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를 잘 하는 박한웅씨, 인사동에서는 박대머리로 통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칠십 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마산에서 음악주점 “감격시대”를 할 무렵 판돌이로 들어 왔다.
영업만 파하면 종업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군기 잡는다는 핑계로 박치기를 일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났다. 사진협회에서 일할 무렵,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서로 기구한 팔자라 내 자리에 그를 밀어 넣었다. 그의 딱한 사정도 있었지만 나도 그만두어야할 사정이 있었다.

노태우정권 때 ‘민주항쟁’사진전을 준비하는데 당시 문모 이사장께서 지레 겁먹고 못하게 했다.
'사진협회'의 존재의미가 무색해 그만두고 전시는 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박한웅씨를 편집장으로 추천했으니
거짓말을 지껄인 대가로 몇 달 동안을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때부터 악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들어간 지 며칠 만에 적음스님을 머리로 받아 앞니를 깨더니,
술만 취하면 차 유리를 머리로 들이박아 세 번이나 갈아 끼워야 했다.

인사동 술집의 벽이건, 사람 머리건 수없이 박아대더니 결국 뒤통수 치고 시골로 낙향했다.




조문호(사진가)

해가 설핏 기울고 나뭇잎 그림자마저 땅거미가 지우는 시간이면 더욱 활발한 기운이 감도는 인사동.
눈에 띄는 카페의 이름들도 낯익은 시의 제목이나 시대의 혼돈을 풍자하는 고풍스런 단어라 반갑다.
어느 집엘 가면 낡은 베레모의 화가가 술에 취해있고, 어느 집엘 가면 글쟁이들이 동동주를 즐기며
‘성현도 시속에 따르랬다’며 적당히 풀어져 있다.
그 속에서 어울려 가곡 몇 곡 쯤 불러가며 함께 즐거울 수 있는 낭만의 거리가 인사동이다.
집시 형 귀족들이 몰리는 인사동에서 백작부인으로 불린 까닭에 이상한 낯익은 각설이라도 만나게
될지 몰라 주머닛돈을 확인한다.
미워할 수 없는 웬수들이 혼자서 고독을 삼킬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쩌지도 못하고 오가는 거리 인사동



임춘원(시인)


인사동 입구에 들어서면 일단 발걸음이 느릿해진다.
여행자의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목조건물 2층의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싶기도 하고,
작은 화랑들 창문 밖을 서성대면서 안에 전시된 그림들을 하나하나 음미한다.
언젠가 갔었던 파리의 몽마르뜨르 언덕에서의 배회처럼...

인파 사이로 문득, 자주 범상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행색과 눈초리로 대뜸 예술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동네사람들이고 직업인이고 또...즉, 인사동 인사들이다.
대학로 연극인들이 화려한 젊은 내방객들에 가려 골목길을 서성이는데 반해 여기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어서
검정 베레모, 낡은 바바리, 파이프등으로 거리의 풍경을 연출한다.

고졸한 정원을 갖춘 가옥에서 친구와 애인과 아내와 녹차를 마신다.
전혀 날카롭지 않은 시간. 결코 둥둥 뜨지 않는 생각. 새삼스럽게 밝은 낯색. 체취.


기국서(연출가)



팔도 쟁이들이 몰려드는 인사동은 한 편의 무협지였다.
술이 서너 순배 오가면 젓가락이 춤을 추고 술 주전자가 날아다녔다. 먼저 맛이 간 사람이 대장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극은 오래 가지 않고 으르렁거리던 서로는 이내 킬킬거리며 어깨동무하곤 했다.

억압과 제한의 시대에도 인사동은 해방구였다.
금기의 언어들이 술판에 난무했고, 절대 권력자도 술상 위에서 난도질당했었다.

인사동은 인정의 터였다.
추운 겨울, 입었던 옷을 떨고 있는 후배에게 입혀주던 선배들,
가족 몫으로 챙겨 가던 풀빵을 거리의 사내들에게 기꺼이 내놓던 인정 많은 지인들, 그네들이 그립다.

요즘 들어 인사동이 조금은 삭막해졌다고들 하지만, 인사동 탓도 세월 탓도 아닐 것이다.
단지 우리 가슴이 메말라가는 것이리라. 나는 인사동이 사막화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인사동에는 각지의 정겨운 사투리가 살아 숨 쉬고, 옛 모습 잃지 않고 계신 선생님들,
내가 닮고 싶어 하던 형들과 사랑하는 후배들이 있어 행복하다.
그것이 내 발을 인사동에 잡아 묶는 이유인 것 같다.
귀소본능이라 하는가?





변순우(시인)


천상병 시인은 온갖 기행으로 살아생전 이미 전설이 되어 귀천한 분이다.

박재삼시인의 단칸방에 끼어 자다 오줌을 싼 이야기며, 소설가 한무숙선생의 집에서 샤넬 파이브 향수병을
미니 양주병으로 알고 마셔 몇 날을 방귀만 뀌면 향수냄새를 풍겼다는 이야기,
행려병자로 알고 정신병동에 갇혀 몇 달동안 행방불명되어 문우들이 유작 시집을 펴내 찾은 일,
간첩으로 몰려 정보부에서 겪었던 사건 등 그 일화들이 숱하다.

인사동 '귀천'에 앉아 귀천할 시간을 기다리듯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면식이 있는 사람만 나타나면 천원짜리 노잣돈을 징수해 이승을 떠나셨다.
천상시인의 절창 “귀천”은 이미 국민시가 되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다음으로 잊을 수 없는 시가 “주막”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몽롱한 것은 장엄하다!” 이 얼마나 천선생 다운 화두냐?

한 평생을 몽롱하게 사시다 하늘로 떠나신 천상시인이 항상 부럽다.



조문호(사진가)





인사동사람들을 대개 기인 부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는 천상병선생과 중광스님의 기행적 삶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인이라고 기이한 행동만 일삼는 비사회적인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낭만과 자유, 그리고 순수의 열정이 너무 강할 뿐이다.
일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늘 일상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항상 외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외로움을 덜 타려는 별난 행동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기인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인이란 말 뒤에는 미쳤다는 뜻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때론 창작에 대한 일념으로 한 가지에 몰입하다 보면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진짜 미칠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만드는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할 산이다.

비록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과 미친 사람 사이의 그 경계를 지킬 수 없을지라도 미치고 또 미쳐야 한다.




최울가(서양화가)


나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청년기를 보낸 명동 시절이고, 두 번째는 장년기를 보낸 관철동 시기이며, 세 번째가 노년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의 인사동 시대이다.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다. 나는 내 취향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코드 음악이 흐르는 명동의 음악다방 <엠프레스>를 즐겨 찾았고, 한국 바둑의 총본산인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도처가 그림인 인사동 거리를 걷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나의 교우 영역은 넓어 시인․ 소설가․ 바둑칼럼리스트․ 음악가․ 연극인 지인이 허다하나, 그중 대표적으로 <엠프레스>에서 이일(불문학과 선배로서 시인으로 출발해 나중에 아방가르드를 이끈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 타계), 한국기원에서는 신동문(초로에 시업을 접고 단양으로 내려가 땅을 개간하며 무료 침술을 펼치다 별세)과 강홍규(고교 후배로 스포츠 소설을 개척하고 바둑 야사를 감칠맛나게 썼으나 요절)를 들겠다.

명동 시절은, 이청운의 어둡고 아픈 「구석」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6․25 전후의 폐허를 배경으로 각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여 한데 어울려 예술과 술과 사랑으로 꽃피웠던,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절 ‘라 벨 에폭’이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좋아 거기 깊이 빠져 공부는 고사하고 대학도 팽개쳤다. 또 한편으로 내기바둑에 빠져 마침내는 놀음바둑에 미쳐 금쪽같은 돈을 상당수 날리며 인성마저 피폐해졌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내 생애의 세 시기를 관통하여 함께한 세 사람이 있었으니, 한 분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이요, 다른 한 이는 천진무구의 시인 천상병이며, 또 한 사람은 무학의 수재 번역가 박이엽이다. 위․아래층으로 한 건물에 있던 송원기원과 청동다방에서 뵈었던 민병산과는 관철동으로 이어져 한국기원에서 한 식구처럼 지냈는데, 해가 져 어스름해지면 나를 포함해 1개 분대나 되는 떼거리가 그를 대장으로 모시고 이웃한 꼬마집이나 예쁜이집으로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즐겼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으나 그가 인사동으로 옮기고는 관철동이 전과 같지 않았으며 나 또한 그와 뜸해졌다. 해직기자로 민병산에게 신세지던 임재경이 신세를 갚을 양으로 발의해서 조건영이 설계․시공한 연립주택에 집 없이 떠도는 민병산을 모셔 안정시켜드리자는 운동에 나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걸로 해서 결국은 민병산 기념문집 「철학하는 즐거움」에 그의 프로필을 그리는 난에 조차 끼지 못했다. 이는 나에게 두고두고 후회스럽고 끝내 유감으로 남았다. 그 까닭은 임재경이 벌이는 운동이 좋은 일이긴 하나, 이를 당사자도 적극 사양하는 형국이고 나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위선이 느껴졌던 때문이었다.

천상병과 나와의 첫 만남은 낙원동 초입의 고전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서였는데, 종로 1가 <말리앙스 프랑세즈>에 불어를 배우러 다니는 나는 고교 3년생의 까까머리인데 반해 그는 이미 시 「강물」,「갈매기」와 평론 「허윤석론 으로 <문예>지의 추천을 마친, 한참 촉망받는 최연소 ‘2관왕’이었다. 나는 그를 쫓아 명동의 여러 예술인 집합처는 물론 을지로 입구 내무부 못미처에 있는 동방살롱과 소공동 쪽 미도파 맞은편의 문예살롱까지 두루 주유했는데, 붙어다니는 우리는 흡사 돈키호테와 그를 따르는 종자 산초판자와 같았다. 음식점을 하던 내 집에 천상병은 환대를 받으며 드나들었고, 나는 그의 전리품을 팔아 누상동 한옥 여관에서 잠자며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 디퉁디퉁 불안한 걸음걸이와 왁자지껄 볼륨 높은 언성, 그리고 고르지 못한 이빨을 온통 드러내는 파안대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지금도 보고 싶고 그립다.

본명이 박은국인 박이엽을 처음 만난 것도 천상병과 만난 그 무렵이었다. 부산 수영 밖 촌놈이 대처 서울에 올라와 국민음악연구회의 편집장을 맡아하던, 어엿한 직장인 박은국은 그때 서라벌예대․ 동국대의 문학 지망생들에게 어리굴젓을 곁들인 녹두지짐을 자주 맛보게 해준 독지가였다. 조숙하면서 어른스러운 박은국의 수영집의 신문지로 도배된 흙벽 방에서 나는 처음 정성껏 필사한 오장환의 시집 「헌사」와 「병든 서울」을 보았으며, 러시아의 마지막 농민시인 예세닌의 번역시집을 감격스럽게 읽었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박은국 이야말로 명동을 시발로 해서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까지 꾸준히 우정을 이어온 흔치 않은 친구이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박이엽이 진정 따랐던 선배 민병산이 지병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둔 바로 그 병으로 숨진 것인데, 나도 지금 같은 병으로 고생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처럼 근년에 부쩍 박이엽과 단짝이었던 채현국을 여기서 빠뜨릴 수 없다.

채현국으로 말하자면, 대학생 적에 넝마 같은 검정 교복에 까까중머리를 하고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다녔지만, 친구들의 점심은 도맡아 챙겨 배불려주었던, 당시 제2의 민영 탄광주의 외아들로서, 부친의 사업을 이어 받고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집을 채로 사준 오척단구의 거한이었으며, 예대해야 할 ‘농무’의 시인 신경림과 리얼리즘의 문학평론가 구중서에게는 현찰로 주기 계면쩍어 그들이 다니는 술집에 술값으로 상당액을 미리 적금해주었고, 나중에 사돈이 된 임재경에게는 그가 워낙 현찰을 밝히므로 꼭 돈으로 안겨주었으며, 후배인 구중관이나 방영웅에게는 수시로 용돈을 건네주었으니, 흔히 보기 드문 인정의 사나이였다.

나는 관철동을 지키다 뒤늦게 인사동으로 건너간 편인데, 이미 새들이 둥지를 옮겨 튼 터라 그 곳에 나가서야 외려 오랜 친구와 후배를 만날 수 있었다. 어쨌든 분명 인사동은 관철동과는 다른 잔정과도 같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오늘에 생각해보면, 칠십줄 노인이 된 이제 가끔 하는 서울 나들이에 인사동 같은 곳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자문해본다.

지금 인사동의 주인은 60대 초반의 형벌인 배평모와 조문호, 그리고 좀 아래의 김명성과 전활철, 이청운 등 ‘인사모’의 면면들이다. 천애고아 화가 이청운과 결의형제를 한 「분례기」의 작가 방영웅이나 숱한 독신남을 거느렸던 총각대장 구중관은 이제는 한물갔다고 보아야 옳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닥 걱정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으니, 예술 벨트가 명동을 시발로 해서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이행한 오늘의 문화지도가,

사람들이 너도나도 강남을 선망하듯 언제 그쪽으로 떠나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사동은 잡다한 잡상인을 떨쳐버리고 국적을 알수 없는 상품들을 쫓아내고 전통을 살려내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통금이 있었던 그 시절, 인사동에 겨울비가 내렸다.

질퍽대던 골목에 어둠이 깔려 들어선 곳은 ‘갈까부다‘를 잘하는 점숙씨의 카페 ’레떼‘, 흐릿한 불
빛 너머의 길가 좁은 의자위에 뭔가 포기해가는 사연이 비쳤다.
자칭 여류시인이며 진보운동가라는 삼십대 후반 Y여사, 열 달이나 방세가 밀려 노숙자 신세로 토
막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기구한? 사연을 물리칠 수 없었다.
엊그제 내 결혼시계와 집사람 패물 팔아, 수배 중 이라는 친구를 도왔던 뱃심으로 수표 두 장 건네
고는 ’실비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명성씨! 쌀도 떨어졌어, 이 지긋지긋한 장사 십 만원 매상만 오르면 문 닫을거야‘ 실비집 총장이
내민 외상장부에는 박광호를 비롯한 인사동 낭인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십 만원 수표 한 장으로 칠 천원짜리 양주 네 병을 샀다.
'이걸로 십 만원 매상입니다. 안주는 필요 없어요.‘
마지막 한 모금을 남기고는 쓰러져 깨어난 아침, 찬 겨울비는 그치지 않고 주룩주룩 인사동을 적
시고 있었다.

그 날 일로 가계수표 30만원 부도에 몇 년간을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되돌아보니 인사동 술값, 밥값으로 삼십년이 흘러왔다.

어느 날 꿈속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인력거를 끄는 초로의 내 모습을 보았다.
얼핏 슬펐지만 오늘도 다시 ‘갈까부다’ 라는 인사동에 와 있으니, 고향집의 가난한 행복이라고 억
지를 부려본다.

빚에 쫓기는 부도수표 같은 삶을 살지만 그 차가웠던 겨울비는 이미 봄비가 아니었을까 위안해본
다.







김명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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