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볼만한 전시-

노무현 추모전"사람 사는 세상"/ 5월19일부터 5월24일까지 / 마루아트센터

황재형전 / 4월30일부터 8월22일까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최울가전 / 5월7일부터 5월30일까지 / 가나아트센터

황주리전 / 5월19일부터 6월8일까지 / 노화랑

이영지전 / 5월19일부터 6월8일까지 / 선화랑

송광익전 / 4월21일부터 5월16일까지 / 통인화랑

김정수 ‘진달래-축복’ 4월21일부터 5월11일 / 선화랑

안봉균전 / 5월11일부터 5월30일까지 / 금보성아트센터

김명진전 / 5월1일부터 5월14일까지 / 갤러리담

김종숙전 / 5월5일부터 6월1일까지 / 갤러리 그림손

오용길한국화전 / 5월5일부터 5월17일까지 / 동덕아트갤러리

이하린도자전 / 5월19일부터 5월27일까지 / 통인화랑

정동석사진전 / 5월19일부터 5월31일까지 / 갤러리 인덱스

전민조사진전 / 5월26일부터 6월1일까지 / 토포하우스

잔재홍사진전 / 5월26일부터 6월1일까지 / 토포하우스

한국펜화가협회전 / 4월28일부터 5월4일까지 / 경인미술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5월30일까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이 불전 / 3월2일부터 5월16일까지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분관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1년 5월호]

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널 뛰기를 하고 있다. 뒷편이 '쌈지'로 바뀐 '영빈가든'

지난 4월3일 ‘푸른사상’ 맹문재씨 사무실에서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이야기가 잠간 언급되었는데

 내용인 즉, 인사동 매력이 사라져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좌로부터 맹문재, 조문호, 방동규선생

그동안 인사동은 끝났다는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했지만, 사실상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나에 대한 충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인사동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었다.

 

2009 눈오는 날의 인사동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동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환경이 달라졌다고 고향이 고향 아닐 수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변해가는 인사동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록에 좋고 나쁜 것이 있겠는가?

 

1982 실비집에서 나오는 박종수시인과 천상병시인

내가 인사동과 인연을 가진 것은 부산에서 올라 온 81년 무렵이었다.

아무 의지할 곳 없는 낯선 타향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인사동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사동에는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 부른 최정자 시인,

적음이란 법명을 가진 땡초시인 최영해, '실종' 소설로 실종된 소설가 구중관,

인사동에 재산 다 털어넣은 김명성,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

소설 폐업한다며 ‘작가폐업’ 술집 낸 배평모, 술값 내 주는 물주 사진기자 김종구,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화가 이청운,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

히말라야 기 받아 잘 나가는 화가 강찬모, 노동자 시인 김신용,

바람개비 작가로 알려진 설치미술가 김언경, 사마귀 그림으로 알려진 전강호,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예가 김용문, 시와 도자가 하나인 신동여,

아직까지 대위로 불리는 공윤희, 홍대미대 나와 술 장사하는 전활철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애간장을 녹였던 임춘원 시인,

‘갈까보다’ 판소리로 휘어 잡은 ‘레테’ 주인 이점숙 등 많은 사람을 만났다.

 

2006, 호젓한 아침 무렵의 거리풍경

인사동 지척에 있는 피맛골에 박종수 시인이 운영한 '시인통신'이 있었는데,

시인 조해인, 화가 이목일, 연극배우 이명희, 언론인 이두엽 등

많은 예술가들이 피맛골과 인사동을 넘나들었다.

 

1985, 초창기 맴버들 ,좌로 이윤섭,노광래,박광호,최울가, 고 김종구(앞), 공윤희, 김신용,황외성

그런데, 부산에서 잘 알던 화가 이존수, 최울가, 박광호를 비롯하여

마산에서 상경한 디제이 출신 박한웅 등 여러 사람을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난 것이다.

이처럼, 인사동에 애착을 갖는 것도 인사동이란 장소에 앞서 사람에 대한 정이다.

 

1984, 인사동거리축제에서, 화가 강용대 모습도 보인다

88년 무렵, 인사동 사거리의 허름한 옥탑 방을 얻어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작업실이 종종 술집이 되어 노는 것과 일이 구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충무로로 옮기고 부터 여기 저기 떠돌았는데, 한참 후 그 옥탑방을 다시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놀랍게도 방 곳곳에 손 때 묻은 나의 흔적들이 있었다.

끼익끼익 소리 내며 돌아가는 환풍기와 쓰레기에 섞여 나온 빛바랜 간판이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유적 같은 파편들이 인사동 사람들을 더 그립게 만든 것이다.

벗들을 다시 찾아 나서며 찍은 입상사진으로 전시도 했다.

그 이후 정영신씨와 사진출력실 ‘아트온’을 차렸으나 돈 벌이가 되지 않았다.

 

2015, 심우성,이명희,강민,정영신씨, 돌아가신 심우성, 강민 선생은 유달리 인사동을 사랑하셨다.

필자 외에도 인사동 주변에 사무실이나 작업실을 두고 왕래한 분이 여럿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문을 연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을 비롯하여 민속학자 심우성, 김동수, 

사진가 한정식, 김영수, 정인숙, 안영상, 언론인 임재경, 화가 이존수,

 서지학자 김영복, 시인 송상욱, 서예가 이상명, 천연염색인 이명선 등이다

 

1999 '아트온' 사무실에서, 좌로부터 전활철, 김의권, 변형주, 김언경

80년대 초반에는 문학 유목민들도 인사동으로 대거 옮겨왔다.

명동에서 관철동으로 옮겨 ‘한국기원’에서 지내던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건너 온 것이다.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

영국산 파이프를 물고, 술보다는 커피 향을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시인 신경림, 황명걸,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등 일개 소대는 족히 되었을 거다.

그 이후에는 행위예술가 무세중, 무나미씨를 비롯하여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과 원광스님 등 괴짜 스님들도 등장했다.

 

2006 고) 원광스님

천상병 시인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 같은 찻집이 만남의 장소였다.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단골이었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그 이후 ‘하가’나 '레떼', '춘원', '누님칼국수‘ 등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서 많은 작가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작가로는 김용태, 여 운, 문영태, 신학철, 박불똥, 황재형, 박성남,

최민화, 장익화, 류연복, 미술평론가 곽대원, 최석태, 조각가 박상희, 연극연출가 기국서,

음악인 김상현, 시인 서정춘, 소설가 박인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14, 좌로부터 구중서,강민,방동규,추은희,김승환,기국서,신경림,정두리,박정희,장소임,심우성선생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의 ‘시인’, 

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이 생기는 등

문인들의 아지트도 이어졌다.

 

1989 '춘원'에서 열린 문은옥시인 시집 출판기념회, 박중식시인이 삼페인을 들고 있다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남인사마당 맞은편의 포도대장 터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되며 김용태, 문영태, 유홍준씨가 주동이 된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1985 안국동 아랍미술관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 박용수사진

88년에는 조성국, 고 은, 김윤수선생이 공동의장을 맡고

신경림선생이 사무총장, 김용태가 실질적인 업무를 맡은

‘민예총’이 창립되며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냈다.

그리고 99년에는 홍순태선생이 회장이고 필자가 사무국장을 맡은

‘민사협’이 창립되어 북인사마당 입구 제과점 2층에 둥지 틀었다.

 

2011 '푸른별 이야기'에서 좌로부터 배평모, 전강호내외, 장경호, 최일순, 전활철, 김용문

이렇게 형성된 인사동 풍류는 문인과 화가만이 아니라 사진가, 연극인, 언론인까지 모여 들였다.

한학자 노촌 이구영선생을 비롯하여 김영복, 임계재, 김문호 등 여러 명이

‘이문학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낙원동에서 모이기도 했다,

'통인가게' 관우가 주동이 된 '인사모'를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임도 여럿 생겼다.

 

2013 '인사모' 회원들, 왼쪽부터 강윤구, 박일환, '김완규, 민건식 

심우성, 채현국, 민 영, 김동수, 신봉승, 이계익, 이호철, 조준영, 장경호, 윤양섭, 배성일 등

많은 예술가들이 그 무렵 생겨 난 노인자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을 드나들었다.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시인 강고운의 '무다헌'도 있었다.

 

2007 '무다헌'에서 노래하는 이계익선생, 좌측은 송상욱시인

2012년에는 전활철의 ‘유목민’과 최일순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다.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2010  '봄날은 간다'사진전에서 아코디온을 켜는 이계익 전장관, 좌측은 연극배우 이명희,민영시인

이제 인사동의 마지막 풍류주막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가 운영하는 ‘풍류사랑’과 전활철의 ’유목민‘ 뿐이다.

 

1987 실비집 골목에서, 좌로부터 박한웅, 조해인시인

세월을 되돌려 옛 사료들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도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 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인화랑’, ‘통문관’, ‘동헌필방’, ‘농협종로지점’,

‘이문설농탕’ 등이 서울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53 인사동거리 / 임인식사진

19세기말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2018, 이겸노옹에 이어 지금은 손자인 이종운씨가 운영하는 '통문관'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가장 오래되었으나 살아 남았던 '통인가게'나 '통문관'이 같은 통할 통자를 쓰는 것도 흥미롭다.

 

2020 '통인가게' 김완규선생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1988 수도약국 앞에서 휘호대회를 구경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 

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  문제는 소중한 유적들을 일본에 팔아 넘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기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1988 북인사마당 장승터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년 '문헌화랑',

1976년 '경미화랑' 등의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국화 작가를 발굴하여 전시하는 박주환씨가 1976년 '동산방'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 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김명성씨가 2012년 개관한 '아라아트' 전경

한 참후에는 화가 최대식씨가 운영한 갤러리 21‘과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한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은 ’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통인가게‘를 이어받은 관우선생의 ’통인옥션갤러리‘도 역량 있는 작가를 꾸준히 초대하며,

정기적으로 판소리마당을 여는 등 인사동 문화를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1959년 인사동 사진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신희순이 운영한 ‘꽃나라’ 라는 흑백현상소가 생겨나며

김대현, 양은환, 유성준, 정영신, 윤 옥, 김종신, 정용선, 이혜순, 고영준, 하상일, 변홍섭 등

많은 사진인들이 인사동을 더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2018, 인사동 "꽃나라'에 출입하던 사진인들을 오랜만에 인사동에서 만났다. / 정영신사진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이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최건수가 운영하는 ‘인덱스’가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2012 룩스갤러리에서 열린 김영수추모전 개막식, 정범태선생과 곽명우씨가 보인다

99년 창립된 ‘민사협’은 사무실 보증금이 없어

회원인 정원일에게 500만원을 빌렸으나, 아직 갚지 못했다.

회장과 사무국장은 로봇에 불과하고 모든 걸 김영수가 좌지우지해,

다들 탈퇴하거나 한 걸음 물러나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대구지부에서 연명으로 탄원 하는 등 분란도 속출했다.

사무국장은 일찍부터 정인숙이 물려 받았다.

 

1986 고)김영수씨, 인사동 작업실에서

그래도 김대중 정권 들어서며 ‘광복60년 시대와 사람들’,

‘한국현대사진60년’ 등 ‘사협’에서는 엄두도 못낼 굵직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김영수가 세상을 떠나자 '민사협'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젊은 사진가들이 다시 결집했으면 좋겠다.

 

2006 인사동 거리풍경

1980년 정일학원 자리에 민정당사가 들어서며 밤이 되면 식당골목 주변에

검은 세단이 들락거렸으나, 정치인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처럼 인사동에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며

샛길 안쪽에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옥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섰다.

 

2006 많은 인파가 몰리는 주말의 인사동거리

그런데 1987년 ‘인사동 상인회’가 결성되었고,

그 이듬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사동에 관이 개입하여 축제를 벌이자 구경꾼은 몰렸지만

인사동만의 풍류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요일에는 차 없는 거리가 시행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기존의 고서점, 화랑, 민예품 가게를 밀어내고,

화장품 가게나 중국산 싸구려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7 '인사전동문화보존회'에서 발행한 '인사동이야기' 목차

1997년 ‘인사동 상인회’가 ‘인사전통문화보존회’로 바뀌었다.

이호재가 보존회 회장을 맡으면서 ‘인사동이야기’란 회보를 제작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인사동에 차 없는 거리가 실시되며 관광객 거리로 변모했다.

 

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할아버지와 어린이가 함께 놀고있다

상권이 바뀌면서 1999년에는 '영빈가든' 자리 약 450평에 고층상가가 세워질 계획에

길가 있던 동서표구, 아원공방 등 열두 가게가 쫓겨 날 처지가 되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인사동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부지를 인수한 '쌈지'가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만든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다.

 

2018 인사동 쌈지 앞 거리풍경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을 빼 닮았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은 인사동이 완전 망했다고 한탄하지만,

세월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세대교체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장에서

그 무렵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인들이 인사동을 살리기 위해 규합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김명성을 비롯한 150여명의 예술인들이 뭉쳤다.

‘아리랑가든’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진 후 몇 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문화행사를 벌였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

그리고 천상병 시인 20주기가 되는 2013년 4월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인사동 소풍, 천상’이라는 시와 노래, 회고담이 어우러지는 추모행사를 열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은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사진집을 출판해 기념했다.

 

2012, '아라아트' 개관식에서

가난한 예술인들이라 처음부터 대부분의 경비를 이사장인 김명성이 부담했다.

그러나 그가 건평 1,000평이 넘는 대형갤러리 ‘아라아트’를

인사동에 세워 자금난에 시달리자 ‘창예헌’ 활동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도나 중국자본에 넘어감에 따라 '창예헌’ 활동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과

2010년 ‘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이 내가 남긴 인사동 자료다.

 

2007 ‘공화랑’에서 열린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 퍼포먼스

이제 이 글을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유일한 인사동 사진집으로 펴냈던 ‘인사동 이야기’는 절판되어

저자도 없는 귀한 책이 되고 말았다.

 

2010 북스갤러리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 개막식에서

낭만과 풍류가 흐르던 옛 인사동은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영글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그 흐릿해 가는 추억을 안주삼는 예술가들만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마저 일 년 넘게 끌어 온 코로나 여파로 만나기 어려워졌다.

 

2013 여자만 연회에서, 송상욱시인과 김신용시인

유일하게 희망적인 것은 '인사아트프라자' 박복신 대표가 인사동 문예부흥에 공 들이고,

박재동화백이 갤러리 입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인사동 지킴이로 나섰다는 점이다;

 

2019 '통인가게' 판소리 마당에서 배일동명창이 열창하고 있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전시 제목처럼 인사동, 봄날은 갔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두 원로 시인의 시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2007 쌈지에서 노래부르는 장사익씨

인사동 / 고 은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2016 좌로부터 조준영, (고)강민 시인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인사동 아리랑 / 강 민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내 인사동 걷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이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공(眞空)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2005년 '인사아트프라자' 앞에서 노래하는 고) 이남이씨)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한 이후 인사동에 최고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휴일 맞은 봄나들이 객으로 다들 마스크를 착용하여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인사동은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으나,

전시는 물론 모임까지 줄어들어 예술인들의 발길도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전시 보러 간 일 외는 사람만나 술 마신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지난 토요일, ‘말하고 싶다’ 지방전에 보낼 전시 액자를 갖고 나갔다.

‘인사아트프라자’ 입구에 있는 박재동화백 작업실에 갖다놓으라는

전시기획자 박 건씨의 메시지를 받아서다.

 

박재동화백의 인사동 작업실은 예술인들 사랑방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9월 ‘인사아트프라자’ 제안으로 갤러리 입구에 차렸는데,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공간이지만, 종종 예술가들 만나는 공간을 겸한다.

 

그 날은 액자가 있어 ‘인사아트프라자’ 가까운 골목까지 차를 끌고 갔다.

비상등을 켜놓고 바삐 가져갔는데, 박재동 화백을 찾아 온 반가운 분이 계셨다.

촛불정국 때 광화문미술행동 일원으로 자주 만났는데, 사정상 성함을 거명할 수 없다.

앉았던 자리를 내주며 앉으라지만, 오래 머물 형편이 아니었다.

차 한 잔 나누지 못한 채 기념사진만 찍고 와야 했다.

 

인사동에 나왔으면 사람들 만나 술이라도 한 잔 했으면 좋으련만

무엇에 쫓기 듯 바쁘게 사는데,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걸까?

아무래도 일 년 넘게 몰아 부친 코로나가 만들어 낸 더러운 병인 것 같다.

 

하루속히 코로나가 끝나 인사동도 나도 정상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나이가 먹어가니 몸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어저께는 정영신 동지가 치과에 수술 받으러 갔으나 퇴자 맞았다.

혈압이 높아 수술이 안 되니 내과부터 다녀오라는 것이다.

협압이 187이나 되는 고혈압인데, 본인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눈에 열이 많았지만, 눈병인줄 알아 안약만 넣었다나...

 

내과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고혈압에다 당뇨까지 있어 비상이 걸렸다.

약으로 위기는 넘겼지만,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병원을 멀리한 탓인데, 이젠 좋아하는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체중 관리는 열심히 하면서, 왜 그리 건강관리에 무심했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게 약이라던 미련이 병을 키웠는데, 사돈 남 말 하는 격이다.

 

정동지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하루 사이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머리가 아팠으나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정신 줄을 놓는 이변을 당했다.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열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이 끊겨 버린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으나, 처음 당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죽어도 이처럼 편하게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 후 정동지와 함께한 자리에서 내가 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운전하는 도중 그런 상황이 온다면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정동지가 나보다 더 놀란 것 같다.

정동지도 몇 년 전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넘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스마트협동조합’에서 서인형씨에게 그 이야기를 꺼낸 모양인데, 당장 병원 가야한다며 전화가 빗발쳤다.

동자동 갈 채비를 하는 중에, 박건주씨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병원에 검진 받으러 가자며 건주씨 차에 타라는데, 빼도 박도 못해 끌려가듯 병원에 갔다.

실려 간 병원은 ‘스마트 협동조합’과 협약을 맺은 ‘녹색병원’이었다.

 

병원에서 진료 일정이 맞지 않아 다음 날로 검진날짜를 미루자,

하루라도 늦출 수 없다는 정동지 고집에 응급실에 들어간 것이다.

갑자기 환자가 되어 병상에 드러누웠는데, 의사가 묻는 말만 답하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간호원이 피를 빼거나 혈압을 재는 등 바쁘게 움직였으나 모른 체했다..

여기 저기 끌고 다니면서 시티촬영에다 갖가지 검사를 하는 것 같았다.

 

간호원과 조무사가 소근 대는 밀어에서부터 다른 환자의 신음소리까지

귀에 들려 모든 소리가 저승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검사결과가 나올 때 까지 잡혀 있었으니, 한 시간은 더 걸린 것 같았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세 사람이 붙들려 아무 일도 못 본 것이다.

 

그 이튿날 검사는 MRI검사라는데, 대형 세탁기 같은 곳에 머리를 집어넣어 돌리는데, 정신이 없었다.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시끄러운 소음에 시달려야 했는데, 오래 살다보니 별 검사를 다 받아 보았다.

그런데,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문제는 저혈압에 의한 증상이라고 했다.

정동지는 고혈압이고 나는 저혈압이니 섞어버리면 둘 다 정상이 될 것 같은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다.

사형선고 아닌 집행유예선고를 받아 저승에서 이승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아프지 않고 편안히 눈감았으면 좋겠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예전에는 인사동에서 술 마실 기회가 많았지만,

요즘은 은평 지역에서 마실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 곳에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김명성, 서인형씨등

가까운 분들이 많이 살아 종종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이 녹번동에 있는 것도 한 몫 하는 셈이다.

 

지난 25일 오후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녹번동 있으면 ‘마포나루’로 오라는데, 나의 움직임을 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역에서 녹번동으로 이동 중에 전화를 받아 술집부터 먼저 들렸는데,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포나루’는 서부경찰서 뒤편에 있는 조그만 횟집인데,

가격이 저렴한데다 주인의 넉넉한 인심까지 한 몫해 김명성씨 단골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가격이 싸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에는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원님 덕이 아니라 김명성씨 덕에 매번 나팔 부는 집이다.

지척에 이청운씨 화실도 있으나, 함께 못함이  마음에 걸린다.

 

갈 때마다 회에다 멍게, 전복, 생선구이 등 갖가지 해산물이 코스요리처럼 나왔다,

해산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 오죽하면 거지 영양 보충하는 날로 여길까?

이 날은 모인 사람이 다섯 명이라 두 군데 나누어 술 상을 차려 놓았다.

 

김수길씨는 다음 주에 ‘마루아트’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김명성씨는 김상현씨의 두번째 ‘뮤아트’가 이틑 날 개업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그 날의 화제는 김명성씨 소장품전인 ‘백범 김구 쓰다’전과 관련된 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였다.

사회적위치가 높은 사람들의 부친 친일이력인데, 문제는 독립운동가로 조작한단다.

고증자료를 근거로 철저하게 진위를 밝혀야 한다.

 

그 날은 소주 한 병 남짓 마셨는데, 숨이 차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김명성씨와 먼저 일어났는데, 조해인씨는 시동이 걸렸는지 일어 날 생각을 않았다.

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조해인씨는 달랐다.

몸도 챙겨야 할 나이지만,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로 끝장을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사진들이 나를 기다렸다.

얼마 전 만해도 매일 같이 소식 주워 날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렸으나,

이젠 다른 일도 있지만, 몸이 받쳐주지 않아 일을 줄이기로 했다.

가급적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팅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안 한다.

 

그전 같았으면 주변 분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이젠 꼭 필요한 사진만 찍고, 찍어도 올리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평에서 만난 분들 사진을 함께 엮어 소개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양산에 가 있는 공윤희씨가 전화를 했다.

역촌동 ‘양갈비에 꼬치다’에서 기다린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고깃집 이름은 흥미롭지만, 그 곳은 잘 가지 않는 술집이다.

가보니, 공윤희씨 뿐 아니라 조해인씨와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날은 폭설을 예고한 날이라 온종일 서울역 주변에서 맴돌았다.

백설이 휘날리는 서울역 전경사진이 한 장 필요했는데,

날씨가 포근해 그런지 간간이 내린 눈도 금세 녹아버렸다.

술 마시러 오라는 공윤희씨 전화에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달려갔는데,

술을 마시다 보니 진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황급히 서울역으로 달려갔으나, 도착할 무렵 눈이 그쳐버렸다.

운이 없는 건지 찍지 말라는 건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부득이 눈 내리는 서울역이 아니라 눈 내린 전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은 사진은 녹번동 정영신씨 집을 방문한 최석태씨와 서인형씨 사진이었다.

 때늦은 사진이지만, 그 날은 대취해 그런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또 언젠가는 연신내 청구병원 앞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화가 박불똥씨 였는데, 장경호씨 집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사진 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진은 어딘가 남아 떠돌테니까...

 

사진, 글 / 조문호

 

 

무명가수로 인사동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신현수씨가

돌아 가셨다는 부음을 두 달 가까이나 지나서야 전해 들었다.

 

어차피 한 번은 가야할 길 조금 먼저 돌아가신 것 보다 더 슬픈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쪽방에 기거하다 무연고로 돌아가셨다는 거다.

 

국립병원에 이송되어 연고자 없는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동자동 쪽방촌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는 무연고자와 다를바 없었다.

 

신현수씨는 한때 연예협회 분과 사무국장을 지낸 연유로 신국장이라 불렀다.

김삿갓 노래를 불렀다는 연유인지 야유회에 삿갓을 쓰고 나타난 기억도 있다.

 

항상 김명성씨 술자리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며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인사동에 행사만 있으면 나타나 궂은일을 맡아했고

특히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나타난 자리에는 수행원처럼 잔 심부름을 했다.

그러면서도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기타 치며 노래했다.

 

한 번은 술이 취해 그의 노래를 유심히 들어보았는데,

노래의 억양이나 리듬에 세상에 대한 저주나

비아냥 같은 것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가지 달갑지 않았던 것은 나이가 한 참 아래인 후배에게

“회장님 회장님”하며 너무 굽신 그렸다는 점이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더 많은 해방둥이인데,

얼마나 눈에 그슬렸으면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을까?

 

그러나 그의 마음이나 속사정도 모르면서 왜 그리 쉽게 속단했는지 모르겠다.

살아 생 전 존경의 마음으로 술 한 잔 권하지 못한 게 한이 된다.

 

인사동에 신국장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인사동 ‘아라아트’가 막 내릴 즈음이었으니,

그때부터 마음의 병이던 육신의 병이던 앓지 않았나 싶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 이야기로는

부음을 듣기 한 달 전 새벽 무렵에 그를 보았다고 했다.

인사동매점에서 소주 한 병 들고 나오는 것이 마지막이었단다.

 

마지막 화장하는 날에야 알게 된 유재만씨와 김명성씨의 동생이자

역술인인 신단수선생이 가서 유골을 강물에 뿌리고 왔단다.

 

신현수 형! 이승에서 못다한 노래 저승에서라도 마음껏 불러 즐겁게 지내세요.

그곳에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가시는 걸음에 형이 남긴 파편들을 모아 올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사진가 최인기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최인기씨는 미투와 관련된 사건으로 불편한 관계라

식사보다 인사동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모처럼 ‘유목민’에 나갔더니, 다들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올린 꼴 페미 까는 글 보고 청탁한 원고를 취소한 터라

어색한 관계를 풀어야 했는데, 바쁜 이규상씨까지 나오게 해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최인기씨는 미워할 수 없는 사이다.

좋아하는 후배이기도 하지만, 사진판에 잘 못된 현실과 싸우는 그만한 전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올린 내용은 일부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성 평등 운동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요즘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선의의 피해자마저 의혹의 눈길을 받는 세상이 되어바렸다.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악용되는 현실인데,

진보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공략에 많은 국민들이 등 돌리고 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이던 과하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최인기씨를 꼴 페미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청탁한 원고를 취소하는 전화를 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할 수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변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했을 것으로 여긴다.

 

그냥 덮고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페미니즘 문제라 

 꼴 페미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싶었다.

아마 내 글을 본 지인이 ‘눈빛출판사’에 연락한 것 같은데,

이규상대표가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그 날 최인기씨는 죄송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민망할 정도의 사과라 더 이상 묻지도 말하기도 싫었다.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만, 노령진수산시장 투쟁 사진집 서문은

최인기씨를 잘 아는 이규상대표가 쓰면 어떠냐고 했더니,

이번 책은 서문 없이 사진집을 내겠다 했다.

 

아무튼, 좋은 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그날 이규상 대표가 반가운 선물도 주었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가제본된 사진집 한 권을 내놓아 눈이 번쩍 띄었다.

그동안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정영신씨 원고가 선정된 것은 알았지만

사진집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유목민’ 안 쪽 테이블에서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도예가 변승훈씨가 나를 보더니 옮겨왔다.

변승훈씨는 백기완선생 문상 다녀 왔다는데, 이미 취해 말이 거칠었다.

이규상씨와 유근오씨는 서로 명함을 건네받으며, 원고 청탁도 하더라.

구체적으로 모르나, 문제만 일으키는 내 뒷조사 해달라는 말인지,

나에 대한 글을 청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은 필자와 좋은 편집자가 만났으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을 게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도 한 때 미투문제에 걸려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

의혹이 풀려 다시 강단에 서게 되었지만, 자칫하면 생사람 잡는 무기로 악용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파장 무렵에는 발렌티노 김이 나타났다.

서울특별시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나타났는데, 요즘 청소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공채 시험 면접에서 "서울을 자기 머리처럼

빤짝 빤짝 빛나게 하겠다"는 말에 배꼽을 잡은 적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렵게 사는 최인기씨 주머니를 털어 마음은 편치 않지만,

나올 때 무거웠던 걸음에 비해 갈 때는 날아갈 것 같았다.

알랑방구 낄 정영신씨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간 크게도 택시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요! 녹번동 가입시다. 택시비는 그 집 안주인한데 바드이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6일에는 인사동 거리에서 제법 긴 시간을 맴돌았다.

봐야 할 전시도 두 곳인데다 길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서로 만나기로 한 시간조차 달랐다.

 

인사동 사진은 거리를 지나치며 찍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지만,

이번에는 한 시간 넘게 거리를 방황했더니 다리가 아팠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라도 둘러 보았으면 좋으련만

정영신씨와 같이 보기로 해 먼저 볼 수도 없었다.

 

거리는 구정을 앞둔 주말이라 평소에 비해 많은 사람이 오갔다.

더러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는 모습에서 명절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반가운 풍경은 행인들이 거리에 내놓은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아무리 작가의 영혼이 빠진 그림이지만, 가격이 너무 쌌다.

이 삼만원 대가 주류고 비싼 게 오 만원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져 나왔는지 모르나 물감을 이겨 그린 그림도 있어,

인건비는 차지하고 재료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나무아트’에서 김진하관장이 나오고 있었다.

박건씨의 ‘나는 산다’전에 가자기에 사람 만나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한 사진가 최인기씨가 드디어 나타났다.

조그만 양반이 도르르 굴러오듯 바쁘게 걸어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빙그레 웃는 동안에 마음까지 포근해 졌다.

 

그를 만나기로 한 건, 며칠 전 경남 함안장에서 연락 받았다.

‘눈빛출판사’에서 노량진구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집을 만드는데,

서문 좀 쓰 달라는 원고청탁이었다.

 

그는 사진가이기에 앞서 노동운동가다.

가끔 현장에서 만나 지켜본 바로는 성실하고 겸손한데다 투쟁력 또한 치열했다.

좋아하는 후배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 바쁜 시간이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명절선물이라며 보리굴비까지 들고 왔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받은 선물도 다른 분 줄 정도로 선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굴비는 정영신씨가 좋아하는 생선이라 점수 따기 딱 좋았다.

 

마침 정오 무렵이라 ‘툇마루’에 밥 먹으러 갔다.

술 마시러 간 것이 아닌데도, 쥔장의 도토리묵 서비스까지 받았다.

맛있게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고, ‘귀천’ 목영선씨의 모과차도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사진 자료 담긴 유에스비를 건네받고 헤어졌다.

 

그도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나 또한 정영신씨를 만날 시간이 되어서다.

지하철 역 방향으로 마중가니, 총총걸음으로 정동지가 나타났다,

바쁜 분 만나려니, 이 몸까지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루의 ‘아지트갤러리’로 갔더니, 눈에 익은 작품들이 줄줄이 걸렸더라.

전시 개막 직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가 최경태씨 그림에 마음이 아팠는데,

작가 박 건씨와 김진하씨가 나타났다.

 

박건씨의 공산품 아트를 비롯하여 김주호, 김환영, 류연복, 박불똥, 박영숙,

성병희, 안창홍, 이윤엽, 이현정, 이하, 정영신, 정보경, 정복수, 정정엽, 하일지 씨 등

내 노라 하는 분들의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었다.

 

박건씨의 혜안으로 모운 작품이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 기분 좋은 건 작가의 권위를 지키려는 거품은 모두 빼버렸다,

작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이치에 대한 도전장에 다름 아니었다.

 

다음에 들려야 할 전시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었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지 35년 만에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자음을 윷놀이 하듯 화면에 던져놓았는데, 문자와 디자인이 결합한 독창적 언어였다.

작가로부터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인사동에서의 일정은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동자동에서 일해야 하고, 그 다음 날은 경북 상주장에 가야했다.

무슨 놈의 일이 한꺼번에 몰려 똥오줌 못 가릴 지경이다.

 

서울역 홈리스 원고는 탈고한지 오래지만, 노숙인 코로나 확진자가 100여명이나

나온 데다 동자동 쪽방 촌 공공 개발 소식에 추가 할 원고가 생겨서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아산시를 시작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전시를 기획했다며,

필요한 사진 자료를 수집해 보냈는데, 정말 난감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한 사진도 있었는데,

필름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했던 사진도 수정 이미지를 못 찾아 재 수정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얼마나 마우스를 잡고 낑낑거렸으면 아직까지 어깨가 결린다.

오죽하면 오래된 필름 정리해 스캔 받아 두라는 정동지의 성화를 뭉갠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고려장 할 나이에 이처럼 일이 많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고, 욕이라면 욕이다.

 

그토록 바삐 쫓겨 다녔으니 최인기씨 원고 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2월 중순까지 요구한 글이라 추석연휴에 쓰려고 밀쳐두었으나,

원고료 부담에다 자료 담긴 유에스비 조차 열어보지 못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믐 날 제사음식 준비 하는 중에 최인기씨로 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어렵게 전화한 듯, 정중하게 원고 청탁을 거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앓던 이 빠진 것 시원해 받은 원고료를 즉각 돌려보냈는데,

거절한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더 좋은 필자를 구했거나, 다른 이유라면 모르겠으나,

20여일 전 '인사동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말하고 싶다'전 포스팅에

“언제까지 미투로 생사람 잡을거냐?“는 글을 본 모양이다.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미투였다.

 

고질적인 성희롱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미투 운동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진짜 미투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폐단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부산의 이광수교수가 여러 차례 페북에서 지적한 바 있는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가들이 페미니즘에 집착하는 폐단이 떠올랐다.

그 문제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걸 여태 보지 않았던가?

 

개안적 견해에 불과한 미투의 문제점 제기에 안면까지 몰수할 정도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로 흐르는 세태가 안타까운 실정에, 페미니즘 문제까지 부채질 한다.

 

메주알고주알 까발리다 보니 말이 엄청 길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사동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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