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혜선스님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단다.

엊그제 정선화재 현장에 찾아 온 선우씨가 일을 흐리멍텅하게 처리하는 나를 보며 한 말 중에 할 말을 잃게 했던 말은 무슨 일이던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우선이지만, 원칙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여지 것 줄 창 주장해 왔던 일도 원칙이 아니던가? 그동안 가까운 지인들 까지도 원칙을 어기는 잘못된 일은 공개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분들이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잘못한 일에 남과 내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잘못된 일은 두루 뭉실 넘어가니 세상이 이 지경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번 일은 돈 즉, 스스로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 좋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난 17일 아침, 정영신씨와 정선 만지산 화재 현장으로 떠났다. 당장 기거할 컨테이너 박스라도 구해야 했지만, 다음 날 보험사 직원과 손해사정사가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화재 현장에 갔을 때는 윤인숙씨가 보험 던 게 없다고 했는데, 뒤늦게 확인한 바로는 본인은 탈 수 없지만, 피해자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손해보험이 있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꼼꼼히 증거 자료를 찾아 두어야 하는데, 이미 일부의 폐기물은 버려졌고, 남은 것도 포크레인으로 헤집어 찾기가 어려워 진 터라 걱정되었다.

 

 

 

화재 난 다음날 현장에 갔을 때도 불 탄 현장에 포크레인이 와 있었는데, 어떻게 화재원인도 규명하지 않고 현장을 헤집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보험금을 받아내려면 어떤 자료를 어떻게 소명해야 하는지를 몰라 아들 햇님이에게 손해사정사 한 분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해 둔 것이다.

 

 

 

정선으로 가다 양평 쯤에서 ‘성심건업’이라는 이동주택 제작소가 있어 한 번 들려 보았다.

농막에서부터 크고 작은 다양한 견본주택을 만들어 놓았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건축허가 없이 갖다 놓으려면 6평짜리 농막밖에 없지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주택형 농막은 최하가 2천만원 대였다. 심지어 일억이 넘는 이동주택도 있었다. 완전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주변인들이 보내 준 성금이 천만원이나 들어 와 그 돈으로 농막이 아니라 ‘예술창고’라는 집을 지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왔는데, ‘예술창고’를 제대로 지으려면 손해보상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불난 방안에 명품가방이나 돈 나가는 물건이 많았다고 진술하라며 부추겼지만, 집에 없는 명품을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명품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은 필름 원판이라며 자위했으나, 손해사정사 말도 손해배상 규정에 필름은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전시하고 남은 작품도 집안 창고에 수 없이 많았는데, 그 사진 판매금액을 책정해 배상을 청구하란다. 사진은 원판만 있다면 다시 제작할 수 있지만,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만들 수가 없는데, 이런 개떡 같은 보상법이 어디 있는가?

 

 

 

배상한도가 일억이라는데, 그런 식으로 산출하려면 아무리 계산해도 얼마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손해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지경인데, 이제 보험사를 상대로 싸워야 할 문제가 남았다.

 

 

 

일단 정선 집보다 읍내부터 들렸다. 올해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했지만, 빈 땅에 노력이 덜 가는 옥수수라도 심으려면 모종도 사야하고 농기구도 구입해야 되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마침 정선장이었다. 나물이 많이 나는 요즘 철에는 정선장에 엄청 많은 인파가 몰렸으나 코로나 때문인지 장터가 썰렁했는데, 이제 정선장도 봄날은 간 것 같았다.

 

 

 

비는 부슬부슬 왔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산 후,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정선아우라지’식당에 들어가 곤드레밥을 시켰다.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올 해는 작년보다 손님이 더 없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만지산 집에 도착하니 산 위로 구름이 몰려다녔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낼 수밖에 없었는데, 카메라앵글 속에 불난 화재 현장이 나오니 또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가까이 가보니 철재는 모두 수거해 갔고, 나머지 폐기물도 일부 치우고 없었다. 타다 남은 책들만 폐기물 자루에 담겨 길가에 첩첩이 쌓여 있었다.

 

 

 

옥수수 심을 땅에 잡초를 뽑고 있는데,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가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정선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단다. 제2의 공유공간 만드는 일에서 부터 할 일이 태산 같은 사람이 만사를 제쳐두고 그 먼 길을 온다기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좀 있으니 잘 아는 농막 짓는 분을 모시고 찾아왔는데, 화재현장을 둘러보며 타다 남은 잔재들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귤암리 노인회장 이었던 서덕웅씨도 오셨다. 얼마 전 최종열씨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며, 내일 아침 노인회 회의에서 작은 성의나마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김선유씨가 모셔 온 건축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집 짓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밭을 택지로 용도변경부터 해야 하고 설계도면 등 인허가 과정이 까다롭다고 했다. 정화조 설치에서부터 준비해야 할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집 지을 장소와 임시 기거할 농막 위치까지 알려주었는데, 당장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며 서둘 일은 아니라고 했다. 우선 당사자 간의 합의가 우선이지만, 보상받을 예산이 정해져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창수 엄마로 부터 올라 오라는 연락을 받아 정동지 더러 손님 모시고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일찍부터 저녁상을 준비해 두었는지, 가자말자 빨리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 오고 흐린 날 파종을 마무리해두어야 잘 자랄 것 같아 먼저 식사하라고 말했는데, 선우씨가 데리러 오기 까지 했다. 좌우지간,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 하는 더러운 습관 때문에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

 

 

 

식사 후에 윤인숙씨와 합의하기 위한 요구조건이나 앞으로의 복안을 설명하며 환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아산까지 가야 할 선우씨 일행은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술이 한 잔 들어 간 창수엄마 이선녀씨 노랫소리가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노래자랑에 나가도 손색없는 실력인데, 서덕웅씨가 정선 아리랑도 한 번 부르라고 부추겼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한 바탕 놀고 나니 서덕웅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부터 정영신씨의 일이 시작되었다.

요즘 그녀가 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젝트였다. 얼마 전 어머니 인터뷰 대상을 장터에서만 찾기에 사연이 많은 만지산 이선녀씨가 어떠냐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맞다“고 맞장구 쳤다. 이 번 기회에 인터뷰를 하려고 장비까지 챙겨 온 것이다.

 

 

 

예전에 이선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만지산에서 있었던 시집살이였다면 이번에는 시집오게 된 내력과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애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먼저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술만 마시면 신체적 장애가 생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이제 술도 그만 마시라는 신호일까? 아니면 그만 살라는 말일까? 아무튼 다리에 힘줄 땡기는 통증까지 찾아와 곤욕을 치르다 잠들었는데, 인터뷰는 잘 끝냈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날은 오전 일곱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창수가 아침 먹으라며 깨웠다. 덕분에 일찍부터 일 할 수 있어 좋긴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구름이 여전히 장관을 이루었다.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귤암리 노인회장 최종열씨가 찾아 와 성금이라며 이십만원을 전해 주었다. 나는 주민등록이 서울 동자동으로 되어있어 이곳 주민이 아닌지라 줄려면 귤암리에 주민등록을 옮겨놓은 정영신씨에게 주어야 할 돈이었다. 나중에 만나면 전해주겠지만, 성의를 고맙게 받아 들였다.

 

 

 

마침, 윤인숙씨가 해선스님께서 한 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바로 찾아 갔는데, 절 쪽에서 보는 우리 집 전경도 근사했다. 스님께서는 불 난 밤에 이 곳 절에서 지켜보며 핸드폰으로 사진과 동영상까지 찍었다고 했다. 불난 현장을 보지 못해 궁금했는데, 스님 덕에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진 / 혜선스님

 

십여 년 전에 보여 드린 적 있는 ‘한국불교미술대전’ 전집 이야기도 꺼내시며, 그 때 갖고 싶었지만 한 질 뿐인 책이라 차마 사고 싶다는 말을 못 꺼냈는데, 차라리 샀더라면 불에 타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 책은 이십 여 년 전, 이년에 걸쳐 사진을 찍어 원고를 제공했으나 출판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천만 원이 넘는 원고료를 받지 못한 책이 아니던가? 도록도 마지막 남은 책이었지만, 이제 필름까지 타 버렸으니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진 / 혜선스님

 

보살님이 내 온 차를 마시며 내 의중을 물어 오셨다. 짐작컨대 옆집 윤인숙씨가 쓰리쿠션을 친 것 같았다. 그래서 윤인숙씨 에게 이야기하듯 소상하게 말을 전했다. 두 집이 본래 한집이었던 집을 잘라 판 것이 문제였다며, 여간 불편하지 않다고 하소연 했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처럼 사용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개가 오가며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어왔고, 그물망을 쳐 방목하는 수많은 닭소리 조차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문제라고 말했다. 화재 난 그날도 네 사람이 찾아와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매번 그냥 오는 손님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이는 영업의 일환이었다. 얼마전 불 난 집 터 옆에 있는 밭을 사서 농막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지금의 집터는 양보하고 그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우선 불편에 앞서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복안도 설명했다. 내가 펴낸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집과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을 바탕으로 동강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동강사람들’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소유한 400여 평으로는 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옆집의 가축 방목이나 영업행위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집 지을 여력이 없어 땅과 자료만 정선군에 넘겨주면 건축은 정선군에서 추진하는 기획안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의 요구면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일하러 내려 왔더니,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뒤 이어 아들이 선임해 준 손해사정사 김민수씨도 도착했다. 김민수씨는 물증을 찾기 위해 불난 현장을 헤집기 시작했는데, 나와 정동지 모두 동원되어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흔적들이 소실된 후라 별로 찾아내지 못했다.

 

 

 

김민수씨가 찾은 중요한 것은 120필름 열다섯 장이 붙어 있는 비닐 파일이었다. 내가 찾은 것으로는 화가 강찬모씨 그림으로 추정되는 캔버스 천을 비롯하여 일세기가 지난 뷰카메라 필름케이스 가림막으로 보이는 알미늄 철판만 주웠을 뿐 필름용 카메라와 암실장비 등의 부품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외는 85년‘동아미술제’ 대상받은 상장 잔재와 불타다 남은 나무액자 조각뿐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주워 보관하고 있는 90년도에 전시했던 11X14인치 규격의 ‘전농동588’ 사전첩 일부는 소중한 물증인 셈이다. 이웃 주민이 기념으로 챙겨 간 ‘87민주항쟁’ 사진첩 일부도 다시 받아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찾아내기가 힘들어 찾은 자료만 촬영해 두고 맡겨놓았다.

 

 

 

일 억 정도 보상받으려면 3억 정도의 자료가 나와야 한다며 보상 받게 될 금액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소견을 상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윤인숙씨 더러 불난 집터를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의향이 없냐고 물어 본 모양인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며 잘라 말했다고 한다. 소실된 집기나 비품 명세를 적을 용지를 전해주며 다시 연락하겠다며 김민수씨도 떠나버렸다.

 

 

 

우리도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해자나 마찬가지인 윤인숙씨가 피해보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보험사에 떠넘기며 일체의 대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위에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충고를 끈임 없이 했지만, 이웃의 정리를 생각해 마다하지 않았던가?

 

 

 

운전 중에 아산의 김선우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이유를 조목 조목 이야기하며 다시 설득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가 선임되어야 소실된 자료의 중요함을 변호해 보험사로부터 적정한 보험금을 받아 낼 수도 있지만, 배 째라는 윤인숙씨의 재산추적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영신씨는 나더러 의견을 물어 왔지만, 법적으로 갈 생각은 없기도 하지만, 피해 입은 땅이 정영신씨 땅이니 당신이 판단하라고 미루었다.

 

 

 

사실상, 화재현장에는 그동안 정영신씨가 전시해 온 장터 작품도 모두 보관해 두는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그 집 땅 역시 정영신씨 소유나 마찬가지다. 5년 전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며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돈이 없어 위자료 조로 넘겨 준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 양해각서만 작성해 두고 아직까지 명의 이전을 못해 준 것은 신용카드대금 천 백오십 만원을 연체하여 채권추심사인 ‘미래신용’에 땅이 압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 조정을 신청해 정해진 납입금을 여섯 차례 납부했으니, 머지않아 압류만 풀리면 등기 이전해 주어야 할 땅인지라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밤늦게야 도착해 잠들었는데, 이틀 날 다시 김선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나도 들으라고 전화소리가 들리도록 외장 스피커를 켜두어, 전화내용을 상세히 엿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왜 원칙을 지키지 않느냐며 나무라는 말에 더 이상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휴일인 부처님 오신 날이지만, 정선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버리려고 쌓아 둔 타다 남은 포대기들을 실고 와 뒤져보기 위해 트럭을 대절했다는 것이다.

 

 

 

‘공유공간 마인’에 내 전시를 유치했다는 연유로 저토록 자신의 일처럼 지극정성으로 돕는데, 어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걸 김선유씨에게 위임한다며 두 손 들고 말았다. 밤늦게는 포대를 다 실고 돌아왔다는 전화를 걸며 트럭 대절비나 부대비용은 나중에 청구하겠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끝장을 보고 마는 대단한 여장부였다.

 

 

 

김선유씨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다 끝난 인생 말년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마음 상하지 않고 일이 잘 마무리되어 약속대로 정선 만지산에 멋진 ‘예술창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드린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 만지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간밤의 폭우로 강물이 넘쳐 다리가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잠수교라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높은 다리를 만든 다음부터는 다리가 잠겨 고립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10년 전에는 정선 읍내 장 보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강변길이 침수되어

이틀 동안 정선읍내 여관에서 물 빠지기만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물가에 산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옛 귤암분교를 빌려 레프팅업을 운영하던 외지인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서둘러 다리를 건너다 차가 물에 떠밀려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산길로 돌아 갈 수도 있었는데, 무엇이 급해 목숨까지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물이 빠지도록 집에서 기다리면 되겠지만,

이튿날이 생일이라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는 정영신씨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틀 전부터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뜸을 들이더니, 엄청난 폭우를 쏟아 부었다.

 

윗만지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은 사방이 산으로 가려있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

20여 년 동안 살며 한 번도 폭우나 태풍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몰아 닥쳤을 땐, 이변도 있었다.

한 밤 중에 산에서 돌이 굴러 부딪히는 소리가 대포 터지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무서워 꼼짝도 못하고 밤을 지샜는데, 새벽에 나가보니

서낭당 앞 공터가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돌덩이가 개울과 도로 따라 굴러 우리 집 주변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집 터에 절을 짓겠다며 땅을 팔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적 여건이 자기가 찾던 곳이라지만, 살고 있는 집을 팔수야 없지 않은가?

아마 명당인 것을 알아본 듯 했다.

 

첫날은 비 때문에 일을 못하고, 둘째 날은 땅이 질퍽거려 일을 못했다.

방안에서 혼자 노닥거리려니 무료해 미칠 지경이었다.

만지산에는 티브이도 인터넷도 없어 책 볼일 밖에 없는데,

요즘은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도 오래보지 못한다.

 

무료한 마음을 아는듯, 아랫만지 사는 최연규씨가 찾아왔다.

집에 술안주가 없는 것을 눈치 챘는지, 윤인숙씨가 사는 옆집으로 오라고 했다.

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술꾼을 모으러 온 것 같았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차를 타고 아랫만지로 넘어갔다.

아랫만지 가는 도로도 물에 잠겼으나 사륜구동이라 산길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랫만지 아낙들이 물 구경하느라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최연규씨 댁은 농지가 많은 대농이라 일반 농작물만 아니라 사과나 배 등 과일도 없는 것이 없다.

소도 여러 마리 키우는데, 그 많은 일을 두 내외가 맡아, 농사철에는 한가하게 만나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든 농작물이 풍작이었다. 고추도 과일도 주렁주렁 달렸다.

 

그 날 아낙들은 깻잎을 땄지만, 남정네는 냉동실에 있는 홍어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홍어가 부족한지, 이번엔 매운탕 끓인다며 물고기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이 넘쳐 고립되면 항상 즐기는 놀이지만, 대개 조그만 피라미들만 잡힌다.

그물 채를 급조하여 물가로 나가보니, 아까보다는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강변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리는 그 때까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심어 둔 농작물들은 휩쓸렸고, 떠내려 온 쓰레기들만 나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는 고구마가 능쿨채 떠내려 와 걸려 있기도 했다.

밤 늦게는 물이 빠져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슬쩍 피해버렸다.

고기를 잡은 후 계속 술을 마신다면 나중에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깨기 위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옆집의 윤인숙씨가 데리러 왔다. .

손사래를 친 후, 밤 열시쯤 출발해 보니 길가의 물은 빠졌으나 진흙 투성이었다.

 미끄러운 길을 힘들게 뚫고 나갔으나, 다리가 막혀있었다.

 

다리에 물은 남았지만 갈 수는 있었는데, 떠내려 온 나무둥치가 다리 중턱을 가로막았다.

늦은 시간이라 이웃의 도움은 물론 기계 톱도 빌릴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영신씨에게 전화 걸어 아침 약속을 저녁약속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진흙에 바퀴가 빠져 계속 헛바퀴를 돌렸다.

핸들을 돌려가며 계속 페달을 밟았더니,

차가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며, 뒷 범퍼가 돌벽을 치고 빠져 나왔다.

범퍼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기에 확인해 보지도 않고 돌아 와 버렸다.

 

그 이튿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열무도 솎아내고

지난번에 수확하고 남겨 둔 옥수수대와 무성한 잡초들도 제거했다.

마른 땅이라면 옥수수뿌리는 괭이로 캐야 겠지만, 땅이 질어 손으로 뽑기 시작했는데,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점심 때가 지나서야 끝났다.

 

그 때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허리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겠더라.

한번 일에 빠지면 힘든 것조차 잊어버리는, 고질병이 아닐 수 없다.

정선만 갔다 오면 그 다음 날 곤욕을 치루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라면으로 허기를 메운 뒤, 수확한 농작물과 짐을 싣다보니, 차가 엉망진창이었다. 

간밤에 진흙탕에서 씨름하였으니 깨끗할리야 없지만, 뒷 범퍼 모서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도 문짝이 망가져 중고 문짝을 60만원이나 들여 교체했는데,

차주인 정영신씨에게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비 받아, 정선 오가는 기름 값과 차 유지비에 대부분 소모하는 편인데,

더 이상 수리할 여력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내년에는 땅도 쉴 겸, 농사를 짓지 않을 생각을 했다.

길에 돈 뿌려가며 농사 지어도 모종 값과 비료 값이면 사먹고도 남는다.

 

정선 만지산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1시 무렵이었느데,

언제 물난리가 났느냐는 듯, 도로와 다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무리하게 일해 손가락은 깨졌고 팔목은 삐었지만, 운전을 마다 할 수 없었다.

 

오다보니, 강변 도로에 아스팔트 조각들이 떠 내려와 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시멘트 포장이 된 산길을 모두 아스팔트로 덧 입혔더라.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좋아하는 주민도 있어 입을 다물었는데,

이게 토목업자와 군의원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멀쩡한 포장길에 왜 날림공사 하느라 돈을 쏟아 붓는지 모르겠다.

정선군은 돈이 남아돌아 탈이다.

 

매번 정선 갈 때는 새벽에 출발하고, 올 때는 한 밤중에 출발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정체를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이 날은 하는 수 없이 한 낮에 출발하여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양평을 경유하는 국도는 늦어도 네 시간이면 충분한데, 이 날은 일곱시간 걸렸다.

 

양평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퇴근 시간과 마주친 서울에서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저녁식사를 일찍하는 정영신씨가 기다려줄지 걱정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밥상은 차려 놓고, 아들 햇님이 내외와 손녀 하랑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있으니 가족들이 나타났는데, 예쁜 하랑이 덕분에 지친 피로도 잊어버렸다.

생일케익까지 사와 복에 없는 생일잔치까지 열게 된 것이다.

 

생일밥 먹기가 이리 힘들다면, 다시는 생일을 맞지 않으리...

 

사진, 글 / 조문호

 

자연을 지키느냐? 편리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원칙과 현실에서 늘 갈등하는 문제다.

천만다행으로 편리하게 살 여건이 되지 않아 자연을 지키는 원칙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뜻밖에 원칙을 어긴 이변이 생겨버렸다.

 

정선 만지산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이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 온 것이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보낸 것이라며 날더러 보라고 했다.

지난 번에 도로 포장하는 사람 있으면 움푹 파진 입구 좀 부탁 했다는데, 마당부터 덮어버린 것이다.

그 마당은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해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거다.

 

누가 들어도 고맙다고해야 할 일이라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보내 주기로 했단다.

레미콘 값만 아니라 콩크리트를 바닥에 골고루 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 번 고맙다고 말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었다.

 

그 집은 25년 전 동강 환경캠프로 빌려 사용하던 집인데,

이년 여의 활동이 끝 난 후, 개인 작업을 위해 혼자 눌러 앉은 집이다.

밭으로 지정된 땅에 무허가로 지은 농가주택인데, 불편하긴 해도 사는 대는 지장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경캠프에 함께 한 회원 한 사람이 그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집을 비워줘야 하는데, 그 많은 짐을 어디로 끌고 간단 말인가?

부랴부랴 아내에게 부탁해 복에 없는 그 집을 사게 된 것이다.

당시 시세보다 비쌌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 밖에 없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민 체질인지라

아름다운 자연도 버릴 수 있겠다 싶어 돌아가신 어머님까지 그 곳에 묻어 두었다.

 

김대중정부에서 댐을 취소하는 결단을 내림에 따라 동강 환경운동도 끝나게 되었는데,

문제는 농민들의 보상이 이루어지며 모든 게 달라졌다.

주택건설비를 비롯해 축사나 버섯재배장 같은 농가지원이 실시되며,

오래된 농가주택은 모조리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양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마 그 때 주택이라고는 내가 사는 집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뿐 아니라 집집마다 티브이 수상기가 들어와, 사는 방식이나 습관마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던 동내 인심이 서서히 변해갔다는 것이다.

 

산골에 살다보면 마당에 제초작업도 해야 되고 소나기라도 퍼 붓게 되면 땅도 질퍽거리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당에서 조차 흙을 밟을 수 없다면 굳이 산골에서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옆집 차가 자주 들락거려 잡초도 자랄 틈이 없지만, 자주 머물지 못하니 불편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마당가에 코스모스가 너울거리고, 딸기가 조롱조롱 달리는 풍경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 여름 폭우 속에 만난 아름다운 장면도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집에 없는 샤워한다며 알몸을 드러낸 아내의 몸에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는데,

황토물이 발 위에 튀어 오르는 소란스러움과

무성하게 핀 맨드라미의 붉은 꽃술은 정염을 토하듯 매혹적이었다.

아쉽게도 보도검열에 걸려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젠 그 장면도 서랍 속에 갇힌 풍경이 되고 말았다.

 

지난 19일 정선 집에 들려보니, 마당의 2/3는 콘크리트로 하얗게 덥혀있었다.

이젠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처지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두 번째 레미콘 차가 도착했을 때는, 함께 도와 바닥을 고를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 탓하기는커녕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했으나,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만지산과의 인연을 끝내야 하는 것 인가?

정이 떨어지니, 모든 사물까지 싫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 새벽 일찍 정선으로 떠났다.

피서를 겸해 좀 쉬었다 왔으면 좋으련만, 겨우 2박3일의 일정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느긋하게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지산에 당도하니, 옥수수 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멧돼지가 쳐들어 와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알맹이라고는 한 알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워버렸다.






옥수수 챙겨주기로 한 약속들도 결국 헛소리가 되고만 것이다.

우리 밭만 전기 철조망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한 해 걸러 당하는 일이지만,
전기 철조망까지 쳐가며 농사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주렁주렁 열린 고추에는 옆집에서 시키지도 않은 농약을 쳤다고 한다.
한 집만 농약을 치지 않으면 모든 고추가 탄저병이 걸린다는 이유인데,
농약 없는 유기농 풋고추 먹으려는 노력 또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망친 농사에 답답해 하는 중에 가족들이 찾아왔다.






동생 조창호, 큰누님 조영희, 김순화 형수, 조카 영란이가 찾아 와 산소에 올라갔다.
어머니 무덤에 절 올리며 나눈 대화는 햇님이 장가가는 이야기 뿐이었다.
다들 신부 얼굴을 보지 못해 궁금해 하니, 영란이가 핸드폰을 뒤져 신부 사진을 찾아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산 위에서 블로그 사진을 꺼내 볼 수 있다니...






점심식사를 한 후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니, 혼자 바빠졌다.
냉장고가 정전되어 모든 음식물이 썩어 있었는데,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아껴 둔 돼지고기까지 몽땅 버려야 했다.
어찌된 일인지, 밖에 노출된 배전함 스위치가 내려져 있었다.






뒤늦게 냉장고 청소하랴, 집 청소하랴, 똥 오줌 못 가릴 정도로 부산을 떨어댔다.

더위에 지친 사정을 알았던지, 옆집에서 술 한 잔하자는 기별이 왔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이웃 최재순, 한순식씨와 함께 염소 탕을 안주로 술판을 벌여 놓았단다.






술 자리에서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누군가가 던져놓은 독약 묻은 고기를 먹고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 집 정전도 누군가의 해코지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지하수 분쟁에 대한 화풀이라는 추측이 나왔으나, 아무런 물증은 없다.

이젠 산골짜기에도 씨씨티브이를 설치해야 할 형편이다.
어쩌다 순박한 산골 인심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침, 아랫동네 최연규씨가 나타나 그의 구수한 옛이야기에 잠시나마 즐거울 수 있었다.

뗏꾼들이 즐겨 찾았던 '전산옥'의 살 냄새 풍기는 이야기에서 부터
‘정선아리랑시장’에서 떡메치기 훈수 두던 우스개로 좌중을 웃겼다.


“너무 많이 치면 아파요. 잘 안되면 물 좀 살살 발라 쳐요.”






술이 취해 방으로 돌아오니, 평소에는 정겹게만 보이던 벽의 사진이나
온돌 열기에 그을린 포스터까지 귀신 나올 집처럼 음산해 정나미 떨어졌다.
사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서운데 말이다.






날이 밝아오니,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당 아래 핀 도라지꽃은 장관을 이루었고, 배나무엔 돌배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강 댐이 무산되어 다들 배나무를 뽑아낼 때, 한 그루 옮겨 심어 놓았는데,
20여 년 동안 가꾸지 않고 버려두었더니, 자연스럽게 돌배가 된 것이다.
그것도 돌배 술을 만드니 호흡기 나쁜 나에게는 도랑치고 게 잡는 격으로,
최고의 약인 셈이다.






그 이튿날은 하루 종일 잡초와의 전쟁을 벌였는데,
잡초 더미 속에서 탐스러운 호박이 굴러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활에 정들어 어머니까지 모셨으나,

사람들이 자꾸 마음을 뜨게 만드네. 



 


어쩌면 피하지 못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빼지도 박지도 못할 처지에 한 숨만 나온다.



사진, 글 / 조문호

















무더운 쪽방을 탈출하여 찾아 간 정선 만지산은 휴가지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몇일 내내 술에 절어 살아야 했고, 제 마음대로 자란 풀과 나무 벌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곤욕을 치러야했다.

그런데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벌어진 물 전쟁이 2년이 가깝도록 해결의 조짐조차 없으니,

해도 해도 너무 한, 편치 않은 여름휴가가 되었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도착한 만지산 집은 잡초에 뒤 덥혀 있었다.
온 종일 벌인 잡초와의 전쟁으로, 온 몸에서는 땀이 빗물처럼 흘러 내렸다.
그러나 갈증으로 들이키는 시원한 물맛이 유일한 보상이었다.
난, 오나가나 전쟁을 치룬다. 사람 사는 곳이 어쩌면 전쟁터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튿날은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에 사는 화가 양서욱씨가 만지산으로 찾아 온 것이다.

덕분에 일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를 구워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는데,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까지 합류하여 술판은 무르익었다.

역시 술자리에는 여성이 있어야 생기가 돈다.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는 이사 온지가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술자리에 함께 하기는 처음이었다.

가끔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나누었지만, 함께 하기를 꺼려했다. 혼자 사는 여자라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리다 보면 서로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남자 녹이는 킬러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주변에서 “마음 약한 작가님은 특히 가지 말라”며

만날 때마다 신신당부했는데, 은근히 당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술자리에 인사하러 왔기에 자리에 앉기를 권했는데, 무척 친절한 분이었다.

사내들이 굽는 고기가 신통찮았던지, 대뜸 자기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 집이 구멍가게라면 그녀 집은 슈퍼마켙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테라스까지 만들어 놓은 주변 환경에 주눅 들었다.

밤 늦도록 전활철씨의 기타소리와 윤인숙씨의 북소리가 만지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활철씨의 노래솜씨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윤인숙씨의 소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시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화력의 양면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깊은 산골에서 여자 혼자 살려면 그러한 성격이 아니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 물 분쟁에 시달리며 남자를 잘 꼬들기는 요녀로 둔갑한 것이다.
윤인숙씨가 기존 집을 사서 들어 올 때에 이미 동내 지하수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동네에서는 물 사용 기금으로 2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며 동네에서 물을 끊어 버린 것이다.

난, 서울에 살아 한 달에 한번 밖에 들리지 못해 지하수에 대한 권한 일체를 동네 결정에 위임한 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지만,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 지루한 싸움이 오래 지속되어 정선 읍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했다.

신판 봉이김선달이라는 바아냥까지 받아야 했는데, 이제 제발 물싸움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그 날 밤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완전히 맛이 갔다.
방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옆집에서 밥 먹으러 오란다며 양서욱씨가 전했다.

가보니 친절하게도 가마솥에다 닭죽을 끓여 아침상을 준비해 둔 것이다.

자기는 정선에 손님 맞으러 가야 한다며 “서욱아! 잘 챙겨먹고 전화번호 두고 가”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져버렸다.

싹싹하기도 하지만, 부지런한 여자였다.

전활철씨와 양서욱씨가 떠나 간 후 어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갔다.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라 서울에서 가족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제초기와 기계톱만 있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낫과 톱으로 일하자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덤 앞을 가린 잡목들 베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숨이 막힐 듯 헉헉거렸다.






이틀 날은 서울에서 영희 누님과 일산에 사는 동생 창호, 그리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진옥과 매제 김종성씨가 찾아왔다. 

교회에 다니는 동생들은 다들 묵념만 올렸지만, ‘엄마 덕에 반가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며 다들 좋아했다.
산소에서 내려 와 수박으로 더위를 식히는 자리에서 동생 창호가 말을 꺼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꼴이 안 서럽던지, ‘형님 몸보신 좀 시켜야 되겠다’며 횡성한우 먹으러 가잖다.

정선에서 횡성까지 만만찮은 거리인지라, 밥 한 끼 먹으러 먼 거리를 간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모처럼의 제안이라 서울 가는 길 마중가는 셈치고 따라 나섰다.






제사 준비로 서둘러 돌아 와야 했는데, 이웃 최종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저녁, 정대식씨 집에서 집들이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동네사람들이 모인자리에서 물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만지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길이 너무 가파러 중간에서 시동이 꺼지는 일도 생겼지만, 주변 경관 하나는 끝내 주었다.

새로 지은 집은 조립주택 비슷했지만,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몇 그루가 산세의 위용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들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동네 물 분쟁으로 얼굴들고 살 수 없다며 이제 타협점을 찾아 마무리 짓자고 했지만,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 기금으로 적립해 두기 위해 돈을 받는다지만, 모터가 고장나면 수리비까지 읍사무소에서 대 주는데, 기금은 어디다 쓸려는지 모르겠다.

새로 입주한 분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랫만지 최영규씨 뿐이었다.

이 친구는 울 엄마 무덤까지 공짜로 빌려 준 인심 좋은 친구다. 그러나 동네 어른으로 사리대로 말했다가 주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누가 해코지했는지 그 쪽으로 가는 물 라인에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동네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최영규씨 내외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마침 물 논쟁 당사자인 윤인숙씨 댁에 술판이 벌어져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도 손님이 찾아와 흥청댔다.

마당 한 쪽에 술상을 차려 집주인과 찾아 간 세 사람이 앉았지만,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200만원을 내 놓기도 했으나, 추가 공사비로 50만원을 더 요구해 무산되기도 했고,

결국은 200만원이나 들여 모터를 설치해 냇물을 끌어 올려 쓰지만, 가물면 그 물도 끊길 수밖에 없었다.

윤인숙씨도 여러 차례 자기주장을 굽히려 했지만, 아랫만지 장영서씨가 거듭 만류하고 나섰다고 한다.

어쩌면 갑질의 전형을 뜯어고치려 한 장영서씨가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얄팍한 지식을 내세워 지역민들을 너무 무시했기 때문이다.

주민들 자존심을 건드려 수습의 실마리를 잃은 것인데, 결국은 장영서씨 댁 물도 끊기고 말았다.


물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가구당 30만원씩을 추가로 걷기로 했는데, 장영서씨가 못 내겠다며 버텼는데,

차라리 물을 먹지않겠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말 물을 잘랐는데, 이 더위에 물을 끊는다는 것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이제 다시 물을 먹으려면 200만원을 내야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다.

집을 팔고 이 지역을 떠나겠다지만, 집 값조차 만만찮으니 쉽게 살 사람이 나서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최영규씨에게 말했다.
산골마을이 유난히 많은 정선군에서 지하수를 직접 관리하도록 건의하자고 했다.

군에서 지하수를 파주었으면, 지역민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관리하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계량기를 설치해 일반 수도요금처럼 군에서 징수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동안 지하수에 대한 분쟁은 귤암리 만지골 뿐 아니라 숱하게 많았는데, 언제까지 뒷짐 지고 남의집 불구경 하듯 보고만 있을 것인가?

수도요금을 징수하는 대신 수질검사도 틈틈히 하여 식수인지 허드렛 물인지도 주민들에게 알려 주어야한다.

지금은 물사용료 조로 모터 돌린 전기요금을 균등하게 나누어 내지만, 일반가정과 농가의 물 사용량이 같을 수도 없다.

어쨌든 얼굴 들기 부끄러운 물 분쟁을 이제 끝낼 수 있도록 정선군에서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

지역민들로 부터 따돌릴 것을 걱정했는지, 최영규씨는 나더러 나서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언제까지 옆집과 물도 나누어 먹지 못하는 이 야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마을 귤암리”라는 오래된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심 좋은 귤암리가 되도록, 다 같이 한 발씩 양보하자.






자정이 가까워서야, 제사지내러 우리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술이 취했으나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는데, 변압기가 터져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부득이 제사상을 마루에 차렸는데, 어두워 유리컵이 방바닥에 떨어져 박살난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유리를 찾아가며 파편을 쓸어 모으는 일은 숱한 인내를 요구했다.

제사상 차리는 정성을 엉뚱한 곳에 쏟는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술 깨도록 귀신이 보낸 일거리라 생각하니 마음 편했다.
큰 절을 올리며, 제발 살기 좋은 동네로 되돌려달라고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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