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해 주신 덕에 ‘인사동 이야기’ 출판기념전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설치는 때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편치 않은 전시임은 틀림없었다.

한 달 전의 민폐가 체 가시기도 전이라 염치없는 짓이었다.

 

책이라도 좀 팔려는 욕심의 신중하지 못한 결정임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전시안내를 올린 터라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도자료에서 부터 일체의 전시홍보를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일기처럼 매일 올리는 중계방송까지 멈추고, 한 분이라도 알게 될까 전전긍긍한 것이다.

그러나 다녀간 분들의 페북 연결로 알만한 분은 다 알게 되어버렸다.

 

그 벌은 전시장을 지켜는 내내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아는 분이 오시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으니, 고문도 그런 고문은 없었다.

심지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자기가 왜 빠졌냐며 원망하는 지인까지 여럿 있었다.

그래서 정동지에게 맡겨둔 채 전시장 비우기를 밥 먹듯 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한정된 지면에 어찌 다 수용할 수 있겠는가?

11년 전 초판 나올 때 찍은 분도 다 게재하지 못한 상황에서 추가 촬영까지 했으니 쩔쩔 맨 것이다..

하다못해 사진 질에 따라 선정하라며 출판사 편집자에 위임해 버렸다.

 

예전에는 만나는 대로 촬영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친분보다 인사동과의 관계성에 중점을 두어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이 또한 갑 질에 다름 아니었다.

 

내년에 출판될 인사동 책에는 개인 입상사진보다 인사동 행사장을 비롯한

특정 공간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많이 할용해 당시의 현장 이야기까지 곁들일 생각이다.

많은 분이 참여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도 약속드린다.

 

이번 전시로 인해 많은 분들에게 민폐는 끼쳤지만, 더 좋은 책을 준비하는 수업료로 여긴다.

그 덕에 ‘인사동 이야기’ 책도 100여권이나 팔았고, 사진도 여러 점 판매해 손해는 보지 않았다.

 

그런데, 대전에 계시는 사진가 박순규씨는 전시 때마다 먼 길을 찾아주는 것도 고마운데,

마치 자식 챙기듯, 올 때 마다 농산물이나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송구스럽게 만들었다.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전시 첫날인 24일은 ‘유목민’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했는데,

이한성씨가 술값으로 백만원을 술집에 맡겨주는 통에 지난 전시 때와 달리 술값 걱정은 덜게 되었다,

그 날은 조해인, 김수길, 정동용, 김 구, 김제홍, 장경호, 임경일, 이명희씨와 함께 마셨다.

 

그 다음 날인 25일에는 마지막 들린 황정수씨 내외와 한 잔했는데,

먼저 술집으로 안내해 드린 화가 김정헌, 이태호씨도 자리 잡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황정수씨와 사진가 양승우씨가 친하게 된 경위와

서지학자 김영복씨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관계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셋째 날인 26일은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와 조준영씨가 전시장 문 닫을 무렵에 나타나

모처럼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을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에 들린 ‘부산식당’은 방에서 의자로 실내장식이 바뀌었으나

13년 전 찍어 준 조성민씨 사진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마치 부친의 입상사진이 ‘부산식당’ 트레이드 마크처럼 벽면을 지켰다.

 

27일 늦게는 판화가 류연복씨, 사진가 김문호씨, 화가 신상덕씨가 나타나

전시장에서 와인으로 목을 축이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 마시는 중에 신상덕씨와 ‘귀천’에 모과차 마시러 갔더니 목영선씨가 반겼다.

목순옥여사가 운영했던 ‘귀천’을 조카 목영선씨가 물려받았는데,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단다.

다섯 살짜리 아들이 스물여덟의 청년이 된 것이다.

 

28일은 ‘진인진출판사’ 김태진대표가 꽃다발과 축하선물까지 사 오셨다.

오래전 부터 인사동에 관한 출판 계약을 한 상태에서 같은 주제의 사진집 복간 기념전을 열었으니,

죄송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고마운 분이다.

 

그 날은 마지막 들린 화가 이인철씨와 어울려 불편한 마음을 위안했다.

 

전시 철수 전 날인 29일은 최석태, 장경호씨 등 여러 명과 어울려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전시장에선 매일 주눅 들어 지내지만 문 닫기가 무섭게 술집에서 지냈다.

 일주일 내내 술독에 빠지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런데 전시 끝나는 날 이한성씨가 다시 나타났다.

맡겨두고 간 술값이 소진될만하니 다시 찾아 온 것이다.

그 날은 장경호씨 앞으로 술 값 백만원을 맡겨두고 간 것이다.

 

이한성씨는 20여 년 전 인사동 주막 ‘작은뜨락’을 자주 찾았는데,

늘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자선 사업가다.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야박한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분들이 인사동 풍류객의 주체로 버티는 한 인사동 앞 날은 결코 어둡지만 않을 것이다.

 

전시를 철수하는 날은 전시 디피에서부터 마무리까지 도와 준 김진하관장과 한 잔 했는데,

김수길, 전활철, 임경일, 노광래씨와 어울려 마지막 술잔을 들었다.

 

그동안 전시장을 비워 만나 뵙지 못한 분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아쉽지만, 아래 방명록에 적힌 성함이라도 오래 동안 기억하렵니다.

"고마웠고, 미안합니다"

 

조해인, 이명희, 한배규, 석은미, 김인재, 박경하, 이종승, 전강호, 양시영, 박홍순, 노광래, 박상희, 변정대섭,

편근희, 손기환, 전태수, 양상용, 김이하, 정영철, 나종희, 조정애, 김재홍, 황영선, 우문명, 곽숙경, 공윤희,

박옥수, 박서연, 박상희, 박 건, 조경연, 박불똥, 임태종, 서인형, 박태종, 김진하, 박서호, 안정희 ,최인기,

임경일, 안동해, 정동용, 김 구, 김수길, 박은태, 변성진, 박찬원, 성기준, 현영애, 박순규, 최효준, 이종구,

김발렌티노, 이태호, 김정헌, 황정수, 이만주, 김윤기, 최연하, 이규상, 조준영, 최영호, 이기정, 이성은,

김지연, 곽명우, 최태만, 양정애, 최동락, 박종면, 고 헌, 송주원, 전민조, 김문호, 유광식, 신상덕, 류연복,

이승곤, 양재문, 이병진, 김태진, 이인철, 문성식, 박순영, 이한복, 서정란, 임정희, 강찬모, 이상훈, 최석태,

금보성, 하형우, 이태호, 임동은, 고영준, 전활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이야기' 표지 / 눈빛출판사 / 가격 25,000원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이 나와 억지 춘향격으로 전시를 준비하다 보니 인사동을 다시 돌아 볼 기회가 생겼다, 인사동은 서울의 수많은 동네 중에 한 동네에 불과하나 마치 고향 같았다. 긴 세월 예술가들을 만나 정신적 키를 키워 온 것에 비한다면, 오래전에 떠나온 고향보다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사동이 마냥 좋아 때론 아쉽기도 하고. 원망스러워 밉기도 했다. 어쩌면 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어왔듯 인사동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돈에 병들어가는 사람이 미워져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제 돈에 병든 인사동이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가끔 인사동 골목에서 벗들을 만나 회포 푸는 것으로 위안하는데, ‘맛이 간 인사동을 그만 찍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들 말한다.

 

나에게 인사동은 병든 가족 못버리는 것과 같다. 고향이 싫다고 아닐 수 없듯이 인사동은 인사동인 것이다.

 

오랜세월 인사동을 기록해 왔지만, 예술로서 작품을 찍은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니 각양각색이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거리풍경이나 전시장 풍경이 난무했고, 대폿집 정경을 비롯하여 인사동 향취가 묻어나는 사진도 있었다. 때로는 변해가는 인사동의 어두운 모습도 있었다.

 

수 많은 사진 중에서 '인사동 묵시록'이란 주제에 걸맞는 이미지만 골라냈는데, 백남준씨가 ‘예술은 사기다’고 말했듯이 이 또한 사기다. 사람이 별로 없거나 역광에 의해 무거운 분위기의 사진을 고르고 거기다 한술 더 떠 컬러사진을 흑백으로 바꾸었다. 사진을 실제보다 어둡게 프린트하여 흥겨운 놀이를 귀신놀음처럼 음산하개 만드는 등의 조작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게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게 아니더라. 먹고살기 위해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덫에 걸린 것이다.

 

작가라면 자신이 표현하려는 주관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 찍는 게 상식이지만, 기록을 중시하는 사진가라면 편파적인 시선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만약 신문기자가 주관적인 기사를 만든다면 기레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도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달라지고 앵글 선택에 따라 의미가 바뀔 수 있다.

객관적인 기록사진을 찍는 자가 다소 주관적 사진을 골라낸 데 따른 변명을 하다 보니 말이 길어진 것이다. 전시 의도는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인사동의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삭막해 가는 인사동의 그늘이 짙은 것도 사실이고, 망가져 가는 현실에 실망한 시선도 한몫했다.

 

인사동은 긴 세월 많은 사람에게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온 곳이다. 어찌 보면 예술을 공유하는 장터나 마찬가지다. 장에 갔다가 반가운 사람 만나 즐기듯이, 다들 뒷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정 나누어 온 장소다. 혁명을 외치고 사랑과 예술을 노래하며 꿈을 펼친 곳이다.

 

세상 흐름 따라 장터 변하듯 인사동 역시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어가지만 망치는 것도 사람이다. 유명세에 힘입어 관광지화 되다보니 돈맛에 병든 것이다. 예술보다 돈 되는 상품이 인사동을 장악하는 현실은 전통가게와 전시장까지 밀어내고 있다.

 

돈이 무섭고 악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인사동에서 무자비하게 철거된 문화공간 ’코트‘가 대표적인 예다. 전시장을 헐어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계약도 끝나지 않은 곳을 강제 철거했다. 용역업체를 끌어들여 고압수를 살포하며 입주자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했으니, 돈 앞에서는 법도 소용없는 무서운 세상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지만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상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가게나 문화공간이 어려워도 군데군데 버텨나갈 것이고, 예술가들도 작품을 펼쳐 놓고 어느 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담론으로 꽃 피울 거다.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인사동 노래라도 부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번에 출판된 '인사동 이야기’는 11년 전에 나와 절판된 사진집이다. 인사동에서 잔뼈가 굵은 노광래씨가 복간을 추진하다 개정판이 되었는데, 글과 사진을 일부 추가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웠다.

 

내년에 출판할 예정인 인사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준비 작업이기도 하다.

 

전시에 내걸 사진은 인사동의 현실을 말하는 40여점이 주를 이루는데, 책에 없는 사진이 더 많다. 그리고 한 쪽 벽에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상사진 10여점도 내걸기로 했다.

 

주제와 다른 입상 사진을 내건 것은 ‘인사동이야기’의 많은 지면을 인사동 사람들의 입상사진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본래 의도한 책 제목도 ‘인사동이야기’가 아니라 ‘인사동 사람들’이었다.

 

초판에 게재된 분들은 13년 전에 열었던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전에 내 걸었으니, 추가로 촬영한 20여 명 중 일부라도 선보이려는 것이다.

 

각자가 추억하는 장소에서 찍었으니, 인사동의 특정 거리나 공간도 포함되었다. 사실 인사동이란 장소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인사동을 지켜나갈 전사이기도 하다.

 

‘인사동 이야기’ 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124명의 입상사진을 바탕으로 강민시인을 비롯한 43명의 작가가 쓴 48편의 인사동에 관한 시와 추억담이 있고, 인사동 사진도 37점이 중간 중간 들어있다. 책값은 25,000원이다.

 

이 전시는 11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가물거리는 인사동의 부흥을 위해 다 같이 신명난 굿판 한 번 벌이자.

 

사진, 글 / 조문호

 

요즘은 너무 바빠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지경이다.

전시 치루느라 정신 차릴 겨를도 없었는데, 또 다시 전시 아닌 전쟁을 치루어야 할 판이다.

여기 저기 바쁘게 쫓아 다니다보니 반가운 사람도 많이 만났다.

 

어제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으로 교정보러 갔는데, 사진평론 하는 진동선씨가 와 있었다.

둘 다 부산에서 올라 온 처지라 어찌 사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한동안 병원에서 고생하다 살아났다는 뜻밖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사진평론집 출판을 위해 왔다는데,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사진집이 나와 전시까지 준비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16일부터 정영신의 ‘장날’전이 '돈화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24일부터 나의 '인사동 이야기'도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얼마전 노광래씨가 추진한 ‘인사동 이야기’ 복간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현수막 전시 때 싸 잡아 출판 기념회까지 열 작정이었는데,

한 분이라도 더 찍어 제대로 된 개정판을 만들려는 욕심이 문제였다.

 

사진원고가 지체된데다 책 만드는 ‘눈빛출판사’까지 요즘 일손이 모자란다.

출판사 운영이 어려워 파주로 옮긴 후로 이대표 혼자 살림 살아가며 책을 만들어야하니

날짜 맞추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달 하순경 책이 나온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전시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적자를 무릅쓰고 내주는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사진은 못 팔아도, 책이라도 한 권 팔려는 속셈에서다.

 

문제는 전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시에 들어 갈 경비야 차지하고라도, 요즘 몸이 말이 아니다.

보름동안 전시 치루느라 퍼마신 술병 후유증으로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죽지 못해 움직이는 산송장에 가깝다.

 

그렇다고 정동지 돕는 걸 포기할 수도 없지만, 아는 분들 행사도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나?

근 한달 가까이 돌아 다니며 찍은 사진이 첩첩이 쌓였지만 그대로 처박아 둔 것이다.

이미 시기를 놓쳐 포스팅할 필요도 없는 것이 태반이라 정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이 포스팅도 근 열흘 동안의 사진과 이야기를 짜집기 한 것이다.

 

며칠 전 정동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시할 '장날' 사진을 프린트하니 좀 옮겨 달라는 기별이었다.

'스마트협동조합'으로 가보니, 때 마침 김문호씨가 와 있었다.

예술인 등록하는 일이 까다로워 도움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짐부터 옮겨놓고, 서인형이사장과 어울려 전으로 시작해 전으로 끝나는

전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이어졌다.

 

김문호씨는 나를 처음 만난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부산에 계셨던 사진가 최민식선생을 만나러 갔더니, '서울에 있는 조문호를 만나 보라' 했단다.

그래서 이석필, 안해룡, 김봉규, 추연공, 이한구씨등 여러명이 규합하여 ‘사진집단 사실’이란

동아리를 만들었고, 김문호씨와는 충무로에서 같은 사무실을 사용한 인연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튿날은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임’을 운영하는 김선우씨가 녹번동 집으로 찾아왔다.

정동지가 ‘장날’전을 보조할 장터 소품 좀 알아보라 부탁한 모양인데,

어디에서 구했는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골동 가게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있어 깜짝 놀란 것이다.

 

옛날 아리랑 성냥각에서 부터 손저울, 됫박, 체 등 귀한 것들만 챙겨왔다.

김선우씨는 안 되는 게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 무조건 밀어부치는데는 선수다.

늦도록 노닥거리다 아산으로 돌아갔는데, 자정이 넘어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정영신씨와 가을 나들이 겸 장터 촬영을 떠났다.

모처럼 호젓한 시간을 가졌으나, 머리는 온통 눈 앞에 닥친 전시 걱정뿐이었다.

전시할 마음을 먹었다가 취소하기를 여러차례 번복하니,

정동지가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께 전화 걸어 전시할 날을 잡아버린 것이다.

이제 날자가 정해졌으니,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있는 사진 골라 전시하는 건 어려울 것 없으나, 무슨 말을 하느냐가 문제다.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인사동 정체성도 말하고 싶고, 흘러간 풍류도 되새기고 싶고,

암울한 인사동 현실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 등 온갖 욕심만 난무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내년에 마무리할 ‘인사동 풍류 40년’ 출판전 때 하기로 하고,

며칠 동안 한가지에 집중해 사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지난 5일은 아침부터 연이어 연락이 왔다.

제일 먼저 케이비에스 이석재 피디 였는데, 오늘 만날 수 없냐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자리에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다른 방면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분량의 연말 특집이라는데, 시달리는 시간보다 빈민들 내세워 잘 난채 하는게 쪽팔려서다.

동자동 사는 동안 여러 매체에서 요청해 온 인터뷰를 번번이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면한 재개발문제에서부터 고통받는 빈민들의 현실을 알려

개선하는 일 또한 소홀할 수 없는 일이라 ‘동자동사랑방’ 선동수 간사장을 추천했다.

필요하다면 노숙인이나 쪽방 빈민 중에 힘든 사람을 연결시켜 주거나

그동안 찍은 스틸사진은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일단락 지은 것이다.

 

전화 온 바로는 일전에 말한 노숙인 소개도 받고 싶고,

‘노숙인, 길에서 살다’ 책을 샀는데, 사인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빛출판사' 이대표 약속이 내정되어 있어 월요일 오전으로 미루었다.

두 번째는 부산의 함창호씨가 오후 세시경 서울역에 도착한다지만,

그 또한 저녁 시간으로 미루었다.

 

녹번동에 들려 정동지를 태우고 경인선 책거리부터 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진동선씨가 이규상대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이대표가 파주에서 챙겨 온 교정본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더러 이름과 사진이 바뀐 것도 있으나 초판보다 편집디자인이나 내용이 새롭고 알찼다.

인사동에서 50년 동안 리어카 끈 이방웅씨와

‘그림마당민’에서 잔뼈가 굵은 미술평론가 곽대원씨 사진까지 넘겨주고 마무리했다.

 

마지막 교정은 메일로 하기로 하고, 함창호씨가 기다리는 인사동으로 갔는데,

함창호씨는 짐 내려 놓고 온다며 좀 늦겠다고 했다.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이기정, 한상진씨 등 반가운 분이 여럿 있었다.

골목에 앉아 술 마시다 보니, 벽치기 골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정동용시인을 필두로 박건, 김수길, 백승호, 정영철, 황경애, 이인섭선생까지 줄줄이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인사동 주막 골목의 진미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함창호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눈 뒤, 자리를 옮겨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작업하는 주제는 사라지기 직전의 농촌가옥과 사람이었다.

농민들 사진은 입상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기존 사진과의 차별화가 난제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농촌 옛모습은 곧 사라질 우리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한 때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을 찍어사진집을 출판한바 있지만,

20년이 가까워지니 당시의 풍경은 모두 바뀌었고, 사람도 세상 떠난 사람이 더 많다.

내가 찍은 사진이 흑백사진인 반면 함창호씨 사진은 컬러사진이었다.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컬러사진의 리얼리티가 더 강하다.

나 역시 예전에는 흑백사진만 고집했으나, 지금은 컬러사진의 생생함을 더 즐긴다.

함창호씨가 페북에 틈틈이 올리는 사진을 보아 왔는데,

자연이 주는 녹색의 푸르름과 따뜻한 황토색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엇보다 틀에 갇히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화면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다보면 자기만의 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늦게 사진 세계에 빠져들었다지만, 기존 아마추어 사진과는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한 분야에 빠져들어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농촌에 대한 그만의 사진세계가 확립되리라 기대되었다.

 

그나저나,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마시다 보니 주량을 초과해 버렸다.

마침 장경호씨와 함창호씨가 비슷한 연배인데다 둘다 경남고등학교 출신이라

두 사람을 붙여놓고 줄행랑 친 것이다.

 

거지 팔자에 대리기사까지 불러 뒷자리에서 비스듬히 누워 편하게 돌아왔다.

바쁘게 쫓아 다닌 하루였지만, 반가운 분들 만나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 입에 달삭거렸지만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았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이숲’에서 발간한 조문호의 ‘노숙인, 길 위에 살다 죽다’[부제: 쪽방촌에서 보낸 5년의 기록]이 오는 9월 중순경 동시에 출판됩니다.

 

그 사진집 출판과 함께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전시는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리고, 조문호의 ‘노숙인, 길 위에 살다 죽다’는 인사동 벽치기 골목 담벼락과 ‘유목민’에서  9월23일부터 10월4일까지 열리오니 많은 관람과 성원을 바랍니다.

십일 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인사동 이야기’는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다.

인사동 사람들이 기억하는 공간과 인사동 옛 이야기로 엮은 사진집인데, 당시 출판과 함께 인사동 ‘북스갤러리’에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전시기간동안 절반 이상이 팔려 나갔고, 삼사 년 지난 후에는 완전 절판되어 더 이상 구입할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다. 저자에게 한 권 남은 사진집마저 도둑맞게 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다.

 

2015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농동588’전시를 열며 그동안 발행한 사진집을 견본으로 내놓았는데, 그 책이 감쪽같이 사라 진 것이다, 그 당시 전시장을 지키던 공윤희씨가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 사이에 없어져, 입장이 난처해진 공윤희씨가 CCTV를 돌려 본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책을 몰래 가져간 분은 잘 아는 원로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부터 책 도둑과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란 말도 있지 않는가? 그 문제는 두 사람만 아는 영원한 비밀로 묻어버렸다.

 

‘빛깔 있는 사람들’이란 부제를 단 ‘인사동 이야기’는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억하는 공간에서 찍은 입상사진 110여점과 오래된 인사동 풍정사진 40여점, 그리고 인사동을 추억하는 작가들의 글 47편 등 총 244페이지로 구성된 책으로 가격은 20,000원이었다.

 

 

게재된 입상사진 110여점은 2007년 인사동 ‘공화랑’에서 가진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전에 전시한 사진이었다. 뷰카메라로 찍어 한지에 디지털 프린트한 사진인데. 파주 헤이리에 있는 ‘인물박물관’에서 5점, 오산 ‘막사발미술관’에서 4점 구입한 것 외에는 대부분 찍힌 분들에게 실비로 제공하거나 기증하여 제고를 한 점도 남기지 않은 유일한 전시였다.

 

사연이 많은 사진집이지만 절판되어 저자도 갖지 못한 귀한 책이 되어버렸는데, 노광래씨가 인사동 자료를 구하다 알게 되어 개정판을 발간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어려운 출판사 사정을 감안하여 선 구매 독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연락했는지 저자에게 확인하는 전화도 여럿 걸려 왔다.

 

아마 책에 실렸던 분들에게 전화를 한 모양인데,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해 선 구매를 부탁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책이 나왔을 때도 전시 안내 외에는 책 판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어떤 분은 절판된 후에야 책을 구해달라고 안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광래씨를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인사동을 사랑하는 애착에서 책을 다시 찍고 싶어 선 구매를 부탁했을 것이다. 그 책이 복간된다고 해서 노광래씨에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2년 전 ‘진인진출판사’와 새로운 인사동 사진집을 출판하기 위해 계약까지 해둔 상태라 다른 곳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음 달 ‘노숙인’사진집이 나와 마무리되면 새 인사동사진집에 매 달릴 작정이었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하여 새 책 제작에 올인 해야 할 절박한 사정이나, 노광래씨의 열성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재판을 찍으려면 그대로 펴 낼 것이 아니라,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부사진을 추려내고 인사동과 관련 있는 분 중에 누락된 분을 추가로 촬영하여 개정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광래씨가 몇몇 분들에게 연락하여 촬영 스케줄까지 잡아 두었다.

 

오늘 오전 노광래씨를 만나 인사동에 사진 찍으러 따라 나섰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박복신 대표와 방귀식씨를 만나 차 한 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늦게 ‘명신당’ 필방 이시규씨와 섬유공예가 최정인씨도 만났다. 오늘은 세분을 촬영했는데, 꼭 들어가야 할 박재동씨와 김진하씨도 연락해야 할 것 같다. 촬영스케줄을 잡아야 할 텐데, 워낙 바쁜 분들이라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인사동 추억을 불러내어 삭막해 가는 인사동에 봄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오래전 인사동 전시와 출판에 관련된 기사를 모아두었다.

https://blog.daum.net/mun6144/405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진전문출판사인 ‘눈빛출판사’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무실을 외곽으로 옮겨가고 유일한 직원이었던 성윤미씨가 그만두고 이규상대표가 북치고 장구치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초판 천부 찍던 사진집이 오백부로 줄어들었고, 그마저 엄선해서 출판해야 한다니 33년 전통의 출판사가 고사 직전에 몰렸다. 안 팔리는 다큐멘터리 사진집만 냈으니, 여지 것 버텨낸 것만도 용하다 싶다.

 

사진출판사로서 오로지 한 길을 걸어 온 '눈빛출판사'의 궤적은 한국사진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정작 보아야 할 사진인들이 책을 사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젠가 유명 사진가의 집을 방문하여 서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국내에서 출판된 사진집은 보이지 않고 비싼 수입서적만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러면서 '눈빛출판사'에 자신의 사진집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650여종에 이르는 많은 사진집을 출판했으나 베스트셀러 한 권 없다.

프랑스 사진가 크리스 마커가 북한 모습을 담은 사진집 '북녘 사람들'이 3,000부 팔렸고, 이경모선생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이 1만부, 김기찬 사진집 '골목 안 풍경'이 7000부 정도 팔린 것이 대박 친 사진집에 속한다.

 

만약 ‘눈빛출판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을 수 없는 불모지에 뛰어들어 온 힘을 기울여 온 ‘눈빛출판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다큐멘터리사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역사와 삶의 흔적을 남기려는 투지가 없었다면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 개인 파일에서 잠자다 잊혀 지거나 사장되었을 것이다.

 

‘눈빛출판사’는 긴 세월동안 다큐멘터리사진을 발굴하여 출판해 왔고, 역량 있는 신진작가를 배출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분야인 다큐멘터리사진을 부흥시켰다. 그 고마운 출판사를 위해서보다 사진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사진집은 사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대중성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몰락은 사진가 스스로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사진집 출판에 이변이 생겼다. 이강산 시인이 준비한 사진집 ‘여인숙’이 선주문 형식으로 진행된 ‘텀블벅 펀딩’에 283명의 후원자가 몰려들어 천 팔백 육십 만원을 후원했다고 한다. 물론 그중에는 사진인도 있었겠지만,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집 출판에 전례가 없었던 일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를 겨냥한 서적은 꾸준히 잘 팔린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곤충사진가 이수영씨의 곤충사진집에서 나오는 인세는 그가 작업하는 경비뿐 아니라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도 꾸준히 들어온다고 했다. 그 뿐 아니라 이십 년 전 정영신씨가 글을 쓰고 정영신씨 사진으로 유성호씨가 그림을 그린 ‘시골장터 이야기’(진선출판사)는 23쇄에 이를 정도로 꾸준히 팔리는 품목이다. 6개월간의 판매부수를 정산한 인세 백여 만원이 지난 7월에 보내왔다는데, 정영신씨에게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책이다. 다큐멘터리사진집으로 그런 수익을 얻는다는 것은 요원한 꿈일까?

 

작년에는 정영신씨가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선정되어 작업비를 지원받았으나, 2차에서 탈락하여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게 될 ‘어머니의 땅’ 사진집제작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운이 없는 출판사다. 나 역시 그동안 작업해 온 노숙인은 책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해 출판하자는 제안은 커녕 꿈도 꾸지 못했는데, 우연히 ‘이숲’출판사에서 출판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의외의 출판계약으로 편집까지 마무리한지가 오래되었지만, 서둘 필요는 없다고 했다. 책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책으로 하여금 노숙인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기에 지원 없는 출판은 무의미했다. 적어도 찍힌 사람에게는 책 한 권씩이라도 전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출판사에서 지원 신청한 ‘노숙인’이 종이책 부분 우수출판물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집이 나오는 9월23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전시를 한다는데, 나도 꼽사리 끼어 인사동거리에서 가두 전시를 할 작정이다. 일반인은 전시장에서 놀고 노숙인들은 거리에서 노는 잔치판을 한 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 기대하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금요일 서초동 한정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선생의 연락을 정영신씨가 받았는데, 찾아 뵌 지가 석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선 집에 불이 나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오랜만에 뵈어 그런지 안색이 좋아지셨다. 

전에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는데,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또 하나 외형상 달라진 것은 제자 이일우씨가 사 주었다는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그 날은 가까운 식당들을 두고 자동차로 이동해 ‘늘봄’이란 고급 식당으로 안내했다.

얇게 자른 생고기에 야채를 곁들어 먹는데, 처음 먹는 음식이라 입 맛에 맞지 않았다.

 

선생께서도 귀가 어둡지만 나 역시 귀가 어두운 편이라

정영신씨가 통역을 해 주었는데, 선생께서 맛이 어떠냐?고 물었단다.

“촌놈이라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는데, 정영신씨가 통역을 잘 못했다.

“아주 맛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이 건 무슨 죄목으로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 날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작년 가을에 발간한 한정식선생의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단다.

그리고 새로 나온 사진집 ‘가을에서 겨울로’도 선물하셨다.

일전에 경의선 책거리에 있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에서 얼핏 보기는 했으나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사진이 주는 울림이 선생의 오랜 주제였던 ‘고요’보다 큰 것 같았다.

 

일 년 전 사진을 보여 줄 때만해도 스물 장으로 사진집을 만드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사진은 량이 아니라 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집을 보면 쓸데없는(마음에 들지 않는)사진이 많아 대충 보게 되는데,

엄선된 사진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 사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책에 게재된 사진이라고는 열여덟 장뿐이고 글도 많지 않았다.

 

“가을이어서 쓸쓸한 게 아니라, 쓸쓸해서 가을임을 느낀다.

그리하여 내게는 봄도 가을이었다. 봄만 아니라 여름도 가을이고,

심지어 가을조차도 가을이었다.“

 

이 말이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에는 경허스님 시로 대신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 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 손가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짧은 글이지만 선생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가을에서 겨울로’사진집 가격은 3만원이다.

한정식 선생의 마지막사진집이며 소량 한정본이라 소장할 가치가 높다.

 

사진을 보니 아옹다옹 다투고 욕심 부리며 살지만,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법문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코로나로 답답한 세상을 산지가 이년이 넘었으나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다들 외출을 자제하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나 책은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엔 책이 잘 팔린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하기야!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인터넷에서 뒤져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신문 한 장 보지 않는 판에...

 

지난 8일 오후 여섯시 무렵 정영신씨와 함께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이 있는 ‘경의선 책거리’에 갔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가 올라 오셨는데,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와 사진가 김문호씨도 와 있었다.

격리기간 중에 약속한 일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두고 기다린 날이었다.

 

모처럼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는데, 전시장 아닌 책방에서 만나는 기분은 또 다르다.

새로 나온 따끈 따근한 사진집을 살펴보는 설레 임을 알랑 가 모르겠다.

초딩 때 방학 책 받아보는 그런 기분 말이다.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이고 서양화가인 고)김영태선생의 '초개일기'가 서거14주기를 맞아 나왔고,

마지막 사진집이 될지도 모르는 한정식선생의 ‘가을에서 겨울로’도 눈에 밟혔다.

 

힌두교사 깊이 읽기/ 이광수 지음 푸른역사/ 2만 5000 원

이광수교수로 부터 ‘푸른역사’에서 펴낸 ‘힌두교사 깊이 읽기’란 책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 책은 힌두교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책인데,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힌두교부터 알아야한단다.

힌두교를 모르는 불교 공부는 반쪽짜리라는 말에 더 관심이 생겼다.

불교가 인도의 역사에서 태어나 항상 힌두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했기 때문이란다.

 

이광수교수는 정치평론에서부터 사진평론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해박하지만,

국내 유일의 힌두교사 전공자로 부산외대에서 인도학을 가르치고 있다.

너무 많이 알아 구라나 글 빨이나 아무도 당할 자가 없다.

오죽하면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부르겠는가?

 

책 1부에서는 '힌두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2부는 힌두교 형성 과정의 역사를 통해 힌두교 기원을 찾았다.

힌두교가 체계화되고 불교가 발생하는 과정을 살펴 본 것이다.

3부에서는 힌두교가 세 가지 전통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과,

힌두교의 구동 장치로서 바르나(카스트)를 분석했다.

 

뒤이어 힌두교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관용 그리고 관용과 뗄 수 없는

박해와 개종이 힌두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구명했다.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힌두교가 형성되고 변화해 온 모습과 성격을

인도사의 흐름에 따라 역사학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상상으로 그려진 힌두교에 힌두교 본연의 색을 입혔다“는

'푸른역사' 신간 ‘힌두교사 깊이 읽기’를 강력 추천한다.

 

그리고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경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임대료가 비싼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있는 지금의 사무실을 없애고 파주로 옮긴단다.

이제부터 사진집 출판도 엄선해 줄여나가야 할 처지라는 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진의 대표출판사인 ‘눈빛출판사’가 이럴 진데 군소출판사야 어찌 버티겠는가?

책 사보지 않는 풍토는 사진집을 펴내야하는 사진가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

다들 필요한 책들을 살펴보고, 이제부터라도 책보는 것을 생활화했으면 좋겠다.

 

길거리는 많은 젊은이들이 오갔지만, 책거리에 널린 책방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규상씨 따라 ‘경의선’이란 술집을 찾아갔다.

다섯 명이라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모처럼의 정겨운 자리였다.

술도 담배도 자가 격리 후 보름 만에 맛보는 터라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고기 굽는 데는 따를 자 없는 김문호씨가 구운 삼겹살로 입 호강을 했는데,

술만 취하면 나이 값을 못하는 내 버릇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어찌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뱉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즘처럼 남자 수난시대에...

또 하나 신기한 것은 흡연자가 별로 없는 판에 네 사람 모두 골초라는 점이다.

밖에서는 피우고 안에서는 마시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차로 간 ‘홍대포’집에서는 주량을 초과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술김에 간크게도 택시를 불러 세웠는데, 거침없는 말에 삐쳤는지 정동지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