통인가게주인 직함을 고집한다.

인사동 허름한 주막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기를 즐기는 낭만파로 살아간다.



'통인가게'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바른 문화에 바탕이 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 전통 문화와 미술의 가치를 높이고 보존하며, 우리 문화를 바르게 전달 정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에 세워졌으니, 4년만 지나면 100주년이 되는 인사동 명물이 되었다.

인사동에서 동헌필방’, ‘통문관’, ‘이문설농탕’, ‘통인화랑등이 서울문화유산에 지정되었으나,

찻집으로 바뀐 동헌필방이나 문 닫은 날이 더 많은 통문관에 비한다면, ‘통인화랑은 인사동 꽃중에 꽃인 셈이다.

통인가게70년 부터 문화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왔다.


 

지하1층에 있는 '통인화랑'은 올해로 42년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화랑이다. 당시 분청작가인 윤광조씨 전시가 첫 전시였다.

통인화랑이 공예 부문이라면, 5층에 있는 통인옥션갤러리는 모던 아트 쪽으로, 2주마다 초대전을 연.

"팔리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우리가 그 작품을 사준다. 다행히 나는 선친에게 물려받아 집세를 내지 않아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사들인 작품들이 지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통인화랑에서 전시한 현대미술 화가로는 박서보씨가 대표적이다. 그1976`묘법` 화풍의 첫 개인전을 '통인화랑'에서 열었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2010년 이후 `단색화` 열풍이 불면서 지금은 호당 단가가 가장 비싼 인기 작가가 됐다.

이동엽씨도 '통인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전시된 작품이 모두 팔려 전체 판을 두 번 바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이동엽씨가  생애 최초로 큰 돈을 만져봤다고 자랑 했지만, 죽고니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김구림, 황성준, 강경구 등 수 많은 유명작가들이 '통인화랑'을 거쳐갔다.




그리고 '통인가게'1층은 생활도자기와 규방공예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다류와 청자, 나전칠기 제품이 즐비하다.

3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되살림 가구를 전시하는데, 되살림 가구란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가구를 재현하는 것이다.

오래된 한옥에서 나온 고재를 사용해 새로 만든 가구를 말한다. 4층은 백자와 17세기 후반의 앤틱가구가 전시되고 있다.

 


또 한 가지 통인가게의 자랑은 외교사절을 비롯한 각 분야 내로라하는 분들을 초청하는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두 달에 한 번씩 통인오페라를 열고, 일 년에 서너 번 판소리와 국악 공연도 한다.

판소리나 오페라 공연을 정기적으로 여는 것은 고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이기도 한데,

주한 미대사는 테러를 당해 얼굴에 상처를 입은 후에도 오페라 공연을 찾았을 정도로 인기다.


 

나는 음악과 미술은 한 통속이라 음악이 미술을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문화예술 수준이 그 나라 품격이고 선진화의 기준이다. 예술인과 예술 애호가들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다.

통인 판소리와 오페라가 우리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관우선생은 말한.


 

그는 거상 임상옥이 말한 상인이 아니라 상도를 지키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산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널리 베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을 사서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통인가게' 주인은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통인가게’ 100주년을 맞이하여 통인도자연구소가 있는 강화 고려산 자락에 1, 2200평 규모의 10개 미술관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박물관 아래 절집’, ‘미술관 속 예배당’, 통인현대도자박물관, 청자박물관, 섬유박물관 등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기보다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전시공간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다.

그동안 그가 수집해온 한국 고가구, 청자, 백자, 미술품 등을 일반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건축가 김동주씨의 설계로 추진되고 있다.


 


미술관에서 불공 드릴 수 있는 불당은 첨단 영상 등으로 꾸며 평소엔 오페라 공연도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될 것이라 한다.

2탄은 미술관 속 예배당이다. ‘박물관 아래 절집과 같은 콘셉트다. 스님과 목사도 큐레이터처럼 근무하게 된단다.


 

관우 김완규씨는 돈을 쫓는 거상이라기보다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

고급 요정이 아니라 간판도 없는 인사동 다리밑 선술집을 즐겨 드나들며 주당자리를 꿰차고 있다.

집에선 수시로 난을치는 서화를 즐기기도 하지만화가나 글쟁이들이 모여 막걸리 한 사발 하는 풍류를 더 즐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예술가들의 참새 방앗간이나 다름없는 '통인가게'에 문화예술인들은 꾸준히 드나들 것이며,

대폿집 어디에선가는 그가 즐겨 부르는 단가 이 산 저 산이 구성지게 흘러나올 것이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사진, / 조문호






















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하지만, 모든 건 바뀔 수밖에 없다.
세월 따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고, 바뀐 손님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장사 속성 아니겠는가?

싸구려 기념품점과 장신구점,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지만,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세가 듬직한 분들이야 아쉽겠지만. 젊은이들은 오늘의 인사동이 즐거운 걸 어쩌랴?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변화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쉼 없이 변모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사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곳곳에는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집은 민가다헌이란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도 아직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인사동 초입의 승동교회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태화빌딩 자리는 태화관에서 명월관으로 바뀐 역사적 자리다.

그곳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자리가 아닌가.


 

인사1길 골목 깊이 숨은 100년 넘은 오동나무와 오래된 한옥 서까래들이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인사동이 구한말부터 문화의 거리로 불려왔지만,

우리시대의 인사동은 1960대부터 70년대에 형성된 인사동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그 무렵 골동품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는 가운데, 표구점, 고서점, 화랑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인사동 대로변에 표구점들이 30여 곳이나 몰린 적도 있었다.

표구하던 그림을 길가에서 말려 인사동 거리자체가 미술관 같았다.


 

인사동에 돈이 몰린 시절도 있었다.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하며 화상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라도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들이 몰렸단다.

가끔은 추사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눈 밝은 자들이 보석을 찾아내는 금광 같은 곳이었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인사동에서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화랑을 만드는 등 인사동에 돈이 몰리며 인사동의 판도가 서서히 바뀐 것이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그림을 사들였는데,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필방은 대부분 남아있다.



지금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은 대부분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은밀하게 보여주며 거래하던 시절은 끝난 셈이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어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거래된다.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나 액세서리가게, 옷가게가 대세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는 보석상과 악기점까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이젠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영세업자들은 버텨나지 못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은 서서히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화방과 필방, 지물포, 갤러리들이 남아있어 화가나 서예가 등 작가들은 드나들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 한 가닥은 자리를 지키는 셈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을 정겹게 만든 것은 골목골목마다 박혀있는 술집들이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한옥으로 된 음식점들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리 저리 연결된 골목에는 술집과 한식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맛 집들이 몰려있어 그나마 옛 분위기를 일깨워준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가 개막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인사동 골목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전시 작가는 물론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울려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데,

예전 같았으면 담배연기 자욱한 주청에서 노래 가락도 간간히 흘러나왔다.

술자리에서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 된소리도 났으나, 요즘은 술 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주청에서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풍류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사동집정도다,

실비집’, ‘하가’, ‘누님칼국수’, ‘실내악’, ’춘원‘ ‘시인통신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뒤에 생겨났던 평화만들기뜨락마저 사라졌다.

사라진 가게를 대신해 유목민’, ‘낭만’, ‘시가연등이 옛날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길가에 자리했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나고

초당또한 어렵사리 지탱하지만,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던 수희재인사동 사람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변하는 인사동을 어쩌겠는가?

변한 인사동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정들었던 벗들도 가고, 훈훈한 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설 연휴가 끝나는 날, 연출가 기국서씨로 부터 술두 통지가 날아왔다.
해 바뀌어 술 한 잔하자는 기별인줄 알고 갔더니,
초저녁부터유목민’에 여러 명이 모여 작당하고 있었다.



연극연출가 기국서씨를 비롯하여 마임이스트 유진규씨, 언론인 윤상길씨,

연출가 최유진 교수 등, 다 한 가닥씩 하는 분들이 모여 있었다.

성악가이자 배우인 박준석씨, 문화평론가이기도 한 최정철 감독 등

처음 보는 분도 두 분이나 있었다.



명절 덕담으로 시작된 술자리는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비롯하여

문체부, 예술의전당, 국립극단, 한국에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등으로 옮겨가며,

예술가 엿 먹이는 기관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먼저 언론인 윤상길씨가 말을 꺼냈다.

윤상길씨는 ‘부산일보’에서 시작하여 ‘국민일보’, ‘시사저널’에서 일하다 명퇴하여 조용히 살던 분이다.

이달 초부터 온라인 종합 신문 ‘뉴스코프’ 제작위원과 ‘스포츠 투데이’ 편집위원 자리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얼마 전 들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본인의 뜻을 존중해 비상임으로 맡겨 준 대표와 후배들을 고마워했는데,

막상 일을 하다 보니, 기가 막히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모니터를 끼고 일하는 모습이 마치 닭 싸움하는 것 같단다.

발로 뛰며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뜨는 이야기 짜깁기하느라 컴퓨터와 싸운다는 것이다.



전람회나 연극공연 등 좋은 기사를 찾아나서지 않아, 왜 가서 취재하지 않느냐고 말하면,

‘그긴 왜 가느냐?’는 것이다. 보도자료를 비롯하여 필요한 정보가 인터넷에 있으니까...


 

문제는 인터넷 신문이 살아남으려면, 기사의 질보다 양이란다.

광고주들이 신문매체의 클릭 수에 따라 광고를 주니, 하루에 수십 건의 기사를 올려야 하는데,

기껏 한 두건 밖에 쓸 수 없는 현장 취재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기사 내용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쏠리니, 제목과 무관한 기사도 있단다.

예를 들면 이 이야기 제목처럼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야하고,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하려면, 가지 따로, 잎 따로, 뿌리 따로의 수십 개 이야기를 만들어,

엉터리지만 많이 올리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란다.



클릭수가 많은 것도 연예, 스포츠, 만화 같은 기사가 주종을 이루는데, 흥미위주의 추측기사가 많단다.

그러니 쓰레기 기사를 양산하는 기레기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검찰개혁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언론개혁이었다.



두 번째는 성악가 박준석씨가 말을 꺼냈다.

‘예술의 전당’에 크게는 년봉 1억이 넘는 수백 명의 직원들이 벌어 먹지만,

그 곳에 과연 예술가가 몇 명이나 있냐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국립극단'과 각종 문화재단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할 자리를 예술과 무관한 이들이 좌지우지하는데,

심지어 ‘세종문화회관’ 관장도 회계사 출신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엄청난 문화예산을 각종 재단이나 관련 기관을 통해 쏟아 붓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지인과 출판사의 권유로 몇 년에 걸쳐 두 차례나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중견작가작품집제작지원’에 신청한 적 있다.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하여 묶는 유고집 비슷한 성격의 사진책이었다.



탈락되어 어떤 분들이 받았는지 궁금해 발표된 내용을 살펴보니,

사진부문은 한 사람도 지원받은 사람이 없었다.

더 웃기는 것은 두 번 모두 사진 전문 심의위원을 배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는 쓸데없는 짓거리에 들러리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고 마음 상하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난, 사기꾼 되기 십상인 고상한 예술 따윈 집어 치운지 오래다.

잘 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에 여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놈이다.

그까짓 사진집은 만들어 어디에 쓸 것이며, 팔리지 않는 전시는 해서 무엇 한다 말인가?



그 날 모임에서 예술가들이 정부나 조직에 이용만 당하는 세상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기로 하나 같이 뜻을 모았다. 이니, 공산당 선언 하듯 결기를 다졌다.



예술가를 예우하는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이고,

문화의 향기가 넘치는 살기 좋은 나라임을 정책가들이 정말 모른단 말인가?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장관은 행정과 관광의 전문가라는데,

도대체 예술행정을 어떻게 하는지 묻고 싶다.



뒤늦게 ‘76극장장’이며 조명전문가인 주성근씨가 나타났다.

이 분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 속에서 살아나온 분이라 했다.

옆자리의 최유진씨도 '삼풍백화점' 사우나를 매일 이용했는데,

그 날 따라 가지 않아 살아남았다며, 지난 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기국서씨는 술을 너무 급하게 마셨다.

술을 따르기 무섭게 단 숨에 들이켰는데, 그렇게 마시면 항우장사인들 견딜 수 없다.

술기운에 과격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지만,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공산당 선언 같은 메시지를 내 세워, 다들 상복 차려입고 침묵시위를 하자"는 것이다.

옆에 있던 최정철 감독이 좋은 생각이라며, 상복 값은 자기가 대겠다며 맞장구 쳤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입으로 떠벌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행동하는 예술가들이 아니던가?

이제 날 잡아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한 술집에서 세 시간 넘도록 버티면 장사 망친다며, 2차를 가자고 술값을 거두었다.

다들 일어나 옆 골목에 있는 맥주집 ‘예당“으로 자리 옮겼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자’, ‘아제’, ‘샬라’ 등 다양한 구호들이 나왔는데,

술 취한 기국서씨가 소리 높여 외쳤다. “니미 씨발~”

‘니미’는 추임새에 불과하지만, ‘씨발(始發)’은 최고의 구호가 아닌가?

역시 천재적 기질의 연출가였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뜻밖의 사람이 등장했다.

터키 국립 하제테패대학 도예과 초빙교수로 가 있는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 였다.

지금 막 공항에서 오는 길이라지만, 일행이 있어 긴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한 달가량 국내에 체류하며 한 판 벌이겠다는데, 무슨 일일지 궁금했다.

개인적인 소모전보다 세상 바꾸는 일에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너무 힘들다.

이제 예술가들도 당하고만 살지 않을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늦은 시간에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청진동 술집으로 나오라며 화가 손연칠씨를 바꾸어 주었다.
반갑기야 하지만, 술에 골병들어 술자리는 피하는 처지라 난감했다.
그렇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술집 위치를 몰라 가서 전화했더니, 손연칠씨가 데리러 나왔다.
날더러 ‘서울문화투데이’와 무슨 일이 있었냐며 캐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미운 돌맹이’란 카페에 들어가니, ‘서울문화투데이’ 이대표와
화가 전인경, 정영신씨등 여러 명이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과메기 안주에 고급 위스키까지 나온 푸짐한 술상이었다.




그 날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해 중 가장 큰 일을 치루고 난 뒤풀이였다.
문화에 한정된 신문이라 광고 얻기도 어려운데,
십일 년 동안 ‘문화대상 시상’을 끌어 온 것이다. 


 

처음엔 술을 사양했지만, 연이은 권주에 못 이긴 척 술잔을 받았다
사나이 맹세 개 맹세되는 건 순식간이지만, 어쩌겠는가?
딱 석 잔만 마시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으로 아껴 마시기는 했지만,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손연칠씨가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를 완성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 대표는 왜 나를 싫어하냐며 따져 물었다.
술집에 들어오기 전 손연칠씨의 말과 겹쳐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신문에 글을 쓰지 않는데 따른 오해 같았다.


화가 손연칠씨가 완성한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

처음엔 문화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발행인의 열정에 감화하여 동참한 일이지만,
대가없는 봉사라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일이었다.
종이신문을 고집하는 자체가 운영을 더 어렵게 하는데, 그 걸 지켜보기도 편치 않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고 정한 칼럼 제목도 발목 잡았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잘못된 것을 찾아야 하는 절박감도 따랐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빼딱해 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2년간의 칼럼 투고를 끝으로 전시리뷰만 쓰겠다며 슬며시 빠져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가를 잘 아는 처지라 전시리뷰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누군 쓰고 누군 안 쓸 수도 없는데다, 아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지적하기 힘들었다.
안 좋은 작품을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쪽팔리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 쏟고 뭐 데인다는 속담처럼, 힘들게 글 써주고 욕 얻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일 년쯤 하다 전시리뷰도 손을 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야 처음부터 원고료 없이 봉사할 마음으로 나섰지만, 뒤늦게 끌어들인 정영신씨는 달랐다.
수고비도 없는 취재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일로 수시로 부려먹지 않았는가?
공과 사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 처리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도 있다.




나로서는 ‘서울문화투데이’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고,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며 오해는 풀었지만,
정영신씨가 하고 있는 전시리뷰도 하루속히 그만두어야 해 걱정되었다.
이 날도 시상식을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불려나간 모양인데,
아무리 좋은 일도 민폐 끼쳐서는 안 된다.




아무튼 ‘서울문화투데이’가 좋은 매체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