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지난 초복 날, 인사동에서 사진동지 정영신씨와 삼계탕 미팅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몸보신하는 날로, 인사동 ‘무교 삼계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유달리 이집 삼계탕만 찾는 것은 인사동의 오래된 맛집이기 때문이다.
맛은 변함없었지만, 작년에 비해 삼천원이나 올라 한 그릇에 만 오천원 했다.
분에 넘치는 밥 값을 물었지만, 너무 맛있어 살찌는 소리가 “뿌드득”하더라.





그런데, 식사하고 나오는 길에 인사동의 유서 깊은 회화나무를 만난 것이다.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볼거리 중 하나가 ‘이율곡 집터‘ 자리에 있는 이 회화나무 고목이다. 
비록 은행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400년을 지켜 온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다.
입구에는 흡연금지라는 큼직한 팻말이 있으나 인근 회사원들의 흡연 장소가 되어버렸는데,
회화나무가 담배연기에 절어 죽을 맛일 게다.





옛날에는 회화나무가 있는 이 곳을 독녀혈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녀혈은 과부가 많이 나온다는 말로 과부골이란 뜻이란다.
그런데 과부골에 율곡 같은 대학자가 살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탑산사’ 학암스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인데,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여인의 자궁을 상징하는 곳으로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따른다. 
큰 구멍을 막으려 나무를 심는데, 이 회화나무도 그래서 심은 것이다.
율곡도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





인사동에는 이율곡의 절골(인사동의 옛 이름)집터를 비롯하여 세도가 김좌근 집터도 있다.
민익두, 민영환, 박영효가 살았던 고가를 비롯하여,
책방이나 집필묵 가게, 표구점, 골동가게, 화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 인사동 본래의 예스러운 모습이다.






인사동하면 뺄 수 없는 사람으로는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가게 여기저기에 남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과 '귀천'의 시인 천상병, 작가 박이엽선생이 먼저 떠 오른다.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민화를 전통문화로 처음 드러내신 조자용 선생, 통인가게 김정환선생,
백자를 품위 있게 누리신 ‘아자방’의 시인 김상옥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도 기억할 수 있겠다.

 


 


이제 그러한 오래된 역사와 전통은 점점 묻혀가고,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싸구려 거리로 변해 가고 있다.
어쩌겠는가?
돈에 묻혀가는 세월이지만, 이렇게라도 추억할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볼만한 전시가 있어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




옛 민정당사 자리 호텔공사는 이제 마무리를 했다. 머지않아 인사동이 더 낯설 것이다.




거리에는 임금님이 나와 광고판을 들고 있고, 지난날이 그리운 유랑 악사는 멀쩡한 날 ‘봄비’를 불렀다.




요즘 인사동에 나와도 갈만한 술집이 별로 없다.
돈에 밀리고 젊은이에 밀려, 길 잃은 기러기 신세다.
아지트로 죽치던 ‘유목민’도 젊은이 아닌 돈에 밀려났다.




사실상, 인사동을 못 잊어 배회하는 것은 공간의 추억이 아니라, 그 곳에서 놀던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 보다 죽었거나 볼 수 없는 자들의 추억이 짙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천상병시인이고,
뒤이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방송작가 박이엽선생,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
넋을 부르는 민속작가 심우성선생 같은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땡초시인 적음과 최루탄 냄새 풀풀 풍기던 사진기자 김종구, 별만 그렸던 강용대,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 ‘민예총’의 대부 김용태,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
강단 있는 민중화가 문영태, 그리고 살아있어도 볼 수 없는 화가 박광호와 이청운도 있고,
미국으로 떠난 최정자시인도 그립다.




그들과 어울리던 ‘실비집’이나 ‘누님칼국수’, ‘시인통신’, '하가', '레떼'

‘수희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부산식당’이나 ‘사동집’, ‘귀천’ 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잘 가지 않는 것은,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만났던 사람이 그리운 거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곳이 있어야해 ‘다리 밑’에 자리 잡기로 했다.
‘다리 밑’은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있는 코 구멍만한 술집인데, 간판이 없어 계단집으로 불렸다.
통인의 관우선생이 ‘다리 밑 집’으로 고쳐 불렀으나, 더 줄여 ‘다리 밑’으로 부른다.
옛날엔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살았으나, 대개 태어날 때의 고향인 다리 밑을 좋아한다.
공사판의 함바집처럼 서민적이라 더 정겹다.




주종은 불문이나 관우선생이 개발한 시원한 생맥주에 막걸리를 타 먹는 막맥이 맛있다지만
통풍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안주가 싸다. 쫀득쫀득한 감자전 같은 대부분의 안주가 오천원이다.




이 날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통인의 관우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보는 여인도 나타났다.
미끄러질 것 같은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생글 생글한 눈웃음이 죽이더라.




그런데, 옆 자리에 아는 분이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처럼 상투를 틀어 올린 권도경씨인데,
사진가 하형우씨께 전화 걸어 바꾸어 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좁았다.




그들의 건배사가 더 재미있더라.
술잔을 치켜들며 “이것이 무엇이요?”하니, 다같이 “정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이란 노래를 처절하게 합창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렇다. 다들 그 놈의 정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그리운 사람 만날 때는 다리 밑에서 만나자.
받을 때나 줄 때나 한 결 같이 꿈속 같도록...

사진, 글 / 조문호



















최정자 시집 '별사탕 속의 유리새' 표지

인간과 문학사 발행 / 2017.12.28일 발행/ 값 9,000원



요즘 너무 한가하게 지낸다.

전시장은 물론 바깥출입을 자제하는데다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어버리니 찾는 사람도 없다.

쪽방에서만 딩굴며 낮잠까지 자는데,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큰일이다



1990, 9 인사동 '귀천'앞에서

 

 

몇일 전 정영신씨 집에서 서재를 뒤져 볼만한 책을 뒤적거리다 뜻밖의 시집을 발견했다,

미국에 계신 최정자시인이 쓴 별사탕 속의 유리 새였는데, 일 년 넘게 잊었던 시집이다.

작년에 미국에서 최정자 시인으로 부터 시집이 부쳐왔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깜빡 잊어 버린 것이다.

눈에 부딪히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그의 치매수준이니 이일을 어쩌랴!




2016,9 인사동 '귀천'


    

몇 권의 책을 챙겨 와 모처럼 책 속에 푹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최정자시인 시집 표지에 나온 프로필 사진을 보니, 할머니가 처녀처럼 찍혀있었다.

뽀샵은 아닌 것 같은데, 사진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사기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2012.9 인사동 커피숍에서


    

최정자 시인은 80년대 중반 인사동에서 만난 누님 같은 분이다.

천방지축 날뛰던 개막난이를 거두고 보살펴 주셨다.

돌아가신 천상병, 민병산, 박이엽씨를 비롯한 인사동 터주대감 반열에 드시는 분인데,

어느 날 뉴욕으로 이민 간다며 보따리를 싸셨다.

나라꼴이 싫어 갔을까? 아니면 사는 게 힘들어 가셨을까?




2013.12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정영신, 박양진, 최정자시인

    


가끔 생각나면 처녀작이나 마찬가지인 개망초 꽃 사랑을 뒤적였는데, 어느 날 새 시집을 보내 주셨다.

얼마나 서울이 그리웠으면 제목이 서울로 서울로였다. 구구절절 서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2016. 9 인사동 '귀천'



어려운 형편에 여비만 마련되면 서울로 나오셨는데, 신판 유배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미동부한국문인협회회장을 맡는 등 마음을 붙이시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뉴욕에서만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으니, 온통 시작에만 매달린 셈이다.


    

 2012.9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배평모, 최정자, 공윤희, 편근희씨



나는 한국이다란 제목의 시에서도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전략) 내가 한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다./ 내가 두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다./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내가 걸으면 걷는 대로 다 한국이 됨으로....”



2015.9 인사동 커피숍에서

 


그런데, 작년에 펴낸 별 사탕 속의 유리 새 표제 시는 시인 자신의 유년의 모습이며 현재의 모습이었다.

백일홍 꽃밭에서는 어머니는 꽃밭 앞에 서 있었다./어머니는 왜 거기 서 있었을까.“로 적고 있는데,

공터에 핀 백일홍을 보면서도 어머니를 떠 올리고, 봉숭아꽃을 모티브로 한 첫사랑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어/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을 만난다는/ 철석같이 믿은 그 말인데, 태어 난 나라를 떠나와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봉숭아 꽃물을 들인들./물빛 위로 첫눈이 내린들./첫사랑이 온들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제주도에서 온 낙타를 대상으로 한 마두금소리나 제주도 해녀를 대상으로 한 숨비소리“,

양노원을 말한 거기 가고 싶지 않다등 대부분의 시들이 자아성찰에 의한 그리움이었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뉴욕과 고향 사이의 거리라는 제목으로 쓴 문학평론가 유한근씨의 서문에서는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처럼,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거기에 있어야 한다. 뉴욕의 최정자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는 최정자 시인이 있다고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별사탕 속의 유리 새를 화두로 삼고 최정자 시인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그 화두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하나의 판타지로, 시인 자신의 유년의 모습이나 현재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떨칠 수 없는 것은 별 사탕 속의 유리 새라는 이미지다. 그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 이미지는 곧 최정자 시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라고 마무리했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위에 거론되지 않은 시중에서 인사동 민병산선생 이야기를 비롯한 마음에 남는 시  세 편을 옮긴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사망금지령>

 

죽지 마라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사망금지령을 내린 도시가 있다. 인구 370만 명이 사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

팔치아노 델 마시코, 줄리오 세사르 파바시장이 시장 령을 내렸단다.

사망금지령을 내렸단다.

 

반갑다고

즐겁다고

시민들은 춤추었단다.

 

죽지 말라는 명령, 영원히 살아라, 는 명령,

너도 나도 좋아라, 는 명령

명령이라도 죽지 말라면 살아라, 면 좋아라, 는 것

명령이란

따르는 자가 있고 어기는 자가 있기 마련인데

 

당연하게 반란자가 생겼다.

앞장선 노인 두 명

사망금지령을 어기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명령불복종자들.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명령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냐,

무서운 독재자의 명령도 기어코 거스르는 자가 있는 법

아무리 백세시대라 노래 불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2016. 9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사람만>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2013.12 인사동 '유목민'에서/ 좌로부터 최정자, 조경석, 이명희



<민병산 선생님 20주기에 드리는 편지>

 

살아계셨다면 이제 겨우

여든이실 텐데

살아계셨다면

힘없고 가난하고 슬프고 외롭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인사동 골목골목에 선선한 바람 불었을 텐데

말없이 말하는 법을

낮게 앉아 높이 보이는 법을

가진 것 없이 넉넉한 법을 배웠을 텐데

 

불광동에서 탄 버스 남대문시장에서 내려

건포도 한 봉지, 바나나 한 개 사면

늘 반기는 옆 집 여섯 살짜리 아가씨 생각나서

절로 나오는 미소까지 배낭에 담으시고

명동을 거쳐 관철동을 거쳐

유행의 물결을 거쳐 인사동으로 오시던 선생님.

 

인사동 세월 느릿느릿 간다 하시더니

선생님 안 계신 세월

그새 스무 해가 지났네요.

강산이 두 번 변했네요.

 

맨해튼 가로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청설모를 보면

고속 도로변에 서 있는 사슴 가족들을 보면

흐드러진 풀꽃을 보면 생각나는

슬프면서 슬프지 않았던 선생님.

변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생님 그리워

모두 모였네요.

      

사진, / 조문호



2013 인사동 '귀천'앞에서 / 좌로부터 목영선, 최정자








 

 

 

 

 

 





사진가 김수길씨가 응암동에 “순간포착”이 아닌 “순간포차”를 차렸더라.
지난 3일, 송추 전강호씨 집에 가을소풍 갔다 오며 이차로 들린 술집이었다.
김수길, 공윤희, 민영기씨 등 몇 명이 둘러앉아, 송추에서 모자란 기름을 ‘순간포차’에서 보충하였다.
뒤늦게 조해인, 박진관씨도 나타났는데, 나만 ‘순간포차’를 몰랐던 것 같았다.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전형적인 선술집이나 통술집 스타일인데, 가뿐하게 한 잔 하기 딱 좋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민병산 선생 조카 민영기씨로 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인사동 사람이라면 한두 장 쯤 다 갖고 있는 민병산 선생의 글씨였다.
아들 조햇님 결혼식을 미처 몰랐다며, 전해주라는 결혼선물이었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선생은 세상을 훤히 읽고 있지만, 평소 별 말씀이 없으셨다.
붓 글씨 또한 얼마나 좋은지, 추사선생께서 계셨다면 아마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다.
자유롭고 거침없이 몰아가는 바람 같은 획들이, 쓰 놓고 나면 얼마나 조형적인지,
한 눈에 반할 글씨였다. 항상 괴나리봇짐에 잔뜩 넣고 다니며 나누어 주셨다.


선생께서는 달라고 말만 하면 거침없이 주었지만, 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주지 않았다.
싫어서도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하는 것 같아 차마 주지 못하신 것 같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토록 많은 글을 쓰서 나누어주셨지만, 나는 한 장도 받지 못했다.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 못 받았는데, 어떻게 귀한 작품을 그냥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민영기씨가 내놓은 민병산 선생의 붓글씨 내용을 보니,
김삿갓처럼 떠돌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봄 새벽’이란 시였다.
살아생전 그 글을 인사동 ‘귀천’에서 쓰시는 것을 보고 탐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글씨를 삼십년 만에 만났으니, 그 인연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달라지 않은 너는 가질 자격이 없으니, 자식에게나 주겠다는 것 같다.
그 시를 곱씹고 곱씹으며 민병산 선생님을 그린다.

“봄날 혼곤히 잠들어 새벽을 느끼는데
여기저기서 새 울음 들려온다.
지난 밤 비바람 사나웠기에
꽃잎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아누나“

사진, 글 / 조문호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싱그러운 봄은 찾아왔건만, 정작 인사동의 봄은 기약이 없다. 

그토록 인사동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떠들어도 다들 ‘마이동풍’이다.

“조 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며 예전 군인들이 비아냥거리듯, 관련부서는 코 방귀조차 안 뀐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인사동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술집으로 흘러 다닐 뿐이다.

한 때,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인사문화마당’을 포장마차 장사꾼들로부터 되찾아 예술공간으로 활용하자” /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의 주단위 리플렛을 거리에 내 놓아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자”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처럼, 거리에서 작업도 하고 작품도 팔 수 있는 무명작가 거리를 조성하자“ /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인사동과 북촌지역을 연계하는 국제적인 아트페어를 개최하자“는 등

예술가들의 제안을 나팔 불어댔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지금 전통문화거리를 표방하는 인사동에 ‘한국은 없다’는 볼멘소리가 거세다.

치솟는 임대료를 못 견뎌 문화관련 업소들은 외각이나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거리의 상품 90%가 중국산으로, 마치 인사동이 차이나타운 같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을 꼭 닮아간다.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인사동은 조선 말기부터 100여 년간 고미술의 메카였다.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이 살던 곳이 인사동이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빠짐없이 인사동에 문을 열었었다.

이들 따라 크고 작은 화랑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공방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인사동이 명실 공히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관광객들은 넘쳐나지만, 백 개가 넘는 인사동 전시장들이 텅텅 비어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왜 인사동을 찾겠는가? 인사동 고유의 색깔이 없는데, 다시 올 리 없다.

그들에게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느끼게 하려면,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거리환경을 정비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 도화서를 복원해 작가들을 선발하는 방법은 없는가?

그 곳에서 전통적인 민화나 서예, 도예 등을 제작해 외국관광객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터와 민병옥대감의 저택인 ‘민가다헌’도 잘 보존돼 있다.

이를 알리는 표지판들도 너무 작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적 자취를 바탕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자.

가깝게는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도 있다.

어쩌면 먼 조선시대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과

영국산 장미뿌리 파이프를 문채, 술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그리고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의 자유분방한 행색들 말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한 번 바꾸어보자.

아기자기한 인사동만의 골목 문화를 가꾸어,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의 사람냄새도 담자.

다 같이 힘 모아, 인사동을 낭만1번지로 되돌리는 봄바람 한번 일으키자.
 



지난 18일 오전 무렵, 별 볼일 없이 인사동에 나갔다.
주말은 봄나들이 나온 관광객들로 붐빌 것 같아 금요일을 택했는데,

포근한 봄 볕 탓인지 거리가 유난히 정겨웠다.

유치원 어린이들의 재잘거림도 여기저기 들리고,
장대만한 흑인이 피에로처럼 머뭇거리는 모습도 만났다.
‘이즈갤러리’ 건물은 한국화가 김현정의 전시 광고로 뒤 덥혀 있었다.
4개 층 전관을 한 달 가까이 빌려 ‘내숭놀이공원’이란 전시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동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예스러움은 만날 수 없었다.


한 때,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아라아트’를 운영하는 김명성씨가 사재를 들여, 벤취에 앉히거나
골목 어귀에 세우기 위해 조각가 최옥영씨에게 맡겨 시안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김명성씨가 빚더미로 벼랑에 내몰리며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서울시에서 물려받아 재추진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 국적불명의 관광지가 된 인사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물꼬를 터야한다.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위한 다양한 사실적 스토리텔링이 절실한 것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

사진,글 / 조문호























대부호 재산 포기하고 무소유 삶 실천한 철학자
양자 민영기씨 "유고집 이제는 세상 빛 봤으면"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로 불린 청구자(靑丘子) 민병산(1928~1988)의 유고집이 타계 30여년 만에 세월의 더께를 벗고 빛을 본다.

민병산은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충북 청주 대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재산을 포기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평생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채 무소유의 자유인으로 살았다. 말 그대로 안분지족의 삶을 향유했다. 그리고 회갑 하루 전날 세상을 떴다.

신경림 시인은 ‘세월청송로(歲月靑松老)’란 시에서 ‘민병산 선생은 회갑 바로 전날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만 예순해를 머문 셈이다/ 가족이 없는 그를 위해 친구와 후배들이/ 잔치를 열어준다는 걸 극구 마다했을 때/ 그의 뜻대로 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준비했던 잔치 음식은 장례 음식이 되고/ 회갑 옷은 그대로 수의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민병산은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동서고금의 서적을 독파,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서와 수필 등을 남겼고 서예에도 능했다. 1960년 <새벽>지에 ‘사일의 철학적 단편’, ‘사천세의 은자’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사상계> <세대> <창작과비평> 등에 여러 편의 철학 에세이와 전기를 발표했다. 사후인 1990년 지인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펴냈다.

그는 생전에 서울 관철동과 인사동 일대를 사랑방으로 삼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던 민병산이 가는 곳마다 문인들의 아지트가 됐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인사동 3전설’. ‘귀천’의 시인 천상병,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과 함께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꼽혔다. 매일같이 거리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만나며 청빈한 교유를 즐겼다.

“돌아가시고 한 차례 유고집을 냈죠. 그 이후에 책으로 나온 건 없습니다. 큰아버님이 생전에 써둔 원고를 쭉 갖고 있었어요. 수기나 일어로 써놓은 내용들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저도 몸이 아파요. 이대로 묻힐 수도 있겠다 싶었죠. 더 늦기 전에 세상의 빛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민병산의 조카 민영기씨(58)가 이제야 남은 원고를 묶어 유고집을 내려는 이유다. 일어로 된 원고 번역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해서 타계 30주년에 맞춰 유고집을 출간할 요량이다. 민병산이 남긴 원고와 서예 작품을 보관해 온 민씨 역시 고집스레 살았다. 혹시 무소유의 삶을 산 큰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될까봐 유고집 출간을 미뤄왔다고 했다.

민씨는 호적을 옮기진 않았으나 민병산의 양자 노릇을 했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큰아버지 뜻에 따라 인사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 글씨를 서각(書刻)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선생의 생애 마지막 한 해를 곁에서 지켜본 것도 그다.

지난 22일 명륜동 한 공원에서 한경닷컴과 만난 민씨가 기억하는 생전의 민병산은 스스로의 양심에 예민했던 지식인이었다. 무소유를 지향하되 무책임하지는 않았던 자유인이기도 했다.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산 이유도 그가 남긴 원고에서 읽어낼 수 있다고 했다.




-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야 유고집을 내려는 이유가 궁금하다.

“큰아버지는 생전에 이런저런 글이며 글씨를 주변 분들에게 나눠주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지인 분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냈고. 제가 이런저런 큰아버지의 원고며 수기를 넘겨받게 됐다. 큰아버지 후배 분에게 보인 적 있는데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말고 잘 갖고 있으라고 하더라. 옛날에 썼지만 현대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서. 혹시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렇게 당부한 것 같다. 그래서 그간 쭉 보관해 왔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고 저도 몸이 아파서 자칫 이대로 묻힐 수 있겠다 싶었다. 이젠 세상의 빛을 봤으면 좋겠다.”

- 민병산 선생의 양자라고 들었는데.

“제 큰아버지 된다. 호적을 옮기진 않았지만 양자로 들어온 셈이다. 늘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곤 했다. 1987년 가을로 기억한다. 큰아버지가 편찮아 병원 응급실까지 가는 일이 있었다. 만나 뵈러 갔더니 ‘너 이쪽으로 와서 내 밑에서 시키는 것 해라’ 그러시더라.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산 큰아버지인데 나라도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자전기 계통 일을 했는데 그때부터 인사동으로 옮겨 서각 일을 배웠다. 큰아버지는 1년여 만에 돌아가셨다. 저도 고지식해서 돌아가신 분과의 약속은 지킨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원고를 봤을 텐데 어떤 내용인가.

“일어로 써놓은 게 많다. 수기는 1권부터 4권까지 있는데 1권은 생전에 직접 번역해 놓았다. 남긴 글을 읽어보니 큰아버지의 삶이 이해되는 점들이 있다. 해방 전 큰아버지가 중학생 때였다. 일제가 패망 중이란 소식을 학생그룹에서 삐라로 만들어 뿌렸다가 구속당했다. 집안에 재산이 있는 편이어서 감옥에서 빼내려고 했는데 혼자선 못 나간다고 버텼다. 결국 몇 달 옥중생활을 한 뒤 손을 써 빼냈다. 큰아버지는 일을 벌인 친구들과 다 같이 감옥에서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혼자만 혜택을 받은 데 대해 양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원래 활동적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 집에 틀어박혀 철학책을 탐독하면서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해방 후엔 ‘독립운동 하고 나왔네’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주변 행동에 또 충격 받았다고. 그러니까 큰아버지는 굉장히 양심에 예민한 분이었던 거다. 수기에는 스무살 때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쓴 내용도 나온다. 그 여학생 분은 6·25 즈음에 결핵으로 돌아가신 걸로 안다. 큰아버지가 왜 평생 혼인을 안 했는지 글을 읽으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만큼 마음을 준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딴 사람에게 마음 주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유고집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번역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단순히 번역만 하는 게 아니라 큰아버지를 잘 알고 글도 읽어본 분이 맡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문제가 걸림돌이다. 사실 이전에도 한 차례 유고집을 내자는 얘기가 오간 적 있다. 큰아버지 글을 많이 읽은 언론사 문화부장 하던 분이 출판사 대표에게 권유해 추진됐었다. 그런데 원고를 번역하려던 분이 돌아가셨고, 그땐 저도 유고집 내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이번엔 여유를 갖고 차근차근 추진하려 한다. 3년 후면 큰아버지 돌아가신 지 30주년이니 그때쯤 맞춰 나오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선생이 재산을 포기하고 무소유로 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철학적 사색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선조들이 이만한 부를 축적한 만큼 남들은 누릴 것을 못 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큰아버지는 자유인이긴 했지만 책임감은 있었다. 큰아버지가 종손이라 집안의 기대가 컸다. 일찌감치 무소유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도 1950년대 후반에 집을 떠난 것도 그래서다. 그때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당시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 ‘이젠 훌훌 털고 벗어나겠다’는 여운의 문장이 보인다.”

- 철학자이자 문필가, 번역가였다. 그중 어디에 가까웠을까.

“모두 맞지만 사실 큰아버지에게는 평생 소원이 있었다. 기존 위인전이 아닌 역사 속에 묻혀있는 위인들의 전기를 새롭게 발굴해 쓰는 것이었다. 그 꿈을 위해 어렵게 살면서도 청계천 고서점을 다니며 옛날 서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고서적이 족히 1톤 트럭 분량은 됐던 걸로 안다. 가난 때문에 거처를 자주 옮기다 보니 아는 분 댁에 맡겨뒀는데 책들이 사라져버렸다. 필생의 업이 그렇게 됐으니 얼마나 허무했겠나. 그 이후 주로 글씨로 소일했다.”

 


민병산 선생의 서예 소품

 

 

- 생전에 ‘인사동 3전설’로 불렸다고.

“돌아가시기 전 1년 정도는 곁에서 직접 지켜봤다. 큰아버지는 대개 불광동 숙소에서 오후쯤 인사동으로 나와 찻집을 돌았다. 아는 분들과 말씀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즐겼다. 미리 그분에게 어울리는 내용을 써 와서 주위에 건네기도 했다. 큰아버지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유명한 문인들도 큰아버지가 있는 찻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사람들이 버글버글 했다. 그래서 큰아버지가 가는 곳은 늘 명소가 됐다.”

- 아지트나 사랑방처럼 만들었구나.

“그렇다. 인사동 자체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인사동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부분도 예전의 사랑방처럼 모이는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다.”

- 기억나는 선생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큰아버지는 천식을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여러 번 저를 불러서 쉬엄쉬엄 인사동 뒷골목길로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평생 무소유로 살았지만 저한테는 ‘야, 나이 먹으니 조금은 돈이 있어야 하겠더라’고 말한 적도 있다. 큰아버지가 당시 건강이 안 좋기도 했고, 원래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분인데 전시회에 출품된 토기 주전자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 기억이 있다. 제게 ‘내가 죽고 나서도 네가 평생 서각할 만큼 글씨를 써놨다’고도 했다. 그런 장면들이 기억난다.”

- 인간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살아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면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책임한 자유인은 아니었다는 거다. 인사동 분들은 놀랄 텐데, 1970년대에 큰아버지가 고향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어머니를 모신 적이 있다. 물론 서울의 전셋집 보증금도 안 되는 값이었고 그나마도 얼마 안 돼 처분했지만.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집안을 떠나온 몸이었으나 수시로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리고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효자였다.”

한국경제 /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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