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늙은이들을 인생의 도서관이라 말했던가?

인사동 추억의 파편을 건져 올리려 늙은이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인사동에서 시인학교10여 년 운영하다 말아먹은 정동용 시인,

구름에 달 가듯이를 운영하다 달 가듯 떠도는 사진가 김수길씨,

인사동에서 태어난 만담가 장소팔씨의 아들 장광혁씨,

인사동을 번질나게 드나들며 인사동의 추억을 쌓아 온 안동해씨,

천상병시인을 지독히도 따랐다던 허태수목사 등 여러 명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한 지난 24일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어제는 오래된 인사동 사진 자료 찾느라 잠 못 이루다 아침에서야 잠에 빠졌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 것이다.

 

방문을 열어보니 교회 젊은이들이 도시락을 가져왔는데, 벌써 점심때가 되어버렸다.

세수라도 해야 할 텐데, 화장실 들어 간 사람은 알을 까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않았다.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도시락을 카메라 가방에 넣어 부랴부랴 인사동에 나간 것이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인사동을 돌아다니며 추억할 장소부터 살펴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추억하려는 장소는 흔적도 없이 다 바뀌어 버렸다.

빗길을 헤집고 다니는 나그네들의 발길만 분주했다.

 

약속한 인사아트프라자전시장에 갔더니,

일을 주선한 노광래씨가 먼저 도착해 장광혁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사진 찍기가 불편했지만, 당사자들이 추억하는 공간에서 사진을 찍다보니,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짜증스러웠다.

 

인사동에서 40여 년 손수레를 끌고 다닌 분을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정동용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한 자는 여전히 가난할 뿐이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조해인 시인을 만나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축축한 비가 술 생각을 재촉했지만, 허기가 져 더 다닐 수도 없었다.

술안주 삼아 도시락을 까먹으니, 김수길씨와 정동용씨가 차례로 등장했다.

 

분명 술이 약은 약이었다.

배고픔과 짜증스러운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기억에서 불러낸 인사동 벗들을 안주 삼아 옛이야기로 위안했다.

지난날이 그리워지는 인사동의 하루였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8일 '인사동 이야기' 사냥 길에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인사동 민중미술의 교두보 역할을 해 온 김진하관장 만나러 가는 길에발렌티노를 만났는데,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축하 대잔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로 휴관 중에도 불구하고 김진하관장과 화가 박 건씨를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무화랑'에서 모처럼 반가운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중에 뜻밖의 소식이 날아 온 것이다.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오는 20일 정오무렵, 종각 타종 행사를 시작으로 100일 동안 축하대잔치를 연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김발렌티노가 김수영시인의 시 ‘푸른 하늘을’ 너무 좋아해 입버릇처럼 노래를 불렀는데,

기타리스트 김광석씨가 곡으로 옮겨 새로운 노래로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들었다.

 

인사동 거리는 며칠 사이 새로운 점포가 여럿 들어섰다.

'나무화랑' 건물 일층에 있던 ‘보물창고’가 사라지고 무엇을 파는지는 알수 없으나

‘블랙다이아’라는 간판을 단 새로운 매장이 마무리 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보갤러리'가 있던 건물이 재건축되어 건물 전체가 ‘더스타갤러리’란 간판을 달고

개관전으로 서달원씨의 ‘面’이 열리고 있었다.

 

버스킹에 나선 젊은이들의 연주 솜씨들도 날이 갈수록 세련되어 거리가 한층 젊어졌다.

 

두 분 시간 뺏은게 너무 미안해 모처럼 술 한 잔 대접하기 위해 ‘툇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된장비빔밥에 막걸리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김진하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옛날 인사동 다방에서 이루어졌던 나까마들의 그림 거래에 대한 이야기인데, 

귀가 번쩍 뜨이는 인사동 사료라 원고청탁까지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불화가 장춘씨가 나타났다.

네명 인원 초과로 떨어져 앉아 자리 파하기만 기다리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세 사람이 막걸리 두 주전자 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달짝한 툇마루 막걸리는 술술 넘어가는 대신, 뒤늦게 취기가 오르는 위용을 알아 더 마실 수도 없었다.

 

정영신사진

반가운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마신 술자리라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니 두 화가 사이에 늙은 개 한 마리 끼인 꼴이었다.

 

술이 취해 준비해야 할 골목전시 현장 확인 하느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술만 취하면 개로 돌변함을 널리 양지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십일 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인사동 이야기’는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다.

인사동 사람들이 기억하는 공간과 인사동 옛 이야기로 엮은 사진집인데, 당시 출판과 함께 인사동 ‘북스갤러리’에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전시기간동안 절반 이상이 팔려 나갔고, 삼사 년 지난 후에는 완전 절판되어 더 이상 구입할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다. 저자에게 한 권 남은 사진집마저 도둑맞게 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다.

 

2015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농동588’전시를 열며 그동안 발행한 사진집을 견본으로 내놓았는데, 그 책이 감쪽같이 사라 진 것이다, 그 당시 전시장을 지키던 공윤희씨가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 사이에 없어져, 입장이 난처해진 공윤희씨가 CCTV를 돌려 본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책을 몰래 가져간 분은 잘 아는 원로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부터 책 도둑과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란 말도 있지 않는가? 그 문제는 두 사람만 아는 영원한 비밀로 묻어버렸다.

 

‘빛깔 있는 사람들’이란 부제를 단 ‘인사동 이야기’는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억하는 공간에서 찍은 입상사진 110여점과 오래된 인사동 풍정사진 40여점, 그리고 인사동을 추억하는 작가들의 글 47편 등 총 244페이지로 구성된 책으로 가격은 20,000원이었다.

 

 

게재된 입상사진 110여점은 2007년 인사동 ‘공화랑’에서 가진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전에 전시한 사진이었다. 뷰카메라로 찍어 한지에 디지털 프린트한 사진인데. 파주 헤이리에 있는 ‘인물박물관’에서 5점, 오산 ‘막사발미술관’에서 4점 구입한 것 외에는 대부분 찍힌 분들에게 실비로 제공하거나 기증하여 제고를 한 점도 남기지 않은 유일한 전시였다.

 

사연이 많은 사진집이지만 절판되어 저자도 갖지 못한 귀한 책이 되어버렸는데, 노광래씨가 인사동 자료를 구하다 알게 되어 개정판을 발간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어려운 출판사 사정을 감안하여 선 구매 독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연락했는지 저자에게 확인하는 전화도 여럿 걸려 왔다.

 

아마 책에 실렸던 분들에게 전화를 한 모양인데,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해 선 구매를 부탁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책이 나왔을 때도 전시 안내 외에는 책 판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어떤 분은 절판된 후에야 책을 구해달라고 안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광래씨를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인사동을 사랑하는 애착에서 책을 다시 찍고 싶어 선 구매를 부탁했을 것이다. 그 책이 복간된다고 해서 노광래씨에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2년 전 ‘진인진출판사’와 새로운 인사동 사진집을 출판하기 위해 계약까지 해둔 상태라 다른 곳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음 달 ‘노숙인’사진집이 나와 마무리되면 새 인사동사진집에 매 달릴 작정이었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하여 새 책 제작에 올인 해야 할 절박한 사정이나, 노광래씨의 열성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재판을 찍으려면 그대로 펴 낼 것이 아니라,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부사진을 추려내고 인사동과 관련 있는 분 중에 누락된 분을 추가로 촬영하여 개정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광래씨가 몇몇 분들에게 연락하여 촬영 스케줄까지 잡아 두었다.

 

오늘 오전 노광래씨를 만나 인사동에 사진 찍으러 따라 나섰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박복신 대표와 방귀식씨를 만나 차 한 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늦게 ‘명신당’ 필방 이시규씨와 섬유공예가 최정인씨도 만났다. 오늘은 세분을 촬영했는데, 꼭 들어가야 할 박재동씨와 김진하씨도 연락해야 할 것 같다. 촬영스케줄을 잡아야 할 텐데, 워낙 바쁜 분들이라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인사동 추억을 불러내어 삭막해 가는 인사동에 봄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오래전 인사동 전시와 출판에 관련된 기사를 모아두었다.

https://blog.daum.net/mun6144/405

 

모처럼 정 동지 더러 인사동서 밥 한 끼 사겠다며 불러냈다.

며칠 전 ‘인사동 맛 집 순례’란 글을 올렸는데,

‘메밀란’도 괜찮다는 신단수선생의 댓글이 올라와서다.

 

그 집은 예전에 ‘산타페’에서 이태리식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메밀란’으로 바뀐 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맛을 봐야 알 것 같아 정 동지에게 생색을 낸 것이다.

 

코로나로 대개의 식당이 한가하지만, 그 곳은 손님이 제법 있었다.

자리 잡아 메밀 콩국수 두 그릇을 시켜놓고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했다.

오래 전 ‘산타페’ 술집일 때는 ‘인사동 밤안개’로 통하는 여 운의 단골집이었다.

 

오래 전 '산타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여운화백

인사동에서 만나기만 하면 이곳으로 끌고 왔는데, 아예 양주병을 맡겨두고 술을 마셨다.

백수인 내 처지를 알아 주인에게 이 친구가 오면 맡겨둔 술을 언제든지 내 주라며 호의를 베풀었는데,

소탈하고 인정 많은 친구였지만 이제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저승에서 기다릴 그를 생각하고 있으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밑반찬이 정갈하고 그중 겉절이가 맛있었다.

걸쭉한 콩국의 구수한 맛이 진국인데다 쫄깃한 메밀 맛이 더해 최상급의 콩국수였다.

주머니 사정으로 시키지는 못했지만, 제주흑돼지보쌈, 복 튀김, 메밀전 등 침 넘어가는 음식도 많았다.

 

정 동지는 쓴 김에 제대로 쏘라고 부추겼지만,

“이 여자가 기초수급자 등 쳐 먹을려 한다”며 어름장을 놓았다.

메밀콩국수 한 그릇에 만이천원이라 좀 부담스럽지만, 음식 맛이나 식당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다음에 물주 나타나면 제주흑돼지보쌈에다 소주 한 잔 해야지.

 

인사동 나가시는 걸음에 ‘메밀란’에 들려 콩국수로 올 여름을 보내세요.

 

사진, 글 / 조문호

 

지겨운 코로나에다 날씨까지 푹푹 찌는 삼복 더위라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아무리 집에 박혀 감옥살이를 하더라도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살 것 아닌가?

이왕 외식을 하려면 전시도 볼 겸 인사동 나들이나 가자.

 

며칠 전 인사동에 들려 맛집의 추억을 더듬어가며 찾아 보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긴 인사동은 식당들도 한가했다.

주인은 죽을 지경이나 손님 입장에서는 편하고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인사동 맛집 순례지만 가는 곳마다 먹을 수 없어 사진만 찍고 맛은 지난 날을 추억하기로 했다.

마침 점심때라 한 끼는 먹어야 하는데, 어디 갈까 망설이다 낙점한 곳이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이었다.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기도 좋지만, '툇마루' 된장 맛은 이름처럼 된장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주인인 김원순씨가 갈 때마다 도토리묵을 공짜로 줘, 입장 곤란하게 만든다.

 도토리 뇌물 먹어 일번으로 추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곳은 박중식 시인이 호구지책으로 93년에 문을 연 밥집인데, 완전 대박이었다.

그리고 된장 음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쾌거였다.

 

처음엔 1층에 문을 열었으나 손님이 너무 많으니, 건물주인이 그 자리에 식당을 차리는 바람에

지하로 밀려났고 나중엔 2층까지 얻어 식당을 확장했다.

박중식 시인은 시골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대신 선아엄마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잡곡밥과 된장이 따로 나오는데, 부추를 된장에 넣어 순을 죽인 후 참기름을 쳐 비벼 먹는다.

열무김치까지 곁들이면 옛날 생각이 절로난다. 주전자에 따라 주는 막걸리 맛도 은근히 죽인다.

술 안주로는 가지미식혜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약간 바스락거리게 구운 녹두전이 별미다.

 

그 다음은 같은 건물 일층에 있는 ‘향교 나주곰탕’을 찾았는데, 맑은 곰탕 국물의 깊은 맛이 일품이다.

‘툇마루’가 처음 문을 열었던 곳인데, 주인이 직접 식당을 운영했으나 손님이 없어 몇 년을 고전하다

나중에 ‘향교 나주곰탕’이 들어서며 손님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강민 시인께서 살아계실 때는 종종 들렸지만, 요즘은 갈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았다.

얼마 전 나주에 있는 원조 곰탕도 먹어 보았지만, 인사동 나주곰탕보다 못하더라.

 

어떻게 끓였으면 맑으면서도 이렇게 깊고 진한 국물 맛을 내는지 모르겠다.

국물 위에 떠있는 파 사이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보들보들한 수육 맛도 일품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예술가들은 푸짐하게 들어 있는 수육을 안주로 반주까지 곁들일 수 있다.

‘툇마루’와 ‘나주곰탕’ 위치는 종로구 인사동4길 5-26인데, 갤러리 서호’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북인사마당 방면으로 가기 전에 들릴 곳이 한 곳 더 있었다.

바로 낙원상가에 있는 청국장으로 유명한 ‘일미집‘이다.

 

갓 지은 고슬 고슬한 밥과 담백하고 고소한 청국장 맛은 밥집 이름처럼 일미다.

청국장 특유의 냄새가 적어 청국장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

낙원 상가에 자리잡은 허름한 식당이지만, 미식가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인사동사거리에서 낙원동방향으로 가면 ‘낙원악기상가’지하148호에 있다.

 

그리고 인사동 사거리에서 공평동 쪽에 있는 삼계탕의 본가 ‘무교 삼계탕’도

40여년의 관록 있는 음식점인데, 복날에나 가끔 들려 몸보신 한다.

밑반찬으로 나온 깍두기와 김치 외에 고추장으로 무친 마늘이 있는데, 은근히 닭과 궁합이 잘 맞는 반찬이다.

 

서비스로 주는 인삼주까지 한 잔 곁들이다 보면 세상 부러운게 없어진다.

위치는 인사동사거리에서 공평동 쪽 '인사동7길'에서 우리은행 건물을 끼고 돌면 나오는 종로구 인사동7길 37이다.

 

그 곳에서 맞은 편 건물 사잇길로 조금 들어가면 100여년의 전통으로 서울미래유산에 지정된 ‘이문설농탕’이 나온다.

'이문설농탕'의 진맛은 묽은 육수 국물에 있다.

 

곰탕은 고깃국물, 설렁탕은 뼛국물이라는 말도 있듯이 뼈와 도가니를 많이 넣고 끓여 국물이 희고 뽀얀 색깔이 특징이다.

인공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깊은 맛이 우러난 담백함이 일품이다.

주소는 종로구 우정국로 38-13이다.

 

그 곳에서 다시 사거리 방향으로 나와 북인사마당으로 가면 '통인가게'가 나오는데, 2층에 한 때 양과점으로 이름을 떨쳤던 ‘태극당’이 있다.

'통인가게' 옆에는 ‘뜰과 다원’이라는 전통차와 떡을 파는 새로운 가게도 생겼더라.

 

인사동에서 오래된 만두집으로는 만두전골로 유명한 ‘사동집’과 개성식 만두집 ‘궁’이 있다.

 

‘궁’은 만두국과 조랭이 떡국이 유명한데, 만두 내용물이 실하면서 맛은 담백하다.

 

만두전골로 유명한 ‘사동집’은 큼직한 만두에 10가지가 넘는 야채가 들어가 또 다른 맛을 낸다.

 

‘개성만두 ’궁‘은 수도약국 옆길로 조금 가다 왼편의 경인미술관 방향으로 들어가면 경인미술관 바로 앞에 있다.

 

그리고 ’사동집‘은 ‘인사아트프라자’ 건물 사이 골목인 인사동5길에 있다.

 

사동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 왼쪽으로 접어들면 쫄깃한 수제비가 일품인 ‘인사동 수제비’가 나온다.

 

항아리에 담겨 나오는 인사동수제비는 얼큰 수제비와 들깨 수제비로 구분되는데.

굴이 들어간 국물 맛도 진하지만 쫄깃한 수제비 맛이 이집만의 자랑이다.

 

그리고 인사동 9길로 들어가면 백악미술관 지하에 ‘소람 안동국시’ 인사점이 있다.

 

양지 국물에 가늘게 썰은 파와 고기 지단으로 맛을 낸 안동 국수가 소람의 대표 음식이지만,

여름철 메뉴로는 콩국수가 더 좋다.

 

그 곳에서 서인사마당주차장 건너편의 인사동 11길에는 생태탕이 시원한 ‘부산식당’이 있다.

손님들이 기다려도 항상 갓 지은 밥을 내놓아 밥맛이 일품이고, 밑반찬으로 나오는 고소한 콩나물 맛도 좋다.

 

시원한 생태탕에 내장을 추가해 소주 한 잔 걸치는 진미를 모른다면 인사동 주당이 아니다.

 

인사동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영화감독 이미례씨가 운영하는 ‘여자만’이다.

'여자만'은 여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여수와 고흥 사이에 있는 만 이름이다.

 

싱싱한 남도 제철음식으로 유명한 이곳은 양념꼬막이 맛있다.

위치는 인사동 14길 골목으로 100미터쯤 들어가면 ‘귀천’ 맡은 편에 있다.

 

인사동에는 가난한 예술가가 식당 차려 부자된 곳도 두 군데나 있다.

박중식 시인이 된장예술이라 명명한 ‘툇마루’와 이미례 영화감독이 만든 ‘여자만’이다.

두 곳 다 분점이 생길 정도로 유명세는 떨쳤지만, 돈과 예술은 궁합이 안 맞는지 더 이상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이 밖에도 맛있는 밥집이 많으나, 인사동 토박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을 골랐다.

맛도 있고 부담이 덜한 음식점인데, 대부분의 식당들이 골목에 숨어있다.

찾을 때는 골목 입구에 붙은 도로번지 이정표를 참조하면 찾기 쉽다.

 

무더운 여름철은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체력이 말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맛있는 음식으로 몸을 챙겨, 님도 보고 뽕도 따자.

건강한 여름을 바라는 마음에서 인사동 맛 집을 돌아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가한 주말을 보내던 지난 25일,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처들어 왔다.

냉면이나 한 그릇 하자는 전화에 나갔다가 송추 전강호씨 화실까지 실려 간 것이다.

 

가는 길에 냉면 사리와 술 안주까지 사들고 갔다.

여러 지인들도 호출한 모양인데, 다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비상시국에 많이 모여 좋을 것 없다.

 

전강호씨 송추 작업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가는 길이 피서객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들이를 제한하는 거리두기도 푹푹 찌는 무더위에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만난 전강호, 이종순 내외가 반갑게 맞았는데, 이 얼마만이던가?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첫 만남이고, 송추 작업실에 들린 적은 3년이 더 되었다.

 

연못이 조성된 정원에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자연 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이제 연꽃이 피기 시작한 연못에는 팔뚝만한 술 안주가 우글거렸다.

 

노광래씨가 술자리를 만든 것은 오는 9월경 민병산선생 33주기를 맞아

인사동에 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인데, 사진을 좀 제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역시 인사동 책 낼 출판사 약속으로 코가 석자지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인사동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 알찬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오래된 인사동 추억담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미리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담도 많았지만 한 때 인사동에 사무실을 둔 모 시인의 추잡한 비행까지 나왔다.

그 자가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 오른 ‘예술원’ 회장을 하지 않았던가?

미성년자를 건드린 그 일이 다시 불거지면 사회매장은 물론 바로 구속감이다.

 

사실 예술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없애야 할 조직이었다.

철옹성 같은 벽으로 쉽게 들어갈 수도 없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오라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바 있는 이시영시인이다.

 

1954년 "반공 문예 조직의 국가적 공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자 권리 주장”이라는 설립 성격도 웃기지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회원들에게 매달 180만원의 정액 수당과 각종 회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회원이 대학교수 출신이라 연금을 받는데,

이중으로 국고를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프랑스와 미국, 독일 예술원의 경우는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정액 수당이 없으며,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낸다고 한다.

다들 예술원 회원 자신들보다는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사업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은 하는 일도 없지만, 국민들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이 더 많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다들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입 다물고 묵인해 왔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분과와

연극·영화·무용을 합친 4개 분과로 구성되어있는데, 사진 분과만 빠졌다는 점이다.

사진 뿐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희곡 분야 회원도 없고, 남성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 생활이 어려워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작가 몇몇 분이 나서서 선생을 입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경노단체에 안 들어 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나 패거리 의식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기호 교수가 예술원을 비판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덜 쪽 팔릴 문제다.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결단을 부탁드린다.

 

사진: 전강호,조문호 / 글: 조문호

 

 

'대한민국 예술원을 폐지하라'

 

한겨레 [시론]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기호 작가가 대한민국예술원을 비판하는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긍정적인 역할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는 일들이나 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폐지를 말해왔다.

 

문학회원의 경우 원로 문인으로 귀감이 되기는커녕 부끄럽고 추하게 자신의 ‘생사당’을 짓듯 살아서 자기 이름의 문학관을 짓는 모습들과 후배 예술인을 위한 창작 지원 활동보다는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이나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기리어 짓는 것으로 알아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자기 문학관을 국가 예산까지 끌어들여 짓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문학관을 짓는 것에 더해 지역 시민의 재산인 공적 재산 수백점을 탈취해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들이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으로 예술원의 문학 분과 회원 26명이 받는 수당만도 4억6800만원이다. 여기에 비해 2021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으로 문학 부문 청년예술가에게 지원된 예산은 7명 선발 4000만원에 불과했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자신들이 받는 연금 외에 월 180만원, 연간 216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대부분 다른 고액의 연금을 받는 이들이 감액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특권적 지원이야말로 창작 지원이 절실한 청년예술가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이기호 작가가 “나라 예산으로 명예를 세우지 마십시오. 제 또래의 부장급 과장급 작가들도 밥벌이가 따로 있으면 지원금 같은 거 신청 안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누구보다 지원이 절실한 전업작가들도 남보다 조금 더 알려지면 자기보다 어려운 동료 후배 작가들을 생각해 지원 신청을 자제한다. 그러나 예술원은 이제까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키워왔다.

 

과거 2005~2006년 ‘우수예술인발굴지원’ 하던 것을 폐지하고,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예술원 회원만의 예술활동 지원을 시행해왔다. 그나마 외부 작가에게 주는 ‘대한민국예술원상’도 올해 문학 부문은 예술원 회원의 동생에게 1억원을 주었다. 이쯤 되면 특권이 아니라 나라 세금에 대한 범죄 수준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기호 작가가 공개한 글에 이시영 시인이 댓글로 이들이 ‘수당 180만원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행사 시 국가 의전서열 제일 앞에 예술원 회원을 배치하고, 해외여행 시 공항 귀빈실 이용 및 1등석 등을 요구하고 있다. 후진 예술가들의 가난과 고투 등은 눈 밖이며 오로지 예술 원로로서의 자기 보신이 제일 사업이며 청와대가 예술가들을 초청해 밥을 안 먹는 것도 항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지 끝이 없다.

 

회원은 예술원 회원이거나 예술원이 지정한 예술단체가 후보를 추천하는데, 예술원 회원 중 출석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회원이 된다. 자격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저희끼리 바꾸었다. 이러다 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누가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 온갖 추문이 흘러나온다. 존경받는 회원이 왜 없겠는가마는 명단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나 싶은 이름이 왜 저렇게 많은지 절로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선을 말하지만, 조직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운영되어 개선해봐야 마찬가지다. 무보수 명예직이라 하더라도 그 허울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추한 몰골을 보일 것이 뻔하다. 문학으로 예술을 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단체는 해체와 폐지가 답이다. 그 전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들 물러나길 바라나 이제까지의 특권적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무망한 일이다. 정녕 문학을 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조감도 [사진자료 = 서울시]

국보급 유물이 대량 출토된 인사동 도시정비형 재개발 구역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유적 전시관이 들어선다.

전시관이 들어설 장소는 지난 달 훈민정음 창제 당시 금속활자를 비롯한 천문시계, 물시계 등의

유물이 다량 발견된 곳으로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인 공평동 제15·16지구(인사동 87번지)다.

옛 건물 터인 조선시대 배수로가 발견된 신축 건물 지하 1층 전체에 조성된다.

 

위치도 [사진자료= 문화재청]

지난 달 발굴한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제작된 것으로,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유적 보존으로 손실을 입은 시행자를 고려해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기존 17층으로 허가된 건축을 25층으로 보상하는 대신 지하1층 전체를 전시관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건축계획 [사진자료 = 서울시]

이는 문화재 전면 보존 시 공공이용적률 상향 등 인센티브를 주기로 한 '공평 룰'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현행법상 건설 공사 도중 매장 문화재를 발견하면 국가에 귀속될 뿐만 아니라

발굴 비용은 시행자가 부담해야 해 문화재 발견은 시행자 측에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전시관 건립지역 및 유적출토현장 [사진자료 = 문화재청]

서울시는 지난 21일 제9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공평동 제15·16지구(인사동 87번지) 재개발구역 정비계획을 결정했다.

이 전시관은 총면적 4745㎡로 국내 최대 규모다. 종각역 인근 오피스인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에 조성된 공평유적전시관의 1.25배 수준이다.

전시관 일부 공간은 지상 1~2층까지 뻗어나가 외부 통로에서도 손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출토된 유적/ 조선전기한글금속활자 [사진자료 = 문화재청]

인근에서 운영 중인 공평유적전시관은 외부 통로에선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배수로의 경우 벽 높이를 달리해 15세기 토층부터 원형 그대로 전시한다.

인사동의 또 하나 자랑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 / 조문호

 

 

출토된 유적 / 일성정시의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물시계 부속품인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총통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동종 [사진자료 = 문화재청]

인사동이 변하고 있다.

가게들이 바뀌고 낭만은 사라졌다.

지루한 거리두기로 거리가 지루하다.

 

그래도 인사동은 인사동이다.

변하는 것은 미워도 인사동은 미워할 수 없다.

 

일주일에 두 번 가던 곳이 한 번가고,

이젠 한 번도 못갈 때가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다.

전시 작품보다 정 나눌 사람이 없다.

 

예술가 만나기도 쉽지 않고 대폿집 풍류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 죽일 놈의 코로나가 부채질한다.

 

 

몸은 멀어도 마음마저 멀어질 수는 없다.

영원한 추억의 저장고기 때문이다.

 

 

미국 가신 최정자 시인이 생각난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했다.

그 시집 나온 지가 어언 20여년이 되었다.

 

몇 년 전만해도 생활비 줄여 만든 돈으로

일 년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오셨으나,

힘들어 못 오신지가 사 오년 된 것 같다.

 

한번 갔다 오면 며칠 동안 앓아눕는다더니

이젠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하신단다.

 

인사동이 그리워 틈틈이 블로그나 찾았는데,

영영 인사동과 작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 최정자 시인뿐이던가?

강 민시인은 저승에서 '인사동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사람들이 한 분 한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인사동을 그리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다.

멀리서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들려 향수 달랜다.

내가 거리풍경을 찍어 올리고 인사동타령을 해대는 이유다.

 

인사동 사진집을 만들려고 출판사 계약서 받은 지가 일 년이 가깝지만,

 아직도 원고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마침표가 될 사진집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할까 염려되어서다.

 

요즘은 세상이 뒤숭숭해 인사동도 잘 나가지 않는다.

동자동에서 녹번동 가는 길에 잠시들려 안부나 묻는 정도다.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

 

엊그제도 지나치는 길에 인사동에 잠깐 들렸다.

미친 코로나에다 폭염까지 겹쳐 거리는 한산했다.

 

일주일 만에 본 인사동 거리지만 계속 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추억 지우느라 안달하는 것 같았다.

 

전통적 상품을 거래하던 매장들이 옷가게로 바뀌고 있다.

민예품이 놓였던 진열대는 옷과 마스크가 대신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부터 문 닫았던 ‘보물창고’가

더디어 새 주인을 만났는지 실내장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쌈지 건물 벽에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궁녀 설화가 담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치 누굴 기다리 듯 애잔하다.

 

‘통인화랑’은 ‘미술관 속 그림과 조각전‘이 열렸고,

‘나무화랑’은 인사동활성화를 위한 신진작가 공모전이 열렸다.

 

전시장마다 작품은 걸렸지만, 반가운 사람이 없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인사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몽유병 환자 같은 늙은이만 거리를 떠돈다.

 

인사동의 봄은 요원한 것인가?

아! 그 때 그 사람이 그립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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