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간다고 마시고 경자년 온다고 마신 연말 술로 몸이 말이 아니다.
동자동과 녹번동을 오가며 이부자리 감고 살았던 셈이다.
오래된 년식이라 몸이 삭아 철철하는데도, 겁 없이 마신 벌이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해가 바뀜에 따른 스스로의 자책이었다.
안 좋은 건 모조리 씹어 돌렸으니, 사람을 많이 잃었더라.
잘 못된 것을 고치고 싶은 말이었지만,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이다.
상대의 마음만 다친 것이 아니라, 내 마음도 다쳤다.
그래서 올해 다짐한 것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보는 습관이다.



지난 토요일에 나선 인사동 외출은 일주일 만이었다.
점등식 한 태화관 터의 ‘3,1독립선언광장’을 재확인할 일이 있어서다. 
나간 김에 인사동을 다시 살펴 볼 속샘도 있었다.

포기했던 인사동이지만, 부정적 시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보고 싶었다.
가는 세월을 누가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안국역 4번출구로 나가니, 한 젊은이가 큰 소리로 구걸했다.
“선생님! 천원만 주세요~. 누님! 천원만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주지 않았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고 너무 상습적인 냄새를 풍겨서다.
이젠 구걸을 해도 연기를 잘해야 얻어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많이 나와 거리는 활기찼으나, 골목은 한산했다.
‘인사마루‘의 신나는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다.




연세 듬직한 분이 드나 들었던 ‘통인가게’에 젊은이들 행열이 이어지는 걸 보니,

이 곳도 서서히 세대교체가 되는 것 같았다.




요즘은 인사동 나와도 전시장에 들리지 않으니 갈 곳이 없다.
반가운 인사동 사람을 만나거나, 전시장에서 작품 감상할 일이 아니라면 인사동이 무슨 소용이랴?




통기타나 마술로 행인들의 관심을 끄는 버스커도 다들 열심히 놀며 살아가더라.
태화관 터 골목어귀에 있는 헌책방이 그나마 옛날 인사동 냄새를 풍겼다.




지난 년 말  ‘3,1독립선언광장’ 점등식에 갔으나, 밤이라 자세히 보지 못해 다시 찾은 것이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비스듬한 광장 바닥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광장 바닥을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미끄러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광화문광장’으로 행선지를 바꾸려 ‘부산식당’있는 '인사동11길'로 접어드니,

한 동안 부푼 기대와 안타까움을 차례로 안겨 준 ‘아라아트’가 눈에 들어왔다.
김명성씨가 전관을 전시장으로 만들어 공 들인 건물인데, 결국 중국 자본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넓은 전시관에 ‘미래의 꿈, 게임에 담다’는 한 가지 전시만 열리고 있었다.
잠시 지난 날의 회한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인사동과 사연이 깊은 사진가 김수길씨 였다.




술 한 잔 하자며 유혹했건만, 그 날은 술이 무서웠다.
'광화문광장' 갈 일로 아쉽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사동을 돌아 다닌 두 시간 동안 아는 분이라고는 김수길씨 딱 한 사람 만난 것이다.




조계사 앞 길에서도 아는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나는 치매환자다.
이제부터 인사동의 오래된 추억은 물론, 악연도 잊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13일 연극 연출가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아니라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전갈에 괜히 쫄았네.

주인공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와 언론인 윤상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비가 내리다 멈춘 인사동 길은 은행잎이 떨어져 보도블록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발 걸음에 밟혀  은행 터지는 소리조차 정겨웠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가니, ‘유담커피숍에 김명성씨가 기다리고 있었.


 

 전활철씨의 안내로 유목민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춘천의 유진규씨가 나타났다.

뒤 이어 김상현씨와 조해인씨가 왔고, 나중에는 김수길, 이인섭, 최일순씨도 만났다.

기국서씨 훈장 덕에 반가운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귀한 훈장 술이라 술은 술술 넘어갔으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

매년 30명이나 훈장과 상을 주면서 기국서씨를 왜 이제 주었을까? 

기국서씨 수훈도 공적에 비해 늦지만, 유진규씨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리고 문화훈장은 상금도 없는데다, 아무런 혜택이 없다고 했다.

무공훈장처럼, 사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특혜도 없지 않은가.

금붙이가 아니라 전당포에도 잡혀주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밥 먹지 않고 명예만 먹고 사나?

대개의 예술가들이 가난하게 사는, 도움 되지 않는 훈장이 무슨 소용인가.

정부에서 주는 훈장이 이 모양이니, 신문사에서 주는 문화대상도 상금 한 푼 안 주는 곳도 있다.

상으로 작가를 우롱하고 장난 치는 곳이 많으니, 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관객모독이 아니라 훈장모독이란 연극도 무대에 올려야겠다.


 

몇 일전에는 '이중섭미술상' 받는 정복수씨 시상식에 갈 일도 있었지만

주관하는 조선일보가 꼴 보기 싫었다. 어찌 치욕적인 사옥에 발 디딜 수 있겠는가?

그 곳에는 상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권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

일억을 상금으로 내놓은 '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이 더 좋은 상으로 친다.


 

훈장에 초치는 소리 집어치우고, 술자리 이야기나 해야겠다.

그 날의 화제는 70년대 시절 이야기가 많았는데, 명동 심지다방을 비롯한 다양한 추억담이 나왔다.

그 당시는 부산에 살아 귀를 곤두세우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말짱 도루묵이네. 


 

조해인씨는 영화 도둑들에 출연한 기국서씨의 연기가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장면들이 너무 인상 깊었는데, 기국서씨는 연출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명성씨는 몇 일전 무세중씨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는데,우리 상복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 했단다.

그렇기야 하지만, 한복이라면 모르나 흰 양복이 어울리겠는가? 전통장례를 두고 다들 서양식 장례를 택하니 어쩌겠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유진규씨는 어머니 임종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곁에 누워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갑자기 말씀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잠 들듯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는데, 이보다 행복한 임종이 어디 있겠는가?


 

70여 편의 창작으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씨 문화훈장 수훈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번 수훈이 창작활동의 결실인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계기라고 입을 모았다.


    

기국서씨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며 늦도록 축배를 들었다.

기분좋게 만취한 것은 좋으나, 버스타고 졸다 종점까지 가버렸네.

 

사진, / 조문호
















김수길사진















김수길사진

















조해인사진




















 

 





 니가 회 맛을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다.

사진가 김수길씨, 시인 조해인씨와 함께 복에 없는 횟집에 간 이야기다.

네 사람이 회 한 접시를 남겼는데, 상대를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있는데, 김수길씨가 나오라고 했다.
은평구 주민끼리 만나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나왔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난, 주말만 녹번동에 오지만, 그마저 정선 가거나 없을 때가 많다.

마침 하루 전날 조해인씨와 연락이 되어 만나기로 작정했던 터다.

그것도 집 가까이 있는 최원호병원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나가 기다리니 조해인씨는 역촌역 방향에서, 반대 방향에서 김수길씨가 나타났다.

내가 역촌역 부근의 사정을 잘 알아 어디로 가면 좋겠냐고 물었지만, 좀 난처했다.

여지 것 따라가기만 했지 내가 주동이 되어 음식점 안내한 적도 없지만,

상대방 음식 취향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평소 정영신씨와 외식할 때도 실랑이하지만, 결국은 내가 따라간다.

늘상 뭘 먹을까?”하고 물어오면 사모님 드시고 싶은 곳에 가시죠  이런 식이다.

사실, 짠맛이나 매운 맛 같은 강한 맛을 제외한 예민한 맛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것저것 가리고 않고 남 따라 먹는 잡식성이 되어버렸는데,

어찌보면 맛도 제대로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다.

 

더구나 틀니를 끼면 더 맛을 알 수 없다.

맛은 혀로 감지해, 틀니 때문에 맛이 없다는 말은 기분에 의한 것이라지만,

실제 끼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일 뿐이다.

아무리 혀로 맛을 안다지만, 입안에 돌덩이가 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니 맛인지 내 맛인지 분간되겠나?


 

내가 잘 가는 곳은 짜장면 한 그릇에 2,500원이고,

제일 비싼 게 5,000원하는 역촌동 기사식당이지만, 그 곳은 술을 팔지 않아 안내할 수 없었다.


결정을 못 하니, 어디서 보았는지 회집 이야기를 꺼냈다.

정영신씨가 회를 좋아해 한 두 차례 따라갔지만, 별로 탐탁치는 않았다.

아마 김수길씨가 날 생각해 각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안내했다.



조해인씨는 술 끊은 지가 두 달 가까이 되었으나, 그 때까지 춘향이처럼 지조를 잘 지켰다.

나 역시 병원 다니느라 술 마시지 못한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갈보처럼 지조를 팽개쳤다.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듯이 술 술 넘어갔다.

김수길씨 조차 평소 말이 적은 양반이라 주거니 받거니 술만 홀짝였다.

김수길씨가 친구 김일남씨를 불렀으나 마찬가지였다.


 

김수길씨는 정영신씨도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싸웠냐고 물었다.

싸운 게 아니라 요즘 노출되는 것을 꺼려 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싫어해서다.

여자들은 자기 얼굴에 예민하기도 하지만, 주변 지인 중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이혼했으면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지 모르겠다.

대충 짐작하는 년인데, 걸리면 가랑이를 찢어 버릴 작정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찍지만 상대를 배려해 가능하면 예쁘게 나온 사진만 쓴다.

두 번 찍어 그 중 예쁜 사진을 고르고, 그것도 본인이 싫어하면 즉각 내린다.

더러는 찌그러지거나 요상한 표정의 포트레이트만 즐겨 찍는 사진가도 있더라.

예술사진은 찌그러져야 하는가? 제발 남의 얼굴가지고 장난치지마라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갈 일이 있다.

어제 지방에 있는 잘 아는 사람이 페북에 댓글을 달았는데, 별 것 아닌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난, 그 양반이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내 글을 쭉 읽어 잘 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런 거야 있을 수 있겠으나, 처음으로 댓글 달며 충고하는 식이었다.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는 등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며, 뒤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오랜만에 할 소리도 아니지만, 포스팅한 내용도 댓글과 상관없는 동자동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말을 엉뚱한데 풀어 놓은 것 같았는데, 오래 전의 악연으로 생각하기도 싫어 페친을 끊어버렸다.



 

사실, 긴 세월동안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살아왔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 실없는 소리까지 해가면서...

그러나 내 뜻과는 달리 돌아서서는 욕하며 바보 취급 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더러운 세상이 되었고...

 

다들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지, 댓가도 없이 사진을 부탁하고 사진도 그냥 사용했다.

대개 아는 사람들이라 그냥 넘어갔는데, 오죽하면 40여 년 동안 열심히 사진 찍어 거지처럼 살겠는가?


 

그래서 마누라와 이혼하고 쪽방에 들어가며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잘 못한 것은 그냥두지 않고 바로 잡겠다고 나섰다.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남은 세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좆되고 싶으니 

더 이상 씹소리 하지마라.


 


페친 끊은 놈 이야기하다 열 받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술자리가 재미없으니 조해인씨는 살아생전 마광수씨의 숨겨진 이야기를 술안주로 내놓기도 했고,

얼마 전에 인사동에서 전시한 소설가 이외수씨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당시 사정이 있어 개막식에 가지 못했는데, 조해인씨가 이혼한 부인도 왔더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나도 정영신씨와 이혼했지만, 정영신씨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지 않던가?

나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결혼이란 틀 자체를 깨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난 본래부터 음식을 많이 먹지 않지만, 다들 회를 먹지 않았다.

소주 안주로는 얼큰한 매운탕이 더 좋았는데, 비싼 회집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결국 그 회를 싸가지고 정영신씨 갖다 주었지만, 돈만 쓴 김수길씨에게 미안했다.

 

난, 돈 맛도 모르는데다 음식 맛까지 모르니, 끝난 인생이다.

그래도 아는 맛이 하나 있긴한데, 알랑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2018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의 “가을 봄 여름 그리고 겨울”이
이화마을 일대와 ‘아지트문화갤러리’에서 내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지난 9일 방문했으나, 늦장 부리다 뒤늦은 소식이 되었다.






사진가 김수길씨가 2010년부터 이 전시를 기획하여 참가하고 있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동안 도시재생 문제로 지역민들의 갈등이 시끄러웠으나, 이화동 낙산마을 자체를 처음 가 본 것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물어물어 낙산공원으로 향했는데,
마로니에 공원에는 젊은이들의 거리공연이 흥을 돋우고 있었다.
도보로 약 10~15분 거리라, 산책하기 좋은 코스였다.






이화동은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 카페, 공방, 호프집, 식당 등 다양하게 들어서 있었다.
여기 저기 조형물과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다, 성곽길이라 분위기가 좋았다.






천사 날개가 그려진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도 있고,
도처에 옛날 교복을 걸쳐 입은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산 모양이 낙타를 닮아서 ‘낙타산’으로도 불리는 낙산공원은 옛 모습대로 복원한 성곽 따라 역사 탐방로가 이어져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일품이었다.






벽화마을에 관광객이 몰려드는데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몰래 벽화를 지우거나
붉은 페인트로 휘갈긴, 마을 관광화를 반대하는 글귀도 보였고, 계단에 그려진 벽화를 지운 흔적들도 역역했다.
마을 재개발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부 갈등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2006년 서울시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진행한 ‘낙산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화동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 따라 그려진 벽화와 계단 위 그림은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의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알려져 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으나,
동네 사는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인 ‘가을 봄 여름 그리고 겨울“전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열렸는데,
이화동 삶의 이야기가 빨래 줄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사진가 김수길씨를 비롯한 출품작가들의 사진이 저 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김수길 작



낙산마을페어 뿐만 아니라 “낙산실빛음악회”도 열렸고, 대학로에서는 서울아트마켓 국제공연예술제도 열리고 있었다.
사람사는 이야기인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는 내일까지니, 일요일 데이트 코스나 산책 코스로 이화동을 정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진을 감상하고 있으니, 반가운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김수길씨가 나타났고, 조해인시인도 왔더라.





김수길씨가 차린 술상에 목을 적시기 시작했는데,
‘아지트문화갤러리’ 관장인 양한모씨와 “ART & SHARE" 대표 김영기씨도 만났다.






양한모씨가 직접 갈아 준 커피에다 중화요리까지 골고루 영양 보충한 하루였다.
늦게는 인천 사는 권양수씨가 나타나 심심찮게 만들었다.
사진가 김수길씨 덕에 낙산 구경 한 번 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수길작


김수길작



김수길작


김수길작




양한모작



김수길작























사진가 김수길씨가 응암동에 “순간포착”이 아닌 “순간포차”를 차렸더라.
지난 3일, 송추 전강호씨 집에 가을소풍 갔다 오며 이차로 들린 술집이었다.
김수길, 공윤희, 민영기씨 등 몇 명이 둘러앉아, 송추에서 모자란 기름을 ‘순간포차’에서 보충하였다.
뒤늦게 조해인, 박진관씨도 나타났는데, 나만 ‘순간포차’를 몰랐던 것 같았다.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전형적인 선술집이나 통술집 스타일인데, 가뿐하게 한 잔 하기 딱 좋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민병산 선생 조카 민영기씨로 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인사동 사람이라면 한두 장 쯤 다 갖고 있는 민병산 선생의 글씨였다.
아들 조햇님 결혼식을 미처 몰랐다며, 전해주라는 결혼선물이었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선생은 세상을 훤히 읽고 있지만, 평소 별 말씀이 없으셨다.
붓 글씨 또한 얼마나 좋은지, 추사선생께서 계셨다면 아마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다.
자유롭고 거침없이 몰아가는 바람 같은 획들이, 쓰 놓고 나면 얼마나 조형적인지,
한 눈에 반할 글씨였다. 항상 괴나리봇짐에 잔뜩 넣고 다니며 나누어 주셨다.


선생께서는 달라고 말만 하면 거침없이 주었지만, 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주지 않았다.
싫어서도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하는 것 같아 차마 주지 못하신 것 같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토록 많은 글을 쓰서 나누어주셨지만, 나는 한 장도 받지 못했다.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 못 받았는데, 어떻게 귀한 작품을 그냥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민영기씨가 내놓은 민병산 선생의 붓글씨 내용을 보니,
김삿갓처럼 떠돌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봄 새벽’이란 시였다.
살아생전 그 글을 인사동 ‘귀천’에서 쓰시는 것을 보고 탐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글씨를 삼십년 만에 만났으니, 그 인연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달라지 않은 너는 가질 자격이 없으니, 자식에게나 주겠다는 것 같다.
그 시를 곱씹고 곱씹으며 민병산 선생님을 그린다.

“봄날 혼곤히 잠들어 새벽을 느끼는데
여기저기서 새 울음 들려온다.
지난 밤 비바람 사나웠기에
꽃잎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아누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9일은 사진가 정영신씨와 함께 김수길씨 사진전이 열리는 인사동 ‘나우갤러리’를 찾았다.

전시장엔 사진가 김수길씨와 민병제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영신씨의 작가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작품들을 살펴보니 마치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고분의 벽화를 대하는 듯 했다.

리얼리티보다 미적 요소들이 두드러진 사진 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내포되었으나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여러 장의 필름이 겹쳐진 추상적인 이미지는 오래된 희미한 기억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작가의 사적인 기억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이 때로는 낯설기도 하지만, 작가의 사색적 고백처럼 다가왔다.






10여 년 동안 같은 작업만 반복해 온 김수길의 '시간 지우기'는 개인전만도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 그의 사진을 접했을 때는 비 사진 적이라는 느낌이 앞섰으나, 이 또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한 형식임에 틀림없었다.

중첩된 각각의 필름마다 기록된 시간과 특정 장소가 존재하고 있으니, 한 장소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구체화된 것 아니던가. 

그러나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보기가 주저해 지는 것은 사실적인 기록성보다 미학적 관점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을 하기 이전에 음악과 영화에 심취했고,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작가였다.

그러하니 기록적 관점보다 미학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결과로 여겨진다.





욕심 같아서는 사진에 저장된 구체적인 기억의 데이터가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월과 함께 작업이 농익게 되면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는 그만의 시각언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같은 장소를 시기별로 찾아다니며 변해가는 공간을 기록하였다.

사라져가는 도시의 단면을 한 편의 영화처럼 엮어내고 있다.





그의 작업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감성이라 못 박을 수 없는 것은 엄연한 기록적 현실이 존재해 있고,

그 일련의 작업은 작가의 고뇌와 삶의 파편들이 응축된 데이터베이스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로지 한 눈 팔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를 고집해 온 '시간지우기' 작업은

누가 뭐래도 김수길표 기록법이며 이야기법이다.






지난 14일 오후5시에 가진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는 사진인보다 인사동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영준씨의 시 ‘사육된 비둘기’가 기타 음율에 실려 낭송되기도 했다. 






이순심 나우갤러리 관장을 비롯하여 소설가 배평모, 시인 이영준, 김낙영, 화가 장경호, 김 구,

무용평론가 이만주, 유카리관장 노광래, 사진가 권양수, 인사동을 사랑하는 공윤희, 유진오,

이일용, 민병제, 손인수씨 등 많은 분들이 함께 하며 전시를 축하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나누었다.


김수길의 '시간을 지우다'전은 인사동 '갤러리 나우'(02-725-2930)에서 21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수길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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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 조준영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인사동 좋아하는 사람들 얼굴 한번보자는 전화였다.
그러자는 답은 했으나, 몸이 피곤해 한 숨만 자고 갈 생각 이었다
한 시간만 자고 가려했으나, 그만 깊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전화벨에 눈을 떠보니, 조준영씨 였는데, 오고 있냐는 거다.
시계를 보니, 지금 쯤 도착했어야 할 일곱 시였다.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지금 지하철 타고 가고 있다고...






도착하니 조준영 시인을 비롯하여 뮤지션 김상현, 사진가 김수길, 연극배우 이명희,
화가 장경호, 유목민 주인장 전활철, 박혜영, 유진오, 공윤희씨 등 대략 열 명 쯤 모여 있었다.






전활철씨가 갖다 준 깔치조림에다, 허급지급 밥부터 먹었다. 살아남으려고..
한 잔 한 조준영시인의 목청 높은 소리가 밥숟가락 사이로 흘러왔다.






“박근혜는 뭘 모르는 바보지만, 이명박이는 진짜 나쁜 놈입니다.
그 놈은 돈 밖에 모릅니다. 억지로 잡은 대권도, 대권보다 이권이 먼저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난,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더 나쁜 것들은 언론이라 생각한다.
명색이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어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무슨 득 좀 보려고, 쉬쉬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수의 국민은 언론이 바람 잡는데로 찍은 것이다.
“얼마나 분하겠느냐? 내 손가락으로 찍은 대통령이 저런 바보였고,
저런 도둑놈이었다는 것이...

” 씨발! 찍은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정치이야기 하면 열 받으니까, 가요반세기로 돌아갔다.
임희숙의 ‘진정 난 몰랐네“로부터 남인수의 ’비나리는 호남선‘에 이르기까지
김상현씨의 애절한 노래가 슬펐는데,
갑자기 아마추어 가수 전활철씨가 나타나 ’청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오랜 울분이 치솟았다.






술자리에서는 아가리 닥치고, 남의 이야기나 듣다가,
술 취하면 조용히 사라질 것을 스스로 약속해 살며시 빠져 나오니,
화가 장경호씨의 술 취한 행복한 노래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친구 생각난다

그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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