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뜻밖에 손님이 찿아 와 모처럼 인사동의 봄을 즐겼다.

마산 사는 후배 변형주씨와 인사동과 녹번동,

동자동 쪽방촌을 두루 돌아다니며 봄날의 회우를 기념했다.

 

지난 3일, 동자동에서 늦은 아침 밥을 준비하는 중에

유목민 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엊저녁에 변형주씨가 왔는데, 함께 점심이나 먹자고 한다.

손님 접대에는 대마불사주가 좋을 것 같아 녹번동 가자고 했다.

 

정영신씨는 지방 촬영을 떠나버려,

인사동 '유목민'부터 들려 김치찌개 한 냄비 끓여 가지고 간 것이다.

녹번동 좁은 탁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옛이야기로 추억을 더듬었다.

 

변형주씨는 40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한탄한다.

정말, 나이가 들수록 어찌나 세월이 빠른지, 총알 같다.

 

말년을 자연과 함께 지내려고 지리산에 집 지을 준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지리산 집들이 가서 한 번 취할 꿈도 꾸어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바닥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다들 밥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치매환자들인가?

 

전활철씨는 영천시장 장 보러 가는 틈에, 둘이서 동자동 간 것이다.

숨 막히는 좁은 공간이지만, 그곳만큼은 흡연구역이 아니던가?

얼마나 줄담배를 피웠는지, 담배 연기에 질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한때 변형주씨를 인사동 골목대장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그는 괴물로 통한다.

그 괴물의 실체를 찍은 오래전 사진을 찾아 본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된 10년 전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인사동에서 찍은 변형주씨 알몸사진은 실제 크기로 뽑았으나

정선 작업실 화재 때 타버려 원본 이미지를 보여준 것이다.

 

쪽방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목민’에 들려 부족한 술부터 보충하고 싶었으나,

술시가 일러 인사동 돌아다니며 봄바람 맞은 것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나들이객들이 많았는데,

북인사마당’엔 부채춤이 봄꽃처럼 피었더라.

 

오랜만에 괴짜 고 헌씨를 거리에서 만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가로등만 찍는 사진가였으나,

이젠 사진과 작별했는지 카메라 잡은 것 본 지 오래되었다.

 

버스킹에 나선 인사동 단골 뮤지션들의 연주도 각양각색이었다.

一心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은 변형주씨가 샀다.

 

인사아트프라자에 들려, 제주4.3과 여순사건을 묶은 동백이 피엄수다도 보았다.

외세에 의한 동족 살상의 끔찍한 사건을 떠 올리며 치를 떨었다.

 

인사동 수도약국앞에서 변형주씨 아들 변도영군을 만났다.

본 지가 오래되어 낯설었으나, 붕어빵 같은 모습은 여전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다시 음악에 매진할 것이라 했다.

 

다 같이 유목민으로 갔더니, 그때사 준비가 끝났는지 문을 열어 놓았다.

부자간 대작하도록 남겨두고, 급히 다녀올 곳이 생겼다.

 

사진을 빨리 보내 달라는 복에 없는 원고청탁에 바쁜 걸음 쳐야 했다.

두 시간이나 걸려서야 돌아왔더니, ‘유목민은 이미 흥청댔다.

 

한쪽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이하씨 일행이 술판을 벌였고

윗쪽에는 신단수, 장홍순씨 일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전에서 돌아온 정 동지도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 저 자리 끼어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날 따라 전활철씨 더러 노래 한곡 하라며 장경호씨가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기타에 꽂아 주기도 했다.

 

전활철씨 노래와 기타 솜씨야 익히 알지만,

록과 부루스가 주특기인 도영이 기타연주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들어 본 도영이 연주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곡은 잘 모르겠으나, 슬픔과 한이 배어있는 부루스였다

 

장음계에서 3도움과 7도움을 반음 낮춰 연주하는 블루스가

약간 늘어지는 박자이긴 하지만,

불루스 특유의 슬픔과 한이 잘 배어 났다.

잔잔한 애드립 여운이 촉촉이 적셔주는 멋진 연주였다.

 

정동지는 벌써 무더울 여름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올여름엔 꼭 에어컨을 살 것이라며, 나더러 말리지 말란다.

돈도 돈이지만, 그 비좁은 집에 어디다 놓을 것인지 모르겠다.

신단수와 최석태씨까지 나서서 에어컨 살것을 부추기며, 극빈자 모금까지 하겠단다.

 

끝날 시간이 되었는지 한 사람 두 사람 물러나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안 쪽에 있던 '학고재' 우찬규씨가 우리 자리 술값까지 계산해 버렸다.

더 마실 형편도 되지 않는데, 잘 모르는 화가 한 분은 골든 벨을 누르겠다고 큰 소리다.

변형주씨는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도영이 부축을 받아 여관 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틈만 나면 인사동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은 사람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인사동이 인사동 다워 지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출간한 황정수

 

미술평론가 황정수가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현장 취재와 발굴의 결과물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샀다는 그의 작업실엔 그림과 문헌 자료가 가득하다. 실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작품 평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김종목 기자

“작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소문난 수집·애호가
조선 말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의 화가와 작품 찾아 ‘있는 그대로’ 기록
“서구 인상파 영향 받은 이인성, 정확히 말하자면 구로다 세이키 영향”

 

“탑골공원에 가면 심전 안중식(1861~1919)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가 떠오르고, 정관 이건중(1916~1979)의 사진 ‘탑골공원’도 생각나죠.” 미술평론가 황정수는 옛 서울의 흔적이 남은 곳에 갈 때면 관련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고 했다. 탑골공원에서는 “그림 네댓 개가, 사람 네댓 명이 머릿속으로 싹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살던 집은 탑골공원 근처라 ‘탑원’이라 불렸다. ‘탑원도소회지도’는 안중식·오세창 등 여덟 친구가 달빛 아래,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뒤로 두고 시·서·화를 즐기던 모습을 담았다.

황정수가 최근 출간한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푸른역사) 북촌·서촌 편 2권(사진)에는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전후까지 격변기를 살아낸 화가와 작품 이야기가 가득하다. 책은 ‘황정수, 근대 그림들의 장소를 거닐다’로 여겨도 된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주상복합건물에 있는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황정수는 경성 화가들의 자취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기록을 하나하나씩 뒤져 다 찾아다녔다고 한다. “뜻밖에 화가가 많았어요. 대부분 서울 중심부, 그중에서도 북촌과 서촌에서 활동했더라고요.”

 

인물과 인맥, 지리, 미술사에 관한 육하원칙이 줄줄 이어진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은 광통교 쪽에서 활동했다.”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서화골동(書畵骨董) 유통의 본거지다.” “일본인 화가들은 주로 남산 아래 남촌으로 들어갔다.” 황정수는 “인사동을 중심으로 북촌과 서촌, 남촌이 하나의 미술 벨트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왜 ‘경성 화가들’이었을까. “이중섭이나 김환기는 1950년 이전에 그린 작품으로 남은 게 다섯 점 될까 말까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작품은 서양화 석 점만 남았어요. 근대기 작품을 여럿 남긴 다른 작가는 왜 연구하지 않는지가 불만이었죠.”

 

근대기는 ‘일본 미술’ ‘일본인 화가’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는 “여러 연구자가 자랑스럽지 못한 일제강점기 역사 때문에 미술 분야에서 발전한 일본이 발전되지 못한 한국에 영향을 줬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를 배운 일본인이 도쿄에 온 한국인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이 한국인 제자가 나중에 한국에서 유명 화가가 되었어요. ‘서구 인상파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1886년 프랑스에서 화가 라파엘 콜랭에게 배운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아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유명 화가는 고희동 등이다. 황정수는 “일본의 누구한테 무엇을 배웠는지, 왜 그런 작품을 그렸는지 하는 연구가 없다”고 말했다.

 

황정수는 2018년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를 출간했다. “일종의 한·일 문화교류사의 사초”로 책을 정의했다. 1908년 한국에 들어와 미술을 가르친 일본인 화가 시미즈 도운의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등 여러 작품을 발굴해 책에 실어 알리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 화가든, 일본인 화가든) 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긴 건 미술사에 이름은 남았지만, 작품이 남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을 낼 때 ‘친일·반일’ 프레임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황정수는 “일본인 화가들은 빼고 근대기 한국 미술과 경성 화가들의 면모를 볼 수가 없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신념으로 출간했다”고 말했다. 그 신념은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에도 적용됐다. 작업실은 온갖 작품으로 가득했다. 황정수는 소문난 수집가이자 애호가다. “작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다”는 신념으로 여유가 생기는 대로 작품을 사들였다. 부모님 드릴 용돈을 빼곤 다 그림을 샀다고 했다. 통틀어 1만점가량을 가졌다. 그는 “너무 그림이 좋으니까 안 사면 못 배기는 그런 병이 생긴 것”이라며 웃었다.

 

30여년간 작품을 수집하면서, 주식이나 부동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다고 했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나 다른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갖고 있던 그림을 팔고서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림을 팔아야 한다면, (화랑이나 개인이 아니라) ‘반값’에라도 미술관에 팔려고 한다”고 했다. “미술관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요.”

 

황정수는 한밤에 깨면 불현듯 보고 싶은 작품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둘이 마주 앉으면 그림과 어떤 대화가 이루어져요. 미술품은 살아 있는 생물이에요. 무속인들의 접신 비슷한 걸 느낄 때도 있죠. 작가의 마음이 된 듯도 하고요. 그 희열이 매력적이죠.”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미술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발로 가본 곳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술이 인간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걸 조금이나마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구소를 찾았을 때 황정수는 출판사 요청으로 신간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이름 곁에 “畵中有詩 詩中有畵(화중유시 시중유화: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를 적었다.

 

경향신문 / 김종목기자

지난 주말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인사동에 나갔다.

한산했던 인사동 거리가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이 나왔더라.

 

술 마시기는 좀 이른 것 같아 '나무화랑'부터 올라갔다.

전시장엔 용해숙씨의 '유토피아 삼경'이 열리고 있었는데,

작가를 비롯하여 최석태, 김구, 김이하 시인등 여러명이 있었다.

 

전시는 특정 장소를 입체 거울을 통해 재구성한 사진전인데,

일곱 개의 삼각 피라미드로 구성된 입체 거울이 전시장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기로는 거울 같지만, 잘 가공된 스테인리스였다.

 

가로 3m,·세로 1m의 대형 설치물이라 전시장에 올릴 때 고생했겠더라.

전시하는 사진이 각진 거울의 반사를 통해 태어났으니, 설치물 자체가 작품의 모태인 셈이다.

 

작가는 최석태씨에게 작업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에 반사된 다각도의 이미지가 장소의 고유성을 허문다는 것 같았다.

 

작가 용해숙씨를 처음 보았는데, 대단한 열정을 가진 여장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주목해 볼 작가로 생각되었다.

 

법당 단청을 거울에 반영시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했는데,

공간을 바라보는 인간 중심적 관점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야기 같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으로 기록의 매개인 사진마저 무위라는 걸까?

사진이 폭 넓게 활용되며 사진 본연의 목적에서 점차 멀어 간다는 씁씁한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초저녁인데도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좀 쌀쌀했지만, 담배 피우기 좋은 골목에 상을 차렸다.

 

안쪽에서 마시던 김태영, 이승철 시인, 전상기 문학평론가 등

몇몇 분들이 담배 피우러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최석태, 김구, 김이하씨도 전시장에서 왔으나 자리가 없어 ‘사랑채’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김태영씨가 ‘이즈’에서 그림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주었다.

시간이 늦어 볼 수는 없었으나, 전시 리프렛과 새로 펴낸 시집

‘버드나무 버드나무 흰 그림자’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시집은 읽을 수 없었으나, 리프렛에 실린 그림은 볼수 있었다.

그림에 환영어린 몸짓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흐릿한 붓질에서 인간의 불안감이나 삶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도 고개 내밀었다.

 

그 날은 ‘유목민’과 ‘사랑채’를 넘나들며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뒤늦게는 '사랑채'에 안원규씨와 우문명씨도 나타났다.

여기저기 옮겨가며 마셔 그런지 주량을 한참 초과해 버렸다.

 

필름이 끊겨 어떻게 돌아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며 그 날 방기식씨가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와중에 선물 받은 김태영씨 시집을 흘리지 않은 게 신통했다.

 

속은 쓰렸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시집부터 읽었다.

김태영씨 그림과 시의 연관성이 궁금했는데, 공통점이 보였다.

 

 

첫장에 실린 ‘만종’이란 제목의 시는 이러했다.

 

“묻지도 않고

스포츠로 민 머리

손수 감겨주고

뽀드득,

물기를 훔친다.“

 

‘잠꼬대’란 시는 더 난해했다.

“비단길 흰 허벅살 한 입의 사과즙”

 

‘즉물성의 감각, 즉물성의 형이상학’이란 제목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전상기씨는 김태영시의 불친절함을 이렇게 말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전봉건의 초현실주의시, 아니면 김종삼의 음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감흥을 시화한 방식에 견준다면 어떨까. 예의 없고 불친절하며 뜬금없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 시를 보노라면 김태영의 시가 어떨지 감이 올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시적 화자의 시작 당시의 생각과 감성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고 했다. 즉흥성과 즉물성의 감각을 이미지화하는 것, 다시 말하면 거기에 집중하는 미세하고 예리한 감각의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것이 김태영의 시작 목표라고 적고 있다.

 

시어가 잠꼬대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단어를 나열시킨 무슨 암호 같았다.

김태영의 시는 세심한 독해력이 요구되었다,

 

‘고아’

 

​엄마는 어쩌자고

뻐꾸기 둥지였을까

나는 삐뚤빼뚤

도대체 천사는

언제까지나 유구할까

 

임동확 시인은 김태영의 시집에 ‘모순과 소퉁의 시학’이라는 추천사를 썼고,

홍일선 시인은 “천길 나락 ‘절벽’ 속에 피워낸 만다라 시편”이라는 글을 썼다.

요즘 작품들은 너무 난해하다. 

 

사진, 글 / 조문호

 

 
 

 

곡운구곡의 농군화가 길종갑의 '화전'이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 펼쳐졌다.

 

화전2014-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cm(X7)

지난 4일 느지막하게 전시장에 가보았는데, 작품 크기에 압도당했다.

새롭게 내놓은 신작 ‘두류산 풍경’은 9미터가 넘는 대작이었다.

대작 3점이 전시장 삼면을 가득 메웠고, 제일 큰 작품은 12미터나 되었다.

 

화전2014-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cm(X7)

특유의 붉은 색으로 주변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화전’에는

 이 땅을 살아 온 민중의 아픔이 배어있었고,

화면을 가득채운 강렬한 색 속에 서릿발 같은 날이 서있었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길종갑의 실경산수도였다.

 

듀류산풍경2022 캔버스에 아크릴, 267X940cm

작가가 사는 화천면 사내면은 조선중기의 화가 조수걸이 그린 ‘곡운구곡도’의 땅이다.

조수걸의 ‘곡운구곡도’가 평온하다면, 길종갑의 ‘곡운구곡도’는 날이 서 있다.

 

산치성 2009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cm

삶의 터전인 두류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작품에서 따뜻한 작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소박한 찰나의 삶도 소중하다"는 작가의 말이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다산별곡 2020 캔버스에 아크릴, 267X940cm

곡운구곡(谷雲九曲)의 작가로 알려진 길종갑은 그동안 4.3미술제, 평화미술제,

광주40주기 기념전 등의 단체전에도 참여하며 사회비판적 보폭을 넓혀왔다.

 

산불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70X267cm

그는 산수화를 그리지만, 그 풍경 속에 사람이 있다.

마치 삼각지 그림처럼 두서없는 유쾌함을 풀어내기도 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주며 작은 사람들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는 화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다.

다들 편하게 살려고 고향을 떠나지만, 팔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낯에는 호미로 밤에는 붓으로 농사짓고 있으니, 옛날의 ‘주경야독’인 셈이다.

 

어머니와 함께 포즈를 취한 길종갑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치열하게 살아간다.

임대 창고 빌려 쓰는 그의 화실은 사는 집보다 더 컸다.

주변 환경을 그려 “화천인문기행”이란 화첩을 만드는 등, 미처도 제대로 미쳤다.

작가의 야생성이나 원시성도 작품과 괘를 같이한다.

 

2015년12월 작업실을 방문한 정영신씨와 대화를 나누는 길종갑작가

그 원시성에 끌려 육년 전 바이칼 찬바람에 옷을 벗긴 적도 있다.

그를 모델로 끌어들여 강원도 작가들의 기획전 “강렬하게, 리얼하게”에 출품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 작업은 자연 속에 동화된 인간의 원시성을 드러내는 ‘신체발언’ 프로젝트였다.

30여년 전부터 시작했으나 사진 규격이 실제처럼 너무 큰데 따른 제작비 부담이나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어 온 일이었다.

20여명을 촬영한 마지막 주자에 길종갑 작가가 걸린 것이다.

 

작가의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보자.

 

“주변을 돌아보며 소소한 대상과 대화를 나누는 건 이야기를 찾는 거지요.

그리고 그림 속에 우리가 살아온 터전의 소소한 부분까지 말하고 싶었어요,

환경 문제는 대학 시절부터 작품에 개입 시켜 왔는데,

세밀하게 표현하다 보니 작품이 점점 커지게 되었어요.

그림으로 보는 장편소설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다산별곡 2020 캔버스에 아크릴, 267X940cm

'그림다운 그림' 그런 것을 그리고자 하는 감수라는 수동성과 지극히 찬란한 곳에는

지극한 슬픔이 배어 있곤 하더라는 아픈 통찰, 그 둘 사이가 길종갑 그림의 터전인 듯하다.

이 둘이 서로를 누르고 제압할 듯 힘을 겨루지만, 이제껏 늘 승리는 전자(前者)에게로

돌아가곤 했던 전장(戰場). 사랑과 슬픔이 싸운다는 것!

'민중'미술 아닌 민중‘'미술’'의 한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전시 서문에 박응주 평론가가 적었다.

 

장사날 2011 캔버스에 아크릴, 194X300cm

이 전시는 오는 23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강행복선생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 가는 세상이치야 어쩌겠습니까만

그 작업은 무념무상의 수행이었습니다.

 

한 올 한 올 쌓은 목판화 아티스트북이 있어

적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에서 못 이룬 화엄의 경지, 저승에서 이루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주로 ‘유목민’ 아니면 ‘나무화랑’이네요.

지난 모습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그리고 역병때문에 문병오시는 걸 가족들이 사양한답니다.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도 드릴 분은 아래로 보내주세요.

 

 

부고

-상주: 조진숙, 강성민, 강민정, 강행자

-빈소: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8호실 (대학로)

-발인: 2022.2.10.(목)

-장지: 서울추모공원

상주 강성민 계좌번호

국민은행 567001-04-320280

 

설날을 하루 앞둔 31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집을 방문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사차 들렸는데, 대접할 음식이 마땅찮았다.

설날 세찬과 함께 마신다는 도소주는 없으나 대마불사주로 목을 달랬다.

 

이년 넘게 어렵사리 가게를 끌어가는 그로서는 빨리 코로나 역병이 끝나고

정상적으로 영업 하도록 해주는 것이 새해의 바람일 것이다.

만사형통을 기원했지만, 다들 나이가 들어 건강이 문제다.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연식이라 술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활철씨는 당뇨가 심해 술을 멀리해야하지만, 술장사가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술만 마시면 숨이 가빠 정신을 못 차리지만, 거절할 줄 모른다.

그러나 혼자서는 마시지 않고 주량도 점차 줄여나가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설날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가까운 분들과 술 한 잔하기로 했다기에 나도 가겠다고 했다.

활철씨가 시장 보러 가야한다며 일어나기에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했는데,

자고나니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으슬으슬 추웠다.

감기 같았지만, 불길한 생각도 들어 온 종일 누워 뒤척였다.

 

유목민에 가겠다고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오후에야 몸을 추서려 인사동에 나갔다.

좀 이른 시간이라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한복 입은 사람은 커녕, 거리에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곳저곳 전시장만 기웃거리다 유목민으로 발길을 옮겼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담배 피우러 나온 정영철씨가 멀리서 반가워했다.

오후 여섯시 밖에 되지 않았으나, ‘유목민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정영철씨와 필립, 두 사람 뿐이었다.

여지 것 약속 없이 술 마시러 나온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입구에 자리 잡아 전활철씨와 술 마시며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어제는 몸이 아파 오늘 왔다니까,

자기도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아 안원규씨 에게 맡겨두고 잤다는 것이다.

이인섭선생과 장경호씨 등 몇 사람 나오지도 않았다며

어제 먹다 남은 갈비 살이 있다며 한 접시 구워냈다.

 

얼마 전 김홍성씨가 페북에서 궁금해 한, 적음의 산문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오래 전 김홍성씨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시집 저녁에가을밤의 춤만 내고 산문집은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적음의 정리되지 않은 많은 원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대지 못했다는데,

유목민에 메달리다 보니 출판에 관한 일은 손댈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그 일을 맡아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마침 가을밤의 춤표지에 사용된 신준식의 담뱃불 그림 속에

적음 육필로 쓴 파적이란 시가 적힌 작품이 벽에 붙어 있었다.

김홍성씨 말처럼, 적음의 음모정렬체가 또렷했다.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 '파적' 부분-

 

두 사람 다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적음은 암자에서 술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신준식은 술이 취해 길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아무리 운명의 장난이라지만, 어찌 이리 기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사동 이야기사진전 이후의 불편한 심정도 털어 놓았다.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한라산을 두 병이나 깠는데, 손님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여덟시 반 밖에 되지 않았으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니 끝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이년 넘게 끌었던 코로나가 주당들의 음주문화까지 바꾸어 버렸다.

처음 보는 나야 황당했지만, 활철씨는 익숙한 듯 자리를 치웠다.

 

나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여지 것 이른 시간에 술 취해 돌아간 적이 있었던가?

하릴없이 인사동 밤거리를 방황했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흥타령이 잠잠한 인사동을 들썩였다

 

그런데,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실수를 저질렀다.

술이 취하면 숨이 가빠 마스크를 쓸 수가 없는데,

대중교통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는가?

경노석 구석자리에 앉아, 몰래 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한 것이다.

 

세상에! 숨 못 쉬면 죽는 것 아닌가?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산소호흡기 달린 마스크는 나오지 않는가?

정초부터 저승 문턱에 갔다 온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오래전 '인사문화마당'에서 찍은 포도대장과 순라꾼들

인사동은 추억을 먹고 산지 오래다,

40여 년 전 예총회관이 있던 인사문화마당 자리는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곳이다.

순라꾼들이 인사동 거리를 돌며 조선시대 풍정을 연출했으나,

재개발로 파헤쳐지며 지하에 묻힌 유물만 쏟아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은 문화마당만 바뀐게 아니라, 사람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인심까지 변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아무런 대책도 관심도 없다

왜, 나만 못잊어 한물 간 인사동 노래를 줄창 부르고 있을까?

아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 추억의 창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겼다.

‘인사동이야기’ 사진전 결산이 안 된다는 노광래씨 연락을 받아서다.

홍수표씨가 사진 값을 본인이 직접 와야 준다는 것이다.

사진 전해 준 사람에게 주거나 계좌이체하면 될 텐데...

 

해가 바뀌었으나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탓인지 인사동 거리는 한산했다.

홍수표씨를 만나러 인사동14길 골목을 들어서서 ‘신궁장 모텔’ 앞에 섰는데,

 ‘지리산’ 건물이 사라진 골목이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쪽 면이 훤히 드러났다.

다시 새 건물이 들어서면 볼 수없는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철거된 자리에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나, 변하는 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SK허브빌딩 쉼터인 ‘개천정’위로 솟은 앙상한 가지들이 스산한 겨울풍경을 연출했다.

‘개천산업’ 회장실에 들어가니 홍수표씨 혼자 있었다.

자주 만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 한번 보자는 심사였다.

 

홍회장은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고등학교 제자였고, 나와는 동갑내기다.

젊은 시절 법원 서기로 일했으나 월급 많이 주는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단다.

행원 공채에 응시해 인사동 태화관 자리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홍회장 사무실은 흡연이 가능한 보기 드문 장소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연신 줄담배를 피운 것은 흡연자의 설움에서다.

얼마나 냉대를 받았으면, 담배 피우는 사람만 만나면 동지애를 느낄 정도인가?

 

그곳을 나와 거리를 싸돌아다녔으나,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대감집’으로 바뀐지 오래된 옛 실비집 주변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실비집에서 만났던, 먼저 떠났거나 소식 끊긴 사람이 그리워서다.

 

적음 시집출판기념회에서 스스로 천재시인이라며 웃고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민폐를 가장 많이 끼친 땡초 적음이었다.

‘월간 빠’란 이야기로 온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했던 옛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잡지지만, 자기가 주간이고 날 더러 조대표라며 수시로 깔깔거렸다.

서울만 오면 실비집에 죽치며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실비집에서 술 마시다 잠든 적음스님

그런 그가 갑자기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한 번 웃자며 ’일소암‘이라 이름붙인 그의 방을 들여다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오래 전 찍어 준 초상사진은 영정사진이 되었고,

숨진 지 며칠이 지났는지, 바닥에 시신 썩은 자욱이 선명했다.

벽에 목을 기대어 기도가 막혀 숨진 것 같았으나, 스스로 열반에 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의 시 처럼 너무 그리워서 이승을 떠났을까?

 

적음스님이 열반한 자리

저녁에 / 최영해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사진기자 김종구, 소리꾼 김민경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세상을 하직한 인사동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랴 마는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낄낄거리며 인사동 술꾼들 물주 노릇 톡톡히 한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인사동 밤거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화가 이청운과 강용대

별을 그리다 별나라로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끊긴 이근우씨와 실비대학 총장님

 

이근우와 벼평모씨가 어울려 '레떼'에서 춤을 추고있다.

인사동이 그리워 ‘서울로 서울로’ 노래 부른 미국계신 최정자시인,

 

최정자시인 좌우로 김정혜씨와 이점숙씨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만 / 최정자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눈오는 인사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한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다 바뀐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은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정자시인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최규일, 최정자, 박이엽, 채현국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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