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마다 시절 따라 피었다가 지는 사연(대부분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들과 마주하거나
지나치면서 상식보다 진실이 난무하고 이익보다는 이해를 앞세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서툴었지만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움이랴!
갈비(마른 솔잎)한 움큼 불 질러 놓고 캠프파이어한다고 선남선녀를 호객하는 누더기 복장의 미남스님,
몇 년이 가도 부르는 노래는 ‘인천에 성냥공장...’ 하나 뿐인 분,
말이 업이라 혀를 짤랐다는 사람,
온 몸을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서하듯 여성분들에게 첫인사 레파토리를 거침없이 들이대는 사람,
남의 공사를 혼자 다 맡아서 해결해 주는 사내,
때론, 아줌마들 여러분을 어둑한 찻집에 앉혀 놓고 시 공부를 열심히 시키시는 대 시인님,

그 패션, 그 헤어스타일, 그 개성들.


박영현(시인)






현대인에게 문화란 공기나 물처럼 생존의 근원을 이루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필자도 오랜 세월 인사동을 드나들며 우리문화를 찾고 작품들을 구하며 그 맛을 은근히 즐겨왔다.

그동안 구입했던 소장품 중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80년대 중반에 구입한 운보의 ‘태양을 먹은 새’다.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는 욕망을 표현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와당에 새겨진 새가 마치 불새가 되어
가마 위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하며 창작의 집념을 다져왔다.

이십 여 년 전 어느 날 친구들 틈에 끼어 초면이었던 정승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다 갑자기 운보 김기창씨의 판화 앞에서 자리를 뜨질 못했다.
술자석이 파한 후에도 저 그림을 갖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며 드러누워
결국은 그 판화시리즈 세 점을 뺏기듯이 넘겨주었다.
필자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해야 하는 성정이라 십분 이해는 하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인사동을 오가며 늘 안타깝게 생각해 온 것은 인사동만의 전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관광명소로 꼽히는 인사동은 이리 저리 얽힌 골목길의 정취를 빼 놓을 수 없다.
골목마다 신라길, 가야길, 고구려길, 백제길등 으로 명하여 그 시대의 문화를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벽화나 도자, 풍속도를 전돌이나 와당으로 재현하는, 담장문화, 굴뚝문화, 장독문화 등 을 조성하여
우리 골목문화를 살려보자는 것이다.

조문호


오래전 부산에서 올라 온 김석중씨를 인사동에서 우연히 만났다.
너무 반가워 주머니 생각도 않고 가까운 술집을 찿았다.

한 때는 부산에서 사진동아리 멤버로 어울리며 내가 운영하던 ‘한마당’에서 그의 첫 사진전을 연적도 있다.
아타 김으로 이름을 바꾼 후로는 잘 나가지만 그 때는 그도 개털이었다.
부어라 마시어라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 까지는 좋은데, 돈이 없어 주인한테 개망신을 당했다.
“장사도 안 되는데, 하루매상의 절반이나 처먹고 외상이라니!” 위기는 모면했으나 엄청 자존심이 상했다.

때마침 지나나는 청소차에 몸을 날렸다.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니 탈 자격은 있는듯 싶었다.
난지도까지 가려는 계획은 오래가지 못해 들통이 났다.
청소부한테 들켜 욕만 잔뜩 먹고 개처럼 끌려 내려와야 했다.

정말 개 같은 날 이였다.
아직도 내 몸에서 그 때의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조문호(사진가)








실비집은 인사동의 전형적인 한옥을 개조해 만든 술집이었다.
그 집은 실비집이라는 이름답게 정말 술값은 쌌고 인심은 후했다.
누구든 소주나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찾아들 수가 있었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 무침 같은 반찬을 보시기 채로 그냥 내주기도 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는 누구든 물 값이 없다고 그냥 내치는 법이 없었다.
외상인지 뻔히 알면서도 술상을 차려주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 집의 주 고객들은 그 실비집을 실비대학이라고 불렀다.
주모는 실비대학 총장님으로 불리웠다.
그 실비대학의 수강생들은 주로 화가, 사진작가, 도예가, 조각가, 시인 같은 예술인들이었다.
또 소리꾼이나 춤꾼, 성악가들도 있었고, 심지어 수도승처럼 보이는 스님들까지도
면벽 좌선하듯 앉아 있곤 하였다.


김신용(시인)






인사동 한 귀퉁이에서 시인통신을 꾸려가기 시작한지는 20년이 넘어서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 고통 받으며 시를 쓰는 시인들을 비롯해 배고픔을 이겨내며
눈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가슴에 담아있는 진실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는 기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밖에도 보통사람들이 ‘시인통신’에 와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외상을 하고 싸움을 하고 사랑을 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아무튼 그 예술가란 작자들이 저지른 상상할 수 없는 기행과 아무도 못 말리는 끼를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점점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다.


한귀남(수필가)

천상병선생은 시인이기 전에 훌륭한 사진모델이었다.
사진 찍을 때마다 마치 사진사의 마음을 읽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동작으로 놀라게 했다.

내가 월간사진 편집장 할 무렵, 사진협회에 일이 있어 잠시 들렸다.
그 당시에는 예총회관이 인사동 초입에 있었는데, 난데없이 천상병 선생이 문을 열고 나타나신 것이다.
“어! 육명심씨는 어딧노? 육명심씨는 어딧노?”를 반복하며 마치 돈 떼어먹고 달아난 사람 찾듯 목청을 높이셨다.
육명심선생은 왜 찾으시냐고 여쭈었더니 대뜸 모델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받아야 되냐고 여쭈었더니 “만원은 받아야 된다. 만원은 받아야 된다.”를 반복하셨다.
선생님의 천원짜리 세금 징수는 당연시 여겼으나 모델료는 좀 생뚱맞았고, 돈이 없어 더 난감했다.
하여튼 초상권이니 저작권이니 하는 권리 주장이 당연시된 지금 되돌아보면 천선생은 매사에 앞서가고 있었다.
문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있던 오화경씨가 찾아와 모셔갔지만 노잣돈 할 것이라는 천선생의 말씀이 영 잊히지 않는다.

고향 가는 여비인지 저승 가는 여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 노잣돈 못 챙겨 드린 것이 회한으로 남는다.


조문호(사진가)






나에게 인사동은 50년대 르네상스음악실의 동내였다.
그 뒤에는 이승만자유당과 싸우던 민주당(조병옥선생)당사가 있던 동내였고,
나중에 엠비시 문화방송 라디오국이 거기 있었다.
건너편에 있던 동일가구에서 책장을 사다가 신혼가정을 꾸몄다.

한참 뒤 동아일보 기자시절 선배들 술 뒷바라지하러 인사동을 다니다가

나이가 들면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만나는 동네가 되었다.
유신독재가 심하던 때 정권의 갈퀴에 할 킨 남재희 이영희.....
평화만들기 시대에도 슬슬 인사동에서 만나 맥주를 마셨다.
세월이 지난 뒤 맥주카페에서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벽에 붙이는 치기를 발휘하다
여운선생의 눈에 띄어 그림 공부하러 왔다 갔다 하고 아코디온을 들고 다니는 바람에 한량이 되었다.

캐주얼 차림으로 인사동 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계익(전 교통부장관)





스무살! 선물로 받은 시집 한 권 달랑 들고 “귀천‘의 천상병
시인을 만나 뵙기 위해 처음으로 인사동 골목을 찾아 들었다.
시인과 더불어 인사동을 만나고 선생님, 선배님들을 만났다.

밤이면 찾아들던 골목 어귀의 허름한 선술집 하나! 그 술집에
서 산골 청년의 꿈은 하나 둘 피어올랐다.
더운 가슴들을 만나며 집을 찾듯 인사동 골목을 드나들었다.
불혹의 마흔을 넘은 지금, 인사동과 함께 다시 꿈 하나 피워
올린다. 인사동! 그 푸른 별 이야기,


최일순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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