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서울 전역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밤잠을 설쳤다.

 

눈이 오면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순백의 세계도 장관이지만,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 밟는 소리가 정겨워서다.

 

눈 치울 일이나 길이 미끄러운 불편함이야 따르지만,

 눈이 오면 어린애처럼 마음 들 떠는 것은 늙어도 어쩔 수 없다.

 

어제 밤엔 늦잠이 들어 오전 열시 무렵에야 일어났다.

 

쪽방에 창문은 있지만 옆 건물과 붙어있어 햇볕은커녕 바깥 날씨조차 알 수 없다.

 오로지 담배연기 빠져 나가는 배출구 역할만 톡톡히 해 준다.

 

마음이 바빠 서둘러 나가보니, 솜털 같은 눈발이 휘날렸다.

 

골목엔 간간히 눈 치우는 주민이 보였으나,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눈이 내려 나처럼 신이 난 사람도 있었다,

 정재은씨를 골목에서 만났는데,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다들 추운 날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티브이 삼매경에 빠진다.

 

그러나 티브이는커녕, 길거리에서 떨고 있는 노숙인이 걱정이다.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를 내려가니, 계단 구석에 웅크려 울고있는 여인이 있었다.

옆에 파지가 깔린 걸 보니 그 곳에서 밤을 지샌 것 같았다.

 

무슨 사연으로 가출했는지 모르지만, 추위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슬펐던 것 같다.

 

서울역광장에 머무는 노숙인들은 찬바람 피할 곳을 찾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교단체에서 여러 동의 천막을 세워, 오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예배를 시작할 때는 몇 명 안 되던 인원이 40여명으로 불어났다.

 

한 아낙은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젊은이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구원을 외쳐댔다.

 

예배를 마친 이들은 추위를 피해 '서울역희망지원센터'로 가거나, 지하 통로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역 지하도에 앉은 노숙인은 “평소에는 저녁 6시가 지나야 내려오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 어쩔 수 없이 일찍 내려왔다”고 한다.

 

일부는 광장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추위를 버티기도 했다.

따뜻한 커피와 떡을 나누어 준다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금방 긴 줄이 형성되었다.

 

잠잠하던 텐트 안에서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텐트 지프를 열려고 손이 슬그머니 나왔는데,

반지를 낀 고운 손을 보니 여성 노숙인 같았다.

 

요즘 들어 여성 노숙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모든 생활이 남성에 비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여성 노숙인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노숙인의 삶을 개선할 수는 없을까?

별도의 보호시설은 있지만, 그 곳에 가지 않는 이유는 술과 담배를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추운 고통을 감수해 가며 자유를 원하는 노숙인의 삶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다.

 

서울역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 거리가 아닌데다, 인사동의 눈 내린 풍경을 기록하고 싶어서다.

 

인사동 거리는 눈 치우는 상인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골목에 자리 잡은 술집들은 대부분 문이 잠겼고, 내린 눈은 그대로 쌓여 있었다.

 

더러 한복을 입은 중국관광객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다들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남인사마당 입구에는 눈을 뒤집어 쓴 노점상 리어카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했다.

 

눈 덮인 설경을 찾아 가까운 탑골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 또한 서울역광장의 살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빵과 두유를 얻기 위해 선 줄이 탑골공원에서부터 담장을 끼고 길게 이어졌다.

 

그 곳은 노숙인보다 집에서 눈칫밥 먹는 노인들이 더 많다.

춥고 미끄러운 눈길을 헤쳐 나와 빵조각 하나 얻기 위해

긴 줄을 서야하는 노인들의 속울음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곳곳에 오갈 곳 없는 가난한 자들의 서러움이 넘쳐 나는데,

아름다운 설경이나 찾아 나선 스스로의 작태가 부끄러웠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가난한 자의 눈물을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가난의 서러움을 껴안아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만, 방법이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투사라기보다, 싸우다 죽겠다.

 

새해는 가난한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눈이 아니라

내일을 꿈 꿀 수 있는 흰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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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해 서둘다 방문에 걸어야 할 자물통을 주머니에 넣고 와버렸다.

그 날은 '서울역 쪽방상담소'에서 식권 타는 날로,

 김명성시인이 해 바뀌기 전에 술 한잔 하자는 시간과

한 시간 차이라 마음이 조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서울시에서 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실시한

아름다운 동행식권 사업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2023년 1월분 식권을 27일 오후 2시부터 준다는 벽보가 나 붙었는데,

세시까지 가려면 늦을 것 같아 30분 일찍 나섰.

 

한 시간이 넘어서야 차례가 돌아왔는데,

지켜 보고 있던 상담소 전실장이 소장이 찾는다며 날더러 가자는 것이다.

식권 받고 가겠다는데도, 일분도 안걸릴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소장부터 만났으나,

대개 주민들과의 마찰도 이런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상담소 소장이 나를 찾는 이유는 대충 짐작되었다.

블로그에 올린 ‘쪽방상담소는 갑질 그만하고 자세를 낮추라는 글에

상담소 소장이 올린 장문의 해명 댓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소장과는 첫 대면으로, 소장이 바뀐 것도 댓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그 해결 방법을 물어왔다.

다소 불공평한 점은 있으나,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받도록 해야 한다.

소량 물품은 푸드마켓과 연계하여 나누어주는 등 자정의 노력이 요구된다.

 

특정인을 거명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부탁은 수용했다.

그리고 식권사업은 사용한 식권을 매일 회수하는 일도 힘들지만,

싼 가격으로 뒷거래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단다.

 

그 문제는 매달 식권을 나누어 줄 것이 아니라 전 주민을 대상으로 전산화 해야 된다.

지금 쪽방상담소에서 주민등록증에 붙여 확인하는 바코드처럼

주민등록증 한쪽에 별도의 식권 바코드를 붙여 관리하면 될 것 아닌가?

해당 식당에 별도의 단말기를 비치하는 불편이야 따르지만..

 

식권은 모두에게 줄 수 있는 량인데, 왜 시간을 정하냐고 물었더니,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지키고 있어야 한단다.

이 말은 주민들 입장보다 업무의 편의성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동사무소처럼 업무시간에 언제나 받을 수 있도록, 담당자 한 명만 있으면 될것이다.

 

뒤늦게 식권을 받아 나왔으나, 이미 세시가 가까웠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문도 잠그지 않고 왔겠나?

주머니에 자물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때는 응암역, 내릴 무렵이었다.

요즘들어 잊어버리는 일이 잦기는 하지만, 자물통을 가지고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나이들어 잦아지는 치매증상이야 어쩔 수 없어나,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 없는 쪽방 문 열어두고 온 것에 왜 그리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다.

 

누구처럼 이불 밑에 감추어 둔 돈이 있나, 가져 갈 것이라고는 고물 컴퓨터 뿐인데 말이다.

혹시 배고픈 사람이 책상에 놓인 식권이라도 가져간다면, 그건 적선이 아니겠는가?

여태 신발 도둑 맞았다는 소리는 들어도 방에 도둑들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약속장소인 응암동 '풍천장어'집에 갔더니, 김명성, 조해인시인과 정동지도 왔더라.

과분한 술 상 앞에 모여앉아 한 해 못다한 아쉬움을 달랬다.

꾸물대는 장어처럼 등 달아 꾸물댈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김명성씨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신용 시인이 아파트를 샀다는 것이다.

한 달 전만해도 인사동 ‘유목민’에 나와 디카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이 홍제동 셋집에서 충주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다.

 

지난 달 인사동에서 만난 김신용시인

가난한 시인이 집을 샀다는 자체만도 뉴스가 아니겠는가?

시만 쓰는 시인이 아파트를 샀다는 거짓말같은 사실 말이다.

누구처럼 칠억짜리가 아니라, 칠천만원에 불과하지만...

 

내년에는 몸이 아픈 친구들도 찾아보기로 했다.

김명성씨가 며칠 후 이청운화백 문병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뮤아트' 김상현씨도 몸쓸 병으로 여러차례 수술받아,

그 통증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오래 전의 이청운화백, 입원했을 때다

새해에는 이청운화백도 만나고, ‘뮤아트’ 에서 김상현씨의 쉰 듯 절절한 노래도 들어보자.

모두의 건강한 한 해를 위해...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아픈 몸을 이끌고 양평 황명걸시인 추모제에 참석한 김상현씨가 아코디온을 연주하고 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마지막 송년회라 여긴지가 한 두 번이 아니건만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다.

 

올 해 따라 가까운 친구가 여럿 세상을 떠나, 더욱 슬픈 한 해를 보낸다.

모든 게 없을 땐 소중함을 깨닫지만, 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살아있을 때 자주 만나지 못했음이 가슴을 후벼 파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지금부터라도 주변 분들과 자주 소통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유래 없는 코로나 광풍은 아직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적 피해도 막대하지만, 개인의 삶 또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차지하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소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싸울 일이 아닌데도 다투는 등,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와중에도 스스로의 이권에만 전전 긍긍하는 정치인들 보면 울화가 치민다.

정당보다 정책과 인물을 보고 뽑는 그런 세상은 정말 요원한 것이던가?

이태원참사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49제 날,

크리스미스 트리 불을 밝히며 술잔을 치켜드는 대통령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

 

다들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두 번 죽이는 망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도 여럿 보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인들은 걸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부자 표를 노려 부자감세를 추진하거나,

노인 표를 의식해 선심형 노인복지예산을 올리는 모순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유권자에게 고무신 돌리던 자유당 시절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시급한 것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과 쪽방에서 죽어가는 고독사 부터 없애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청년이 더 살기 어려운 시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시대를 맞은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젊은이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정책과 행정력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16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송년회가 ‘유목민’에서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지만, 참석하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조준영시인이 비용일부를 부담해가며 어렵사리 주선하지만, 매번 그 얼굴에 그 얼굴이다.

 

이번 모임은 날씨가 추워 그런지 송년회 모임치고 저조했으나,

백남이 시인은 정읍에서 상경하는 열성도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앉던 ‘유목민’ 좌석이 예약되어 떨어져 앉아야하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깥 좌석에는 바람막이까지 설치해 두었으나, 날씨가 추워 앉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골목이 대화의 자리고, 사진 찍는 장소였다.

불화가 이인섭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야외의자에 정답게 앉기에

두 분 결혼사진 찍는다고 떠벌렸더니, 화들짝 놀라면서도 좋아한다.

결혼은 겁나지만 연애는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화가 정복수씨는 지역문학총서인 ‘장소시학’ 2호 한권을 선물했다.

이번호의 특집 장소는 경남 의령인데, 의령은 정복수씨 고향이 아니던가.

문인들의 글만 아니라 화가와 미술평론가 글도 실려 있었다.

정복수씨의 회향기인 ‘내 존재의 비망록과 그림', 미술평론가 황인의  ‘병막의 주인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네갤러리'를 운영하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떴다.

‘한겨레신문’ 짬에 ‘즐겁게 놀며 배우는 인사동 대학 다시 살리고 싶다’는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풍류학교 교장선생으로 추천한다는 허풍도 떨어댔다.

 

이 날 ‘유목민’ 특선 안주로 사골건더기와 시루떡이 나왔다.

술만 홀짝이던 예전과 달리 푸짐한 안주 덕에 술이 덜 취했다.

 

이날 참석한 분으로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 이명희, 전강호, 조해인,

정복수, 이인섭,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노광래, 백남이, 정영신, 임경일,씨가 참석했고,

끝날 무렵에는 김수길, 최석태씨도 나타났다.

 

엊저녁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수길씨가 녹번동까지 쳐들어 와 술을 마셨는데,

술병 났는지 장경호씨는 나타나지 않고, 그 패잔병 둘이 뒤늦게 온 것이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그런지, 모든 일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사람이 좋아 사람만 찍어 왔는데, 사람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전시장 돌아다니며 써 온 전시리뷰는 물론,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남의 작품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적 만들기 싫어서다.

 

사람을 피해가며, 사람을 찍어야 하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까지 싫은 소리에 등 돌리는 판에 남이야 오죽할까.

심지어 내가 있는 쪽방 주민들 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다 허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찌 사람을 포기할 수야 있겠는가?

 

새해에는 좋은 사람 많이 만나, 살 맛 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80년대와 90년대에 인사동을 내 집마냥 드나들던, 35명의 작가가

인사동,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 낸 책 "인사동에서 만나자"가 '덕주'출판사에서 나왔다.

소설가, 시인, 화가, 조각가, 의사, 가수, 정치인, 인사동 가게 주인 등 여러 저자들의 이야기는

자신이 지켜 본 인사동 만의 매력과 따뜻한 삶의 자락을 전해주고 있다

 

15X21cm / 275P / 20,000원 / 덕주출판사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인사동을 기록해 온 사진가 조문호와 김수길의 사진도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 책은 인사동에서 '갤러리 씨네'를 운영하는 노광래씨가 기획했다.

책이 출판된 지난 11월 17일 오후 4시무렵 저자들을 초대하여,

김수길씨의 '시간 지우기'사진전이 열리는 '무우수갤러리'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아래 사진은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김수길, 김이하, 박상희, 김진규, 이명희, 최일순,

김 구, 김종근, 이도윤, 기국서, 최정인, 안선재씨 등 그 날 참석한 분들의 모습이다.

'풍류사랑'에서 '유목민'으로 옮겨가며  술을 마셨는데,

'유목민'에서 전태수, 최유진, 안원규씨를 만나기도 했다.

 

책에 실린 필자들의 글

지친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온기 가득한 거리_ 신소윤 ㅣ 우리들의 인사동 시대_ 이만주 ㅣ

삼류 시인 _ 조정은 | 알렉산드리아 _ 윤후명 | 뜨겁고, 아프고, 찬란했던 _ 신영란 |

〈천상시인의 노래〉와 인사동 _ 김진규 | 내가 만난 인사동 작가들 _ 노광래 |

사는 게 뭔지 _ 윤영준 | 인사동 in 서울 _ 장두이 | ,인사동 추억 _ 이정래 |

고서점, 화랑, 그리고 ‘그림마당 민’ _ 유홍준 | 나의 인사동 전시장 소요記 _ 김진하 |

인사동 ‘그림마당 민’ 이야기 _ 곽대원 l 고상한 미술관은 아니지만 지낼 만하니? _ 김구 |

인사동, 내 청춘의 고향 _ 김종근 | 수요일의 인사동 _ 최영남 |

천지에 쓴 낙서, 정신적 떠돌이가 된 사람들에게 _ 이도윤 | 새롭게 낡아가는 인사동을 그리며 _ 황주리 |

숨 쉬는 박물관 인사동 _ 김경업 | 1964년 인사동 _ 장광팔 |

먹 향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 인사동의 추억 _ 정문헌 | 시간의 노숙자들 _ 정병례 |

인사동을 추억하며 _ 서공임 | 숨어 있는 전시장을 찾는 즐거움 _ 남궁옥분 |

화선지를 홍두깨로 다듬어 쓰셨다고 _ 유필근 | 우리나라 고미술품의 위상을 높이려면 _ 홍선호 |

나를 길러준 요람, 인사동 _ 최일순 | 스무 살 청년의 세 친구-삼청동, 관훈동, 인사동 _ 박상희 |

회상 _ 유상동 | 인사동, 나의 놀이터 _ 최정인 | 인사동에서의 안선재 수사 _ 안선재 |

인사동에 가면 _ 장순향 | 인사동에는 귀천이 있다 _ 강애심 l

인사동 40년 문화 공간 ‘시가연(詩歌演)’을 지키며 _ 김영희 | 흐린세상건너기 _ 한세미 |

 

 

정상과 비정상이 권력자의 눈높이에 따라 바뀌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군인들이 판친 정치를 사기꾼도 모자라 검사까지 설쳐대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누가 집권하던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뒤집혀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격이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좋아 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인간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지난 월요일 정오 무렵,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의 인사동 오찬모임이 있었다.

인사동 골목에 둥지 튼 여자만에 구정희, 이수만, 김이만, 윤성관,

하금순, 김순남씨 등 일곱 명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이다.

 

한 달 전, 고향친구들이 상경하여 인사동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청와대와 롯데월드를 둘러 한강유람섬까지 타는 일박이일 일정의 서울 관광을 다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모아 이수만씨가 사진집으로 엮어 왔다.

 

이수만, 신규식씨가 만들었다는 사진집에는 340여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뿐 아니라 인사동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서울 구경 온 고향친구들, 인생졸업사진 찍다는 수필까지 올려

무려 175페이지에 달하는 사진집이 된 것이다.

 

중복된 사진이 많은데다 무작위적인 편집이 눈에 거슬렸으나,

찍힌 친구들에게 사진 보내 줄 일을 들게 되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6년 전, 정동지의 장날전시 때, 장흥의 마동욱 사진가

전시 개막식사진을 찍어 사진집으로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소량으로 만들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그 때 알았는데,

왜 진즉 활용하여 정동지의 오래된 빚을 갚지 못했을까?

고향친구들 사진집을 보니, 그 일이 떠올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래전부터 정영신의 사진집을 먼들기 위해 틈틈이 기록해 왔다.

그러나 사진의 량도 만만치 않지만, 여러가지 비용이 마음에 걸렸는데,

두 권만 만든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만들 수 있다기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사진을 년도 별로 구분하여 당시의 추억을 끌어내는 글까지 곁들인다면,

당사자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 아니겠는가?

 

정동지는 생일이나 명절만 되면 선물타령을 해대지만, 그동안 못들은 척 해왔다.

알라도 아이고 선물은 무슨 선물이고?“라며,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린 수십 년의 세월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선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만약에 초상권 침해라며 압수해 간 정동지의 알몸 사진을 표지로 감는다면, 흥행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진은 십 육년 전 장대비가 쏟아지는 만지산에서 찍은 그녀의 모습이다.

 

흙탕물이 튕겨 오르는 폭우 속에 검붉은 맨드라미까지 더해, 을씨년스런 풍경을

연출하는 그 때 장면은 처연하다 못해 처절한 느낌이 드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정영신 개인 파일에 들어간 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다.

설마 사진가가 자기 사진집 만든다는데도 내놓지 않을까?

 

그런데, 마동욱씨가 만들어 준 장터개막식 사진집도 줄 때만 좋았지, 두 번 다시 볼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마침 고향친구들의 서울관광 사진집과 비교해 보기 위해 어렵사리 그 책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는 이외의 감동은 없었다.

 

결국 비슷한 사진들의 나열 보다 좋은 사진을 선정하는 안목과

편집 능력에 따라 책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것이다.

 

어렵게 구입한 책도 세월에 밀려 버려지는 것이 어디 한 두 권이던가?

인쇄물 홍수시대에 자칫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특히 두고두고 보아야 할 가족 앨범이라면 좀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자 하나 글씨 체 하나에 책의 품위와 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무조건 사진이 많다거나 책 면수가 두터워야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진을 어떻게 배열하고, 어떤 캡션을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 제대로 한 번 만들어 볼 작정이다.

 

찍은 사진을 년대별로 분류하여 당시의 추억을 들추어내거나

삶의 의미까지 더해 준다면 책장에서 잠이나 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진집은 안 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어쩌면 만들려는 정영신 사진집도 책이 아니라 e북으로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책장보다 컴퓨터 앞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량과 부피가 아니고, 질이며 가치다.

 

이날 여자만에서 가진 오찬비용은 구정회씨가 부담했다.

그런데, 이미례씨가 '여자만 경영에 손을 땠을까? 음식도 달라졌고 종업원들이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밑반찬도 다시 요구할 수 없는데다, 가져 온 밥도 바짝 말라 있었다.

밥을 바꾸어 달라고 하니 손님 먹는 밥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는 무례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부터 툇마루에서 오찬모임을 갖기로 했으나,

 괜찮은 집으로 가자는 구정회씨 이야기에 여자만으로 정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주인 없이 장사 잘되는 집 없고, 불친절에 다시 가고 싶은 집 없다.

 

구정회씨는 어릴 때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향에서 떠나오며 기억에서 멀어졌는데, 듣기로는 긴 세월을 군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절제된 삶과 빈틈없는 생활습관에서 군인정신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고향친구도 잊고, 다들 엄청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나야 민방위 출신이라 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군대생활은 어디서 했고 전역 계급은 뭐냐?"고 물었더니, 입 무거운 구정회씨가 말문을 열었다.

 

귀가 어두운데다 말도 조근조근 하는 바람에 정확히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두 차례에 걸쳐 군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한번은 소위로 임관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이고

한번은 12.12사태를 일으킨 전두환 졸개들 총에 죽을 뻔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전두환의 12,12사태에 저항한 정병주 특전사령관 참모로 일했으나,

반란군들의 쿠테다가 성공하는 바람에 소령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이 상관에게 총질을 해대는 더러운 판에 무슨 미련이 있겠냐마는,

간신처럼 달라붙어 승승장구하는 동료들을 보며 어찌 간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전두환의 쿠테타 암호명인 생일집잔치의 최대 희생양은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이었다.

그들이 받은 수모는 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만약 정병주사령관 수하 였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같은 간신배처럼 상관을 배신했더라면

그런 처참한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 아닌가?

 

하기야! 만약 전두환을 직속상관으로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게 군인이 짊어져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명령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은 상관이 아니라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 사나이가 갈 길이 아니겠는가?

그 때 쿠테타 군부에 고개 조아려 충성서약이라도 했다면,

처자식은 편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령으로 전역해야 할 타고 난 운명이며 팔자였다. 

장한 사람을 만들어 주었으니, 팔자가 나쁘지는 않다.

우리가 정치군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죽어서도 반역자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살지만, 자네는 용기 있는 군인으로 길이 남는다.

 

여자만에서 일어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여자만맞은편에 있는 귀천에는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수만씨의 안내에 따라 찻집 인사동으로 갔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찾는 찻집이지만, 안쪽에 작은 정원이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다.

인사동에는 자판기 커피가 없어 달콤한 팥죽을 시켰는데, 찻값은 하금순씨가 냈다.

 

그 자리에서 서울모임 회장으로 이수만씨가 추천되어,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얼굴보고 밥 먹는 모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창출해 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가물가물한 어릴 때 기억의 퍼즐이라도 맞춰, 잘못 알고있는 고향의 역사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 곳에서 늙은 군인의 초상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안쪽 작은 정원으로 구정희씨를 불러내어 사진을 찍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배경이 없었다.

사진 값이라도 하라는 듯 십만원을 꺼내 주기에,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받아 챙겼다.

서울역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아서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잔뜩 지푸려 있었다.

인사동 길을 걸어 나오며 자랑스러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니,

김민기가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가 떠 올랐.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사진,  / 조문호

 

 

 

김의권(74)씨가 지난 14일 새벽 4시 무렵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실내장식 및그래픽디자이너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초창기 맴버로

인사동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오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갑작스런 부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늘로 승천한 고인에게는 축복이겠으나,

단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 뿐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빈소 : 창원 파티마병원 장례식장 VIP, (창원시 의창구 창이대로45)

발인 : 20221116/ 오전 730

장지 : 창원 상복공원

상주 : 처 최갑순, 자 김형일, 자부 배주연

녀 김엄지, 사위 이문규

 

상주 연락처 : 010 5049 0824 김형일

 

아래 사진은 인사동에서 찍은 고인의 살아 생전 모습입니다.

지난 날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황명걸 시인의 추모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29일 오후 4시 무렵,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미망인 서상실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평소 선생을 존경해 온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린 것이다.

 

황명걸시인 추모제는 한 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 이사장 김명성씨가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한 행사다.

장례식 때 추모제를 지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었지만, 49제는 아니었다.

날자도 맞지 않은데다, 유족들이 착실한 기독교 신자기 때문이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농심마니가을 산행과 함께 추모제를 지낸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과 농심마니’ 회원,  양평문인, 가족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분으로는 최유진 농심마니 회장을 비롯하여 김명성, 송상욱, 

김상현, 조준영, 수견 김정남, 이명희, 전활철, 조해인, 기국서, 김수길, 정복수, 

정영신, 이 성, 최진환, 노광래, 이강용, 송일봉, 박상희, 황예숙, 서길헌, 최정인,

오만철,나자명, 오치우, 박흥식,  권경업, 신영수, 윤성은, 조명환, 김각환, 

문창길, 이동국. 김성철, 강미숙,  이철순, 황요한씨가 함께했다.

 

모처럼 반가운 분들 만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황명걸선생 시비 앞에 놓인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가슴 아린 회한이 밀려왔다.

오래전 선생께서 시화전을 하고 싶어 하셨으나, 그 걸 말렸기 때문이다.

시화전이라면 오붓한 장소가 어울리지, 백 평이 넘는 '아라아트'는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 이후로 전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추모제를 맞아 그때의 배은망덕을 사죄한 것이다.

 

추모제에 앞서 행사를 주선한 김명성 시인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수견 선생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영령을 위안했다.

 

시인은 시를 낭송했고젊은 춤꾼은 위령무로 넋을 기렸다.

 

 '뮤아트' 김상현씨까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김상현씨는 병원에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 입원한 환자가 아니던가?

병든 자신의 몸보다 떠난 분의 그리움이 절절했던 모양이다.

 

김상현씨가 연주하는 애잔한 ‘부베의 연인음율에 맞춰

선생께서 너울너울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시비 세운 장소가 중앙에서 옆자리로 옮겼을 뿐, 꽁지머리상은 여전했다.

시비에는 황명걸선생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배준석시인은 선생의 지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라.

지조를 풀과 집오리로 비유하며 파초와 백조로 연결시킨다.

그중 두 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 살아 있으면이다.

이를 목숨을 걸 수 있으면으로 바꿔 읽어본다.

멀리 있던 지조가 꿋꿋하게 곁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빗방울도, 물살도 데리고 놀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저항의 격문 같은 한국의 아이가 먼저다.

황명걸선생은 70년대 대표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한국의 아이'에서 민족분단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기 어린 시어로 토해낸 분이다.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머지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잘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너무 외롭다고 해서/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빛나는 눈빛의 아이야/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 부분)

 

'한국의 아이' 시집은 판금 되었고, 선생께서는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뜨거운 저항 의식에 고개 숙입니다.

 

추모제가 끝난 후, 35년 동안 심어 온 농심마니가을산행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리는 산삼심기는 양평 '천주교 양근성지'라고 한.

 

양평군 강하면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하루 묵으며 야외 술판과 굿판을 벌이고,

다음날 아침 산신제를 지내고 산삼을 심지만,

난, 오후 여섯 시까지 동자동에 갈 일이 있어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무거운 앰프까지 짊어지고 오셨는데 말이다.

그 푸짐한 술상의 놀이판을 마다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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