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운 화백이 청운을 꿈을 안고 상경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가깝다.

그가 화단에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71년 구상회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다,

그리고 데뷔한 지 10년 만에 중앙미전에서 특선을 받으며 재 부상한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시련도 따랐다.

 

박통 때인 1970년대 말에는 독제에 항거하는 ‘현실과 발언’에 합세해 혼이 난적도 있다.

정의감을 억누를 수 없어 참여했지만, 그가 표적이 된 것이다.

 

어리숙한 이화백을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그를 납치해 무려 50일이나 감금해 버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출감하자 말자 낯설고 먼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가 주로 그렸던 그림 소재는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 바닷가 풍경이었다

애수에 젖은 풍경들은 질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둡지만 서정적인 바다가 바로 이청운의 그림 세계다.

 

그가 아프기 전에 부산 청사포로 화실을 잠깐 옮긴 적이 있었다.

비릿한 바닷가 추억을 떠올리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항상 10년이라는 변곡점이 따랐다.

병마와 싸운 지도 이제 10년이 가까워오니, 곧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먼지 덮인 미완의 작품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지난 20일, '청운이형 병문안 가자'는 연락을 김명성씨로부터 받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다 몸도 편치 않았지만, 누워만 있을 일은 아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며 가지 못했으니, 그를 본 지도 3년이 넘어 버렸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 응암역에 내렸는데,

약속 장소인 서부경찰서 앞에는 김명성씨와 조해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뒤이어 송상욱, 김영복, 전활철씨가 줄줄이 나타났다.

 

화실에는 부인 이상랑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긴 세월동안 간병하느라 고생해서 그런지, 곱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대조적으로 이청운씨는 동자 같은 미소를 띠며 반갑다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청운 화백이 지병으로 자리에 누운 지도 어언 십 년이 가깝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제 이청운 화백도 변할 때가 된 것 같다.

살신성인,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아내 덕이지만,

미완의 그림을 두고 눈감지 못하는 이화백의 절박함도 더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처음 병문안 갔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소연 했는데,

소망을 이루고 싶은 집념에 십 년을 버텨낸 것 같다.

병상에 누워  곳곳에 걸린 미완의 그림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구상과 고민을 했겠는가?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 미완의 그림에 혼을 불어넣을 때다.

 

털고 일어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구상한 것을 에이 아이가 완성케 하면 안될까?

 

어두운 잿빛 화실의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래된 자화상 같다.

이젤은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봇대 같기도 하고,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든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뒤 늦게 뮤지션 김상현씨가 등장했다.

그 역시 중병으로 투병하는 처지지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힘들게 찾아온 것이다.

전에는 아코디온을 메고 와 셀브루의 우산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때가 생각났는지, 청운의 표정은 아쉬운 감이 역력했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상현씨 역시, 힘들어 악기를 가져오지 못한 심정이 어떻겠나?

 

물감이 짓이겨져 걸려 있는 팔레트 행렬도 정겹고,

이젤에 기대어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등대 또한 얼마나 불을 밝히고 싶겠는가?

모든 게 정지된 풍경이지만, 그 자체가 이청운의 삶이고 색깔이었다.

 

김명성씨는 이청운 미완의 작품 전을 열겠다고 말하지만, 안쪽에 누운 이 화백 들을까 걱정되었다.

긴 세월 눈 감지 못한 이유가 뭔 데, 자존심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들 화실에서 나왔지만 그냥 헤어질 수 없어, 서부경찰서 후문 쪽에 자리 잡은 마포나루로 갔다.

푸짐한 갖가지 해산물이 나왔는데, 인사동 낭인들 술자리에 어찌 소리가 없을소냐?

‘부용산’으로 시작한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흘러간 노래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들였다.

 

'내 이름은 순이' 라는 노래인데, 가사 내용이 대폿집 작부의 신세타령이었다.

"내이름은 순이랍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에레나예요. 그냥 그냥 십팔번으로 통한답니다

술이 좋아 마신 술이 아니 랍니다. 괴로워서 마신 술에 내가 취해서 고향에 부모형제 내동생이 보고파 웁니다.

그 날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뜬소문도 거짓이예요"

 

오랜만에 듣는 송상욱선생 노래도 흥겹지만, 술상 두드리는 젓가락 반주가 더 죽였다.

 

사진, / 조문호

 

 

 

모처럼 이태원의 ‘Mu/art’를 방문했다.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니지만, 잘 가지지 않았는데,

그날은 시간이 일러 그런지, 상현씨와 후배 한 명뿐이었다.

 

암 투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해 온 그가 다시 수술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들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수술은 잘 된 것 같았다.

 

음악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같았다.

 

아직 입가 수술 상처가 남아 말조차 어눌했으나,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 솜씨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구성지고 더 슬펐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김상현을 응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27작성]

친구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게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나 마음 편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어려운 일에 득달같이 나서 줄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개인주의로 치달으며 친구 만나는 기회도 점차 줄어들고,

만나게 되어도 물질문명에 찌들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러나 고향 친구는 다르다.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얼굴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곰삭은 정이 있잖은가?

신경림시인은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말했다.

 

얼마 전 서울 사는 고향 친구 수만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고향 동창들이 12일 여정으로 서울관광 오는데, 함께 할 수 있냐?' 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기로 작정했다.

 

월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지만, 이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참가비가 20만 원이라며, 낼 수 있?고 묻기에

문디 코구멍에 마늘 빼 먹지라며 핀잔을 주었다.

부자 친구도 많은데, 이럴 때 기분 좋게 안 쓰면 어디다 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돈이 아까워 어떻게 죽을까? 

 

거지는 안 받기로 했다지만, 만찬 후 이차 술값은 내가 낼 생각이었다.

마침 인사동5길에 있는 '센트마크 호텔'에 방 다섯개를 예약해 두었다기에

유목민에서 술 한잔 살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누가 기획했는지 궁금했다.

종석이 더러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냐고 물었더니, 자기란다.

돈은 죽고나면 아무 쓸모 없다며 즐겁게 살자는 취지였는데.

수식이와 의논했더니, 일사천리로 추진하더라는 것이다.

 가이드는 서울 수만이가 맡아, 책임지고 일정을 짰단다.

정말 잘 한 일이라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인사동에서 시작하여 경북궁, 청와대, 광화문, 청게천,

롯데월드, 한강유람선 등 시골 노인네들 관광코스야 뻔했다.

몇 년 전 정선 귤암리 노인들 관광왔을 때 다녔으나, 지금은 그 때와 사정이 다르다.

 청와대가 새로 생긴 볼거리지만, 아무래도 친구들과의 마지막 상면일 것 같았다.

팔순을 눈앞에 둔 노인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고향을 지키는 영산 친구를 비롯하여 서울, 인천, 부산,

그리고 광양 사는 친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지난 7일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서울역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지만, 마음은 바빴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대기하는 사람만 점점 늘어났다.

기다릴 특정 장소를 지정하지 않아, 이산가족 찾기보다 더 힘들었다.

열차 탈선사고로 오가는 열차가 모두 연착이라는 안내방송만 흘러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무심했으면, 전화번호 아는 고향 친구가 이수만 뿐이었다.

그는 찾아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아, 다음 집결지인 인사동으로 옮겨야 했다.

 

종각역에 도착할 무렵에야 대합실 2층에 있다지만, 아무래도 길이 엇갈릴 것 같았다.

호텔에서 막연하게 기다리다 다시 전화 걸었더니, 시간이 늦어 오찬 장소로 바로 가야 할 것 같단다.

 

시간이 남아 인사동에서 경복궁을 둘러 삼청동으로 갔는데,

오찬 장소로 정한 ‘삼청동 수제비집 앞에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 줄을 서서 수제비를 다 먹어도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다면 다시 서울역으로 갔어야 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죄 없는 담배만 연신 피우고 있으니, 그때 사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탈선하여 두 시간이나 연착되었다지만,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 그런지 더 반가웠다.

영산초등학교 45회 동창생 중 세상을 떠난 친구도 많지만, 사정이 있어 못 온 친구도 있었다.

 

영산에서는 신수식, 조대권, 김종석, 김공조, 이석중, 신규식씨가 왔고,

정대식, 김옥선은 부산에서, 조성호는 광양에서 왔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김이만, 김순남, 하금순, 김상현, 윤성관,

이수만, 구정희 등 다들 얼마 만에 만났는지 모르겠다.

 

이 사진은 5년 전 영산에 모인 동문들 기념사진이다. 그동안 이렇게 늙다니...

무정한 세월 속에 나만 늙은 게 아니라, 모두 늙어 버렸다. 

 

쌓이고 쌓였던 그리움이라, 코끝이 찡하며 눈물까지 어른거렸다.

죽을 때가 되어 그런지, 작은 일에도 감동하며 눈물이 많아진다.

친구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수제비 먹을 동안 또 다시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며 피운 담배가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 아침에 산 담배인데...

 

다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청와대 관광부터 나선 것이다.

신수식이 잘 아는 국립고궁박물관장의 도움으로 청와대 입장도 비교적 수월했다.

북악산 아래 똬리 턴 청와대 자태는 웅장했다.

 

청와대 중심 건물인 본관은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을 위한 공간이다.

 

그곳에는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 사진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으나, 살인마나 사기꾼도 걸려 있었다.

당선만 되면 죄를 지어도 두고두고 대통령 대우를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정한 동선 따라 관람할 수밖에 없었는데, 넓고 웅장한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 다음은 해외 국빈을 맞거나 대규모 공식행사가 열리던 영빈관을 들렸다.

1978년에 지어진 이곳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받드는 형식의 건물이었다.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빈 방문 시 공연과 만찬 등을 열던 곳으로

100명 이상의 대규모 회의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다.

 

조선 왕실의 불노장생을 기원하는 불로문을 거쳐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청와대 소정원에 있는 불로문은 16세기 말 조선 숙종 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과 가족이 사는 주거공간이다.

생활 공간인 본채와 접견장인 별채, 그리고 우리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등산로의 작은 연못 앞에 조성된 화단도 아기자기했다.

 

그 다음에 들린 '인왕실'은 소규모 연회와 기자회견장으로도 사용되던 장소였고,

'충무실'은 임명장을 수여하거나 회의를 여는 장소였다.

 

그리고 '상춘재'는 국내외 귀빈에게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또는 비공식 회의를 진행하던 곳이다.

 

'춘추관'은 기자 회견과 출입기자들의 기사송고실로 사용된 공간인데,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역사기록을 맡은 관아였던 춘추관에서 비롯되었다.

 

가는 길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녹지원'도 보였다.

대정원에서 국빈 행사가 많았다면, 녹지원은 주로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 곳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침류각'도 둘러 보았다.

침류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본래 경복궁 후원에 있던 북궐의 부속 건물이란다.

 

이외에도 통일신라 석불좌상인 미남불도 있고,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

5색 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 '오운정' 등, 못 들린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건물보다는 넓은 주변 경관이 더 아름다웠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아름다운 북악산 일부를 독점하고 살았다는 건 너무하다.

때 마침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두 번째 행선지인 경복궁을 가기 위해 신무문을 통과하려니, 관람이 끝날 시간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도착시간이 지연되어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경복궁 대신, 만찬장인 경복궁으로 이동해야 했다.

 

경복궁은 인사동 센트마크호텔입구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음식이 정갈하다.

그곳 만찬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그 비용을 서울 김상현이 계산했다.

모처럼 흥겨운 술자리가 열렸는데, 옆자리에 김공조가 앉았다.

그 많은 친구 중에 담배 피우는 친구가 공조뿐이라 조가 맞았다.

 

김공조는 영산 구계목도 보존회회장이고, 김종석은 보존회 회원인데,

며칠 뒤 창녕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41회 민속예술축제

창녕군 대표 팀으로 출전하여 경연을 벌인단다.

 

신수식이 이끌어 가는 영산줄다리기

조대권의 영산쇠머리대기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구계목도만 지정되지 않아 서러운 것 같았다.

 

구계목도’가 민속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으나

이번에 열리는 도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야 경남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단다.

12일 경연대회 마지막 순서로 출전한다기에, 행사장에 찾아가 응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몸살로 드러누워 공수표를 날리고 말았다.

뒤늦게 '구계목도'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장한 일을 해냈다.

친구야! 다 같이 축배를 들자.

 

이차를 가기 위해 유목민의 전활철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그날이 쉬는 날이란다.

만찬장까지 찾아와 술값 보태라며 20만원을 줘, 고맙기 그지없었다.

신수식의 딸 정화와 사위까지 찾아와 만찬장에 금일봉을 전달했다.

 

일이 생겨 함께 하지 못한 남이우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몸이 많이 불었더라.

한때는 대한항공중역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정년퇴직하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다들 손자 재롱이나 즐기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아니던가?

 

이석중은 마산 초등학교 선생으로 정년퇴직 했고,

김종석은 부산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하다 정년퇴직 했으니, 연금 받아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김종석의 아내가 부산에서 살아, 혼자 구계리에 돌아와 '구계목도' 전승에 힘을 보탠다고 했다.

 

친구들이 조성국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문화 전승에 애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

이것이 영산의 자부심이다. 영산 사람이라면 그 자부심 다 안다.

 

그나저나 술자리가 파하니, 이차 보다 청계천에 가잖다.

술 취한 노인들의 청계천 나들이는 볼만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딱 맞다.

물 위에 비친 불빛이 아름다워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돌다리를 건너 다니며 낄낄거리는 등 신났다.

 

다들 호텔로 돌아와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호텔에서 잘 형편이 아니었다.

카메라 충전도 해야 하고 메모리 포맷도 해야 하는데, 장비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김공조와 함께 자기로 했으나, 몰래 빠져나와 동자동으로 갔다.

콧구멍 만한 쪽방이지만, 내 집이 호텔보다 훨씬 편했다.

가자마자 뻗었는데, 눈떠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충전할 시간이 없어 잘 쓰지 않는 라이카를 들고 간 것이다.

 

이미 친구들은 호텔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바삐 청진동 해장국으로 갔더니, 다들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장국에다 소주 몇 잔 들어가니, 어제 기분으로 바로 돌아갔다.

 

거지가 라이카를 메고 있으니, 사진 하는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 카메라는 고향 후배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라고 자랑했으나,

 컴펙트 카메라인 니콘 coolpix P310’이 훨씬 편하다.

카메라는 장식이 아니라 손에서 자유롭게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수만김상현도 사진을 찍지만, 각자 가는 길은 다르다. 나는 사람을 찍고 그들은 풍경을 찍는다.

처음엔 아마추어와 어울려 풍경이나 찍는다며 한심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인지라, 사는 동안 즐기며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좋아하는 풍경에 취해 인생을 즐기는것 처럼, 작업은 놀이가 돼야 하는 것이다.

 

2-30년 전 이수만이 정선 만지산 집에 놀러와 하룻밤 묶은 적이 있다.

구들장 바닥에 틈이 생겨 벌건 장작불이 방에서 내려 보이는

 궁상맞은 방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시장철 피어나고 온 국민이 다 찍는 꽃 풍경보다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옛집을 찾아 찍으면 어떻겠냐? 고 권한 적이 있었다.

문화도 양반 문화가 판친 역사라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집들이 사려져

누군가 그 기록을 좀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그 뒤로 일체의 친구사진을 보지 못했으니, 지금은 어떤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인사동 툇마루에서 우연히 만난 이수만

이 친구는 성균관대에서 정년퇴직했는데, 한번은 친구 덕을 본적도 있다.

오래 전 인사동 크라운베이크리 이층에 있던 민사협사무실에 갔더니

콧수염 김영수씨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들 영보가 성균관대에서 등록금 거부운동을 주도해, 잘릴 처지라는 것이다.

수만이 에게 부탁하여 등록금 갖다주고 무마되었는데, 인연이란 묘하게 연결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롯데월드타워'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갔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이 지하철로 움직이기는 좀 소란스러웠다.

동화책에 나오는 돼지 새끼 소풍처럼, 줄로 엮어 다녀야 할 판이다.

 

종각역에서 타고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는데,

늙은이 들의 무임승차라 괜히 젊은이들 눈치 보이더라.

말은 안 하지만, ’노인네들이 집에서 티브이나 보지, 왜 몰려다니냐?‘는 듯 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높다는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다.

123층에 555미터의 높이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지만, 롯데 신회장의 고집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높은 곳에서 느끼는 아찔함과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요기야 되지만,

아직도 적자에 시달려, 마천루의 저주를 답습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사무실 공실률이 너무 높아 계열사로 채워 겨우 땜빵을 한다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겹쳐 호텔 사업까지 힘들기 때문이다.

워낙 손해가 크다 보니, 다른 초고층 빌딩 계획이 축소되거나 변경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롯데월드타워'가 그곳에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가?

긴 세월에 걸쳐 비행항로까지 바꾸어 가며 어거지로 이루어 낸 것이다.

신격호회장 숙원사업이라 살아 있을 때 완공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회전초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돌아가는 접시가 다 돈이라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은 김이만은 청주 한 병을 시켰는데, 거기다 소주까지 시킬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청주 마시고 혼 난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청주 청자만 들어도 취한다.

기어이 술 한잔 줄여주지 못하고 혼자 다 마시게 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음 행선지인 여의도나루로 가기 위해 네 사람씩 모여 택시를 탔는데, 김이만이 핸드폰을 흘린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핸드폰에 꽂힌 카드가 열 개나 된다는데,

왜 카드를 전부 갖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돈 자랑이 아니라 카드 자랑인가?

 

다급해진 이만이가 택시에서 내리자, 구정희도 따라 내린 것이다.

이만이가 술도 취했지만, 구정희는 군장교 출신이 아니던가?

치밀하게 일을 해결하는 대는 일가견이 있다.

 

시골 노인네들의 한양 나들이에 꼬이는 일도 많았다.

어제는 열차 빵구로 두 시간이나 헤매게 만들더니,

김이만에 이어 조성호도 사고를 쳤다.

할마시 셋을 뒤에 태우고 앞자리를 차지한 성호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도 다른 좌석에서 술을 한 병쯤 마신 모양인데,

왜 금실 좋은 부부처럼 금순이를 끼고 디니던 규식을 따돌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택시 기사 더러 여의도나루가 아니라 잠실나루로 가자고 한 것이다

 

잘 못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유람선 탑승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들은 유람선이 돌아올 때 까지 여의도 나루에서 기다려야 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할마시들 한테 뒷머리가 다 뽑혔을 텐데,

다시 고문받아야 할 운명의 장난이었다.

 

광양에서 올라 온 조성호는 오래 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릴 지경까지 갔으나.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간신히 걸음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예능에 다양한 재질이 있었다.

음악에 빠진 줄 알았는데, 한국화도 그렸다더라.

아직도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인의 길이나 다름없다.

 

지팡이가 있긴 하지만, 걸어서 서울 구경하기란 만만찮을 것이다.

거기다 하금순까지 성한 몸이 아니라 화장실을 연락부절로 다녀야 했다.

세상에! 친구 볼려고 그 아픈 몸을 끌고 먼 길을 왔다니, 어찌 눈물 겹지 않겠는가?

자판기 두드리다 눈물 흘리는 것도 난생 처음이다.

 

나는 신수식, 이수만과 같은 택시를 탔는데,

수식이가 두 곳의 사정을 일일이 연락 받아, 마치 우리 택시가 작전사령부 같았다.

그러나 택시 요금 올라가는 걸 보니, 가슴이 콩닥거려 죽겠더라.

마침, 엊저녁에 유목민’ 전활철이가 주고 간 돈 봉투가 생각나 회비를 냈더니, 난색을 표했다.

회비라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마지못해 받았지만, 자기 호주머니에서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돈의 가치를 떠나 가슴이 따뜻해지더라. 이게 사람 사는 정이다.

 

한강 유람선 이랜드 크루즈엔 신수식을 비롯하여 조대권, 이석중, 이수만, 신규식,

김종석, 윤성관, 김상현, 정대식 등 아홉 명만 승선하여 한강 유람을 했다.

유람선을 타려면 밤에 탔어야 서울야경이라도 즐겼을 텐데,

승무원 잔소리 들어가며 갑판에 둘러앉아 캔맥주나 마시는 억지 춘향의 뱃놀이였다.

그것도 캔맥주 하나에 오천원이고 컵 하나에 오백원 하는 바가지를 쓰가며...

 

다행히 김이만과 구정희는 핸드폰을 찾아 다음 행선지인 광화문광장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택시 세 대에 나누어 타고 광화문으로 이동했는데, 이제 서서히 막 내릴 준비를 했다.

바뀐 광화문광장을 둘러보고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토속촌에 마지막 식사하러 간 것이다.

 

삼계탕에다 인삼주까지 마셨는데, 잘 먹어야 하루 두 끼 먹는 놈이 세끼를 먹었으니, 배가 놀랠 지경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 인생 졸업사진을 찍었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날 광양 사는 조성호가 전라도 여인 예찬론을 폈는데, 김상현이도 두 며느리가 모두 전라도 여자라네.

신랑은 물론 시댁에 그렇게 잘 한다며 며느리 칭찬에 입이 말랐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함평댁 정영신 동지를 보면 알지 않겠는가?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셈표간장이라 칭찬하다 더러 혼나기도 하지만...

 

사실, 경상도 사내들은 정나미 떨어진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경상도 사내들이 밤늦게 들어오면 아내에게 하는 말은 세 마디 뿐이다.

"밥 뭇나?" 먹었어요. "아는?" 잡니다. 자자! ...

웃을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처럼, 그런 사람 많았다

말이 좋아 무뚝뚝이지, 요즘 여자들 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차례대로 일어나 그동안의 소회나 좋은 말을 한마디씩 했는데,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 자리에서는 고맙다는 인사밖에 못했지만, 우짜던지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

 

시골 내려갈 친구들과 구정희만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 조성호 누님도 나왔더라.

배웅나온 고향 선배와 잘 가세요. 잘 있어요손 흔들어가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끝으로 친구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슬퍼 할 것이 아니라 축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된 삶을 끝낸 영혼이 승천하는데, 울긴 왜 울어? 박수 쳐야지...

 

가끔 아는 분이 돌아가셔도 차마 축복이란 말은 꺼내지 못하지만,

지난 사진이라도 돌려보며 다시 만나지 못할 그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십여 년 전에 남자 알몸을 찍어 실물 크기로 출력하여 세우는 영정 작업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신체발언이란 택도 아닌 제목을 붙였지만, 그 사진은 당사자가 돌아가시면 영정사진으로 내 걸기로 했다.

초상집에 온 문상객도 마음껏 웃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목욕탕에 가면 당연히 옷을 벗지만, 왜 다른 곳에서 벗어면 난리를 칠까?

영혼이 가볍게 날아가려는데, 뭐가 그리 보기 싫은가?

상갓집을 잔치집으로 바꾸려는 계산도 깔렸지만, 다 생각의 차이다.

 

초상집에서 꽹과리치고 춤추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세상의 풍습이나 법까지 통치자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 너무 많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정남규와 이종문의 장례는 너무 늦게 알거나,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제 신나는 잔치를 열게 될, 내 차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정선 있을 때부터 사후에 있을 일을 정동지에게 다짐에 다짐을 해 두었다.

농주 걸러 가마솥에 고깃국 끓이고, 술 마시고 노는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사물놀이가 체질에 안 맞으면, 노래방 기계라도 갖다 놓으라고 했다.

 

이제는 정선 집이 불 타버려, 내년에 옮기게 될 아산에서 치룰 작정이다.

시신은 화장하여 그 부근에 묻으면 그만이다.

 

친구야~ 내 죽었다는 소리 듣거들랑 꼭 놀러 오너라.

축의금도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화끈하게 한 턱 쏠게...

나의 십팔번 '봄날은 간다'도 라이브는 안 되지만, 동영상으로 보여 줄 작정이다.

그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자주 만나자.

 

사진, / 조문호

 

(이틀에 걸쳐 찍은 사진이라 너무 많네요. 필요하신 분은 살펴보세요.)

 
 

 

 

2021.9,23

지난 23일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전이 막을 올렸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도 ‘유목민’ 담벼락에 내 걸어, 옛말처럼 떡 본 김에 제사지낸 것이다.

현수막전은 서울역이나 동자동에서 해야하지만 책을 팔기 위한 이벤트였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전시였으나 허리 통증이 심해 병원부터 들렸는데,

환자들이 많은데다 물리치료까지 받느라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핸드폰을 두고 와 정영신씨와 연락을 할 수 없었는데, 끝나고 가니 떠나고 없었다.

 

부리나케 전시장으로 달려갔더니, 아산 공유공간 ‘마인’ 김선우씨와 양햇살, 김온 군이 와 있었다.

사진가 전제훈씨는 일찍부터 왔으나 문이 잠겨 한 참을 기다렸단다.

마침 사진집을 가져온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와 계셨다.

 

아산 팀의 도움을 받아 ‘유목민‘ 담벼락에 현수막부터 설치했다.

아침 식사를 못해 전제훈씨와 '툇마루'에 갔다 오니, 그때부터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 보러 오신 분들이 현수막 전에도 들려 ‘유목민’ 골목은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해야 할 즈음이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신용, 조해인, 김이하, 김명성, 김상현, 함창호, 조준영, 노광래

김문호, 장경호, 김수길, 김발렌티노, 최인기, 김종준, 윤 관, 이택근, 강기식, 조경석, 이두엽, 한상진,

김 구, 나종희, 노영미, 이상근, 이광군, 임경일, 최명철, 김효성, 서인형, 김성은, 김재홍,

이인섭, 김진하, 이창수, 이한복, 김영진, 곽명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

 

난처하게도 ‘뮤아트’ 김상현, 김병수씨 일행은 악기를 가져 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를 축하 한다지만 옆에 노숙인 사진이 걸려 있는데...

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내세워 잔치 벌이는 꼴이 된 셈이다.

흥겨운 음악이 아니라 애잔한 슬픔이 깔린 음율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신경이 곤두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시간을 보냈는데, 끝난 후 나온 술 값이 한 달 생활비가 넘었다.

허구한 날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참에 술 한 잔 대접한 것이다.

그나저나 술집 앞에서 열리는 전시라 끝나는 날까지 살아 남을지 모르겠다.

 

멀리서 와 주신 전제훈, 함창호씨를 비롯해 온 종일 일을 도와 준 아산 '마인'팀,

그리고 전시를 축하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선우촬영

 

 

 

지난 주말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전날 밤 인사동 이야기원고도 마무리해 넘겼고,

노숙인, 길 위에 살다현수막 전에 사용할 사진도 골라

정영신씨께 넘겨주려 녹번동으로 찾아갔다.

 

주말 쫑 기념으로 정영신씨와 와인이나 한잔할 생각인데,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니, 이게 왠 난리냐?

그날이 생일이라며 여기저기서 꽃바구니가 날아오고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페북 창을 도배했다.

본인도 몰랐던 생일인지라 깜짝 놀랬다.

 

사실, 나는 태어난 자체가 부끄러워 생일을 싫어한다.

예전에는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았으나 정영신씨를 만나고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제일 싫어하는 음식인 미역국을 먹어야 하고

부담스러운 선물도 받아야 했다.

 

요즘은 페이스북까지 나팔 불어 동네방네 소문 다 내버린다.

그 수많은 축하 인사에 일일이 답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 되어버린다.

조용히 살기 힘든 세상인 것이다.

소통하기 위해 페북에 가입한 자업자득인 것을 어쩌겠는가?

 

미끌미끌한 미역국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어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이태원의 김상현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도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사 온 빵과 식혜를 술안주로 한 잔하고 있는데,

이번엔 조해인 시인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생일 케잌까지 사 와서는 촌스럽게 촛불까지 켰다.

정영신씨는 이제부터 나이가 한 살이라며 초를 하나만 켜네

한 살짜리 어린애로 취급하겠다는 심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아무 일도 안 해도 되고 젖도 빨려주겠네.

그나저나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도대체 몇 살인가?

며칠 전 김발렌티노가 같은 띠 동갑이라며

꿀꿀이 행님이라고 했으나 계산이 잘 안 된다.

 

낮술에 취해 뻗어 잤는데, 자고 일어나니 날 새버렸네.

우왕~ 생일이 가버렸잖아.

정영신씨 하고 오붓하게 쫑 파티 하려던 것도 물 건너갔고

기념으로 하려던 한 살짜리 퍼포먼스도 불발로 끝났네.

뒤늦게 한 말로 요즘은 육 개월 지나면 젖 안 물린다네.

 

, 한 살짜리 개구쟁이가 분명한데, 몸은 자꾸 늙어가니 이 일을 어떻하나?

이제 내 나이 철없는 한 살로 돌아왔으니,

행여 어리광을 부리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라나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김신용 시인이 인사동에 뜬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목민에 출몰하는 디데이는 7일 오후 네 시로 잡혔다는데, 아마 손님 없는 낮 시간을 택한 것 같았다. 

마치 간첩 접선 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구신들 모이 챙기느라 좀 늦었는데, 한 낮의 술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김신용, 김명성, 조해인, 장경호, 김원명, 노현덕, 김수길 씨가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있었는데, 마치 이산가족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뒤늦게는 김상현씨와 안원규씨도 왔고, 딸 같이 예쁜 소녀 조은영, 박지수양 까지 합류했다.

김신용씨는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하며 잠적했으니 근 이년이 가까워 온다.

 

그동안 월북한 게 아니라 시작에 몰입했다고 한다.

이사도 두차례나 했다는데, 다음 달엔 다시 홍제동으로 온다고 했다.

돈 벌려고 이사를 자주하는 복부인과는 달리 빈자의 설움이다.

한 편으론 사는 환경에 따라 시적 대상도 새로워 질 수 있겠더라.

 

이 얼마만의 인사동 유민들의 만남이며 얼마만의 술판이던가?

그동안 수행하듯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니, 몸은 좋아진 것 같았다.

 

그런데, 김신용씨가 몸만 온 게 아니라 새로 낳은 시집 .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를 챙겨왔다

 시가 전과는 달리 짧아졌는데, 시처럼 시집도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았다.

 

 

김신용의 아홉 번째 시집에는 90여편의 짧은 시가 실려 있었다.

시의 대상이 자연적인 사물과의 대화에 집중되고 있었는데,

서사적 구조에 중점을 둔 종전과는 달리 함축된 미학적 탐미가 두드러졌다.

'백조출판사'에서 펴낸 시집 가격은 9,000원인데, 갖고 다니며 읽기 딱 좋았다.

 

김신용 시인은 1988년 무크지 현대시사상양동시편-뼉다귀집6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밑바닥 인생인 지게꾼으로 살며 버려진 사람’, ‘개 같은 날들의 기록등을 발표한 대표적 노동자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기며 시도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하잘 것 없는 사물과 대화를 나눈 도장골 시편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몸으로 부딪힌 시에서 감성으로 부딪힌 시로 바뀐 것이다.

 

그동안 장편 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를 비롯하여

산문집 저기 둥글고 납작한 시선이 떨어져 있네등을 발표한바 있다.

문단의 주목을 받아 온 김시인은 '천상병시상', '노작문학상'도 수상했다.

 

김신용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더 이상 입 아픈 소리는 그만두고

시집에 실린 시 안개’나 맛보기로 소개하련다.

 

안개 자욱한 봄의 들녘에서

경운기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안개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다.

이제 곧 햇살의 작은 새 떼들이

안개의 심장 속을 날아올라

아침을 깨우리라

 

박형준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맑게 빛나는 사물의 영혼과 손을 맞잡은 느낌이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이런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숨결 같기도 하고 이슬 같기도 한 이 아련한 따뜻함이 정겹다.

김신용의 시는 작고 여린 사물이 서로 맞잡은 손에 가만히 쥐어준 손수건 같다.

옹이, 풀잎, 이슬, , 수박, 목화씨 등 쓸모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해준

위로의 힘 덕분으로 나는 그대와 처음 손잡고 걷던 그 길을 다시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길에 그때의 벤치가 남아 있다면, 사물들의 영혼이 건네준 손수건을 깔고 함께 앉아

그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의 살아온 숨 냄새를 맡고 싶다.“

 

다른 때 같았으면 출판을 기념하는 잔치가 떠들썩했을 텐데,

이 미친놈의 코로나가 무서워 간첩 접선하듯 만난 것이다.

시집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로 위안한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불러주는 축가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조용히 살자고 명세에 명세를 하였건만, 술만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다.

막힌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건, 노래가 아니라 피 토하는 각혈환자의 절규였다.

 

술과 안주는 또 얼마나 푸짐했으면, 아무리 먹고 마셔도 계속 나왔다.

그 술값은 긴 세월 인사동 유민들을 챙겨온 김명성씨가 냈다.

그 역시 형편이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제 버릇 개주지 못한다.

 

헤어질 때도 하나하나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졌는데,

은밀한 접선이라 은밀하게 헤어졌다.

 

지하철을 탔으나,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핸드폰에 미쳐 있었다.

시집을 꺼내 보고 싶어도 꼰대로 보일까바 참았다.

 

머리에 박힌 고드름시 한 편을 되뇌어 보았다.

물이 되어 흘러내리다 문득 걸어 온 길 되돌아보는,

저 서늘한 눈빛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이태원에서 이전개업을 준비하는 김상현씨를 찾아갔다.

신사동 ‘뮤아트’ 가게를 비워주고 이태원에 다시 가게를 얻은 것이다.

 

이태원 공사 현장에는 혼자서 가게를 정리 하고 있었는데,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러나 코로나가 4단계로 격상되며 개업도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가게 임대료만 물어야 할 판이다.

 

실내장식을 살펴보니 너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신사동 가게에 붙어있던 사진 한 장 버리지 않고 모두 그대로 옮겼더라.

 

긴 세월 벽에 붙여두었다 떼어내면 망가질 수도 있을 텐데, 하나도 망가진 게 없었다.

그 자료는 30여년을 끌어 온 ‘뮤아트’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바닥 장식도 일품이었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 신선감이 일었다.

보여 준 공사현장에서의 공연 동영상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김상현씨는 의지의 뮤지션이며 불굴의 사나이다.

이태원에서 신사동으로, 신사동에서 이태원으로 옮겨온

30여 년의 세월이 녹녹치 않았다.

 

영업 장소라기보다 뮤지션들의 공연장으로서 의미가 더 컸다.

손님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메니아들로 한정된 회원제였으니까...

 

그동안 ‘뮤 아트’를 거쳐 간 가수나 연주자도 헤아릴 수 없지만,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페스티벌을 가져왔다.

 

그런데, 비싼 가게 임대료와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말은 안 해도 그 사정은 보나마나다.

그동안 문 닫기 직전에 이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럴 때마다 의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니, 아마 천직인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암에 걸려 투병까지 했으나 그마저 털고 일어났다.

 

음악에 미쳐 산 인생이 힘들기는 했으나 행복했을것 같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처럼,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하루속히 코로나가 꺾여 ‘뮤 아트’ 음악이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길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만봉 스님 기일이라는 전활철씨 연락을 받았다.

 

만봉스님 자제분인 이인섭선생께서 생일과 기일이 되면 매번 지인들을 불러 모아 오찬을 베푸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직접 재워두었다가 구워주는 소갈비 맛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가끔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다. 솔직하게 말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 번도 가지 못해 이번엔 만사를 제쳐두고 봉원사로 달려간 것이다.

 

입구에 걸린 고색창연한 ‘만봉불화전시관’이란 현판이 반겼는데, 안쪽에는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김명성, 안영희, 안완규씨등 뵌 지가 오래되어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님들이 선물로 위스키나 와인을 가져왔는데, 스님 기일에 양주와 갈비 파티가 어울리지 않지만, 인사동 주객 이인섭선생의 오랜 전통이니 널리 양해하시길...

 

다른 분들이야 가끔 인사동에서 만나지만, 만봉스님 제자였던 안영희씨는 너무 오랜 만 이었다.

예쁜 모습은 여전하지만, 곱게 나이던 주름을 보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끌고 와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다른 분들도 이른 낮이라 그런지 좋은 술이 남아돌았다.

 

이인섭선생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전활철, 김명성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보러 간다는 전활철씨를 영천시장에 내려주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 판화전시 보러 간다는 김명성씨 따라 나섰지만, 나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지난 번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겨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철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관객이 제법 있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전시였다. 판화의 진면목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이만한 기획전을 어디서 보겠는가?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김명성씨는 김억씨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태원에서 실내장식 중인 뮤지션 김상현씨를 만나러 갔다.

이제 ‘뮤아트’ 신사동 시대를 끝내고 다시 이태원으로 복귀한 셈이다.

 

공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약50여 평 되는 공간에 공사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신사동 ‘뮤아트’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될 것 같았다.

 

‘이태원 이모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했는데, 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재미있었다.

 

생각에 따라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주 화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김명성씨가 이승만에 의해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의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는데,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던 ‘조선의혈단’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서찰을 많이 찾아냈다고 한다. 얼마나 독립운동사에 빠져 몰입하는지, 좋아했던 여자 잊은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선 집에 불난 이야기도 나왔는데,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소송을 위한 비용은 화가 박건씨가 페이스북에 올려 들어 온 후원금 천만 원으로 우선 추진한다는 말에 김명성씨와 김상현씨도 보태겠다며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옆집의 뻔뻔하고 얄팍한 속내도 얄밉지만, 나에게 제일 중요한 필름 원본이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손해배상 규정에 맞서기 위해서다.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으나 마음은 편치않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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