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아리랑’에서 “인사동 백년을 걷다”란 인사동 풍류객을 위한 큰 잔치가 열렸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과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명성씨가 초대한 자리로,

마치 심청전의 심봉사 잔치가 연상되는 그런 자리였다.



그동안 터줏대감이셨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풍류가 이계익선생, 극작가 신봉승선생,

음향의 달인 김벌레 선생은 세상을 떠난 데다 강 민, 신경림, 무세중 선생은 몸이 불편해, 나오실 원로 분이 몇 분 되지 않았다.

엉겅퀴 꽃을 쓴 민영 시인, ‘한국의 아이로 잘 알려진 황명걸 시인, 조선의 삼대구라로 불리는 협객 방동규 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소설가 김승환 선생, 철학자 신성준 선생 등 몇 분 남지 않은 원로께서 먼저 나오셨고,

제주와 부산, 사천, 남해, 단양, 전주, 광주 등 전국 방방곡곡의 풍류객들이 한 분 두 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오부터 오후 아홉시까지 온 종일 잔치를 열어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는데,

무려 15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예전에는 틈틈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으나, 그 비용을 혼자 감당해 온 김명성씨의 아라아트사업이 나락에 떨어져,

오랫동안 소식한 번 전하지 못한 것이다.


 

인사동 백년을 걷다라는 잔치를 마련한 취지는 친일 후손의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게 부끄러워 집을 나와 한 평생 거리를 떠돌며 독서회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 나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았던 노촌 이구영 선생,

문필가이신 박이엽 선생의 노조에 대한 지조, 그리고 저잣거리 웃음거리로 잘 못 왜곡된 천상병시인의

올 곧은 정신을 제대로 알고, 그 분들의 무대였던 인사동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들 모처럼의 잔치 소식에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나누는 정담에 인사동은 봄바람 같은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그동안 소식도 듣지 못한 황명걸 시인의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라는 신간 시선집과

김신용 시인의 비는 사람의 몸속에도 내려라는 제목을 단 신간 시집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 어찌 풍류가 없을 소냐? 전주에서 올라온 음류 시인 송상욱씨의 열 두냥 인생을 시작으로

김상현씨의 아코디언과 장 군의 협연으로 부른  장소영씨의 진도아리랑으로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 갔다.

김상현씨가 애절하게 부른 '떠날 때는 말없이 봄이 오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슬픔에 빠져들었다.

봄이 오면으로 반복되는 절절한 후렴에서 내가 좋아하는 봄날은 간다와 겹쳐지며 설움이 북받힌 듯 했다.


 

부산에서 올라온 김진규 시인은 하모니카 연주에다 천상병선생의 시 강물을 낭송하기도 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천상병시인의 눈에 비친 강물은 기쁨의 강물이 아니라 서럽게 흘러가는 강물이었다.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이지, 기계처럼 돈만 쫓고 살아가는 오늘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난데없는 엉뚱한 일도 벌어졌다.

모임에 참석한 원로 분에게 여비라도 챙겨드리기 위해 80세 이상은 16만원을 드린다고 공지했는데,

한겨레에서 확인도 없이 기사화 해, 돈 얻으러 찾아 온 분이 여럿 생긴 것이다.

사정을 잘 말씀드리고 식사 대접해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참 돈이란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의 원로 분들은 오찬 후 곧 바로 귀가하셨으나, 뒤 늦게 위선으로 똘똘 뭉친 늙은이 한 분이 나타났다.

입구에서 사진 찍는 나에게 사진 찍지 말라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폭력을 저질렀다.

다시 지팡이를 치켜들기에 휘어 잡는 위압에 멈추었으나, 사과하라고 겁박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치매증세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참았다.



무슨 억한 심정에 잔치 집 깽판 치려 작심한 모양인데, 언론이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든 불쌍한 노인이다.



 

내가 이 잔치를 기록하는 사진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 찍혀 않될 일이 있으면 조용히 말을 하던지, 카메라 확인 후 지우면 그만이다

평생을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에게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니,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오래전 자선을 내 세워 사익을 취한 기획전을 문제삼은 적이 있는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분은 일체 카메라에 담지 않으나, 보기 싫은 사람은 찍을 필요도 없다.

한 달 전에는 우연히 창성동 실험실갤러리에서 열린 이지녀씨의 무속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날은 노광래씨 흉사를 알리어 문상객을 모아준 일을 격려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마음이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좀 있다 다른 지인에게 들어보니, 나를 더 두들겨 패고 싶었으나 폭력 전과가 많아 참았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옛날에 저지른 폭력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들 떨어진 분이지만,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봉변 당하지 않고 살았던 게 용하다 싶다.

여지 것 돈으로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내 한테 걸리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입구에서 분노를 삭이다 연회장으로 들어가 보니, 배평모씨와 김언경씨가 보였다.

그들을 향해 사진을 찍는데, 난데없는 지팡이가 또 나타난 것이다.

키가 작아 파묻혀 못 보았지만, 안 쪽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잔치 집에 어떻게 좋은 일만 일을 수 있겠는가?

다른 분들은 그런 불협화음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연회를 즐겼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재건 문제는 회의를 진행할 자리가 되지못해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으나,

많은 분들의 자문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했다.


 

오후 아홉시가 넘어 인사동 풍류객의 아리랑연회는 끝났지만,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분을 위한 잠자리까지 준비해 두었으니, 이 좋은 날 어찌 그냥 갈 수 있을 소냐?

그 날 잔치는 천상병시인 기념사업회 재건과 돌아가신 인사동 터줏대감의 올 곧은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김명성씨가 모았지만, ‘아리랑'광진상공', '엠에스오토텍', '이엘에스솔루션'에서 도왔다.


 

자리가 파한 후 남은 소주 한 병을 챙겨들고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평화만들기로 찾아갔다.

개업 소식은 들었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도 하지만, 벗들이 그 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 했기 때문이다.

마침 배평모씨를 비롯하여 김언경, 하형우, 박상희, 임경일, 고선례, 편근희씨 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함께 어울려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또 폭력배가 나타난 것이다.

나 더러 나가라고 고함 질렀는데, 설사 그 술집이 자기 집이라도 먼저 온 손님을 내 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꾸도 않했더니 다른 분이 데리고 나갔지만, 별 개 같은 꼴을 다 본 것이다.


 

그 곳에서 나와 인사동 벽치기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찻집 유담에는 김명성, 최석태, 손연칠, 백남이, 공윤희씨 등 여러 명이 홍어회를 배달시켜 마시고 있었다.

그 날은 신경이 날카로워 그런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좀 있으니 정영신, 조경석, 서길헌씨가 나타나 그 것으로 인사동 백년을 걷다잔치를 마무리했다.


 

그 날 잔치에 참석한 분들은 아래와 같다.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성준, 황명걸, 채현국, 송상욱, 이인섭, 유재만, 한귀남, 정기범, 손연칠, 김신용, 배평모, 조경석, 김명성, 김상현, 장 군, 장소영, 신현수, 강찬모, 기국서, 조준영, 임계재, 김진규, 최명철, 전강호, 조해인, 백남이, 변순우, 김언경, 김민경, 이명희, 장경호, 황외성, 박상희, 김 구, 서길헌, 노광래, 정영신, 이은영, 조두림, 안영상, 김수길, 하형우, 고선례, 박구경, 이희종, 최혁배, 임경일, 전활철, 정복수, 이만주, 이지녀, 금보성, 김종근, 박 철, 김효성, 김이하, 공윤희, 고중록, 강선화, 홍석화, 편근희, 유진오, 서인형, 최석태, 김윤기, 황예숙, 김이하, 이승철, 이광군, 박윤호, 권양수, 민영기, 유근오, 김발렌티노, 임태종, 오치우. 최유진, 송일봉, 최근모, 박완규, 조명환, 나재문, 정현석, 김용국, 김상윤, 이상훈, 김병호, 김준태, 목영순, 조신호, 한슬기, 주영선, 김미란씨 등 15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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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신명난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단, 음식준비를 위해 참가할 의향이 있는 분은 댓글이나 별도의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인사동 백년을 걷자” 잔치에 많은 참석있기를 바랍니다.

일시 : 2019년 6월 28일 (정오부터 오후9시까지)
장소 : 인사동 ‘아리랑가든’ (전화 02-723-7311)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9-7


회비 :
60세 이하 : 회비 무료
60세 이상 : 회비 6,000원
70세 이상 : 회비 7,000원
80세 이상은 16만원을 드립니다.
90세 이상은 100만원을 드립니다.
단, 지방에서 참여하는 분은 1박2일 동안 무료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고) 천상병시인 기념사업회 재건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단합을 위해
김명성회장이 초대하는 자리로 ‘아리랑’의 유재만회장이 돕고, 

'광진상공', '엠에스오토텍', '이엘에스솔루션'에서 후원합니다.


그리고 80세가 넘은 분에게 돈을 드리는 건 무조건 다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인사동에 자주 출입하는 원로작가(전 창예헌 고문 및 자문위원)에 한합니다.
일부는 여비로 드리고, 일부는 생계가 어려운 유고작가를 돕기 위한 배려니,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주최 :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주관 : ()천상병기념사업회, 농심마니

후원 : )엠에스오토텍, )광진상공, 이엘에스솔루션(), 아리랑가든







      





지난 토요일 오후1시 무렵,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 들렸다.
사진가 양재문씨를 만나러 갔는데, 케냐의 사진가 김병태씨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더 페이스’란 제목의 케냐 사람들 얼굴을 찍은 작품인데, 검은 공간에 부조처럼 박혀 있었다.






전시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멀건 대낮부터 한 잔 하러 갔다.
인근의 전라도 음식점 ‘자희향’에 갔는데, 맛있는 홍어부침에 김병태씨 사진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뜻밖의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미술평론가 김진하. 이태호씨 등 몇 분이 입성하더니, 뒤 따라 김명성, 김용국, 김상윤씨가 들어왔다.
이 집 음식이 맛있는 건 다들 알지만, 용케도 시간이 맞은 것이다.






몇 일전 이야기는 들었지만, 김명성씨가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잔치를 마련한다고 했다.
6월 28일 정오부터 오후9시까지 ‘아리랑’에서 여는데, 모처럼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좋은 자리다.






전 ‘창예헌’ 회장 김명성씨 제안으로 추진되는 이번 잔치에 ‘아리랑’ 유재만 회장도 후원한단다.




2013년 고)천상병시인 20주기에 맞추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의 한 장면이다. 



그 날 원로시인들로 부터 천상병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시 낭송회를 비롯하여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작은 음악회도 준비한다.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알리겠지만, 인사동 사람들은 물론이고 천상병시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페북이나 블로그에 신청만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술자리가 끝나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녹음 짙은 인사동 10길의 정취가 낯선 듯 아름다웠다.
토요일의 인사동 거리라 변함없이 붐볐는데, 오랜만에 만개떡 장사도 나왔더라. 






취기가 올라 ‘유담’ 커피숍에서 팥빙수를 시켰는데, 김명성씨가 두툼한 책 두 권을 선물했다.






한 권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이고
한 권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백년 편지’라는 소중한 사료집이었다.






김명성씨가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갖고 있던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가 책에 실려 있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조소앙선생이 작성한 글로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김교헌, 여준 등 주요인사 39명이 연서한 독립선언서였다.

제2선언서라는 ‘대한국민의회독립선언서’는 문창범선생께서 중심이 된 최초의 임시정부로 
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대한국민의회 직인이 찍혀 있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료를 홀대하는 나라인지, 대부분의 중요한 사료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짜로 기증받을 생각만 하지, 적극적으로 구입하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에 반가운 사람 만나 즐겁게 취하고, 좋은 선물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축구결승을 보아야 하는데, 어디서 볼지 고민되었다.
티브이가 없어 서울역 대합실에서 보면 되겠으나, 토요일은 녹번동 가는 날이 아니던가. 
녹번동에 들려 인터넷으로 볼 작정을 한 것이다.






여지 것 결승에 오르기 까지 축구 중계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뉴스를 보지 않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기도 하지만, 내가 보면 지는 징크스가 있다.






꾸물대다 컴푸터를 늦게 켰는데, 이미 전반전이 시작되어 한 골 이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지켜보자 역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3대1로 지고 만 것이다.






난, 정말 재수 없는 인간이다.
안 보던 축구 중계는 왜 보아 온 국민이 김빠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전생에 무슨 죄가 많은 지, 되는 일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안 간다던 인사동에 또 나갔다.
갈 곳도 없고 만날 놈도 없지만 좀이 쑤셨다.
한 때는 정 주었던 고향 같은 년이 아니던가.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데.




인사동서 붓글 쓰는 사내가 한 소리 한다.
초지일관이란 글만 휘갈긴다.
초상화 그리는 꼬맹이도 열심히 그린다.
변함없이 열심히 하라는 말이다.




바람난 딸년이 갈보처럼 놀지만,
바람난 딸년은 딸이 아니던가.
돈에 눈멀고 유행에 맛이 갔지만,
둘도 없는 내 딸이고 정들었던 년이다.




눈치만 보는 아우들은 보이지 않고
천상의 천상병선생이 한 마디 하셨다.
미워도 내 새끼고 고와도 내 새끼란다.
몽둥이로 잡지 말고 사랑으로 잡어라네.

사진, 글 / 조문호








































볼만한 전시가 있어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




옛 민정당사 자리 호텔공사는 이제 마무리를 했다. 머지않아 인사동이 더 낯설 것이다.




거리에는 임금님이 나와 광고판을 들고 있고, 지난날이 그리운 유랑 악사는 멀쩡한 날 ‘봄비’를 불렀다.




요즘 인사동에 나와도 갈만한 술집이 별로 없다.
돈에 밀리고 젊은이에 밀려, 길 잃은 기러기 신세다.
아지트로 죽치던 ‘유목민’도 젊은이 아닌 돈에 밀려났다.




사실상, 인사동을 못 잊어 배회하는 것은 공간의 추억이 아니라, 그 곳에서 놀던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 보다 죽었거나 볼 수 없는 자들의 추억이 짙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천상병시인이고,
뒤이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방송작가 박이엽선생,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
넋을 부르는 민속작가 심우성선생 같은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땡초시인 적음과 최루탄 냄새 풀풀 풍기던 사진기자 김종구, 별만 그렸던 강용대,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 ‘민예총’의 대부 김용태,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
강단 있는 민중화가 문영태, 그리고 살아있어도 볼 수 없는 화가 박광호와 이청운도 있고,
미국으로 떠난 최정자시인도 그립다.




그들과 어울리던 ‘실비집’이나 ‘누님칼국수’, ‘시인통신’, '하가', '레떼'

‘수희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부산식당’이나 ‘사동집’, ‘귀천’ 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잘 가지 않는 것은,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만났던 사람이 그리운 거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곳이 있어야해 ‘다리 밑’에 자리 잡기로 했다.
‘다리 밑’은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있는 코 구멍만한 술집인데, 간판이 없어 계단집으로 불렸다.
통인의 관우선생이 ‘다리 밑 집’으로 고쳐 불렀으나, 더 줄여 ‘다리 밑’으로 부른다.
옛날엔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살았으나, 대개 태어날 때의 고향인 다리 밑을 좋아한다.
공사판의 함바집처럼 서민적이라 더 정겹다.




주종은 불문이나 관우선생이 개발한 시원한 생맥주에 막걸리를 타 먹는 막맥이 맛있다지만
통풍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안주가 싸다. 쫀득쫀득한 감자전 같은 대부분의 안주가 오천원이다.




이 날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통인의 관우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보는 여인도 나타났다.
미끄러질 것 같은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생글 생글한 눈웃음이 죽이더라.




그런데, 옆 자리에 아는 분이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처럼 상투를 틀어 올린 권도경씨인데,
사진가 하형우씨께 전화 걸어 바꾸어 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좁았다.




그들의 건배사가 더 재미있더라.
술잔을 치켜들며 “이것이 무엇이요?”하니, 다같이 “정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이란 노래를 처절하게 합창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렇다. 다들 그 놈의 정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그리운 사람 만날 때는 다리 밑에서 만나자.
받을 때나 줄 때나 한 결 같이 꿈속 같도록...

사진, 글 / 조문호





















약속이 없는 한, 인사동 거리를 지나치다 아는 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연히 가장 많이 만난 분을 꼽으라면 단연 화가 이종승씨다.

이종승씨는 신학철, 황효창선생과 홍익미대 동문으로, 술을 드시지 않으니 거리에서만 만난다.

인사동을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그동안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인사동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한 번 들어 볼 작정이다.



   



지난 노동절엔 처음으로 동자동에서 인사동까지 걸어갔다
.

전 날 밤에 눈이 나빠졌는지 돋보기 도수가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새 돋보기를 구할 겸, 카메라를 수리하려면, 남대문시장도 들려고 하고,

매월 1일은 인사동 전시일정 알리는 날이라, ‘서울아트가이드’ 구하러 인사동도 가야했다.

중간에 내려 다시 지하철 타기가 번거로워 아예 걷기로 작정한 것이다.



    

 

평소 걷는 것을 싫어해 조금만 걸어도 빌빌거리는데, 좀 무리한 듯 싶었.

동자동에서 남대문시장까지는 걸을 만 했지만, 인사동까지는 다리가 아팠다.



 


공휴일이라 인사동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히 통인가게앞 실타래 과자는 불티났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딱 두 사람 만났다.

먼저 이야기한 이종승화백과 노숙자 까딱이다.

멋쟁이 화가나 노숙자 행색은 눈에 잘 띄어 쉽게 알아보지만, 이번엔 그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이종승화백이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지나가니, 이번엔 까딱이가 다가왔다.



   



오래 전 인사동에서 노잣돈 바친 천상병선생보다 더 많이 뜯긴 사람이 까딱이다.

명목은 인사동 통행세지만, 아는 사람에게만 받는 통행세다.

같은 개털처지라 여지 것 천원밖에 주지 못했는데, 이젠 인상해 달란다.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천원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 산다"

하기야! 천원가지고 뭘 살 수 있겠나?

다음부터 100% 인상해 주겠다고하니, 그래도 안 된단다.

최소한 담배 한 갑 살돈은 돼야 한다는데, 좀 걱정스럽네.



 


헤어져 가다보니,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아이스크림 사먹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종업원에게 담배 한가치 구걸하고 있었다.

아마 한 두 번이 아닌듯하나, 장난스럽게 건네주었다.

대부분 흡연구역 재떨이에 버려진 꽁초로 해결하지만,

"이 친구 때문에 장초도 얻어 피운다"며 웃는다.




 

한 쪽에선 처음 보는 악사가 엠프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벤츠스의 파이프라인를 멋들어지게 연주했지만,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다.

레퍼토리를 바꾸던지, 무대를 바꾸던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인사동에 사람은 많지만, 구걸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공휴일에는 큰길만 북적거려, 주변 잡화상만 재미 보지 다른 매장은 죽 쓴다.

관광객들로 사람은 많지만, 다들 인사동 문화를 즐길 줄 모른다.

그 많은 갤러리 들도 텅텅 비었지만, 골목 안쪽 가게들은 문 닫는 곳도 많다.

인사동 구경이 아니고, 사람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 같다.



   



인사동 손님 바꾸는 방법은 없을까?

 


사진, / 조문호

 

    

















최정자 시집 '별사탕 속의 유리새' 표지

인간과 문학사 발행 / 2017.12.28일 발행/ 값 9,000원



요즘 너무 한가하게 지낸다.

전시장은 물론 바깥출입을 자제하는데다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어버리니 찾는 사람도 없다.

쪽방에서만 딩굴며 낮잠까지 자는데,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큰일이다



1990, 9 인사동 '귀천'앞에서

 

 

몇일 전 정영신씨 집에서 서재를 뒤져 볼만한 책을 뒤적거리다 뜻밖의 시집을 발견했다,

미국에 계신 최정자시인이 쓴 별사탕 속의 유리 새였는데, 일 년 넘게 잊었던 시집이다.

작년에 미국에서 최정자 시인으로 부터 시집이 부쳐왔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깜빡 잊어 버린 것이다.

눈에 부딪히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그의 치매수준이니 이일을 어쩌랴!




2016,9 인사동 '귀천'


    

몇 권의 책을 챙겨 와 모처럼 책 속에 푹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최정자시인 시집 표지에 나온 프로필 사진을 보니, 할머니가 처녀처럼 찍혀있었다.

뽀샵은 아닌 것 같은데, 사진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사기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2012.9 인사동 커피숍에서


    

최정자 시인은 80년대 중반 인사동에서 만난 누님 같은 분이다.

천방지축 날뛰던 개막난이를 거두고 보살펴 주셨다.

돌아가신 천상병, 민병산, 박이엽씨를 비롯한 인사동 터주대감 반열에 드시는 분인데,

어느 날 뉴욕으로 이민 간다며 보따리를 싸셨다.

나라꼴이 싫어 갔을까? 아니면 사는 게 힘들어 가셨을까?




2013.12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정영신, 박양진, 최정자시인

    


가끔 생각나면 처녀작이나 마찬가지인 개망초 꽃 사랑을 뒤적였는데, 어느 날 새 시집을 보내 주셨다.

얼마나 서울이 그리웠으면 제목이 서울로 서울로였다. 구구절절 서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2016. 9 인사동 '귀천'



어려운 형편에 여비만 마련되면 서울로 나오셨는데, 신판 유배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미동부한국문인협회회장을 맡는 등 마음을 붙이시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뉴욕에서만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으니, 온통 시작에만 매달린 셈이다.


    

 2012.9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배평모, 최정자, 공윤희, 편근희씨



나는 한국이다란 제목의 시에서도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전략) 내가 한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다./ 내가 두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다./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내가 걸으면 걷는 대로 다 한국이 됨으로....”



2015.9 인사동 커피숍에서

 


그런데, 작년에 펴낸 별 사탕 속의 유리 새 표제 시는 시인 자신의 유년의 모습이며 현재의 모습이었다.

백일홍 꽃밭에서는 어머니는 꽃밭 앞에 서 있었다./어머니는 왜 거기 서 있었을까.“로 적고 있는데,

공터에 핀 백일홍을 보면서도 어머니를 떠 올리고, 봉숭아꽃을 모티브로 한 첫사랑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어/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을 만난다는/ 철석같이 믿은 그 말인데, 태어 난 나라를 떠나와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봉숭아 꽃물을 들인들./물빛 위로 첫눈이 내린들./첫사랑이 온들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제주도에서 온 낙타를 대상으로 한 마두금소리나 제주도 해녀를 대상으로 한 숨비소리“,

양노원을 말한 거기 가고 싶지 않다등 대부분의 시들이 자아성찰에 의한 그리움이었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뉴욕과 고향 사이의 거리라는 제목으로 쓴 문학평론가 유한근씨의 서문에서는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처럼,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거기에 있어야 한다. 뉴욕의 최정자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는 최정자 시인이 있다고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별사탕 속의 유리 새를 화두로 삼고 최정자 시인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그 화두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하나의 판타지로, 시인 자신의 유년의 모습이나 현재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떨칠 수 없는 것은 별 사탕 속의 유리 새라는 이미지다. 그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 이미지는 곧 최정자 시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라고 마무리했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위에 거론되지 않은 시중에서 인사동 민병산선생 이야기를 비롯한 마음에 남는 시  세 편을 옮긴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사망금지령>

 

죽지 마라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사망금지령을 내린 도시가 있다. 인구 370만 명이 사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

팔치아노 델 마시코, 줄리오 세사르 파바시장이 시장 령을 내렸단다.

사망금지령을 내렸단다.

 

반갑다고

즐겁다고

시민들은 춤추었단다.

 

죽지 말라는 명령, 영원히 살아라, 는 명령,

너도 나도 좋아라, 는 명령

명령이라도 죽지 말라면 살아라, 면 좋아라, 는 것

명령이란

따르는 자가 있고 어기는 자가 있기 마련인데

 

당연하게 반란자가 생겼다.

앞장선 노인 두 명

사망금지령을 어기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명령불복종자들.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명령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냐,

무서운 독재자의 명령도 기어코 거스르는 자가 있는 법

아무리 백세시대라 노래 불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2016. 9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사람만>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2013.12 인사동 '유목민'에서/ 좌로부터 최정자, 조경석, 이명희



<민병산 선생님 20주기에 드리는 편지>

 

살아계셨다면 이제 겨우

여든이실 텐데

살아계셨다면

힘없고 가난하고 슬프고 외롭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인사동 골목골목에 선선한 바람 불었을 텐데

말없이 말하는 법을

낮게 앉아 높이 보이는 법을

가진 것 없이 넉넉한 법을 배웠을 텐데

 

불광동에서 탄 버스 남대문시장에서 내려

건포도 한 봉지, 바나나 한 개 사면

늘 반기는 옆 집 여섯 살짜리 아가씨 생각나서

절로 나오는 미소까지 배낭에 담으시고

명동을 거쳐 관철동을 거쳐

유행의 물결을 거쳐 인사동으로 오시던 선생님.

 

인사동 세월 느릿느릿 간다 하시더니

선생님 안 계신 세월

그새 스무 해가 지났네요.

강산이 두 번 변했네요.

 

맨해튼 가로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청설모를 보면

고속 도로변에 서 있는 사슴 가족들을 보면

흐드러진 풀꽃을 보면 생각나는

슬프면서 슬프지 않았던 선생님.

변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생님 그리워

모두 모였네요.

      

사진, / 조문호



2013 인사동 '귀천'앞에서 / 좌로부터 목영선, 최정자








 

 

 

 

 

 



인사동은 차 없는 길로 천천히 산책하기에 적합하다


[골목 내시경]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 불린 것은 구한말부터 1960~70년대까지 만들어진 이야기다. 인사동에는 골동품상, 표구사, 고서점, 화랑이 즐비하고 뒷골목 막걸리집에는 시인이며 기자에 그림쟁이들이 득실거렸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길, 한국의 일상을 엿보고 싶은 외빈이 오면 으레 들르는 곳, 인사동이다. 서울의 구도심이 그렇듯 인사동에는 여러 골목길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그리고 골목마다 사연과 역사가 감춰져 있다.



안국동 교차로부터 종로2가에 이르는 인사동 큰길은 아침부터 밤까지 나들이객들이 점령한다. 길가의 가게에는 중국어, 일본어 안내판이 당연히 붙어 있고 노점상이나 호객꾼도 외국어 한두 마디는 거침없이 한다. 큰길 가게들은 대부분 관광객 상대의 기념품이 주종이거나 구색을 갖추고 있다.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대략 2000년 이후부터인 것 같다. 그 전에도 외국 관광객들은 오갔지만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지금은 하루에 관광버스 100여대 이상이 관광객을 풀어놓는다”는 게 인사동 토박이 상인의 설명이다. 뼈아픈 우스갯말로 인사동에 “중국 관광객이 몰려와서 중국산 짝퉁 골동품을 사간다”고 한다. 그만큼 인사동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물건은 저렴하게 중국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관광버스 하루에 100여대 몰려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 불린 것은 구한말부터 1960~70년대까지 만들어진 이야기다. 인사동에는 골동품상, 표구사, 고서점, 화랑이 즐비하고 뒷골목 막걸리집에는 시인이며 기자에 그림쟁이들이 득실거렸다. 누구라도 시 한 편을 팔거나 그림 한 점을 주문받으면 호기있게 벗을 불러 거나하게 취하던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도 대를 이어 문을 열고 있는 부산식당을 비롯해 골목 안에 숨어 있는 밥집들이 잊혀진 인사동의 전설을 썼던 곳이다. 큰길에서 버티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났고 1층에 줄을 이어 있던 표구사들도 하나둘 떠났거나 도로변을 피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40년째 인사동에서 표구 일을 하는 이는 “인사동 큰길가로만 표구사들이 30곳 넘게 있었다. 작업 중인 그림을 길가에 내놓고 말리곤 했는데, 그냥 인사동 전체가 미술관이었다. 한 바퀴 돌면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화랑들이 인사동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화랑들이 인사동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이며 사학자, 한학자에 기자들까지 고서점에 몰렸다. <석보상절>이며 추사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인사동에서 발견돼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그야말로 눈 밝은 이들이 종종 보석을 찾아내던 창고였던 셈이다. 요즘엔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을 판다는 골동품상은 “지금은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사람들 인식도 많이 달라져서 고물상이 국보급 보물을 주워오던 시절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귀하다 싶으면 따로 감정을 맡긴다. 골동품상들도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골목 안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깃든 카페가 있다.

골목 안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깃든 카페가 있다.



화장품 가게 들어서면서 집세 올라 

70년대까지 인사동의 분위기에 고졸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면 80년대부터는 그야말로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소위 그림이 돈이 되기 시작했다. 화랑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손으로 재벌가를 오가며 그림을 거간하는 이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미술계 관계자는 “망조는 그때부터 들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미술관 짓는 게 유행이 되고 거기에 거물들이 나서서 판을 바꿨다.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는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아파트에 걸어놓을 그림을 사들였고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미술품 시장의 수요는 소수만이 지탱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고가 미술품과 골동품은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실시간으로 빠르게 거래된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매물이 나오면 감정을 거치고 손질을 해서 정기적인 경매시장을 열고 커미션을 떼가는 미술품 거래시스템이 정착했다고 한다. 보따리에 싸서 은밀하게 보여주고 작자를 찾던 시절이 아니라서 인사동이 미술품 거래의 중심에서 밀려난 지는 한참 됐다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오랫동안 작품 거래를 소개했다는 업자는 “옥션도 그렇지만 지금 미술품 시장이 바닥이다. 그림값이 최하다. 일단 사려는 이들이 없다. 게다가 인사동은 소위 중간상인 ‘나까마 가격’이라 일반 거래가보다 반 이하로 깎인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한다. 

인사동 골목에는 오랜 맛집들이 숨어있다.

인사동 골목에는 오랜 맛집들이 숨어있다.



인사동 거리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들은 싸게는 1만원부터 5만원까지 저렴한 작품도 찾아볼 수 있다. 손으로 그린 그림치고는 비교적 저렴하고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해 보인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그림들이 나오는 것일까. 그림을 팔던 가게 주인은 “그림 공장은 삼각지에 서너 곳이 있다.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서 직접 붓으로 그려 대량생산한다. 예전에는 인사동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떠났다”고 한다. 인사동에 느긋한 유람객들의 발길이 몰리는 이유 중에는 가벼운 주머니로도 소품 그림 한 점 정도는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사동 일대에는 화방과 필방이 몰려 있어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이들은 어김없이 드나들어야 한다. 인사동에서만 40년째 붓과 종이를 팔고 있다는 지업사 주인은 “손으로 붓 만들고 종이 뜨는 이들의 주된 판로가 인사동이다. 화가들도 인사동에 오면 화랑도 들러보고 붓이며 종이도 사갈 수 있으니 이제껏 이 거리에 예술 냄새가 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교황도 들러 붓을 사가고 낙관 도장을 파갔다는 필방 주인은 “우리는 대량 소비처와 기업 거래처가 많아 그럭저럭 수지를 맞춰간다. 나머지 필방이나 종이가게들은 매상이 들쭉날쭉하다. 겨울과 장마철에는 손님이 뚝 끊기고 학기 초에는 매상이 좀 오르는 편이다. 인사동에서 예술 팔아서 장사하기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곳곳에 화랑과 표구점이 인사동을 지킨다.

곳곳에 화랑과 표구점이 인사동을 지킨다.



인사동에 붓글씨를 가르치는 서실들이 남아있으나 드나드는 이들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서실 주인은 “요즘 동네 행정복지센터에서도 붓글씨를 가르친다. 2만~3만원만 주면 배울 수 있고 구청 문화센터는 그나마 공짜다. 그러니 누가 인사동까지 나와서 비싸게 붓글씨를 배우나. 요즘은 민화가 대세”라고 한다. 민화는 밑그림을 두고 베껴 그린 후 색을 칠하면 되니 쉽고, 완성품도 화려해서 배우는 이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인사동 미술단체 관계자는 “대개 인사동은 10년 주기로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는 문화적인 색깔이 거의 빠져나가는 분위기다. 중심길에는 화장품 가게가 대세가 되고 있지 않나.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개인 업자들은 버티지 못하고, 대기업들은 홍보만으로도 효과가 있으니 비집고 들어온다”고 분위기를 들려줬다. 외국 관광객과 사람들이 몰려드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이 지워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골목의 미로를 만날 수 있다. 한옥을 고친 카페와 수십 년째 문을 연 한식당. 예술가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주점에서, 명상을 반찬으로 내놓는 식당까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미식과 독특한 식당들이 인사동으로 발길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주역들이다. 70년대에는 몰래 밀주를 담가 팔다가 이제는 전통 가양주의 명인으로 꼽히는 인사동 뒷골목 깊숙한 식당 주인은 “예술가들이 원체 입맛이 까다롭다. 거기다 술까지 들어가서 조금만 성미가 안 맞으면 안하무인으로 소리 지르고 술상을 엎기도 한다. 그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장사를 했으니 오래된 인사동 골목 음식점 주인들도 보통 내공은 아닐 것이다”라고 자랑한다.

명월관 등 역사의 흔적 곳곳에 

인사동 화랑들은 대부분 수요일에 전시회 개막을 했다. 그날이면 화가와 서예가를 비롯한 친척에 지인과 동료들까지 인사동 골목 식당에 자리를 잡고 먹고 마시고 예술과 인생과 철학을 이야기하다가 멱살을 잡고 치고받고 싸우며 다시 어깨동무하고 돌아가던 모습이 일상이었다. 그 시절을 경험한 이들에게 오늘의 인사동은 왠지 각박하고 낯선 모습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인사동 주변 곳곳에 남아있다. 인사동 초입에 있는 승동교회는 긴 골목을 지나 들어서면 도심과 전혀 다른 적막감을 보여준다. 이 교회 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청년들의 3·1운동 참여가 있었다. 인사동 길 어귀의 태화빌딩은 이완용의 별장인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 기생 놀음으로 질펀하던 명월관도 있었다. 그러다 1919년엔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던 곳이 됐으니 역사의 우여곡절은 가혹하다. 

철종의 사위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서 있어 무정한 세월을 증거한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우아한 개량한옥은 민가다헌이란 이름의 식당이 됐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은 아직도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명판을 이고 굳게 서 있다. 그곳은 또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서울 제1골목이라는 인사1길 골목 깊은 곳엔 100년 넘은 오동나무가 지금도 살아있어 봉황이 날아와 깃들기를 기다린다. 골목 안 보드카를 파는 식당 서까래는 100년 넘게 춘양목의 고운 속살을 고스란히 지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 골목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어제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오늘의 변화를 아쉬워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골목은 그 시간대에 어울리는 옷을 갈아입는다. 관광객이 몰리고 옷가게와 화장품가게가 늘고, 값싼 장신구와 기념품이 팔리는 인사동의 모습을 어떤 이는 아쉬워한다. 젊은이들은 그 공간의 모습이 즐겁고 유쾌하다.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인사동은 과거 100년 동안 변해 왔던 것처럼 또 다른 100년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변화되는 골목 안에 숨어 있는 향수의 자취를 문득 만나는 기쁨도 인사동에 깃들어 있다.



주간경향 1317호 2019.03.11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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