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의 원로 시인 황명걸(87)선생께서 지난 9 13일 새벽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전에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병 병문도 못한 채 운명하시어 더 가슴 아픕니다.

 

황명걸선생을 인사동 대표 시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창예헌)’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기 때문입니다. 인사동에 일만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달려오시던 선생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명걸시인의 강력한 현실비판시는 60~70년대 한국시단을 풍미한바 있습니다.

서울대불문과를 중퇴한 후 여상’, ‘주부생활’, 여성동아기자로 일했으며,

1962자유문학봄의 미아가 당선되며 등단하셨지요.

그동안 ‘한국의 아이’(1976)를 비롯하여 마음의 솔밭’(1996),‘ 저고리 검정 치마’(2004),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2017)등의 시집을 펴낸바 있습니다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어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가 나오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요.

생계를 위해 일했던 LG에서 퇴직한 뒤는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 만큼 아름답다.

칠순이 되어서야 시의 참맛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신경림 시인이 황명걸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고 상찬한 말입니다.

아래는 판금 조치라는 수난을 겪기도 한, 선생의 대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도시 소시민의 무기력한 생활을 반성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 시였지요.

인사동을 못 잊어,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달랜 선생의 지난 자취가 너무 가슴 아립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장례식장 :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6호

발인 : 2022년 9월 15일 오전6시30분

장지 :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묘역

 

상주 : 황요한 유성희, 황서정 김경덕

배우자 서상실

손자 : 황일우, 손녀 : 황지은, 황지혜

외손녀 : 김나영, 김경민

손서 : 변문균, 손부 : 서가이

 

그동안 찍은 선생님의 사진들을 모았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생일이 다가오면 반갑기보다 술병 날 걱정이 앞선다.

솔직히 말해,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스럽지만, 어릴 적부터 생일을 유난히 싫어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인 미역국을 먹는 것에서부터 나를 위해 떠벌리는 자체가 싫었다.

집에서 나와 객지로 떠돌며 생일 챙긴지 오래되어 음력생일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정동지를 만나며 사정이 달라졌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양력 생일만 되면 제삿날처럼 기억해 내,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가까이하며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생일을 나팔 불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축하 인사받느라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태어난 자체가 악업인데, 축하받을 일인가?

 

그 중 주변 사람 불러 모아 생일잔치 여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리부터 촬영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

정동지와 생일 전날 여수로 출발하여 다음 날 돌아올 계획인데,

안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듯, 태풍 온다는 일기예보로 그마저 취소되었다.

 

마침 페이스북에 판화가 류연복씨가 인사동에 나왔다며 훌훌 털고 나오라는 댓글이 달렸다.

마침 나무화랑에 전해 주어야 할 숙제 같은 문제도 있어 겸사겸사 술 동네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나무화랑에 있어야 할 류연복씨는 술집 유목민에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미인 두 분을 앞자리와 옆자리에 모신 채, 이미 술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연극배우 이명희와 장경호, 이기만, 김발렌티노 등 조연도 많았다.

뒤늦게 나타난 최석태, 정영신까지 어울려 술판이 한창 무르익는데,

그 자리에서 정동지가 천기누설을 하고 말았다.

 

내일이 조문호 생일이다고 나팔 분 것은 떡 본김에 제사 지내겠다는 말이다.

졸지에 술자리가 생일잔치가 되어 생일 케익을 대신한 그득한 생일 팥빙수가 올라오는 등

술자리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홀짝홀짝 마신 술에 맛이 가 결국 돼지 멱따는 소리까지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똥오줌 못 가릴 정도로 취했으면, 그냥 자빠져 잘 것이지 컴퓨터는 왜 켤까?

술 취해 떠 오른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은 글에다 알몸사진 한 장 올려놓고,

아는 분 포스팅에 댓글까지 달고 쓰러져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컴퓨터를 열어 보니 다행스럽게도 검열에 걸려, 그 포스팅은 삭제되고 없었다.

그러나 볼 사람은 다 보았을 것이다. 쪽팔려 미치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댓글 또한 무례한 관람자 나무라는 말이 작가를 탓하는 글로 비칠 수도 있었다.

오죽하면 정동지 십팔 번이 제발 아는 채하지 마라는 말이겠는가?

 

속은 쓰려 죽겠는데, 생일이라고 일찍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와 딸 소영이가 온 것이다.

아산 마인팀의 양햇살양이 보내 준 생일 케익에다 정동지가 준비한 새우 안주가 술상을 가득 채웠다.

진짜 생일 술은 해장술로 마신 것이리라.

점잖게 마셔야 하는 가축적인 분위기라 술맛은 어제보다 못했다.

 

연이은 생일 술에 치어 며칠을 낑낑거렸으나, 이번에는 추석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치 않던가.

전라도 아낙이 끊인 경상도식 탕국을 술안주로 술이 술술 넘어간다.

보름달 뜨면, 달 파먹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긋지긋한 더위가 한풀 꺾여, 이제야 한 숨 돌릴 것 같다.

쪽방에서의 여름나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수행자처럼 버텨내지만, 허리 협착증까지 도져 죽는 게 편하겠더라.

 

일기처럼 쓰던 주변 잡기에서부터 전시리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일을 중단했다.

주제넘은 이야기로 욕 먹는 일도 지겨웠지만, 죽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

사진 정리가 되지 않아 사진 한 장 찾으려면 온종일을 허덕여야 한다.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한정식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원본 찾느라 몇시간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늦게 사진을 정리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된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은 손도 대지 못했다. 

 

여름 내내 전시장 방문은 물론, 사람 만나는 일까지 피해 가며

컴퓨터와 씨름하였으나 도무지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선 집 불났을 때, 남은 짐까지 모두 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이 사진들은 한 달 전에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7월 27일, 양산의 공윤희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아 모처럼 정동지를 만나 인사동에 나갔다. 

쌈지 담벼락에는 궁녀가 임금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의 꽃, 능소화가 피었더라.

 

약속했던 ‘풍류사랑 낭만에는 공윤희씨 외에 김수길씨도 왔더라.

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는 민어에다 홍어, 돼지 수육까지, 그득하게 상을 차려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만나 이야기 나누기 보다 음식 먹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귀가 어두워 소통이 안 되니 술이 약인 것이다.

 

인사동 지킴이로 알려진 공윤희씨는 퇴역한지가 수십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공대위로 불린다.

몇십 년동안 인사동에서 일 하며 살았으나, 장가는 못 간게 아니고 안 갔다.

요즘은 먹고살기 위해 양산에서 학교 일을 돕는다는데, 여름휴가를 받은 것 같았다.

 

휴가를 받았으면 바다나 산으로 갈 것이지, 인사동에는 무슨 미련이 남아 왔는가?

 

이차로 유목민’에 갔더니, 골목에는 장경호씨와 한상진씨가 있었고,

안쪽에는 전활철, 안원규, 유 준, 발렌티노김 등 아는 분이 많았다.

 

만나 반가운 시간은 잠깐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술만 빨다 정량 차면 일어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파장 인생의 설움이다.

 

사진, / 조문호

 

 

 

지난 토요일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아트프라자앞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 자선 공연'에 들리기 위해서다.

 

보름 전에 사진은 찍어 올렸으나, 그때 돈이 없어 모금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자선 공연은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나설 뮤지션이 없었을까?

아니면 모금이 신통찮아 그만두었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자선음악회가 있다고 나팔 분 것이 문제였다.

행여 그 글을 보고 나왔다면 얼마나 원망하고, 실없는 사람으로 보겠는가?

주최 측에 재확인하지 못한 탓이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헛걸음 한 모든 분에게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몇 푼 되지 않는 후원금은 후원계좌를 찾아 보내기로 하고,

비참한 심정을 달래려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치기 딱 좋은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반대편에서 장춘씨가 걸어왔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유목민에는 전활철씨 3-40년전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안면 있는 분도 여럿 있었는데, 술 장사에 찌든 활철씨가 제일 많이 삭았더라.

 

다행히 그날부터 유목민에 새 지배인이 들어와 활철씨도 편하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전활철씨의 해방인지, 아니면 사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건지 분간 안 간다.

 

담배 피우기 딱 좋은 술집 입구에 술상을 차렸는데,

장춘씨에 이어 강남에 전시 보러 간다던 정동지도 돌아오고,

갤러리시네노광래 관장과 불화가 이인섭선생 등 줄줄이었다.

 

덕분에 정성진, 안지현씨 등 미녀들도 알현할 수 있었다.

 

노관장은 전시 중인 “Funny Art, Money Art’ 리플렛 한 장 내놓았다.

 

719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는 돌아가신 민병산, 김구림, 변우식, 임창렬,

이존수, 강용대, 김지하시인에서 부터 요즘 잘 나가는 최울가, 강찬모에 이르기까지

22명의 작품을 모은 전시로 소품 위주라 마음에 들면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생각지도 못한 술자리가 만들어져 술은 취했으나,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레기나 다를 게 뭐 있나?

 

덕분에 반가운 분들 만나 잘 마셨다.

인사동에서 그리운 분들 만나 전시 보아가며 좋은 시간 만들자.

남는 건 그리움의 추억뿐이다.

 

사진, / 조문호

 

 

 

사진가 이완교(82) 선생께서 지난 513()일 돌아가셨습니다.

사진가로 반세기를 사셨지만, 한 번도 사진가다운 대접 한 번 받지 못하고 가셔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한국의 대표사진가로 꼽히는 육명심, 한정식, 홍순태, 삼교수를 비롯하여

지금의 원로급 사진가가 다 친구며 사진도 거기서 거긴데, 왜 번번이 선생만 밀렸을까요?

다른 분과 달리 대학 강의도 항상 보따리 장사만 하시고...

이완교 선생의 실력이 미치지 못할까요?

'기운 생동'하는 선생의 사진을 다시 한 번 조명해 봅시다.

 

그것은 한 번 갑이면 영원한 갑이고, 한 번 을이면 영원한 을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억울하다고 역정도 더러 내셨지만, 잘 참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것을 이제 아셨지요.

언젠가 선생 가신 길 따라가서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빈소 : 분당서울대병원 39호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300

전화 031-787-1500

 

발인 : 2022, 516() 630

장지 : 성남 시립봉안당

 

조의금 보내는 곳

하나은행 143-910101-30207

예금주 : 이선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보이는 고인 기념사진을 무작위로 올렸습니다.

지난 날을 추억하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주기적으로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회를 인사동에서 가졌습니다.

아래 단체 사진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양반댁' 앞에서 찍었는데,

이완교 선생의 모습은 7-80%가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네요

 

아래 사진 석장은 '양반댁' 주모께서 찍었는데, 나보다 훨씬 잘 찍었네요.

아래 사진 넉장은 홍순태선생 마지막 전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정영신 / 이명동선생 사진전에서...

모처럼 질퍽한 술자리가 인사동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난 수요일은 나무화랑에서 이명복의 어멍전이 시작되었고,

인사아트프라자에서는 박옥수의 시간여행이 열리는 날이었다.

 

코로나 규제까지 풀려 모처럼의 해방감에 많은 분과 어울려 바쁜 잔치 판을 오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항상 많이 마셔 탈이다.

 

술 취해 사진은 얼마나 찍었는지, 메모리카드가 찼더라.

요즘 몸도 비실거리지만, 하던 일도 귀찮아 게으름을 피운다.

미루고 미루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뒷북치는 것이다.

 

전시가 열리던 날, 안국역에서 가까운나무화랑부터 갔더니

작가 이명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박흥순, 이재민, 김구, 홍성미, 김양훈, 양상철, 김성명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주 사는 이명복씨는 4.3의 한 맺힌 응어리를 형상화하는 작가다.

전시된 어멍전에는 어머니의 초상과 일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한 사람의 인물을 그렸지만, 그 속에 우리 민중의 한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의 주름진 눈빛에서 지난한 세월의 아픔도 읽을 수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하고 강인한 제주 어멍의 모습이었다,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지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웠다

 

같은 시간에 개막된 박옥수씨의 시간여행‘ 사진전도 보러 갔다.

전시를 기획한 지승룡씨가 개막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박옥수씨 내외를 비롯하여

사진가 김문호, 김녕만, 곽명우, 정영신, 가수 장사익,

연출가 김혜련씨 등 많은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사익씨가 축가를 구성지게 불러 분위기를 띄웠다.

 

사진들을 돌아보니, 아파트가 즐비한 배경으로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킨 청계천 판자촌에서 부터 물지게를 지고 가는 어린 소녀들,

창경원에서 휴대 전축을 틀어놓고 춤추는 젊은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연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진가 박옥수씨는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아래지만, 사진은 한참 선배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진 활동을 해, 전시하는 사진들도 65년부터 80년까지의 시대상이다.

사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근현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그날 박옥수씨 부인도 처음 뵈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를 숨겨 둔지 미처 몰랐다.

더구나 연출가 김혜련씨와 절친이라는데, 세상은 넓고도 참 좁았다.

 

뒤풀이가 있는 사동집에도 반가운 분들이 있었다.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사진가 정장식, 심보겸, 성유나, 조명환씨를 비롯하여

김구, 김이하, 이만주, 노광래씨 등 많은 분이 어울린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사동집 주인 송점순씨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았더니, 주방에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일손을 줄여 쉴 틈도 없다며 바쁘시다.

 

안쪽 자리에는 미술평론가 유근오씨 일행이 마시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맛보는 떼거리 술판이던가?

반가운 자리지만 다른 뒤풀이가 궁금해 급하게 마셨더니,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이명복씨 뒤풀이를 찾아갔다.

 

유목민으로 가다 보니, 길목 사랑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에 이명복, 장경호, 이재민, 박흥순씨가 나와 있었고,

안에는 손기환, 김진하, 김재홍, 고옥룡, 나종희, 송 창, 류연복씨 등 민중미술가들 판이었다.

 

장경호씨와 유목민‘으로 가보니, 그곳도 북적였다.

 

박성남씨를 비롯하여 임헌갑, 임동은, 이경희, 주홍수, 유준 씨 등 성함이 오락가락하는 많은 분들이 있었다.

 

뒤따라 사동집에 있던 김문호, 정장식, 정영신, 노광래, 김이하씨가 차례로 나타났고,

사랑채에 있던 이재민, 김 구, 김재홍씨도 합류했다

 

김명성, 김상현, 이상훈, 안원규씨 등 줄줄이 사탕이다.

 

! 이 얼마만의 이산가족 만남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겠냐 마는 다들 시간이 늦어 몸 사린다.

 

인사동에서 좋은 전시 있으면 작품보러 나오는 길에 자주 만나자.

 

 다시 뭉쳐 인사동에 봄바람 날리자.

 

사진, / 조문호

 

이명복 '어멍'전시장 사진 / 나무화랑

 

박옥수 '시간여행' 개막식 사진 / 인사아트프라자2층

 

박옥수 '시간여행' 뒤풀이 사진 / 사동집

 

  이명복 '어멍'전 뒤풀이 사진/ 사랑채

 

'유목민'에서 만난 사진 

 

며칠 전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최울가를 유목민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같이 만나자고 한다.

속상한 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최울가 때문에 안 갈 수 없었다.

 

최울가는 부산 시절부터 알던 동생 같은 후배인데, 만난 지가 삼 년 가까이 되었다.

자리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공간에서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가는 유목민 같은 작가라 자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시아권은 물론 파리에서 북미 지역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데,
서울에 오면 파주에 있으나 파주 작업실은 물론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 떠도는 유동성이 최울가 만의 방식이 되어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화이트, 블랙, 레드+’전도 보러 갔으나 작가는 만나지 못했다.

 

상형문자 같이 원시성을 띤 그림들은 자유로웠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는데,

무겁거나 난해하지 않고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 그림도 있었다.

 

최울가만의 독창성과 기발함을 세상이 모를 리 없다.

요즘은 스타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작가라 작품값도 천정부지다.

 

지하철에서 옛날 생각에 빠지다 보니, 금방 안국역에 도착했다.

유목민’에 가니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도 있었다.

 

안 쪽에는 최울가,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인디프레스를 운영하는 김정대씨 내외도 와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최울가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 요즘 좋은 곳에서 산다면서라는 아리송한 말을 꺼냈다.

전시 때 못 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을 전해 주었는데,

쓰리쿠숀으로 돌려 준 돈봉투에 삼십만원이나 들었네.

"고맙다. 그 돈으로 햇님이 지방선거 현수막 값이라도 좀 보태 애비 체면 좀 세울께.."

 

김명성씨는 얼마 전 울산서 전시한 박상진과 동지들이야기를 했다.

박상진 투사의 활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매국노 이완용 글씨까지 걸었다가

여론에 밀려 철수한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단다.

 

그런데, 김정대씨가 4년 전에 결혼했다는데,

이렇게 젊고 예쁜 부인을 두었는지 미처 몰랐다.

소장수 같은 인상에 마누라 복은 있네요.

 

술 마시다 정선집 불난 이야기가 나오니,

30년 전에 최울가가 선물한 그림 생각이 났다.

 

화마에 휩쓸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 오는 날 개울가에 아이가 우산을 받쳐들고 쪼그려 앉은 그림이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인데,

그림을 그린 작가도 보고 싶어 했으나, 다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빠져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금새 취해 버렸다.

술집 실내에서 담배까지 피웠으니 취해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최울가와 헤어져 지하철을 탔는데, 불광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는 잠들어 버렸네.

 

돌고 돌아 녹번동을 찾아갔더니, ‘스마트협동조합이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취했고 서인형씨는 기다리다 취했으니, 용건이 뭔지도 모르겠.

 

반가운 사람 만나 술 마시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언제나 술이 술을 마셔, 오바하는 것이 문제다.

속은 쓰린데다 엊저녁 실수한 일이 생각나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전통문화의 거리로 알려진 인사동도 많이 변했다.

 

화랑을 주축으로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등이 모여 있었고,

인사동 골목 골목에 똬리 튼 술집에는 예술가들의 낭만과 풍류가 넘치던 곳이었다.

 

며칠 전 인사동 거리에서 한참 방황했다.

인사동에 숨겨둔 애인도 없는데, 왜 틈만 나면 인사동을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날은 인사동 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남았는지 찾아보려 작심한 것이다.

 

기존 가게들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며 잡화상이나 옷가게들이 대신했는데,

이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만의 풍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특한 것은 아직 많은 화랑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월 따라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으로 남았지만,

인사동의 추억으로 꼽을 대상은 아니었다.

 

1924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지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때 생겨난 것이란다.

 

지금은 민가다헌’, ‘경인미술관’, ‘통문관’, ‘통인가게’, 수도약국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뀌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인사동과의 인연은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이나 '시인통신',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고,

찻집으로는 천상병 선생이 계시던 귀천이나 수희제’, ‘초당등이었다.

 

그리고 옛 순라꾼 터에 있던 초창기 예총회관건물이나

건국빌딩에 둥지 튼 민예총사무실에 대한 추억도 많다.

 

'민예총'창립총회에 갔다가 우연히 고향의 은사 조성국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민예총'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어 자리하심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림마당 민이나 꽃나라흑백현상소', ‘민사협사무실 등

들락거린 곳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골목골목 숨어있던 술집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아직 살아남은 식당은 부산식당이나 사동집이 고작이다.

 

그런 특정한 장소의 현장 보존성을 찾는다면

한때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활용했던 옥탑방 철계단이 유일했다.

 

문 닫은 지 오래된 술집 문에 쌓인 우편물이나

옛 잔재물들이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

인사동다운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마 경인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두엽씨가 가장 인사동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사동과의 첫 만남도 사람으로 이루어졌지만,

인사동을 못 잊어 하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사동이 그리운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인사동은 유효하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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