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가는 길은 20여 년 동안 쉼 없이 오고 가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들었던 사색의 길이다.

평균 한 달에 두 번 가지만 농사철에는 더 잦아질 수밖에 없는데, 기름 값이 장난이 아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나의 생활비 대부분이 길바닥에 뿌려지는 셈이다.

양평으로 가는 국도를 이용하여 고속도로 통행료는 없지만, 왕복 기름값이 5만원 소요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짐도 짐이지만 만지산 중턱이라 두 번 갈아타는 데다 한 참을 걸어야 한다.


 

국도로 가면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속도를 내지 않아 기름 값이 절약되고 길 막힘도 그의 없다.

도로가 정비된 요즘은 세 시간 반쯤 걸리지만, 쉬다보면 족히 네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혼자 운전하는 시간만이 스스로를 생각하게 하는 유일한 시간인 셈이다.

돌아올 때는 일에 지쳐 생각할 겨를이 없지만,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이라 안성맞춤이다.

정신도 맑은데다 주변 풍경까지 변화무쌍해 사색하는 시간으로 딱 좋다.


 

지난 20일은 특별하게 갈 일은 없었으나 새벽 네시에 집을 나섰다.

요즘 무더운 쪽방에서의 생활에 열 받아 그런지 폭발 직전이었다.

어저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댓글에 악을 박박 쓰며 욕을 퍼부어 댔다.

그 댓글에 대한 감정은, 오랜 악연이 생각나 도저히 누그러트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9년 전 완주 종남산 자락에서 열린 창예헌의 가을여행 때 일이었다.

난 행사를 준비하는 처지라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가 뱉은 말 한마디가 화근이 된 것이다.

소설 쓰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날더러 저 인간이 뭐가 좋아 같이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니

소설 쓰는 친구가 좋은 구석이 있겠지라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이 앉은 술좌석에서 말했더라면 농담으로 여겨 욕하고 넘어 갔겠지만,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그것도 마누라가 듣도록 이야기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수십 년 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며칠 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 혼자 속을 부글부글 끓였는데,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며 그와의 오랜 인연을 끊기로 작정한 것이다.

본인은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 한 것도 잊었는지 그 뒤에도 자기가 필요할 때 연락해 왔다.

도록에 들어 갈 사진이 필요하면 내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서울 올라오면 불렀지만,

내가 미쳤다고 그를 위해 삼천포까지 내려가며, 그 얼굴 보러 인사동 나가겠는가?

더불어 맞장구치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까지 꼴 보기 싫어졌다.


 

그런데, 엊그제 느닷없이 패북에 댓글이 달린 것이다.

처음 페북에 가입했을 때는 누군지 살피지도 않고 페친 신청을 받아주었던 게 탈이었다.

그가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그가 올린 댓글에 오랜 악연이 치솟았다.



 내용인즉, 내가 올린 페북의 글을 쭉 읽어 잘 안다며 충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인데,

내용도 내가 올린 동자동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는 댓글에 처음엔 습관적으로 대꾸했으나,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 “뒤도 돌아보라는 등 두 세 번 올라오는 내용에 저의가 느껴졌다.

아마 위선적인 노인을 탓하는 글에 알랑방귀 끼고 싶었으나, 속보일까 엉뚱한데 댓글 단 것 같았다.


 

댓글도 댓글이지만, 오랜 악연이 생각나 댓글을 지우며 페친을 끊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분노가 식지 않으니, 녹번동에서 술친구 만난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이야기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이 터져 나오는 등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작정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어두운 시가지를 벗어 나 양평 쯤 도달하니 운무에 휩싸인 그림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며 속 좁은 인간의 한계를 탓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속마음을 숨기고 수시로 변하는 인간사를 말하는 듯 했다.



만지산에 눌러 살 때는 새벽녘, 안개나 구름 따라 바뀌거나 사라지는 산의 형상을 통해

지워져 가는 산을 찍은 적도 있었다.

구름에 가려 지워지는 모든 것은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간다는 무위의 사상을 일깨우며,

산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사진 팔아먹을 속샘도 깔렸지만, 사진 아닌 소설쓰는 것 같아 비위도 상했다.

자신을 지우지 못해 다시 사람을 찍지만, 그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용문산 가까이 이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에서 어김없이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세상사를 떠 올렸는데,

부질없는 생각일랑 버리고 좀 더 희망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메시지로 다가 왔다.

미워하는 사람도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친구 모습만 떠올라도 달아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던 일로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졸음방지용으로 준비해 둔 대마초를 한 대 피웠다.

생각을 깊게하는 대마초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끌어내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운전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를 만나면 그 때 일이 다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차는 이미 귤암리 강변으로 들어섰는데,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차를 강변에 세워두고 흐르는 강물을 멍청하게 지켜보았다.




비가 왔는지 흐르는 강물의 속도가 빨라졌고, 우뚝 솟은 만지산 살팔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나쁜 기억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내고, 좋은 기억만 세우라는 것 같았다.

그래! 나쁜 기억은 지우고, 그때 일은 용서하기로 하자.

만나면 그 때 일이 생각나 다시 불편해 질것아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하기로 했다.

대신 그 친구가 말한 뒤 돌아보며 살라는 말은 두고두고 새겨들을 것이다.


 


나 역시, 말 한마디로 남에게 상처 준 적이 한 두 번이겠는가?

쉽게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의 가슴에 박혀 등진 사람은 왜 없겠는가?

그동안 글로서도 숱한 상처를 준 것이 사실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정의롭지 않은 부당한 일을 밝혀내어 시정하는 일은 중단할 수 없다.

고쳐지면 당사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할 작정인데,

개인적인 감정은 없음을 너그럽게 이해하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니가 회 맛을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다.

사진가 김수길씨, 시인 조해인씨와 함께 복에 없는 횟집에 간 이야기다.

네 사람이 회 한 접시를 남겼는데, 상대를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있는데, 김수길씨가 나오라고 했다.
은평구 주민끼리 만나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나왔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난, 주말만 녹번동에 오지만, 그마저 정선 가거나 없을 때가 많다.

마침 하루 전날 조해인씨와 연락이 되어 만나기로 작정했던 터다.

그것도 집 가까이 있는 최원호병원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나가 기다리니 조해인씨는 역촌역 방향에서, 반대 방향에서 김수길씨가 나타났다.

내가 역촌역 부근의 사정을 잘 알아 어디로 가면 좋겠냐고 물었지만, 좀 난처했다.

여지 것 따라가기만 했지 내가 주동이 되어 음식점 안내한 적도 없지만,

상대방 음식 취향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평소 정영신씨와 외식할 때도 실랑이하지만, 결국은 내가 따라간다.

늘상 뭘 먹을까?”하고 물어오면 사모님 드시고 싶은 곳에 가시죠  이런 식이다.

사실, 짠맛이나 매운 맛 같은 강한 맛을 제외한 예민한 맛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것저것 가리고 않고 남 따라 먹는 잡식성이 되어버렸는데,

어찌보면 맛도 제대로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다.

 

더구나 틀니를 끼면 더 맛을 알 수 없다.

맛은 혀로 감지해, 틀니 때문에 맛이 없다는 말은 기분에 의한 것이라지만,

실제 끼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일 뿐이다.

아무리 혀로 맛을 안다지만, 입안에 돌덩이가 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니 맛인지 내 맛인지 분간되겠나?


 

내가 잘 가는 곳은 짜장면 한 그릇에 2,500원이고,

제일 비싼 게 5,000원하는 역촌동 기사식당이지만, 그 곳은 술을 팔지 않아 안내할 수 없었다.


결정을 못 하니, 어디서 보았는지 회집 이야기를 꺼냈다.

정영신씨가 회를 좋아해 한 두 차례 따라갔지만, 별로 탐탁치는 않았다.

아마 김수길씨가 날 생각해 각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안내했다.



조해인씨는 술 끊은 지가 두 달 가까이 되었으나, 그 때까지 춘향이처럼 지조를 잘 지켰다.

나 역시 병원 다니느라 술 마시지 못한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갈보처럼 지조를 팽개쳤다.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듯이 술 술 넘어갔다.

김수길씨 조차 평소 말이 적은 양반이라 주거니 받거니 술만 홀짝였다.

김수길씨가 친구 김일남씨를 불렀으나 마찬가지였다.


 

김수길씨는 정영신씨도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싸웠냐고 물었다.

싸운 게 아니라 요즘 노출되는 것을 꺼려 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싫어해서다.

여자들은 자기 얼굴에 예민하기도 하지만, 주변 지인 중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이혼했으면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지 모르겠다.

대충 짐작하는 년인데, 걸리면 가랑이를 찢어 버릴 작정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찍지만 상대를 배려해 가능하면 예쁘게 나온 사진만 쓴다.

두 번 찍어 그 중 예쁜 사진을 고르고, 그것도 본인이 싫어하면 즉각 내린다.

더러는 찌그러지거나 요상한 표정의 포트레이트만 즐겨 찍는 사진가도 있더라.

예술사진은 찌그러져야 하는가? 제발 남의 얼굴가지고 장난치지마라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갈 일이 있다.

어제 지방에 있는 잘 아는 사람이 페북에 댓글을 달았는데, 별 것 아닌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난, 그 양반이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내 글을 쭉 읽어 잘 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런 거야 있을 수 있겠으나, 처음으로 댓글 달며 충고하는 식이었다.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는 등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며, 뒤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오랜만에 할 소리도 아니지만, 포스팅한 내용도 댓글과 상관없는 동자동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말을 엉뚱한데 풀어 놓은 것 같았는데, 오래 전의 악연으로 생각하기도 싫어 페친을 끊어버렸다.



 

사실, 긴 세월동안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살아왔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 실없는 소리까지 해가면서...

그러나 내 뜻과는 달리 돌아서서는 욕하며 바보 취급 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더러운 세상이 되었고...

 

다들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지, 댓가도 없이 사진을 부탁하고 사진도 그냥 사용했다.

대개 아는 사람들이라 그냥 넘어갔는데, 오죽하면 40여 년 동안 열심히 사진 찍어 거지처럼 살겠는가?


 

그래서 마누라와 이혼하고 쪽방에 들어가며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잘 못한 것은 그냥두지 않고 바로 잡겠다고 나섰다.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남은 세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좆되고 싶으니 

더 이상 씹소리 하지마라.


 


페친 끊은 놈 이야기하다 열 받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술자리가 재미없으니 조해인씨는 살아생전 마광수씨의 숨겨진 이야기를 술안주로 내놓기도 했고,

얼마 전에 인사동에서 전시한 소설가 이외수씨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당시 사정이 있어 개막식에 가지 못했는데, 조해인씨가 이혼한 부인도 왔더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나도 정영신씨와 이혼했지만, 정영신씨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지 않던가?

나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결혼이란 틀 자체를 깨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난 본래부터 음식을 많이 먹지 않지만, 다들 회를 먹지 않았다.

소주 안주로는 얼큰한 매운탕이 더 좋았는데, 비싼 회집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결국 그 회를 싸가지고 정영신씨 갖다 주었지만, 돈만 쓴 김수길씨에게 미안했다.

 

난, 돈 맛도 모르는데다 음식 맛까지 모르니, 끝난 인생이다.

그래도 아는 맛이 하나 있긴한데, 알랑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난, 새 것보다 오래된 것이 더 좋다.
젊을 때 부터 새 옷 보다 양놈 구제품 옷을 더 좋아했으니,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오래 전에 '신사는 새 것을 좋아 한다’는 영화도 있었듯이, 신사되긴 틀린 모양이다.
자동차나 옷이나 물건이 생기면 끝장을 보는 체질이다.




버리겠다는 마나님과 늘 실랑이를 벌이지만, 오래된 물건이 정들어 더 편한 걸 어쩌겠는가?
여지 것 애마도 '포니'에서 시작하여 코란도, 갤로퍼, 무소 등 여러 종류를 갈아 탔지만,
한 번도 중간에 바꾼 적 없이 폐차할 때 까지 끌고 다녔다.
한 번은 운행 중에 차에 불이 나 장열하게 전사한 일도 있지만...




몇 일 전, 차주가 기사도 모르게 타고 다니던 고물차를 폐차장에 보낸 일이 있는데,
노후차량 폐차 보조금 받을려고 보냈다가, 퇴자 맞은 것이다.
범퍼와 외관을 수리하면 주고, 그냥 두면 사고차량이 되어 안 된단다.
좌우지간, 없는 놈만 죽어나는 잘 못된 법이나 규정이 한 둘이 아니다.




덕분에 폐차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똥차를 찾아 극적으로 구출해 온 것이다.
그렇찮아도 차가 없어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그 곳에 끌려 간 차가 얼마나 쫄았으면, 잡소리도 없이 더 잘 나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튿날 새벽 정선으로 떠났다.





할 일도 많지만, 지난 번 잊어버린 안경을 찾기 위해서다.
도수가 맞지 않는 옛날 안경을 쓰고 다니려니, 어질 어질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일 광복절에 광화문에서 권철씨 전시가 있어, 당일치기로 오려고 새벽 네 시에 출발했다.
양평 쯤에선 구름이 몰려다니며 분위기를 잡더니, 횡성 초입에서야 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침 불볕을 보니, 한 낮 더위가 사람 잡을 것 같았다.




정선에 도착해 라면부터 한 그릇 끓여먹고 텃밭에 일하러 나갔다.
지난 번 풀숲에서 안경을 벗은 기억이 선명해 그 자리를 이 잡듯 뒤졌으나 없었다.
네 시간 가까이 헤매었으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모아 둔 잡초를 퇴비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마당에 눈 익은 게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지 것 찾고 있는 그 안경이 처참하게 사망해 있었다.




안경에 발 달린 것도 아닌데 마당에 어떻게 내려 왔으며, 꼴은 또 그게 뭐냐?
추측컨대, 옆집 강아지가 풀숲에서 물어다 마당에 갖다 놓은 걸, 옆집 차가 깔아 뭉갠 것 같았다.
반갑기는 했지만, 사용할 수 없도록 망가져 그만 맥이 풀려버렸다.
마치 유해를 수습하듯 돌아 올 채비를 했다.




방안에서 옷가지를 챙기다 보니, 하늘에 구멍 난 차양이 가관이었다.
집이나 차나 하나 같이 나를 닮아 고물 뿐이다.


안경은 못 쓰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발길은 한결 가벼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두워질 때 까지 찾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방림을 거쳐 안흥 쯤 들어서니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말 걸었다.


“고물님, 제 노을이 보입니까?”
“눈은 가물 가물해도 카메라는 밝다”며 사진을 찍었더니, 다시 말했다.
“지나치다 찍는 풍경은 아마추어 사진이라 무시한다며 사진은 왜 찍나요?
“야~ 입장 곤란하게 하지마라. 찍어야 구라를 풀게 아니가?”
“세상에 정답이 있나요?

난, 볼거리를 선사하려 그림같이 하늘이라도 물들이지만, 당신은 뭘 주고 갈 건가요?“
"할 말이 없네"

사진, 글 / 조문호










이 찜통 같은 날씨에 인사동의 시원한 전시장에서 작품에 푹 파묻히는 건 어떨까?
새로이 개관한 ‘이노아트스페이스‘에서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 열리고,
‘마루갤러리’에서는 이도씨의 ‘서사를 만드는 정물’전이, ‘통인화랑’에서는 김정선씨의 ‘다시 지금 여기에’전이 열린다.


 


그리고 지난 6월 개관한 '베를린미술관‘에서는 융합서예술가 양상철씨의 전시를 비롯하여

24명의 작가들이 함께하는 ’8월의 만남‘전이 기다린다.

여러 개의 전시장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곳곳에 마련된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몇 몇 아는 전시가 이 정도인데, 인사동 곳곳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가 얼마나 많겠는가?

다양한 작가들의 예술 혼에 흠뻑 빠지다보면,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9일 오후 무렵, 무작정 인사동에 나갔다. 그리운 사람도 많고, 보고 싶은 작품도 많아서다.

제일 먼저 금보성씨의 전시가 열리는 이노아트스페이스부터 들렸다.



그런데, 입구에 줄지어 선 축하 화분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보내 주는 화분을 어쩌겠냐마는, 이젠 쓸데없는 낭비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전시장을 답답하게도 하지만, 쓰레기가 될 화분에 작품이 파 묻혀 버린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화분 외에는 담을 수 없단 말인가?



전시장에서 심철민 관장과 초대전을 여는 금보성씨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존의 보아왔던 한글 작품과는 좀 달랐다.


 


최근에는 아리랑을 주제로 민족의 정서에 다가간 작업을 해 왔으나

이번에는 한글의 역사성과 생명성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한글에 담긴 정신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 역사성은 암각화의 상형문자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한글 자모를 바탕으로 철판이나 동판을 부식시켜 만든 부조였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철판의 나이테 속에는 푸른 나뭇잎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철이 한글의 역사를 상징한다면 작은 나뭇잎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했다.


 

금보성씨는 금년에만 아홉 번의 개인전을 열었던, 잠시도 쉬지 않는 열혈작가다,

같은 시간에도 자하미술관에서 열리는 나랏말싸미’ 단체전을 비롯하여

외국이나 지방에서 각기 다른 전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는 개인 작업에만 열정을 쏟는 것이 아니라, 작가지원에도 온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치 미술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오는 819일까지 열리니, 꼭 한 번 들려보기 바란다.


 

두 번째 들린 전시는 마루갤러리’1관에서 열리는 이도씨의 서사를 만드는 정물전 이다.



작가가 그린 소재들은 사실대로 재현하기보다 화면을 이루는 계기와 연유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수확과 연결되는 시간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그 시간은 사람의 강인한 정신을 담아 내었다.

 


작가가 보여주는 도상이 추상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이미 사유되어 정서적 이해로 얽힌 하나의 덩어리였다.

바로 정서적 운동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유이고 느낌이다.

단호하면서도 생략된 선들이 만들어내는 완강한 힘이 핵심이다.


 


미술평론가 강선학씨는 완만한 선, 직선이 최소화된 배분의 화면은 구성과 해체라는 자신의 어법을 보여주고,

머뭇거림 없는 단호한 선들과 색상들, 흔적은 최소의 색, 도식화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표정과 관계,

의외로 서사가 이루어지는 정물적 시선으로 인물을 구축하는 독특한 조형성 태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선이 보이는 형태의 단호한 결정, 그러나 그 단호함 밑으로 보이는 중첩된 선들의 민감한 배치, 선의 다의성이 주는 잠세적인 운동감,

대지를 밟고 선 강인함의 현재화야말로 작품을 이해하는 기항지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전시 팜프렛에 적힌 작가 프로필을 보고 약간의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수미술대전' 초대작가상 수상이라 적혀 있었는데, 그 상이 그토록 자랑스러웠던가? 

'정수미술대전'은 박근혜가 만든 '정수문화재단'에서 주는 상이 아니던가?

상이란 것 자체가 작가를 병들게도 하지만, 상에 따라서는 작가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난, 작가주의 보다 인간주의자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인간답지 않으면 발톱에 때 만치도 여기지않는다.

여류작가 이도씨의 작품은 13일까지 열린다.


 

그리고 마루갤러리신관에서는 김동욱, 김영진, 김용식, 김주희, 김지은, 빅터조, 오재언, 왕에스더,

이우현, 이정연, 장영훈, 정현태, 제소정, 채정완, 최은서, 한민수, 허진의. 호 진 씨등 젊은 작가 18명이 함께 한

젊음 그리고 오늘전이 12일까지 열리고 있다.



마루갤러리’2관에서는 세계 유일의 오가닉 그림을 그리는 황복은씨의 별이 쏟아지는 푸른 정원이 열린다,

염색기법에 의한 다양한 천들과 도자들이 어우러져 전시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베를린미술관개관초대전으로 열리고 있는 제주의 양상철씨 전시도 눈길을 끌었다.

서예와 회화를 융합하여 작업하는 양상철씨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장르를 해체하는 작가다. 

제주의 대표적인 작가로 나무, , . 도자 등을 이용하여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는 과거의 서예 가치를 미래의 가치로 끌어 올린 가장 현대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제주밀감껍질을 말려서 가루 낸 것을 석고와 풀, 아크릴로 반죽하여 바르고,

끈적이는 면 위에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붓질로 글 쓰듯이 그려 낸 작품이다.

꿈틀대는 그림의 형상들은 암각화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닮은 것도 여럿 있다



 

 필락해집'이란 작품은 '급한 붓질에 끌려 게들이 모여든다'는 뜻이다.

굵게 내려 그은 붓질이 폭포가 되었는데, 가히 붓질의 힘이 폭포를 능가하였다.

이 그림은 어릴 적 폭포 아래서 게를 잡던, 오래된 기억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강민기, 권치규, 김기애, 김병규, 김재호, 김지영, 나인성, 남희조, 도태근, 박건재, 박찬걸, 성도형,

송미진, 송현구, 양진옥, 이성옥, 이인숙, 이창희, 이해성, 임세현, 임호영, 장수빈, 주영호, 최승애씨 등

24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8월의 만남전도 열리는데, 두 전시 모두 13일까지 열린다.


 

오는 825일까지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김정선씨의 다시 지금 여기에전도 볼만하다.


 

김정선씨는 오래된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여 유화를 그려 온 작가다.

한 동안의 관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 동안 사진에 의한 그 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몇 장은 가지고 있을 법한 어렴풋한 형상의 사진 이미지들은 보는 이들에게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그의 주변 친구나 가족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화면을 메우지만,

그 것들이 누구이며 무엇이고, 어디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이나 풍경들은 존재론적인 세계에서 규정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의미를 위해 임무를 부여 받은 것도 아니다.

작품의 소재가 되는 인물과 풍경은 그저 그렇게 자리에 있는, 즉 실존하는 어떤 것들이다.


 

기억을 살려내는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보잘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과

그것이 우연히 망막에 맺혀 만들어내는 색채를 그만의 기억으로 그려낸다.

그 작품이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 느끼고 기억하게 하는 순간의 진실이다.


 

사라져가는 자신 안의 어떤 것들을 필사적으로 구출하고 살려내기 위한 인공호흡이며 몸짓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모든 것들을 살려내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한가? 누구를 위해, 아니 무엇을 위해 불태우고 있는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스스로를 충전하러 나가자.



 사진, / 조문호






















 

 

 

 







정선에선 바삐 일만 해야 하는 건가?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내니, 상념에 잠 못 이룬다.
눈을 떠보니 아직 새벽 세시.
어두워 일도 못하는 시간에 뭘 할까?
갑자기 적음의 시 ‘새벽녘’이 생각난다.
책꽂이에서 시집을 찾아보았다.






“잠 안 와 뒤척이는
새벽녘 그만
불을 켜고 일어나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읽을까(아니),
차나 한 잔 (아니),

木石처럼 앉아 있는
두 빰에
웬 일인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





갑자기 저승 간 적음이 보고 싶다.
외로움을 낄낄거림으로 위장한 땡초가 보고 싶다.
아직 ‘월간 빠’는 유효한 건가?

발문은 표성흠씨가, 그림은 신동여씨가, 사진은 내가 찍었다.










인사동 아리랑 1

비 / 강 민


인사동을 걷는다


스산한 경인년 여름, 비는 멎지 않았다
찻집<귀천>의 주인 목순옥 여사도 떠났다
그녀는 거기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천상병 시인 만나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아름다웠다고 말하였을까

세월의 이끼 낀 인사동을 걷는다

흐르는 세월처럼
눈물처럼
비는 멎지 않는다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 2019


2010년 경인년 여름, 비가 출출히 내리는 날 인사동을 걷는다.
인사동 나오면 늘 들르던 곳이 찻집<귀천>이다.
천상병 시인 부인이 경영하던 조그마한 찻집은 문학인들,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사랑방이다.
시인은 약속 없이 귀천에 와도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을 만나곤 했다.
술 한 잔 마시면서 웃고 울던 그들도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해 저세상으로 하나씩 둘씩 떠났다.

담배 한 갑, 막걸리 두 병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천상병 시인도 이미 하늘나라로 갔고,
시인 부인인 목순옥 여사도 25년 인사동 지킴이를 내려놓고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이제 인사동에 와도 갈 곳이 없다.
흐르는 세월처럼, 비처럼, 눈물이 멎지 않는다.(박미산)






인사동 아리랑 7

유목민 이야기 / 강민

 

날이 저문다

해가 저문다

골목길의 모습이

기우는 낙일(落日)에 젖어 낯설다

갑자기 붐비는 인파, 시끄러운 소음이 멎고

홀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그의 부인 목순옥,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

그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움직임이 없다

슬프다

정물화된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는데

쭈그러진 모자에 카메라를 든 유목민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옆에 개량한복의 예쁜 사진작가가 웃고 있다

이 삭막한 인사동의 길잡이 부부

막힌 가슴이 뚫린다

소음이 들리고

정물화된 풍경이 움직인다

다시 한 세월은 가고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외포리의 갈매기, 푸른사상, 2014.

 

인사동은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위로 북촌 한옥마을을 두고, 아래로 종각(보신각)과 탑골공원을 두고 있다. 좌우 위쪽으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이 그 아래에 광화문과 종묘가 나란히 있고 인사동은 그 안쪽에 있으니 서울 문화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안국역에서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 쪽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화랑, 고서점, 미술상, 공예점, 찻집, 술집 등이 어우러져 있었으나 쌈지길 등 세련된 현대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옛 정취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특히, 고서점이나 책방은 거의 사라지고 통문관 정도만 남아있다.

시인이 찾은 유목민에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은, 평소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잘 어울렸던 문인들이었을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은 귀천과 유목민 등을 오가며 자신의 붓글씨를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4.19를 노래했던 <!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을 썼던 신동문 시인은 붓을 꺾은 뒤에는 시골에 은거하며 무료 침술을 해준 걸로 유명하다. 박이엽 방송작가는 나의 서양 미술 순례(서경식) 등을 번역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이들은 움직임이 없다. 젊은 날, 시대의 울분을 나누고 예술을 말하던,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인사동이지만 언젠가부터 그곳을 메우던 사람들은 술잔을 놓고 하나 둘 떠나고 없으니 술집 상호처럼 머물지 않는 유목의 인생을 실감하게 한다.

이제 시인도 인사동이 낯설고 허전하다.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 부부를 통해 아직 인연의 끈이 다하지 않음을 알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시인과 친분이 있고, 인사동 이야기를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조문호, 정영신 다큐 사진가일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시인에게 인사동은 현재의 연을 쌓는 공간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시인학교가 인사동을 떠났고, 귀천은 남았으되 귀천의 주인과 사람들이 떠났듯이 유목민의 이야기도 언제까지 쓰일지 알 수 없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한때의 삶과 인사(人事)에 대해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아주 귀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이동훈)




            


강민 선생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들을 찾아보니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 200여장을 무작위로 추려내다보니, 날자와 장소를 미처 메모하지 못했네요.

언젠가 시간나면 그 당시의 이야기까지 곁들여 추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은 조문호가 찍었는데, 조문호가 나온 사진은 정영신씨가 찍었습니다.




 






























































































































































































강 민선생 캐리커쳐는 시인이며 화가에다, 무용평론까지 하신

고 김영태선생의 예술가 초상 시리즈 9집에서 스크랩했습니다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일보 3월20일자에 실린 "건달 할배, 채현국이 말한다 “꼰대들에 속지 말라”는 기사다. 

인사 구술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해방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나온 말인데,

소 선친께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와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해방될 무렵의 채현국씨 나이는 10살로 그 정도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만한 나이인데,

학교친일교육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건 일제 황국신민으로 생활화된 가정교육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가진 근현대사 구술채록 대담에서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문제되는 인터뷰 내용-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아래는 인터뷰 기사 전문이다-


"건달 할배, 채현국이 말한다 “꼰대들에 속지 말라”
개인사 구술 작업하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2019.03.20 / 한국일보 / 스크랩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과 대칭되는 말을 꼽으라면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가 있다. 하지만 앞의 말과 달리, 뒤의 말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회 변화가 급격해 노인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영향력 좀 있다는 노인들이 한다는 얘기는 ‘이만큼 먹고살게 된 게 다 누구 덕이냐’는 것이 대부분이어서다.

조선시대 행장(죽은 이의 언행을 기록한 문장)의 전통까지 겹쳐져서일까. 번듯하게 한자리 차지했으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고,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이며, 그런 자리 하나 못 차지해본 사람은 바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방식으로 내면적 깊이를 제거해버리고 나니, 우리 사회엔 제대로 된 자서전, 평전, 구술 문화가 없다.


[저작권 한국일보] 장신(왼쪽부터)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가 채원국 효암학원 이사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노인에게 속지 말라

그래서 ‘채현국’의 존재는 소중하다. 1935년생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하 ‘선생’)은 1945년 8ㆍ15 해방, 1950년 6ㆍ25 전쟁, 1960년 4ㆍ19혁명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고, 민주화 운동을 후원했고, 학교를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내 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건달 할배’라는 별명답게 오히려 젊은이들더러 “늙으면 뻔뻔해지는 비열한 꼰대들에게 절대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요즘도 여전하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곤 하는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도 거부했다. 채 선생은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가 사람을 속이는 말”이라 본다. 그는 “돼먹지 않은 이들이나 세대갈등이라 부르며 수작을 붙이려는 것”이라더니 “그런 사람들은 원래 젊어서도 형편없었는데, 젊은 시절엔 드러내놓질 못하다가 늙으니까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서울대 출신임에도 서울 광화문광장, 서울역 일대에 자주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를 두고서도 “서울대 나와 의사하거나 법대 나온 내 주변 사람들도 앞에 안 나서고 뒤에서 100만원, 200만원씩 후원한다”며 “일제시대 때 공부 잘하는 게 수지 맞는다는 걸 알고 그저 공부만 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매섭게 쏘아댔다.


◇8ㆍ15 해방이라는 ‘충격’

그런 채 선생은 요즘 구술 작업에 재미를 들였다. 일제시대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기억,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해 연극단원으로 활동했던 추억, 아버지 채기엽씨와 연탄공장과 탄광사업을 일으킨 경험 등을 바탕으로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주로 문헌자료를 뒤적이던 현대사 연구자들도 그의 생생한 기억에 호기심을 내보였다. 실제 몇몇 학자들은 올해 초부터 채 선생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채 선생은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마주했다. 두 번째 자리였다.

채 선생이 파격적 언행을 거듭하는 건 1945년 8ㆍ15 해방이 안긴 충격 때문이다. ‘해방의 기쁨’이 아니라 ‘해방의 충격’이라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채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 “생각하며 살자”

세상이 한번에 뒤바뀐 뒤 이제껏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세뇌된 친일파’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그 이후 채 선생에게 세상을 달리 보는 눈, 달리 사는 법을 일러줬다.

그걸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생각하며 살자’다. 해방은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권력자가 훈련시킨 데 따른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일제시대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해야 했고, 말하지 못하면 얻어맞았다. 뜻도 희미한 일본어 군가(軍歌)를 수없이 불러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술 한잔 들어가면 그 노래가 잘도 나온다”고 했다. 생각 없이, 주어진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다가는 어떤 엉터리 같은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채 선생은 “해방 이후,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서울대? 가정 학대의 정점

해방 뒤 상황은 처참했다. 그 전까지 일본어만 썼으니 중ㆍ고등학교 가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선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릴 적 우리말 소설을 즐겨 읽었던 채 선생은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지금도 “서울대가 최악의 학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말이 낯선 이들은 한문으로 된 시만 읊었다. 전공 수업도 교수가 우리말을 겨우 외워서 가르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해방됐으나 그들은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땐 연극반에 심취했다. 배우 이순재와 같은 극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채 선생에게 서울대란 그저 시험 잘 치는 학생을 뽑는 곳일 뿐이다. 그는 그런 시험 중심 체제를 가학, 그러니까 ‘가학(家學)’이 아니라 ‘가학(家虐)’이라 부른다. 집안의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집안의, 가정의 학대다. 자기만의 독서, 탐구를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립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저 집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 가고 직장을 구한다. 채 선생은 이걸 “통치에 방해되는 생각은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방식”이라 부른다. 이런 방식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탄광 부자 … 과감히 접다

채 선생의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을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준 1960년대 광산 경영에까지 이어졌다. 광산은 원래 아버지 사업이었다. 1952년 연탄공장을 시작한 아버지는 광산주와 계약을 맺고 채굴한 광물 가운데 일부를 수수료로 내는 독립 경영인 ‘덕대’였다. 광산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연극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배우가 되려고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에 들어갔던 채 선생이 뛰어들었다. 공격적 경영으로 그야말로 떼부자가 됐다. 당시 소득세 납부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개발 독재시대였지만 광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무료 진료를 제공했다. 또 흥국탄광은 그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 숨던 도피처이자, 해직기자들의 궁한 살림을 돕는 융통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아버지 사업 잠깐 거들어 드리는 게 목적이었지 돈을 크게 벌 생각도 없었고 부자가 되는 게 창피했다”는 이유로 채 사장은 1973년 그간 잘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10년치 퇴직금을 광부들에게 쥐여주는 방식 등으로 모두 정리했다. 채 선생이 그나마 아버지에게 이어받았던 것은 효암학원 이사장(경남 양산 효암고, 개운중)직이다. 이건 아이들을 키우는 거니 할 만하다 생각했다.


◇제대로 된 기억 전승, 그게 어른의 임무

채 선생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구술 채록은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끝났다. 3시간 가량 이어진 이야기 행군 뒤에도 고령의 선생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채 선생이 구술에 열정적인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기억 전승’에 나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었던 ‘해방의 충격’ 같은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직접 역사를 써야 한다. 채 선생은 도서관 분류법을 펼쳐 보였다. 철학, 종교, 사회ㆍ자연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 등. 그는 “각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시대 경험을 구술하면 광범위한 정보들이 쌓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용비어천가식 구술은 안 된다. 돌직구처럼 묻고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채 선생은 “묻는 사람이 혹시 노인의 체면을 구길까 봐, 질문의 내용이 가혹할까 봐 망설여서는 안 된다”며 “더 엄격한 기록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선생은 노인들에게 기록을 하라고 외쳤다. 대신 이런 조건을 붙였다. “결코 자신의 과거 잘못을 외면하는 합리화는 하지 말 것.”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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