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스랩(Grus Lab) 설치전경



연말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캐릭터 미니언즈를 주제로 한 전시가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안녕인사동’ 지하 1층에 위치한 인사 센트럴 뮤지엄에서 내년 3월 15일까지 열린다.

국내 최초 미니언즈를 주제로 진행되는 <미니언즈 특별전>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은 애니메이션 '슈퍼배드'

시리즈와 '미니언즈 (Minions)'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콘텐츠 – 아트웍, 영상, 인터랙티브 멀티미디어, 체험,

굿즈 등을 한자리에 모은 글로벌 공식 투어 전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비스트킹덤, 지엔씨미디어가 약 800평 규모 전시장에 펼쳐져

미국 인기 캐릭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미니언즈 특별전' 전경.


'전시장은 '극장과 갤러리'를 시작으로, '악당 그루의 실험실'과 '걸즈룸' '미니언즈 연대기' 등 테마별로 섹션이 나뉘어 구성된다.

'극장과 갤러리'에서는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아트워크과 인터뷰 영상 등이 전시된다.

'악당 그루의 실험실'에는 대형 그루스 카(자동차)가 관람객을 몰입시킨다.

그루의 무기를 만들어보는 게임 외에도 각종 소품이 마련돼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4대 악당 캐릭터인 스칼렛 오버킬, 벡터 퍼킨스, 엘 마초, 발타자르 브랫은 실물 크기로 화려한 무대와 함께 꾸며져 있다.

'걸즈룸'은 귀여운 소녀 아그네스가 제일 좋아하는 대형 유니콘으로 장식했다.

핑크빛 색감과 아늑한 연출로 관람객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장소다.


 '걸즈룸'

또한 최고의 악당을 찾아 떠나는 미니언즈의 모험 일대기가 펼쳐지는 전시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상들이 재생된다. 미니언들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거나 함께 사진을 찍고 즐기면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바나나 볼 풀장'은 거의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큰 바나나 풍선과 더불어 수만 개의 하얀색, 노란색 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모든 연령대 관람객들이 함께 뛰어들어 놀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 백미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소통하는 인터랙티브 체험물이다.

관람객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디지털 기기 기반의 멀티미디어 게임과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그루의 방귀총을 쏘고, 브랫의 춤을 따라해볼 수 있다.


바나나볼 풀장

전시는 내년 3월 15일까지 열리고 관람료는 일반인(만 19세 이상) 1만5000원, 청소년(만 18세 이하) 1만3000원,

어린이(만 7~12세) 1만1000원이다.


나인트리 프리미어 호텔의 ‘미니언즈 특별전 패키지’를 이용하면 객실에서의 1박을 포함해 2인 조식뷔페 이용과

미니언즈 특별전 입장권 2매가 함께 제공된다.

‘미니언즈 특별전 패키지’는 12월 19일(목)까지 운영되며, 나인트리호텔 공식 웹사이트 또는 유선으로 예약 가능하다









지난 14일은 영문도 모른 채, 안성에 있는 변승훈씨 도예공방에 끌려갔다.
그 날은 여의도 집회 가는 토요일이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나?
일을 끝내고 여의도 갈 작정으로 일찍 출발했는데,
마포에서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우는 걸 보니 좀 불안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변승훈씨 공방이라면 한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를 알게 된지가 수십 년이 되었건만, 작업실은 커녕 그의 전람회조차 몇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도 ‘민예사랑’에서 초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스스로 전시장 금족령 내린 그간의 사정에 또 모른 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빚진 듯한 오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변승훈씨 전시를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일 처음 본 건 80년대 후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남다른 도예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번째 본 것은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민예사랑’의 ‘빙빙유람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영태씨 연락으로 갔는데, 변승훈씨가 전시하는 걸 모르고 간 것이다.



30여년 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놀랍게 변신해 있었다.

투박한 질감의 매혹적인 그릇에 마음을 뺏겼으나, 전시 후에 또 잊어버렸다.

변승훈씨 분청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는 여러차례 들었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다.

인사동 술자리에서 간혹 만나도 쓸데없는 술주정으로 시간 보냈다.



느닷없이 최석태씨와 변승훈씨 공방을 찾게 될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가서야 알았지만 작품집 제작에 필요한 사진찍을 일이 있단다.



일단, 작업실 주변에 늘려 있는 그의 도자 작품에 압도되었다.

변승훈씨의 작품 영역은 분청의 생활도자에 국한되지 않고, 회화적, 부조적 도자로 폭 넓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통 분청을 기반에 둔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분청세계를 개척했더라.

점심 때라 식당으로 안내되어 밥부터 먹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방황한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한 때 록그룹을 결성하는 등 음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계기로 홍익대에 진학하여 섬유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도중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85년부터 도예에 몰입했다고 한다. 

분청에 일가를 이룬 윤광조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다.



다시 공방에 돌아와 그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뒤늦게 듣게 된 많은 이야기와 작품집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난,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을 유달리 좋아한다.

분청하면, 분 바른 여인네가 술 한 잔 마신 듯한 불그레한 얼굴부터 연상되는데,

서민적인 인상을 주는 분청의 투박한 질감이 너무 정겨웠다.

한국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분청은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고있다.

우리네 정서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분청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숨소리를 듣는 듯 친근하다.



공방 입구에 자리 잡은 변승훈씨의 분청 항아리는 기존 형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 멋대로 생겼지만, 볼수록 정감 가는 작품이었다.



변승훈씨 작품 디테일에서 삼베같은 투박한 직조의 결을 느끼는 것은

섬유미술을 전공한 그만의 감성이요 감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형된 작품들이라 자칫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하나같이 자연스러웠다.

사진 찍을 때의 자연스럽다는 말에 앞서 모두 자연을 닮아 있었다.



분청사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분청자기에 머물지 않았다.

현대적인 형태의 기물제작에서부터 목탄 드로잉을 도자 부조로 표현한 벽화에 이르기 까지 폭 넓었다.

이미 분당 요한성당과 대화성당 등의 도자벽화에서 보여준 작업들은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분청사기의 평면화 작업에 일가를 이루었다.



작가의 실험적 도전정신도 돋보였다.

지금 작업 중인 작업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불상을 닮았다.



그리고 지금의 공방자리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자리라는데,

그곳에서 몇 백년 전의 분청사기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선조의 대를 잇는 필연의 업인지도 모른다.

그 게 분청에 전념한 계기라는데, 지금 사용하는 흙도 모두 그 터에서 나온 흙이란다.



변승훈씨는 술을 즐기는 애주가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일체 술을 마시지 않는단다.

그 날도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술을 마셨는데, 운전 때문에 나만 못 마시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체되어 여의도 가는 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비롯하여 

누님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다는 이야기 등 집안의 감추어진 이야기까지 들춰냈다.

청바지를 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눈치 챈 누님이 책갈피 속에 몰래 넣어 둔 5백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단다.



항시 돌이나 나무의 질감을 어루만져 그런지, 그 질감이 자연스럽게 옮겨 간단다.

작품에 드러난 질감도 그냥 생겨 난 것이 아니었다.




흙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스스로가 흙이라는 그의 말처럼, 아낌없이 작업에 불 태웠다.



술이 떨어져 다시 읍내 술집으로 옮겼는데,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음주면허라며 호기 부린 때가 엊거제 같은데, 뒤늦게 철든 셈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일어섰는데, 변승훈씨도 서울가겠다며 따라 붙었다.

공방 문단속도 하지 않고 불도 켜두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두 사내의 취중 잡담을 음악삼아 들어야 했다. 


"아이구~ 내 팔자가 와 이래 댓뿟노?"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화사집' 초판에 얽힌 이야기


▲ 표지 화사집 초판 표지
ⓒ 소명출판사



상상속의 동물인지 실존하는지 헛갈리는 희귀본이 있다. 김구 선생이 직접 서명해서 증정한 <백범일지>라든가, 1973년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월간문학사판 <농무>는 구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소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구경은 할 수 있다. 근대 서지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조차 존재한다는 것만 알뿐 그 실물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한탄한 책이 있다. 1941년 오장환 시인이 경영하던 <남만서고>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한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특제본이 그 주인공이다. 

미당 서정주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 국립중앙도서관이 <화사집> 특제본을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근대 서지 전문가들조차도 그제야 <화사집> 특제본이 있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특제본 <화사집>은 경매에 낙찰된 가격이 무려 1억 원이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제본이란 말 그대로 특별히 제작한 한정판이라는 의미인데 이 사전적인 설명만으로는 <화사집> 특제본의 귀함을 다 담지 못한다.

<화사집>과 시인 오장환

먼저 서정주의 <화사집>을 발행한 오장환 시인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다. 오장환 시인은 1937년 시집 <성벽>을 발표했으며 서정주, 이용익과 함께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고 심지어 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문인들이 친일성향을 보였지만 오장환 시인은 꿋꿋하게 지조를 지켰다.

서정주 시인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우정을 나눈 것이 <화사집>을 출간하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부락>은 1936년 당시까지만 해도 문단에서 그럴듯한 명성이나 경력이 없는 서정주가 주도를 해서 창간을 한 소박한 시 동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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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 또한 서정주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무명신인들로 김진수, 김달진, 오상원 등이었다. 부락이라는 명칭 또한 무슨 심오한 뜻이 아니고 그냥 여러 민가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뜻하는 그 부락이다. 시작이 미약했고 끝도 미약했으니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오장환은 미당이 친일활동을 한 이후로는 교류를 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인사도 하지 않으며 친일파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은 1946년이 되자 임화 등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8년 월북했다. 오장환 시인의 시는 강건하고 치열했지만 그의 일생은 짧았다. 많은 월북 작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사망시기와 사망원인이 분명치 않다. 늦어도 1953년경 결핵 또는 숙청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에 유학 생활을 하였었는데 이때 일본의 화려한 장정 책을 접하고 장차 본인도 아름다운 장정으로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서양 서적이 많이 유입되고 출판 산업이 발달한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오장환 시인은 주 책방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가죽을 비롯한 고급 재료로 장정을 하고 화려한 마감을 한 서양의 고서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보고 오장환 시인은 조선에 돌아간다면 한정판을 전문으로 만드는 단체를 만들어서 춘향전이나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고전이나 조선 현대 문인들의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오장환은 시인이면서 발행인이기도 하고 한정판 애호가였다.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가 이봉구의 기억에 의하면 오장환이 일본에서 귀국하고 나서 1938년에 차린 책방 '남만서방'는 시집, 문학, 역사, 철학책을 주로 취급했고 희귀본과 호화장정본이 가득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의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 물려받은 유산을 밑천으로 해서 서점을 열은 서점이다.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 시집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차린 것을 두고 세간의 사람들은 '일 년에 시집이 몇 권 출간되지 않는 나라에서 웬 시집 전문 서점이냐?'며 오장환 시인의 객기를 어지간히 걱정했다고 한다. 

서점 정면 벽에는 이상이 선물한 자화상이 걸려있었다. 1940년대 '남만서방'에 자주 드나들면서 벽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과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책들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느낀 십대 후반의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인환 시인이다. 

'남만서방'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은 보통의 그것처럼 근엄하고 멋있는 모습이 아니고 연필로 그렸는데 머리는 무성한 잡초처럼 보였고 수염은 면도를 하지 않아 갈대밭처럼 보였다니 소년 박인환은 적잖이 놀라기도 했을 터였다. 서점이름도 평범함을 거부하고 '남쪽 오랑캐'를 뜻하는 '남만'이지 않는가.  



          

오장환 시인이 유학하던 시절 도쿄에는 '남만서점'이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책을 펴내다가 판금을 당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오장환 시인이 서울에 서점을 차리면서 도쿄의 서점 상호를 따온 것이 아니겠냐는 설이 있다. 아쉽게도 서점은 문을 연 지 2년이 채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만다. 대신 남만서점의 고객이었던 박인환이 파고다 공원 근처에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열었고 그 이름처럼 외국 서점을 연상케 하는 서양 책들이 많이 진열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이유

다시 <화사집> 특제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장환 시인은 본인의 시집을 수수하고 평범한 장정으로 출간했지만 한때 동인으로 활동했고 절친했던 후배 미당의 <화사집>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으로 출간을 했다. 한마디로 미당의 시에 홀딱 반한 오장환 시인은 발표작도 얼마 되지 않은 미당에게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미당은 일지감치 오장환 시인에게 시집에 수록할 시를 넘겼지만 1941년에 와서야 출간이 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것은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결국 당시 남대문 약국의 주인이자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했던 김상준이 500원을 출연해서 간신히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화사집> 모두를 호화 장정판으로 출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과 한정판을 따로 제작했다.

한정판들은 가로 14.5cm, 세로 23cm인 데 비해서 보급판은 가로14.5cm, 세로21cm로 작은 크기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100부 한정판 시집'이라는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보급판도 하드커버였는데 몇 부나 발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정판이라고 해도 표지나 용지를 조금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제작하는 우리의 출판 관례와는 달리 <화사집> 한정판은 그 외관이 보급관과는 차원이 다르게 제작했다. 총 100부로 발행했으며 초판본 속지에 번호별로 용도가 아래처럼 기재돼 있었다. 
 

正壹百部限定印行中
第壹番에서 第拾五番까지 著者寄贈本
同拾六番에서 同五拾番까지는 特製本 
同五拾壹番에서 同九拾番까지 竝製本

同九拾壹番에서 第百番까지는 印行者寄贈本 
本書는 其中第 番 


정리하면 1번에서 15번까지는 저자 증정본, 16번에서 50번까지가 문제의 특제본, 51번에서 90번은 병제본(병제본의 의미가 분명치 않지만 대략 보급판 정도의 뜻으로 추측된다), 91번부터 100번까지는 발행인 증정본이라는 것이다. 번호별로 정확한 용도가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번호가 인쇄돼 있지 않은 책이 많았고 수기로 임의로 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화사집>은 오장환 시인이 장정을 책임졌고, 정지용 시인이 표지 제호를 썼으며 근원 수필로 유명한 김용준의 그림을 수록한 그야말로 당시 내로라하는 문인이 동원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특제본만은 내지를 태지(닥나무와 이끼를 섞어서 제작하는 한지)를 사용했고, 비단으로 책 등을 만들었으며 책등의 책 제목을 붉은 색 실로 수를 놓아 만들었다. 특제본은 한눈에 보기에도 증정본과 병제본과 확실히 구별되는 군계일학이었다. 저자와 발행인 증정본은 말 그대로 증정된 비매품이었다. 그러니까 35권의 특제본은 한정판의 한정판이었던 셈이다. 

보급판이 1원 80전, 병제본이 3원이었고 병제본보다 크기가 크고 장정이 화려한 특제본은 5원이었다. 특제본을 제외한 나머지 한정판들은 능화판 문양의 누런색 표지다. '모두 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병제본과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은 의미가 비슷해서 헛갈리는데 가격이 다르고 장정도 달랐다.

보급판은 두껍고 딱딱한 종이 위에 천을 덧씌운 하드 커버형태로 제작되었다. 보급판이지만 상당히 고급스럽게 제작되었다. 최근 경매에서 원저자와 발행인 증정본도 경매에서 5천만 원에 낙찰되었고 한정판과 한날한시에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된 보급판마저 1천만 원에 팔리기도 한다.

< 화사집>은 당시 문단의 큰 자랑거리였다. 김기림, 임화, 김광균을 비롯한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9명의 문인들이 명월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워낙 오장환 시인이 술을 좋아해서 나온 말일 수도 있는데 명월관 기생 치마폭에 붉은 실로 '花蛇集' 석 자를 수놓은 다음 특제본 표지로 삼았다고 한다. 자줏빛 실로 제목을 수놓은데 오장환 시인이 직접 수 놓은 집에 가서 한 권 한 권 제대로 하는지 참견했다고 한다. 



화사집 내지 그림 뱀이 사과를 물고 있는 아름다운 내지 그림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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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사집>출간 50주년이 되는 1991년에 도서출판 전원에서 명월관 기생 치마폭으로 표지를 삼은 <화사집> 특제본을 재발간하기 위해서 원본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서정주 시인의 기억에 의지해서 <화자집> 특제본의 복간본을 출간했다. 1941년판 특제본을 그대로 구현한 복각본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500부 한정판이었고 지금은 이 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나중의 일이지만 김광균 시인조차도 <화사집> 특제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세월이 흘러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7년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전20권 미당 서정주 전집을 발간했다. 물론 친일과 군사정권을 찬양한 글들은 포함하지 않은 전집이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화사집>은 한국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며 화사집을 읽고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찬사가 그리 틀리지 않는다. 읽을 때 마다 아름다움에 몸서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찬사도 수긍하게 된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말이다. 


 [스크랩] 오마이뉴스(시민기자)박균호







  






인사동이 인사동이 아니다.
인사동 혼 나간지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건만,
실오라기 같은 미련이라도 잡고 싶었다.




엊그제, 응향선생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사동은 끝났다”는 것이다.
차마 끝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는데, 꿈 깨라는 말로 들렸다.
인사동 전통도 풍류도 다 바뀌었는데, 사람인들 왜 안 바뀌겠는가?




이젠 인사동을 좋아하던 80대 원로 선생은 대부분 떠났거나,
살아 계셔도 몸이 편 찮아 발길을 끊으셨다.
유일하게 나오는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마저 노망들어 집에서 금족령이 내렸단다.




70대는 끝 난지 오래고,  그나마 60대가 인사동을 주름잡았는데,
그 들도 밥줄 걸린 사람 외에는 등 돌린 지 오래다.
인사동을 챙기던 김명성마저 은평예술촌에 푹 빠져있다.




응향 말이 마음에 걸려 인사동 나갔으나,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제 지난 추억이라도 정리해야겠다.

올 겨울 인사동 사진책 만들어지면, 나도 잊으련다.




그래!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도,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해마다 과메기 철이 되면 ‘통인가게’ 상광루에서 킨포크 파티가 열린다.
‘통인가게’ 관우선생이 예술가들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들과 벌이는 잔치로,
이번에는 과메기와 함께 밍크 고래 고기 까지 등장했다.



통인가게김완규, 이계선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정규, 문혜준, 배일동, 김기범,

김시율, 김정범, 라선영, 박영수, 송재엽, 양관모, 정호철, 주기윤, 조용희, 이성은,

오진원, 윤규석, 서용민, 이미애, 이세연씨 등 장안에 잘 생긴 미남 미녀가 다 모였다.

못 생긴 놈은 나뿐이더라.


 

이 날은 가슴 아프고 기쁜 두 가지 소식이 날아들었다.

첫째는 관우선생이 자식보다 아끼는 캔죠가 몇 일전 죽었다는 것이다.

쪽 팔리게 개 죽음에 울 수는 없지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오죽하면 손자가 오는 것까지 탐탁찮게 여길 정도였단다.

말로는 손자 녀석이 캔죠에게 물 릴 것이 걱정되었다지만,

내 생각에는 짓궂은 손자가 캔죠를 귀찮게 해서 그러지 싶다.


 

이제 좋아 할 곳이 마누라밖에 더 있겠는가?

그 날도 고래 고기 한 점을 마나님 입에 넣어주는, 평소 안하는 행동을 했다.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알랑방귀 뀔 정도이니, 사정은 보나마나다.


 

그런데 캔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배일동 명창이 한 곡 뽑았는데,

춘향전 이별가에 나오는 갈까 보다였다.

고수 없는 소리지만, 그 소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비통한지 상광루를 울렸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임 따라 갈까보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님 따라 갈까보다.“


    

두 번째 기쁜 소식은 송재엽씨 아들 송자호가 김환기 작품 우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에 낙찰 받았다는 이야기다.

‘M컨템포라리 아트센터수석 큐레이터로 일하는 송자호는 이제 나이가 스물다섯이다.

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 외국으로 나가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해

지인들과 공동 응찰 했다지만, 애비가 뒷돈을 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작품 한 점에 132억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지만, 아무리 비싸도 마약 같은 돈 보다야 작품이 낫다.

단지 걱정되는 것은 돈에 작가들 영혼이 저당 잡힐까 두렵다.


 

두 번 째 배명창이 부른 노래는 단가 이산 저산이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이산 저산은 관우선생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인데, 아마 늙어가는 우리네 심사를 말하는 것 같아 좋아할 거다.


 

누군가 중국 술 한 병을 선물로 가져왔는데, 이름 하여 貴州芳台酒라나.

생긴 꼴이 꼭 농약병같이 생겼으나, 술 맛은 여인네 입술처럼 감 칠 맛이더라.

그 술병을 열지 못해 몇 사람이 달라붙었는데, 알고 보니 마게를 빼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옛날 군바리 시절 노래가 왜 생각날까? 

돌리지마라 돌리지마라 내 앞에서 돌리지마라. 살살 돌리는 그 바람에 신세 조진 사나이다 

잡놈이라 잡스런 생각 밖에 못하니 널리 양지하시길...


 

포항에서 가져왔다는 과메기는 꼬들꼬들한 게 맛있게 보였으나,

동자동에서 급하게 오느라 틀니를 빼놓고 와버렸네.

씹는 것 보다 빠는 게 더 편해 술만 홀짝 홀짝 마셨더니, 알딸딸한 게 기분 죽이더라.



술 마시랴, 사진 찍으랴, 미녀 곁눈질하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그만 술잔을 돌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신통하게도 술잔은 깨지지 않았으나, 막걸리가 튀어 옆에 있던 귀부인 밍크코트를 적셔버렸네. 에고~


 

서울역까지 오는 내내 귀부인께서 얼마나 욕을 하는지 귀가 간지럽더라.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 조문호



































































 





지난 20일 김상현씨의 음악홀 ‘뮤아트’에서 “인사동 사람들을 위한 공연"이 열렸다.

얼마 전 기국서씨 훈장수훈 기념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축하공연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다들 취중이라 제대로 기억 못했는지 몇 명 나오지 않았다.




평일 공연 외에도 봄, 가을로 페스티벌을 갖지만, 그동안 잘 가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끔 다녔으나, 귀에 이상이 생기면서다
조명이 어두운 공연장이라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무례도 마음에 걸렸고, 한 번도 내지 못한 술 값도 부담스러웠다.
이번은 꼭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저녁 여덟시 무렵 집을 나섰다.




옛날에는 고막이 덜덜 떨릴 정도의 볼륨으로 음악에 파 뭍혀 살았지만,
사진에 미쳐 음악에 등 돌 린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번엔 스스로 즐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모처럼 음악에 빠져 볼 작정을 했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뮤아트‘ 입구에서 망설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김상현씨가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뮤아트'의 분위기는 언제보아도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다.



자리에는 조준영 시인과 양평에 작업실을 둔 화가 최용대씨가 와 있었다.
이태원 시절 만난 최용대씨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24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숲‘을 주제로 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주었다.
인사동에서 가끔 만났던 최 형, 안준영, 곽미영, 박소진, 류수씨 등 여러 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날 처음 본 유혜린 째즈 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감미로웠다.
물방울을 튕기는 듯한 영롱한 피아노 음율에 빠져들기도 했다.




선물로 샴페인을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 맛은 샴페인에 대한 기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여지 것 삼페인 하면 40여년 전에 마셔 본 ‘오스카삼페인’이 떠올라 기피해 왔다.
그 당시는 생일이나 무슨 축하할 일만 생기면 “뻥‘ 터지는 소리 때문에 오스카 삼페인이 따라 붙었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그 맛에 고개를 절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샴페인은 가라 안는 기분을 살짝 받쳐주는 좋은 술이었다.




김상현씨의 ‘뮤 아트’는 93년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회원제로 14년 동안 어렵게 끌어왔으나, 건물주 횡포에 신사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원치 않는다는 그의 고집은 사업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그 긴 세월동안 임대료에 허덕이며 버텨온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다. 부도로 무너질 때도 음악이 일으켜 세웠고,
병마에 쓰러졌지만, 음악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사나이가 김상현이다.




그 날은 나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며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를 불렀다.
전시 오프닝 공연이나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뮤 아트’ 본 무대에서 듣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김상현씨가 아픈 후로 감정의 폭이 더 깊어진 것 같다.
그의 노래 소리에서 낙엽 떨어지는 가을 냄새가 난다.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하신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생전의 심우성선생 모습


심우성선생을 추모하는 2019 돌모루유랑예인축제가 지난 16일부터 이틀 간에 걸쳐 ‘공주민속극박물관’에서 열렸다.

심우성 선생의 발자취를 담은 ‘일인극 배우 심우성 아리랑’이 발간되었고,

당시 사진과 저서, 육필 원고 등을 돌아 볼 수 있는 ‘심우성의 1인극 인생’ 자료 전시도 있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정영신씨와 심우성선생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공주로 떠났다.

고속도로가 밀려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현장에 도착했는데,

'공주농악보존회'의 풍물놀이가 민속극박물관 야외 놀이마당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생각 외로 참석한 관객이 적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연극배우 최일순씨 뿐이었다.

그 많은 선생의 제자와 가까웠던 인사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더 아쉬운 것은 추모제가 열리는 어디에도 심우성선생을 그리며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모든 게 낯설었고, 심지어 포스터에 실린 사진마저 젊은 시절 모습이라 다른 사람 같았다.




'공주농악'에 이어 유랑음악가 오트곤바타르가 몽골 전통악기인 마두금을 연주하였고,

저글링 코리아의 재주 부리는 보부상 묘기도 펼쳐졌다.

공연장에서 펼쳐진 논두렁 밭두렁의 ‘동학이야기’가 그나마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심우성선생께서 살아 생전 애써 건립한 ‘공주민속극박물관’을 두고

인사동 여관에서 체류하며 떠돌았던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심우성선생은 인사동을 지극히 사랑하신 분이다.

한 때는 인사동 벽치기 골목 초입에 있는 '푸른별이야기' 구석방을 집필실로 삼아

식사는 '화목식당' 식권으로 해결하고, 잠은 신궁장여관에서 주무셨는데,

아마 그 때가 선생께서 가장 행복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춤꾼 이애주선생이 나타났는데, 다음 날 공연되는 ‘극단서낭당’(이애주, 최일순, 이재선)의

‘넋전 아리랑’에 출연하기 위해 오신 것 같았다.

그 공연은 보고 싶었지만, 하루 더 머물 형편이 아니라 아쉽게 돌아왔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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