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털터리 술꾼들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술자리가 끝난 뒤의 잠자리다.

술이야 얻어먹기도 하고 외상술도 마시지만 여관비는 외상이 안 된다.
대개 술자리가 파할 즈음엔 대중교통이 끊기고, 모범택시들만 기다렸다.
요즘은 사우나탕이라도 가지만, 예전엔 주로 술 먹고 뻗는 작전을 많이 썼다.
타켓은 그래도 녹녹한 ‘실비집’이었다.
술 마시며 잘 놀다가 자정만 가까워 오면 폭주로 나자빠진다.
술상 밑에 개 같이 끼어 자지만 운이 좋으면 아침 해장국까지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절대 비밀이다.
추운 겨울에는 곤란하지만 특급 호텔 파고다 공원이 지척에 있다.
문 잠긴 텅 빈 공원에 잠입하려면 일단 나즈막한 대리석담을 넘어야 하고,
모기가 좀 귀찮게 하지만 술 취한 사람에겐 별거 아니다.

잔디 카페트가 쫘악 깔린 데다 너무 시원해 신선이 부럽지 않은 웰빙 호텔이다.

조문호(사진가)

우수마발 같았던 시절, 그러나 가슴 속에 따뜻한 둥지 같은 것을 품게 해 주었던 곳, 인사동.
요즘도 나는 인사동을 찾아들면 그 좁다란 골목 안으로 시선을 던져 넣곤 한다.
한때, 내 빈곤했던 영혼을 따뜻이 채워주었던 실비집, 그 실비집이 그리워서다.
내게 그 실비집의 풍경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에게는 아는 예술가
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또 혼자서 문학 공부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내게 비록 가난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열망으로 모여드는 실비집의 분위기는 고담준론과 같은 것이었고, 비록 시끌
렁한 잡담과 음담패설로 왁자지껄 하더라도 내게는 자기비하가 아닌 꿈을 향한 비젼처럼 비쳐졌었다.



김신용(시인)

사람들은 와서 고장 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이지만 소리는 소리를 만들지 못한다.
내가 인사동에 작은 골방 하나를 얻어 쉼터를 마련한 때는 1998년 9월이다.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을 30년간 하다가 진정으로 내 ‘인생 일’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과감하게 사퇴를 하였다.
그때 인사동 학고재 골목을 어정거리다가 무슨 카페 같은 곳에서 풍금소리가 들려와 그 안을 기웃하는데
요상한 사람들 몇이 맥주를 마시고 한 여인은 “빛나는 졸업장”이란 곡의 풍금을 치고 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나는 그곳 “시인과 화가”라는 카페 2층에 방을 얻어 나의 인사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사동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상한 기운을 타게 한 곳이다.
내가 시와 함께 음악을 한 탓으로 ‘음유시인’이란 명칭이 따른 탓인지
인사동에서는 풍류인들과 심심찮게 만나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노래 중에서도 특히 “부용산”이란 노래를 즐겨 부른다.
부용산 노래는 인사동을 드나드는 많은 지인들과 예인들이 좋아한다.
이 노래의 사연이 애상적인데다 곡이 가곡 이상의 신선함을 자아내 좋다.

송상욱(시인)








고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중후반, 영어공부 좀 해보겠다고 종로 2가 언저리에 있던 학원 단과반
을 오가면서, 홍수환과 차범근이 나오는 권투, 축구 등의 빅 이벤트 중계방송을 보려고 가끔씩 땡
땡이를 치고 허리우드 극장, 낙원상가 근처의 TV가 있는 중국집과 분식집을 기웃거릴 때만 해도
인사동의 진면목을 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인사동의 골목 기웃거리기는 이렇게 땡땡이에서 시작되었다.


조준영(시인)

부산에서 인사동으로 상경한 세 화가가 있다.

영도다리 밑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존수씨와 최울가씨, 박광호씨다.
이들은 70년대 중반 부산 남포동의 ‘한마당’에서 알게 되어 10년 후 인사동에서 재회했다.
어느 날 술이 취해 포장마차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박광호씨를 만났는데 “형!”하며 반가워하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몇 푼 되지 않는 외상 술값으로 ‘실내악’에 건네 준 박광호씨의 그림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또렷하다.
생선뼈만 앙상하게 남은 빈 쟁반을 그린 그림은 그의 삶을 말하는 것 같아,
가끔 그 술집을 찾기도 했으나 이제는 문을 닫아 그마져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이존수씨와 최울가씨는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여 승승장구 했으나
박광호씨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그림을 모아 몇 번이나 불태웠다.

지난 해 갑자기 이존수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들었다.
인심을 잃어 그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해 주는 사람이 없어 더 슬펐다.

최울가씨는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녀 자주 볼 수가 없고,
박광호씨는 몹쓸 병에 걸려 다리를 쓰지 못해 자주 볼 수가 없다.



조문호(사진가)





인사동,
그 아득한 거리에
내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다.
나는 생각한다.
실비집과
귀천에 죽치던,
문학이니 그림이니 뭐니 하던
대책 없던 술패들...

봉화에 내려와 산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나는 그들을 만나러
가끔 인사동으로 간다.
여전히 반갑다.
술잔이 돌고 밤이 깊으면
나는 그들에게 어깨를 기대고 싶다.


신동여(도예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 하나가 있다.

인사동에서 몇 분과 어울려 낮술을 마시다 소설 쓰는 형의 안내로 조그만 카페에 들어섰는데 그
마담의 형색이 영판 툇물 포주인 듯한 모습이었다, 거친 피부에 천박스럽게 보이는 주름살과 레이
스가 많이 달린 빨간 원피스, 모자테가 거추장스러운 빨간 비키니모자. 전체 모습에서 고상미는
눈 씻고 찾을래도 없을 듯 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분위기를 띄우던 형이 한쪽 구석의 낡은
풍금을 향해 손짓하며 그 주인을 앉으라 한다. 아무도 선동하지 않았지만 차츰 고양되는 흥겨움으
로 쉬지 않고 한 두어 시간 합창을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노래가 다 끝난 후에 풍금에서 일어서는
그 아줌마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풍금은 처음에 ‘학교
종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은 루치아니 파바로티를 넘어서 나의 무식을 조롱하는 선율까지 담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풍금을 생각하니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박영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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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을 친 ‘작은 뜨락’은 ‘시인통신’이 있는 건물의 서측 외벽을 이용한 겨우 비를 피하는
가건물로 비가 오면 좌석을 옮겨야 했다.
슬레트가 부족하여 바이닐류로 막음한 일부 천정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선으로 낮에도 그리 어둡지
는 않았다.

소원당(素園堂)은 고행의 방편으로 이곳에 국수집을 열었을 뿐인데 예술가들이 부추겨 주막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경험이 없어 내 놓는 술이나 안주도 모두 과객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사실 주인이 없는 집이었다.
이곳은 애술가들의 천국이었고 풍류해방구였다.
어제 고함이 오늘 또 고함을 쳤다. 어제 울분이 오늘 울분을 토한다. 어제 비평이 오늘 같은 내용
의 비평을 쏟는다. 어제 딴지가 오늘 딴지를 걸어도 어느 누가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새해를 새 마음으로 맞이하려는 소원당이 하루 종일 도배한 흰 벽지 위에 김진두화백이 두 시간에
걸쳐 여인과 정자그림을 완성하였다.
고추장낙관을 자정에 맞추어 누르고 내가 新年元旦素苑堂이라 적어 夢遊亭子圖를 완성시킨 적도
있다.

이 해괴한 주막은 그 철학의 우위성으로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방송에도 나왔다.
술값을 내지 않고 그냥 나갈 수 있는 것도 공개된 자유였다.
화장실 가다 갈 수 있게 건물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소원당은 애술인들이 시키는 여러 안주들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값을 내는 것도 한번 씩 수금을 돕는 대바구니가 돌때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여 얼마건
넣으면 되는 것이다.
주막이 걱정스러워 채현국선생님께서 분위기를 다잡아 주고 바구니에 돈을 슬그머니 놓고 가시곤
했다.

풍류해방구가 되기는 했으나 그 해방구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윤양섭 (펀드매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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