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준씨 자당 임화녀씨(83세)가 지난 10월31일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평소에 지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식사를 한 후, 속이 매스꺼워 체한 줄 알았다고 한다.

날이 밝으면 병원 갈 작정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병원 가려다 심경경색으로 운명하셨단다.

 

처음 119를 불렀더라면 회생하실 수 있었을텐데, 얼마나 애석하겠는가?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의 입장으로서는 통탄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보를 받은 상주 고영준씨가 태국에서 돌아오는 일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밖에 없는 비행기를 어렵사리 탔으나, 검역으로 공항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절차를 마치고 장례식장을 찾아오니, 발인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람 모이는 곳은 잘 가지 않지만, 고영준씨 상가에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영준씨는 오래 전부터 동생처럼 지낸 가까운 지기인데다, 자상한 모친을 두 차례나 뵌 적이 있었다.

 

부음을 받은 지난 1일 오후 일곱시 무렵에서야 장례식장이 있는 상계백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상주 역시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해 염하러 갔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고영준씨 부친이 살아계신다는 것도 그 날 처음 알았다.

평소 가족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 홀어머니 슬하에 자란 줄만 알았다.

장례장식장에서 아버님 고동석씨를 처음 뵙게 되었는데,

갑자기 당한 사연에 기가 막히는 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즉각 병원에 못 데려간 것이 얼마나 한이 되며,

혼자 여생을 보낼 일은 또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더구나 아버님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 유골이 다른 묘역에서 기다려야 된단다.

돌아가신 어머님보다 살아계신 아버님의 여생이 더 가슴 아팠다.

 

부디 어머님의 극락왕생과 함께 아버님의 편안한 여생을 빕니다.

 

발인 ; 2020년 11월 2일 오전8시

장소 : 수원연화장

 

배우자 : 고동석,

아들 : 고영준, 고영재, 고영기

며느리 : 한선혜, 이유영

손 : 고병수, 고병욱, 고수연

 

장례식장에는 오래전에 함께 했던 사우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인사동에 있던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를 매개로 어지간히 어울려 다닌 벗들이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하상일, 정용선, 이혜순, 김종신, 목길순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는데,

옛날에는 ‘진우회’가 아니라 ‘진로회’라 부를 만큼 애주가들이 많은 사진모임이기도 했다.

 

그런데 독신녀로 살아 온 이혜순씨가 몇 년 전부터 사진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얼마나 사진에 대한 한이 많았으면, 남아 있는 사진은 물론 필름까지 모두 불태웠겟는가?

그 긴 세월 동안 기록해 온 숱한 자료들이 전문가의 검증 한번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 이혜순씨만의 일이겠는가?

천덕꾸러기로 처 박혀 있던 필름들이 당사자가 죽으면 대개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소중한 사료들이 안타깝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기구가 협력하는 사진아카이빙기구 설립이 절실하다.

 

김종신씨는 캠핑카를 마련하여 전국 유랑에 나섰다고 했다.

숙식을 해결해 주는 캠핑카는 대개의 사진가들이 꿈꾸던 선망의 차가 아니던가?

장례식장 밖에 세워두었다기에, 문상이 끝 난 후 차 구경하러 갔다.

 

6천만원이라는 차 값에 비해 편의성이 좀 떨어지는데, 

침대를 줄여서라도 일할 수 있는 집무공간을 늘렸으면 좋겠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진가들에게 꼭 필요한 차였다.

 

80년대 초반 ‘진우회’에서 활동하던 맴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난 분도 더러 있고,

소식 끊긴 사우가 많았다. 연락되는 사우들도 이제 퇴역이 되어 뒷전으로 밀려났다.

다들 건강을 잘 지켜 최후의 일각까지 세상을 기록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태국에서 자리 잡은 고영준씨가 모처럼 서울에 나타났다.

죽도록 식구들 고생만 시키던 사진을 접고 사업에 몰입한지 15년째다.

사진을 그만두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사진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진과 돈은 멀어도 너무 먼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다 해도 돈은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지나 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온갖 회한이 다 밀려온다.

잘 나가던 가게 내팽개치고 사진하지 40여년, 과연 얻은 게 무엇인가?

살기가 힘들어 몇 차례 직장을 전전하기도 했으나, 사진에 미쳐 오래가지도 못했다.



83년 인사동 포장마차에서..(좌로부터 고영준, 조문호, 윤재성, 유성준)



평생 저축 한 번 하지 않고, 만원 생기면 만원 쓰고, 십 만원 생기면 십 만원 썼다.

그렇지만 돈 없어 굶어 본 적 없고, 돈 없어 병원 못간 적도 없다.

한 평생 잘 놀며 잘 살았으니 여한은 없다. 죽고나면 말짱 도루묵 아니던가?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말고 혼자 살아야하는데, 가족들 고생시킨 죄는 크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처럼 살지만, 흉악한 돈에 물들지는 않았다.




같이 춤춘 이런 때도 있었네, 옆 여인은 누구지? ㅎㅎ



지난 11일 오후 고영준씨가 귀국했다는 전갈에 충무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모처럼 케케묵은 이야기로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한가한 시간을 가진 것이다.

고영준은 40년 지기의 사우로 ‘사협’ 내막을 일찍부터 지켜 본 산증인이다.

인사동에 '예총'사무실이 있던 70년대 하반기부터 사진협회 총무로 일했으니,

원로사진가들의 이야기는 물론, 단체에 대한 내막을 훤히 깨고 있다.



85년 '동아미술제'에서 큰 상을 받았을 때 축하하러 온 사우들

(오른쪽부터 고영준, 신희순, 양은환, 홍순태, 조문호, 한 분 건너뛰어 정동석, 유성준씨)



김광덕이사장에서 시작하여 이정강, 이명복이사장을 두루 거쳤으나,

천성이 못된 짓을 못해, 못된 패거리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만두었기에 망정이지 더 있었다면, 똥바가지 뒤집어 쓸 수도 있었을 게다.

갈수록 조직 규모가 커지면서 비리의 규모도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달에는 400여명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한꺼번에 회원으로 입회하였다니,

가히 사진작가를 생산하는 공장이나 마찬가지다.






고영준씨는 '한국환경사가회'를 비롯한 여러 모임에서 함께 일했는데,

사람 좋은 덕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꼬인다.

그런데, 독한 구석도 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그 좋아하던 사진을 접고 사업에 매진한 것은 차지하고라도

'알중'에 가까울 정도도 좋아한 술과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어버렸다는 점이다.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난 담당의사가 끊지 않으면 죽는다 해도 끊지를 못하니, 어찌 존경스럽지 않겠는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브레송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강재구씨의 ‘12mm’사진전을 보러갔다.

전시 작가는 잘 모르지만,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12mm' 사진집 광고에 관심을 가져서다.

전시장에 아는 분이라고는 고정남씨 뿐이었으나, 군 입대를 앞둔 장정들의 긴장된 표정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번에 전시된 ‘12mm’는 군 입대 전에 머리카락을 12mm로 자르는 행위를 통해 통제되고 집단화되어 가는 과정을 말했다.

전형적인 기념사진풍의 방식이었으나, 긴장된 표정을 강조하기 위해 인공조명을 사용한 점이 특이했다.

입대를 앞둔 장정의 긴장된 표정과 경직된 자세가 핵심인데, 사진에는 애인 같은 여성이 옆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이 규율화되고 통제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성을 통한 사회적 관계도 함께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젊은이의 표정과 자세를 통제하여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이끌어 내었는데,

남성이라면 한 번은 거쳐야 할 군대라는 공룡집단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입영을 앞둔 두려움과 이질감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강재구씨는 이전에도 군인을 소재로 한 작업을 두 차례나 가진 바 있었는데, 그 작업들이 궁금해 졌다.

병영의 기록은 이한구씨의 작업 '군용'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다녀와 고정남씨가 올린 페북 사진을 보니, 강재구씨도 나의 페친이란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평소 ‘오빠랑 놀고 싶다’는 젊은 애들만 아니면 무조건 페친으로 받아 주다보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

가끔 인사동이나 전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하면 난감할 때가 많다.




강재구 사진집 ‘12mm’ / 눈빛사진가선 60
2019년 4월 ‘눈빛출판사’ 발행 / 가격12,000원



전시장을 나왔으나, 고영준씨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마침 정영신씨와 연락이 되어 충무로 복국집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제기랄! 혼자 소주 한 병을 깠더니,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소주 한 병도 무리인 것 같은데, 술과 인연을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영준씨와 언제 만날지 기약은 없지만,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다면, 볼 날이 있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신랑 고병수가 엄청 잘 생겼더라.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노래도 가수 빰 치데.
예쁜 소라 양을 만나 입이 찢어지는데, 솔직히 사랑 좀 받겠더라.
‘병수야!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런데, 병수보다 아버지 고영준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겠다.
병수야 어린 시절 한두 번 본 게 전부지만, 고영준은 40년 지기다.
79년 쯤 만났는데,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사협’의 반세기를 지켜 본 증인이다.






‘사협’의 총무라면 하나의 권력라인이다.
총무에서 사무국장으로 바꾸어가며 이사장을 좌지우지했던
웃기는 사협의 세월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감방까지 오가며..






세상에! 이사장 바뀌었다고, 먹고 사는 총무 목을 자르는 놈이 어디 있노?

이명복과 이명박이 비슷한 과다.
오죽하면, 옆 사무실에 있던 ‘예총’소속 ‘연예인협회’ 사무국에서 일했겠는가?






고영준은 천성이 못된 짓을 못한다. 그러니 못된 패거리들과 조가 맞을 수 없다.
대신 너무 착해 빠져, 아내 한선혜씨 고생깨나 시켰다.
서울예전 사진과를 나온 아내 한선혜씨는 사랑 때문에 하던 일을 포기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다.
초창기에 본 한선혜씨의 사진은, 솔직히 고영준 사진보다 한 수 위였는데 말이다.






고영준씨는 일찍부터 ‘사협’에서 총무 일을 오래 한 덕에,
‘환경사진가회’나 ‘현대사진가회’의 총무 일도 도맡아 했다.
사람 좋은 덕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몰린다.





당시에는 ‘예총’에 소속된 ‘사협’ 사무실도,
신희순씨가 운영한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도 모두 인사동에 있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사진동아리도 만들었는데,
이름 하여 ‘眞友會’라고 했으나 대개 ‘진로회’라 불렀다. 




 


돌아가신 양은환, 신회순씨를 비롯하여 유성준, 정용선, 하상일, 고영준, 정영신씨
등 10여명 남짓 되었으나, 뒤늦게 들어 온 분들은 헷갈려 정리가 잘 안 된다.
그 중 사진으로 돈 번 친구는 강남에서 폐션 사진 한 정용선씨가 유일하다.






어떤 특정한 색깔 없는 친목단체였기에, 사진 기억보다 술 마신 기억이 더 많다.
그 모임의 중심에도 언제든 고영준씨가 있었지만, 어느 날 홀연히 털고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빨간 불에,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 헌신짝처럼 버려 버렸다.
고생만 죽도록 한 사진판을 뒤로하고, 태국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82년 서울 올라 왔을 때,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 있다.
취직하기 위해 면접 보러 간다니까, 면접 볼 사람이 그 꼴로 어떻게 가냐며
카드를 빌려 준, 그런 위인이다. 






본래부터 정장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 따뜻한 마음에 촌놈처럼 빼입고, 면접 보러 간일도 있다.
그러나 매사가 쉽지 않았다. 사진 때문에 잘 나가던 장사도 날린 놈인데,
차라리 거지로 살며 마음대로 사진 찍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꼴리는 대로 살았으니, 아무 여한은 없다.






고병수 장가가는 날에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 것은 고영준과의 만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다.
그날 결혼식장에 모인 분들이 대개 ‘진우회’와 관련 된 오래된 사우였다.
하상일 선생의 오붓한 가족을 비롯하여 유성준, 정용선, 이혜순, 김종신, 목길순,
정철균, 배창완, 우숙자, 최성규, 정영신, 김흥묵씨 등 많은 분들이 어울렸다.
옛날 ‘한국일보’자리의 ‘무드블랑’ 예식장에서 한 잔 했으나, 이차는 인사동이었다.






옛날 ‘꽃나라’ 자리에 가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더 하려 했으나, 생각을 잘 못했다.
주말의 인사동은 관광객에게 뺏긴지 오래라, 단골집 모두가 문을 닫아 버렸다.
골목은 텅텅 비어 허허로웠고, 큰 거리만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했다.
그들은 밥도 술도 먹지 않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먹을 것을 싸들고 다닐까?






사람이 많으니 한 사람 찾고 나면, 한 사람 잃어버리는 돼지 가족처럼 돌아다니다
간신히 자리 잡은 곳이 인사동 ‘마중’이었다.





정용선씨가 ‘화요’를 비롯한 기똥 찬 술로 한 턱 쏜다지만,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사실은 축의금을 부탁하고, 전 날 강진 가기로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결혼식이라 한선혜씨 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결혼식만 끝나면, 출발할 작정으로 차를 끌고 나온 것이다.






‘진로회’답게 삼차를 간다기에 도망쳤지만, 주차비 문제로 또 씨름했다.
요즘은 카드가 없으면, 주차도 못하는 지랄 같은 세상이다.

하기야! 카드 내지 않고 현금 내니, 탈세 조장한다는 양반도 있더라.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14일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술 마시는 호기를 부리다 혼쭐 난 날이었다.

인사동에서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서 24시간동안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당분간 술과 담배를 자제할 작정이나, 생각을 따라주지 않으니, 한 낱 구호에 불과하다.



 


병원에서의 허송세월로 밀렸던 봄의 일정을 서둘러야 했다.

강진과 정선에도 가야하지만, 중간 중간 서울에서 할 일도 많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일이 스스로를 위한 일인지,


남을 위한 일인지도 분간 되지 않고, 하지 않는다고 문제생길 일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길들어왔던 관습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 귀찮은 관습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른다.




 

16일은 한정식선생의 생신날이라 오찬모임에 가야 했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최경자여사 전민조선생 등 네 분이 만나는

조촐한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나, 갑자기 전민조선생께서 일이 생겨 차질이 생겨버린 것이다.

예약 인원수를 맞추느라 계획에도 없던 내가 끼이게 되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최근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병원에 입원한 후로,

매년 치루어 왔던 생신 오찬회를 그만두겠다고 하셨으나,

정영신씨가 손사래를 쳐 자리를 만들었으니, 그냥 넘어 갈 수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는데다.

불편한 몸으로 긴 시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어떠하든, 정영신씨를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한정식선생의 인사동 작업실을 찾아 그동안 못들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사모님 걱정에 심기가 편치 않은 모습이 역역했다.






지난 해 사별하여 홀로 계신 이명동선생님의 초라한 모습을 늘 안쓰러워 하셨는데,


사진가 이완교선생 까지 사별하시어, 더 힘든 것 같았다.

이완교 선생께서는 사별한 후, 그리도 구슬피 울었다는 말씀도 전해주셨다.

혼자 남는다는 외로움의 웅덩이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일이다.





오찬장인 이화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께서는 운동 삼아 늘 걸어 다니시는 구간이지만,

, 힘들어 택시를 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식당으로 가다 테라로사에 계시던 강운구선생과 이갑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 다음 일정은 자하문로에 위치한 이안의 개관전시에 참석하는 일이다.

개관전으로 치루어지는 더레퍼런스 #1 : Asia Art Book Library였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중국, 대만 등 아시아 5개국의 아트북 241권을

5명의 작가들이 국가별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는데, 나에게는 좀 생경스러웠다.





발행인 김정은씨를 비롯하여 한정식, 황규태, 박진영, 박지숙, 김다울씨 등

여러 명이 행사장에 있었으나, 전시된 다양한 출판물들만 살펴보았다.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어, 인사동에서 기다릴 작정으로 살며시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인디프레스 갤러리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호련씨의 'collaged image'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쇼케이스에 걸려있는 작품 한 점에 나도 모르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작가는 물론 안내하는 사람조차 없었으나,

혼자서 두 개 층에 걸린 작품들을 훔쳐보듯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젊은 여인들의 자유스러운 동작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사진 같은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인데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위적으로 연출하여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관음증적 욕망을 끌어내는 이 은밀한 엿보기는

보는 이에게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흥분까지 불러 일으켰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물장난을 치거나, 작업에 몰입하거나,

누워있는 다양한 상황이 연출된 모습을 일방적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다,

철저하게 시선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이면서도 허구이자 사실적이면서도 어딘지 추상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이 많은 사내가 젊은 여인을 훔쳐본다는 생각에 이르니,

요즘 부는 미투의 휘오리에 휘말릴 것 같은 두려움마저 생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서평에 이렇게 썼다.

작가가 그린 신체는 단지 대상의 닮음 꼴에 그친 도상,

대상의 외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감각이고 대상의 신체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나름 강렬하게 감각하고 욕망화한 것, 체험한 신체의 대상화이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신경, 감각을 다분히 건드리는 그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저기에 있다.

그림 안에서 유령처럼, 환각적인 존재인 냥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체이면서도 물질적 존재감 없이 몽롱하게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저 존재성은

욕망의 대상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방증하는 회화적 제스처로 다가온다적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독특한 체험의 전시였는데, 오는 33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다.



 


지름길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들어섰는데,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보니, 한정식 선생을 모시고 내가 가는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살다보면, 우연하게 통하는 일도 많다.

인사동에서 한정식선생을 배웅한 후, 유목민에 잠시 들렸다.

갈증도 풀 겸, 화장실에도 들려 잠시 쉬고 싶었다.



 


그 다음의 일정은 태국에서 귀국한 고영준씨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40년 지기의 사우였지만, 사업장을 태국으로 옮기고 부터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는데,

이틀 뒤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귀국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주말에 강진으로 떠나야 했으나, 그 결혼식 때문에 연기한 셈이다.

그를 만난 김에 축의금만 전해주고, 결혼식은 빠질 심산이었던 것은

축의금이래야 두 사람 밥값도 미치지 못하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약속장소인 멕도날드에 들렸더니, 고영준씨 뿐 아니라

오래된 사우인 유성준씨와 최성규, 김흥묵씨도 있었다.





40여년 전, 인사동에 있었던 꽃나라라는 흑백 암실에서 만나기 시작한 분들인데,

오랫동안 하는 일이 다르고, 사진에 대한 생각마저 달라,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지만,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 분들이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 만난 많은 선배들이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한 평생 누드를 찍어왔던 정운봉 선생을 비롯하여,

백로사진을 열심히 찍던 경찰서장 출신의 이봉하선생,

사진계 소식지를 만들어 사진인들에 돌렸던 정철용씨,

작년 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인사동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던

이기윤씨 등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떠나는 구나

안타깝고 허무했으나, 나 또한 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쓴 웃음이 흘렀다.



 

 

고영준씨는 태국에 살지만, 폐친이라 나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글에 마음이 아렸던지, 자신의 카메라를 싸 들고 왔다.

난 이미 카메라를 구했고, 다른 카메라는 잘 사용하지도 않지만,

사람 사는 인정에 콧 잔등이 찡했다.



   



다들 툇마루에 가서 된장비빔밥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는데,

술 한 잔 하자는 인사법에서 밥 한 그릇 먹자는 인사로 바뀐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여섯명이 소주 한 병으로 끝냈는데, 겨우 반잔 밖에 마시지 않았으니, 입만 버린 셈이다.

밥값은 정영신씨가 내고 생색은 내가 내는 이 웃기는 짜장면은 또 무얼꼬?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5월7일, 인천에서 전시를 잘 마친 김보섭씨가  인사동에서 오찬모임을 마련하였다.

약속장소인 한정식선생 오피스텔로 나갔으나 카메라가 말썽을 부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동차처럼 카메라마저 늙은 나를 닮아 수시로 애를 먹인다.
자동초점이 고장나 수동으로 렌즈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옛날에는 모두들 그렇게 찍었지만, 습관이 바뀐 지금은 번번이 셔터 찬스를 놓치기 일 수였다.
그건 그래도 괜찮으나 밝은 곳만 가면 노출 오버로 화면에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고장 난 총으로 전장을 누비는 병사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겨누었고, 요행을 바라며 셔터를 눌러댔다.

'툇마루'에서 가진 오찬모임에는 김보섭씨를 비롯하여 한정식, 전민조, 이완교, 최경자씨가

참석했는데, 김기찬선생 미망인 최경자씨로 부터 건강관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지만,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자리가 파한 후 충무로 AS센터로 달려갔다.
근로자의 날에 벌어진 인사동 시위 때, 경찰의 물대포를 맞은게 원인인 것 같았는데,

고물 카메라에 비해 수리비가 더 크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수리비도 수리비지만, 한 동안 카메라 없이 지낼 일이 더 막막했다.

마침 충무로에서 옛 사우들의 모임이 있었다.
태국에 갔던 고영준씨가 일시 귀국하여 마련한 자리였는데,

이수영, 유성준, 하상일, 배창환, 정동석, 이혜순, 윤봉수, 선우인영,

장막동, 이혜순씨 등 열두 명이나 모여 있었다.

그 날은 무장해제된 허탈한 심정이라 술을 좀 과음했다.
고영준씨가 가져 온 양주로 폭탄주까지 만들어 부어라 마시어라 했는데,
이차 노래방에선 잠자던 객기마저 슬그머니 도져 별 난리를 다 피웠다.

왜? 술만 취하면 이렇게 간이 커지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집에 갈 요량으로 트럭에 매달렸는데,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뛰어내리기도 했다.

아마 죽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5일 저녁, 오랫만에 옛 사우들을 충무로에서 만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사동에 있었던 흑백현상소 "꽃나라"에서 만난 친구들인데,
그 뒤 '진우회'란 이름의 사진모임을 만들어 함께 다니기도 했다.
모두 허물없이 지낸 사이였으나 세월이 흘러 각자 바쁜 삶을 살다보니 잘 만나지지 않아

이혜순씨가 나서서, 한 달에 한 번씩 소주 한 잔하는 시간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매번 연락 올 때마다 촬영 스케줄과 겹쳐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 나가지 못했다.
이번엔 태국에서 나온 고영준씨 때문에 모임을 좀 빨리 갖는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다행히 전라도에서 사진 찍고 돌아 온 날이라 일정이 비어 있었다.
안 나온다고 투덜대는 벗들의 욕지거리에 귀가 간지러웠던 터라 만사를 제켜 놓고 나섰다.
약속장소에는 고영준, 정용선, 유성준, 하상일, 김종신, 이혜순, 정철균, 조규선, 선우인영,

목길순씨 등 열 한명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지글거리는 삼겹살에다 먹는 소주 맛은 반가움이 더해져서인지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이런 저런 지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중, 한 사우가 걱정스런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조형! 이젠 마누라 매니저 노릇 그만 하고 조형 사진 좀 찍어소"
얼마 전에도 가까운 친구들로 부터 충고 아닌 충고를 들은 적이 있어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잘 못된 생각임을 여러사람들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누라 메니저 노릇이면 어때? 그래도 내가 사진 해 온 35년 동안, 이처럼 앞 뒤 안가리고

치열하게 사진을 해 본 적은 없었네. 마누라따라 다니는 게 아니라 내 사진 찍으러 다닌다"고 

어눌한 말투로 변명했다.

그랬더니 "장에 가서 같이 찍으면 그 사진이 그 사진 아니요."란 답이 나와 기가 막혔다.
사진가의 목적의식에 따라 대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일까?
아내가 찍은 장터사진들에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아 장터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이 담겨있고,
내가 찍은 사진들에는 부정적인 시선에 의해 암울한 그림자가 깔려 있다는 것을 말했지만 수긍치 않는 눈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 올 해 중에 사진집으로 보여주겠다며 말을 끝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노래방에 가서 한 잔 더하자며 모두들 일어섰다.
이차는 강남에서 패션 스튜디오 하는 정용선씨가 쏜다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다들 개털들만 모였는데, 그가 유일하게 사진으로 돈 번 친구이기 때문이다.
황송스럽게도 도우미양까지 불러 주었는데, 늙은 놈 마른 가슴에 불을 지펴 마음 깊숙이 숨어있던 잡끼가 슬슬 발동하였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여색에  허우적거리다, 결국 지갑 깊숙이 숨겨놓은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 주고 말았는데, 택시비가 없어 걱정이었다.
쪽 팔리는 일이지만, 쪽 팔리는 자체가 내 인생이라며 위안했다.

 

 

 

 

 

 

 

 

 

 

 

 

 

고영준씨는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와  만난 사진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 가장 절친했던 사우다.

80년대 초반, 그가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일 할 때였다.

 

쥐꼬리만 월급으로 사는 주제에 내가 회사에 면접보러 간다니까 "옷이 그래가지고는 않된다"며

자기 카드로 양복을 사주었던 그런 인정많은 친구다. 

 

그 당시 인사동의 '꽃나라'흑백 암실에 드나들던 사진인 모임이었던 '진우회'(일명:진로회) 맴버로 시작하여  

'한국환경사가회'와 충무로에 있었던 '한국현대사진가회'까지 오랜 세월 같이 일해 왔다.

지금도 사진을 전업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데, 그 당시는 여유있는 사람 아니면 버텨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10여년 전 느닷없이 태국으로 돈 벌러 간다며 자기가 아껴 입던 옷가지를 골라 와 내게 전해 주었다.

그 곳은 더운 나라이기에 정장이 필요없다지만, 그 속 깊은 마음을 모를리가 없었다.

이 친구, 처음에도 옷을 사 주더니 떠나면서 까지 옷을 주어, 영원한 작별인사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가끔 한국에 다니러 올 때 만났는데, 태국에서 벌인 사업이 궤도에 올라 돈 걱정없이 산다기에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몇일 전 아내의 핸드폰으로 그가 한국에 왔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요즘은 장터 촬영으로 바쁜 나 날을 보내기에, 지난 일요일에서야 그를 인사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번 서울대학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정기검진 때문에 왔다고 했다.

 

그 좋아하는 술을 끊은지는 오래지만, 심장수술로 담배마저 끊고 이제 목숨 끊는 일만 남았다며 실없이 웃었다.

사동집에서 술 한 잔 없는 만두전골로 재미없는 식사를 하고, 허리우드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판기 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했는데, 비슷하다며 가져 온 이름도 모르는 커피는 맛보다 크림 문양이 일품이었다.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 태국에서 사진은 찍지않고 골프치는데 소일 한다는 그의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물론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도 무시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건 아니다 싶었다.

언젠가 틈을 내어 그의 주변 상황을 살펴 본 후, 다시 카메라를 잡도록 설득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는 선배 사진가들의 안부로 화제를 바꾸었고, 선배들이 찍어두었던 사진 활용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특히 사회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사회 생활상의 단면을 찍어 온 다큐멘터리사진들이야 말로

지금은 세월의 무게에 그 가치가 날로 높아가지만 스스로 과소평가하거나, 생활고에 쫓겨 거뜰 떠 볼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에 전혀 주목받지 못한 채 사장되어가는 들의 원고를 찿아내야 한다는데 생각이 모아졌다.

이 사진들을 발굴하려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도움은 물론,

그 원고들을 검토하여 고르는 것에서 부터 옛 필름들을 스캔하고 수정하는 일들이 간단치가 않다.

결국은 돈이 필요했다. 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장되기 쉬운 한국사의 중요한 기록물 수집은

정부에서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누가 그들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요즘 이사장 선거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한국사진작가협회'는 도대체 무엇하는 단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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