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인사문화마당'에서 찍은 포도대장과 순라꾼들

인사동은 추억을 먹고 산지 오래다,

40여 년 전 예총회관이 있던 인사문화마당 자리는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곳이다.

순라꾼들이 인사동 거리를 돌며 조선시대 풍정을 연출했으나,

재개발로 파헤쳐지며 지하에 묻힌 유물만 쏟아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은 문화마당만 바뀐게 아니라, 사람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인심까지 변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아무런 대책도 관심도 없다

왜, 나만 못잊어 한물 간 인사동 노래를 줄창 부르고 있을까?

아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 추억의 창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겼다.

‘인사동이야기’ 사진전 결산이 안 된다는 노광래씨 연락을 받아서다.

홍수표씨가 사진 값을 본인이 직접 와야 준다는 것이다.

사진 전해 준 사람에게 주거나 계좌이체하면 될 텐데...

 

해가 바뀌었으나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탓인지 인사동 거리는 한산했다.

홍수표씨를 만나러 인사동14길 골목을 들어서서 ‘신궁장 모텔’ 앞에 섰는데,

 ‘지리산’ 건물이 사라진 골목이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쪽 면이 훤히 드러났다.

다시 새 건물이 들어서면 볼 수없는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철거된 자리에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나, 변하는 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SK허브빌딩 쉼터인 ‘개천정’위로 솟은 앙상한 가지들이 스산한 겨울풍경을 연출했다.

‘개천산업’ 회장실에 들어가니 홍수표씨 혼자 있었다.

자주 만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 한번 보자는 심사였다.

 

홍회장은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고등학교 제자였고, 나와는 동갑내기다.

젊은 시절 법원 서기로 일했으나 월급 많이 주는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단다.

행원 공채에 응시해 인사동 태화관 자리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홍회장 사무실은 흡연이 가능한 보기 드문 장소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연신 줄담배를 피운 것은 흡연자의 설움에서다.

얼마나 냉대를 받았으면, 담배 피우는 사람만 만나면 동지애를 느낄 정도인가?

 

그곳을 나와 거리를 싸돌아다녔으나,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대감집’으로 바뀐지 오래된 옛 실비집 주변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실비집에서 만났던, 먼저 떠났거나 소식 끊긴 사람이 그리워서다.

 

적음 시집출판기념회에서 스스로 천재시인이라며 웃고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민폐를 가장 많이 끼친 땡초 적음이었다.

‘월간 빠’란 이야기로 온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했던 옛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잡지지만, 자기가 주간이고 날 더러 조대표라며 수시로 깔깔거렸다.

서울만 오면 실비집에 죽치며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실비집에서 술 마시다 잠든 적음스님

그런 그가 갑자기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한 번 웃자며 ’일소암‘이라 이름붙인 그의 방을 들여다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오래 전 찍어 준 초상사진은 영정사진이 되었고,

숨진 지 며칠이 지났는지, 바닥에 시신 썩은 자욱이 선명했다.

벽에 목을 기대어 기도가 막혀 숨진 것 같았으나, 스스로 열반에 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의 시 처럼 너무 그리워서 이승을 떠났을까?

 

적음스님이 열반한 자리

저녁에 / 최영해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사진기자 김종구, 소리꾼 김민경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세상을 하직한 인사동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랴 마는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낄낄거리며 인사동 술꾼들 물주 노릇 톡톡히 한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인사동 밤거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화가 이청운과 강용대

별을 그리다 별나라로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끊긴 이근우씨와 실비대학 총장님

 

이근우와 벼평모씨가 어울려 '레떼'에서 춤을 추고있다.

인사동이 그리워 ‘서울로 서울로’ 노래 부른 미국계신 최정자시인,

 

최정자시인 좌우로 김정혜씨와 이점숙씨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만 / 최정자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눈오는 인사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한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다 바뀐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은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정자시인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최규일, 최정자, 박이엽, 채현국선생)

 

 

인사동을 유달리 좋아했던 사업가 강선화씨가

지난 28일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부고를 접했습니다.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상주 : 김진규(아들)

빈소 : 서울성모장례식장23호실

발인 : 2021년 12월30일

 

지난 날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과

‘인사동이야기’ 사진집에 게재한 강선화씨 글입니다.

 

 

"인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

 

인사동은 친정집 같은 포근함이 있다. 숱한 세월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화가 박광호씨와 사진작가 조문호씨를 꼽을 수 있다. 애잔하고 즐거운 두 사람의 상반된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박광호씨의 그림과 그의 삶은 너무 애잔하다. 전람회장에서 만난 그의 삶도 기구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마음을 적셨다. 생선뼈만 그려진 그의 그림을 구입했는데, 볼 때마다 애잔한 감상에 빠져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문호씨는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소설가 배평모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충성서약 같은 첫 인사로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갑자기 술상 밑을 기어 내 앞으로 나와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개구쟁이처럼 좌중을 웃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 신비스러웠다. 그의 절창 ‘봄날은 간다’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한번은 ‘천포문학회’ 모임을 영월에서 가진 적이 있다. 시 낭송회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결정판은 아침에 찍은 기념촬영이었다. 참석한 삼십 여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뜰 앞으로 모였는데, 대뜸 조문호씨가 “무슨 졸업사진 찍냐?”며 바지 지프를 내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에 모든 상황은 끝났다. 그 많은 사람의 표정이 천태만상인데, 내 생애 찍은 기념사진으로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글 / 강선화

 

며칠 전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서 초촐한 망년회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방콕에서 해방된 날은 28일이었다.

날 잡은 김에 다 만날 작정으로 녹번동부터 갔다.

 

정동지 일로 충무로 가려는데,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에서 김수길씨와 한 잔 한다는데,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늦게 끝나 바쁘게 찿아 갔더니, 이미 술자리는 파장이었다.

사이클이 맞지 않아 부어 주는 쪽쪽 마시다보니 금방 취해버렸다.

김수길씨는 "'케이비에스'에서 동자동을 소개한 방송을 보았냐?"고 물었다.

쪽방은 물론 정동지 집에도 티브이가 없으니, 세상돌아 가는 걸 잘 모른다.

인사동 약속시간을 30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인사동은 연말분위기가 실종된지 오래다 

옷 가게들이 점령해 가는 거리 풍경은 낮 설기만 하다.

 

인사동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에 그 장면이지만, 출근부 도장 찍듯 찍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김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가 운영하는 ‘낭만’이었다.

어디쯤 왔느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 순찰을 마쳤는데,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공윤희, 임태종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두기 지침에 맞추어 네 사람만 모인 것이다.

 

박영애여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주었다.

돔 찜에다 돼지수육과 홍어, 그리고 과메기까지 등장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지, 술 마시며 안주를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나온 사람 몇 명 없는 조촐한 '인사동 사람들' 망년회지만, 음식이 너무 푸짐했다.

공윤희씨가 먼곳에서 공수해 온 꼬냑까지 꺼냈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만 마셨다. 양년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레 겁 먹은 것이다. 

 

최석태씨가 ‘유목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 김이하, 안완규씨도 있었으나, 술이 취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새해에는 신나는 일만 주렁 주렁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끝나는 봄 날, 때거리로 한번 젖어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https://youtu.be/fiqWyTLmWEc

 

 
-사진평론가 이광수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글-
 

사진은 그 본질이라 부르든지 속성이라 부르든지, 그 성격이 참 다양하다. 그런데 그것을 곰곰히 곱씹어보면, 그 여러 성질들이 서로 충돌하고 모순적이기까지 해,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은 각자 '꼴리는대로' - 이 글의 주인공인 조문호 선배 상투어임 ^^ - 받아들일 수 있는 참으로 오묘한 매체다. 그렇게 모던한 것이 그렇게 포스트모던 하다니...그 여러가지 것들 가운데 출발선상을 기준으로 보면, 사실에 대한 모사인데, 사진가의 주관으로 '모사'를 하니 재현representation이 되고, 결국 기록의 문제가 된다.

 

기록은 결국 기억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슬픈 것이 되고 사라진 것에 대한 비탄 내지는 찬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잊히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제시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최대한 사진가 자신의 주관이라는 기름기를 쫙 빼버리고, 가능할 수 있는 데까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그저 그런 평범한 이미지를 남겨 많은 사람들이 그 기억의 늪으로 쉽게 빠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사진가 조문호 선생은 바로 이렇게 사진을 찍는다. 기름기 없이, 사람의 눈을 중심에 놓고...
 
 
그리고는 여러 사람을 함께 참여하게 한다. 기억의 눞에 같이 빠지자는 것이다. 사진은 한 장 한 장 재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를 토대로 하여 사람들에게 제시presentation하는 일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가 조문호가 택한 제시 방법은 강민, 김명성, 김진하, 정영신 등 인사동에서 함께 지냈고 지내는 그리고 앞으로도 지낼 사람들 글을 싣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인 것은 그곳을 스쳐간 그리고 지금도 스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을 찍는 사진가 조문호의 작품은 볼 때마다, 읽을 때마다, 그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뭉클해진다. 그가 사진에 대해 취하는 태도 때문이고 그 태도가 아마도 그가 "인간은 악이다"라는 테제에 나하고 백퍼 일치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세계를 사유하고 세상 일에 참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서울을 가지 못해 막걸리 한 주전자 같이 못 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선배님 축하드리고, 이대표 좋은 책 [인사동 이야기] 다시 내주셔서 고맙소,

 
 
 
 
 

 

 

며칠 전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지난 달 물대포를 쏘며 강제철거 논란이 일었던 인사동 소재 복합문화공간 '코트' 전시장에

또 다시 승합차 두 대를 전시장에 밀어넣어 재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러 나간 것이다.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 큰길로 들어가니, 구세군 종소리가 연말분위기를 풍겼으나,

왠지 쓸쓸한 인사동 풍경이 낮 설게만 느껴졌다.

 

곳곳에 대포 맞은듯, 구멍 뚫린 빈 점포가 자리잡은 음산한 풍경이야 익숙하지만,

인사동 사거리 대로변에 들어서는 식당의 대형 간판이

마치 정육점 같은 벌건 고기 덩어리로 장식되고 있었다.

 

건물철거 등으로 곳곳에 출입통제 막이 쳐져 있었고,

남인사마당 공연장 앞에는 바닥교체 작업으로 어수선했다.

 

해마다 년 말이 가까워오면 지자체에서 남은 예산을 탕진하기위해

멀쩡한 바닥을 교체하는 장면은 이제 연례행사나 마찬가지다.

 

문제를 일으킨 복합문화공간 '코트' 전시장은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니, 벽면에는 ‘깨어진 땅’이라는 제목의 김지욱, 함형렬씨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바닥에는 텐트와 승용차가 들어 차 있었다.

 

지난 4일, 건물 입주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쏜 철거용역업체 직원들이

특수폭행 혐의로 입건돼 분쟁이 일단락 되는 듯 했지만,

이날 추가로 점거 사태가 일어나면서 분쟁이 재점화된 것이다.

 

'코트'는 예술인들에게 작업 공간을 저렴하게 제공하고,

전시 및 공연 장소로도 활용하는 복합문화 공간이다.

현재 다큐멘터리 감독, 디자이너, 사진가 등

약 30여 명이 2층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전시장을 치우고 승용차를 끌어들이는 용역업체 직원들 [사진, 점포주제공]

법정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돈 앞에는 예술도 상도의도 필요 없는 무지막지한 요지경 세상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만 할까?

엉뚱하게 피해 보는 전시작가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돈이 인사동 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가를 말살하고 있다.

인사동이 위태롭다. 이대로는 안 된다.

 

사진, 글 / 조문호

 

성원해 주신 덕에 ‘인사동 이야기’ 출판기념전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설치는 때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편치 않은 전시임은 틀림없었다.

한 달 전의 민폐가 체 가시기도 전이라 염치없는 짓이었다.

 

책이라도 좀 팔려는 욕심의 신중하지 못한 결정임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전시안내를 올린 터라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도자료에서 부터 일체의 전시홍보를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일기처럼 매일 올리는 중계방송까지 멈추고, 한 분이라도 알게 될까 전전긍긍한 것이다.

그러나 다녀간 분들의 페북 연결로 알만한 분은 다 알게 되어버렸다.

 

그 벌은 전시장을 지켜는 내내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아는 분이 오시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으니, 고문도 그런 고문은 없었다.

심지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자기가 왜 빠졌냐며 원망하는 지인까지 여럿 있었다.

그래서 정동지에게 맡겨둔 채 전시장 비우기를 밥 먹듯 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한정된 지면에 어찌 다 수용할 수 있겠는가?

11년 전 초판 나올 때 찍은 분도 다 게재하지 못한 상황에서 추가 촬영까지 했으니 쩔쩔 맨 것이다..

하다못해 사진 질에 따라 선정하라며 출판사 편집자에 위임해 버렸다.

 

예전에는 만나는 대로 촬영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친분보다 인사동과의 관계성에 중점을 두어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이 또한 갑 질에 다름 아니었다.

 

내년에 출판될 인사동 책에는 개인 입상사진보다 인사동 행사장을 비롯한

특정 공간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많이 할용해 당시의 현장 이야기까지 곁들일 생각이다.

많은 분이 참여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도 약속드린다.

 

이번 전시로 인해 많은 분들에게 민폐는 끼쳤지만, 더 좋은 책을 준비하는 수업료로 여긴다.

그 덕에 ‘인사동 이야기’ 책도 100여권이나 팔았고, 사진도 여러 점 판매해 손해는 보지 않았다.

 

그런데, 대전에 계시는 사진가 박순규씨는 전시 때마다 먼 길을 찾아주는 것도 고마운데,

마치 자식 챙기듯, 올 때 마다 농산물이나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송구스럽게 만들었다.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전시 첫날인 24일은 ‘유목민’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했는데,

이한성씨가 술값으로 백만원을 술집에 맡겨주는 통에 지난 전시 때와 달리 술값 걱정은 덜게 되었다,

그 날은 조해인, 김수길, 정동용, 김 구, 김제홍, 장경호, 임경일, 이명희씨와 함께 마셨다.

 

그 다음 날인 25일에는 마지막 들린 황정수씨 내외와 한 잔했는데,

먼저 술집으로 안내해 드린 화가 김정헌, 이태호씨도 자리 잡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황정수씨와 사진가 양승우씨가 친하게 된 경위와

서지학자 김영복씨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관계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셋째 날인 26일은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와 조준영씨가 전시장 문 닫을 무렵에 나타나

모처럼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을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에 들린 ‘부산식당’은 방에서 의자로 실내장식이 바뀌었으나

13년 전 찍어 준 조성민씨 사진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마치 부친의 입상사진이 ‘부산식당’ 트레이드 마크처럼 벽면을 지켰다.

 

27일 늦게는 판화가 류연복씨, 사진가 김문호씨, 화가 신상덕씨가 나타나

전시장에서 와인으로 목을 축이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 마시는 중에 신상덕씨와 ‘귀천’에 모과차 마시러 갔더니 목영선씨가 반겼다.

목순옥여사가 운영했던 ‘귀천’을 조카 목영선씨가 물려받았는데,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단다.

다섯 살짜리 아들이 스물여덟의 청년이 된 것이다.

 

28일은 ‘진인진출판사’ 김태진대표가 꽃다발과 축하선물까지 사 오셨다.

오래전 부터 인사동에 관한 출판 계약을 한 상태에서 같은 주제의 사진집 복간 기념전을 열었으니,

죄송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고마운 분이다.

 

그 날은 마지막 들린 화가 이인철씨와 어울려 불편한 마음을 위안했다.

 

전시 철수 전 날인 29일은 최석태, 장경호씨 등 여러 명과 어울려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전시장에선 매일 주눅 들어 지내지만 문 닫기가 무섭게 술집에서 지냈다.

 일주일 내내 술독에 빠지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런데 전시 끝나는 날 이한성씨가 다시 나타났다.

맡겨두고 간 술값이 소진될만하니 다시 찾아 온 것이다.

그 날은 장경호씨 앞으로 술 값 백만원을 맡겨두고 간 것이다.

 

이한성씨는 20여 년 전 인사동 주막 ‘작은뜨락’을 자주 찾았는데,

늘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자선 사업가다.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야박한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분들이 인사동 풍류객의 주체로 버티는 한 인사동 앞 날은 결코 어둡지만 않을 것이다.

 

전시를 철수하는 날은 전시 디피에서부터 마무리까지 도와 준 김진하관장과 한 잔 했는데,

김수길, 전활철, 임경일, 노광래씨와 어울려 마지막 술잔을 들었다.

 

그동안 전시장을 비워 만나 뵙지 못한 분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아쉽지만, 아래 방명록에 적힌 성함이라도 오래 동안 기억하렵니다.

"고마웠고, 미안합니다"

 

조해인, 이명희, 한배규, 석은미, 김인재, 박경하, 이종승, 전강호, 양시영, 박홍순, 노광래, 박상희, 변정대섭,

편근희, 손기환, 전태수, 양상용, 김이하, 정영철, 나종희, 조정애, 김재홍, 황영선, 우문명, 곽숙경, 공윤희,

박옥수, 박서연, 박상희, 박 건, 조경연, 박불똥, 임태종, 서인형, 박태종, 김진하, 박서호, 안정희 ,최인기,

임경일, 안동해, 정동용, 김 구, 김수길, 박은태, 변성진, 박찬원, 성기준, 현영애, 박순규, 최효준, 이종구,

김발렌티노, 이태호, 김정헌, 황정수, 이만주, 김윤기, 최연하, 이규상, 조준영, 최영호, 이기정, 이성은,

김지연, 곽명우, 최태만, 양정애, 최동락, 박종면, 고 헌, 송주원, 전민조, 김문호, 유광식, 신상덕, 류연복,

이승곤, 양재문, 이병진, 김태진, 이인철, 문성식, 박순영, 이한복, 서정란, 임정희, 강찬모, 이상훈, 최석태,

금보성, 하형우, 이태호, 임동은, 고영준, 전활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은행잎이 인사동을 금칠 한다

또 한 해의 끝자락이 몰려온다.

 

세월따라 가겠지만 모두 바뀐다.

인사동 거리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다.

 

복면의 시대라 사람도 잘 몰라본다,

사람이 사람 만나기를 겁낸다.

 

더 큰 건물 지으려고 ‘지리산’을 철거한다.

인사동의 기억을 지운다.

 

풍류객 잔당들의 마지막 저지선 '벽치기골목' 

 

‘유목민’에 모여 앉아 음모 꾸민다.

이름하여 ‘풍류 쿠테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전통문화가 퇴색되고 예술가들의 풍류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인사동이 관광지로 바뀌며 점차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을 말하고 싶어 ‘인사동 이야기’ 사진전을 마련한다. 

이 전시가 인사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서곡이기도 하다.

 

2009.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은 긴 세월 많은 사람에게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온 곳이다. 어찌 보면 예술을 공유하는 장터나 마찬가지다. 장에 갔다가 반가운 사람 만나 즐기듯이, 다들 뒷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정 나누어 온 장소다. 혁명을 외치고 사랑과 예술을 노래하며 꿈을 펼친 곳이다.

이제 문화 특구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 간데없다. 더러는 인사동이 끝났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상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 가게나 문화공간들이 어려워도 군데군데 버텨나갈 것이고, 예술가들도 작품을 펼쳐 놓고 어느 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담론으로 꽃 피울 거다. 그래서 인사동 노래를 부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2006.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이번 전시는 20년 이전에 촬영한 흑백사진을 제외한, 그 이후에 촬영된 컬러사진에서 골라냈다. 인사동의 변해가는 풍경을 년 대별로 보여주는 작품 30여 점을 주축으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입상 사진 20여 점도 함께 전시한다.

 

2010.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이야기에 비켜선 입상 사진을 내건 것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의 많은 지면을 인사동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본래 의도한 제목도 인사동 이야기가 아니라 인사동 사람들이었다. 비단 인사동만이 아니라 장소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인사동을 지켜나갈 전사이기도 하다.

 

2016.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사람들' 작업은 1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2007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사진전과 2010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사진전에 이은 세 번째 전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을 각자가 추억하는 특정 장소에서 촬영하여 지난날을 되새기게 했다. 앞으로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촬영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과 사료를 정리하기로 했다.

 

2011. 65x40cm. 디지털프린트

길고 긴 인사동 이야기를 들추려니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겠다. 조선시대에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2012. 33x20cm. 디지털프린트

19세기 말 개화 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2013.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 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그리고 사기 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2014.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문헌화랑', 1976'경미화랑' 등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박주환씨가 '동산방'1976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김완규씨의 '통인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그 후에도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하여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의 교두보로 자리 잡았다.

 

2015. 65x40cm. 디지털프린트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씨가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최건수씨가 '룩스'를 인수하여 인덱스’로 개명한 것이 인사동의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시인들의 아지트로는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단골 모임터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이 운영한 시인 과 강고운시인의 '무다헌'이 운영되다 문을 닫았고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만 남아 있다.

 

2016.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자리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한 데 이어 88년에는 민예총이 창립되어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민미협 창립과 함께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인사동이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99년에는 민사협이 북인사마당 입구에 둥지를 틀었다.

 

2017.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에 예술가들의 풍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로 알려지고 있다. 명동을 주 무대로 모이던 문인들이 종로 관철동 시대를 거쳐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시작된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 선생을 앞세워 천상병, 박이엽, 민영, 신경림, 강민, 구중서, 신동문, 박재삼, 황명걸, 방영웅씨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8.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은 주로 기원이나 찻집, 그리고 대폿집이었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같은 찻집, 그리고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하가'레떼', '춘원', '누님칼국수등이 연이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 많은 작가들이 어울렸다. 그 이후 생겨 난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노인자의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에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그 뒤에는 최동락씨가 운영한 풍류사랑’과 전활철씨의 유목민’, 최일순씨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고, ’풍류사랑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씨가 이어받았다.

 

2018.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는지 모른다.

 

2019.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이 전시는 1124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가물거리는 인사동의 부흥을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우자.

 

2016. 65x40cm. 디지털프린트

개정판으로 나온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124명의 입상사진을 바탕으로

강민시인을 비롯한 43명의 작가가 쓴 48편의 인사동에 관한 글과 인사동 사진 37점이 소개되어있다

 

눈빛출판사 / 가격25,000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